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드니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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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 파리 북쪽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으로, 프랑스 왕가의 묘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3세기 경 순교한 파리의 수호성인 성 드니의 무덤 위에 세워졌으며, 632년 다고베르 1세에 의해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개편되었다. 12세기 쉬제르 수도원장의 주도로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며, 13세기에는 라요낭 양식이 적용되어 건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0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프랑스 왕과 왕족들이 이곳에 묻혔으며, 프랑스 혁명 당시 훼손되었으나 복원되었다. 현재 생드니 대성당은 초기 고딕 건축의 중요한 사례이자, 프랑스 역대 왕들의 무덤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조각, 오르간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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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드니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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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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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바실리크 생드니 (프랑스어) |
다른 이름 | 왕립 생드니 대성당 (프랑스어: Basilique royale de Saint-Denis) 생드니 대성당 바실리카-대성당 (프랑스어: Basilique-cathédrale de Saint-Denis) |
위치 | 프랑스 일드프랑스 센생드니 생드니 |
좌표 | 48°56′08″N 2°21′35″E |
종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전례 | 로마 전례 |
교구 | 로마 가톨릭 생드니 교구 |
주교 | 파스칼 들라누아 |
웹사이트 | 생드니 대성당 공식 웹사이트 |
건축 | |
건축가 | 알려지지 않음 |
스타일 | 고딕 양식 |
기공 | 1135년 |
완공 | 미완공 |
길이 | 미상 |
폭 | 미상 |
네이브 폭 | 미상 |
최대 높이 | 86m |
첨탑 수 | 미상 |
첨탑 높이 | 미상 |
역사적 중요성 | |
문화재 지정 | 지정됨 |
추가 정보 | |
재건 계획 | 북쪽 탑 및 첨탑 재건을 위한 협약 체결됨 |
재건 노력 | 첨탑 재건을 위한 작업 진행 중 |
2. 역사
생드니 대성당의 역사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이자 첫 파리 주교였던 성 드니의 순교에서 시작된다. 전설에 따르면 3세기 중반(250년경)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참수당한 성 드니는 자신의 머리를 들고 현재의 대성당 자리까지 와서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52][44] 그의 무덤 위에 순교자 기념관(마르티리움)이 세워졌고, 4세기 이후 바실리카로 확장되며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52]
7세기 다고베르 1세(재위 628년-637년)는 이곳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세우고 왕실 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45] 다고베르 1세는 이곳에 묻힌 최초의 프랑스 왕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인 775년에는 샤를마뉴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교회가 봉헌되었다.
12세기 쉬제르 수도원장(재임 1122년-1151년)은 기존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을 혁신적인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하기 시작했다. 특히 1140년부터 1144년까지 진행된 동쪽 후진(체베) 재건축은 리브 볼트, 첨두 아치, 스테인드글라스 창 등을 통해 빛이 풍부한 공간을 구현하며 고딕 건축의 시작을 알렸다.
13세기에는 루이 9세의 후원으로 라요낭 양식의 본당(네이브) 재건축이 시작되었고(1231년), 왕실 묘지 기능이 강화되었다. 1267년 루이 9세는 역대 군주들의 유해를 옮겨와 공식적인 왕실 묘지를 조성했다.[21] 이후 생드니는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처럼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단 세 명의 군주를 제외하고 모든 프랑스 왕이 묻히는 왕가의 네크로폴리스가 되었다.[43] 16세기에는 발루아 왕가의 영묘 건설이 시도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시기(1792년 이후)에는 왕정의 상징으로 여겨져 수도원이 해산되고 왕릉이 파괴되는 등 큰 수난을 겪었다. 많은 유물이 약탈당하거나 훼손되었으며, 건물 자체도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1805년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복원이 시작되었고, 왕정 복고 이후 루이 18세 등에 의해 왕릉 복원과 유해 재안치가 이루어졌다. 건축가 프랑수아 드브레와 외젠 비올레르 뒤크가 복원을 이끌었으나, 1845년 드브레가 재건한 북쪽 첨탑이 붕괴되는 등 어려움도 있었다. 1862년 프랑스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오랜 기간 바실리카이자 수도원 교회였던 생드니는 1966년 센생드니 주 교구가 신설되면서 주교좌 성당(대성당) 지위를 얻었다. 2004년에는 루이 17세의 심장이 안치되기도 했다.
중세에는 대성당 부근에서 국제 시장인 '랑디(Lendit)'가 열렸고,[46] 1534년에는 예수회가 이곳에서 창립되었다.
2. 1. 초기 역사 (3세기 ~ 12세기)
프랑스의 수호성인이자 초대 파리 주교였던 성 드니는 3세기 중반(서기 250년경)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사제 루스티쿠스, 부제 엘레테리우스를 포함한 두 명의 추종자와 함께 참수형을 당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스스로 묻히기를 원했던 현재의 대성당 자리까지 걸어와 그곳에서 쓰러졌다고 한다.[52][4] 약 313년 이후, 그의 무덤 자리에 순교자 기념관(마르티리움) 또는 묘당이 세워졌고, 이곳은 점차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52][4]451년에서 459년 사이, 생트 주느비에브의 주도로 무덤과 기념물을 추가하여 바실리카로 확장되었다. 이곳에는 클로타르 1세의 아내인 아레곤드와 같은 왕족의 무덤도 포함되었다.[4]
프랑크 왕국의 왕 다고베르 1세(재위 628년~637년)는 632년에 이 교회를 베네딕토회 수도원인 생드니 수도원으로 지정했다.[10] 수도원은 곧 500명이 넘는 수도사와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동체로 성장했다. 다고베르 1세는 성인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한 새로운 성소를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왕의 수석 고문이자 숙련된 금세공인이었던 엘루아가 제작했다. 엘루아의 초기 ''성인전''은 이 성소의 화려함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11]
:무엇보다도 엘루아는 파리시에 성 마르티르 데니를 위한 묘소를 제작했는데, 그 위에는 금과 보석으로 훌륭하게 장식된 멋진 대리석 성찬 덮개가 있었다. 그는 [무덤 상단에] 문장을 만들고 화려한 정면을 만들었으며 제단의 왕좌를 금도끼로 둘러쌌다. 그는 그곳에 금사과를 둥글게 박아 넣었다. 그는 설교단과 은문, 그리고 은도끼로 제단 왕좌의 지붕을 만들었다. 그는 무덤 앞 공간에 덮개를 만들고 성 마르티르의 발치에 외부 제단을 제작했다. 그는 왕의 요청에 따라 그곳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골에는 장식이 거의 남지 않았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놀라운 일이다.[11]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단신왕은 생드니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치르면서 낡은 수도원을 재건하겠다고 맹세했다. 새로운 교회 건설은 754년에 시작되어 그의 아들 샤를마뉴 시대에 완공되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775년에 직접 봉헌식에 참석했다.[12] 수도원의 건립 신화 중 하나에 따르면, 봉헌식 전날 밤 교회에서 잠을 자던 나병 환자가 그리스도가 성 드니와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 직접 교회를 봉헌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떠나기 전 나병 환자를 치유했고, 환자의 벗겨진 병든 피부가 대리석 기둥에 붙어 흉한 조각으로 남았다고 전해진다. 이 전설은 교회가 그리스도에 의해 직접 봉헌된 신성한 장소임을 강조했다.[13]
생드니의 카롤링거 시대 교회 모습은 1937년 미국의 미술사학자 섬너 맥나이트 크로스비가 시작한 발굴 조사를 통해 많이 밝혀졌다.[14] 당시 교회는 길이가 약 80m에 달했으며, 인상적인 서측 입구, 두 줄의 대리석 기둥으로 나뉜 3개의 신도석, 익랑(트란셉트), 동쪽 끝의 후진으로 구성되었다. 중요한 종교 행사 때는 1,250개의 램프로 내부를 밝혔다고 한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방하여 후진 아래에는 지하 묘소가 만들어졌는데, 중앙에는 고해실 또는 순교자 예배당이 있었다. 이곳에는 성 드니의 석관이 놓인 단상이 있었고, 양옆에는 그의 동료 루스티쿠스와 엘레우테리우스의 석관이 배치되었다. 단상 주위에는 순례자들이 다닐 수 있는 복도와 창문이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일부 공간에서는 이 초기 지하 묘소의 채색된 장식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 지하 묘소는 늘어나는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려워지자, 832년경 수도원장 힐두인은 첫 번째 지하 묘소 서쪽에 두 번째 지하 묘소를 건설하고, 후진 옆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작은 예배당을 추가했다. 이 힐두인이 만든 지하 묘소는 12세기에 쉬제르 수도원장에 의해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832년까지 수도원은 코탕탱 반도에서 수익성 높은 포경업 면허를 보유하기도 했다.[12]
2. 2. 고딕 양식 재건축 (12세기 ~ 13세기)
쉬제르(1081년경 ~ 1151년)는 생드니 대성당 재건 사업의 후원자였다. 그는 열 살 때부터 교회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1122년에 수도원장이 되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는 학창 시절 친구이자 측근, 재상이었으며, 그의 아들 루이 7세의 측근이기도 했다. 루이 7세가 십자군 원정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는 섭정을 맡았다. 그는 뛰어난 기금 모금가로서 대성당을 위한 보물을 확보하고 재건을 위한 막대한 자금을 모았다. 1135년경부터 수도원 재건 및 확장 공사를 시작했는데,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낡은 건물의 노후화와 순례객 수용의 어려움을 재건 이유로 설명했다.
12세기 쉬제르의 노력 덕분에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 왕족의 주요 성소가 되었으며, 왕들의 대관식이 열리던 랭스 대성당과 경쟁하는 위치에 올랐다. 또한 대관식에 사용되는 예복, 왕관, 홀 등 상징물들을 보관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1124년부터 15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국왕들은 전쟁에 나설 때 성인의 보호를 받고자 생드니의 오리플람, 즉 전투 깃발을 들고 나섰다. 이 깃발은 프랑스가 위험에 처했을 때만 생드니 대성당으로 가져왔으며, 1488년 파리 시민들이 영국 및 부르고뉴 군대에 성문을 열어주면서 폐기되었다.
쉬제르가 주도한 서쪽 부분 확장 공사는 1140년에 완료되었다. 중앙에 문이 하나만 있던 기존 카롤링거 양식 정면을 허물고, 3개의 문과 예배당을 갖춘 새로운 정면과 현관 (나르텍스)을 추가했다. 이 새로운 현관의 예배당들은 1140년 6월 9일에 봉헌되었으나, 로마네스크 양식의 중앙 본당은 아직 그대로였다. 쉬제르는 서쪽 끝의 새로운 현관에 대해 "새로운 후면 부분이 앞부분과 연결되면, 교회의 중앙 부분이 밝게 빛나게 된다. 밝은 것은 밝은 것과 밝게 결합되고, 새로운 빛으로 가득 찬 고귀한 건물도 밝다."라고 기록했다.
쉬제르의 가장 큰 혁신은 1140년부터 1144년까지 진행된 새로운 성가대석(choir) 건설에서 나타났다. 그는 후진(apse)과 회랑(ambulatory) 사이의 두꺼운 벽을 가느다란 기둥으로 대체하여 내부 공간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그는 "원형으로 늘어선 예배당들은 가장 밝은 창문의 놀랍고 끊임없는 빛으로 인해 교회 전체가 빛나게 하고, 내부의 아름다움을 채워준다"고 묘사했다. 이 예배당 중 하나는 성 오스마나에게 헌정되었고 그녀의 유물을 보관했다.
쉬제르의 석공들은 리브 볼트, 뾰족한 아치(pointed arch), 그리고 더 큰 창문을 만들고 내부 벽을 줄일 수 있게 해주는 외부 부축벽(flying buttress) 등 기존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발전하거나 도입된 요소들을 활용했다. 이러한 특징들이 처음으로 한 곳에 종합적으로 사용된 생드니 대성당의 새로운 양식은 구조의 가벼움과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거대한 크기를 통해 이전 로마네스크 건축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고딕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건축 양식은 상징적인 의미로 가득했다. 성가대석의 기둥 12개는 12사도를, 내부를 채우는 빛은 성령을 상징했다. 쉬제르는 6세기 신비주의자 위(僞) 디오니시오스 아레오파기테의 영향을 받아 빛을 신성함과 동일시했으며, "밝은 것은 밝은 것과 밝게 결합되고, 새로운 빛으로 가득 찬 고귀한 건물도 밝다"는 그의 말을 본당에 새겼다.[15] 이처럼 신비로운 빛으로 내부를 채우는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이후 고딕 건축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12세기 재건축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두 명의 건축가, 즉 석공장이 참여했다.[16] 양식적 차이를 통해 두 사람의 작업을 구분할 수 있다. 서쪽 끝 초기 작업을 담당한 첫 번째 석공은 풍부하고 개성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주두와 몰딩을 선호했다. 반면, 새로운 성가대석과 서쪽 정면 및 현관 상부를 완성한 후임자는 장식을 절제하고 단순화된 모티프를 사용하여, 그가 창조하는 데 기여한 더 가벼운 고딕 양식에 적합하게 만들었다.[17]
발루아 문(Valois Portal)은 쉬제르가 계획한 고딕 건축의 마지막 구조물이었으나, 그가 1151년에 사망했을 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13세기에 이 문은 교회의 북쪽 익랑(transept) 끝으로 옮겨졌다. 문의 조각상들, 특히 팀파눔(tympanum)에 묘사된 생 드니의 순교 장면은 사실성과 섬세함으로 고딕 조각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새로운 구조는 1144년 6월 11일, 국왕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다.[18] 생드니 대성당은 북부 프랑스 왕실 영토에서 고딕 건축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 양식은 이후 플랜태저넷 왕가를 통해 잉글랜드에 도입되었고 프랑스, 베네룩스 3국, 독일, 스페인, 북부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19][20]
쉬제르는 고딕 양식 재건축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151년에 사망했다. 1231년, 오도 클레멘트(Odo Clement) 수도원장은 쉬제르가 만든 동쪽과 서쪽의 고딕 양식 사이에 남아 있던 낡은 카롤링거 양식의 본당(nave)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본당과 쉬제르가 만든 합창단 상부는 라요낭 고딕 양식으로 교체되었다. 오도 수도원장은 섭정이었던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그녀의 아들 루이 9세의 승인을 받아, 새로운 본당과 넓은 교차부(crossing)가 프랑스 왕실의 묘지로서 더 명확한 중심 역할을 하도록 계획했다. 이 계획은 1264년 방돔의 마태오 수도원장 시대에 실현되었는데, 16명의 전 왕과 왕비의 유해가 교차로 주변에 배치된 새로운 무덤으로 옮겨졌다. 남쪽에는 카롤링거 왕조 군주 8명, 북쪽에는 카페 왕조 군주 8명이 안치되었다.[21] 이 무덤들은 높이 솟은 받침대 위에 생생하게 조각된 누워있는 상(gisants)을 특징으로 한다. 프랑스 혁명 때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1860년 외젠 비올레르뒤크에 의해 두 개를 제외하고 모두 복원되었다.
두꺼운 벽과 작은 창문으로 어두웠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본당은 최신 기술인 라요낭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벽 면적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단단한 석조 벽 대신, 스테인드글라스(혁명 당시 모두 파괴됨)로 채워진 거대한 창문을 만들고, 창살(트레이서리)은 최대한 가늘게 처리했다. 이는 상부 창(클리어스토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어두웠던 중간층(트리포리움)에도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훨씬 커진 양쪽 익랑의 상부 정면에는 각각 지름 12m의 거대한 장미창이 설치되었다.[22] 쉬제르 시대의 재건축과 마찬가지로 이 라요낭 양식 재건축을 담당한 건축가 또는 석공장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종종 피에르 드 몽트뢰유에게 공로가 돌려지지만, 그의 참여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1247년의 관련 없는 문서에서 그를 '생드니 출신의 석공'으로 언급하는 것뿐이다.[23]
2. 3. 왕실 묘지로서의 역할 (13세기 ~ 18세기)
생드니 대성당은 오랜 기간 프랑스 왕실의 주요 매장지로 기능하며 "프랑스 왕가의 묘소"로 불렸다. 특히 1267년 루이 9세가 왕실 묘지를 공식적으로 조성하면서 그 역할이 더욱 확고해졌다.10세기부터 혁명기(1789년)까지, 단 3명의 군주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의 군주가 이곳에 안장되었다.[43] 이곳에는 루이 9세를 비롯하여 필리프 3세, 필리프 4세,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 앙리 4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등 많은 왕과 왕족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왕과 왕비의 묘 대부분은 지상묘(gisant) 형태로 제작되어, 누워있는 모습의 조각상이 묘 위에 안치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대성당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기도 했다. 백년 전쟁 (1337년–1453년)과 종교 전쟁 (1562년–1598년) 기간 동안 두 차례 약탈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무덤이 훼손되고 제단과 보물창고의 귀중품이 도난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 마리 드 메디치 시대와 그 이후 왕족들에 의해 여러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1572년에는 발루아 왕가 군주들의 영묘로 사용하기 위해 북쪽 익랑(Transept)에 인접하여 발루아 예배당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이 예배당은 후에 철거되었다. 1700년경의 계획도에는 이 예배당이 돔 형태의 로툰다(Rotunda)로 묘사되어 있다.[24] 1771년에는 본당에 흰수염고래의 골격이 전시되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생드니 대성당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왕실 묘지로서의 중요한 지위를 유지했다.
2. 4. 프랑스 혁명과 복원 (18세기 ~ 현재)
프랑스 혁명 이전에도 대성당에는 변화가 있었다. 18세기에는 발루아 왕가 군주들을 위한 무덤으로 사용될 발루아 예배당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후에 철거되었다.[24] 1700년경에는 수도원 건물의 재건이 시작되어 18세기 중반에 완료되었는데, 이 건물은 후에 나폴레옹에 의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들의 딸들을 위한 학교로 사용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771년에는 본당에 흰수염고래 뼈가 전시되었고(19세기에 복제품으로 교체), 쉬제르 시대에 서쪽 정면을 장식했던 초기 고딕 양식의 열주-조각상들이 철거되는 등 변화를 겪었다.프랑스 혁명은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생드니 대성당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1792년 9월 14일, 수도사들은 마지막 예배를 드렸고 다음 날 수도원은 해산되었다. 교회 건물은 곡물과 밀가루를 저장하는 창고로 전락했다. 1793년, 혁명 정부인 국민공회는 왕릉 파괴를 명령했다. 왕들의 무덤은 파헤쳐졌고 유해는 꺼내져 구덩이에 함께 버려졌다. 다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념물을 보존하기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어 일부 중요 유물들은 이후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존될 수 있었다. 중세 시대의 수도원 건물 대부분은 1792년에 철거되었다. 교회 자체는 남았지만 심하게 훼손되었고, 보물들은 몰수되었으며 성유물함과 전례용 가구들은 금속으로 녹여졌다. 쉬제르 시대의 성배와 같은 일부 귀중품들은 숨겨져 현재까지 전해진다. 서쪽 파사드의 구약성경 왕족 조각상들은 프랑스 왕과 왕비의 모습으로 오인되어 철거되었고, 팀파눔 조각도 훼손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794년에는 정부가 총알 제작을 위해 지붕의 납 기와를 제거하기로 결정하면서, 교회 내부는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생드니 대성당을 다시 봉헌하고 자신과 그의 왕조의 묘소로 지정했다. 그는 마지막 프랑스 왕들을 기리기 위한 세 개의 예배당 건설을 명령했으며, 갈리옹 성에서 가져온 화려하게 조각된 성가대석과 나무 상감 세공으로 예배당을 장식하도록 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왕정 복고가 이루어지면서, 루이 18세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를 찾아 생드니로 옮기도록 명령했다. 마들렌 교회 묘지에서 일부 유해가 발견되어 1815년 1월 21일 생드니 지하 묘소에 안치되었다. 루이 18세 자신은 1824년 사망 후 이곳에 묻힌 마지막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1817년에는 혁명기에 구덩이에 버려졌던 다른 왕족들의 유해도 수습되었으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여, 지하 납골당에 함께 안치되고 그 앞에는 수백 명의 왕족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판이 세워졌다. 루이 7세의 묘는 혁명 시기에도 무사했던 생 퐁 수도원에서 옮겨와 지하에 안장되었다. 2004년에는 루이 17세의 심장이 지하 묘소 벽에 봉인되었다.
1813년, 건축가 프랑수아 드브레가 대성당 복원 책임자로 임명되어 30년 넘게 혁명으로 인한 피해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본당 상부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프랑스 왕들의 모습으로 교체하고, 트랜셉트에 새로운 창문을 추가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1837년 북쪽 탑 첨탑이 번개로 파괴되자 드브레가 이를 재건했으나, 고딕 건축 원리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설계 오류를 범했고 결국 1845년 첨탑과 탑이 자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었다.[25]
드브레의 사임 후,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지지를 받은 외젠 비올레르 뒤크가 복원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비올레르 뒤크는 1879년 사망할 때까지 복원 작업을 계속하며 드브레의 작업을 상당 부분 수정했다. 그는 특히 왕릉 복원에 집중하여 내부 공간 일부를 프랑스 조각 박물관처럼 재배치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는 비올레르 뒤크에게 자신과 왕조를 위한 황실 묘역을 지하에 건설하도록 의뢰했으나, 황제가 폐위되면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895년, 나폴레옹이 설립했던 교회가 해산되면서 생드니는 대성당 지위를 잃고 다시 본당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1966년 새로운 센생드니 주 교구가 설립되면서 다시 대성당 지위를 되찾아, 공식 명칭은 "생드니 바실리크-카테드랄"이 되었다.
2016년 12월, 북쪽 탑이 해체된 지 170년 만에 프랑스 문화부는 기술적으로 재건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재건축을 다시 제안했다 (공적 자금 지원 제외).[26] 이후 "수이베 라 플레슈"(뾰족탑을 따라가세요)라는 단체가 설립되어, 게델롱 성 모델처럼 재건 과정을 대중에게 공개하여 기금을 모으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2018년 3월 문화부와 협약이 체결되어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공사는 2020년 5월 시작될 예정이었으나[27][28], 2500만유로 규모의 이 재건 계획에 대한 학계의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29] 2023년에는 대성당 부지에서 5세기부터 14세기에 걸친 수백 기의 무명 묘지가 발굴되는 성과가 있었다.[30] 같은 해, 25년에 걸쳐 진행된 스테인드 글라스 창 복원 프로젝트가 총 200만유로 이상의 비용을 들여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31]
3. 건축
생드니 대성당의 건축은 고딕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로 평가받는다. 1136년경 쉬제르 수도원장의 주도로 시작된 재건축은 기존의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을 혁신적인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쉬제르는 먼저 서쪽 부분을 확장하고 새로운 정면을 세웠으며, 이후 성가대석과 후진을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뾰족한 아치, 리브 볼트, 외부 부벽과 같은 새로운 건축 기술들이 결합되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술 덕분에 벽을 더 높이 쌓고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설치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이를 통해 내부 공간을 밝은 빛으로 채울 수 있었다. 쉬제르는 "밝은 것은 밝은 것과 밝게 결합되고, 새로운 빛으로 가득 찬 고귀한 건물도 밝다."[15]고 기록하며 빛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쉬제르가 완성한 새로운 구조는 1144년 6월 11일에 봉헌되었으며[18], 이후 프랑스 북부 왕실 영토를 시작으로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고딕 양식의 원형이 되었다.[19][20]
쉬제르 시대의 건축 작업에는 양식적 차이를 보이는 두 명의 익명의 석공장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 서쪽 부분을 담당한 석공장은 기존 로마네스크 양식의 풍부한 장식을 선호했지만, 후임자는 보다 절제되고 단순한 장식을 사용하여 새로운 고딕 양식의 가벼움을 표현했다.[17] 쉬제르가 계획했던 발루아 문은 그의 사후인 13세기에 완성되어 북쪽 익랑 끝으로 옮겨졌으며, 문의 정교한 조각은 고딕 조각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10]
쉬제르가 1151년에 사망한 후, 1231년 오도 클레멘트 수도원장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지어진 낡은 본당과 쉬제르 시대 성가대석 상부를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재건축은 섭정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그녀의 아들 루이 9세의 후원 아래 진행되었으며, 대성당을 프랑스 왕실 묘지로서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계획되었다.[21] 이 시기에 도입된 라요낭 고딕 양식은 벽 면적을 최소화하고, 거대한 창문과 정교한 트레이서리, 화려한 장미창을 통해 내부를 더욱 밝게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이전에는 어두웠던 트리포리움 층에도 창문을 내어 빛이 풍부하게 들어오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22] 13세기 재건축을 담당한 건축가 역시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피에르 드 몽트뢰유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다.[23]
생드니 대성당의 건축은 초기 고딕에서 라요낭 양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빛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혁신적인 구조와 디자인은 이후 고딕 건축 양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대성당 서쪽 정면에는 두 개의 탑이 있었으나, 북쪽 탑은 1837년 낙뢰와 이후 폭풍으로 손상되어 1846년 해체되었다. 해체된 건자재는 보존되어 있어 복원이 예정되어 있다.[50]
3. 1. 초기 고딕 양식 (쉬제르의 건축)
쉬제르(1081년경 ~ 1151년)는 생드니 대성당 재건 사업의 핵심 후원자였다. 그는 열 살 때부터 교회에서 경력을 시작해 1122년 수도원장이 되었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는 학창 시절 친구이자 신뢰받는 측근이자 재상이었다. 또한 루이 6세의 아들인 루이 7세의 측근이었고, 루이 7세가 십자군 원정으로 자리를 비웠을 때는 섭정을 맡기도 했다. 쉬제르는 뛰어난 모금 능력을 발휘하여 대성당을 위한 귀중한 보물을 확보하고 재건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마련했다. 1135년경, 그는 낡고 비좁아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어려웠던 기존 수도원 건물을 재건하고 확장하는 대대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쉬제르의 노력 덕분에 생드니 대성당은 12세기 프랑스 왕족의 주요 성소로 자리매김하며, 국왕 대관식이 열리던 랭스 대성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 이곳에는 예복, 왕관, 홀 등 대관식에 사용되는 상징물들이 보관되었다. 또한 1124년부터 15세기 중반까지 프랑스 국왕들은 전쟁에 나설 때 성인의 보호를 기원하며 생드니의 오리플람, 즉 왕의 전투 깃발을 들고 갔다. 이 깃발은 프랑스가 위험에 처했을 때만 대성당에서 꺼내 사용되었다.
쉬제르는 대성당 서쪽 끝 부분부터 재건을 시작했다. 그는 중앙에 문이 하나뿐이던 오래된 카롤링거 왕조 양식의 정면을 허물고, 기존 본당을 서쪽으로 네 개의 만(bay)만큼 확장했다. 그리고 새로운 정면과 1층에 세 개의 예배당을 갖춘 거대한 서쪽 현관을 추가했다.
1140년 6월 9일에 봉헌된 새로운 서쪽 정면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듯 세 부분으로 나뉘며 각각의 출입구를 가졌다. 거대한 수직 부벽이 세 개의 출입구를 나누고, 수평 몰딩과 아케이드 창은 각 부분을 명확하게 구획했다. 이러한 명확한 구획은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벗어나 고딕 건축으로 발전하는 특징적인 모습으로, 이후 서유럽 성당들의 서쪽 파사드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면을 가로지르는 성벽과 탑(1140년 당시 미완성)은 교회 정면이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입구임을 나타냈다.[16]
너비 34m, 깊이 20m의 이 새로운 정면은 세 개의 문을 가졌는데, 중앙 문은 본당의 너비를 반영하여 양쪽 문보다 더 크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삼분할 구조와 3층 높이, 측면 탑 구성은 11세기 후반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작인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교회 정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는 남쪽 탑만 남아 있으며, 북쪽 탑은 1846년에 발생한 토네이도로 인해 해체되었다.
서쪽 정면은 원래 구약 시대의 왕과 여왕을 나타내는 일련의 기둥 조각상으로 장식되었다. 이 조각상들은 1771년에 제거되었고 프랑스 혁명 동안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머리 부분의 일부는 파리의 클뤼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16] 중앙 출입구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새겨진 웅장한 팀파눔으로 장식되었고, 그 아래 인방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쉬제르 자신의 조각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겸손한 탄원이 새겨져 있었다. "받으소서, 엄격한 재판관이시여, 당신의 쉬제르의 기도를,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양들 가운데 저를 헤아려 주소서." 출입구를 막았던 금박 청동 문에는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과 함께 쉬제르의 후원을 명확히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현재의 청동 문은 현대적인 것이지만,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묘사한 원래 문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다.[16]
쉬제르의 건축가들은 서쪽 정면에 또 다른 혁신적인 요소를 도입했는데, 바로 중앙 문 위에 설치된 장미창이다. 삼각 팀파눔 내의 작은 원형 창(눈)은 이탈리아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 서쪽 정면에서 흔했지만, 이는 아마도 사각형 틀 내의 장미 창의 첫 번째 예일 것이다. 이는 곧 샤르트르 대성당 등 많은 곳에서 모방되어 프랑스 북부 고딕 양식 정면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32]

생드니 대성당은 건축학적으로도 획기적인 건물이다. 회랑은 고딕 건축 초기 주요 건축물 중 쉬제르의 후진(chevet) 또는 동쪽 끝이 유일하게 현존한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생드니 대성당의 고딕 구조는 대수도원장 쉬제르(1081년 - 1155년)에 의해 1136년경 시작되어 불과 4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144년 6월 11일에 봉헌되었다[47]。
쉬제르 시대에 지어진 주보랑(ambulatory)에는 볼트의 리브(Rib)를 지지하기 위해 가느다란 앙 데리(en délit, 암석을 가로로 길게 성형한 석재를 세로로 사용하는 것) 첨주가 세워져 있다. 앙 데리의 첨주는 일반적으로 여러 개의 모노리스(monolith, 단일석)를 세로로 이어서 만들지만, 이음새는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보강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금속 링으로 벽면의 조적조 부분에 고정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생드니 대성당에서 앙 데리의 첨주는 새롭게 도입된 건축 기술이며, 고딕 건축의 선상 요소 중 하나로서 중요한 공법이다. 생드니 대성당 이후, 상스 대성당, 누아용 대성당 등에서 앙 데리의 첨주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48][49] 주보랑에 사용된 원주는 한 개의 기둥이다. 반면, 앱스의 기둥은 13세기의 개축에 의한 것으로, 돌을 쌓아 만드는 성층 적층 기둥이다. 12세기의 받침대를 같은 위치에서 재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앱스의 개축 전 지주는 주보랑과 마찬가지로 원주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쉬제르 시대에 제작된 주보랑 제실에 있는 "알레고리의 창"(「성 바울의 우화」)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3. 2. 라요낭 고딕 양식 (13세기 재건축)
쉬제는 고딕 양식의 재건이 완료되지 않은 채 1151년에 사망했다. 1231년, 오도 클레멘트 수도원장은 동쪽과 서쪽에 쉬제의 고딕 양식이 부조화스럽게 끼어 있는 카롤링거 왕조의 본당을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본당과 쉬제의 합창단 상부 모두 라요낭 고딕 양식으로 교체되었다. 처음부터 오도 수도원장은 섭정 카스티야의 블랑슈와 그녀의 아들 루이 9세의 승인을 받아 새로운 본당과 넓은 교차로가 프랑스 '왕실 묘지', 즉 매장 장소로서 훨씬 더 명확한 초점을 갖도록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획은 1264년 방돔의 마태오 수도원장 시대에 16명의 전직 왕과 왕비의 유해가 교차로 주변에 배치된 새로운 무덤으로 옮겨지면서 실현되었다. 남쪽에는 8명의 카롤링거 왕조 군주, 북쪽에는 8명의 카페 왕조 군주가 안치되었다.[21] 이러한 무덤은 높이 솟은 받침대 위에 누워 있는 생생하게 조각된 엎드린 상 또는 '지상'(gisant)을 특징으로 하며, 프랑스 혁명 동안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1860년 비올레르 뒤크에 의해 두 개를 제외한 모든 것이 복원되었다.
두꺼운 벽과 작은 창문이 있는 어두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본당은 현재 라요낭 고딕으로 알려진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재건되었다. 쉬제의 초기 작품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신이 달랐던 만큼, 이 새로운 스타일은 벽 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견고한 석조는 찬란한 스테인드 글라스(혁명 당시 모두 파괴됨)로 채워지고 가장 얇은 막대 트레이서리로만 중단되는 거대한 창문 개구부로 대체되었다. 이는 클리어스토리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어두운 트리포리움 층에서도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훨씬 더 커진 두 개의 익랑의 상부 정면은 두 개의 웅장한 12m 폭의 장미 창으로 채워졌다.[22] 쉬제의 이전 재건축 작업과 마찬가지로 건축가 또는 석공장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종종 피에르 드 몽트뢰유에게 귀속되지만, 그의 참여에 대한 유일한 증거는 1247년의 관련 없는 문서로, 그를 '생드니 출신의 석공'이라고 언급하고 있다.[23]
본당은 일반 신자들을 위해 교회의 서쪽에 위치한 부분이며, 성가대석은 성직자들을 위해 동쪽에 위치한 부분으로, 동쪽의 앱스(apse)와 서쪽 정면부를 거쳐 13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다른 일 드 프랑스의 고딕 양식 교회처럼, 벽은 세 층으로 구성되었다. 1층에는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큰 아케이드가 있었고, 벽 중간에는 좁은 트리포리움 또는 통로가 있었는데, 원래는 창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채광창이 있는 높은 창문 열이 있었다. 가느다란 기둥이 기둥에서 벽 위로 솟아 올라 4분할 리브 볼트를 지지했다. 라요낭 양식으로 재건축되면서 트리포리움에는 창문이 생겼고, 상부 벽은 완전히 유리로 채워져 볼트의 아치까지 올라가 교회에 빛을 쏟아냈다.
현존하는 건축물의 대부분은 대수도원장 우도 클레망(재임: 1228년 - 1245년)의 지휘 아래 1231년에 착공되었다. 이 우도 클레망 시대에 개축, 조성된 부분은 라요낭 양식의 최초 사례로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내진의 주보랑 제실에 있는 "알레고리의 창"(「성 바울의 우화」)의 스테인드글라스는 걸작으로 유명하다.
주보랑에 사용된 원주는 한 개의 기둥(모노리스)이다. 반면, 앱스의 기둥은 13세기의 개축에 의한 것으로, 돌을 쌓아 만드는 성층 적층 기둥이다. 12세기의 받침대를 같은 위치에서 재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앱스의 개축 전 지주는 주보랑과 마찬가지로 원주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개축 이후, 한 개의 기둥인 모노리스 원주는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주보랑에는 볼트의 리브를 지지하는 가느다란 en délit|앙 데리fra(암석을 가로로 길게 성형한 석재를 세로로 사용하는 것)의 첨주가 세워져 있다. 앙 데리의 첨주는 일반적으로 여러 개의 모노리스를 세로로 이어서 만들지만, 이음새는 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보강이 필요하다. 그것들은 금속 링으로 벽면의 조적조 부분에 고정함으로써 실현되었다. 생드니 대성당에서 앙 데리의 첨주는 새롭게 도입된 건축 기술이며, 고딕 건축의 선상 요소 중 하나로서 중요한 공법이다. 생드니 대성당 이후, 상스 대성당, 노와이옹 대성당 등에서 앙 데리의 첨주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48][49]
3. 3. 건축 요소
1140년 6월 9일에 봉헌된 교회의 서쪽 정면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에는 자체 입구가 있다. 폭 34m, 깊이 20m의 이 새로운 정면은 중앙 정문이 측면 통로의 너비를 반영하여 양쪽 정문보다 크다. 이러한 삼분할 배치는 11세기 후반 노르만-로마네스크 양식의 생테티엔 수도원, 캉 교회 정면의 영향을 받았다.[16] 성벽이 서쪽 정면을 가로질러 탑(1140년 당시 미완성)을 연결하여, 교회 정면이 천상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상징적인 입구임을 나타낸다. 남쪽 탑만 남아 있으며, 북쪽 탑은 1846년 토네이도로 손상된 후 해체되었다. 건자재는 보존되어 있어 복원될 예정이다.[50]서쪽 정면은 원래 구약 시대의 왕과 여왕을 나타내는 기둥 조각상으로 장식되었으나, 1771년에 제거되었고 프랑스 혁명 중 대부분 파괴되었다. 일부 머리 부분은 파리의 클뤼니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16] 중앙 정문의 청동 문은 현대적인 것이지만,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묘사한 원래 문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다.[16] 쉬제르의 건축가들이 추가한 또 다른 원래 특징은 중앙 정문 위의 장미 창이다. 이는 사각형 틀 안의 장미 창의 첫 번째 사례일 수 있으며, 이후 샤르트르 대성당 등 여러 곳에서 모방되어 프랑스 북부 고딕 양식 정면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32]
본당은 일반 신자들을 위한 교회의 서쪽 부분으로, 13세기에 라요낭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다른 일 드 프랑스의 고딕 양식 교회처럼 벽은 세 층으로 구성되었다. 1층에는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큰 아케이드가 있고, 벽 중간에는 좁은 트리포리움(통로)이 있으며, 그 위에는 채광창이 있는 높은 창문 열이 있다. 가느다란 기둥이 기둥에서 벽 위로 솟아 올라 4분할 리브 볼트를 지지했다. 라요낭 양식으로 재건축되면서 트리포리움에도 창문이 생겼고, 상부 벽은 완전히 유리로 채워져 볼트의 아치까지 올라가 교회에 빛을 쏟아냈다.[11]
대성당의 동쪽 끝 부분인 체베(후진)는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초기 부분 중 하나로, 1140년 쉬제르 수도원장에 의해 의뢰되어 1144년에 완공되었다. 1231년부터 젊은 왕 루이 9세와 그의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슈에 의해 상당히 수정되어 본당과 함께 훨씬 더 높게 건설되었다. 상부 벽을 지지하고 거대한 창문을 설치하기 위해 대형 플라잉 버트레스가 추가되었다. 동시에 익랑이 확장되었고, 각 익랑 끝에는 지름 12m의 새로운 라요낭 양식의 대형 장미 창이 설치되었다.[22]
북쪽 익랑 끝에 있는 발루아 문(Porte de Valois)은 원래 12세기 말 쉬제르 시대에 계획되었으나 그의 사후 완성되어 13세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문설주에는 6개의 인물상이, 문 위 아치(볼트)에는 구약성서의 왕들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30개의 인물상이 있다. 문의 팀파눔은 생 드니와 그의 동료들의 순교 장면을 보여준다. 이 조각들은 사실성과 섬세함으로 고딕 조각의 중요한 이정표로 여겨진다.[10] 혁명 때 파괴된 원래 조각은 19세기 초 펠릭스 브룬(Felix Brun)이 제작한 조각으로 대체되었다.[8] 남쪽 정면의 팀파눔은 드니와 그의 동료들의 순교 전 마지막 날들을 묘사하며, 피에드루아(piedroits)는 달의 노동을 나타내는 메달리온으로 채워져 있다.[8]
쉬제르가 1140년에서 1144년 사이에 건설한 후진의 이중 주보랑은 고딕 건축의 최초의 중요한 사례 중 하나이다. 두꺼운 벽 대신 두 줄의 기둥으로 공간을 나누고, 외부 벽은 부벽 덕분에 창문으로 가득 채워 빛이 성가대 내부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주보랑은 5개의 방사형 예배당과 연결되며, 각 예배당에는 큰 창문이 있다. 예배당들은 동일한 아치형 지붕 시스템을 공유하며, 예배당 사이의 벽은 가느다란 기둥과 트레이서리로 덮여 벽의 존재감을 줄였다.[8] 13세기 개축 시에도 쉬제르가 만든 이 초기 고딕 양식의 특징들은 보존되었다.[12]
주보랑에 사용된 기둥은 한 개의 돌로 만든 원기둥(모노리스)이지만, 13세기에 개축된 앱스의 기둥은 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12세기 받침대를 재사용했기 때문에 개축 전 앱스의 기둥도 원기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보랑에는 볼트의 리브를 지지하는 가느다란 기둥(앙 데리 첨주)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여러 개의 모노리스를 세로로 이어 만들고 금속 링으로 벽에 고정하여 강도를 보강한 새로운 건축 기술이었다. 이는 고딕 건축의 중요한 선상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48][49]
교회 아래의 지하 묘소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고고학적 지하 묘소라고 불리는 더 오래된 부분은 트란셉트 아래에 위치하며, 약 775년 수도원 재건 시 지어졌다. 이곳에는 순례자들이 성 드니와 그의 동료들의 유물을 볼 수 있는 순례자 회랑이 있었다. 쉬제르는 이 지하 묘소를 재건하고 동쪽으로 확장했으며, 벽은 맹아치와 성경 장면을 묘사한 기둥머리가 있는 기둥으로 장식했다. 원래 62개의 로마네스크 양식 기둥머리 중 39개가 남아 있다. 쉬제르는 방사형 예배당과 연결된 새로운 순례자 회랑도 건설했다. 앙리 4세 치세 동안 지하 묘소 중앙 부분은 부르봉 왕조의 묘역으로 지정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당시 왕들의 유해는 훼손되고 흩어졌다.[34] 왕정 복고 이후 루이 18세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를 찾아 이곳에 안치했으며, 그들의 묘는 1975년 설치된 검은 대리석 판으로 덮여 있다. 루이 18세 자신도 1824년 사망 후 이곳 중앙에 묻혔다. 2004년에는 루이 17세의 심장이 지하 묘소 벽에 봉인되었다.[35]
4. 매장 인물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 왕과 왕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매장된 곳으로, 이 때문에 종종 "프랑스 왕가의 묘소"라고 불린다.[43] 이 전통은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 1세(639년 사망)가 이곳에 묻히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위그 카페(987년–996년) 치세부터 공식적인 왕가의 묘지로 자리 잡았다. 10세기부터 1789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한 군주 중 단 세 명(필리프 1세, 루이 11세, 루이 필리프 1세)을 제외한 모든 왕이 이곳에 안장되었다. 일부 초기 군주들의 유해는 파괴된 생트 주느비에브 수도원 등 다른 교회에서 옮겨왔다.
대성당 지하 묘소와 성가대 주변에는 왕과 왕비, 왕족들의 정교한 무덤 조각상들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13세기 루이 9세는 이전 군주들의 묘를 통일된 양식으로 재정비하여 왕가의 연속성을 강조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묘처럼 더욱 화려하고 극적인 형태의 기념물이 만들어졌다.
프랑스 혁명 시기인 1793년, 국민공회의 명령에 따라 왕릉들은 대대적으로 파괴되었다. 많은 묘가 열리고 유해는 꺼내져 인근 구덩이에 집단 매장되었으며, 산화 칼슘이 뿌려져 훼손되었다.[34] 이 과정에서 고고학자 알렉상드르 르누아르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많은 묘 조각상들을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51][3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6년 대성당을 다시 열었으나 훼손된 유해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루이 18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를 마들렌 묘지에서 찾아 1815년 생드니 지하 묘소로 이장했다. 1817년에는 혁명 시기 집단 매장된 다른 왕족들의 유해를 수습하여 신원 확인 없이 지하 납골당에 안치하고,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판을 세웠다.[34] 루이 18세 자신도 1824년 사망 후 이곳 지하 묘소에 묻혔으며, 생드니에 안장된 마지막 프랑스 국왕이 되었다. 2004년에는 루이 17세의 심장이 DNA 검사를 거쳐 이곳에 안치되었다.[35]
4. 1. 국왕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 왕과 왕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매장된 곳으로, 이 때문에 종종 "프랑스 왕가의 묘소"라고 불린다.[43] 10세기부터 1789년까지의 프랑스 군주 중 샤를마뉴, 필리프 1세, 루이 11세, 샤를 10세, 루이 필리프 1세 다섯 명을 제외한 모든 군주가 이곳에 묻혔다. 일부 초기 군주들의 유해는 파괴된 생트 주느비에브 수도원 등 다른 교회에서 옮겨왔다.
생드니가 프랑스 왕들의 묘소로서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시작한 것은 위그 카페(987년–996년) 치세부터지만, 그 이전에도 여러 왕들의 묘가 이미 이곳에 있었다. 이 장소는 파리의 초대 주교이자 프랑스 초기 기독교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이곳에 묻힌 성 드니와의 연관성 때문에 선택되었다.[44]
대성당에 묻힌 주요 군주 및 왕족은 다음과 같다.
- 클로비스 1세 (466년–511년)
- 킬데베르투스 1세 (496년–558년)
- 아레군트 (515/520년경–580년) (클로타르 1세의 왕비)
- 프레데군트 (597년 사망) (킬페리쿠스 1세의 왕비)
- 다고베르투스 1세 (603년–639년) - 생드니에 묻힌 최초의 왕으로, 묘는 13세기에 재건되었다.
- 클로비스 2세 (634년–657년)
- 샤를 마르텔 (686년–741년)
- 피핀 3세 (714년–768년)와 그의 아내 라온의 베르트라다 (710-727년 출생 - 783년 사망)
- 카를로마누스 1세 (751년–771년)
- 대머리 샤를 (823년–877년) (청동 기념물은 프랑스 혁명 때 녹여짐)와 그의 첫째 부인 오를레앙의 에르망트루드 (823년–869년)
- 루이 3세 (879년–882년)
- 카를로마누스 2세 (866년–884년)
- 오도 (888년–898년)
- 위그 카페 (묘는 혁명 중 소실)
- 로베르 2세 (972년–1031년)와 그의 셋째 부인 아를의 콩스탕스 (986년–1032년)
- 앙리 1세 (1008년–1060년)와 마틸드 드 프리
- 루이 6세 (1081년–1137년)
- 루이 7세 (1120년~1180년)와 그의 둘째 부인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1140년–1160년) (유해는 바르보 수도원에서 옮겨옴)
- 필리프 2세 (1165년–1223년)와 이자보 드 에노
- 루이 8세 (1187년–1226년)
- 성인 루이 9세 (1214년–1270년)와 마르그리트 드 프로방스
- 나폴리의 카를로 1세 (1227년–1285년) - 심장만 묻힘
- 필리프 3세 (1245년–1285년)와 그의 첫째 부인 프랑스 왕비 아라곤의 이사벨 (1248년-1271년)
- 필리프 4세 (1268년–1314년)
- 루이 10세와 클레망스 드 헝가리
- 장 1세 (1316년 출생 및 사망)
- 필리프 5세와 잔 드 부르고뉴
- 샤를 4세와 잔 데브뢰
- 필리프 6세와 잔 드 부르고뉴, 블랑슈 데브뢰
- 장 2세와 잔 도베르뉴
- 샤를 5세 (1338년–1380년)와 잔 드 부르봉
- 아르메니아 왕 레본 5세 (1342년–1393년) (가묘)
- 샤를 6세 (1368년–1422년)와 바이에른의 이자보
- 샤를 7세 (1403년–1461년)와 마리 당주
- 샤를 8세 (1470년–1498년)
- 루이 12세 (1462년–1515년)와 안 드 브르타뉴
- 프랑수아 1세 (1494년–1547년)와 클로드 드 프랑스
- 앙리 2세 (1519년–1559년)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 (1519년–1589년)
- 프랑수아 2세 (1544년–1560년)
- 샤를 9세 (1550년–1574년) (기념물 없음)
- 앙리 3세 (1551년–1589년) - 폴란드 국왕이기도 함 (심장만 묻힘)
- 앙리 4세 (1553년–1610년)와 마리 드 메디치,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 루이 13세 (1601년–1643년)와 안 도트리슈
- 루이 14세 (1638년–1715년)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1638–1683)
- 루이 15세 (1710년–1774년)와 마리 레슈친스카 (1703–1768)
- 루이 16세 (1754년–1793년)와 마리 앙투아네트 (1755년–1793년)
- 루이 17세 (1785년–1795년) (심장만 안치됨, 시신은 공동묘지에 버려짐)
- 루이 18세 (1755년–1824년)
- 베르트랑 뒤 게클랭 (샤를 5세 시대의 장군, 왕족 아님)
-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1675), 프랑스 원수


수도원 교회에는 왕과 왕비의 모습을 본뜬 훌륭한 묘들이 다수 있다. 13세기에 루이 9세는 이전 왕들과 프랑스 역사 인물들의 중요한 묘 제작을 의뢰했으며, 이들의 유해는 다른 교회에서 수습되었다. 이는 클로비스 1세, 샤를 마르텔, 피핀 3세 등의 묘를 포함하며, 프랑스 군주제의 연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비슷한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묘들은 더욱 극적이고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루이 12세와 안 드 브르타뉴의 묘는 흰 대리석 사원 형태로, 내부에는 죽음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왕과 왕비의 모습이, 외부와 위쪽에는 그들의 미덕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묘(1559) 역시 비슷한 형식으로, 프리마티초가 설계한 로마 사원 형태 위에 기도하는 왕과 왕비의 조각상이 있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많은 묘가 훼손되었다. 당국의 명령에 따라 묘가 열리고 유해는 꺼내져 근처 구덩이 두 곳에 버려졌으며, 시신 훼손을 위해 산화 칼슘이 뿌려졌다.[34] 고고학자이자 보존론자인 알렉상드르 르누아르는 많은 기념물을 예술 작품으로 주장하여 프랑스 기념물 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51][34]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6년 교회를 다시 열었지만 왕족의 유해는 그대로 두었다. 왕정 복고 이후인 1817년, 루이 18세는 구덩이를 열도록 명령했으나 신원 확인은 불가능했다. 수습된 158구의 유해는 지하 묘소의 납골당에 안치되었고,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판 뒤에 보관되었다.[34]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는 마들렌 묘지에서 발견되어 1815년 1월 21일 생드니 지하 묘소로 옮겨졌다. 이들의 묘 위에는 1975년 검은 대리석 판이 설치되었다.
루이 18세는 1824년 사망 후 지하 묘소 중앙, 루이 16세 부부 묘 근처에 묻혔으며, 생드니에 안장된 마지막 국왕이 되었다. 2004년에는 DNA 검사를 통해 진위가 확인된 루이 17세의 미라화된 심장이 크리스탈 항아리에 담겨 지하 묘소 벽에 안치되었다.[35]
4. 2. 그 외 왕족과 귀족
- 프랑스의 블랑슈 (필리프 4세의 딸)
- 오를레앙 공작 니콜라 앙리 (1607년–1611년) - 앙리 4세의 아들
-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1608년–1660년) - 앙리 4세의 아들
- *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 (1605년–1627년) - 가스통의 아내
- * 마르그리트 드 로렌 (1615년–1672년) - 오를레앙 공작부인이자 가스통의 둘째 부인
- * 안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 (1627년–1693년) - ''라 그랑 마드무아젤''
- * 마르그리트 루이즈 도를레앙 (1645년–1721년) - 토스카나 대공 부인
- * 발루아 공작 장 가스통 (1650년–1652년)
- * 마드무아젤 드 샤르트르 마리 안 도를레앙 (1652년–1656년)
- 프랑스의 헨리에타 마리아 (1609년–1669년)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찰스 1세의 아내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1640년–1701년) - 루이 14세의 동생
- * 잉글랜드의 헨리에타 공주 (1644년–1670년) - 필리프의 첫 번째 아내
- * 팔라티네이트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1652년–1722년) - 필리프의 두 번째 아내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1638년–1683년) - 루이 14세의 배우자
- * 프랑스의 루이 (1661년–1711년) - ''르 그랑 도팽''
-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공작 부인 (1660년–1690년) - 프랑스의 도핀, 루이의 아내
- * 프랑스의 안 공주 엘리자베트 (1662년) - 루이 14세의 딸
- * 프랑스의 마리 안 공주 (1664년) - 루이 14세의 딸
- *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공주 (1667년–1672년) - 루이 14세의 딸
- * 앙주 공작 필리프 샤를 (1668년–1671년) - 루이 14세의 아들
- * 프랑스의 루이 프랑수아 (1672년) - 앙주 공작, 루이 14세의 아들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 (1674년–1723년) - 프랑스 섭정
- 프랑스의 루이 (1682년–1712년) - 부르고뉴 공작
- *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공주 (1685년–1712년) - 부르고뉴 공작 부인
- * 루이 드 프랑스 (1704년–1705년) - 브르타뉴 공작
- * 프랑스의 루이 (1707년–1712년) - 브르타뉴 공작
- 베리 공작 샤를 (1686년–1714년)
- * 베리의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1695년–1719년) - 베리 공작 부인
- * 알랑송의 Na (세례 받지 않음) (1711년)
- * 알랑송의 샤를 (Charles d'Alençon, 1713년) - 알랑송 공작
- * 알랑송의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Marie Louise Élisabeth d'Alençon, 1714년)
- 마리 레슈친스카 (1703년–1768년) - 루이 15세의 배우자
- *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공주 (1727년–1759년) - 파르마 공작 부인
- * 프랑스의 앙리에트 공주 (1727년–1752년) - 루이 15세의 딸이자 위의 쌍둥이
- * 프랑스의 루이즈 공주 (1728년–1733년) - 루이 15세의 딸
- * 프랑스의 루이 (1729년–1765년) - 프랑스의 도팽 (단지 그의 심장만; 그의 시신은 생테티엔 대성당에 묻혔다)
-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인판타 (1726년–1746년) - 위의 첫 번째 아내
- ** 작센 공녀 마리아 요제파 (1731년–1767년) - 루이의 둘째 부인
- * 프랑스의 필리프 (1730년–1733년) - 앙주 공작
- * 프랑스의 마리 아델라이드 공주 (1732년–1800년) - 루이 15세의 딸
- * 프랑스의 빅투아르 공주 (1733년–1799년) - 루이 15세의 딸
- * 프랑스의 소피 공주 (1734년–1782년) - 루이 15세의 딸
- * 프랑스의 루이즈 공주 (1737년–1787년) - 루이 15세의 딸
- * 프랑스의 루이 조제프 도팽 (1781년–1789년)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아들
- * 프랑스의 소피 헬렌 베아트리스 공주 (1786년–1787년)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둘째 딸
-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1675년) - 프랑스 원수.
- 안 드 브르타뉴 (1477년–1514년) - 브르타뉴 여공작이자 샤를 8세 및 루이 12세의 아내.
5. 예술과 장식
대성당의 동쪽 끝 부분인 체베(chevet), 즉 후진은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초기 구조물 중 하나이다. 이 작업은 1140년 쉬제르 수도원장이 의뢰하여 1144년에 완공되었다. 이후 1231년부터 젊은 왕 루이 9세와 그의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블랑슈 드 카스티유에 의해 대대적으로 수정되었다. 후진은 본당과 함께 훨씬 더 높게 지어졌으며, 상부 벽을 지지하고 거대한 창문을 설치하기 위해 대형 플라잉 버트레스가 추가되었다. 석공들은 생마르탱데샹 수도원에서 사용된 것과 유사한 공학 기술을 적용하여 대형 예배당 창문을 지탱했다.
같은 시기에 익랑이 확장되었고, 새로운 레이오낭 양식의 대형 장미창이 설치되었다. 이 장미창은 원 안에 새겨진 삼엽창과 다른 기하학적 형태로 장식된 여러 개의 뾰족한 창으로 구성되었다. 양쪽 본당 벽은 창으로 가득 채워졌는데, 각 창은 삼엽창과 장미창으로 구성되어 트리포리움 위의 공간 전체를 차지했다. 상부 벽은 체베와 마찬가지로 본당 옆 예배당 사이에 기초를 둔 플라잉 버트레스에 의해 지지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내부 공간을 더욱 밝고 화려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사제들이 제의를 입던 공간인 사제관은 1812년 건축가 자크 셀러리에에 의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이곳은 대성당의 역사를 묘사한 벽화 갤러리로 꾸며졌다. 사제관에는 시몽 부에의 그림 "신성한 말씀의 알레고리"가 있는데, 이 작품은 원래 루이 13세가 생제르맹앙레 성의 제단화로 의뢰했던 것이다. 1993년 국립 기념물 관리국에 의해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벽면의 전시 케이스에는 대성당이 소장한 귀중한 물건들도 전시되어 있다.
5. 1. 스테인드글라스
쉬제르 수도원장은 새로운 쉐베를 위해 많은 양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의뢰했지만, 그의 시대인 12세기에 제작된 원래 유리는 아주 적은 양만 온전하게 남아있다. 19세기에 외젠 비올레르 뒤크가 이 남아있는 조각들을 수집하여 쉐베의 창문에 통합했다.원래 유리 조각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창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축선 예배당의 "그리스도의 유년기" 창에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쉬제르 자신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 같은 축선 예배당에는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여주는 이새의 나무 창이 있다.
- 내진의 주보랑 제실에 있는 "알레고리의 창"(또는 "성 바울의 우화")은 걸작으로 유명하며[48][49], 북쪽 네 번째 방사형 예배당의 "모세의 생애" 창과 함께 12세기 유리를 포함한다.
- 남쪽 네 번째 방사형 예배당에는 그리스도의 수난 그룹에서 유래한 "타우의 징표 아래의 에제키엘의 환상"을 묘사한 유리가 있다.
- 북쪽 두 번째 방사형 예배당에서는 낙원의 상징인 신화 속 그리핀을 묘사한 12세기 창 조각이 발견된다.
반면, 쉬제르가 의뢰했던 다른 창들, 예를 들어 샤를마뉴 대제의 순례나 십자군 전쟁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현재 대성당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상당 부분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던 19세기에 제작되었다. 건축가 프랑수아 드브레는 1813년 본당의 첫 네오 고딕 양식 창문을 디자인했는데, 여기에는 프랑스의 역대 왕과 왕비를 묘사한 본당 상층 창문이 포함된다. 이후 남쪽 익랑의 상층 창문에는 교회의 복원 과정과 특히 1837년 당시 국왕이었던 루이 필리프 1세의 방문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들 19세기 창문 중 상당수는 프랑수아 드브레의 형제인 화가 장바티스트 드브레가 디자인했다.
5. 2. 조각
쉬제르가 주도한 생드니 대성당 서쪽 정면의 재건축 과정에서 추가된 조각들은 고딕 양식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서쪽 정면 ===
1140년 봉헌된 새로운 서쪽 정면은 세 개의 문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문은 삼위일체를 상징한다. 중앙 정문은 금박을 입힌 청동 문으로 장식되었는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또한 문에는 쉬제르의 후원을 명확히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중앙 정문 위 팀파눔에는 최후의 심판 장면이 웅장하게 조각되었고, 그 아래 인방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쉬제르의 조각상과 함께 다음과 같은 겸손한 탄원문이 새겨졌다.
> "받으소서, 엄격한 재판관이시여, 당신의 쉬제르의 기도를,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양들 가운데 저를 헤아려 주소서."[24]
서쪽 정면의 가장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는 정문 양쪽 기둥에 부착된 길고 가는 형태의 '기둥 인물(statue-colonne)' 조각상들이었다. 이 조각상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과 왕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이후 파리와 샤르트르 대성당 건축에도 채택되어 거의 모든 고딕 양식 성당 정문의 특징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 중요한 기둥 조각상들은 1771년에 제거되었고 프랑스 혁명 시기에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베르나르 드 몽포콩의 그림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으며, 일부 머리 부분은 현재 파리의 클뤼니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중앙 팀파눔에는 위엄을 갖춘 그리스도가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그 아래 무덤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오른쪽) 정문 팀파눔에는 생드니의 순교 장면이 조각되었고, 북쪽(왼쪽) 정문 위에는 원래 모자이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었다. 쉬제르는 이 모자이크에 대해 '현대 관습에 반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현재 서쪽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조각의 대부분은 1839년에 이루어진 복원 작업의 결과이며, 원본 조각의 일부 파편만이 클뤼니 박물관에 남아 있다.[36]
=== 익랑 정문 ===
북쪽 익랑 끝에 위치한 발루아 문(Porte de Valois)은 쉬제르의 생애 말년인 12세기에 계획되어 13세기에 재건되었다. 쉬제르에 따르면 원래 북쪽 입구에는 조각 대신 모자이크가 있었으나, 1140년대에 조각상으로 대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작업은 쉬제르가 1151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북쪽 정문의 조각은 문설주에 6개의 인물상, 아치 볼트에 30개의 인물상(구약의 왕들로 추정)이 있으며, 팀파눔에는 생드니와 그의 동료 엘레우테르, 루스티쿠스의 순교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1175년경 제작된 이 북쪽 익랑 정문의 조각상들은 매우 길고 표현력이 풍부한 인물 묘사를 특징으로 하며, 고딕 조각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같은 시기 샤르트르 대성당의 보다 절제되고 위엄 있는 조각상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또한 이 조각들은 기법이나 인물의 경직성 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 고딕 조각사에서 중요한 단계로 평가받는다. 북쪽 정문의 원래 조각들은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었고, 19세기 초 펠릭스 브룬(Felix Brun)에 의해 복원되었다.
남쪽 익랑 정문의 팀파눔에는 생드니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하기 전 마지막 날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문설주인 피에드루아(piedroits)에는 달의 순환에 따른 노동(Les Travaux des mois)을 나타내는 메달리온들이 장식되어 있다.
=== 무덤 조각 ===
생드니 대성당은 프랑스 왕족의 묘역으로 사용되면서 내부에 많은 왕과 왕비, 귀족들의 무덤 조각(Gisant)이 안치되었다. 이 조각들은 각 시대의 장례 미술과 조각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5. 3. 성가대석
본당은 일반 신자를 위한 서쪽 공간이고, 성가대석(Choir|콰이어eng)은 성직자를 위한 동쪽 공간이다. 동쪽의 애프스(apse)와 서쪽 정면부를 거쳐 13세기에 라요낭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다른 일드프랑스 지역의 고딕 교회처럼 벽은 3개 층으로 구성되었다. 1층에는 거대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아케이드, 중간에는 창문 없는 좁은 통로인 트리포리움(Triforium), 위층에는 채광창(Clerestory)이 있는 높은 창문 열로 이루어졌다. 가느다란 기둥 다발이 아케이드 기둥에서 천장의 4분할 리브 볼트까지 이어져 하중을 지지한다. 라요낭 양식으로 재건축되면서 트리포리움에도 창문이 설치되었고, 상부 벽면은 천장 아치까지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 채워 빛이 풍부하게 들어오도록 했다.
성직자들을 위한 좌석인 성가대석(Stalls)은 특히 정교한 조각으로 유명하며, 특히 장시간 서 있는 성직자들이 기댈 수 있도록 각 의자 아래에 작은 접이식 좌석인 미제레코드(Misericord)가 설치된 것이 특징이다. 이 성가대석은 16세기에 제작되었으며, 원래 외르주의 가이용 성(Château de Gaillon) 높은 예배당에 있던 것이다. 180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생드니에 3개의 새 예배당을 만들고 그의 삼촌 페쉬 추기경을 책임자로 임명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성가대석은 정교한 목조각 외에도 다채로운 색상으로 종교 장면을 묘사한 상감 세공(Intarsia) 장식이 돋보인다.
5. 4. 오르간

오르간은 본당 서쪽, 트륀에 위치해 있다. 1520년에 바실리카에 오르간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크레스팽 카르리에가 제작한 후기 오르간 역시 1520년에 기록되었으나, 이 악기는 프랑스 혁명 동안 파괴되었다. 교회는 1806년에 오르간 없이 다시 문을 열었다.
1833년, 새로운 오르간 제작자를 찾기 위한 경쟁이 열렸고, 당시 23세였던 아리스티드 카바이에-콜이 우승했다. 이는 그의 첫 오르간 작품이었으며, 1843년에 완공되어 그의 오르간 제작자로서의 경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37]
이 오르간은 낭만주의 시대에 도입된 여러 혁신적인 기술을 담고 있는데, 특히 최초의 바커 레버가 사용된 것으로 유명하다. 세 개의 수동 건반과 페달 건반을 갖추고 있으며, 프랑스의 역사 기념물fra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오르간은 1901년에 샤를르 뮈탱에 의해, 그리고 1983년부터 1987년 사이에는 장-루 보아소와 베르트랑 카티오에 의해 복원되었다.
1987년부터 2018년까지 30년간 유일한 전속 오르간 연주자였던 피에르 팽스메일은 이 악기를 사용하여 많은 리사이틀(1989년~1995년, 2014년~2017년)을 열었으며, 8개의 CD를 녹음하기도 했다.[37]
6.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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