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 (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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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호는 후조의 인물로, 석륵의 조카이자 양아들로 형제처럼 자랐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으나, 잔혹한 성격으로 인해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질렀으며, 후조 건국 이후 주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석륵 사후, 섭정 조천왕으로 즉위하여 무리한 토목 공사를 벌이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력을 소모시켰으며, 아들들 간의 후계자 다툼으로 인해 잔혹한 숙청을 자행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후조는 잦은 전쟁과 내분으로 국력이 쇠퇴했고, 이는 후조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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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즉위 이전
석호는 석륵의 조카로 29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멱(寇覓)이며, 석륵의 아버지 주갈주(周曷朱)가 석호를 아들로 삼았다. 311년, 병주자사 유곤이 석륵의 모친과 석호를 찾아 석륵에게 송환하면서 서진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석륵은 이를 거절하였다.[1]
석호는 잔인하고 무도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켰으나,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석륵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319년에 석륵이 후조를 건국하자 중산공에 봉해졌고, 329년에는 전조를 멸망시켰다. 330년에 석륵이 황제에 즉위하자 중산왕에 봉해졌다.[1]
333년 석륵이 사망하자, 석호는 태자 석홍을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1]
2. 1. 석륵과의 관계
석호는 석륵의 조카로, 295년에 태어났다. 석호의 아버지는 구멱(寇覓)이며, 석륵의 아버지 주갈주(周曷朱)가 석호를 아들로 삼았다. 그래서 석호와 석륵은 형제처럼 지냈다.[1] 302년부터 303년에 걸쳐 병주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석륵을 따라 고향을 떠났으나, 영흥 연간(304년~306년)에 석륵과 헤어졌다.[8] 태안 연간(302년 ~ 303년)에 기근이 들어 갈족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석륵과 헤어져 석륵의 모친과 함께 살았다.[1]311년 10월, 석호는 석륵의 어머니인 왕씨와 함께 지내고 있었는데,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에게 붙잡혔다. 당시 석륵은 한(후의 전조)의 장군이 되어 중원을 휩쓸고 있었으며, 이때는 갈피(여음군동양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유곤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부하인 장유에게 명하여 석호와 왕씨를 돌려보냈다. 또한 서신을 함께 보내어, 진나라 조정에 귀순하여 함께 한나라 황제 유총을 토벌하도록 요청했다. 석륵은 이를 거절했지만, 어머니와 석호를 돌려보낸 것에 대해서는 감사의 뜻을 표하고, 사자인 장유를 후하게 대접하여 명마와 진보를 선물하여 보냈다.[8]
석호는 잔혹한 성격으로 말을 몰아 사냥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 방탕함에는 한계가 없었다. 또한 탄궁 (화살 대신 탄환을 쏘는 활)을 즐겨 쏘았고, 여러 번 사람을 쐈다. 그 때문에 군대 내에서 석호의 존재는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석륵은 몰래 그를 죽이려 생각하고, 어머니 왕씨에게 "이 아이는 흉폭하고 무뢰하지만, 병사에게 그를 죽이게 하면 평판이 나빠집니다. 스스로 죽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씨는 "튼튼한 소도 송아지 때는 많은 수레를 망가뜨리는 법입니다. 너는 이것을 조금 참아라"라고 간언했으므로, 석륵은 생각을 접었다.[9] 석호는 천성이 잔인하고 무도하여 석륵의 군중에서도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석륵은 석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모친이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석호가 장성하여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석륵은 석호를 장군으로 삼고 총애하였다.[1]
312년 2월, 석륵은 갈피에 머물면서 건업 공략을 꾀했지만, 기아와 역병으로 병사의 대다수를 잃어 싸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낭야왕 사마예 (후의 원제)는 석륵을 맞이하기 위해 강남의 장병을 수춘으로 집결시키자, 석륵은 마침내 철수를 결단했다. 석호는 치중이 북쪽으로 퇴각할 때까지 시간을 벌도록 명령받아 기병 2천을 이끌고 감히 수춘으로 진격했다. 그 도중, 강남에서 도착한 쌀과 천을 실은 수송선 수십 척을 발견하자, 석호의 장병은 앞다투어 이것에 몰려들어 수비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진나라 군대의 복병이 일제히 나타나자, 석호는 거령구에서 패배하여 500명이 넘는 익사자를 냈다. 게다가 퇴각할 때 서진 군대의 지휘관 기첨에 의해 100리에 걸쳐 추격을 받았다. 기첨군이 석륵의 본대에까지 다가오자, 석륵은 진을 쳐서 습격에 대비했지만, 기첨이 석륵의 복병을 경계하여 수춘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위기를 넘겼다. 석륵은 무사히 퇴각에 성공하여 북쪽으로 귀환한 후 상국에 근거지를 두었다.[9]
312년 12월, 석륵은 대항 세력인 단부와 강화하기 위해 석호를 수장 단질륙견에게 파견했다. 석호는 그와 의형제의 의를 맺고 맹약을 맺은 후 귀환했다.[9]
석호는 석륵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319년에 석륵이 후조를 건국하자 중산공에 봉해졌고 최일선에서 활약하였다.[1] 석륵이 후조를 건국한 이후, 석호에게 크게 의존하여 주요 적들을 격파했다. 석호가 참여한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6]
325년에 전조의 군대가 낙양을 포위하자 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며, 328년에는 전조의 거점 병주를 공략하였다. 329년에는 장안을 함락하고 진주를 공략하여 전조를 멸망시켰다.[1]
세월이 흐르면서 시호는 석륵의 핵심 조언자인 정하(程遐) (석륵의 태자 석홍(石弘)의 외삼촌)와 서광(徐光)과 적대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시호의 야심을 간파하고 석륵에게 그의 권력을 제한할 것을 촉구했다.[7]
2. 2. 주요 전투 및 사건
334년, 석홍은 석호에게 선양할 뜻을 비추었고, 석호는 이를 받아들여 섭정 조천왕(居攝趙天王)에 즉위하였다. 석호는 양국과 업에 궁궐을 짓고 황하에 다리를 놓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력을 소모시켰다. 불교를 깊이 믿어 널리 포교하게 하였으며, 335년 수도를 업으로 옮겼고, 337년에는 섭정을 그만두고 천왕에 즉위하였다.[6]
3. 섭정 조천왕 즉위 (334년)
3. 1. 통치 방식
석호는 즉위 후 유흥에 빠져 정치를 멀리하고, 백성에게 가혹한 형벌과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 궁궐을 짓고, 많은 첩을 들이는 데 재물을 낭비하여 백성을 곤궁에 빠뜨렸다.[7] 술과 여자에 빠져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고, 사소한 일에도 분노하여 잦은 숙청을 벌였다. 사냥과 은밀한 행차도 절제하지 못하고,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았다.[10]
한편, 석호는 경학에 관심을 갖고 국자박사를 낙양에 보내 석경을 베껴오게 하고, 비서에게 교정하게 했다. 국자좨주 섭웅은 『곡량춘추』 주석으로 학관에 등용되었다. 불교에 관대하여 스스로 불교도를 칭하며 불도징을 국사로 대우했다. 한인 관료 왕도가 불교를 외래 종교로 배척해야 한다고 간언하자, 석호는 자신은 변방 출신이므로 융신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며 물리쳤다.
또한, 석호는 선대 제왕과 선현의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을 약탈하는 등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3. 2. 주변국과의 관계
석호는 주변의 여러 국가들에 대해 원정을 실시하여 영토를 늘리기도 하였으나, 무리한 원정으로 인해 국력을 크게 소모시켰다.[6] 338년 선비족 단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 모용부의 전연을 공격했다가 패배하였다.[6] 339년 동진을 공격하여 수춘을 비롯한 장강 이북을 대부분 점령하였다.[6] 340년과 342년 전연과 동진을 공격하기 위해 가혹한 징병과 징발을 실시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6] 346년 전량을 공격하였으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6]
4. 후계자 분쟁과 죽음
333년, 석륵이 병이 들자, 석호는 간병을 명목으로 궁에 들어가 석륵과 외부와의 소통을 막았다. 석호는 거짓 조서를 내려 석홍(태자가 아님)과 석륵의 양자 석간을 수도 상국(현재의 허베이성)으로 소환하여 감금했다. 석륵이 죽자, 석호는 즉시 태자 석홍을 붙잡아 억지로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후 석호는 석홍에게 위왕(魏王)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이는 조조의 칭호를 의도적으로 따온 것이었다. 석륵의 신하들은 모두 좌천되거나 실권 없는 자리로 옮겨졌고, 석호의 측근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석륵의 부인 유태후는 석간과 공모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하자 석호는 그를 체포하여 화형으로 잔혹하게 처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태후의 음모가 발각되었고, 그녀 또한 처형되었다.
333년 겨울, 석생은 장안을 지키며, 석랑은 낙양을 지키며 석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포홍의 저 추장 또한 봉기하였다. 석호는 직접 석랑을 공격하여 쉽게 낙양을 함락하고 석랑을 죽였다. 그 후 아들 석정과 함께 장안을 공격했으나, 석정은 석생의 부하 궈취안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석호는 철수했다. 그러나 석생은 이 승리를 알지 못했고, 선비족 추장 섭괴가 반란을 일으키자 당황하여 장안을 버리고 도망가다 죽임을 당했다. 궈취안은 상구이로 도망쳤지만, 334년에 패배했다. 포홍은 항복했고 사면받았다. 이것으로 석호에 대한 주요 저항은 끝났다.
334년, 석호의 보복을 견디지 못한 석홍은 직접 황제의 인장을 가지고 석호의 궁을 방문하여 그에게 양위를 제안했다. 석호는 비꼬는 말로 거절했고, 석홍은 다른 의도를 펼칠 수 없었다. 334년 말, 석호는 석홍을 해양왕(海陽王)으로 강등시켰으나, 곧 그와 그의 어머니 쳉태후, 그리고 그의 형제 석홍과 석회를 죽였다. 신하들은 석호에게 황제의 자리를 바쳤지만, 석호는 이를 거절하고 "섭정 천왕" (攝政天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348년 석호는 석도를 총애하여 석선 대신 태자로 세울까 생각했지만, 석선이 나이가 더 많아 실행하지 않았다. 석선이 석호에게 반항하자, 석호는 "도(석도)를 세우지 않은 것은 실패였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석도는 오만해져, 태위부에 건물을 짓고 선광전이라 이름 붙였으며, 석선의 이름을 사용하여 모욕했다. 이에 석선은 측근 양배, 모성, 조생과 함께 석도를 암살하고, 석호를 살해하여 국권을 장악하려 했다.
9월, 석선이 주살된 후 석호는 여러 신하들과 새로운 황태자를 논의했다. 태위 장거는 석빈과 석준을 추천했지만, 장시는 석호를 부추겨 석세를 태자로 옹립하고, 유씨를 황후로 세워 자신이 보정(輔政)의 책임을 맡을 음모를 꾸몄다. 석호는 장시를 꾸짖었지만, 결국 석세를 태자로 세웠다. 석호는 태상 조조와 광록훈 두가를 불러 태자의 부로 삼고, 행실을 바로잡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월, 석호의 병세가 악화되자 석준, 석빈, 장시에게 석세를 보좌하도록 했다. 그러나 유황후는 석빈과 석준이 정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장시와 함께 석빈 등을 제거하려 했다. 석빈은 유황후의 계략에 속아 살해되었고, 석준은 아버지 석호를 만나지 못한 채 관중으로 떠나야 했다. 유황후는 조서를 위조하여 장시를 태보·도독중외제군사·녹상서사로 임명했다. 같은 달, 석호가 붕어했다. 예정대로 석세가 즉위하고, 유황후는 황태후로 추대되었다. 6월, 그의 유해는 현원릉(顯原陵)에 안장되었다. 무제(武帝)로 시호되었으며, 묘호는 태조(太祖)로 정해졌다.
4. 1. 석선과의 갈등
석수(石邃)는 어릴 적부터 용감하고 총명하여 석호(石虎)의 총애를 받았으나, 성장하면서 잔혹하고 방탕한 성격으로 변했다. 그는 술과 여자에 빠져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았고, 아버지 석호의 권위에 도전했다.석수는 자신의 이복형제인 석선(石宣)과 석도(石韜)를 질투하여 원수처럼 미워했다. 특히 석호가 석도를 총애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석도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석수는 348년 8월, 측근 양배 등을 시켜 석도를 살해했다. 석호는 석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진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석수의 범행을 밝혀냈다. 석호는 석수를 잔혹하게 처형하고, 그의 가족과 측근들까지 모두 몰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석호는 큰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고, 후조(後趙)의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4. 2. 석도와의 관계
석도는 석호의 총애를 받는 아들 중 하나였으며, 석선과의 권력 다툼에서 희생양이 되었다. 석선은 석도를 질투하여 원수처럼 미워했다.348년 4월, 석호는 석도를 총애하여 석선 대신 태자로 세울까 생각했지만, 석선이 나이가 더 많아 실행하지 않았다. 석선이 석호에게 반항하자, 석호는 "도(석도)를 세우지 않은 것은 실패였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석도는 더욱 오만해져, 태위부(석도는 태위)에 건물을 짓고 선광전이라 이름 붙였으며, 석선의 이름을 사용하여 모욕했다. 이에 석선은 측근 양배, 모성, 조생과 함께 석도 암살을 결단하고, 더 나아가 석호까지 살해하여 국권을 장악하려 했다.
8월 밤, 석도는 동명관에서 측근들과 술자리를 열고 불정사에서 숙박했다. 석선은 양배 등에게 미후제(가늘고 긴 사다리)를 걸어 숙소에 침입하게 했고, 석도는 살해되었다.
날이 밝자 석선은 이 사건을 상주했다. 석호는 경악하여 졸도했다가 의식을 되찾았다. 궁전에 나와 상을 치르려 했지만, 사공 이농이 "진공(석도)을 해친 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역적이 경사(업)에 있다면, 경솔하게 나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간언하여, 석호는 태무전에서 애도했다.
석선은 소차를 타고 천 명을 따르며 석도의 상을 치렀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고 "허허"라고만 말하며 덮개를 열어 시체를 보고 크게 웃고 떠났다. 대장군기실참군 정정, 윤무 등을 체포하여 석도 살해 죄를 뒤집어씌웠지만, 석호는 석도를 죽인 것이 석선이라 의심했다. 석호는 석선을 불러 진위를 가리려 했지만, 석선이 경계하여 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어머니 두주가 슬픔에 겨워 위독해졌다고 거짓으로 알리고 석선을 불렀다. 석선이 의심 없이 중궁에 들어오자, 석호는 그를 억류했다.
사과라는 인물이 석선의 모략을 알고 석호에게 모두 보고했다. 석호는 양배, 모성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그들은 도망쳤다. 조생을 체포하여 추궁하자 모두 자백했다. 석호는 석선을 석고에 유폐하고, 턱에 구멍을 뚫어 철환을 채우고 쇠사슬에 묶었다. 석호는 수두의 나무통을 만들게 하고 국밥을 섞어 돼지나 개처럼 먹였다. 석호는 석도가 살해된 칼과 화살을 손에 들고 그 피를 핥으며 울부짖었고, 궁전이 흔들릴 정도였다. 불도징은 "선, 도는 모두 폐하의 아들입니다. 지금 도를 위해 선을 죽이려 하시는데, 이는 화를 거듭할 뿐입니다."라고 간언했지만, 석호는 따르지 않았다.
석호는 업의 북쪽에 섶을 쌓아 표를 세우고, 표 끝에 녹로를 놓아 구멍을 내 밧줄을 통하게 하고, 사다리에도 섶을 쌓았다. 석도를 죽인 환관 학치, 유패는 석선의 머리카락과 혀를 뽑고 밧줄을 석선의 턱에 통과시켜 녹로로 조였다. 유패는 석선의 손발을 절단하고 눈을 베어 장을 뭉개 석도와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사면에 불을 지르자 연기가 하늘에 닿을 듯했다. 석호는 유소의 이하 수천 명과 함께 중대에 올라 이를 구경했다. 불이 꺼지자 유해를 여러 문 입구에 뿌렸다.
4. 3. 말년
石虎|스후중국어는 348년 막내 아들 석세를 태자로 책봉하였다.[7] 349년 정월,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얼마 후 병으로 몸져 누웠으며, 같은 해 4월에 사망하였다.[7]石虎|스후중국어의 사망 당시, 유황후(劉皇后)는 석빈과 석준이 정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장시와 함께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석빈은 유황후의 계략에 속아 살해되었고, 석준은 아버지 石虎|스후중국어를 만나지 못한 채 관중으로 떠나야 했다.[7]
石虎|스후중국어 사후, 그의 유해는 현원릉(顯原陵)에 안장되었고, 무제(武帝)라는 시호와 태조(太祖)라는 묘호를 받았다.[7] 그가 죽은 후, 석세가 뒤를 이었으나, 불과 33일 만에 석준의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석준 또한 석민과 석감에게 살해되었고, 석감 역시 석민에게 살해되었다. 350년, 석민은 이민족을 학살하고, 본래 성인 염민(冉閔)으로 개명하여 염위를 건국했다. 이에 대항하여 석지가 후조 황제를 칭했지만, 351년에는 석지 또한 내란으로 살해되었다.[7]
石虎|스후중국어 사후 불과 2년 만에 후조는 멸망했고, 염위, 전진의 부홍(포홍), 전연의 모용준 등이 중원의 패권을 다투게 되었다.[7]
5. 평가 및 영향
석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졌으나, 잔인하고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폭군으로 평가받는다.[10]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후조는 잦은 전쟁과 내분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소모되었으며, 이는 후조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석호는 자신의 훈공이 제일이라 자부하며 대선우 자리를 원했지만, 석륵의 아들 석홍이 임명되자 원한을 품었다.[10] 서광과 정하는 석륵에게 석호를 제거할 것을 권했으나, 석륵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10]
석호는 즉위 후 유락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하고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10]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노역을 부과하고, 미녀와 재물을 강탈하여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10] 이러한 행태는 한족 지식층의 기록에서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석호의 군사력, 카리스마, 행정 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석호는 군대 내에서 용맹함과 책략이 뛰어난 자들을 시기하여 제거했으며, 점령지의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했다.[10] 석륵은 이를 꾸짖었지만, 석호는 고치지 않았다. 그러나 군대를 이끌 때는 엄격하고 흐트러짐이 없어, 정벌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10]
석호는 불교를 장려하여 불도징을 국사로 대우하고 사찰 건립을 지원했다.[10] 하지만 이는 불교계의 부패와 타락을 초래하기도 했다. 왕도는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석호는 "변방 출신이므로 융신을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며 거부했다.[10]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석호는 진보적 가치에 반하는 폭군이자 독재자로 평가될 수 있다. 그의 잔혹한 통치와 백성에 대한 억압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진보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Zizhi Tongjian
[3]
문서
Shi Hu (石虎)
[4]
간행물
Materials on history of nomadic tribes in China 3rd-5th cc
Science, Moscow
1992
[5]
서적
晋書
[6]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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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
[8]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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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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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資治通鑑
[11]
서적
十六国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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