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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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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르 3세는 1845년 알렉산드르 2세의 차남으로 태어나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암살 이후 전제군주제를 강화하고 반동 정치를 펼쳤으며,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을 추진하는 등 외교와 경제 정책을 펼쳤다. 1894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 역시 전제 정치를 이어가다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강력한 힘과 과묵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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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885년 촬영된 초상 사진
이름알렉산드르 3세
러시아어 이름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로마자 표기Aleksandr III Aleksandrovich Romanov
별칭평화제 (미로트보레츠)
출생일1845년 3월 10일
출생지겨울 궁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사망일1894년 11월 1일
사망지리바디야 궁전, 리바디야, 타브리다 현, 러시아 제국
매장일1894년 11월 18일
매장지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대성당
서명
통치
황제 즉위1881년 3월 13일
퇴위1894년 11월 1일
대관식1883년 5월 27일, 모스크바 우스펜스키 대성당
이전 통치자알렉산드르 2세
다음 통치자니콜라이 2세
왕조로마노프-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가족 관계
아버지알렉산드르 2세
어머니마리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
배우자다우마 애 단마르크 왕녀 (1866년 11월 9일 결혼)
자녀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종교
종교러시아 정교회
같이 보기

2. 생애

1845년 3월 10일,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2세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애칭은 Саша|사샤ru였다. 본래 황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1865년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황태자가 되었다. 형의 약혼녀였던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와는 1866년 결혼하였다.

1881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황제로 즉위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쳐, 이전 시대의 자유주의 개혁을 뒤집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는 보수 반동 정치를 펼쳤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 정교회국가주의가 강조되었으며, 검열 강화, 교육 통제, 소수 민족에 대한 러시아화 정책 등이 시행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독일 제국과 거리를 두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며, 프랑스 자본을 도입하여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을 시작하는 등 경제 발전을 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여러 차례의 암살 위협과 1888년 보르키 열차 사고와 같은 사건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지속적인 정무와 건강 악화로 1894년 11월 1일 크림반도의 리바디아 궁전에서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니콜라이 2세 역시 아버지의 전제 정치를 이어갔으나, 이는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져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1845년 3월 10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겨울 궁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2세이고, 어머니는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출생명: 헤세와 라인 대공국 공주 마리)이다. 알렉산드르는 부모의 둘째 아들이자 세 번째 자녀였으며,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 황제의 통치 기간 중에 태어났다. 애칭은 Саша|사샤ru였다.

그의 생애 첫 20년 동안은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건강해 보이는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애칭: 닉사)이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형 니콜라이는 1864년 9월 28일 덴마크 공주 다그마르와 약혼한 상태였다. 다그마르 공주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제 덴마크 왕비의 딸이다.

형 니콜라이는 황태자로서 제왕 교육을 받았지만, 알렉산드르는 유년 시절부터 군인으로서의 교육을 포함한 일반적인 대공 교육(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군사 훈련 등)을 받았다.

알렉산드르는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으며, 음악가와 발레리나의 후원자가 되기도 했지만, 주변에서는 후원자로서의 세련됨과 우아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얼굴 왼쪽에 있던 피지낭종 때문에 콤플렉스를 가졌고, 이 때문에 성장 후 그려진 초상화나 사진은 대부분 오른쪽에서 찍은 것이다. 또한 키가 190cm에 달하는 장신이었다.

화가 알렉산드르 베누아는 알렉산드르의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마린스키 극장(Мариинский театр)에서 발레를 공연했을 때, 처음으로 알렉산드르 황제를 만났다. 나는 황제의 인간적인 크기에 감탄했다. 황제에게는 농민과 같은 면이 느껴졌다. 그 밝은 눈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황제가 일어섰을 때, 나와 눈이 마주친 것처럼 느꼈던 것을 기억합니다. 강철 같은 외모를 보고, 협박적인 무언가를 느끼고,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

> 황제의 눈! 모든 사람의 정점에 서 있는 남자의 표정. 그러나 그 눈에는 엄청난 부담이 느껴졌습니다. 후년에 나는 여러 번 황제를 만날 기회를 얻었고, 거기에는 조금의 겁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2. 2. 황태자 시절

알렉산드르 2세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의 차남으로 태어난 알렉산드르 3세는 원래 황제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는 황위에 관심이 없었고,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애칭 닉사)와는 달리 단순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1865년 4월 24일, 형 니콜라이가 결핵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알렉산드르가 황태자가 되었다.[5] 그는 형의 죽음으로 큰 슬픔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황태자가 된 알렉산드르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교수이자 훗날 러시아 정교회 성무회 의장이 되는 콘스탄틴 포베도노스트세프에게 법과 행정 원리를 배웠다. 포베도노스트세프는 알렉산드르에게 러시아 정교회 사상에 대한 열정과 러시아 애국심을 강조하며 보수적이고 반개혁적인 군주론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은 그의 정치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황태자 시절(1865년~1881년)부터 기존 정부의 자유주의적 개혁 움직임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그의 보수적인 생각은 정부 방침과 달라 중요한 공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르와 마리아(1866년)


형 니콜라이는 임종 직전, 자신의 약혼녀였던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가 동생 알렉산드르와 결혼하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르의 부모 역시 이 결혼을 지지했다. 1866년 6월 2일, 알렉산드르는 코펜하겐으로 가 다그마르에게 청혼했고,[6] 같은 해 11월 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다그마르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여 마리아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비록 시작은 형의 유언에 따른 정략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매우 금슬 좋은 부부 관계를 유지했으며, 알렉산드르는 표트르 1세 이후의 많은 황제들과 달리 혼외 관계 없이 가정에 충실했다.

황태자 시절, 알렉산드르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와 여러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사이가 멀어졌다. 정치적으로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아버지가 프로이센을 지원한 것에 대해, 덴마크 출신 아내의 영향을 받아 "근시안적인 정부"가 "프로이센 돼지"들을 돕는다며 강하게 비판했다.[7] 또한,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가 병으로 고통받는 동안 아버지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공주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를 맺고 사생아까지 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8] 특히 1880년 어머니가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예카테리나와 재혼하자[94] 알렉산드르는 격분하여 "가족 생활에 대한 모든 소중한 기억을 망쳤다"고 생각했다.[10] 그는 아버지에게 항의했으나, 아버지는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며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였다.[9][11] 알렉산드르는 계모가 된 예카테리나를 "외부인", "계략적이고 미성숙하다"고 비난했다.[12] 훗날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그는 아버지의 재혼이 비극을 초래했다고 회상하며 "모든 쓰레기들이 터져 나와 신성한 모든 것을 삼켰고... 마침내 끔찍하고 이해할 수 없는 3월 1일로 절정에 달했다"고 말했다.[13]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자유주의에 대해 더욱 불신하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2. 3. 황제 즉위와 통치

모스크바의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거행된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의 대관식(1883년). 게오르크 베커 그림.


1881년 3월 13일(율리우스력 3월 1일),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인민의 의지 단원이 던진 폭탄에 의해 암살당하자 알렉산드르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14][15][16][17] 공식 대관식은 2년 뒤인 1883년 5월 27일 모스크바의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국민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갖게 하여 그의 보수적인 성향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로 즉위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떠나 교외의 가치나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황태자 시절부터 반동적인 성향을 보였던 알렉산드르 3세는 즉위 후 아버지 시대의 자유주의 개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가 내세웠던 정교회, 자치독재, 민족주의의 원칙만이 혁명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19] 이러한 그의 통치 철학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무회 의장이자 황태자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콘스탄틴 파베도노스체프의 영향이 컸다. 파베도노스체프를 비롯한 보수적인 측근들의 조언에 따라, 알렉산드르 3세는 의회 민주주의나 언론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당일 서명했던 자문 위원회 설립 칙령마저 즉위 직후 폐기하며, 황제의 자치독재 권력을 제한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알렉산드르 3세가 모스크바 페트롭스키 궁전 마당에서 볼로스트의 원로들을 접견하는 모습. 일리야 레핀 그림.


알렉산드르 3세의 내정 개혁은 대부분 아버지 시대의 자유화 조치를 되돌리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젬스트보(선출된 지방 행정 기관)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정부가 임명한 귀족 출신의 '토지 대장'(''젬스키예 나찰니키'')에게 농민 공동체에 대한 행정권과 사법권을 부여하여 중앙 정부의 통제를 강화했다. 이는 지방 귀족과 농민의 자치권을 축소하고 황제의 개인적인 통치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검열 제도를 강화하여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대학 자치를 축소하는 등 교육에 대한 통제도 강화했다.

러시아화 정책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핀란드 대공국을 제외한 제국 내 모든 지역에서 러시아어 사용을 강제하고, 학교에서 독일어, 폴란드어, 스웨덴어 등 소수 민족 언어 교육을 금지했다.[22] 동방 정교회를 국가의 중심으로 삼고 다른 종교, 특히 유대교를 탄압했다. 1881년 즉위 직후 제국 남서부 지역에서 대규모 반유대인 폭동(포그롬)이 발생했으며,[14][15][16][17] 1882년에는 유대인의 거주 지역을 정착지 내 특정 도시와 슈테틀로 제한하고 농촌 거주 및 토지 소유를 금지하며, 특정 직업 종사를 제한하는 이 공포되었다.[95][24][25] 이 법은 임시 조치로 발표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극심한 차별과 박해를 피해 많은 유대인이 서유럽이나 미국, 팔레스타인 등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낳았다.[23]

1885년 8월 4일, 알렉산드르 3세가 핀란드 라펜란타의 폰텔 하우스("황제의 집"으로도 알려짐)에 처음 도착한 모습. 핀란드에서도 러시아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개인적으로 검소했으며, 왕족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즉위 후 왕실 경비를 대폭 삭감했으며, 황제의 자녀와 남자 직계 손자들에게만 대공(Grand Duke/Grand Duchess) 칭호를 허용하고 나머지 방계 왕족에게는 공작(Prince/Princess) 칭호를 사용하도록 제한했다. 또한 왕족의 모르가나틱 결혼과 정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등 왕실 내부 규율을 강화했다.[18]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혁명 조직 인민의 의지는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한 암살도 계획했다. 그러나 1887년 3월, 옥흐라나(황제 직속 비밀경찰)가 음모를 사전에 적발하여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를 포함한 주모자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1888년 탈선한 황실 열차. 이 사고로 알렉산드르 3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1888년 10월 29일(율리우스력 10월 17일), 알렉산드르 3세와 그의 가족이 탄 황실 열차가 크림반도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던 중 우크라이나 근처에서 탈선하는 사고(보르키 열차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당시 식당 칸에 있던 황제는 무너지는 칸의 지붕을 자신의 어깨로 받쳐 올려 가족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고로 21명이 사망했으며, 알렉산드르 3세는 심각한 내부 부상을 입었고, 이는 훗날 그의 건강을 악화시켜 신부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끊임없는 정무와 보르키 열차 사고 후유증으로 알렉산드르 3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다. 1894년 그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같은 해 11월 1일(율리우스력 10월 20일) 크림반도의 리바디아 궁전에서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 니콜라이 2세가 황제로 즉위했지만, 아버지의 전제정치를 그대로 이어받아 통치하다 결국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지고 자신과 가족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2. 3. 1. 외교 정책

보르키 대성당. 1888년 열차 사고에서 차르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많은 교회 중 하나이다.


알렉산드르 3세와 프랑스 대통령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가 동맹을 맺는 모습.


알렉산드르 3세가 그려진 25루블 지폐.


1889년 여름, 핀란드 랑긴코스키의 자택 현관에서 가족과 함께한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


프랑스 우표에 나온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1896년경.


알렉산드르 3세는 외교 문제에서 평화주의자였으나, 전쟁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에 대한 철저한 준비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와 달리 독일 제국의 영향력을 경계했으며, 슬라보필에 동조하고 프랑스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였다. 이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아버지가 프로이센을 지지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1877년-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했고, 러시아군을 이끌고 이스탄불 근처까지 진격하여 산스테파노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그러나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는 획득한 이권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했고, 이는 알렉산드르 3세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의 기대를 저버리고 "정직한 중개자" 역할에 머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발칸반도 정책을 견제한 것에 분노했다.[31][26][27]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러시아 군대의 재편과 해군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차르가 된 후, 그는 외교관 니콜라이 기르스를 1882년부터 1895년까지 외무장관으로 기용하여 평화 유지 정책을 추구했다. 기르스는 알렉산드르 3세의 공격적인 성향을 억제하며 전쟁을 피하는 것이 체제 유지에 필수적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28] 알렉산드르 3세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에도 불구하고 한때 삼황 동맹을 부활시키고 1887년 독일과 재보험 조약을 맺는 등 독일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890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새로 즉위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알렉산드르 3세가 매우 싫어했던 인물)가 재보험 조약 갱신을 거부하자 독일과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다.[96]

이에 대한 대응으로 알렉산드르 3세는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다. 기르스는 1891년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설계했고, 이는 1892년 군사 협정 체결과 1894년 최종 비준으로 이어졌다.[29] 이 동맹은 프랑스를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러시아는 독일 중심의 외교 노선에서 벗어나 프랑스와의 연대를 강화했다. 프랑스의 재정 지원은 러시아의 경제 현대화, 특히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에 큰 역할을 했다. 이 동맹은 훗날 영국이 합류하면서 삼국 협상의 기반이 되었다.

불가리아 문제에서는 알렉산더 불가리아 공과 스테판 스타볼로프가 러시아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3세는 무력 개입을 자제하는 신중함을 보였다.[30] 중앙아시아에서는 전통적인 남하 정책을 이어가며 러시아의 지배력을 점진적으로 확장했지만, 영국과의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판제데 사건(1885년)과 같은 긴장 상황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며[28] 전면적인 충돌은 피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는 비교적 평화를 유지하며 공업 발전을 이루었으나, 러시아화 정책 추진과 농업 위기 심화 등 내부적인 모순과 사회 불안 역시 증대되었다. 그는 언어, 행정,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러시아적 원칙을 강조하며 독일을 비롯한 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

2. 3. 2. 경제 정책

알렉산드르 3세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처럼 무역과 산업 발전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 당시 러시아 경제는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여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이로 인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했다. 또한 예산 적자를 줄이기 위해 국가 재정의 긴축을 강화하고 회계 관리를 엄격히 했다. 개인적으로 검소했던 그는 즉위 직후 왕실 경비를 200만파운드 삭감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 아래 러시아의 산업은 꾸준히 발전했으며,[32] 특히 이 시기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 건설이 시작되었다.[33]

그러나 1891년부터 1892년까지 발생한 대규모 기근과 콜레라 유행에 대해서는 정부가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3세는 젬스토보에 기근으로 고통받는 농민을 지원할 권한을 부여하는 등 일부 자유주의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2. 4. 죽음

1894년, 알렉산드르 3세는 말기 신장 질환(신장염)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의 사촌이자 마리아 황후의 조카인 그리스 왕국의 올가 왕비는 코르푸의 별장 Mon Repos|몬 레포프랑스어에서 요양할 것을 제안했다.[54][97] 그러나 크림반도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드르 3세는 이미 여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져 리바디아 궁전에 머물렀다.[55][98]

덴마크 왕립 근위대(Royal Life Guards) 군복을 입은 알렉산더 3세, 1894년


리바디아 궁전에서의 알렉산드르 3세의 임종을 묘사한 그림


그의 병세가 악화되자 여러 황족들이 리바디아로 모여들었다. 크론슈타트의 요한 신부가 방문하여 성찬을 베풀었다.[56][99] 10월 21일, 황태자 니콜라이 2세의 약혼녀인 헤센의 알릭스 공주가 다름슈타트에서 도착하여 알렉산드르 3세를 만났다.[57][100] 극도로 쇠약했음에도 알렉산드르 3세는 정복을 갖춰 입고 알릭스 공주를 맞이했으며, 이로 인해 더욱 탈진했다.[58][101]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건강은 더욱 급격히 악화되었다. 알렉산드르 3세는 1894년 11월 1일(율리우스력 10월 20일) 오후, 리바디아 궁전에서 아내 마리아 황후의 품에 안겨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주치의 에른스트 빅터 폰 레이덴(Ernst Viktor von Leyden)이 곁에 있었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인 황태자 니콜라이가 니콜라이 2세로 즉위했다.

그의 유해는 11월 6일 리바디아를 떠나 모스크바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고, 11월 18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덴마크크리스티안 9세, 웨일스 공 부부, 요크 공작(훗날 조지 5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와 그의 아내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알릭스 공주와 그녀의 오빠 에른스트 루트비히 헤센 대공 등 많은 외국 친척들이 참석했다.

3. 유산과 평가

가 제작한 알렉산드르 3세 기마상은 황제가 무거운 말 등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에스토니아(Estonia) 풀라패(Pullapää)에 있는 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


1909년, Paolo Troubetzkoy|파올로 트루베츠코이영어가 조각한 알렉산드르 3세의 청동 기마상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철도 터미널 앞, 자멘스카야 광장(Znamenskaya Squareru)에 세워졌다. 말과 기수 모두 거대한 형태로 조각되어 "하마"라는 별명이 붙었다. 트루베츠코이는 이 조각상을 풍자적으로 구상하여 "동물 위에 또 다른 동물을 묘사하고 싶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당시 황실 가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에 반대하여 상당한 논란이 있었으나, 황태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알렉산드르 3세) (덴마크의 다그마르)가 예상외로 기념비를 지지하여 승인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이 조각상은 1937년 보관될 때까지 차르 전제정치의 상징으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1994년 대리석 궁전 앞이라는 다른 장소에 다시 공개 전시되었다.[62] 혁명 이전의 또 다른 기념비는 이르쿠츠크시 앙가라 강 제방에 위치해 있다.

알렉산드르 3세가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맺는 데 기여한 역할을 기리기 위해 프랑스 공화국은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르 3세 다리 건설을 의뢰했다. 이 다리는 그의 아들인 니콜라이 2세에 의해 개통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2017년 11월 18일,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가 병합한 크림반도에 있는 옛 말리 리바디아 궁전(Maly Livadia Palaceru) 부지에 알렉산드르 3세의 청동 기념비를 공개했다. 러시아 조각가 안드레이 코발추크(Andrey Kovalchukru)가 제작한 4m 높이의 기념비는 알렉산드르 3세가 나무토막에 앉아 팔을 뻗어 칼을 짚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비문에는 "러시아에는 육군과 해군이라는 두 개의 동맹국만 있다"라고 적혀 있지만, 역사가들은 차르가 실제로 그 말을 했는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다.[63][64] 알렉산드르 3세는 조셉 스탈린과 함께 푸틴이 존경하는 역사적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65] 2021년 6월 5일, 푸틴은 가치나 궁전 부지에 또 다른 알렉산드르 3세 기념비를 공개했다.[66]

폴란드 자체르라니(Zaczerlanypl)에도 알렉산드르 3세에게 헌정된 기념물이 있다. [https://pl.m.wikipedia.org/wiki/Pomnik_ku_czci_ocalenia_Aleksandra_III_w_Zaczerlanach?fbclid=IwZXh0bgNhZW0CMTEAAR3Kmft67PnMY3hnc22kvQVDpDMfr03XdPfcXk_qQclh-Ys7dse05jkqlSs_aem_tZfmIDVaZ3hjOKL2F9YSWQ 자체르라니 알렉산드르 3세 기념물]

4. 가족 관계

알렉산드르 2세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사이의 차남으로 1845년 3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겨울 궁전에서 태어났다.[94] 애칭은 사샤(Саша|사샤ru)였다. 키가 190cm에 달하는 장신이었으며, 얼굴 왼쪽의 피지낭종 때문에 콤플렉스가 있어 사진이나 초상화는 주로 오른쪽에서 찍은 것이 많다.

원래 황위 계승 가능성은 낮았고, 제왕 교육보다는 일반적인 대공으로서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학습과 군사 훈련 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형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애칭 닉사)와 매우 가까웠다. 그러나 1865년 형 니콜라이가 결핵으로 요절하면서 알렉산드르가 황태자(체사레비치)가 되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황태자가 된 것에 대해 "엄청난 책임이 내 어깨에 떨어졌다"고 토로하며 형의 죽음을 깊이 슬퍼했다.[5]

황태자가 되기 전, 알렉산드르는 어머니의 시녀였던 마리아 엘리모브나 메시체르스카야 공주와 사랑에 빠져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그녀와 결혼하려 했으나,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반대와 형의 죽음으로 황태자가 되면서 무산되었다. 그는 일기에 "작별이다, 사랑하는 두센카(마리아의 애칭)"라고 적었다. 마리아 메시체르스카야는 이후 파벨 파블로비치 데미도프와 결혼했으나 이듬해 출산 중 사망했다.

형 니콜라이는 죽기 직전 자신의 약혼녀였던 덴마크의 다그마르 공주가 동생 알렉산드르와 결혼하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알렉산드르의 부모 역시 이 결혼을 권유했다. 처음에는 마리아 메시체르스카야와의 관계 때문에 망설였으나, 1866년 6월 코펜하겐에서 다그마르를 만나 청혼했고, 같은 해 11월 9일(구력 10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다그마르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여 마리아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받았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매우 행복했으며, 알렉산드르 3세는 표트르 1세 이후의 다른 황제들과 달리 혼외 관계를 갖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민니(Minny)'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아내가 곁에 없을 때는 "당신 없이 가치나는 텅 비고 슬프구나"라며 그리움을 표현했다.[37] 1885년부터는 매년 부활절마다 아내를 위해 파베르제에게 보석으로 장식된 파베르제 달걀을 주문 제작하여 선물하는 전통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르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아버지가 프로이센을 지지한 것에 대해 알렉산드르는 (덴마크 출신 아내의 영향도 받아) 강하게 비판했다.[7] 또한 아버지가 어머니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가 병으로 고통받는 동안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공주와 오랜 기간 불륜 관계를 맺고 사생아까지 둔 것에 분개했다.[8] 어머니가 사망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아버지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귀천상혼을 하자, 알렉산드르는 이를 "가족 생활에 대한 모든 소중한 기억을 망쳤다"고 여기며 격분했다.[10] 아버지는 결혼에 항의하면 상속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11] 아버지 사후 알렉산드르는 계모 예카테리나를 싫어했지만, 아버지의 유품 일부를 간직하도록 허락하는 등 최소한의 예우는 했다.[51] 반면 이복형제들에게는 친절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52]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는 슬하에 4남 2녀, 총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 중 다섯 명이 성인이 되었다. 그는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고,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만 마음이 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40] 그는 자녀 교육에 있어 엄격하기보다는 비교적 관대하여 가정교사들에게 "나는 도자기 인형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건강한 러시아 아이들을 원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42] 특히 막내아들 미하일과 막내딸 올가를 매우 귀여워했다. 그러나 장남이자 황태자인 니콜라이에 대해서는 성격이 너무 온순하고 순진하여 유능한 통치자가 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다.[43] 심지어 니콜라이가 여성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겨 발레리나 마틸데 크셰신스카야와의 관계를 주선하기도 했다.[44]

'''알렉산드르 3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자녀'''
이름사진생년월일사망년월일비고
니콜라이 2세
1868년 5월 18일1918년 7월 17일헤센의 알릭스 대공녀와 결혼하여 1남 4녀를 둠. 러시아 혁명 후 처형됨.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69년 6월 7일1870년 5월 2일수막염으로 요절.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71년 5월 9일1899년 7월 10일결핵으로 사망. 미혼.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1875년 4월 6일1960년 4월 20일당숙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과 결혼하여 6남 1녀를 둠.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78년 11월 22일1918년 6월 12일경나탈리아 브라소바와 귀천상혼하여 1남을 둠. 러시아 혁명 후 처형됨.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1882년 6월 13일1960년 11월 24일올덴부르크의 페터 알렉산드로비치 공작과 결혼했으나 이혼. 이후 니콜라이 쿨리코프스키와 재혼하여 2남을 둠.



알렉산드르 3세와 그의 아내, 자녀들 (1888년)


1893년 5월에 촬영한 마지막 가족사진 (앞줄 왼쪽부터 니콜라이, 게오르기, 마리아, 올가, 미하일, 크세니야, 알렉산드르 3세)


알렉산드르는 동생들과의 관계가 복합적이었다. 동생 블라디미르 대공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는데, 블라디미르가 공개적인 장소에서 싸움을 벌이자 격분하여 그를 잠시 추방하고 시베리아로 보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48] 이는 두 사람의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와 마리 파블로브나 대공비 사이의 경쟁 관계와도 연관이 있었다.[50] 반면 다른 동생들인 알렉세이 대공, 세르게이 대공, 파벨 대공과는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가 1893년 코펜하겐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모습.


왼쪽부터 오른쪽: 알렉산드르 3세 황제, 조지 왕자(후일 영국 조지 5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 마리아 공주, 니콜라이 황태자(후일 니콜라이 2세). 덴마크 인근의 제국 요트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됨, 1893.


알렉산드르 3세 가족은 매년 여름, 아내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부모인 크리스티안 9세 국왕과 루이제 왕비가 있는 덴마크의 프레덴스보르 궁전이나 베른스토르프 궁전에서 휴가를 보냈다.[46] 이 자리에는 영국의 웨일스 공작 부인(마리아의 언니) 가족,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마리아의 남동생)와 올가 왕비(알렉산드르 3세의 사촌) 가족 등 유럽 각지의 왕족 친척들이 모였다.[46] 알렉산드르 3세는 러시아에서의 삼엄한 경비와 격식에서 벗어나 덴마크에서 누리는 상대적인 자유를 매우 즐겼으며, 아이들과 어울려 장난치거나 친척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것을 좋아했다.[47]

1888년 10월, 알렉산드르 3세와 가족이 탄 황실 전용 열차가 우크라이나 보르키 근처에서 탈선하는 사고를 당했다. 식당 칸에 있던 가족들은 무너지는 지붕 아래 깔릴 뻔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어깨로 지붕을 받쳐 올려 가족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었다고 전해진다. 이 사고로 인한 신체적 충격이 훗날 그의 신장 질환 발병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있다.[53]

1894년 알렉산드르 3세는 신장염 진단을 받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해 가을 크림반도의 리바디아 궁전에서 요양했으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다.[98] 임종이 가까워지자 니콜라이 2세의 약혼녀인 알릭스 폰 헤센다름슈타트 대공녀가 급히 도착하여 그를 만났고, 쇠약한 상태에서도 알렉산드르 3세는 정장을 갖춰 입고 미래의 며느리를 맞이했다.[101] 1894년 11월 1일(구력 10월 20일), 알렉산드르 3세는 아내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품에서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5. 평가와 유산

알렉산드르 3세(차레비치 시절), 세르게이 레비츠키 작, 1865년


알렉산드르 3세의 성격은 온화하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와는 거의 닮지 않았으며, 세련되고 철학적이며 감상적이고 기사도적이면서도 교활했던 고모부 알렉산드르 1세와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는 열렬한 아마추어 음악가이자 발레의 후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련됨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신하들과 같은 거친 성품을 지녔다는 사실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의 직설적이고 퉁명스러운 태도는 때때로 무뚝뚝함으로 비춰졌으며, 그의 직접적인 표현 방식은 거칠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 다소 느린 몸동작과 어우러졌다. 그의 교육은 이러한 특징들을 완화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엄청난 괴력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이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맨손으로 카드 한 벌을 반으로 찢기도 했다.[59] 한번은 오스트리아 대사가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대항하여 2개 또는 3개의 군단을 동원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은으로 만든 포크를 구부려 매듭을 만든 뒤 대사의 접시 위에 던졌다고 한다.[60] 그는 "내가 당신네 2, 3개 군단을 이렇게 만들어 버릴 것이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60]

사교적인 성격의 아내 마리아 표도로브나와는 대조적으로, 알렉산드르 3세는 사교 행사를 싫어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궁전에서 무도회가 열리면 그는 행사가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는 손님들이 떠날 때까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하나씩 떠나라고 명령하고 조명을 끄게 했다.[60]

어린 시절 사나운 말을 타다가 불쾌한 경험을 한 이후, 그는 평생 동안 말을 두려워하게 되었다.[61] 한번은 아내가 그를 설득하여 함께 마차를 타도록 했지만, 그가 마지못해 마차에 오르자 조랑말이 뒷발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즉시 마차에서 내렸고, 아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61]

화가 알렉산드르 베누아의 회고록에는 알렉산드르 3세에 대한 인상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칸다울루스 왕'' 공연 후, 나는 처음으로 황제를 보았다. 나는 그 남자의 체격에 놀랐고, 비록 어색하고 무거워 보였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무지크(러시아 농민) 같은 면이 있었다. 그의 밝은 눈빛은 나에게 꽤 인상적이었다. 그가 내가 서 있는 곳을 지나갈 때, 그는 잠시 머리를 들었고, 나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감정을 기억한다. 그것은 마치 강철처럼 차가운 시선이었고, 거기에는 위협적이고 심지어 무서운 무언가가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황제의 시선! 모든 사람 위에 서 있지만, 엄청난 짐을 지고 매 순간 자신의 생명과 주변 사람들의 생명을 두려워해야 하는 사람의 시선이었다. 후년에 나는 여러 차례 황제와 접촉했고, 그때는 조금도 겁이 나지 않았다. 더 평범한 상황에서 알렉산드르 3세 황제는 친절하고, 소박하며, 거의 소탈하기까지 했다.

5. 1. 부정적 평가

알렉산드르 3세의 통치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 시대의 자유화 흐름을 되돌리는 반동 정치로 평가받는다. 그는 즉위 직후 아버지가 암살 당일 서명했던 자문 위원회 설립 칙령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트세프의 조언에 따라 폐기하며 자치독재를 제한 없이 행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19] 그는 조부 니콜라이 1세가 내세웠던 정교회, 자치독재, 민족주의 원칙이 러시아를 안정시킬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19]

이러한 보수적 통치 기조 하에 여러 정책이 시행되었다. 우선 지방 행정 기구인 ''지엠스트보''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정부가 임명한 '토지 대장'(''젬스키예 나찰니키'')에게 농민 공동체 감독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귀족과 농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 정책 역시 콘스탄틴 포베도노스트세프, 드미트리 톨스토이, I. N. 두르노보 등 보수적인 측근들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제국 내 다양한 민족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러시아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독일, 폴란드, 핀란드 등지의 학교에서 러시아어 교육을 강제하고, 독일어, 폴란드어, 스웨덴어 사용을 억압했다.[22] 동방 정교회를 제외한 다른 종교 및 문화 기관, 특히 독일, 폴란드, 스웨덴계 기관들은 해산시키는 등 종교적, 문화적 다양성을 억압했다.[22]

알렉산드르 3세의 5루블 동전, 1888년


특히 유대인에 대한 적대 정책은 그의 통치에서 두드러졌다. 1881년 즉위 직후부터 제국 곳곳에서 반유대인 폭동(포그롬)이 발생했으며,[14][15][16][17] 정부는 이를 효과적으로 제지하지 못했다. 1882년에는 악명 높은 5월 법령Майские правила|마이스키예 프라빌라ru을 제정하여 유대인들의 거주 지역(시골 및 슈테틀)을 제한하고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했다.[24][25][95] 이 법은 임시 조치로 간주되었으나 1917년 2월 혁명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러한 박해 정책은 공공연한 반유대주의를 부추겼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포그롬과 차별을 피해 서유럽이나 미국, 팔레스타인 등지로 이주하는 결과를 낳았다.[23]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했던 인민의 의지 단체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을 계획했으나, 옥흐라나(비밀경찰)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의 형인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를 포함한 주모자 5명이 1887년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브로니슬라프와 유제프 피우스츠키 형제 등도 연루되어 유형에 처해졌다.

1891-92년 러시아 기근과 이어진 콜레라 유행 당시, 정부는 효과적인 구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해 37만 5천 명에서 50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막지 못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정부는 마지못해 지엠스트보가 구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당시 레오 톨스토이나 체홉 같은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구호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20][21]

5. 2. 긍정적 평가

알렉산드르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러시아는 대외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전쟁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철저한 전쟁 준비에 있다고 믿었으며,[30] 외무장관 니콜라이 기르스와 함께 평화 정책을 추진했다. 기르스는 알렉산드르 3세의 공격적인 성향을 억제하고 주요 전쟁을 피하는 것이 러시아 제국의 생존에 필수적임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기르스는 수많은 협상, 조약, 협약을 통해 러시아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불안정한 국제 관계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885년 영국과의 오랜 긴장 관계였던 판제데 사건을 외교적으로 해결한 것은 주요 성과로 꼽힌다.[28]

알렉산드르 3세는 불가리아 문제에서 무력 개입 제안을 거부하고[30], 중앙아시아에서는 영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점진적인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는 공격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비록 독일과의 관계는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냉각되었지만, 그는 공개적인 단절을 피하고 한동안 삼제 동맹을 유지했으며 1887년에는 재보장 조약을 갱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이 조약 갱신을 거부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 1892년 프랑스-러시아 동맹을 체결했다.[29] 이 동맹은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의 외교적 고립을 종식시키고, 러시아가 독일 중심의 외교 관계에서 벗어나 프랑스와 협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재정적 지원은 러시아 경제 현대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비록 그의 통치가 러시아 역사에서 극적인 사건이 많은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의 엄격한 통치 아래 국가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탈하고 검소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화가 알렉산드르 베누아는 평상시의 알렉산드르 3세가 친절하고 소박하며 거의 소탈하기까지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핀란드 랑긴코스키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며 자녀들이 비교적 검소한 스칸디나비아 생활 방식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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