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빌로니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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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기원전 612년 칼데아인 나보폴라사르가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바빌론을 수도로 건국한 왕국이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바빌론의 건축물을 건설했으나, 이후 쇠퇴하여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멸망했다. 신바빌로니아는 고대 바빌로니아 문화를 계승하여 아카드어를 행정 및 문화 언어로 사용했으며, 마르두크를 수호신으로 숭배했다. 사회는 자유민, 노예, 소작농으로 구성되었으며, 경제는 관개 시설을 이용한 농업과 상업이 발달했다. 왕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고, 군대는 조공 획득과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건축에서는 사원, 궁전, 지구라트, 도시 성벽 등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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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바빌로니아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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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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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통칭 | 바빌로니아 |
공식 명칭 | 마트 바빌리 마트 아카디 마트 슈메리 우 아카디 |
위치 | 메소포타미아 |
수도 | 바빌론 테이마 (데 팍토, 기원전 553–543년) |
역사 | |
건국 | 바빌론 반란 (기원전 626년) |
멸망 | 오피스 전투 (기원전 539년) |
주요 사건 | 니네베 함락 (기원전 612년) 예루살렘 포위 (기원전 587년)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왕 | 나보폴라사르 (기원전 626–605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 (기원전 605–562년) 아멜-마르두크 (기원전 562–560년) 네리글리사르 (기원전 560–556년) 라바시-마르두크 (기원전 556년) 나보니두스 (기원전 556–539년) |
언어 | |
공용어 | 아카드어 아람어 |
종교 | |
종교 | 바빌로니아 종교 |
면적 | |
면적 (기원전 562년) | 500,000 제곱킬로미터 |
상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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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국가 | |
계승 국가 | 아케메네스 제국 |
선행 국가 | 신아시리아 제국 |
2. 역사
바빌로니아가 멸망한 이후 3세기 동안 바빌로니아 지역은 아시리아에 의해 통치되었다. 아시리아의 전성기를 이끈 아슈르바니팔이 죽은 지 1년 후인 기원전 627년, 아시리아 제국이 내전에 휘말리자 나보폴라사르가 반란을 일으켰다. 칼데아인들은 기원전 612년에 니네베를 함락시키고 바빌론을 수도로 하는 신바빌로니아를 건국하였다.
이후 신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바빌론의 문과 바빌론의 공중정원 등의 건축물들을 건설하는 등 최전성기를 맞이하였지만,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539년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에게 멸망했다.
2. 1. 신바빌로니아 제국 성립 이전
기원전 10세기 초, 바빌로니아는 중앙 권력 부재와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아람인과 칼데아인 부족들이 바빌로니아에 정착했으며, 특히 칼데아인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바빌로니아 북부에는 강력한 신아시리아 제국이 있었고, 이들은 여러 구실을 내세워 바빌로니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칼데아인 메로다크 발라단 2세가 엘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르자,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는 대규모 바빌로니아 원정을 감행했고, 메로다크 발라단 2세는 도망쳤다. 이후 엘람의 도움으로 다시 바빌로니아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시리아 왕 센나케리브에게 진압되었다.
센나케리브는 자신의 장남 아슈르 나딘 슈미를 바빌로니아 왕위에 앉혔지만, 아슈르 나딘 슈미는 침입해 온 엘람 군에게 연행되었다. 이에 분노한 센나케리브는 보복을 위해 엘람을 침공하여 많은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다. 게다가 아시리아 군은 바빌론을 포위했고, 15개월 후에 함락시켰다.
센나케리브의 뒤를 이은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은 바빌론을 재건했다. 그는 막내아들 아슈르바니팔을 아시리아 왕으로, 맏아들 샤마슈 슈므 우킨을 바빌로니아 왕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빌로니아 왕은 아시리아 왕에게 종속된 입장이었고, 바빌로니아에서의 최종 결정권은 아슈르바니팔에게 있었다. 샤마슈 슈므 우킨은 기원전 652년, 아시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와 아람인, 칼데아인의 여러 부족(전부는 아님)이 반(反) 아시리아 군에 가담했다. 특히 칼데아인 나부 베르 슈마티는 샤마슈 슈므 우킨과 함께 또 다른 반란의 주모자로 아시리아에 인식되었다.
기원전 650년, 아시리아 군이 바빌론을 포위하면서 굶주림과 역병으로 많은 사람이 사망했다. 그리고 2년 후, 샤마슈 슈므 우킨이 왕궁 화재로 사망하면서 반란은 막을 내렸다. 아슈르바니팔은 엘람을 제압하여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엘람에 은신해 있던 나부 베르 슈마티도 자살했다.
반란 이후 칸다라누라는 인물이 바빌로니아 왕이 되었지만, 이 인물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아슈르바니팔이 죽자, 아시리아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고, 바빌로니아도 혼란에 휩싸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시리아에 대한 반란의 주도자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보폴라사르(재위 기원전 625년 - 기원전 605년)이다.
나보폴라사르는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자의 아들"이라고 비문에 적어, 그의 출신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칼데아인이라거나, 아시리아의 장군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현재의 연구에서는 바빌로니아 남부에 있는 우루크 시의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여겨진다. 우루크는 친(親) 아시리아 성향을 보였으며, 원래 아시리아파였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출신을 숨겼다고 추정된다.
나보폴라사르는 기원전 626년에 바빌론의 왕으로 즉위한 후에도, 모든 바빌로니아 도시를 지배하에 둔 것은 아니었으며, 아시리아와의 항쟁은 계속되었지만, 점차 아시리아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2. 2. 나보폴라사르
신아시리아 왕 신샤리쉬쿤 통치 초기에, 남부 관리 또는 장군이었던 나보폴라사르는 신-슈무-리시르와의 짧은 내전으로 야기된 아시리아의 정치적 불안을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626년에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과 니푸르를 공격하여 점령했다.[2] 아시리아의 대응은 빨랐고, 그해 10월 니푸르를 재탈환하고 우루크에서 나보폴라사르를 포위했다. 그러나 신샤리쉬쿤은 바빌론 점령에 실패했고, 나보폴라사르는 우루크 포위를 견디며 아시리아군을 격퇴했다.[3]
기원전 626년 11월,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론의 왕으로 즉위하여 1세기 이상 지속된 아시리아 통치를 끝내고 바빌로니아를 독립 왕국으로 복원했다.[3] 기원전 625년부터 623년까지 데르 등 남부 도시들이 나보폴라사르에 합류했고, 신샤리쉬쿤은 기원전 623년 대규모 반격을 이끌었다. 이 반격은 초기에 성공적이었지만, 아시리아 본토의 반란으로 인해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4]
아시리아 군대의 부재는 바빌론인들이 기원전 622년부터 620년까지 아시리아의 마지막 거점들을 정복할 기회를 주었다.[4] 우루크와 니푸르는 기원전 620년까지 확실히 바빌론의 손에 들어갔고, 나보폴라사르는 바빌로니아 전역을 통일했다.[5] 이집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시리아는 쇠퇴하기 시작했다.[6]
기원전 615년, 메디아 왕 키악사레스는 아시리아를 공격하여 아르라파를 정복했다.[6] 기원전 614년, 메디아는 칼후와 니네베를 공격하고 아슈르를 포위, 함락시켰다. 나보폴라사르는 약탈이 시작된 후에야 아슈르에 도착하여 키악사레스와 동맹을 맺었다.[7] 기원전 612년, 메디아-바빌론 연합군은 니네베를 공격, 3개월간의 포위 끝에 함락시켰다. 니네베 전투에서 신샤리쉬쿤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7]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슈르-우발리트 2세는 기원전 609년 하란에서 패배했다. 이집트는 바빌론과 전쟁을 계속했지만,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나보폴라사르의 왕세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패배했다.
나보폴라사르는 자신의 출신을 "보잘것없는 자의 아들"이라고 기록하여 그 기원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칼데아인 또는 아시리아 장군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최근 연구는 그가 우루크 출신으로 친아시리아 성향을 숨기려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보폴라사르는 기원전 612년 메디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 니네베를 함락시켜 아시리아를 멸망시켰다. 이후 바빌로니아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침공했고,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에서 이집트를 격파했다. 같은 해 나보폴라사르는 사망하고 아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즉위했다.
2. 3. 네부카드네자르 2세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나보폴라사르의 아들로, 기원전 605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1] 그는 메디아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키악사레스의 딸 또는 손녀인 아미티스와 결혼했다.[1] 일부 자료에 따르면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은 네부카드네자르가 아내를 위해 고향을 떠올리도록 짓게 한 것이라고 한다. 다만, 이 정원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 그의 43년 통치는 바빌론에 황금기를 가져왔고, 바빌론은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되었다.[1]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레반트 지역에 대한 군사 원정을 반복했다.[2] 그의 통치 초기에 시작된 이 원정은 주로 그의 통치를 안정시키고 제국을 통합하기 위해 수행되었다.[2] 기원전 604년에는 블레셋의 아스클론을 파괴했다.[3]
기원전 597년과 기원전 586년에는 유다 왕국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많은 주민들을 바빌론으로 강제 연행했다. (바빌론 유수)[2][3] 13년 동안 티레를 포위했지만, 티레는 기원전 573년에 항복하여[4] 봉신 왕의 통치를 받기로 동의했다.[5]
네부카드네자르는 군사적 업적 외에도 훌륭한 건축가였다.[6] 바빌론의 이슈타르 문과 행렬의 거리, 신전 등 수많은 건축물을 건설했다.[6] 그는 최소 13개의 도시를 완전히 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과 자원을 수도인 바빌론에 쏟았다.[6]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시대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최전성기였다.[3]
2. 4. 네부카드네자르 2세 이후
네부카드네자르 2세 사후 바빌로니아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졌다. 그의 아들 아멜마르두크는 즉위 2년 만에 암살당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사위이자 고관이었던 네리글리사르가 아멜마르두크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당시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오래 재위하지 못했다. 네리글리사르의 아들 라바시마르두크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사자르의 쿠데타로 전복되었다.2. 5. 나보니두스
나보니두스는 기원전 555년에 라바시마르두크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지만, 왕족 출신은 아니었다.[1] 그의 어머니 아다드-구피는 아람인으로 추정되며, 달의 신 신을 숭배했던 하란 출신이었다.[1]나보니두스는 즉위 직후 아라비아 반도의 타이마로 원정을 떠나 10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1] 그가 왜 장기간 바빌론을 비웠는지는 명확하지 않다.[1] 나보니두스가 없는 동안 그의 아들 벨사자르가 바빌로니아를 통치했지만, 왕이 없이는 새해 축제를 열 수 없었다.[1]
기원전 541년경 바빌론으로 돌아온 나보니두스는 신전 개혁을 실시했는데, 특히 달의 신 신을 마르두크 대신 최고신으로 삼아 바빌로니아 주민, 특히 신관들의 반감을 샀다.[1]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2세는 이러한 반감을 이용하여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 무혈 입성했다.[1]
3. 문화
신바빌로니아 통치자들은 왕국의 전신인 바빌로니아의 문화를 계승하는 전통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비록 아람어가 일상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드어는 행정과 문화의 언어로 유지되었다. 1500년 전의 고고학적 표현들은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던 수메르어로 된 단어들과 함께 아카드어 비문들에 다시 소개되었다.
바빌로니아 문화는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 수 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이후 헬레니즘 마케도니아 및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 하에서도 살아남았다.[3] 파르티아 제국 통치 하에서 바빌론은 점차 주요 도시 중심지로서 버려졌고, 오래된 아카드 문화는 진정으로 사라졌다. 파르티아 통치 초기 약 1세기 동안 바빌론 문화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벨-아흐헤-우수르' 및 '나부-무셰티크-우디'와 같이 전통적인 바빌론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에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기원전 127년의 법적 문서에서 은을 받는 사람으로 언급됨).[4]
아카드어 법적 문서는 헬레니즘 왕들의 통치 기간 동안 약간 감소한 수로 계속되었지만, 파르티아 통치 시대에는 드물었다. 고대 바빌론 시대부터 보존된 천문 일기는 페르시아와 헬레니즘 통치를 거쳐 기원전 1세기 중반에 쓰여지는 것이 중단되었다.[5] 파르티아 왕 시대에 아카드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을 것이며, 사람들이 셀레우키아 및 크테시폰과 같은 새로운 메소포타미아 수도로 몰려들면서 오래된 바빌론 사원은 점점 인력이 부족해지고 자금 지원이 줄어들었다.[6]
아카드 설형 문자로 된 오래된 서기관 전통에 따라 작성된 마지막 날짜의 문서는 기원전 35년의 것으로, 마르두크에게 드리는 기도를 담고 있다. 아카드어로 작성된 마지막 알려진 다른 문서는 서기 75년의 천문 예측(예: 행성 운동)이다. 이러한 천문 텍스트에서 기호가 쓰이는 방식은 독자들이 아카드어를 이해하기 위해 익숙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7] 만약 아카드 언어와 바빌로니아 문화가 이러한 희소한 문서를 넘어 살아남았다면, 이는 사산 제국에서 도입된 종교 개혁과 함께 서기 230년경에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이 시점까지 고대 바빌론의 숭배 중심지는 이미 폐쇄되고 파괴되었다. 일부 사원은 파르티아 초기 시대에 폐쇄되었는데, 예를 들어 우루크의 많은 사원이 그렇고, 다른 사원은 파르티아 제국 말기까지 존속했는데, 예를 들어 바빌론의 에사길라가 그렇다.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예술가들은 이전 시대의 예술적 경향을 이어받아 특히 신아시리아 제국 시대의 미술과 유사성을 보였다. 이 시대의 원통형 인장은 이전 시대보다 덜 정교하며 묘사된 주제에서 아시리아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인장에 묘사된 가장 일반적인 장면 중 하나는 날개를 달고 굽은 칼로 짐승을 치려는 영웅이다. 다른 일반적인 장면으로는 신성한 나무의 정화나 신화 속 동물과 생물이 있다. 원통형 인장은 신바빌로니아 시대가 지나면서 점차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결국 도장 인장으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테라코타 조각상과 부조는 틀을 사용하여 제작되었으며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대에 흔했다. 보존된 조각상은 일반적으로 수호신(예: 파주주)이나 신을 나타내지만, 기마병, 벌거벗은 여성, 배, 꽃병을 든 남성, 다양한 유형의 가구의 예도 있다. 테라코타 조각상은 마법의 보호를 위해 또는 장식용으로 사람들의 집에 보관하려는 신성한 물건일 수도 있지만, 사원 내 신들에게 바치는 물건일 수도 있었다.
세라믹 유약 기술은 신바빌로니아 예술가들에 의해 개선되고 완성되었다. 바빌론의 이쉬타르 문과 도시의 행렬 거리(도시의 종교 축제 동안 퍼레이드가 지나가는 곳)의 부조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성형된 벽돌과 결합된 유색 유약은 색상으로 장식을 만들었다. 이 장식의 대부분은 사자(여신 이쉬타르와 연관됨), 꽃, 무슈후슈(신 마르두크와 연관된 신화 속 생물) 및 황소(신 아다드와 연관됨)의 상징이다.
바빌로니아가 독립을 되찾은 후, 신바빌로니아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왕국의 오랜 역사를 깊이 인식하고 고대 수메르-아카드 문화를 부흥시키는 등 매우 전통주의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아람어가 일상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카드어는 행정과 문화의 언어로 유지되었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광의 전성기 시대의 고대 예술 작품들은 거의 종교적인 경외심으로 대우받았으며, 고심하여 보존되었다. 예를 들어, 사르곤 대왕의 조각상이 건설 작업 중에 발견되었을 때, 이를 위해 사원이 지어졌고 제물이 바쳐졌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십파르의 신전을 복원하기 위해 나람신의 기초 제물을 찾을 때까지 반복적인 발굴을 해야 했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발견은 그가 신전을 제대로 재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신바빌로니아인들은 또한 왕의 딸을 달의 신 신의 여사제로 임명하는 고대 사르곤의 관습을 부활시켰다.
4. 사회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사법 제도는 고바빌로니아 제국 시대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바빌로니아 전역에는 장로들과 사회 유력 인사들로 구성된 지방 의회(''푸흐루'')가 있었는데, 이들은 지방 법정 역할을 수행했다. 더 큰 법적 특권을 가진 "왕실" 및 "신전 법원"도 존재했다. 법원에서는 서기관들이 판사를 보좌했고, 일부 지방 법원은 왕실 대표(보통 ''사르테누'' 또는 ''슈칼루''라는 칭호)가 이끌었다.
현존하는 자료는 대부분 편지와 소송이 담긴 점토판이다. 이들은 횡령, 재산 분쟁, 절도, 가족 문제, 채무, 상속 등 다양한 법적 분쟁과 범죄를 기록하여, 제국의 일상생활을 보여준다. 처벌은 대부분 금전적이었으며, 유죄 당사자는 보상으로 은을 지불했다. 간통 및 대역죄는 사형에 처해졌을 것으로 보이나, 실제 집행 증거는 드물다.
4. 1. 계급
신바빌로니아 사회는 자유민, 노예, 소작농으로 구성되었다.[6]자유민(마르 바니)은 도시 시민 계급으로, 면세 등 다양한 특권을 누렸다. 이들은 신전의 고급 관료, 왕실 관료, 장인, 상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6] 자신의 이름과 함께 아버지와 조상의 이름(가족 성)을 사용했다.
노예는 왕실 노예, 신전 노예, 개인 소유 노예로 분류되었다.[6] 개인 소유 노예는 주인의 재산으로 취급되었지만, 가혹한 대우는 받지 않았다. 이들은 결혼하여 가족을 꾸릴 수 있었고, 해방될 수도 있었다.[6] 신전 노예는 종교 관련 잡무에 종사했고, 왕실 노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소작농은 왕실, 신전, 개인 소유 토지를 경작하고 소작료를 납부했다.[7]
5. 경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설립은 이 지역의 인구 및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4] 메소포타미아의 토양은 비옥했지만, 정기적인 작물 재배를 위해서는 관개가 필요했다.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에서 물을 끌어와 관개 시설을 만들었는데, 이 강들은 곡물 수확 시기에 범람하는 경향이 있어 효율적인 농업을 위해서는 정교한 대규모 운하, 댐, 제방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러한 시설들은 지속적인 유지 보수가 필요했다.[5] 운하를 파고 유지하는 일은 왕실의 임무로 여겨졌으며, 필요한 자원과 인력은 사원에서 제공되었다.[6]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경제 기록은 대부분 사원에서 나왔다. 사원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원 의존자(''širāku'')[7]라는 자유롭지 못한 인력이었으며, 이들은 대개 감당하기 힘든 작업 할당량을 받았다. 이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사원은 "임대 농부"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임대 농부들은 돈과 사원에 공급할 상품을 대가로 사원의 농지 및 밭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받았으며, 사원 의존자와 장비도 함께 제공되었다. 임대 농부는 사고 및 할당량 부족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져야 했고, 자신의 소유물과 자산을 보상으로 사원에 넘기거나 판매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축산업은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행해졌지만, 남부에서는 동물이 주요 현금 작물이었기 때문에 축산업이 가장 일반적인 농업 형태였다. 양치기는 사원 의존자 또는 독립 계약자였으며, 양이나 염소 떼를 위탁받았다. 이들은 희생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양의 할당량을 가지고 있었고, 양털과 가죽 또한 사원에서 사용되었다. 낙농 제품은 양치기가 일년 중 대부분의 기간 동안 동물을 몰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덜 중요했다. 소와 황소는 주로 쟁기질을 위한 역축으로 사용되었고, 늪지에서는 새와 물고기를 사냥했다.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자료에서 가장 일반적인 사업 파트너십은 ''harrānu''라고 불렸는데, 선임 자금 지원 파트너와 주니어 실무 파트너로 구성되었다. 이익은 두 파트너 간에 동일하게 분배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부유한 개인이 사업을 수행할 수단이 없는 유능한 개인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일부 주니어 파트너는 사업을 통해 성장하여 새로운 ''harrānu'' 계약의 선임 파트너가 되기도 했다.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바빌로니아의 인구는 크게 증가했으며, 알려진 정착지의 수와 평균 규모도 증가했다. 이는 바빌로니아의 번영 증가, 정복된 사람들의 재정착, 신 아시리아 제국 시대에 재정착된 사람들의 귀환과 결합된 결과로 보인다. 또한 도시화가 극적으로 증가하여, 구 바빌로니아 제국 멸망 이후 남부 메소포타미아가 겪었던 농촌화의 추세를 반전시켰다.
6. 통치 체제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행정 구조는 관련 자료가 부족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왕(''샤르'')은 제국 내 최고 통치자였으며, 그의 신하들은 ''아데''라고 불리는 충성 서약을 맺었다. 이는 신아시리아 제국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이었다.[3] 신바빌로니아 왕들은 '바빌론의 왕'과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들은 보편적 통치를 주장하는 신아시리아의 과장된 칭호들을 많이 버리고, 자신들을 독실한 왕으로 나타내고자 했다.[3]
왕은 제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 소유자였으며, 바빌로니아 전역에는 왕실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있는 여러 개의 큰 토지가 있었다. 왕족의 다른 구성원(예를 들어, 비문에서 "왕세자의 집"은 "왕의 집"과 구별됨)과 다른 고위 관리(예: 왕실 재무관)에게도 대규모 영지가 할당되었다.
제국의 정확한 행정 구조와 정부는 관련 자료 부족으로 불분명하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신아시리아 제국을 대체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제국이 되었지만, 이전 제국의 영토를 얼마나 상속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612년 니네베 함락 이후, 신아시리아 제국의 영토는 바빌론과 메디아인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메디아인에게는 북부 자그로스 산맥이 할당되었고, 바빌론은 트란스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국가)와 레반트를 차지했다. 그러나 두 제국 사이의 정확한 경계와 이전 아시리아의 중심지가 어느 정도 분할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중심지인 바빌로니아 자체는 자치 정도가 다양한 주와 부족 지역의 복잡한 네트워크로 통치되었다. 이 중심지 밖에서 사용된 행정 구조는 알려지지 않았다.
건축 비문을 통해 구 신아시리아 제국의 중심지 일부가 바빌론의 통제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건축 비문은 바빌론의 에테메난키를 개조하는 데 책임이 있는 노동자들이 "아카드 땅과 아시리아 땅, 에베르-나리의 왕들, Ḫatti의 총독들, 상해에서 하해까지"에서 왔다고 언급한다.[3] 네리글리사르 통치 시대의 문서는 아수르시에 바빌론 총독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데, 이는 그 도시가 제국의 경계 내에 위치했음을 의미한다. 신아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네베가 신바빌로니아 제국 내에 위치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제국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건축 비문("하티의 총독", "하티"는 이 지역의 시리아-히타이트 도시 국가를 지칭)과 아르파드 시의 총독을 언급하는 다른 비문에서 나타나듯이 시리아에서 분명히 직접적인 통치를 누렸다.
일부 학자들은 아시리아의 지방 제도가 신아시리아 제국의 멸망과 함께 붕괴되었고,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단순히 바빌론의 왕들이 조공을 징수하는 지배 구역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어떤 형태로든 지방 제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전 아시리아의 중심지는 바빌론과 메디아인 사이에서 분할되었을 것이며, 바빌론은 남부를 제국에 통합하고 메디아인은 북부를 차지했을 것이다. 바빌론이 이러한 영토에 대해 실제로 행사한 통제는 가변적이었을 것이다. 아시리아가 붕괴된 후, 레반트의 많은 해안 도시와 국가들은 독립을 되찾았지만, (지방을 통합하는 대신) 바빌론의 속국으로 통치되었다.
신바빌로니아의 영내 통치 시스템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 장관이 임명되었다. 지중해 연안 지역이나 칼데아인, 아람인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지역의 유력자가 왕에 의해 임명되었다. 바빌론의 도시 행정은 각 도시의 시장 혹은 신전의 장관을 정점으로 하고, 도시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집회에 의해 결정되었다. 사회 구조는 대략 자유민, 노예, 소작농으로 이루어졌다.
7. 군사
신바빌로니아 왕들에게 전쟁은 조공, 약탈(특히 다양한 금속과 양질의 목재와 같은 귀중한 재료), 그리고 사원 노예로 활용할 수 있는 전쟁 포로를 획득하는 수단이었다.[4] 선임자였던 아시리아인들처럼 신바빌로니아 왕들도 통제 수단으로 추방을 사용했다. 아시리아인들은 광대한 제국 전역에서 인구를 이동시켰지만, 바빌론 왕 시대의 관행은 더 제한적인 것으로 보이며 바빌로니아 자체에 새로운 인구를 정착시키는 데만 사용되었다.[4]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왕실 비문은 신아시리아 시대의 왕실 비문처럼 파괴 행위와 추방에 대해 자랑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이것이 관행이 중단되었거나 바빌론인들이 아시리아인보다 덜 잔인했음을 증명하지는 않는다.[4] 예를 들어, 기원전 604년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아스켈론 도시가 파괴되었다는 증거가 있다.[4]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바빌로니아의 다양한 도시, 시리아와 아시리아의 지방, 바빌론 통치하의 부족 연맹, 레반트의 다양한 종속 왕국과 도시 국가 등 복잡한 행정 구조의 모든 부분에서 보급되었을 것이다.[4] 군대에 관해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보존된 가장 자세한 자료는 사원에서 왔으며, 전쟁 시에 사원 종속자(''širāku'')의 일부를 병사로 공급했다.[4] 이 종속자들은 대부분 농부(''ikkaru'')였지만 일부는 양치기, 정원사 및 장인이었다.[4] 사원에서 징집된 이들의 대다수는 궁수로 복무했으며 활, 화살(각 궁수는 40~60개의 화살을 보급받았음), 활통, 단검을 갖추었다.[4] 아카드어와 킴메르 스타일로 제작된 활은 훈련된 활 제작자가 사원에서 제조하고 수리했으며, 화살과 단검은 사원 대장장이가 만들었다.[4] 원래 스텝 기원의 소켓 청동 화살촉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유다 왕국을 정복하면서 파괴된 층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이는 스텝 유목민이 바빌론 군대에서 용병으로 복무했거나 바빌론인들이 이 시기에 화살촉 유형을 채택했음을 시사한다.[4] 십파르의 에바바라 사원 비문은 사원이 위기 시에 종속자의 14%에 달하는 병력을 투입할 수 있음을 시사하지만(에바바라의 경우 180명의 병사가 이에 해당), 그 수는 보통 훨씬 낮았다(에바바라가 공급한 병사의 가장 일반적인 수는 50명이었다).[4] 이 사원에서 징집된 궁수들은 직업별로 분대 또는 십인대(''ešertu'')로 나뉘었으며, 각 분대는 지휘관(''rab eširti'')이 이끌었다.[4] 이 지휘관들은 다시 ''qīpu''(지역 고위 관료)에게 보고하는 ''rab qašti''의 지휘를 받았다.[4] 기병과 전차도 사원에서 공급되었지만 장비, 상대적 수 또는 지휘 구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비문이 거의 없다.[4]
바빌로니아 도시의 시민들은 시민 의무로서 종종 궁수로 군 복무를 해야 했다.[4] 이 시민 민병대는 사원에서 징집된 궁수들과 마찬가지로 직업별로 나뉘고 조직되었다.[4] 병사로 복무한 시민들은 은으로 급여를 받았으며, 아마도 연간 1 미나의 비율이었을 것이다.[4] 신바빌로니아 군대는 또한 제국 영토 내의 부족 연맹에서 병사를 징집하고 용병을 고용하여 병력을 강화했을 가능성이 높다(네부카드네자르 2세 군대에 그리스 용병이 있었다는 것은 시에서 알려져 있다).[4] 전쟁 시에는 ''dēkû''(“동원자”)라는 관리가 모든 ''rab qašti''에게 소식을 보내고, 그들이 모든 ''ešertu''를 조직함으로써 전체 바빌론 군대가 소집되었을 것이다.[4] (3개월에서 1년까지 지속될 수 있는) 캠페인에 참여한 병사들은 배급(보리 및 양 포함), 급여로 은, 소금, 기름 및 물병을 보급받았으며 담요, 텐트, 자루, 신발, 저킨 및 당나귀 또는 말을 갖추었다.[4]
8. 건축
기념비적인 건축물에는 사원, 궁전, 지구라트(꼭대기에 신전이 있는 거대한 계단식 탑), 도시 성벽, 행렬 거리, 인공 수로, 국토 방어 구조물 등이 있다.[3] 바빌론 왕은 전통적으로 건축가이자 복원자였으며,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는 바빌론 통치자들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였다.[6]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대한 대부분의 고고학적 지식은 바빌로니아 주요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광대한 기념비적 건축물과 관련이 있는데, 이는 바빌로니아 고대 도시의 초기 발굴자들의 관심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 편견으로 인해 도시 자체(주거 지역 등)의 구성과 작은 정착촌의 구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7]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비문에는 많은 행렬 거리가 묘사되어 있지만, 아직 발굴된 거리는 바빌론의 주요 행렬 거리뿐이다.[5] 이 거리는 남궁의 동쪽 벽을 따라 뻗어 있었고, 이슈타르 문에서 내부 도시 성벽을 빠져나와 북궁을 지나갔다. 남쪽으로 이 거리는 에테메난키를 지나 나보폴라사르 또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치세에 건설된 다리를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5] 행렬 거리의 일부 벽돌에는 뒷면에 신아시리아 왕 산헤립(Sennacherib)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거리 건설이 그의 통치 기간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시사하지만, 벽돌 윗면에는 모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거리 건설이 그의 통치 기간에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5]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로니아의 방어를 돕기 위해 구운 벽돌로 건설된 두 개의 거대한 국토 횡단 벽을 건설했다. 이 중 확실하게 위치가 확인된 것은 '하블 알 샤르'로 알려져 있으며,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가장 가까운 지점인 십파르 도시 북쪽에서 뻗어 있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다른 벽은 키시 도시 근처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네부카드네자르는 북부 바빌로니아에 방어 건설 프로젝트를 집중했는데, 이 지역이 적의 공격 지점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믿었으며, 키시, 보르시파, 바빌론 자체와 같은 북부 도시의 성벽을 재건하는 동시에 우르와 우루크와 같은 남부 도시의 성벽은 그대로 두었다.
8. 1. 왕궁
비록 비문에 남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여러 도시에 왕궁이 존재했음이 언급되어 있지만, 아직 발견되고 발굴된 신바빌로니아 왕궁은 바빌론 자체에 있는 궁전뿐이다.[4] 남궁은 북쪽 도시 성벽과 서쪽의 유프라테스 강에 의해 형성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보폴라사르 왕과 네부카드네자르 2세 치세에 건설되었으며 각각 자체 안뜰이 있는 5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었다.[4] 이 구역들 중 중앙 구역에는 주거용 스위트룸과 실제 옥좌실이 있었고, 다른 구역은 행정 및 창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4] 궁전은 동쪽에 있는 중앙 행렬 거리와 인접해 있었고, 서쪽(유프라테스 강을 마주보는 쪽)은 심하게 요새화되었다.[4]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또한 내부 도시 성벽의 반대편에 두 번째 궁전인 북궁을 건설했다.[4] 이 궁전 역시 동쪽에 있는 행렬 거리에 인접해 있었지만, 유적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구조와 외관이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다.[4] 또한 도시에는 세 번째 왕궁인 여름 궁전이 있었는데,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건설한 외부 성벽의 가장 북쪽 구석에 있는 내부 도시 성벽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4] 우르의 지방 총독의 궁전과 같은 비왕족 궁전은 바빌론의 남궁과 디자인 특징을 공유했지만 크기가 상당히 작았다.[4]
8. 2. 사원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사원은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은 사원들과 도시의 주요 신에게 헌정된 큰 사원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도시에서 지구라트는 사원 단지 내에 있었지만, 바빌론의 에테메난키는 도시의 주요 사원인 에사길라와는 별도의 단지와 성벽을 가지고 있었다. 신 바빌로니아 사원은 중앙 안뜰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든 면이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고 주요 방은 주로 남쪽을 향했으며, 사원 입구는 이 주요 방의 반대쪽에 있었다. 닌타(Ninurta) 사원처럼 일부 사원은 단일 안뜰을 가졌지만, 이쉬하라(Išḫara) 사원과 같이 주요 안뜰 외에 작은 안뜰을 가진 사원도 있었다.8. 3. 기타
신바빌로니아 시대의 일반적인 주거 가옥은 지붕이 없는 중앙 안뜰을 중심으로 사방에 방이 배치된 구조였다. 큰 가옥은 안뜰이 두 개 또는 세 개까지 있었다. 안뜰 각 면의 중앙 문을 통해 주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이 방에서 다시 가옥의 다른 작은 방들로 연결되었다. 대부분의 가옥은 동남쪽에서 서북쪽 방향으로 지어졌으며, 주요 생활 공간은 동남쪽에 있었다. 가옥의 외부 벽은 장식이 없고 창문이 없는 텅 빈 모습이었다. 주요 입구는 보통 주요 생활 공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독립된 가옥에 살았지만, 낮은 지위의 사람들은 옆집과 외벽을 공유하기도 했다.[4]신바빌로니아 시대 가옥은 주로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지어졌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거대한 성벽처럼 구운 벽돌은 물에 노출되는 방의 포장이나 안뜰 같은 특정 부분에 사용되었다. 지붕은 갈대나 갈대 매트 위에 짚을 섞은 진흙을 덮고, 그 위에 현지 목재를 덮어 만들었다.[4]
참조
[1]
학술지
Size and Duration of Empires: Growth-Decline Curves, 3000 to 600 B.C.
https://escholarship[...]
1978
[2]
웹사이트
Habakkuk 2 Matthew Poole's Commentary
https://biblehub.com[...]
2024
[3]
서적
The Neo-Babylonian Empire and Babylon in the Latter Prophets
https://books.google[...]
Scholars Press
[4]
학술지
A New Typology of Arrowheads from the Late Iron Age and Persian Period and its Historical Implications.
https://www.jstor.or[...]
[5]
문서
"#前田ら 2000, pp.151-152"
[6]
문서
"#前田ら 2000, p.154"
[7]
문서
"#前田ら 2000, pp.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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