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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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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학은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창시된 민족 종교로, 사회 불안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다. 최제우는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인내천' 사상을 전개하며, 민주주의, 인권, 민족주의를 옹호했다. 동학은 농민들에게 빠르게 확산되었으나, 최제우가 처형된 후 최시형에 의해 교리가 체계화되고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후 동학 농민 혁명을 거치며 천도교와 시천교로 분열되었으며, 천도교는 3.1 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 운동에 기여했다. 동학은 현재에도 천도교를 통해 신앙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북한에서도 천도교청우당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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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 - 최시형
    최시형은 1827년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동학의 제2대 교주를 지냈으며, 최제우의 제자로서 동학 경전을 편찬하고 교세를 확장하다가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하여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사후 신원되어 손병희가 그의 뒤를 이어 천도교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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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지도
기본 정보
창시자
창시자최제우
창시 시기1860년
종교적 특징
주요 가르침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주요 경전동경대전
용담유사
해월신사법설
역사
창교 배경조선 후기 사회의 혼란과 서학(西學, 천주교)의 확산에 대한 반발
최제우의 깨달음과 민중 구제의 필요성
발전 과정최제우의 처형 이후 최시형이 2대 교주로 계승하며 교세 확장
동학 농민 운동 발생에 큰 영향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개칭
주요 사건동학 농민 운동: 1894년, 동학 농민군이 탐관오리와 외세에 저항하며 일어난 대규모 민중 봉기
갑오개혁에 영향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
교세
현재 신도수약 10만 명
주요 활동사회 운동
민족 운동
종교 활동
현대적 의의
의의한국 민족 종교의 효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사상 발전에 영향
평등 사상과 인권 사상에 기여
관련 주제민중 신학
제국주의 비판
생명 사상
기타
관련 단체천도교
관련 인물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전봉준
김개남

2.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외국의 간섭, 정치 문란, 사회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다. 또한 기존의 종교는 부패하거나 쇠퇴하였다.[1]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기독교에 대항하고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최제우는 유교, 불교, 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다.[3] "동학"이라는 명칭에는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3] 최제우는 이상적인 "후천개벽"의 시대가 올 것이며, 사람들은 동학 신자가 되어 주문을 외우고 수양하면 현세에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3] 또한, "보국안민"과 "유무상자" 사상을 통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4]

동학의 교리는 간단했다. 유학처럼 오랜 시간과 재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13자를 외우는 것으로 수양할 수 있었다.[3] 동학 교도들은 하늘의 신인 천주를 숭배하며, 천주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믿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했다.[5]

그러나 동학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배척받았다. 창시자 최제우는 1863년 체포되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고, 경전은 불태워졌다.[3]

이후 최시형이 소각된 경전을 복원하고 포교에 힘써 동학은 삼남지방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6] 동학 교단은 "포접제도"라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7]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교단의 합법화를 추구하기도 했다.[6] 그러나 조선 정부의 탄압과 관리들의 수탈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2. 1. 조선 후기 사회의 모순

조선 후기 사회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정치적으로는 관리들의 수탈이 만연했고, 사회적으로는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었다. 기존의 종교는 부패하거나 쇠퇴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1]

조선은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지만, 주자학자들 사이의 대립이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구 열강의 압력은 개혁가들에게 더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최제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동경대전을 저술하여 '동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기독교하느님과 기독교 신학을 배척할 것을 주장했다.[1]

최제우는 기독교의 유입과 아편전쟁 이후 베이징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점령당한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외세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인권을 확립하며, 외세의 간섭 없는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농민들을 동학으로 개종시켜 농민 반란을 일으켰고, 1862년부터 1864년까지 다른 반정부 시민 운동가들과 함께 한국 남부 지역 일부를 장악했지만, 결국 최제우는 처형되었다.[2] 그러나 동학 운동은 그의 교리를 체계화한 최시형에 의해 이어졌으나, 최시형 역시 처형되었다.

2. 2. 서학의 전래와 외세의 침략

조선 후기, 사회 불안과 외세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기존 종교는 쇠퇴했다.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았지만, 주자학자들 사이의 대립도 심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기독교하느님을 배척하고, 외세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인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경대전을 저술, "동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1]

최제우는 천주교의 유입과 아편전쟁으로 베이징이 점령당한 사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외세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인권을 확립하며, 외세의 간섭 없는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농민들을 동학으로 개종시켜 농민 반란을 일으켰고, 1862년부터 1864년까지 조선 남부 지역 일부를 장악했지만,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2]

최제우 사후, 그의 교리를 체계화한 최시형이 동학 운동을 이끌었으나, 그 역시 처형되었다. 이후 동학 지도자 손병희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가 러일 전쟁 이후 귀국하여 진보회를 설립, 동학을 통해 사회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수십만 명의 동학 신도들은 단발령을 따르고 검소한 옷을 입는 등 비폭력 시위를 벌였다.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라는 종교로 발전시켰고, 천도교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 동학의 창시와 발전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동학을 창시했다.[1]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풍류 사상을 더하고, '인내천(人乃天)'과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사상을 핵심으로 삼았다.[1] '인내천'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 사상을, '천심즉인심'은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제우는 천주교의 유입과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에 충격을 받고, 외세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인권을 확립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2]

동학의 신앙 방법은 21자의 주문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고 칼춤을 추며, '궁궁을을(弓弓乙乙)' 부적을 태워 마시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1]

동학은 조선의 신분제도와 적서제도를 부정하는 민중적인 교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유행하던 전라도,경상도,충청도를 포함한 삼남지방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1]

동학은 "포접제"라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7] 최하위 조직인 "접"과 이를 통괄하는 "접주", 중간 조직인 "포"로 구성되었으며, 전 교단을 통솔하는 도주가 있었다.[7] 또한,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이라는 육임제도를 통해 교무를 처리했다.[7]

1892년 말, 동학 지도부는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교단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다.[6] 1893년에는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6] 당시 동학은 종교 운동을 지향하는 "북접"과 사회·정치 운동을 지향하는 전봉준 중심의 "남접"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3. 1. 최제우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경주 출신인 최제우는 제세구민(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1860년 서학(西學: 천주교)에 대립되는 민족 고유의 신앙을 제창하여 동학이라 이름 지었다.[1] 그는 종래의 풍류 사상과 (儒)·(佛)·(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을 전개하였다.[1] '인내천'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평등사상을 표현하는 것이자,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의 이념 즉,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자는 이념이었다.[1]

최제우는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나, 유교·불교·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다.[3] 이 명칭에는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3] 최제우는 이상적인 "후천개벽"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사람들이 동학 신자가 되어 진심으로 주문을 외우고 수양하여 영부를 마시면 천인합일이 되어 현세에서 신선이 된다고 설파했다.[3] 또한, 국가의 악정을 개혁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민본주의적 사상("보국안민")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자가 빈곤한 자를 돕는 상호부조의 사상("유무상자")을 설파했다.[4]

그의 저술은 수양과 성품 개선을 강조하면서 하늘에 대한 유교적 이해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최제우의 저술에 따르면, 하늘의 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성품을 개선함으로써 하늘의 도에 이를 수 있다.[1] 동학은 특정한 의제나 체계적인 교리가 수반되지 않았다. 최제우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것을 믿었다. 그는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방법에 대한 실질적인 계획이나 비전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낙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1]

창시자 최제우는 1863년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이듬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고, 경전은 불태워졌다.[3]

3. 2. 동학의 창시와 초기 교리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는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 고유의 신앙으로 동학을 창시했다.[1]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바탕으로 풍류 사상을 더하고, '인내천(人乃天)'과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사상을 핵심으로 삼았다.[1] '인내천'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인권 사상을, '천심즉인심'은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제우는 천주교의 유입과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에 충격을 받고, 외세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인권을 확립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2] 그는 자신의 저서 『동경대전』에서 하느님을 배척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도를 깨달아 성품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동학의 신앙 방법은 21자의 주문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를 외우고 칼춤을 추며, '궁궁을을(弓弓乙乙)' 부적을 태워 마시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빈곤에서 벗어나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1] 동학 교도들은 하늘의 신인 천주를 숭배하며 천주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믿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했다.[5]

최제우는 1863년 체포되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지만,[3] 그의 사상은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계승되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로 정리되었다.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삼남지방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6]

3. 3. 동학의 확산과 교세 확장

동학은 조선의 신분제도와 적서제도를 부정하는 민중적인 교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1] 창시자 최제우유교, 불교, 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고,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담아 "동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3] 그는 이상적인 "후천개벽"의 시대가 올 것이며, 동학 신자가 되어 주문을 외우고 수양하면 현세에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3] 또한, "보국안민"(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과 "유무상자"(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서로 도움)와 같은 사상을 설파했다.[4]

동학 교도들은 천주(하느님)를 숭배하며, 천주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하는 동학의 가르침으로 이어졌다.[5] 그러나 동학의 교리는 혁명이 아닌 교화였으며, 동학 지도부는 농민들의 폭력 투쟁을 반대했다. 동학은 서학과 유학과는 다른 사상이었기 때문에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배척받았다.[3]

최제우1863년 정부에 체포되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지만,[3] 제2대 교주 최시형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복원하고 동학을 재건했다. 최시형의 노력으로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넘어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남부까지 퍼져나갔다.[6]

동학은 "포접제"라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7] 최하위 조직인 "접"과 이를 통괄하는 "접주", 중간 조직인 "포"로 구성되었으며, 전 교단을 통솔하는 도주가 있었다.[7] 또한,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이라는 육임제도를 통해 교무를 처리했다.[7]

1892년 말, 동학 지도부는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교단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다.[6] 1893년에는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리기도 했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6] 당시 동학은 종교 운동을 지향하는 "북접"과 사회·정치 운동을 지향하는 전봉준 중심의 "남접"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4. 동학 농민 혁명

동학 농민 혁명은 동학의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일어난 농민 운동이다. 조선 개화기에 흥선대원군과 유자들의 위정척사사상과 양반 관료, 중인 계층의 개화사상이 대립했지만, 이는 정부 내부의 대립이었고 민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유교, 불교, 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고,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했다.[3]

동학은 "보국안민"과 상호부조의 사상을 설파하며, 단순한 교리로 일반 대중에 널리 퍼졌다.[3][4] 동학 교도들은 천주(하느님)를 숭배하며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했다.[5] 그러나 동학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배척받았다.

동학은 "포접제도"와 "육임제도"라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7] 1892년 말, 동학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교단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다.[6] 동학 교도들은 공주와 참례에서 집회를 열고,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렸지만 좌절되었다.[6] 당시 동학은 종교 운동을 지향하는 "북접"과 사회·정치 운동을 지향하는 전봉준 중심의 "남접"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조선 정부의 단속과 관리의 수탈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 2만 명이 넘는 동학 교도가 모여 "척왜양"을 외치며 관찰사와 수령의 폭정을 비난했고, 정부는 어윤중을 파견하여 해산을 명령했다.[6]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전봉준의 지휘 아래 민란이 일어났고, 이는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이었다.[6] 전봉준은 일청전쟁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한성(현 서울특별시)에서 처형되었고,[6] 교주 최시형1898년 3월 강원도 원주에서 붙잡혀 같은 해 6월 처형되었다.[6]

4. 1. 동학 농민 혁명의 발발 배경

동학은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 혁명을 촉발시켰다. 최제우유교, 불교, 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고, 이는 기독교(서학)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3] 동학은 "보국안민"과 상호부조의 사상을 설파하며, 단순한 교리로 일반 대중에 널리 퍼졌다.[3][4] 동학 교도들은 천주(하느님)를 숭배하며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강조했다.[5]

그러나 동학의 교리는 혁명이 아닌 교화였고,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배척받았다. 창시자 최제우는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다.[3]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학 포교에 힘썼고, 동학은 삼남지방(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을 넘어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남부등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다.[6]

동학당은 "포접제도"라는 조직 체계를 갖추고, "육임제도"라는 집행 기관을 두었다.[7] 1892년 말, 동학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교단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다. 동학 교도들은 공주와 참례에서 집회를 열고,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렸지만 좌절되었다.[6]

동학 교단은 조선 정부의 단속과 관리의 수탈에 직면했고, 이러한 관리의 폭정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1893년 3월, 동학 간부는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 2만 명이 넘는 교도를 모아 "척왜양"을 외치며 관찰사와 수령의 폭정을 비난했다.[6] 정부는 어윤중을 파견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전봉준의 지휘 아래 민란이 일어났다.[6]

전봉준은 일청전쟁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처형되었다.[6]

4. 2. 동학 농민 혁명의 전개 과정

동학은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되었다. 1863년 창시자 최제우가 정부에 체포되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고 경전이 불태워지는 탄압을 받았지만,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소각된 경전을 복원하고 포교에 힘써 삼남지방(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6]

동학 교단은 "포접제도"라는 조직 체계를 갖추고, "육임제도"라는 집행 기관을 통해 교무를 처리했다.[7] 1892년 말부터 동학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교단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6] 1893년 1월,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렸지만 해산 명령을 받았고, 일부는 "척왜양" 쪽지를 붙이며 저항했다.[6]

당시 동학은 종교 운동을 지향하는 "북접"과 사회·정치 운동을 지향하는 전봉준 중심의 "남접"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동학 교단은 조선 정부로부터 엄격한 단속을 받았고, 관리들의 수탈 또한 만연했다. 1893년 3월, 동학 간부는 충청도 보은군 장내에 2만 명이 넘는 교도를 모아 "척왜양"을 외치며 관찰사와 수령의 폭정을 비난했고, 정부는 어윤중을 파견하여 해산을 명령했다.[6]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전봉준의 지휘하에 민란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동학 농민 혁명의 시작이다.[6]

전봉준은 일청전쟁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한성(현 서울특별시)에서 처형되었고,[6] 교주 최시형1898년 3월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처형되었다.[6]

4. 3. 동학 농민 혁명의 좌절과 역사적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동학의 혁명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일어났다.[3] 최제우1863년 정부에 체포되어 이듬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고, 경전은 불태워졌다.[3] 그러나 동학의 교리는 혁명이 아닌 교화였으며, 동학당 상층부는 항상 농민(천민 계층)의 폭력적 투쟁을 거부했다. 동학은 서학과 유학과 다른 사상이었기 때문에,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배척받았다.[3]

제2대 교주 최시형은 동학 포교에 힘썼고, 삼남지방(경상도·충청도·전라도)을 넘어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남부 각지로 퍼져 나갔다.[6] 1892년 말, 동학 간부들은 최제우의 무죄를 인정받고(신원), 명예 회복과 교단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다.[6]

통솔이 잘 갖춰진 조직이었던 동학 교단은 조선 정부로부터 엄격한 단속을 받았고, 관리의 수탈 또한 만연했다. 이러한 관리의 폭정이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당의 난)으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전봉준의 지휘 아래 민란이 일어났으며,[6] 이것이 갑오농민전쟁의 시작이다.[6]

일청전쟁 중 전봉준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한성(현 서울특별시)에서 처형되었다.[6] 최시형1898년 3월 강원도 원주에서 붙잡혀 같은 해 6월 처형되었다.[6]

5. 동학의 분열과 천도교

동학 농민 혁명 이후, 동학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전봉준은 일청전쟁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처형되고,[6] 최시형은 1898년 강원도 원주시에서 체포되어 처형되면서,[6] 동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동학의 지도자는 손병희가 계승하게 되었다. 손병희는 일본 제국으로 건너가 개화파와 접촉하며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의 삼전론을 주장했다.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정치 단체 진보회를 결성하고, 그 실무를 이용구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용구는 송병준과 결탁하여 친일적인 단체 일진회를 창설하고 일본과의 협조를 주장했다.

이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를 선포하고 "대헌(大憲)", "오관(五款)" 등을 정하여 동학의 정통 교단임을 주장했다. "천도교"라는 명칭은 『동경대전』의 "도(道)는 곧 천도(天道)"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이용구는 1906년에 시천교를 재흥시켜, 동학은 천도교와 시천교로 분열되었다.

천도교는 1908년에 박인호가 도주를 계승하고, 1911년에 "신대헌(新大憲)"을 공포하여 의사원을 창설하였다. 1919년3·1 운동을 거쳐 1923년에는 천도교 청년당을 발족시켜 애국계몽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다.

5. 1. 동학의 분열: 남접과 북접

동학은 교조 최제우가 처형당하고, 2대 교주 최시형이 포교에 힘쓰면서 삼남지방(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을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6] 동학 교단은 "접"과 "포"라는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육임"이라는 집행 기관을 통해 교무를 처리했다.[7]

1892년 말, 동학은 교조 최제우의 신원과 교단의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다.[6] 충청도 공주전라도 참례에서의 집회, 경복궁상소 등을 통해 요구를 전달했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좌절되었다.[6]

이 과정에서 동학은 종교 운동으로서의 순화를 지향하는 최시형 중심의 "북접"과, 사회·정치 운동을 지향하는 전봉준 중심의 "남접"으로 분열되었다. 1893년 보은군 장내 집회에서 "척왜양"을 외치며 동학 농민 혁명의 기틀을 마련했지만,[6]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난 이후, 지도부 사이의 노선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동학 농민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최시형이 처형된 이후,[6] 동학은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로 이어졌고, 이용구시천교를 세우면서 분열은 고착화되었다.

5. 2. 천도교의 성립과 발전

손병희는 1898년 최시형이 처형된 이후 동학의 지도자가 되어 일본으로 정치 망명을 떠났다.[6]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귀국하여 진보회를 설립하고, 동학을 통해 사회 개혁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6] 수십만 명의 동학 신도들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간소한 옷을 입는 등 사회 개량 운동에 참여했다.

1905년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의 정통 교단임을 주장하며 "천도교"를 선포하고, "대헌(大憲)", "오관(五款)" 등을 제정하였다.[6] "천도교"라는 이름은 『동경대전』의 "도(道)는 곧 천도(天道)"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이후 동학은 손병희의 "천도교"와 이용구의 "시천교"로 분열되었다.

천도교는 1919년 3·1 운동을 주도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23년에는 천도교 청년당을 발족시켜 애국계몽운동을 이어갔다.

5. 3. 시천교의 분파와 친일 행적

이용구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정치 단체 진보회를 결성하고 그 실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용구는 송병준과 결탁하여 친일적인 단체 일진회를 창설하고 일본과의 협조를 주장했다.[6] 1906년 이용구는 시천교를 재흥시켜, 동학은 손병희천도교와 시천교로 분열되었다.[6] 시천교는 일진회의 조직 내에서 친일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6. 동학의 사상과 현대적 의의

최제우는 주자학이 조선의 국가 이념이었지만, 주자학자들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서구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기독교하느님을 배척하고, 1862년 동경대전을 저술하여 '동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1]

최제우는 기독교의 유입과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에 경악하며, 외세의 영향에 맞서기 위해 민주주의 도입, 인권 확립, 지상낙원 건설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농민들을 동학으로 개종시키고 반란을 일으켜 1862년부터 1864년까지 한국 남부 일부를 장악했지만, 결국 처형되었다.[2]

이후 동학 운동은 최시형이 이어받아 교리를 체계화했지만, 그 역시 처형되었다. 1898년 최시형의 처형 이후, 동학 지도자 손병희일본 제국으로 망명했다가 러일 전쟁 이후 귀국하여 진보회를 설립하고 사회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수십만 명의 동학 신도들은 단발령을 따르고 검소한 옷을 입는 등 비폭력 시위를 벌였다.[2]

최제우는 수양과 성품 개선을 통해 천(天道)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저술에 따르면, 하늘의 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으며, 자신의 성품을 개선함으로써 하늘의 도에 이를 수 있다.[1] 동학은 민주주의, 인권, 한국 민족주의를 옹호하여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조선 개화기에는 흥선대원군과 유자들의 위정척사사상과 양반 관료, 중인 계층의 개화사상이 대립했다. 최제우유교, 불교, 민간 신앙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하고, 기독교(서학)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담았다.[3] 그는 이상적인 "후천개벽" 시대가 도래할 것이며, 동학 신자가 되어 주문을 외우고 영부를 마시면 현세에서 신선이 된다고 설파했다.[3] 또한, "보국안민"과 "유무상자" 사상을 통해 민본주의와 상호부조를 강조했다.[4]

동학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13자를 외우는 단순한 수양 방법으로 대중에게 널리 퍼졌다.[3] 동학 교도들은 천주(하늘의 신)를 숭배하고, 모든 인간 내면에 천주가 거한다고 믿으며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했다.[5]

동학의 교리는 혁명이 아닌 교화였고,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배척받았다. 1863년 최제우는 체포되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다.[3] --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소각된 경전을 복원하고 동학 포교에 힘써 삼남지방(경상도, 충청도, 전라도)과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남부까지 교세를 확장했다.[6]

동학 교단은 "포접제도"라는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육임제도"라는 집행 기관을 통해 교무를 처리했다.[7] 1892년 동학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교단 합법화를 위한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지만, 경복궁상소는 해산 명령으로 좌절되었다.[6] 당시 동학은 종교 운동을 지향하는 "북접"과 사회·정치 운동을 지향하는 "남접"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동학 교단은 조선 정부의 단속과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렸고, 이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893년 동학은 보은군에서 "척왜양"을 외치며 관찰사와 수령의 폭정을 비난했고, 정부는 어윤중을 파견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다.[6] 1894년 전봉준의 지휘하에 고부군에서 민란이 일어나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되었다.[6]

전봉준은 일청전쟁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한성에서 처형되었다. 井上馨 일본 공사는 전봉준의 인격에 공감하여 처형을 막으려 했지만, 조선 정부는 그가 귀국한 틈을 타 처형을 단행했다.[6] 최시형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6]

6. 1. 인내천 사상과 평등주의

최제우는 자신의 마음속에 하늘의 도가 있으며, 자신의 성품을 개선함으로써 하늘의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1] 동학 교도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천주(하느님)가 있다고 믿었으며,[5]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주장했다.[5]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 人乃天)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신분제 철폐와 남녀평등을 포함하는 평등주의적 가치를 강조했다. 최제우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사상은 당시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6. 2. 민주주의적 요소와 민족주의

최제우는 서구 열강의 침략 위협 속에서 한국이 외세의 간섭 없이 민주주의인권을 확립하고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믿었다.[2] 그는 유교, 불교, 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는데, 이 명칭에는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3] 동학은 모든 인간이 내면에 천주(하느님)를 모시고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강조했다.[5]

동학은 또한, 국가의 악정을 개혁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민본주의적 사상("보국안민")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자가 빈곤한 자를 돕는 상호부조의 사상("유무상자")을 설파했다.[4] 이러한 사상은 당시 조선 사회에 만연했던 신분제와 불평등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고 있었으며, 민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동학은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민족주의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1893년 동학 교도들은 "척왜양"을 외치며 외세 배척 운동을 전개했고,[6] 이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이어졌다. 비록 갑오농민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동학은 이후에도 항일 의병 운동과 3.1 운동 등 한국의 민족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학의 민주주의적 요소와 민족주의적 성격은 한국 근대 민주주의 발전과 민족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6. 3. 동학의 현대적 계승

동학은 3대 교주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라는 종교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한국과 북한에서 신봉되고 있다. 1904년 러일 전쟁 이후, 손병희는 진보회를 설립하여 동학을 통해 사회 개혁 운동을 펼쳤다. 수십만 명의 동학 신도들은 단발령을 따르고 검소한 옷을 입는 등 비폭력 시위를 통해 사회 변화를 추구했다.[2]

2010년대 현재, 한국에는 약 100곳의 천도교 교회가 있으며 신자 수는 10만 명에 이른다.[10] 북한에는 280만 명의 신자가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11] 천도교청우당이라는 정당이 조선로동당위성정당으로 존재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일본 국회 연설에서 아시아의 3대 민주주의 사상으로 불교, 유교와 함께 동학 사상을 언급하며 동학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7. 주요 인물

동학의 주요 인물로는 창시자 최제우를 비롯하여, 2대 교주 최시형, 3대 교주 손병희, 그리고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 등이 있다.

최제우는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로,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나 유교, 불교, 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다.[3] 그는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항하는 의미로 '동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3]

최시형은 최제우 사후 소실된 경전을 복원하고 교단을 정비하여 동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손병희는 러일 전쟁 이후 사회 개혁 운동을 주도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발전시켰다.

전봉준은 부패한 조선 사회 개혁에 앞장선 인물로 농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갑오농민전쟁을 이끌었다.

7. 1. 최제우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났으며, 유교, 불교, 민간 신앙 등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다.[3] '동학'이라는 명칭에는 '서학', 즉 기독교에 대항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3]

최제우는 기독교의 유입과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에 경악하였다. 그는 외세의 영향에 맞설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인권을 확립하며, 외세의 간섭 없이 지상낙원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동경대전』(東經大全한국어)에서 "동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하느님과 기독교 신학의 다른 측면들을 배척할 것을 촉구하였다.[1] 최제우는 수양과 성품 개선을 강조하면서 하늘에 대한 유교적 이해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의 저술에 따르면, 하늘의 도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으며, 자신의 성품을 개선함으로써 하늘의 도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1]

최제우는 이상적인 "후천개벽"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사람들은 동학 신자가 되어 진심으로 주문을 외우고 수양하여 영부를 마시면 천인합일이 되어 현세에서 신선이 된다고 가르쳤다.[3] 또한, 국가의 악정을 개혁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민본주의적 사상("보국안민")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자가 빈곤한 자를 돕는 상호부조의 사상("유무상자")을 설파했다.[4]

동학 교도들은 천주(하느님, "하늘의 신", 조선의 고대부터 내려오는 샤머니즘에 기원하는 개념)를 숭배하며, 천주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거한다고 믿으며 인간의 존엄과 평등을 가르쳤다.[5]

최제우의 민주주의, 인권,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옹호는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동학은 한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모두에게 배척받았다. 결국 최제우는 1863년 정부에 체포되어 1864년 대구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경전은 불태워졌다.[3]

7. 2. 최시형

최제우가 처형된 후, 최시형이 제2대 교주가 되어 동학의 교리를 체계화했다.[2] 최시형은 소각된 경전을 암송하여 복원했는데, 순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순국문으로 된 『용담유사』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최시형은 동학 포교에 힘썼고, 동학은 경주에서 삼남지방(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을 거쳐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남부까지 퍼져 나갔다.[6]

동학 교단은 "포접제도"라는 질서정연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7] 최하위 조직인 "접"과 이를 통괄하는 "접주", 중간 조직인 "포"와 이를 통괄하는 "포접"이 있었고, 그 위에 전 교단을 통솔하는 도주가 있었다. 또한, 교무를 처리하는 집행 기관으로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이라는 육임제도가 있었다.[7]

1892년 말, 동학 간부들은 창시자 최제우의 무죄를 인정받고 명예를 회복하며 교단의 합법화를 꾀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시작했다.[6] 1893년 1월, 동학당 인사들은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올렸지만, 해산 명령을 받고 좌절되었다.[6] 당시 동학은 최시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고, 종교 운동으로서의 순화를 지향하는 주류파인 "북접"과, 전봉준이 이끄는 사회·정치 운동으로서의 목표 추구를 지향하는 급진파인 "남접"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898년 3월, 최시형은 강원도 원주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6월 처형되었다.[6]

7. 3. 손병희

손병희(孫秉熙)는 동학의 제3대 교주였다. 1898년 최시형이 처형된 후 동학의 지도자가 된 손병희는 일본으로 정치 망명(political asylum)을 갔다.[2] 1904년 러일 전쟁(Russo-Japanese War)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진보회("progressive society")를 설립하여 새로운 문화 및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2] 그는 동학을 통해 낡은 관습과 생활 방식을 바꾸는 사회 개혁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쳤다.[2] 수십만 명의 동학 신도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검소한 옷을 입는 등 변화를 실천했으며, 1904년 한 해 동안 동학 신도들은 사회 개혁을 위한 비폭력(Nonviolence) 시위를 전국적으로 벌였다.[2]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Cheondogyo), 즉 천도교(Cheondoism)라는 종교로 발전시켰으며, 천도교는 오늘날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신봉되고 있다.[2]

손병희는 일본에서 개화파와 접촉하며 “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의 삼전론을 주장했다.[9] 1904년에는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정치 단체 “진보회”를 결성했다.[9] 그러나 진보회의 실무를 맡았던 이용구송병준과 손잡고 친일 단체 “일진회”를 만들어 일본과의 협조를 주장했다.[9] 이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를 선포하고 동학의 정통 교단임을 내세웠다.[9] “천도교”라는 이름은 『동경대전』의 “도(道)는 곧 천도(天道)”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9] 1906년 이용구는 시천교를 만들어 동학은 “천도교”와 “시천교”로 갈라졌다.[9] 천도교는 1919년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1923년 천도교 청년당을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을 이끌었다.[9]

7. 4. 전봉준



전봉준은 1894년 전라도 고부군에서 민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갑오농민전쟁의 시작이다.[6] 일청전쟁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1895년 한성(현 서울특별시)에서 처형되었다. 井上馨 일본 공사는 전봉준의 인격에 공감하여 그를 처형하지 않도록 요청했지만, 조선 정부는 이노우에 공사가 귀국한 틈을 타 처형을 단행했다.[6]

7. 5. 그 외 주요 인물



참조

[1] 서적 An Introduction to Confucianism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A Handbook of Korea Korean Overseas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 1993-12-01
[3] 서적 糟谷(2000)
[4] 서적 東学農民戦争と日本
[5] 서적 鳳仙花: 評伝・洪蘭坡 https://books.google[...]
[6] 서적 糟谷(2000)
[7] 서적 東学農民戦争と日本
[8] 서적 東学農民戦争と日本
[9] 서적 朝鮮雑記 岩波書店
[10] 뉴스 MK News http://news.mk.co.kr[...] 2011-00-00 #날짜 정보 부족으로 년도만 표시
[11] 웹사이트 North Korea http://www.worldstat[...]
[12] 웹사이트 神戸新聞NEXT|神戸|朝鮮半島の民衆宗教「天道教」 神戸に国内唯一の教会 https://www.kobe-np.[...] 202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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