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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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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선규는 일제강점기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동대문구청장, 서울특별시 부시장, 서울시 행정장관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제2대, 제3대 국회의원, 참의원 부의장을 지냈으며, 민주국민당, 민주당 등에서 활동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자유민주당 창당을 주도하고, 한일협정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1968년 위장병 등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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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소선규
한자 이름蘇宣奎
로마자 표기So Seon-gyu
직업
직업정치인
정치 활동
소속 정당대한민국 헌정회
주요 경력제헌 국회의원
가족 관계
형제소완규

2. 생애

1903년 전라북도 익산 출생으로, 1928년 후쿠시마 고등상업학교(후의 후쿠시마 대학)를 졸업하고 도쿄 상과대학(후의 히토츠바시 대학)에 진학했다.[4] 해방 후 동대문구 구청장을 역임하고, 1946년 서울특별시 부시장을 지냈다.[1][2]

1950년 제2대 총선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익산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한 가운데, 정당 이름을 걸고 당선된 초선 의원이었다. 김성수와 신익희 등이 이끌던 민주국민당은 의원 25명에 불과했지만, 소선규는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투사형 야당 의원으로 활동했다.[1][2]

1960년 4·19 혁명 직후 치러진 제5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거대 여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하여 김도연, 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신구파 분리 및 보수 양당 체제를 제안했다. 예상대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자, 신파 민주당과 구파 신민당으로 분열되었다.[1][2]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한동안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가, 1963년 민정 이양을 앞두고 김준연 등과 함께 자유민주당 창당을 주도하고 창당위원장을 역임했다. 같은 해 제6대 총선 이후 야당 통합으로 민정당, 자유민주당, 민주당, 국민의당이 통합되었을 때, 잠시 무소속으로 지낸 뒤 통합 야당인 민중당에 참여했다.[1][2]

제6대 국회 회기 중 한일협정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에서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지고,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행동했다. 제6대 국회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고, 1968년 위장병, 담낭질환, 으로 사망했다.[1][2] 국회의원 재임 중 헌법위원, 상공위원장,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 자유민주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1][2]

2. 1. 초기 활동

1903년 11월 30일 전라북도 익산군 팔봉면 용제리(후일의 익산시 팔봉동)에서 소휘창(蘇輝昌)의 아들로 태어났다. 익산의 지주 가문 출신으로, 출생지는 전라북도 익산이었지만 후에 경성으로 본적지를 옮겼다. 어려서 부안군 계화도에 가서 성리학자 간재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글과 학문을 배우다가 일본으로 유학,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福島高等商業學校)를 다녔다.

소완규(蘇完奎)는 변호사였는데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933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나혜석최린을 상대로 낸 위자료 청구 소송 당시 나혜석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4]소완규미 군정 시기에 법무부 차장을 역임했지만 6.25 전쟁 중 실종되었다. 조카 소진탁(蘇鎭琸)은 의사였다.

1925년 일본 유학 중 일시 귀국하여 8월 13일 이리공립보통학교에서 익산유학생회를 창립,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간사로 활동했다. 8월 23일에는 이리 지역 강연회에서 '조선의 장래'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29년 후쿠시마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28년 후쿠시마 고등상업학교(후의 후쿠시마 대학)를 졸업하고 도쿄 상과대학(후의 히토츠바시 대학)에 진학했다.[4]

2. 2. 관료 생활

1929년 경성부속이 되었다.[4] 1930년에는 경기도 용인군속으로 전임되었다가 1936년 다시 경성부로 전보되어, 경성부 서무국 서무과에서 1941년까지 근무했다.[4]

2. 3. 제헌 국회의원 낙선과 제2대 국회의원 당선

1948년 4월 11일 5.10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서울특별시 부시장직과 서울연료회사 회장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민당 공천으로 익산을구에 입후보했다가 낙선하였다. 한때 서울특별시의 청소 용역 대행업체 운영을 추천받았지만 거절했다.

이후 일반 회사에 취직하여 회사원으로 근무하다가 사직서를 쓰고 1950년 5월 10일 제2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국민당 공천으로 익산갑구에 출마, 5월 30일 당선되었다.

2. 4. 민주국민당 활동과 6.25 전쟁

1950년 6월 24일 조선호텔에서 이청천, 신익희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 원내교섭단체를 조직했다.[4]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회는 제5차 임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소선규는 쌀을 포함한 식량의 삼합 배급을 11월 말일까지 연장하고, 대책위원회의 대책안을 국회 표결에 부쳐 구체적으로 작성하여 입안할 것을 건의하였다. 제2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그는 상공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1년 4월 26일, 국민방위군 사건이 문제가 되자, 소선규는 국회 제64차 본회의에서 서민호, 엄상섭, 이종영, 조광섭 의원 등과 함께 국민방위군 사건 책임자 처벌과 할복사죄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6월, 그는 인구 10만 이상의 대도시에 중앙도매시장을 의무적으로 설치하여 중간 상인의 과도한 이익 창출을 막는 중앙도매시장 법안을 남송학, 김영선 등과 함께 국회에 상정했다. 12월 1일에는 비공개로 진행된 내무부 경비 등 예산안 보유 심의에서 예산 삭감안이 결정되었으나, 소선규는 이에 맹렬히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당시 민주국민당김성수, 신익희, 윤보선, 조병옥 등 명망가들이 이끌었지만, 원내 의석은 25석에 불과했다. 소선규는 적극적으로 발언과 발의에 참여하여 투사형 야당 이미지를 각인시켰다.[4]

2. 5. 2대 국회 활동

1952년 2월 18일 벽보사건 국회 진상대책위원회의 민주국민당 몫 대책위원으로 선출되었다.[4] 5월 14일에는 서민호 의원의 서창선 대위 사살 사건에 대해 시체 위치 문제에 대한 의혹과, 의문이 있으면 재부검을 하는데 왜 시체를 화장하였는가를 질의하였다.[4] 6월 13일에는 제75차 본회의에 참석, 대통령의 임기 개정 문제를 놓고 조봉암, 이재형, 박성하 등 참석 의원들과 함께 논의하였다. 이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임기 시작을 당선일인 7월 20일부터로 계산하느냐, 취임 수락을 발표한 7월 24일부터냐로 논할 때 7월 24일설을 지지하였다.[4] 6월 1일 신중목 의원의 석방결의안을 제출하여 82대 0으로 통과되었다.[4] 7월 17일에는 소선규 대표발의 외 10인으로 대통령선거법 수정안을 발표하여 통과되었다.[4] 8월 24일에는 지방분여세 통과에 대한 질의를 하였다.[4] 9월 11일에는 농림위원회가 제시한 농지개혁법안을 놓고 찬반이 나뉠 때 찬성표를 던졌다.[4] 8월에는 중석불 사건을 두고 집중 질의하였다.[4] 10월 17일에는 이윤영의 총리 인준안에 대해 내각 조각을 위해서는 동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국회의 내각 불신임은 곧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도 되고, 대통령은 임기 4년을 보장하지만 책임을 지지 않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4]

1952년 11월 13일 상공회의소법을 대표발의하였다.[4] 11월 20일 민주국민당 당 상무부서장 선출에서 당 외정책위원회 정책위원에 선출되었다.[4] 1953년 1월 29일의 2대 민의원 후반기 각 분과위원회 선출시 상공위원회 소속이 되었다.[4] 2대 민의원 하반기 상공위원회 위원장 선출에 태완선 등과 경합하였다.[4] 2월 8일 민주국민당 의원부 대표 임흥순이 국회 국방위원장이 되면서, 그가 민주국민당 의원부 대표에 선출되었다.[4] 11월 27일 민국당 중앙당 각 부서 선출시 선전부 위원이 되었다.[4] 그밖에도 2대 민의원에서 그는 안건이 발의되면 참석하여 질의, 의사발표, 안건 제출 등에 반드시 참여하였다.[4]

1953년 3월 25일 제39차 본회의에서 농림부 운영자금 관련 안건을 제출하였으나, 농림부가 불출석하자 초근목피, 아사자 속출을 들어 정부측의 태도 무성의를 질의하였다.[4] 4월 1일 각 부서 예산편성 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미국 워싱턴에는 무기원조 승낙을 받으면 국무회의에서 결정해서 예산을 세우고 국회의 승인을 얻는다 하면서, 국방부 예산을 국회 동의 없이 다 썼느냐고 추궁하였다.[4] 7월 7일에는 국회 내무위에 7월 3일의 민국당 당사 습격 사건 진상규명을 입안하였다.[4] 그는 민국당 당사 습격건에 대해, 민국당은 반공청년 석방을 지지하였는데도 반공청년 석방을 반대하는 민국당 타도라는 구호를 문제제기하였다.[4] 7월 27일에는 민주국민당 탈당 의원이 급증하자, 김도연, 최두선 등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을 찾아가 야당 보존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4] 9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정국은 사건 조사특위 구성안 의결과 관세법 중 개정안 처리 의결에 참석, 면세범위를 대형 선박과 항공기 재료에만 한정하지 말고, 중소기업 중 대중적 생필품을 만드는 분야까지 확대시킬 것을 제안하였다.[4] 10월 10일 민주국민당 상무집행위원회 전당대회에서 당 혁신발전연구위원회 위원에 선출됐다.[4]

1953년 5월 28일 휴전회담 당시 대한민국 국회 측 대표단을 선발할 때 민주국민당 몫의 대표로 선출, 대표단 단장인 윤치영 민의원부의장 등과 함께 바로 회담장에 도착, 6월 26일까지 미국과 UN, 북한의 휴전협정 체결을 국회 대표단 자격으로 참관하였다.[4] 5월 30일에는 윤치영, 임흥순, 곽상훈 등 국회 대표단 중 9인과 함께 문산 평화촌 판문점에서 UN측 대표인 미국 육군 중장 해리슨 중장을 면담하였다.[4]

1953년 11월 10일의 민의원 임시회에 참석, 11월 15일 54년도 양곡수급계획과 매상가격 동의안 등이 회부되지 않는 것을 국회 농림위에 문제제기하였다.[4] 11월 17일 양곡 가격에 대해 농림부장관 등에게 문제 제기를 하였다.[4] 1954년 1월 25일 민의원에서 민의원의원 입후보 연고지제 개정안 발표에 참여했으나, 부결되었다.[4] 그는 개표혼합제를 대안으로 세웠지만 역시 부결되었다.[4]

1954년 2월 19일 민의원 본회의에서 형사소송법 26장 474개조항 부칙구조를 놓고 표결에 들어가자 그는 본 법심의에는 법률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하여 질의를 해도 답할 사람이 없음을 들어 대체토론 후 표결로 정하자고 하여 그대로 통과되었다.[4] 1954년 3월 24일 민의원 제39차 본회의에 참석하여 공무원 처우개선금 등 97억의 예산을 통과하는 추가예산수정안 표결에 참석하고 기획처장에게 질의하였다.[4] 4월 5월 10일의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국민당 공천으로 익산 을구에 입후보, 5월 22일 당선되었다.[4]

2. 6. 3대 민의원 활동과 호헌동지회 참여

1954년 김성수, 신익희, 조병옥, 조봉암, 김도연, 김준연, 장면, 윤보선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자유당의 개헌안 반대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6]

3대 민의원에서는 국회 상공분과위원장과 민의원 교통체신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1954년 6월 11일 제3대 민의원 제24차 본회의에서 원내교섭단체 설치를 놓고 자유당은 12일 구성안을 제시하자, 그는 15일 구성안을 제시하였다. 6월 23일 총리 부재 중 국회에서 개최된 내각 신임안 결의에 참석하였고, 6월 29일에는 정부 내각 신임표결에 참석하여 새 내각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8월 9일부터 8월 11일까지 진행된 민의원 본회의 대정부 질의에서는 경찰 인원 수가 평화시의 3배 이상 증원되어 있다며 경찰 인원 감축을 촉구했다.

8월 26일 전국 물가가 2배, 전철 및 철도 요금이 90% 인상되자 송방용, 조경규, 조순 의원 등과 함께 물가 인상 반대 및 국영시설, 관영시설 요금 인상 반대를 촉구하였다. 8월 27일에는 조재천, 권중돈, 유진산 등과 함께 이기붕을 면담하여 개헌안에 대한 협상을 토론하였으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9월 1일 민의원 정부기구간소화추진 대책위원회를 소집하고, 심의 후 민의원 행정기구간소화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뒤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9월 17일 민의원 46차 본회의에 참석하여 농민의 임시토지수득세법중개정법안(국회 재경위안) 통과와 제세법개정안, 민의원 국방위와 외무위에서 제출한 미군 일부 철수 반대결의안 표결에 참석하고 모두 동의하였다.[6] 그는 주한미군 철수 논의가 미국의 여론, 학계에서 제기되자, 미군철수반대전국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9월 15일 국회의사당에서 조직된 미군철수반대전국위원회에서 임흥순, 오재영, 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측 총무, 자유당측 총무 윤치영 등과 함께 공동총무로 선출되어 주한미군 철수 반대 범국민운동을 추진했다. 그해 12월 말 미국 연방정부에서는 주한미군 철수 계획은 당분간 없다는 뜻을 재확인시켜주었다.

10월 17일 대통령 선거 관련 개헌안의 반대측 대표 의사로 발표하였고, 10월 7일에는 개헌안 반대 관련 연사로 지방을 순회하였다.

10월 25일 민의원 61차 본회의에서 백남식 의원과 함께 수복지구 예산 삭감을 추궁하다가 국회 내에서 고성이 오가자 의장 곽상훈이 산회를 선언했다. 10월 26일에도 야당 의원을 비판하는 자유당 의원에 맞서 이철승 의원 등과 함께 발언 취소를 요구하였다. 10월 30일에는 한국 대표단이 네루 인도 수상을 면담할 장소가 아닌 뉴델리에 30분간 체류한 것과, 뉴델리 밀회 사건을 폭로한 함상훈을 당에서 제명한 일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였다. 11월 15일에는 당시 각종 폭로와 구호가 삐라, 벽보 등으로 확산되자 내무부장관과 지방경찰의 직무 수행을 추궁하였다.

1954년 11월 4일부터는 함상훈의 뉴델리 밀회 의혹 제기 관련 함상훈, 김동성 등을 국회로 소환해 질의, 청취하였다. 이때 그는 민중자주연맹의 이름으로 게시된 유인물을 입수해 왔다. 11월 15일 민의원에서는 민주당을 규탄하는 삐라, 벽보가 계속 발견되자, 내무부에서 지방 행정기관에 개헌 지지를 독려하지 않았는가를 추궁하였다. 11월 27일 정부 개편과 개헌에 대한 반대 의사를 발표했다. 11월 30일 자유당의 헌법 개정 추진에 반발, 장택상, 조병옥, 곽상훈, 유진산 등과 함께 국회 위헌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에 선임되었다. 12월 13일 국회 62차 본회의에서 백두진 내무부장관 불신임 결의안과 갈홍기 공보처장 파면결의안을 9명의 다른 의원들과 함께 대표 발의하였다. 그러나 12월 15일 민의원 표결에서 부결되자 항의 발언을 하였다.

12월 5일 호헌동지회의 각 분과 부서를 선임할 때 임흥순, 이인 등과 함께 호헌동지회 운영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12월 30일 신당결성촉진위원회가 결성되자 재무간사에 위촉되었다. 신당결성위원회에서는 문호 개방을 결정했지만 그대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1955년 민주당 창당 시에는 당 정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2. 7. 민주당 창당과 참의원 활동

1960년 4·19 혁명 이후 7·29 선거에서 참의원 의원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어, 참의원 구성 후 바로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소선규는 민주당 구파로 활동했는데, 통합유지측인 신파의 의견에 반대하여 김도연, 유진산 등과 함께 구파 입장에 서서 분당론을 내세웠다.[4]

소선규는 민주당이 거대 여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됨에 따라, 김도연, 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의 신구 양 파를 분리하여 보수 양당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예상대로 민주당이 대승을 거두자, 소선규 등이 제안한 대로 신파 민주당과 구파 신민당으로 분열되었다.[1][2]

2. 8. 생애 후반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신민당 공천에서 탈락하고 신민당을 탈당하였다.

1964년의 한일협정 당시, 윤보선, 이범석, 박순천, 장택상 등 야당 지도자들 주도로 한일협정 반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학생 운동가들의 동참으로 한일 협정 반대운동이 벌어졌지만 그는 참가하기 거부했다. 그는 일본이 과거 적국이기는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아 필요하면 협정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주장했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다른 야당 인사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1967년 2월 4일 민중당에 입당하였다가 2월 13일 신민당으로 입당하였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정치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위장병을 앓아왔다고 한다.[7] 1968년 8월 17일 오전 7시경 서울 권농동 92-1 자택에서 위장병과 담낭질환과 으로 사망했다. 사후 시신은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면 용화동 선산에 안장되었다.

3. 평가

소선규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유명한 투사형 야당 정치인이었다. 대한민국 제2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당선되었을 때, 소속 정당은 의원 25명에 불과한 소수 야당이었지만, 소선규는 굴하지 않고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4]

4·19 혁명 이후 대한민국 제5대 총선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되자, 김도연, 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신·구파 분리를 통한 보수 양당 체제 구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정치 지형의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였다.[1]

5·16 군사정변 이후 야당이 난립하던 시기에는 자유민주당 창당을 주도하며 정계 복귀를 모색했다. 대한민국 제6대 총선 이후에는 야당 통합에 참여하여 민중당 소속으로 활동했다.[1]

한일협정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필요하다는 소신을 밝히며, 야당의 무조건적인 반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단순한 반대를 넘어선 합리적인 대안 제시를 중시하는 그의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1]

전반적으로 소선규는 소신과 원칙을 중시하는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때로는 소수 야당의 일원으로서, 때로는 정계 개편의 주도자로서, 또 때로는 야당 통합의 일원으로서 한국 정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1][2]

4. 역대 선거 결과

연도선거 종류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48년제헌 국회의원 선거한국민주당9,868표 (32.23%)2위낙선
1950년제2대 국회의원 선거민주국민당7,303표 (21.95%)1위당선초선
1954년제3대 국회의원 선거민주국민당15,601표 (42.46%)1위당선재선
1958년제4대 국회의원 선거민주당19,472표 (46.87%)2위낙선
1963년제6대 국회의원 선거자유민주당752,026표 (8.1%)전국구 2번당선3선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소창휘(蘇輝昌)?
소완규1902년 8월 19일 ~ ?
형수박성정(朴聖貞)1909년 12월 ~ ?
조카소진탁1920년 ~ 2016년 12월 31일의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기생충학 교수
종손소의영?아주대학교 의대 교수
조카소진명(蘇鎭明)1934년 ~
조카딸소인경(蘇仁京)?
부인
아들소진철1930년 ~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임


6. 소선규를 연기한 배우

참조

[1] 웹사이트 소선규(蘇宣奎) https://encykorea.ak[...] 2023-08-20
[2]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3-08-20
[3] 웹사이트 [익산신문] 소세양과 진주소씨 - 정복규 본사사장 http://www.iksannews[...] 2023-08-20
[4] 논문 「帝国」の大学に学んだ朝鮮人学生 https://catalog.lib.[...]
[5] 뉴스 공창 폐지 대책위원회를 결성 자유신문 1947-11-25
[6] 문서 이 두 법안은 국회 재석인원 만장일치로 표결되었다.
[7] 뉴스 전참의원부의장 소선규씨 별세 중앙일보 1968-08-17
[8] 뉴스 자유신문 1946-10-13
[9] 뉴스 서울특별시의 인사이동발령 경향신문 194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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