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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칸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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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칸토어는 184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독일계 수학자이다. 그는 집합론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무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집합의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증명하고,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확립했다. 칸토어는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칸토어의 정리와 초한수 이론을 제시했다. 그의 이론은 당대 수학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현대 수학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다. 칸토어는 말년에 정신 질환을 앓았으며, 191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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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칸토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칸토어, 1910년경
칸토어, 1910년경
본명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루트비히 필리프 칸토어
출생일1845년 3월 3일 (율리우스력 2월 19일)
출생지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일1918년 1월 6일
사망지독일 제국 할레
국적독일-러시아
로마자 표기Georg Ferdinand Ludwig Philipp Cantor
서명
학력
모교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제목De aequationibus secundi gradus indeterminatis
박사 학위 논문 링크De aequationibus secundi gradus indeterminatis
박사 학위 취득 년도1867년
지도 교수에른스트 쿠머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경력
직장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
업적
주요 업적집합론
칸토어의 정리
하이네-칸토어 정리
칸토어 역설
대각선 논법
기수순서수
칸토어 집합
칸토어-벤딕손 정리
유도 집합
칸토어-르베그 정리
개인 정보
배우자1874년 발리 구트만과 결혼
수상
수상실베스터 메달 (1904년)

2. 생애

1845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ru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인 게오르크 볼데마르 칸토어(Georg Woldemar Cantor), 어머니는 음악가 집안 출신인 마리아 안나(Maria Anna)였다. 유대인 혈통으로 음악가나 종교인 등을 배출한 가계였다.

리하르트 데데킨트와의 교류는 초기 집합론의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 근교의 할레 대학교(Universität Halle-Wittenberg)에서 강의했다. 말년에 점차 정신 질환을 앓았고, 마지막으로 할레(Halle)의 요양원(Halle Nervenklinik)에서 사망했다.[104]

2. 1. 유년 시절과 교육

게오르크 칸토어는 1845년 3월 3일(율리우스력 2월 19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독일인 가족에게서 여섯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11][105] 칸토어의 아버지 게오르크 발데마르 칸토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 회원이었다.[11][105] 칸토어의 외할아버지 프란츠 뵘(Franz Böhm)은 러시아 제국 오케스트라의 저명한 음악가이자 독주자였다.[11][105] 칸토어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재능을 인정받았다.[105]

젊은 시기의 칸토어


1856년, 칸토어의 가족은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러시아의 추운 겨울을 피해 독일 비스바덴으로 이주했고, 이후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했다.[11] 1860년, 칸토어는 다름슈타트 레알슐레(Realschule)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특히 삼각법에서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였다.[12][13][106][107]

1862년, 칸토어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 입학했다.[12][13][106][107] 186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칸토어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옮겨[14] 레오폴트 크로네커,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에른스트 쿠머의 강의를 수강했다.[14][15][108][109] 1866년 여름, 칸토어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수학 연구에 전념했다.[14][15][108][109] 1867년, 칸토어는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론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4][15]

2. 2. 학자로서의 삶과 연구

게오르크 칸토어는 1869년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수론에 관한 논문으로 하빌리타치온을 수여받고 연구원으로 경력을 시작했다.[15][16] 1872년에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 1879년에는 34세의 나이로 정교수로 승진하였다.[15][14]

1874년, 칸토어는 발리 구트만(Vally Guttmann)과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15] 칸토어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재산 덕분에 교수 연봉이 적었음에도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하르츠 산맥에서 신혼여행을 보내는 동안, 칸토어는 리하르트 데데킨트와 많은 시간 동안 수학적 논의를 나누었다.

칸토어는 당시 독일 최고의 대학이었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옮기려 했으나, 레오폴트 크로네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7] 크로네커는 수학에서의 구성주의적 관점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칸토어의 집합론에 대해 철학적으로 반대했다.[15] 칸토어가 베를린 대학교에 지원할 때마다 크로네커의 영향으로 거절당했고, 칸토어는 크로네커 때문에 할레를 떠날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1881년, 칸토어의 할레 동료인 에두아르트 하이네가 사망한 후, 할레 대학교는 칸토어의 제안대로 데데킨트, 하인리히 마르틴 베버, 프란츠 메르텐스에게 교수직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1882년, 데데킨트가 할레 대학교 교수직을 거절하면서 칸토어와 데데킨트 사이의 서신 교환이 중단되었다.[20] 이후 칸토어는 예스타 미타그레플레르와 서신을 교환하며 ''Acta Mathematica''에 논문을 발표했으나, 1885년 미타그레플레르가 칸토어 논문의 철학적 함의에 반감을 표하면서 관계가 중단되었다.[21]

2. 3. 말년과 사망

칸토어는 1884년 여러 수학자들과의 비판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울증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25] 퇴원 후, 수학 연구를 기피하고 철학과 윌리엄 셰익스피어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25] 특히 프랜시스 베이컨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썼다는 가설에 집착하여 연구에 몰두했다. 1891년 대각선 논법을 발표하며 회복하는 듯했으나, 신경증이 재발하여 1899년과 1903년에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25][26] 할레 대학교는 칸토어가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04년 쾨니그 줄러가 칸토어의 정렬 정리를 "반증"하는 발표를 하자(이후 오류로 밝혀짐), 칸토어는 큰 충격을 받아 신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했다.[28] 이후 2~3년마다 입원을 반복했다.[29] 1911년, 칸토어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 창립 5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고, 버트런드 러셀과의 만남을 기대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다음 해,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는 칸토어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지만, 질병으로 인해 직접 받을 수는 없었다.

1913년 할레-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은퇴한 후,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궁핍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다.[30] 1917년 할레의 정신병원에 마지막으로 입원하여 아내에게 퇴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계속 보냈으나, 1918년 1월 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4] 그의 묘비에는 "수학의 본질은 그것이 갖는 자유로움에 있다(Das Wesen der Mathematik liegt in ihrer Freiheit)"라는 그의 말이 쓰여 있다.

3. 주요 업적

실수의 개수가 자연수의 개수보다 많음을 증명한 대각선 논법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집합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집합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하였다.

칸토어는 무한 집합끼리도 그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 또한 칸토어의 정리는 집합과 멱집합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무한의 무한성"의 존재를 암시한다. 초한수에 관한 칸토어의 이론은 당대 유명한 수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현대의 대다수 수학자들은 그의 초한수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며 칸토어의 이론은 현대의 수학기초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다.[110]

그는 연속체 가설을 고안하여 직관적으로 참이라 믿고 수년 간 그 증명에 힘을 쏟기도 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후 연속체가설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체계에서 반증과 증명이 불가능하여 독립적임이 각각 쿠르트 괴델과 폴 코언에 의해 증명되었다.

칸토어의 1874년부터 1884년까지의 연구는 집합론의 기원이다.[31] 이 연구 이전에는 집합의 개념이 수학 초창기부터 암묵적으로 사용되어 온 다소 기본적인 것이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집합론이 비자명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칸토어 이전에는 유한 집합(이해하기 쉬운)과 "무한"(철학적 논의의 주제로 간주됨)만 있었다. 칸토어는 무한 집합에 대해 (무한히) 많은 크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집합론이 사소한 것이 아니며 연구되어야 함을 확립했다. 집합론은 현대 수학에서 기초 이론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전통적인 수학 분야(예: 대수학, 해석학, 위상수학)의 수학적 대상(예: 수와 함수)에 대한 명제를 단일 이론으로 해석하고, 이를 증명하거나 반증하기 위한 표준 공리 집합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집합론의 기본 개념은 이제 수학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32]

칸토어는 그의 초기 논문 중 하나에서[33] 실수 집합이 자연수 집합보다 "더 많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이는 서로 다른 크기의 무한 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또한 일대일 대응(이하 "1대1 대응"으로 표기)의 중요성을 집합론에서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개념을 사용하여 유한 집합과 무한 집합을 정의하고, 후자를 가산 가능한(또는 가산 무한) 집합과 비가산 집합(비가산 무한 집합)으로 세분화했다.[34]

칸토어는 위상수학에서 중요한 개념과 기수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1875년 헨리 존 스티븐 스미스가 발견한 칸토어 집합[35]이 조밀하지 않지만, 모든 실수 집합과 같은 기수를 가지는 반면, 유리수는 어디에나 조밀하지만 가산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그는 또한 모든 가산 조밀 선형 순서가 끝점이 없으면 유리수와 순서 동형이라는 것을 보였다.

칸토어는 집합 ''A''의 멱집합(즉, ''A''의 모든 가능한 부분집합의 집합)과 같은 집합론에서 기본적인 구성을 도입했다. 그는 나중에 ''A''가 무한 집합일 때도 ''A''의 멱집합의 크기가 ''A''의 크기보다 엄격하게 크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이 결과는 곧 칸토어의 정리로 알려지게 되었다. 칸토어는 자연수의 산술을 확장한 기수와 서수라고 불리는 집합의 전체 이론과 산술을 개발했다. 그의 기수에 대한 표기는 자연수 아래 첨자를 가진 히브리어 문자 ℵ(알레프)였고, 서수에는 ω(오메가)를 사용했다. 이 표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칸토어가 도입한 ''연속체 가설''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다비드 힐베르트가 그의 23가지 미해결 문제 중 첫 번째로 제시했다. 칸토어의 연구는 힐베르트의 유명한 찬사를 넘어서도 호평을 받았다.[36]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피어스는 칸토어의 집합론을 칭찬했고, 1897년 취리히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칸토어가 행한 공개 강연에 이어 아돌프 후르비츠와 자크 아다마르도 모두 감탄을 표명했다. 그 회의에서 칸토어는 데데킨트와의 우정과 서신을 재개했다. 1905년부터 칸토어는 그의 영국 팬이자 번역가인 필립 주르댕과 집합론의 역사와 칸토어의 종교적 사상에 대해 서신을 교환했다. 이것은 나중에 그의 여러 해설 작품과 함께 출판되었다.

순수집합론의 창시자. 자연수실수 사이에 전단사 함수가 존재하지 않음을 대각선 논법으로 증명한 한편, '''R''' 과 '''R'''''n'' 사이에 전단사 함수가 존재함을 증명했다. 연속체 가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했지만, 생전에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연속체 가설에 대해서는, 후에 괴델과 폴 코언의 결과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자신의 집합론의 모순도 발견했지만, 칸토어 자신은 이러한 역설이 집합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플러스가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3. 1. 집합론의 창시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집합론의 기초를 확립했다.[31]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집합의 크기(기수) 개념을 도입하여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하였다.

칸토어는 무한 집합끼리도 그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 보였는데,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33][34] 또한 칸토어의 정리를 통해 집합과 멱집합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초한수에 관한 칸토어의 이론은 당대 수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 현대 수학자들은 그의 결과를 받아들여 칸토어의 이론은 현대 수학기초론의 핵심이 되었다.[110]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고 표현했다.[110]

칸토어는 연속체 가설을 제시하여, 수년 간 그 증명에 힘을 쏟았으나 실패했다. 이후 연속체 가설은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 체계에서 반증과 증명이 불가능하여 독립적임이 쿠르트 괴델과 폴 코언에 의해 증명되었다.

칸토어의 1874년부터 1884년까지의 연구는 집합론의 기원이다.[31] 칸토어 이전에는 유한 집합과 "무한"만이 있었으나, 칸토어는 무한 집합에 대해 (무한히) 많은 크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집합론이 기초 이론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32] 집합론의 기본 개념은 이제 수학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32]

칸토어는 위상수학에서 중요한 개념과 기수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1875년 헨리 존 스티븐 스미스가 발견한 칸토어 집합[35]이 조밀하지 않지만, 모든 실수 집합과 같은 기수를 가지는 반면, 유리수는 어디에나 조밀하지만 가산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그는 또한 모든 가산 조밀 선형 순서가 끝점이 없으면 유리수와 순서 동형이라는 것을 보였다.

칸토어는 집합 ''A''의 멱집합(즉, ''A''의 모든 가능한 부분집합의 집합)과 같은 집합론에서 기본적인 구성을 도입했다. 그는 ''A''의 멱집합의 크기가 ''A''의 크기보다 엄격하게 크다는 칸토어의 정리를 발표하였다. 칸토어는 자연수의 산술을 확장한 기수와 서수라고 불리는 집합의 전체 이론과 산술을 개발했다. 그의 기수에 대한 표기는 자연수 아래 첨자를 가진 히브리어 문자 \aleph(ℵ, 알레프)였고, 서수에는 그리스 문자 \omega(, 오메가)를 사용했다. 이 표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칸토어가 도입한 ''연속체 가설''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다비드 힐베르트가 그의 23가지 미해결 문제 중 첫 번째로 제시했다. 칸토어의 연구는 힐베르트의 유명한 찬사를 넘어서도 호평을 받았다.[36]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피어스는 칸토어의 집합론을 칭찬했고, 1897년 취리히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수학자 회의에서 칸토어가 행한 공개 강연에 이어 아돌프 후르비츠와 자크 아다마르도 모두 감탄을 표명했다. 그 회의에서 칸토어는 데데킨트와의 우정과 서신을 재개했다. 1905년부터 칸토어는 그의 영국 팬이자 번역가인 필립 주르댕과 집합론의 역사와 칸토어의 종교적 사상에 대해 서신을 교환했다. 이것은 나중에 그의 여러 해설 작품과 함께 출판되었다.

1870년부터 1872년 사이에 칸토어는 무리수를 유리수의 수렴 수열로 정의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872년 칸토어와 친구가 된 데데킨트는 데데킨트 절단을 통해 실수를 처음으로 정의한 논문에서 이 논문을 인용했다. 칸토어는 무한소 이론가 오토 슈톨츠와 폴 뒤 부아-레몽의 이론에 반대하며, 그것들을 "혐오스러운 것"이자 "수학의 콜레라 균"이라고 묘사했다.[38] 칸토어는 또한 무한소의 모순을 증명하는 잘못된 "증명"을 발표하기도 했다.[39]

순수집합론의 창시자이다. 그는 자연수실수 사이에 전단사 함수가 존재하지 않음을 대각선 논법으로 증명한 한편, '''R''' 과 '''R'''''n'' 사이에 전단사 함수가 존재함을 증명했다. 연속체 가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했지만, 생전에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연속체 가설에 대해서는, 후에 괴델과 폴 코언의 결과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자신의 집합론의 모순도 발견했지만, 칸토어 자신은 이러한 역설이 집합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어서 플러스가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3. 2. 대각선 논법

게오르크 칸토어무한에 대한 연구를 통해 집합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10]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 개념을 정립하고, 집합의 크기를 연구하여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했다.

칸토어는 무한 집합끼리도 크기가 다를 수 있음을 보였는데, 1891년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40][43] 이는 서로 다른 크기의 무한 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칸토어는 1874년 논문 "모든 실수 대수적 수의 집합의 한 성질에 관하여"에서 여러 종류의 무한이 존재한다는 것을 엄밀하게 증명했다.[31][41] 이전에는 모든 무한 집합이 동수(즉, "크기가 같거나" 같은 수의 원소를 가짐)라고 가정되었으나,[42] 칸토어는 실수 집합과 양의 정수 집합이 동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즉, 실수는 가산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칸토어는 두 가지 구성을 사용하여 이 결과를 증명했다. 첫 번째 구성은 실수 대수적 수[45]를 수열로 작성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즉, 실수 대수적 수는 가산 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구성은 임의의 실수 수열을 사용하여 겹치는 구간을 구성하고, 그 교집합은 수열에 없는 실수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모든 실수 수열을 사용하여 수열에 없는 실수를 구성할 수 있으므로, 실수는 수열로 쓸 수 없다. 즉, 실수는 가산 불가능하다. 칸토어는 이 구성을 실수 대수적 수의 수열에 적용하여 초월수를 생성했다. 그는 자신의 구성이 리우빌의 정리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제공하며, 모든 구간은 무한히 많은 초월수를 포함한다는 것을 증명했다.[46] 칸토어의 다음 논문에는 초월수 집합이 실수 집합과 같은 "위력"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성이 포함되어 있다.[47]

또한, 칸토어의 정리를 통해 집합과 멱집합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무한의 무한성"의 존재를 제시하였다. 초한수에 관한 칸토어의 이론은 당대 수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으나,[48] 현대 수학자들은 그의 결과를 받아들이며 칸토어의 이론은 현대 수학기초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110]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고 표현하기도 했다.[110]

3. 3. 칸토어의 정리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집합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110]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집합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하였다.[110]

칸토어의 정리는 집합과 멱집합 사이에 일대일대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무한의 무한성"의 존재를 암시한다.[110] 칸토어는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110]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Aus dem Paradies, das Cantor uns geschaffen, soll uns niemand vertreiben können.de고 표현하기도 했다.[110]

3. 4. 연속체 가설

칸토어는 무한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집합론의 기초를 세우는 데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110] 그는 집합 사이의 일대일 대응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집합의 크기에 대한 연구로 무한 집합과 정렬 집합을 정의하였다. 대각선 논법을 통해 자연수보다 실수의 개수가 더 많음을 증명하였다.

칸토어는 자연수의 기수와 실수의 기수 사이에 다른 기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연속체 가설을 제안했다.[8] 칸토어는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8] 연속체 가설은 이후 쿠르트 괴델과 폴 코언에 의해 체르멜로-프렝켈 집합론에서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53]

4. 칸토어에 대한 비판과 논쟁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은 발표와 동시에 수학계와 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88] 특히 레오폴트 크로네커는 칸토어의 이론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인물 중 하나였다. 구성주의를 신봉했던 크로네커는 칸토어의 비구성적 증명 방식, 즉 실무한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74] 그는 칸토어의 증명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대신 구성적 증명을 통해 직접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크로네커의 비판은 단순히 학문적인 차원을 넘어 칸토어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크로네커는 칸토어를 "청년들을 타락시키는 자"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칸토어의 연구가 수학계에 해악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극심한 비판은 칸토어에게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었고, 우울증 증세를 악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직관주의적 입장을 취한 L. E. J. 브라우어와 앙리 푸앵카레와 같은 수학자들도 칸토어의 이론에 반대했다.[75][76] 직관주의자들은 수학적 실체가 논리적 명제로 환원될 수 없고 마음의 직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하며 칸토어의 논증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였다.[7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칸토어의 대각선 논증이 집합의 내포(intension)과 외연(extension)을 혼동했다고 비판했다.

칸토어의 이론은 수학계를 넘어 철학계와 종교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은 칸토어의 연구가 신의 절대 무한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판했다.[1] 특히 네오토미스트 사상가들은 칸토어의 실무한 개념이 신의 유일성을 위협한다고 간주했다.[77] 그러나 칸토어는 자신의 이론이 무한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초한수가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1][78] 칸토어는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여러 기독교 철학자들과 신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적극적으로 소통했다.[83][84]

이러한 격렬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칸토어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수학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86] 수학적 개념이 내적 모순 없이 기존의 정의와 공리, 정리에서 비롯되기만 한다면 자유롭게 도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토어의 이론은 당시에는 많은 비판과 논쟁에 직면했지만, 현대 수학에서는 그 중요성을 확고히 인정받고 있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만들어낸 낙원에서 쫓아낼 수 없다"라고 선언하며 칸토어의 업적을 옹호했다. 칸토어의 초한수 이론은 현대 집합론의 기초가 되었으며, 해석학, 위상수학 등 다양한 수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철학 및 종교적 관점

게오르크 칸토어는 자신의 수학적 견해가 철학적, 신학적 함의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69][70] 그는 절대 무한(absolute infinite)을 신과 동일시했으며,[70] 초한수에 대한 자신의 연구가 신으로부터 직접 전달받은 것이라고 믿었다.[1]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칸토어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이 과학 철학을 형성했다고 보았다.[71] 조셉 다우벤(Joseph Dauben)은 칸토어의 기독교적 신념이 초한 집합론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추적했다.[72][73]

칸토어는 자신의 초한수 이론이 유물론결정론에 반대한다고 믿었으며,[79] 자신의 철학이 자연에 대한 "유기적인 설명"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80] 그는 프리드리히 아돌프 트렌델렌부르크(Friedrich Adolf Trendelenburg)의 영향을 받았으며,[81][82]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고자 했다.[80]

칸토어는 자신의 집합론의 철학적 함의에 대해 여러 철학자 및 신학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83] 틸만 페슈(Tilman Pesch), 요셉 혼트하임(Joseph Hontheim)과 같은 기독교 철학자들,[83] 요한 바티스트 프란첼린(Johann Baptist Franzelin) 추기경,[84] 레오 13세 등과 소통하며 자신의 이론을 변호하고 설득하려 노력했다.[85]

칸토어는 수학의 자유를 옹호하며, 수학적 개념은 내적 모순이 없고 기존의 정의, 공리, 정리에서 비롯된다면 자유롭게 도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신념을 요약했다.[86] 이러한 생각은 에드문트 후설의 생각과 유사한 점이 있다.[87]

한편, 칸토어는 무한소를 "혐오스러운 것"이자 "수학의 콜레라 바실루스"라고 묘사하며 격렬하게 반대했다.[38] 그는 자신의 생각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며,[88]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강하게 거부했다.[89]

6. 주요 저서


  • 1874년 Journal für die Reine und Angewandte Mathematik에 〈모든 실수 대수적 수의 집합의 한 성질에 관하여〉(Ueber eine Eigenschaft des Inbegriffes aller reellen algebraischen Zahlen)를 발표하였다.
  • 1878년 Journal für die Reine und Angewandte Mathematik에 〈다양체 이론에 대한 기여〉(Ein Beitrag zur Mannigfaltigkeitslehre)를 발표하였다.
  • 1879년~1884년 사이에는 〈무한 선형 점다양체〉(Ueber unendliche, lineare Punktmannichfaltigkeiten)를 6편의 논문으로 나누어 Mathematische Annalen에 발표하였다.
  • 1891년 Jahresbericht der Deutschen Mathematiker-Vereinigung에 〈다양체 이론의 한 기본적인 문제에 관하여〉(Ueber eine elementare Frage der Mannigfaltigkeitslehre)를 발표하였다.
  • 1895년과 1897년에는 Mathematische Annalen에 2부작 논문 〈초한 집합론의 기초에 대한 기여〉(Beiträge zur Begründung der transfiniten Mengenlehre)를 발표하였다.
  • 1932년 에른스트 체르멜로가 편집한 칸토어의 수학 및 철학 논문 전집이 출판되었다. 이 전집에는 데데킨트와의 서신 내용과 프렝켈이 쓴 칸토어 전기가 부록으로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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