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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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0년은 다양한 연호가 사용되었으며, 주요 사건들로 특징지어진 해이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브린디시 협정을 통해 세력권을 분할했고, 폼페이우스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점령했다. 아시아에서는 파르티아가 시리아와 유대 지역을 침공했으며, 헤로데 대왕은 로마로 도망쳐 유대 왕으로 칭해졌다. 한나라에서는 《급취편》이 출판되었고, 이고도미고도 왕국이 설립되었다. 또한, 철학자 아테노도로스가 아테네에서 폴터가이스트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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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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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0년 | |
연대 | 기원전 40년대 |
세기 | 기원전 1세기 |
주요 사건 | |
사건 | 헤롯이 유대의 왕이 됨. 로마가 세르디카 (현재의 소피아)를 점령함. |
출생 | |
출생 |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딸 (대략적인 날짜) |
사망 | |
사망 | 아시아티쿠스 (기원전 45년 집정관), 로마의 원로원 의원 포시오, 로마의 조각가 |
2. 연호
3. 기년
4. 사건
-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린디시 협정을 맺어 로마 공화국의 세력권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었다. 이 조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소의 결혼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으로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선출되었다.
-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안티오키아에서 만났다.
-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쓰기 시작했다.
- 집정관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였다.
- 페루시아 공방전에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루키우스의 생명은 보존되었지만, 시민들은 사형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다. 풀비아는 시키온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 봄,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는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의 사망 후 11개 로마 군단을 지휘하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진군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라우디아와 이혼하고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
- 5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사망하여 옥타비아 소가 과부가 되었고, 그녀는 나중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결혼하게 되었다.
-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메나스를 파견하여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총독 마르쿠스 루리우스를 몰아냈다. 섹스투스는 브루티움의 코센차와 루카니아의 투리를 포위하고 기병대를 동원하여 영토를 약탈했다.
- 섹스투스의 함대는 푸테올리와 오스티아 항구를 습격했다. 민중들은 삼두정을 전쟁 연장의 책임자로 여겨 포룸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친위대와 함께 폭동을 진압하려다 안토니우스가 부하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기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 브룬디시움 조약에 따라 삼두정은 로마 공화국을 세력권으로 분할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라 칭하며 서부 속주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동부 속주를 장악했으며, 일리리쿰과 마케도니아 속주의 경계인 드린 강이 국경선이 되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통치하게 되었다.[1]
-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킬리키아를 점령하고 군대와 함께 아나톨리아로 진격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알라반다와 밀라사는 예외였다. 파르티아는 자신들의 영토를 옛 아케메네스 제국의 경계에 거의 가깝게 회복시켰다. 라비에누스는 스스로를 소아시아의 "파르티아 황제"라고 선포했다.[1]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페니키아로 가던 중 페루시아의 결과를 전해 듣고 아테네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대사들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항해했다.
- 오기소 이고도는 서아프리카의 이케디온웨어 의회를 해산하고, 해산된 의회와 오디보-오기소 그룹 구성원으로 왕립 의회를 설립했다. 그는 통합 영토를 이고도미고도로 명명하고 수도를 우그베쿤에 두었다.[1]
- 파코루스 1세는 퀸투스 라비에누스의 도움을 받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를 침공했다. 수도 안티오크는 항복하고 파르티아는 페니키아와 유대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함대가 없어 요새화된 도시인 티레를 포위하지 못했다.[1]
- 파르티아는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히르카누스 2세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안티고노스 2세가 파르티아의 지배하에 유대 왕이 되었다. 헤로데 대왕은 로마로 예루살렘을 탈출했다. 그곳에서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칭해졌다.[1]
- 이 해 한나라에서 출판된 사전인 《급취편》은 수력으로 작동되는 트립 해머 장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4. 1. 로마 공화정
- 기원전 40년 브린디시 협정을 통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공화국의 세력권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었다. 이 조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소의 결혼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 브룬디시움 조약에 따라 삼두정은 로마 공화국을 세력권으로 분할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라 칭하며 서부 속주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동부 속주를 장악했으며, 일리리쿰과 마케도니아 속주의 경계인 드린 강이 국경선이 되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통치하게 되었다.[1]
- 페루시아 공방전에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했다. 루키우스의 생명은 보존되었지만, 시민들은 사형되거나 노예로 팔려나갔다. 풀비아는 시키온으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는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의 사망 후 11개 로마 군단을 지휘하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로 진군했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라우디아와 이혼하고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
- 5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사망하여 옥타비아 소가 과부가 되었고, 그녀는 나중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결혼하게 되었다.
-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메나스를 파견하여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총독 마르쿠스 루리우스를 몰아냈다. 섹스투스는 브루티움의 코센차와 루카니아의 투리를 포위하고 기병대를 동원하여 영토를 약탈했다.
- 섹스투스의 함대는 푸테올리와 오스티아 항구를 습격했다. 민중들은 삼두정치를 전쟁 연장의 책임자로 여겨 포룸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옥타비아누스는 친위대와 함께 폭동을 진압하려다 안토니우스가 부하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기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
-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안티오키아에서 만났다.
4. 2. 아시아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린디시 협정을 맺어 로마 공화국의 세력권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동부 속주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부 속주를 차지했으며, 일리리쿰과 마케도니아 속주의 경계인 드린 강이 국경선이 되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소(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의 결혼으로 확정되었다.[1],같은 해, 한나라에서는 전한 원제 시대에 황문령을 지낸 史游|사유중국어가 저술한 사전인 《급취편》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수력으로 작동되는 트립 해머 장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서아프리카에서는 오기소 이고도가 이케디온웨어 의회를 해산하고 왕립 의회를 설립하여 통합 영토를 이고도미고도로 명명하고 수도를 우그베쿤에 두었다.[1]
4. 2. 1.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안티오키아에서 만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페니키아로 가던 중 페루시아의 결과를 전해 듣고 아테네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대사들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항해한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클레오파트라 5세를 퇴위시켰다.4. 2. 2. 파르티아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킬리키아를 점령하고 군대와 함께 아나톨리아로 진격한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알라반다와 밀라사는 예외였다. 파르티아는 자신들의 영토를 옛 아케메네스 제국의 경계에 거의 가깝게 회복시킨다. 라비에누스는 스스로를 소아시아의 "파르티아 황제"라고 선포한다.[1]파코루스 1세는 퀸투스 라비에누스의 도움을 받아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를 침공한다. 수도 안티오크는 항복하고 파르티아는 페니키아와 유대 지역을 점령한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함대가 없어 요새화된 도시인 티레를 포위하지 못한다.[1]
파르티아는 예루살렘을 정복한다. 히르카누스 2세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안티고노스 2세가 파르티아의 지배하에 유대 왕이 된다. 헤로데 대왕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도망쳐 그곳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로부터 유대 왕의 지위를 받는다.[1]
4. 2. 3. 중국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린디시 협정을 통해 세력권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었다. 같은 해 한나라에서 출판된 사전인 《급취편》은 수력으로 작동되는 트립 해머 장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다. 전한 원제 시대에 황문령을 지낸 史游|사유중국어가 급취편을 저술하였다.4. 2. 4. 이고도미고도 왕국
오기소 이고도는 서아프리카의 이케디온웨어 의회를 해산하고, 해산된 의회와 오디보-오기소 그룹 구성원으로 왕립 의회를 설립했다. 그는 통합 영토를 이고도미고도로 명명하고 수도를 우그베쿤에 두었다.[1]4. 2. 5. 기타 지역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린디시 협정을 맺어 세력권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었다.[1]
- 브룬디시움 조약으로 삼두정은 로마 공화국을 세력권으로 분할하는 데 합의하였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라 칭하고 서부 속주를 장악했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동부 속주를 받았다. 일리리쿰과 마케도니아 속주의 경계인 드린 강이 국경선이 되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 속주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 조약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소(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의 결혼으로 확정되었다.
- 철학자 아테노도로스는 아테네에서 유령을 만났는데, 이 이야기는 역사상 최초의 폴터가이스트 이야기 중 하나로 꼽힌다.
5. 탄생
6. 사망
- 풀비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 (기원전 77년 출생)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로마 집정관 (기원전 88년 출생)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미노르: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 의원(기원전 88년 출생)[1]
-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 로마 장군이자 총독
- 파사엘: 유대 헤로데 왕조의 왕자
- 퀸투스 푸피우스 칼레누스: 로마 장군이자 집정관
- 퀸투스 살비디에누스 루푸스: 로마 장군이자 고문
- 시메온 벤 세타크: 바리새파 학자이자 지도자 (''나시'')
- 티겔리우스: 사르데냐 출신 서정시 시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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