조선의 천주교 박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18세기 말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이후, 유교적 가치관과의 충돌, 제사 문제, 정치적 갈등 등으로 인해 발생한 일련의 탄압 사건들을 의미한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학문으로 받아들여졌으나, 평등 사상과 제사 거부 등의 문제로 인해 유교 사회의 지배 질서에 도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1785년 명례방 사건을 시작으로 신해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여러 차례의 박해가 있었으며,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했다. 박해는 남인 세력의 몰락과 쇄국 정책으로 이어져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는 결과를 초래했다.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는 자생적으로 성장하며 신앙의 자유를 얻었고, 근대 사회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가톨릭 박해 - 프랑스 혁명 기간 중 프랑스의 탈기독교화
프랑스 혁명 기간 중 프랑스의 탈기독교화는 혁명 정부가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영향력을 축소하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부정하려 했던 정책과 사건들로, 교회 재산 몰수, 성직자 민사 기본법 시행, 공화력 도입, 탈기독교화 운동 등의 급진적인 시도를 통해 종교 활동 위축과 인명 피해를 야기하며 프랑스 사회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 조선의 천주교 박해 - 병인박해
병인박해는 1866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한 사건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천주교 전파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한 우려 등으로 인해 발생하여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으며,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 조선의 천주교 박해 - 신해박해
신해박해는 1791년 윤지충의 진산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여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되었으며,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유교적 가치관의 충돌을 보여준 사건이다.
| 조선의 천주교 박해 | |
|---|---|
| 개요 | |
| 주요 정보 | |
| 발생 시기 | 1785년 ~ 1876년 |
| 발생 위치 | 조선 |
| 원인 | |
| 사회적 요인 | 신분제 동요에 대한 반발 유교 질서 붕괴에 대한 우려 |
| 정치적 요인 | 서양 세력의 침투에 대한 경계 국왕의 권력 강화 시도 |
| 주요 박해 | |
| 을묘박해 | 1785년 |
| 신유박해 | 1801년 |
| 기해박해 | 1839년 |
| 병오박해 | 1846년 |
| 병인박해 | 1866년 |
| 결과 | |
| 천주교 신자 수 감소 | 많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천주교 신앙 활동의 위축 |
| 사회적 영향 | 서양에 대한 반감 심화 |
| 정치적 영향 | 쇄국정책 강화 |
| 관련 인물 | |
| 조선 국왕 | 정조 순조 헌종 고종 |
| 천주교 인물 | 이승훈 정약용 정약종 황사영 김대건 최양업 |
| 기타 | |
| 관련 사건 | 황사영 백서 사건 |
2. 조선 천주교의 전래와 초기 발전
2. 1. 천주학의 수용과 초기 신앙 공동체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초기에는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9] 이런 연유로 인해 18세기에 조선 사대부의 서가에는 《도덕경》과 같이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기독교 변증서 《천주실의》가 꽂혀 있었다. 보유론(補儒論)적인[10] 관점에서 이루어진 전교는 중국이나 조선에서 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졌다. 점차 천주학이 종교로 받아들여지며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원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11]천주학은 주로 관직사회에서 소외된 남인의 소장파 학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다. 정약용, 이승훈, 권철신 등은 외딴 절에 함께 들어가 강학회를 열기도 했으며[21] 이를 계기로 실천학으로 수용하기도 했다.[22] 그러나 이들은 자료 부족으로 항상 연구의 한계를 절감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던중 1783년(정조 7) 이승훈이 동지사 일행과 함께 북경에 가게 되었다.[23][24][25] 여러날 북경 남천주당에 찾아가 교리를 배우던 이승훈은 신묘한 가르침에 끌려 세례까지 받았다.[26]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 선교사들은 이 사건을 매우 놀라와했다. 선교사가 가서 찾아보지도 않은 미교화국의 젊은 청년이 자진하여 찾아와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된 사례는 로마 카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27] 조선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된 이승훈은 1784년 4월, 성서, 성상, 묵주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귀국후 이승훈은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전교에 힘썼다.[12] 탄압과 박해가 있었음에도 경기와 충청 내포(內浦)지방,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증가하였다.[13]
2. 2. 유교와의 갈등과 명례방 사건
정조는 유학이 흥하면 천주교는 소멸될 것이라며 천주교를 묵인하였다.[14][15] 그러나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신분제와 가부장적 권위를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 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제사 금지 문화는 조선의 장례문화와 정면충돌을 일으켰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였는데,[17] 이는 1656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선언을[18] 뒤집는 조치였다. 이러한 조상제사 거부는 이후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로 활용되었다.[13]1785년(정조 9) 명례방 사건이 발생하여,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16] 1784년,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은 서울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모임을 가졌으나, 다음해 3월 포졸들에게 적발되었다.[30] 김범우는 유배 중 장형으로 1787년 귀양지에서 사망하여 조선 천주교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31][32]
1786년 이승훈은 자치교회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으나, 1790년 북경 교구는 가성직제 운영이 교회법 위반임을 알리고 제사금지령을 내렸다.[35] 영조 때에도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도가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36] 그러나 1791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정쟁의 대상이 되며 천주교 탄압(신해박해)으로 이어졌다.
3.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3. 1. 신해박해 (1791년)
1791년, 천주교도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천주교식 장례를 치르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켜 천주교 박해 사건이 발생했다.[37]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모친상에 위패 없이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후 제사를 폐하였으며,[37] 권상연이 윤지충을 옹호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38] 이는 유교 사회의 제례 질서를 파괴하는 패륜으로 간주되어 조선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39]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참수하고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려 했으나,[40] 사건은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정조는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중용했으나, 남인에 속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39] 남인조차 천주교를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攻西派)로 분열되었다.[41]
신해박해는 을묘박해, 신유박해, 을해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로 이어지는 대규모 천주교 박해의 시작이었다.[42] 제사 거부는 천주교 탄압의 명분이 되었고, 천주교는 정치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다.[42] 천주교가 박해를 받자 양반 계층 교인들은 배교하였고, 그 공백을 중인 계층이 메웠다.[43] 한편,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세가 성장하자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선교사 영입을 추진하였다.
3. 2. 을묘박해 (1795년)
1795년 6월, 은밀하게 활동하는 외국인 선교사가 있다는 제보를 받은 포도청은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4] 관련자인 최인길, 윤유일, 지황을 심문했으나, 이들이 끝까지 함구하여 옥사하게 만들었다.[45][46] 포졸들이 선교사의 은신처를 덮쳤을 때 역관 최인길이 선교사 행세를 하며 대신 체포되었고,[47] 그 덕분에 선교사 주문모는 현장에서 벗어났다.주문모는 중국교회에서 조선에 파송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였다. 가성직제도가 교회법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선 천주교도들이 중국교회에 요청하여 영입했다. 1791년 신해박해로 선교사 영입이 보류된 적이 있었으나 역관 윤유일이 1792년에 중국에 밀파되어 재차 요청하였고[48] 1795년에 성사되었다. 1795년 1월 서울에 잠입한 주문모는 역관 최인길의 집에 숨어지내며[49] 은밀하게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밀고로 인해 체포령이 떨어지면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50][51]
사건은 1795년 8월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 체포 기회를 놓쳤다는 상소를 올리자 다시 시끄러워졌다.[52]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정조는 이들에 대한 심문을 허락, 이승훈은 유배, 이가환과 정약용은 좌천되었다.[53]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숨어지냈으며 정약종과 강완숙의 도움을 받으며 은밀하게 전개한 전교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1794년에 4,000명이었던 교인수가 1800년에는 1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54]
3. 3. 정사박해 (1797년)
주문모 신부 체포에 실패한 뒤, 조정에서는 천주교로 인해 정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고자 공식적인 박해는 피한채 은밀하게 주문모의 종적을 추적하며 체포작전을 진행했다.[55] 1797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한용화(韓用和)가 도내의 수령들에게 천주교 신자의 체포와 박멸을 명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조는 후임 충청도 관찰사들에게도 천주교인에 대한 처벌을 비밀리에 명하였고 이로 인한 박해는 1799년까지 이어졌다.[55]정충달에게 조화진(趙和鎭)이라는 사람을 소개한 다음, 조화진으로 하여금 왕의 밀지를 지니고 천주교 신자라고 거짓으로 일컬으며 충청도 일대의 신자들에게 접근하여 밀고하도록 하였다. 조화진은 행상으로 위장하여 신자들이 사는 집을 염탐한후 밀고하였고, 홍주, 덕산, 청주, 덕산, 당진 등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교회 측 기록에 따르면, 정사박해 과정에서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희생되었다고 전한다. 정사박해(丁巳迫害) 때 붙잡혀 순교한 이들중에 이도기 등 8명은 이후 2014년 시복되어 복자품에 올랐다.[56]
3. 4. 신유박해 (1801년)
1800년 정조가 갑작스레 죽고[57] 순조가 11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며[58] 노론 벽파가 득세했다.[59][60]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사교엄금을 명분으로 남인과 시파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61][62] 정순왕후는 선왕 정조로 인해 자신의 가문이 몰락하자 이에 대한 복수를 원했고 노론벽파의 목적은 정조 재위기에 성장한 남인의 숙청에 있었다.[67][68] 남인 소장파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이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천주교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표방했던 선왕 정조조차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었기[69][70] 때문에 노론 벽파에게는 거칠것이 없었다.사교철폐는 명분일뿐으로 실질적인 목표는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71] 이가환과 권철진은 채제공 사후에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이 조상때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이었다. 이가환이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72]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4월 8일에 옥사하였다.[73] 정약종, 이승훈·최필공·최창현, 홍낙민, 홍교만, 주문모, 강완숙 등이 순교하고[74] 정약용도 구속되었으나 감형되어 유배형에 처해졌다.
지방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진행되던중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졌다. 백서에는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을 비롯한 조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천주교 박해 상황과 중국이나 서양의 군대의 무력을 통해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달라는 요청 등이 담겨 있었다. 백서로 인해 사학이라고 규정한 조정의 입장은 그 증거를 통해 보장받게 되었고 천주교는 매국의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다.[75] '백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재야에서 천주교 배척운동이 세차게 일어났고[76] 박해는 더욱 거세어졌다. 아울러 민중들의 의식속에 천주교를 믿으면 패가망신한다는 생각이 퍼졌고, 천주교도를 '천주학쟁이' 또는 '서학쟁이'라 하며 손가락질하게 되었다.[77]
1801년 12월 22일(음)에 정순왕후는 토사교문(討邪敎文)이 반포하며 숙청작업을 마무리했다.[78] 신유박해로 인해 남인은 전멸하여 재기불능의 상태에 이르렀고[79] 천주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천주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지대나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 소백산맥의 깊은 산중과 계곡에 숨어들게 되었고, 천주교의 전국적 확산을 초래하였다. 이로 인해 종래 지식인 중심의 조선 천주교회가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서민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80]
3. 5. 을해박해 (1815년), 정해박해 (1827년)
신유박해 이후에도 지방관들의 자의적인 박해가 계속되었다.[81] 1814년 전국적인 기근이 심해지자, 일부 백성들과 지방관들은 중앙의 지시 없이 천주교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박해했다.[81] 경상도 청송의 노래산 교인촌에서는 40명이 체포되어 경주진영으로 끌려갔고, 신앙을 버리지 않은 14명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진보의 머루산에서는 25명이 체포되어 안동진영에서 22명이 배교하고 13명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영양에서도 6명이 체포되었다. 대구감영에 갇힌 33명 중 26명은 배교하거나 옥사했고, 1816년 12월 26일 7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강원도 원주에서도 비슷한 박해가 발생하여 순교자가 나왔다. 을해박해는 조정의 박해령 없이 지방관의 자의에 의해 전개되었고,[82] 100여 명의 교우가 체포되어 30여 명이 순교했다. 많은 교우촌이 파괴되고 교인들은 재산을 약탈당했으며, 해당 지역 교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1827년(순조 27) 정해년에는 전라도 곡성, 경상도 상주, 충청도, 서울 일부 지역에서 천주교 박해가 있었다. 전라도 곡성의 한 교인촌에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 곡성 현감에게 천주교도를 고발하는 밀고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빌미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곡성에서 시작된 천주교인 검거는 전라도 전역으로 파급되었고, 240여 명의 교인들이 전주감영에 갇히게 되었다. 그해 4월 전주의 포졸들이 경상도 상주에서 신태보를 체포하여 전주로 압송하면서 경상도에서도 천주교인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어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다.[83]
서울에서는 4월에 이경언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충청도 단양에서는 경상도에서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체포되어 충주로 압송되었다. 전라도, 경상도, 서울, 충청도 등지에서 2~5월 넉 달 동안 5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11명이 순교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유배되었다. 정해박해로 인한 순교와 옥사로 전라도 지방의 천주교회는 거의 궤멸되었다.[84]
3. 6. 기해박해 (1839년)
신유박해를 전후로 하여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박해사건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크게 위축되었으나 교세는 조금씩 회복되어갔다. 집권세력인 안동 김씨 문중에는 천주교인이 많은 관계로 천주교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이 정권을 잡은후 벽파(僻派) 풍양 조씨 가문은 시파(時派)인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 사교근절을 명분삼아 천주교도가 많았던 안동 김씨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839년 헌종의 섭정인 순원왕후에 의해 시작된 기해박해로 천주교도 118명이 순교하였고 이후 풍양 조씨 가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3. 7. 병오박해 (1846년)
김대건은 1846년 5월, 백령도 해역에서 활동하다가 순위도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해주감영에서 신문받던 중 신분이 밝혀져 서울로 압송, 국사범으로 취조를 받았다.[85] 김대건과 함께 서해로 나갔던 선주 임성룡과 뱃사공 등 관련 교인 10여 명도 체포되었다.그 해 9월,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Cecil)이 군함 3척을 이끌고 홍주해역에 나타나 기해박해(1839) 때 프랑스 선교사 3명이 참수당한 것에 대해 조선 조정에 항의하며 통상을 요구하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긴장한 조정은 김대건과 현석문 등 9명에 대한 처형을 서둘렀다.[86]
순교자들의 행적은 〈병오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홍콩으로 보내졌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1847년 교황청에 접수되었다.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들은 1925년 시복되었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87]
3. 8. 경신박해 (1860년)
철종은 성품이 온건하였고 당시 집권 세력인 안동 김씨 가문도 유화 정책을 썼으므로, 천주교는 점차 교세가 성장하였다. 한 해에 약 1,200명 이상의 새 신자들이 입교하였고 전국의 신자 수는 약 16,700명에 달하였다.[90] 그런데 기해박해(1839년, 헌종 4년) 때 천주교도 색출에 공을 세운 금위대장 임성고의 아들인 좌포도장 김태영이 천주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으로 우포도장 신명순과 함께 천주교 박해를 자행하였다. 이들은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서울과 지방의 교인촌을 급습하여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한 후 서울로 압송했다.[88]그러나 포졸들이 천주교인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약탈, 방화, 부녀자 겁탈 등 불미스러운 만행이 벌어졌다.[89] 이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동정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조정에서도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와 병조판서 김병운(金炳雲) 등이, 과거 수차례 천주교도 박해로 인해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불행한 죽음을 가져오는 등 그 동안 왕실과 나라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어왔다는 점을 거론하며 천주교인 체포에 반대하였다. 결국, 두 포도대장은 문책 후 파면되고 교인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박해 기간중에 프랑스 선교사들은 피신하였고, 최양업 신부도 경상도 죽림이라는 곳에서 체포되어 잠시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옥사가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90] 그러나 교우촌들이 황폐화되어 신자들은 생계 수단을 잃고 유랑하는 자가 많아져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3. 9. 병인박해 (1866년)
흥선대원군은 1864년 철종 사후 고종이 즉위하면서 정권을 잡았는데,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인물로 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이 없었다.[91] 부인과 딸도 천주교 신자였고, 불우하던 시절 천주교인과 접촉하기도 했다.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고자하는 계획을 품기도 했다.[92] 그러나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하자,[93] 흥선대원군의 정적들이 천주교와 같은 불순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졌고,[94] 조대비(趙大妃)마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정권 유지를 위해 정책을 바꿔야 했다.흥선대원군은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였다.[95] 2월에 베르뇌를 비롯한 프랑스 신부 6명과 홍봉부, 남종삼, 김면호를 포함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체포되어 순교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당하자 이를 구실삼아 천진에 있던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왔다.[96] 양화나루까지 진출했던 프랑스 함대는 곧 퇴각했으나 이내 강화도를 침공한후 불법 점령하였다. 프랑스는 책임자 처벌과 통상수교를 요구했으나 흥선대원군이 거부하자 양측간에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1866년 11월에 프랑스가 퇴각하면서 강화읍을 파괴, 방화, 약탈하였다.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은 절두산에 형장을 만들어 천주교인 수천명을 참수하였는데, 이로 인해 한강이 피로 물들었으며 잘려진 머리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6]
또한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도(천주학 죄인) 색출 임무를 맡았던 해미읍성에서는 끌려온 인원이 너무 많자 시체 처리의 편의를 위해 1,000여명을 대상으로 집단 생매장이라는 잔인한 방법을 서슴없이 자행하였다.[7] 박해는 1868년에 남연군 분묘 도굴 만행이 벌어지자 더욱 거세졌다.[97] 1871년까지 진행된 탄압으로 전국에 걸쳐 약 8천여명 이상이 순교했다.[98]
3. 10. 한티 천주교 박해 (1868년)
1868년에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신나무골과 한티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99] 신유박해(1801년) 때 탄압을 피해 깊은 산골로 피신하여 생활하던 천주교인들이 을해박해(1815년)로 대거 대구 감영에 수감되었다. 그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대구 감영이 가깝고 숨어 살기에 알맞은 신나무골과 한티에 모여 살게되었다.[99] 정해박해(1827년) 이후에도 이어진 여러차례 박해사건 때마다 탄압을 피해 각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한티에 와서 신자촌을 이루며 살았다. 이들은 옹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100]1845년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Daveluy프랑스어 주교와 1849년 입국한 최양업 신부가 1861년까지 12년 동안 경상도를 순회 전교할 때 한티와 신나무골을 방문했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1862년에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보고서에 “칠곡 고을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작고 외딴 마을이 하나 있는데 그 곳에서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병인박해(1866년) 때에도 신자들이 사방에서 한티로 피난 왔으나, 1868년에 포졸들이 들이닥쳐서 약 37명이 순교하고 말았다.[101]
4. 신앙의 자유 획득과 근대 천주교
1785년 명례방 사건 이후 약 100년간 조선의 천주교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해는 천주교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02]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은 서양 국가들과의 개항에서 엿볼 수 있게 되었다.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1886년에 체결한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102] 또한 시대 변화를 감지한 조선 조정은 천주교인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884년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으로부터 조선에 병원과 학교 사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103][104] 공식적으로 선교를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선교회 사업(의료와 교육)을 허가함으로 간접적으로 선교를 허락한 것으로 개신교 측에서는 받아들였다. 이로써 개신교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그해 9월에 알렌이 의사 자격으로 입국하였고, 이듬해 1885년 의사 겸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이 합법적으로 입국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의사와 교사로 활동하였다.[105]
1895년 조선 조정은 병인박해(1866년) 때에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또한 이 해에 천주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102] 이때 고종은 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했다. 이윽고 1899년에 「교민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되며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106] 아울러 조선 천주교회는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던 명례방(명동)에는 1898년 한국 교회 첫 번째 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이 세워졌다.[107][108][109][110][111][112][113][114][115]
4. 1. 개항과 선교 활동의 시작
1785년 명례방 사건 이후 약 100년간 조선의 천주교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해는 천주교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02]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은 서양 국가들과의 개항에서 엿볼 수 있게 되었다.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1886년에 체결한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102] 또한 시대변화를 감지한 조선 조정은 천주교인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1884년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으로부터 조선에 병원과 학교 사업을 시작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었다.[103][104] 공식적으로 선교를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선교회 사업(의료와 교육)을 허가함으로 간접적으로 선교를 허락한 것으로 개신교 측에서는 받아들였다. 이로써 개신교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그해 9월에 알렌이 의사 자격으로 입국하였고, 이듬해 1885년 의사 겸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이 합법적으로 입국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에서 선교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의사와 교사로 활동하였다.[105]
1895년 조선 조정은 병인박해(1866년) 때에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또한 이 해에 천주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102] 이때 고종은 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했다. 이윽고 1899년에 「교민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되며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106] 아울러 조선 천주교회는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던 명례방(명동)에는 1898년 한국 교회 첫 번째 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이 세워졌다.[107][108][109][110][111][112][113][114][115]
4. 2. 신앙의 자유 보장과 교세 확장
1785년 명례방 사건 이후 약 100년간 조선의 천주교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며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명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박해는 천주교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02] 신앙의 자유에 대한 희망은 서양 국가들과의 개항에서 엿볼 수 있게 되었다. 1882년 미국과 체결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과 1886년에 체결한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102] 또한 시대 변화를 감지한 조선 조정은 천주교인들의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1895년 조선 조정은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또한 이 해에 천주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102] 이때 고종은 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했다. 이윽고 1899년에 「교민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되며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106] 아울러 조선 천주교회는 성당 건립을 추진하여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던 명례방(명동)에는 1898년 한국 교회 첫 번째 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이 세워졌다.[107][108][109][110][111][112][113][114][115]
5. 평가 및 역사적 의의
조선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방문 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로마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사례이다.[27] 이는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선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조선의 제사 문화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이해 부족은 제사 금지와 허용을 반복하는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천주교가 불효와 불충을 조장하는 사교(邪敎)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어 탄압과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27] 가난한 양반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국법으로 다스린 전례가 없었고 불충(不忠)의 의도가 없음이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116] 조선의 정치 권력자들은 정적 제거의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제사 거부를 천주교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
선교 역사가 로빈슨은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19세기 초 70여 년간 조선 교인들만큼의 수난을 겪었을까 단정하기 어렵다"고 평가했으며,[117] 닐 교수는 조선 천주교 역사를 "가장 로맨틱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난사"라고 칭했다.[118]
천주교 박해는 실학을 중시했던 남인의 대량 숙청으로 이어져 조선의 근대화를 퇴보시켰고, 붕당정치가 붕괴되고 세도정치가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쇄국정책으로 이어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맞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5. 1. 자생적 기원과 문서 선교의 중요성
조선 천주교회는 선교사의 방문 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한, 로마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독특한 사례이다.[27] 이는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선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조선의 제사 문화에 대한 로마 교황청의 이해 부족은 제사 금지와 허용을 반복하는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천주교가 불효와 불충을 조장하는 사교(邪敎)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어 탄압과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27] 가난한 양반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국법으로 다스린 전례가 없었고 불충(不忠)의 의도가 없음이 명백했음에도 불구하고,[116] 조선의 정치 권력자들은 정적 제거의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제사 거부를 천주교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로빈슨은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19세기 초 70여 년간 조선 교인들만큼의 수난을 겪었을까 단정하기 어렵다"고 평가했으며,[117] 닐 교수는 조선 천주교 역사를 "가장 로맨틱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난사"라고 칭했다.[118]
천주교 박해는 실학을 중시했던 남인의 대량 숙청으로 이어져 조선의 근대화를 퇴보시켰고, 붕당정치가 붕괴되고 세도정치가 등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쇄국 정책으로 이어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맞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5. 2. 순교와 수난의 역사
조선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로마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사례이다.[27] 이는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된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이 조선의 제사 문화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제사 금지와 허용을 반복하면서, 천주교는 '불효불충(不孝不忠)하여 무부무군(無父無君)한 사교(邪敎)'라는 오명을 얻었고, 이는 탄압과 박해의 빌미가 되었다. 가난한 양반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국법으로 처벌한 전례가 없었고 불충(不忠)의 의도가 없었음에도,[116] 조선의 정치 권력자들은 정적 제거가 필요할 때마다 제사 거부를 천주교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조선 천주교의 선교 역사는 처절한 순교와 수난의 연속이었다. 선교 역사가 로빈슨은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19세기 초 70여 년간 조선 교인들만큼의 수난을 겪었을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117] 닐 교수 또한 조선 천주교 역사를 "가장 로맨틱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난사"라고 칭했다.[118]
천주교 박해로 인해 실학을 중시했던 남인이 대거 숙청되면서 조선의 근대화는 늦춰졌고, 붕당정치가 붕괴된 자리에 세도정치가 들어섰다. 이후 쇄국정책으로 이어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결국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라는 치욕적인 역사를 맞이하게 된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였다.
5. 3. 근대화와 사회 변화에 미친 영향
조선 천주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로마 가톨릭 역사상 유례없는 사례이다.[27] 이는 기독교 선교 역사에서 문서 선교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가 된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은 조선의 제사 문화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제사 금지와 허용을 반복하며 혼란을 야기했다. 이는 천주교에 '불효불충(不孝不忠)하여 무부무군(無父無君)한 사교(邪敎)'라는 이미지를 씌웠고, 박해의 빌미를 제공했다.[116] 조선의 정치 권력자들은 정적 제거가 필요할 때마다 제사 거부를 천주교 탄압의 명분으로 삼았다.조선 천주교의 선교 역사는 처절한 순교와 수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선교 역사가 로빈슨은 "고대 로마 제국의 교인들이 19세기 초 70여 년간 조선 교인들만큼의 수난을 겪었을까"라고 언급했으며,[117] 닐 교수는 조선 천주교 역사를 "가장 로맨틱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수난사"라고 평가했다.[118]
천주교 박해로 인해 실학을 중시했던 남인이 대거 숙청되면서 조선의 근대화는 지체되었고, 붕당정치가 붕괴된 자리에 세도정치가 들어섰다. 이는 쇄국정책으로 이어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3]
웹사이트
천주교 박해 - 조선 후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한 일
https://terms.naver.[...]
2015-02-10
[4]
백과사전
병인사옥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5]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6]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7]
웹사이트
해미순교성지 공식 웹사이트-홍주순교성지의 역사
http://www.haemi.or.[...]
[8]
웹사이트
자유로운 신앙을 위한 외침, 홍주순교성지
http://www.grandcult[...]
2021-08-19
[9]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0]
웹사이트
Ricci, Matteo
https://terms.naver.[...]
2007-11-25
[11]
백과사전
신유박해
두산백과
[12]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13]
백과사전
신해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웹사이트
정조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15]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16]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7]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01
[18]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01
[19]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0]
웹사이트
신해박해(辛亥迫害)
http://encykorea.aks[...]
[2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2]
서적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
[23]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24]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5]
서적
대한국사 4권, 조선시대
청화
1983
[26]
서적
한 권으로 보는 한국사
가람기획
1993
[27]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28]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29]
웹사이트
명례방공동체
https://terms.naver.[...]
[30]
백과사전
추조적발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1]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32]
웹사이트
김범우 - 김범우의 죽음
https://terms.naver.[...]
2005
[33]
백과사전
명례방공동체
두산백과
[34]
웹사이트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
1788-08-02
[35]
뉴스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http://www.cpbc.co.k[...]
카톨릭 평화신문
2009-03-08
[36]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37]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38]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39]
네이버 지식백과
진산사건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40]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두산백과
[41]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종교학대사전
1998-08-20
[42]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3]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44]
네이버 지식백과
을묘박해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45]
네이버 지식백과
최인길
두산백과
[46]
Good News 카톨릭사전
을묘박해
https://maria.cathol[...]
[47]
네이버 지식백과
최인길
두산백과
[48]
네이버 지식백과
윤유일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9]
서적
조선 최대갑부 역관
김영사
2006
[50]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51]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52]
네이버 지식백과
을묘박해
두산백과
[53]
네이버 지식백과
을묘박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4]
서적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
[55]
네이버 지식백과
정사박해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6]
카톨릭신문
대전교구 청양본당, 복자 이도기 순교 220주년 세미나 2018.0916.
https://www.catholic[...]
2018-09-16
[57]
정조실록
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
[58]
순조실록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59]
문서
벽파는 정순왕후의 친오라버니 [[김귀주]](1786년에 사망)가 주축을 이루었다.
[60]
서적
한국사 이야기 16
한길사
2009-04-10
[61]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62]
네이버 지식백과
자찬묘지명-집중본 - 1-9
여유당전서 - 시문집 (산문) 16권,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63]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64]
순조실록
순조실록 (1838)
http://sillok.histor[...]
[65]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66]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지식하우스
1996
[67]
서적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
[68]
네이버 지식백과
진산사건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69]
정조실록
정조실록
http://sillok.histor[...]
1788-08-02
[70]
서적
조선의 왕비
이가출판사
2003
[71]
서적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
[72]
서적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
[73]
서적
한국사의 천재들
생각의 나무
2006
[74]
백과사전
정약종
[75]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76]
서적
한국사 이야기 15
한길사
2009-04-10
[77]
서적
한국사 이야기 16
한길사
2009-04-10
[78]
사료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순조 1년 12월 22일
http://sillok.histor[...]
[79]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80]
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3
웅진출판
1991
[81]
웹사이트
을해박해 (乙亥迫害)
https://maria.cathol[...]
[82]
백과사전
을해박해 [乙亥迫害]
[83]
웹사이트
정해박해 [丁亥迫害]
https://terms.naver.[...]
[84]
웹사이트
정해박해 [丁亥迫害]
https://terms.naver.[...]
[85]
웹사이트
김대건 [金大建]
https://terms.naver.[...]
[86]
웹사이트
병오박해 [丙午迫害]
https://terms.naver.[...]
[87]
웹사이트
병오박해 [丙午迫害]
https://terms.naver.[...]
[88]
웹사이트
경신박해 [庚申迫害]
https://terms.naver.[...]
[89]
웹사이트
경신박해 (庚申迫害)
https://maria.cathol[...]
[90]
웹사이트
경신박해 [庚申迫害]
https://terms.naver.[...]
[91]
백과사전
병인사옥
[92]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93]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94]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95]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96]
웹사이트
병인박해 [丙寅迫害]
[97]
웹사이트
남연군분묘도굴사건 [南延君墳墓盜掘事件]
[98]
웹사이트
병인박해 [丙寅迫害]
[99]
웹사이트
한티 천주교 박해사건 [-天主敎迫害事件]
https://terms.naver.[...]
[100]
웹사이트
한티순교성지
https://terms.naver.[...]
[101]
웹사이트
신나무골 천주교 박해사건 [-天主敎迫害事件]
https://terms.naver.[...]
[102]
뉴스
한국 천주교회사 특별 기획전, (6) 신앙의 자유도 잠시, 또다시 닥쳐온 시련
http://www.cpbc.co.k[...]
카톨릭 평화신문
2017-08-27
[103]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104]
웹사이트
로버트 매클레이 [Robert Samuel Maclay]
https://terms.naver.[...]
[105]
웹사이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https://terms.naver.[...]
[106]
네이버 지식백과
교민조약 [敎民條約]
https://terms.naver.[...]
한국학중앙연구원
[107]
네이버 지식백과
김범우의 집이 훗날의 명동성당으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한국콘텐츠진흥원
2005
[108]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09]
네이버 지식백과
명동성당
https://terms.naver.[...]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김효형, 한미자, 김성철, 유홍준, 최세정, 정용기
2004
[110]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명동성당 [─明洞聖堂]
https://terms.naver.[...]
한국학중앙연구원
[111]
다음백과
명동성당 (明洞聖堂)
https://100.daum.net[...]
[11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적포털
서울 명동성당 (서울 明洞聖堂)
http://www.heritage.[...]
[113]
Good News 카톨릭사전
종현성당
[114]
Good News 카톨릭사전
명동본당
https://maria.cathol[...]
[115]
문서
조선 천주교회는 다양하고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중에 명동성당 건립은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16]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03-31
[117]
서적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Edinburgh
1915
[118]
서적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