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라 기치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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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자 외교관, 정치가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으로, 1898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에서 복무하며 오스트리아, 독일, 미국 등에서 해군 무관으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주재 해군 무관을 지냈으며,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제3함대 사령관으로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한쪽 눈을 잃었다. 이후 해군 대장으로 진급, 가쿠슈인 원장을 거쳐 아베 노부유키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역임했다. 1940년 미국 주재 일본 대사로 부임하여 진주만 공격 직전까지 미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태평양 전쟁을 막지 못했다. 전후에는 JVC 사장을 역임하고 참의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CIA와의 협력 의혹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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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기치사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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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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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노무라 기치사부로 |
출생일 | 1877년 12월 16일 |
출생지 |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
사망일 | 1964년 5월 8일 |
사망지 | 도쿄도 신주쿠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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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경력 | |
소속 | 대일본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898년–1937년 |
최종 계급 | 해군 대장 |
지휘 | 야쿠모 제3함대 사령장관 구레 진수부 사령장관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 |
주요 전투 | 상하이 사변 |
훈장 | 공2급 금치훈장 욱일동화대수장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무소속 제17공실 자유민주당 |
직책 | 학습원 원장 외무대신 주미 대사 참의원 의원 추밀고문관 |
외무대신 임기 | 1939년 9월 25일 – 1940년 1월 16일 |
참의원 의원 임기 | 1954년 6월 3일 – 1964년 5월 8일 |
추밀고문관 임기 | 1944년 5월 18일 – 1946년 6월 13일 |
참의원 의원 선거구 | 와카야마현 선거구 |
참의원 의원 당선 횟수 | 2회 |
자유민주당 참의원 의원 회장 | 1956년 ~ 1957년 |
기타 정보 | |
일본어 표기 | 野村 吉三郎 |
로마자 표기 | Nomura Kichisaburō |
2. 어린 시절과 교육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에서 태어났다. 1898년 해군병학교 26기로 입학하여 57명의 동기 중 2등으로 졸업했다. 해군 사관생도로서 코르벳함 히에이와 전함 야시마에서 복무했다. 1900년 1월 12일 소위로 임관했고, 1901년 10월 1일 중위로 진급했다.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전함 미카사에 승선하여 미국으로 항해했다.
3. 해군 군인 시절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출신으로, 1898년 해군병학교 26기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해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7][9] 초기에는 코르벳 히에이, 전함 야시마 등에서 실무를 경험하고 1900년 소위로 임관했다.[19] 러일 전쟁 시기에는 순양함 사이엔과 다카치호에서 항해장으로 복무하는 등 함선 근무와 전쟁 경험을 쌓았다.
1908년부터 오스트리아, 독일, 미국 등에서 해군 주재무관으로 활동하며 풍부한 해외 경험과 넓은 인맥을 구축했다. 특히 미국 주재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도 교류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파리 강화회의와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활동했다.[7][9]
1922년 소장 진급 이후 군령부, 함대 사령관, 해군성 교육국장, 진수부 사령장관 등 해군 내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승진을 거듭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제3함대 사령장관으로 참전했으나,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일으킨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7][9]
부상 회복 후 1933년 해군 대장으로 진급하고 군사참의관 등을 역임하다 1937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현역에서 물러났다.[19]
3. 1. 초기 경력
와카야마현 와카야마시 출신으로, 구 기슈번사 집안에서 태어나 노무라 마사타네(野村正胤)의 양자가 되었다.[7][9] 와카야마 중학교(현 와카야마현립 토인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가이조 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해군예비학교에서 수학한 뒤, 1898년 해군병학교 26기를 57명 중 차석으로 졸업했다.[7][9]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서 1898년 12월부터 코르벳함 히에이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899년 9월에는 전함 야시마로 옮겼다.[19] 1900년 1월 소위로 임관했으며,[19] 1901년 10월 중위로 진급했다.[19] 1901년 5월부터 전함 미카사의 승무원으로 영국에서 일본까지 항해하기도 했다.[19]
1903년 9월 대위로 진급한 후[19] 포함 마야, 코르벳함 곤고, 순양함 토키와 등 여러 함선에서 근무했다.[19] 러일 전쟁 중에는 순양함 사이엔(1904년)과 다카치호(1905년)에서 항해장으로 복무했다. 전쟁 후에는 해군병학교 교관을 거쳐 순양함 하시다테와 치토세의 항해장을 역임했다.
1907년 해군대학교 갑종 과정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나[9], 해외 파견 예산이 확보되면서[9] 1908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주재 해군 주재무관으로 발령받아[9][11] 해군대학교 입교는 취소되었다.[9] 이 때문에 "해군대학교에 간들 누가 나를 가르칠 것인가"라고 호언하며 시험을 보지 않았다는 일화가 퍼지기도 했다.[10][9][10][11] 오스트리아 주재 중인 1908년 9월 소령으로 진급했고,[19] 1910년 5월에는 독일 제국 주재 해군 주재무관이 되었다.[19]
1911년 9월 귀국하여 방호순양함 오토와의 부장을 맡았고,[19] 1913년 2월부터는 해군성 부관 겸 해군대신 비서관으로 근무하며[19] 같은 해 12월 중령으로 진급했다.[19]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14년 12월부터 1918년 6월까지 미국 주재 대사관 부속 해군 주재무관으로 근무했다.[19] 이 시기 해군차관보였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친분을 쌓았다. 미국 체류 중인 1917년 4월 대령으로 진급했다.[19]
1918년 10월 귀국하여 장갑순양함 야쿠모의 함장을 맡았으나,[19] 약 3개월 후인 1919년 2월 파리 강화회의 전권위원 수행원으로 임명되어 군령부로 자리를 옮겼다.[19] 이후 1921년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도 수행원으로 참가했다.[19]
1922년 6월 소장으로 진급했고,[19] 군령부 제3부장, 제1견외함대 사령관(1923년 9월),[19] 해군성 교육국장(1925년 9월),[19] 군령부 차장(1926년 7월) 등 요직을 거쳤다.[19] 1926년 12월 중장으로 진급했다.[19] 1929년 2월에는 연습함대 사령관을 맡았고,[19] 1930년 6월 구레 진수부 사령장관,[19] 1931년 12월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었다.[19]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제3함대 사령장관으로서[19] 양쯔강에서 함포 사격 등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이끄는 상하이 파견군을 지원했다. 사변 종결 직후인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맞아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중상을 입었다.[19] 이 훙커우 공원 의거로 시게미쓰 마모루 공사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다음 달 사망했다.
부상 회복 후 1932년 10월 다시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으로 복귀했다.[19]
3. 2. 해외 주재
1908년 3월 오스트리아 주재 해군 무관으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9월 25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0년에는 독일 주재 해군 무관으로 임지를 옮겼다. 1911년 5월 일본으로 돌아와 순양함 오토와의 함장 등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인 1914년 12월 11일부터 1918년 6월 1일까지는 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 활동했다. 미국 체류 중이던 1917년 4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당시 해군차관 등 해외 정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았다.[7][9]
1918년 귀국 후 잠시 순양함 야쿠모 함장을 맡았으나, 곧 군령부로 복귀하여 베르사유 조약 관련 회의에 참석하는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7][9] 이후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전권수원으로 참가했다.[7][9]
3. 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노무라는 1914년 12월 11일부터 1918년 6월 1일까지 미국 주재 해군 무관으로 활동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인 1917년 4월 1일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순양함 야쿠모의 함장을 맡아 처음으로 함선 지휘관이 되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만에 일본 제국 해군 참모본부로 발령받아, 프랑스에서 열린 베르사유 조약 체결을 위한 평화 회의에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워싱턴에서 열린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 참가했다.
3. 4. 해군 수뇌부
1903년 9월 26일 중위로 진급한 노무라는 포함 마야, 코르벳 콩고, 순양함 도키와 등 여러 함선에서 근무했다. 러일 전쟁 중에는 순양함 사이엔(1904년)과 다카치호에서 1등 항해사로 참전했으며, 전쟁 후에는 순양함 하시다테와 지도세에서 1등 항해사를 지냈다.
해외 경험이 풍부했던 그는 1901년 전함 미카사 인수를 위해 영국으로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190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 주재 일본 공사관 해군 무관으로 파견되었고, 같은 해 9월 25일 해군 소령으로 진급하며 독일 주재 해군 무관이 되었다. 1911년 5월 귀국하여 순양함 오토와의 선임 참모를 지냈고, 1912년 6월부터는 여러 참모직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4년 12월 11일부터 1918년 6월 1일까지는 미국 주재 일본 공사관 해군 무관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군차관 등과 교류했다. 미국 체류 중이던 1917년 4월 1일에는 해군 대좌로 진급했다.
귀국 후 순양함 야쿠모의 함장을 맡아 처음으로 함선 지휘를 경험했으나, 곧 군령부로 발령받아 베르사유 평화 조약 관련 일본 사절단의 일원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이후 워싱턴 회의에도 전권 수행원으로 참가했다.
1922년 6월 1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군령부 제3과장, 제1근거지함대 사령관, 해군성 교육국장, 군령부 차장 등을 역임했다. 1926년 12월 1일에는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1930년 6월 11일에는 구레 진수부 사령장관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노무라는 제3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양쯔강에서 함포 사격 등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이 이끄는 상하이 파견군을 지원했다.
상하이 사변 종결 직후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쇼와 천황의 생일 기념 행사(천장절) 도중, 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단상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가 발생했다.[7][9] 이 사건으로 노무라는 오른쪽 눈을 실명했고,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으며,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고 다음 달 사망했다.
부상에서 회복된 노무라는 1932년 10월부터 다시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을 역임했고, 이듬해인 1933년 3월 1일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같은 해 11월 군사참의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934년에는 훈일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35년 9월 제4함대 사건이 발생하자, 10월 1일 조직된 사찰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8] 노무라는 1937년 현역에서 퇴역했다.
3. 5. 상하이 사변과 훙커우 공원 사건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당시 제3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노무라는 양쯔강 상의 군함을 동원한 함포 사격 등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이 지휘하는 일본 제국 육군의 상하이 파견군을 지원했다.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천황 생일 축하 기념식(천장절) 도중 한국 독립 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단상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노무라는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 당시 함께 있던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중상을 입고 다음 달 사망했으며, 주중 일본 공사였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3. 6. 해군 대장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당시 제3함대 사령장관(당시 해군 중장)이었던 노무라는 양쯔강 상의 군함에서 함포 사격 등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 대장이 이끄는 육군의 상하이 파견군을 지원했다. 사변 종결 후인 같은 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쇼와 천황 생일) 축하 행사장에서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의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노무라는 오른쪽 눈을 실명했고, 함께 있던 시라카와 대장은 중상으로 다음 달 사망했으며, 시게미쓰 마모루 공사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9]
부상에서 회복한 노무라는 1932년 10월 10일부터 다시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을 역임했다.[19] 이듬해인 1933년 3월 1일 해군 대장으로 진급했으며,[19] 같은 해 11월 15일 군사참의관으로 임명되어 1937년 3월 30일까지 재직했다.[19] 1934년에는 훈일등 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을 받았다.
1935년 9월 제4함대 사건이 발생하자, 같은 해 10월 1일 조직된 사찰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8]
노무라는 해군대학교 갑종 과정을 수료하지 않은 드문 해군 대장 중 한 명이다.[9] 쇼와 시대 이후 해군 대장 32명 중 해군대학교 갑종 출신이 아닌 인물은 노무라를 포함해 단 3명뿐이었다.[9] 흔히 노무라가 해군대학교 시험을 보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10][9][11] 실제로는 1907년 해군대학교 갑종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9] 그러나 당시 해군 사관의 해외 파견 예산에 여유가 생겨 노무라가 오스트리아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면서[9][11] 해군대학교 입학이 취소된 것이다.[9]
1937년 4월 6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고, 이후 학습원 원장을 지냈다.[19]
4. 외교관 시절
1940년 11월 27일, 미일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노무라는 호리노우치 켄스케의 후임으로 주미 일본 대사로 임명되었다. 해군 차관보 시절 워싱턴 D.C. 근무 경험이 있었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에 그의 임명에 기대가 모아졌다.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해군 출신인 노무라를 정직한 인물로 여겨 환영했다.
1941년 한 해 동안 노무라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과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주요 쟁점은 중일 전쟁,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대일 석유 금수 조치 등이었으나, 양측 모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노무라는 일본 정부에 미국 측에 의미 있는 양보를 할 것을 거듭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그의 영어 실력이 협상에 다소 걸림돌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14]
1941년 11월 15일, 협상 타결을 위해 외교관 구루스 사부로가 특별 교섭인으로 워싱턴 D.C.에 파견되어 노무라와 함께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구루스가 삼국 동맹 조약 체결 당시 주독 대사였다는 점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에게 불신감을 보였고, 협상은 더욱 어려워졌다. 노무라는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했으나 번번이 만류되었다.[15]
퇴역 제독이었던 노무라와 일본 외무성 대부분은 1941년 12월 7일 감행된 진주만 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공격 당일, 일본에서 발송된 협상 결렬 통보(사실상의 선전포고) 암호 전문의 해독이 대사관 사정으로 지연되어, 노무라는 실제 공격이 시작된 후에야 헐 국무장관에게 문서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비겁한 기습 공격'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받게 되었고, 노무라는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다. 헐 국무장관은 훗날 회고록에서 노무라가 전쟁을 막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고 평가하면서도, 미국 정부는 일본이 노무라를 시간 벌기용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3]
전쟁 발발 후 노무라를 비롯한 일본 외교관들은 미국 내 시설에 억류되었다가, 1942년 8월 20일 억류자 교환선을 통해 일본으로 귀국했다.[4] 귀국 후에는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어 종전 시까지 비공식적인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
4. 1. 가쿠슈인 원장
해군에서 퇴역한 후, 노무라는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가쿠슈인의 원장을 지냈다. 당시 가쿠슈인 원장이었던 아라키 토라사부로(荒木寅三郎)가 사임 의사를 밝혔는데, 3년 뒤 아키히토 황태자의 입학이 예정되어 있어 후임 인선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하이 사변 등에서 군공을 세운 노무라가 후임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1937년 4월 6일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 제16대 가쿠슈인 원장으로 임명되었다.[12] 해군 대장 출신이 가쿠슈인 원장이 된 것은 노무라가 처음이었다. 그는 1939년 10월 7일까지 원장직을 수행했으며, 후임으로는 역시 해군 대장 출신인 야마나시 카츠노신이 임명되었다.4. 2. 외무대신

1939년 8월 말, 예비역 육군대장 아베 노부유키가 총리로 임명되어 내각을 구성할 때, 처음에는 외무대신을 겸임했다. 그러나 정권 출범 직후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국제법에 능통한 외무대신이 필요해졌다. 이에 아베 총리는 해군 시절부터 국제법 연구에 힘써 권위자로 알려진 노무라를 발탁했다. 노무라는 9월 25일 외무대신에 취임했지만, 아베 내각이 3개월 반 만에 총사퇴하면서 짧은 임기를 마쳤다.
이후 미일 관계가 악화되는 가운데, 1941년 1월 노무라는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활용하려는 기대 때문이었다. 노무라는 해군 차관보 시절 워싱턴 D.C. 근무 경험이 있었고,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해군 출신인 노무라를 정직한 인물로 여겨 그의 임명을 환영했다.
1941년 한 해 동안 노무라 대사는 미국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코델 헐 미국 국무장관과 협상을 벌였다. 주요 쟁점은 중일 전쟁,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대일 석유 금수 조치 등이었다. 노무라는 미국에 의미 있는 양보를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본국 정부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미국 측 역시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노무라는 영어 구사 능력이 유창하지 않아 미국 정부 요인과의 외교 협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4]

일본의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미국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일본 외무성은 1941년 11월 15일, 주독일 대사를 지낸 외교관 구루스 사부로를 특별 교섭인으로 워싱턴 D.C.에 파견했다. 이로써 두 명의 대사가 함께 헐 국무장관과 전쟁 회피를 위한 막바지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 구루스는 미국 근무 경험이 풍부하고 영어에 능숙했지만,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의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 당사자였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에게 불신감을 보였다. 반면 해군 출신으로 친분이 있던 노무라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협상이 난항을 겪자 노무라는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했으나, 외무대신뿐 아니라 해군대신과 해군 군령부 총장의 만류로 대사직을 유지했다.[15]
은퇴한 제독이었던 노무라와 사실상 일본 외무성 전체는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1941년 12월 7일(미국 시간), 일본이 말레이 작전과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을 시작했을 때, 노무라와 구루스는 워싱턴 D.C.에서 미국과의 협상 결렬을 통보하는 암호 전문을 해독하고 있었다. 이 전문은 일본에서 12월 8일(일본 시간) 발송되었으나, 대사관의 암호 해독 작업이 늦어져 공격이 시작된 후에야 헐 국무장관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비겁한 기습 공격'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노무라는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다.
헐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노무라가 전쟁을 막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노무라가 평화를 위한 돌파구를 찾으려 애썼다고 믿었다.[3]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후 노무라를 포함한 일본 외교관들은 미국 내에 억류되었다가, 1942년 8월 중순 교환선을 통해 귀국했다.[4] 귀국 후에는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어, 그대로 1945년 8월 15일의 패전(일본의 항복)을 맞이한다.
4. 3. 주미 대사
1940년 11월 27일, 노무라는 호리노우치 켄스케의 후임으로 미국 주재 일본 대사로 임명되었다. 해군 차관보 시절 워싱턴 D.C.에서 노무라를 알고 지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같은 해군 출신이자 정직하다고 평가했던 그의 임명을 환영하며 개인적인 친분에 기대를 걸었다.1941년 한 해 동안 노무라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과 미국과 일본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주요 쟁점은 중일 전쟁,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대일 석유 금수 조치 등이었다. 노무라는 일본 정부에 미국 측에 의미 있는 양보를 할 것을 거듭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헐 국무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양보하지 않았다.[2] 과거 미국 대사관 주재 무관 경험이 있었지만, 노무라의 영어 실력이 유창하지 않아 미국 정부 요인과의 외교 협상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평가도 있다.[14]
일본의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미일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1941년 11월 15일 일본 외무성은 주독 대사를 지낸 구루스 사부로를 특별 교섭인으로 워싱턴 D.C.에 파견했다. 이로써 두 명의 대사가 함께 헐 국무장관과 전쟁 회피를 위한 협상을 진행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되었다. 구루스는 미국 근무 경험이 풍부하고 영어에 능통한 미국 전문가였지만,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한 당사자였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에게 노골적인 불신감을 드러냈다. 반면 해군 출신으로 친분이 있던 노무라에게는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노무라는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했으나 외무대신, 해군대신, 해군참모총장 등의 만류로 대사직을 유지했다.[15]
결국 일본은 중국에서의 완전 철수, 삼국 동맹 파기 등을 요구하는 헐 노트를 최후 통첩으로 간주하고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 연합국과의 전쟁을 결정했다. 하지만 미일 협상은 공식적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은퇴한 제독이었던 노무라와 일본 외무성은 1941년 12월 7일(미국 동부 시간, 일본 시간 12월 8일) 감행된 진주만 공격 계획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 공격 당일, 일본에서 발송된 협상 결렬 통보(사실상의 선전포고) 전문을 해독해야 했으나, 일요일이라 대사관의 암호 해독 인력이 부재하여 작업이 지연되었다. 이 때문에 노무라는 실제 공격이 시작된 후에야 헐 국무장관에게 해당 문서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일본이 '비겁한 기습 공격'이라는 비난을 받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노무라는 이후 반년 간 워싱턴 D.C.에서 곤혹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헐 국무장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노무라가 전쟁을 막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노무라를 협상 지연을 위한 시간 벌기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을 이해하고 존중했던 노무라는 마지막까지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을 믿었지만, 그의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3]
전쟁 발발 후 노무라를 비롯한 일본 외교관들은 버지니아주 핫 스프링스의 홈스테드 리조트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그린브라이어 호텔 등지에 억류되었다. 1942년 여름, 억류자 교환선을 통해 포르투갈령 모잠비크를 거쳐 8월 20일 일본으로 귀국했다.[4] 귀국 후에는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어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했다.
주미 대사 시절과 관련된 일화로, 연습 함대 사령관 시절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당신들은 미국 국적을 가졌으니 훌륭한 미국인으로서 미국에 충성하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주미 대사로 부임하기 위해 가마쿠라마루를 타고 미국으로 가던 중, 무쓰 무네미쓰의 외교 수완을 높이 평가하며 마쓰오카 요스케와 비교하기도 했고, 미일 협상의 성공 가능성을 50%로 보면서 미국의 석유 공급 여부가 관건이라고 언급했으며, "태평양은 정말 넓다. 미일 전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며 전쟁에 대한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34][35][36]
4. 4. 진주만 공격
1940년 11월 27일, 노무라는 전임 호리노우치 켄스케의 뒤를 이어 미국 주재 일본 대사로 임명되었다. 해군 차관보 시절 노무라를 알고 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그를 정직한 인물로 여겨, 같은 해군 출신인 그의 임명을 환영했다.1941년 한 해 동안 노무라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과 미일 간의 전쟁을 막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 협상의 주요 쟁점은 중일 전쟁,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 미국의 대일 석유 금수 조치 등이었다. 노무라는 일본 정부에 미국 측에 의미 있는 양보를 할 것을 거듭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번번이 거부했다. 미국 측의 헐 장관과 루스벨트 대통령 역시 양보하지 않았다.[2] 노무라는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 미국 정부 요인과의 협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알려졌다.[14]
1941년 11월 15일, 협상을 돕기 위해 외교관 구루스 사부로가 '특별 교섭인' 자격으로 워싱턴 D.C.에 파견되어 노무라에 합류했다. 구루스는 미국 근무 경험이 풍부하고 영어에 능통했지만, 일독이 삼국 동맹 체결 당시 주독 대사였기 때문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에게 불신감을 보였다. 협상은 계속 난항을 겪었고, 노무라는 여러 차례 사의를 표명했으나 외무대신과 해군 수뇌부의 만류로 대사직을 유지했다.[15]
퇴역 제독이었던 노무라와 일본 외무성 대부분은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의 협상 결렬을 통보하는 암호 전문은 일본 시간으로 12월 8일 월요일(미국 동부 시간 12월 7일 일요일)에 발송되었으나,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의 암호 해독 담당 직원이 휴일이라 자리를 비운 탓에 해독이 늦어졌다. 결국 노무라와 구루스는 실제 진주만 공격이 일어난 뒤에야 헐 국무장관에게 협상 결렬 통보문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 지연으로 인해 일본의 공격은 '비겁한 기습'이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헐 노트를 사실상의 최후 통첩으로 받아들인 일본은 미국, 영국 등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정했지만, 이러한 결정과 별개로 노무라는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헐 국무장관은 훗날 회고록에서 노무라가 전쟁을 막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일본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기에, 일본 정부가 노무라를 시간 벌기용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3]
전쟁 발발 후 노무라를 포함한 일본 외교관들은 버지니아주 홈스테드 리조트와 웨스트버지니아주 그린브라이어 호텔에 억류되었다. 1942년 여름, 이들은 포르투갈령 모잠비크에서 미국인들과의 교환을 통해 교환선으로 일본으로 송환되었다.[4] 노무라는 1942년 8월 20일 귀국하여 종전 때까지 추밀고문관 등으로 비공식적인 조언자 역할을 했다.
5. 전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1945년 5월 추밀원에 임명되었으나, 전후 1946년 8월 공직추방되었다. 추방 기간 중에도 전 주일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 등이 포함된 미국 대일협의회[16] 관계자들과[17] 교류하며 지원을 받았다.
추방 해제 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요청으로 재군비 문제 조사 위원회에 참여하여 해상자위대의 전신인 해상경비대 창설에 관여했다. 이후 1953년에는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권유로 JVC(일본 빅터) 사장에 취임하여 기업 경영에 나섰다.
1954년에는 참의원 보궐선거(와카야마 지방구)에 당선되어[5] 정계에 진출했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방위 정책 분야에서 역할을 했으며,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과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문민통제 원칙을 이유로 고사했다.
1960년 참의원에 재선되었으며, 재임 중이던 1964년 5월 8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묘소는 분쿄구의 고코쿠지이다.
5. 1. JVC 사장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6년 8월,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공직추방되었으나, 미국 대일협의회[16] 관계자들은[17] 그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이들은 노무라가 새롭게 민주화된 일본과 새로운 미일 관계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그중 윌리엄 리처즈 캐슬은 노무라를 "일본을 올바른 방향으로 다시 중요한 국가로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추방이 해제된 후, 노무라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요청으로 재군비 문제를 연구하는 위원회에 참여하여 해상자위대의 전신인 해상경비대 창설에 깊이 관여했다.
1953년 3월 24일, 그는 고향 선배이자 파나소닉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여 마쓰시타 전기산업(현 파나소닉) 산하의 JVC(일본 빅터 주식회사, 현 JVC켄우드)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JVC는 공습 피해와 전후 노동쟁의로 경영 위기를 겪고 있었으나, 노무라는 창업 초기 모회사였던 미국 RCA와의 기술 제휴 계약을 재개하여 회사를 재건하는 길을 열었다.
JVC 사장직과 병행하여 정치 활동도 이어갔다. 1954년에는 참의원 보궐선거(와카야마 지방구)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고,[5] 이후 자유민주당에 참여하여 방위 정책 분야에서 활동하며 외교조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대 후반,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과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현 방위대신)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노무라 자신은 군의 문민통제 원칙에 대한 신념을 이유로 두 차례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당시 그는 거의 20년 동안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여전히 구 일본 제국 해군 대장 출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며, 특히 미일 개전 당시 주미 대사였다는 사실 때문에 장관 임명은 시기상조라는 평가도 있었다.
노무라는 1960년 참의원에 재선되었으며, JVC 사장 및 참의원 재임 중이던 1964년 5월 8일 도쿄도 신주쿠구의 국립도쿄제1병원(현 국립국제의료연구센터)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5. 2. 참의원 의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6년 8월 노무라는 공직추방되었으나, 전 도쿄 주재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 등이 포함된 미국 대일협의회[16] 관계자들은[17] 그가 새로운 민주화된 일본과 미일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접근하여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회원 중 한 명인 윌리엄 리처즈 캐슬은 노무라를 "일본을 올바른 방향으로 다시 중요한 국가로 재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추방이 해제된 후, 노무라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요청으로 재군비 문제를 조사하는 위원회에 참여하여 해상자위대의 전신인 해상경비대 창설에 깊이 관여했다. 또한 1953년 3월 24일, 고향 선배인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권유로 파나소닉 산하의 일본 빅터(현 JVC켄우드) 사장에 취임하여, 미국 RCA와의 기술 지원 계약을 통해 경영 위기에 처했던 회사를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1954년 제3회 참의원 보궐선거(와카야마 지방구)에 출마하여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5] 이후 자유민주당에 참여하여 방위 정책을 담당했으며, 외교조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마쓰노 츠루헤이가 참의원 의장으로 취임하자 당 참의원 의원회장 자리에 올랐다.
1950년대 후반,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과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현 방위대신)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노무라 자신은 일본국헌법의 문민통제 원칙에 대한 신념을 이유로 두 차례 모두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그는 거의 20년 동안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구 일본 제국 해군의 퇴역 대장으로 인식되었고,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주미 대사였다는 상징성 때문에 장관 임명이 시기상조라는 평가도 있었다. 훗날 나카소네 야스히로, 야마시타 모토토시, 나카타니 겐 등 자위대 간부 출신들이 방위대신을 맡기도 했지만, 노무라의 경우에는 그의 경력이 오히려 걸림돌이 된 셈이다.
1960년 제5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재선되었으나, 1964년 5월 8일 도쿄도 신주쿠구의 국립도쿄제1병원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 묘소는 분쿄구의 고코쿠지이며, 법명은 ‘현해원전수봉길옹대거사’이다.
6. CIA 협력 의혹
유마 테쓰오는 노무라가 CIA의 협력자였다고 주장한다.[18] 1954년 참의원 선거에서 CIA가 자금 제공 및 선거 대책으로 지원했으며, CIA 일본 지국장 폴 블룸이 당선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18] 선거 자금은 전 해군 중좌였던 후지무라 요시로가 관리했다.[18] 또한, 노무라와 CIA 국장 앨런 덜레스의 연락책이었던 미국 대일협의회 소속이자 『뉴스위크』 외신부 기자였던 해리 카인은 미국 국무부 기획부장이자 CIA에도 관계했던 프랭크 위즈너에게 노무라를 요시다 이후의 총리 후보로 보고하며 그의 당선을 축하했다.[18] 카인은 노무라가 "우리 기관(CIA)의 정치 문제 정보 제공자였다"고 보고하여, 노무라가 CIA와 국무부의 정보 제공자임을 알렸다.[18]
7.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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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선거 종류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선거 제도 |
---|---|---|---|---|---|---|---|---|---|---|
1954년 | 보궐선거 | 3회 | 참의원 의원 | 와카야마현 선거구 | 무소속 | 254,123표 | 66.53%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9년 | 통상선거 | 5회 | 참의원 의원 | 와카야마현 선거구 | 자유민주당 | 247,303표 | 72.73%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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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Nomura, Kichisaburo
http://admiral31.wor[...]
2020-02-2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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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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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millan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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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the Greenbrier and Other Appalachian Resorts Became Prisons for Axis Diploma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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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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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olitical Underrepresentation of People with Disabilities in the Japanese Diet
2021
[6]
뉴스
NOMURA, 86, DIES; JAPANESE ENVOY; Admiral Was Negotiating With Hull on Dec. 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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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05-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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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村大将を委員長に査問会を組織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3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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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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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村吉三郎海軍大将が院長に就任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37-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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ハル回顧録
中公文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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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軍士官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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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RICAN COUNCIL ON JAPAN, INC.
http://www.bizapedia[...]
新潮社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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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隊なき占領-ウォール街が「戦後」を演出した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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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を動かしたスパイ 第四回 野村吉三郎 CIAの支援を受け総理大臣を狙った男
2016-06
[19]
아카이브
野村吉三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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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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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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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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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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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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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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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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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3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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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3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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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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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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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16-07-18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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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1934-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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