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데데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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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하르트 데데킨트는 1831년 독일에서 태어난 수학자이다. 그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베를린 대학교에서 사강자격을 취득했으며,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와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데데킨트는 무한집합에 대한 정의와 자연수의 공리적 기초를 제시하고, 데데킨트 절단 개념을 개발하여 실수를 정의하는 등 수학 기초론과 집합론에 기여했다. 또한, 페터 구스타프 르장 디리클레,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베른하르트 리만의 저작을 편집하고, 아이디얼 이론을 발전시키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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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데데킨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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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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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율리우스 빌헬름 리하르트 데데킨트 |
출생 | 1831년 10월 6일 |
출생지 |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브라운슈바이크 |
사망 | 1916년 2월 12일 |
사망지 | 독일 제국 브라운슈바이크 |
국적 | 독일 |
학문 분야 | |
분야 | 수학 수학철학 |
출신 대학 | 괴팅겐 대학교 |
지도 교수 |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
주요 업적 | 데데킨트 절단 추상대수학 대수적 수론 데데킨트 에타 함수 데데킨트 제타 함수 데데킨트 군 |
알려진 업적 | 데데킨트 절단 데데킨트-페아노 공리 데데킨트의 정리 추상대수학 대수적 수론 실수 논리주의 |
근무 기관 | 괴팅겐 대학교 취리히 공과대학교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 |
모교 | 콜레기움 카롤리눔 괴팅겐 대학교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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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율리우스 레빈 울리히 데데킨트와 카롤리네 헨리에테 데데킨트의 아들로,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활동하고 사망했다.[1] 그의 유해는 브라운슈바이크 중앙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1848년 카롤리눔에 입학하여 수학했으며, 1850년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가우스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1852년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베를린 대학교에서 2년간 유학하며 리만과 교류했고, 1854년 두 사람 모두 사강자격을 취득했다. 이후 괴팅겐에서 사강사로 활동하며 드리클레와 깊은 학문적 우정을 쌓았다.
1858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으며, 1862년 모교인 카롤리눔이 공과대학으로 승격하자 브라운슈바이크로 돌아와 은퇴할 때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1894년 은퇴 후에도 간헐적으로 강의를 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데데킨트는 기초 해석학의 산술화와 현대 대수적 정수론을 구축한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는 환, 가군, 이데알, 체, 벡터 공간 등 현대 대수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창안했으며, 특히 실수의 엄밀한 정의를 위해 도입한 '데데킨트 절단' 개념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10] 또한 괴팅겐 대학교에서 갈루아 이론에 관한 최초의 강의를 진행했으며,[9] 『수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어야 하는가』(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de, 1888년)를 통해 자연수론의 공리적 기초를 마련하려는 선구적인 시도를 했다.[11] 가우스, 드리클레, 리만 등 저명한 수학자들의 저작 편집자로도 활동했으며,[12] 칸토어와의 교류는 초기 집합론 발전에 기여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여동생 줄리아와 함께 살았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널리 인정받아 베를린 학사원(1880년), 로마 학술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900년)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오슬로 대학교, 취리히 대학교,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리하르트 데데킨트의 아버지는 카롤리눔(Collegium Carolinum)의 행정관인 율리우스 레빈 울리히 데데킨트였고, 어머니는 카롤리눔 교수의 딸인 카롤리네 헨리에테 데데킨트였다.[1] 리하르트 데데킨트는 세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율리우스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1848년 카롤리눔에 입학했고, 1850년에는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학업을 이어갔다. 괴팅겐에서 데데킨트는 모리츠 슈테른 교수에게 정수론을 배웠다. 당시 가우스도 괴팅겐에서 강의하고 있었지만 주로 초급 수준이었고, 데데킨트는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1852년, 데데킨트는 "오일러 적분 이론에 관하여"(Über die Theorie der Eulerschen Integralede)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데데킨트의 후속 연구에서 드러난 재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당시 독일 수학 연구의 주요 시설은 괴팅겐이 아닌 베를린 대학교였기에, 데데킨트는 2년간 베를린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그는 베른하르트 리만과 동시대인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1854년에 사강자격(habilitation)을 취득했다. 이후 데데킨트는 괴팅겐으로 돌아와 사강사(Privatdozent)로서 확률론과 기하학을 강의했다. 그는 드리클레와 함께 공부하며 좋은 친구가 되었다. 자신의 수학적 지식의 부족함을 느껴 타원함수와 아벨 함수를 공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괴팅겐에서 갈루아 이론에 관한 강의를 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으며, 이 무렵 대수와 산술에서 군 개념의 중요성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2. 2. 학문적 경력
1848년 카롤리눔에 입학했고, 1850년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모리츠 슈테른 교수에게서 정수론을 배웠다. 당시 괴팅겐에는 가우스도 있었지만 주로 초급 강의를 했고, 데데킨트는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1852년 "오일러 적분 이론에 관하여"(Über die Theorie der Eulerschen Integralede)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당시 독일 수학 연구의 중심지는 베를린 대학교였기에, 데데킨트는 1852년부터 2년간 베를린에서 유학하며 리만과 교류했다. 두 사람은 1854년 함께 사강자격(habilitation)을 취득했다. 이후 데데킨트는 괴팅겐으로 돌아와 사강사(Privatdozent)로서 확률론과 기하학을 가르쳤다. 그는 드리클레와 함께 공부하며 깊은 우정을 쌓았고, 수학적 지식의 부족함을 느껴 타원함수와 아벨 함수 등을 연구했다. 특히 1855년에는 괴팅겐 대학교에서 갈루아 이론에 관한 최초의 강의를 진행했으며,[9] 대수와 산술에서 군 개념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한 선구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1858년에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 당시 Polytechnic)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62년, 그의 모교인 카롤리눔이 공과대학(Technische Hochschule, 현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으로 승격되자 고향 브라운슈바이크로 돌아와 평생 그곳에 머물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1894년에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가끔 강의를 하거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등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데데킨트는 기초 해석학의 산술화와 현대 대수적 정수론을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수학자이다. 그는 환, 가군, 이데알, 체, 벡터 공간 등 현대 대수학의 핵심 개념들을 창안했다. 또한 가우스, 드리클레, 리만의 저작을 편집하기도 했다. 자신이 편집한 드리클레의 『정수론 강의』 제2판 부록에서는 이데알의 기초를 제시했다. 실수의 엄밀한 정의를 위해 도입한 '데데킨트 절단(Schnitt)' 개념은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으며, 이는 『연속성과 무리수』(Stetigkeit und irrationale Zahlende, 1872년)에서 발표되었다.[10] 또한 『수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어야 하는가』(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de, 1888년)에서는 '사슬(Kette)' 개념을 통해 자연수론의 공리적 기초를 마련하고자 한 선구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11] 데데킨트와 칸토어의 교류는 초기 집합론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리만의 친구로서, 리만 사후 그의 전기를 집필했다.[12]
그는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베를린(1880년)과 로마 학술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900년)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오슬로 대학교, 취리히 대학교,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3. 개인적인 삶
데데킨트의 아버지는 카롤리눔(Collegium Carolinum) 행정관인 율리우스 레빈 울리히 데데킨트(Julius Levin Ulrich Dedekind)였고, 어머니는 카롤리눔 교수의 딸인 카롤리네 헨리에테 데데킨트(Caroline Henriette Dedekind, née Emperius)였다.[1] 리하르트 데데킨트는 세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성인이 된 후에는 율리우스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살다가 사망하였고, 그의 유해는 브라운슈바이크 중앙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그는 1848년 카롤리눔에 입학한 후 1850년 괴팅겐 대학교로 편입하였다. 그곳에서 데데킨트는 모리츠 슈테른(Moritz Stern) 교수에게서 정수론을 배웠다. 당시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도 강의를 하고 있었지만, 주로 초급 수준이었고 데데킨트는 그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데데킨트는 1852년 "Über die Theorie der Eulerschen Integrale|오일러 적분 이론에 관하여de"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의 후속 연구에서 드러난 재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당시 독일 수학 연구의 주요 시설은 괴팅겐이 아닌 베를린 대학교였기에, 데데킨트는 2년간 베를린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그는 베른하르트 리만과 동시대인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1854년에 사강사 자격(Habilitationde)을 취득했다. 데데킨트는 괴팅겐으로 돌아와 사강사(Privatdozentde)로서 확률론과 기하학을 강의했다. 그는 페터 구스타프 르장 드리클레와 함께 공부하며 좋은 친구가 되었고, 그의 수학적 지식 부족으로 인해 타원함수와 아벨 함수를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괴팅겐에서 갈루아 이론에 관한 강의를 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이 무렵 대수와 산술에서 군 개념의 중요성을 이해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1858년, 그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당시 Polytechnic)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62년 카롤리눔이 공과대학(Technische Hochschulede)으로 승격되자 데데킨트는 고향 브라운슈바이크로 돌아와 남은 생애 동안 그곳에서 강의했다. 그는 1894년에 은퇴했지만, 이후에도 가끔 강의를 하고 연구 결과를 계속 발표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여동생 줄리아와 함께 살았다.
데데킨트는 베를린 학사원(1880년)과 로마 학사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900년)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오슬로 대학교, 취리히 대학교,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4. 학문적 교류
데데킨트는 학문 활동 과정에서 당대의 여러 중요한 수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괴팅겐 대학교에서는 가우스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고, 모리츠 슈테른에게서 정수론을 배웠다. 이후 2년간 베를린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리만과 동시대인으로 지냈고, 두 사람은 1854년 함께 사강자격(habilitation)을 얻었다.괴팅겐으로 돌아와 사강사(Privatdozent|프리바트도첸트deu)로 활동할 당시에는 디리클레와 함께 공부하며 깊은 우정을 쌓았다. 데데킨트는 디리클레의 『정수론 강의』를 편집하고 제2판 부록에서 이데알의 기초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괴팅겐에서 갈루아 이론에 관한 최초의 강의를 진행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9]
리만과는 친구로서 깊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리만 사후에는 그에 대한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12] 데데킨트와 칸토어의 교류는 초기 집합론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가우스, 디리클레, 리만의 저서를 편집하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널리 인정받아 베를린 학사원(1880년), 로마 학사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900년)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오슬로 대학교, 취리히 대학교, 브라운슈바이크 공과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주요 업적
리하르트 데데킨트는 해석학의 기초를 다지고 현대 대수적 정수론을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 수학자이다. 그는 환, 가군, 이데알, 체, 벡터 공간 등 추상대수학의 여러 중요한 개념을 창안하거나 발전시켰다.
데데킨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다.
- 데데킨트 절단: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미적분학을 가르치면서 실수의 연속성을 엄밀하게 정의하기 위해 '데데킨트 절단'(Schnittde) 개념을 도입했다.[2] 이는 무리수를 포함한 실수를 유리수의 집합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정의한 것으로, 현대 해석학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개념이다. 그는 이 내용을 1872년 『연속성과 무리수』(Stetigkeit und irrationale Zahlende)라는 소책자에서 발표했다.[2][10]
- 이데알 이론: 드리슐레의 정수론 연구를 깊이 이해하고 발전시켜 대수적 수체와 이데알 이론을 정립했다. 그는 자신이 편집한 드리슐레의 『Vorlesungen über Zahlentheorie|정수론 강의de』 제2판(1871년) 이후의 판본 부록에서 환론의 핵심 개념인 이데알을 소개했다. 이는 쿰머의 '이상수' 개념을 일반화한 것으로, 이후 힐베르트와 에미 뇌터 등에 의해 더욱 발전하여 현대 대수학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1882년에는 하인리히 마르틴 베버와 함께 이데알 이론을 리만 곡면에 적용하여 리만-로흐 정리에 대한 대수적 증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 집합론과 수학 기초론: 무한집합에 대한 최초의 엄밀한 정의를 제시했다. 그는 어떤 집합이 자신의 진부분집합과 일대일 대응이 가능할 때 그 집합을 무한집합으로 정의했다.[5] 이는 집합론의 창시자인 칸토어의 연구를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888년 발표한 『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수란 무엇이며 무엇에 쓰이는가?de』[6]에서 자연수를 공리적으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했는데, 이는 이듬해 주세페 페아노가 발표한 페아노 공리의 기초가 되었다.[11]
이 외에도 데데킨트는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 가우스, 드리슐레, 리만 등 위대한 수학자들의 저작을 편집하고 출판하여 후대에 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드리슐레의 『정수론 강의』는 데데킨트가 내용을 대폭 보충하고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855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갈루아 이론에 관한 최초의 강의를 했다.[9]
- 1900년경에는 모듈러 격자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며 격자 이론 연구에도 기여했다.
- 1872년 인터라켄에서 칸토어를 만나 평생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그는 칸토어의 혁신적인 집합론 연구를 초기부터 지지했으며, 레오폴트 크로네커와 같은 비판자들로부터 칸토어를 옹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7] 이러한 교류는 초기 집합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친구였던 리만의 사후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다.[12]
3. 1. 데데킨트 절단
데데킨트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미적분학을 가르치면서 실수를 엄밀하게 정의하기 위한 방법으로 데데킨트 절단(Schnittde)이라는 개념을 개발했다.[2] 이는 현대적인 실수 정의의 표준 중 하나로 여겨진다.데데킨트 절단은 유리수 전체의 집합 를 다음 조건을 만족하는 두 개의 비어있지 않은 부분집합 A와 B로 분할하는 것이다.
# 모든 유리수는 A 또는 B 둘 중 하나에 반드시 속한다 ().
# A와 B는 서로소이다 ().
# A에 속하는 모든 원소는 B에 속하는 모든 원소보다 작다 ().
# 집합 A에는 가장 큰 원소(최댓값)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유리수 집합을 나누면, 두 집합 A와 B의 '경계'가 생기게 된다. 이 경계는 특정 실수에 해당하며, 유리수일 수도 있고 무리수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2의 제곱근 ()은 데데킨트 절단을 이용해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이는 제곱이 2보다 작은 모든 음이 아닌 유리수를 하나의 집합(A)으로, 제곱이 2보다 큰 모든 양의 유리수를 다른 집합(B)으로 나누는 방식이다.
- 집합 A: 음수이거나, 제곱했을 때 2보다 작은 모든 유리수 ()
- 집합 B: 제곱했을 때 2보다 크거나 같은 모든 양의 유리수 ()
이 경우, 집합 A에는 최댓값이 존재하지 않으며, 두 집합의 경계는 무리수인 에 해당한다.
데데킨트 절단 개념은 수직선 위에 유리수와 무리수가 빈틈없이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다는 실수의 연속성 또는 완비성(독일어: Vollständigkeitde)을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수직선 상의 모든 점은 유리수 또는 무리수 중 하나에 대응하며, 그 사이에 어떠한 빈틈이나 불연속적인 부분도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데데킨트는 이러한 절단 개념과 무리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1872년에 발표한 소책자 『연속성과 무리수』(Stetigkeit und irrationale Zahlende)에서 상세히 설명하며 해석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2][10]
3. 2. 이데알 이론
데데킨트는 르장 드리슐레, 가우스, 리만의 저작을 편집했다. 특히 르장 드리슐레의 연구에 대한 데데킨트의 깊은 이해는 그를 대수적 수체와 이데알 이론 연구로 이끌었다.1863년, 데데킨트는 르장 드리슐레의 정수론 강의를 Vorlesungen über Zahlentheorie|정수론 강의d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비록 이 책이 드리슐레의 강의에 바탕을 두고 데데킨트 자신도 평생 드리슐레의 책으로 언급했지만, 에드워즈(1983)에 따르면 책 자체는 대부분 드리슐레 사후 데데킨트에 의해 전적으로 쓰여졌다고 평가된다. 이후 1879년판과 1894년판 ''Vorlesungen''의 부록에서 데데킨트는 환론의 기본 개념인 이데알의 개념을 소개했다. (훗날 힐베르트가 도입한 '환'이라는 용어는 데데킨트의 저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편집한 디리클레의 『정수론 강의』 제2판 부록에서 이데알의 기초를 제시한 것이다.
데데킨트는 이데알을 정수 계수를 갖는 다항 방정식을 만족하는 대수적 정수들로 구성된 수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정의했다. 이 개념은 쿰머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1843년에 고안했던 '이상수'(ideal number)를 일반화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데데킨트는 쿰머의 중요한 학문적 후계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데데킨트가 정립한 이데알 개념은 이후 힐베르트와 특히 에미 뇌터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데데킨트는 이데알 개념을 응용하기도 했다. 1882년 발표한 논문에서 그는 하인리히 마르틴 베버와 함께 이데알 이론을 리만 곡면에 적용하여 리만-로흐 정리에 대한 대수적 증명을 제시했다.
3. 3. 집합론과 무한집합
데데킨트는 두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할 때 두 집합을 "유사하다"고 정의했다.[3] 그는 이 유사성 개념을 이용하여 무한집합에 대한 최초의[4] 정확한 정의를 제시했다. 어떤 집합이 "자신의 진부분집합과 유사하다면"[5], 즉 자신과 원소 개수가 같은 진부분집합을 가진다면 그 집합은 무한 집합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수의 집합 '''N'''은 각 원소를 제곱한 수들의 집합(이는 '''N'''의 진부분집합이다)과 아래와 같이 일대일 대응이 가능하므로 유사함을 보일 수 있다. ('''N'''에서 '''N'''2으로의 대응):'''N''' 1 2 3 4 5 6 7 8 9 10 ...
↓
'''N'''2 1 4 9 16 25 36 49 64 81 100 ...
데데킨트의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집합론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게오르크 칸토어의 연구를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찬가지로, 수학 기초론에 대한 그의 공헌은 고틀로프 프레게와 버트런드 러셀과 같은 논리주의의 주요 지지자들의 후속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다.
1888년 그는 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바스 진트 운트 바스 졸렌 디 찰렌?de("수란 무엇이며 무엇에 쓰이는가?"[6])라는 제목의 짧은 단행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무한 집합에 대한 그의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또한 이 책에서 숫자 1과 후임자 함수를 원시 개념으로 하는 자연수에 대한 공리적 기초를 제안했는데, 이는 이듬해 주세페 페아노가 데데킨트를 인용하며 공식화한, 현재 표준으로 사용되는 페아노 공리의 선구가 되었다.
데데킨트는 1872년 인터라켄에서 휴가 중 게오르크 칸토어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상호 존중하는 오랜 관계가 시작되었고, 데데킨트는 칸토어의 무한 집합에 관한 연구를 높이 평가한 최초의 수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칸토어의 초한수 개념에 철학적으로 반대했던 레오폴트 크로네커와의 논쟁에서 칸토어의 편에 서서 귀중한 동맹이 되어주었다.[7] 데데킨트와 게오르크 칸토어와의 교류는 초기 집합론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4. 자연수의 공리화
1888년 데데킨트는 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바스 진트 운트 바스 졸렌 디 찰렌?de("수란 무엇이며 무엇에 쓰이는가?")[6]라는 제목의 짧은 단행본을 발표했다. 이 책에는 무한집합에 대한 그의 정의와 더불어 자연수에 대한 공리적 기초가 제시되어 있다. 그는 숫자 1과 후속자 함수(successor function)를 원시 개념으로 삼아 자연수론의 기초를 세우고자 했다.[11] 이는 자연수론을 공리적으로 기술하려 한 선구적인 시도였다. 이듬해인 1889년, 주세페 페아노(Giuseppe Peano)는 데데킨트의 연구를 인용하여, 현재 표준으로 사용되는 동등하면서도 더 간결한 형태의 페아노 공리(Peano axioms)를 공식화했다.4. 저작
데데킨트는 르장 드리슐레, 가우스, 리만의 저작을 편집했으며, 특히 르장 드리슐레의 연구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를 대수적 수체와 이상 개념 연구로 이끌었다. 1863년에는 르장 드리슐레의 정수론 강의를 ''Vorlesungen über Zahlentheorie|정수론 강의d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은 데데킨트 자신이 상당 부분을 직접 저술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879년판과 1894년판 ''정수론 강의''에는 환론의 기본 개념인 이상 개념을 소개하는 부록을 추가했다. 데데킨트는 이상(ideal)을 정수 계수를 갖는 다항식 방정식을 만족하는 대수적 정수로 구성된 수 집합의 부분집합으로 정의했다. 이 개념은 이후 힐베르트와 에미 뇌터에 의해 더욱 발전했으며, 쿠머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려는 시도에서 고안한 이상수(ideal number)를 일반화한 것이다.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에서 미적분학을 강의하면서 실수의 표준적인 정의인 데데킨트 절단(독일어: Schnittde) 개념을 개발했다. 그는 1872년 발표한 소책자 ''Stetigkeit und irrationale Zahlen|연속성과 무리수de''[2]에서 무리수와 데데킨트 절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여, 실수의 완비성(독일어: Vollständigkeitde) 개념을 명확히 했다.[10]
1888년에는 ''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수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de''[6]라는 짧은 단행본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두 집합 사이에 일대일 대응이 존재할 때 두 집합이 '유사하다'고 정의하고,[3] 이를 이용해 무한 집합을 '자신의 진부분집합과 유사한 집합'[5]으로 최초로[4] 정확히 정의했다. 또한 이 책에서 자연수에 대한 공리적 기초(숫자 1과 후계자 함수)를 제안했으며,[11] 이는 주세페 페아노가 후에 페아노 공리를 공식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1882년에는 하인리히 마르틴 베버와 공동으로 이상(ideal) 개념을 리만 곡면에 적용하여 리만-로흐 정리에 대한 대수적 증명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1900년경에는 모듈러 격자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저술했다.
또한, 1855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갈루아 이론에 관한 최초의 강의를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9]
주요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영어로 번역된 주요 저술'''
연도 | 제목 | 비고 |
---|---|---|
1890 | "케퍼슈타인에게 보낸 편지" | 장 반 헤이제누르트 편집, 수리 논리학 원전, 1879–1931 (1967) 수록, pp. 98–103. |
1963 (1901) | 수론에 관한 에세이 | W. W. Beman 편집 및 번역. Stetigkeit und irrationale Zahlende 및 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de 영어 번역본 포함. |
1996 | 대수적 정수론 | 존 스틸웰 편집 및 번역. Über die Theorie der ganzen algebraischen Zahlende 번역본. |
1996 | 칸트에서 힐베르트까지: 수학 기초에 관한 원전집, 2권 | 윌리엄 B. 에월드 편집. 다음 내용 포함: |
'''독일어로 된 주요 저술'''
참조
[1]
서적
Remarkable Mathematici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2]
서적
From Kant to Hilbert: A Source Book in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http://www.math.ru.n[...]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3]
서적
Essays on the Theory of Numbers
https://books.google[...]
Dover
1963
[4]
서적
Zermelo's Axiom of Choice
Springer
1982-11-17
[5]
서적
Essays on the Theory of Numbers
https://books.google[...]
Dover
1963
[6]
서적
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
http://www.digibib.t[...]
Vieweg
[7]
서적
The Mystery of the Aleph: Mathematics, the Kabbalah, and the Search for Infinity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8]
학술지
Book Review: ''Richard Dedekind. Gesammelte mathematische Werke''
[9]
서적
ガロア理論入門
http://www.chikumash[...]
筑摩書房
[10]
서적
数について――連続性と数の本質――
http://www.iwanami.c[...]
岩波書店
1961-11-16
[11]
서적
数について――連続性と数の本質――
http://www.iwanami.c[...]
岩波書店
1961-11-16
[12]
서적
リーマン論文集
朝倉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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