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모토 기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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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노모토 기하치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로, 1955년부터 1972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1960년과 1966년에 수위 타자를 차지했으며, 통산 4번의 최다 안타, 9번의 베스트 나인, 1955년 신인왕을 수상했다. 에노모토는 뛰어난 타격 기술과 선구안을 바탕으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61년에는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 1000안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1972년 은퇴 후, 201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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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노모토 기하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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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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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6년 12월 5일 |
출생지 | 도쿄부 도쿄시 나카노구 (현재의 도쿄도 나카노구) |
사망일 | 2012년 3월 14일 (향년 75세) |
신장 | 172cm |
체중 | 71kg |
수비 위치 | 1루수 |
투구 | 좌투 |
타석 | 좌타 |
선수 경력 | |
고등학교 | 와세다 실업학교 고등부 |
프로 입단 | 1955년 (테스트 입단) |
소속 구단 |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5~1971) 니시테쓰 라이온스 (1972) |
첫 출장 | 1955년 3월 26일 |
마지막 경기 | 1972년 10월 4일 |
국가대표 | |
선출 국가 | 일본 |
명예의 전당 헌액 | 선출년: 2016년 득표율: 75.5% (110표 중 83표) 선출 방법: 전문가 표창 |
통계 | |
리그 | NPB |
통산 성적 | 타율: 0.298 안타: 2,314개 홈런: 246개 타점: 979점 도루: 153개 |
수상 내역 | |
신인왕 | 1955년 |
올스타 | 12회 (1955~1964, 1966, 1968) |
베스트 나인 | 9회 (1956, 1959~1964, 1966, 1968) |
기록 | NPB 최연소 2,000안타 달성 (31세 7개월) |
기타 정보 |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 |
등재 연도 | 2016년 |
2. 선수 경력
에노모토는 1955년 아라카와 히로시의 도움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 입단 테스트를 거쳐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였던 에노모토는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과 함께 등번호 '3번'을 받으며 구단의 기대를 받았다.[63]
입단 첫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한 에노모토는 데뷔전에서 고의사구를 얻어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6월 7일부터는 3번 타자로 자리를 굳혔으며, 팬 투표를 통해 올스타전에도 선발 출전했다. 3할 타율에 1안타가 모자란 타율 0.298, 홈런, 타점 등 타격 전반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리며 신인왕을 차지했다.[56] 87개의 볼넷은 신인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자 퍼시픽 리그 기록이었다.
이듬해인 1956년에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가며 리그 9위의 타율과 리그 4위의 홈런을 기록, 2년 연속 타격 3개 부문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들었다. 또한 2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1루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프로 3년 차부터는 슬럼프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성적에 대한 부담감, 팬들의 야유 등이 겹치면서 타격 폼이 무너지고 부진을 겪었다.[64]
1959년 시즌 후 합기도를 배우며 정신적인 강화를 꾀했고, 타석에서 힘을 빼는 방법을 체득하면서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에는 3번 타자 겸 1루수로 복귀하여 타율 0.344로 '''수위 타자'''를 차지하고 리그 5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야마우치 가즈히로, 다미야 겐지로, 가쓰라기 다카오 등과 함께 '다이마이 미사일 타선'의 일원이었다.
1961년에는 주로 1, 2번 타자로 출전하며 시즌 종반까지 하리모토 이사오와 수위 타자 경쟁을 펼쳤다. 9월에는 24세 9개월의 나이로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 일본 프로 야구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1962년부터 다시 3번 타자로 돌아온 에노모토는 1963년에도 리그 2위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다. 1964년 이후에는 팀의 간판 타자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에는 리그 1위의 타율(0.351), 리그 4위의 홈런, 리그 3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남기고 두 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통산 843개의 4사구를 기록하며 통산 네 번째 최다 안타도 기록했다.
1968년 7월 21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스즈키 게이시를 상대로 2루타를 치며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이자 '''최연소'''(31세 7개월)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58] 그러나 같은 날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 도중 상대 선수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가격당해 의식을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70년에는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7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1972년,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이적하여 61경기에 출전, 0.233의 타율을 기록하고 은퇴하였다.
2. 1. 유년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1936년 도쿄도 나카노구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에노모토 가문에는 남자아이에게 모두 '하치'(八일본어)라는 글자를 붙이는 습관이 있어서, '기하치'(喜八일본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59]1941년 다섯 살 때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어머니는 에노모토를 소개 장소로 보내는 날에 병으로 사망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종전 후에도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과 함께 살았던 유년 시절은 가난 때문에 힘들었다. 비가 새는 것을 방치하면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침실에는 빗물이 떨어졌다. 다다미에는 버섯이 생기고, 우산을 받친 채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있었다. 전차를 탈 수도 없어서 당시 근처를 달리는 세이부 전차를 타는 것을 동경했다고 한다.
1943년 이웃집 친구 누나를 따라 고라쿠엔 구장에 직업 야구를 보러 간 것을 계기로 야구를 시작했다. 도쿄 교진군의 고 쇼세이, 아오타 노보루나 야마토군의 가리타 히사노리의 플레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직업 야구는 에노모토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고, ‘할머니를 따뜻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다’는 의지로 프로 야구 선수를 목표로 했다.
1952년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세 번이나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강타자로서 두각을 나타내 2학년 봄에는 4번 타자를 맡았다. 방망이를 길게 잡고 풀스윙을 하는 타격 스타일을 고수했고, 밀어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의 스타일은 방망이를 짧게 잡고 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OB가 에노모토의 타격을 교정하려 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보결로 밀려나기도 했다.
1953년 춘계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1차전에서 도사 고등학교 (고치현)에게 완봉패[59]를 당했고, 자신도 무안타에 그쳤다. 1년 선배 팀 동료 중에는 내야수 다나카 준지(다카하시), 외야수 사이토 기요히로(니시테쓰), 포수 쓰쿠다 아키타다 등이 훗날 프로에 입단했다.
1954년 춘계 선발 대회에도 팀 동기이자 에이스인 가와니시 히로카즈(다이에이 스타스)와 함께 출전하여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센요 고등학교(오사카부)에게 패했다. 같은 해 여름 도쿄도 예선 결승에서 구와타 다케시를 중심으로 하는 에바라 고등학교를 꺾고 하계 선수권 대회 출전을 결정지었다. 하계 선수권 대회 1차전에서는 고쿠라 고등학교 (후쿠오카현)의 하타 다카유키를 누르고 완봉승, 2차전에서는 에이스 요시하라 다케토시를 앞세운 요나고히가시 고등학교 (돗토리현)를 꺾었다. 준준결승에서는 가와니시와 고치 상업고등학교 (고치현)의 가타다 겐지가 투수전을 펼쳤지만, 9회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60]
1953년 춘계 선발 대회 1차전과 1954년 춘계 선발 대회 준준결승전에서는 각각 4번 타자와 3번 타자를 맡았지만, 주축 타자로서의 책임감과 중압감, 찬스에 약한 면모를 보였다. 3번이나 4번 타자로 출전하면 고의 사구를 얻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강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는 1번 타자로 출전했다. 와세다 실업고등학교는 에노모토가 출루하고 후속 타자가 득점하는 스타일을 확립하여, 같은 해 하계 대회에서 8강에 진출했다. 고시엔 대회 마지막 경기 후 인터뷰에서 다른 선수들이 ‘단단해졌다’고 말한 반면, 에노모토는 “결코 잘 하지는 못했다. 안타도 한 개만 쳤다”고 말했다.
지방 대회에서는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1954년 하계 전국 대회를 앞두고 아사히 신문 기자와의 좌담회(8월 12일자)에서는 출전 선수 중 에노모토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타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전국 대회에서는 컨디션 난조로 통산 타율 1할 4푼 3리(21타수 3안타 4볼넷)에 그쳤다. 같은 해 홋카이도 국민 체육 대회에서는 준준결승전에서 홋카이 고등학교를 상대로 홈런과 3루타를 치며 활약했지만, 준결승전에서 고치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
훗날 에노모토는 고등학교 시절의 자신을 “390피트(약 119미터)라고 쓰여진 외야 쪽 담장에 ‘쿵’하고 부딪치는 라이너성 타구인 3루타를 한번 쳤을 뿐인, 단순히 크게 휘두르는 타자였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후배였던 오 사다하루는 고교 시절의 에노모토에 대해서 “타구가 잘 날아가는 대단한 강타자였다”라고 말했다. 고교 1학년 때에는 우측 장외에 있는 밭에까지 공을 날려 보냈고, 타구의 최장 비거리를 나타내는 표시로 나무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나중에 오 사다하루가 경신). 합숙 중 야간에 다른 부원들이 교과서를 펼치는 흉내를 내는 동안, 에노모토는 소 뼈로 방망이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당시 팀 동료는 에노모토에 대해 ‘머릿 속엔 온통 야구 밖에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61]
당시에는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고, 선수 영입은 각 팀이 알아서 해야 했다. 에노모토는 ‘거칠고 난폭한 타자’라는 평판 때문에 어느 팀에서도 영입 제의를 받지 못했다. 프로에 들어가길 원했던 에노모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선배이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이 확정됐던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오리온스 입단을 부탁했다. 아라카와는 “지금부터 3년 간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등교하기 전까지 방망이 500개를 휘두르면 도와주겠다”라고 가볍게 말했지만, 에노모토는 이를 굳게 믿고 고교 생활 3년 동안 방망이를 휘두르는 연습을 반복했다. 3학년 가을에 에노모토는 아라카와의 자택을 직접 방문해 “매일 같이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프로 입단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탁했고, 아라카와는 입단 테스트를 주선했다.
에노모토는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의 힘든 연습으로 지쳐 집에 돌아온 후에도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으면 마음을 추스르고 잘 수 없다”는 이유로 취침 전에도 500번 이상 방망이를 휘두른 후에야 잠들었다고 한다.
1955년 아라카와의 노력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입단 테스트를 보게 되었다. 에노모토의 몇 타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벳토 가오루 감독이나 1루수 니시모토 유키오가 좋은 평가를 내렸고,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 벳토는 에노모토의 타격폼에 대해 “고등학교를 막 나온 사람치고는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는 타격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63] 니시모토는 “에노모토 기하치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타격에 뛰어날 정도의 천성적인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에노모토는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첫 급여로 할머니에게 프랑스 인형을 사 드렸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이 붙었고, 등번호는 ‘'''3'''’번으로 정해졌다.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에노모토는 1955년 아라카와 히로시의 도움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입단 테스트를 거쳐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였던 에노모토는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과 함께 등번호 '3번'을 받으며 구단의 기대를 받았다.입단 첫 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한 에노모토는 데뷔전에서 고의사구를 얻어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6월 7일부터는 3번 타자로 자리를 굳혔으며, 팬 투표를 통해 올스타전에도 선발 출전했다. 비록 3할 타율에는 1안타가 모자랐지만, 타율, 홈런, 타점 등 타격 전반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리며 신인왕을 차지했다.[56] 87개의 볼넷은 신인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자 퍼시픽 리그 기록이었다.
이듬해인 1956년에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가며 리그 9위의 타율과 리그 4위의 홈런을 기록, 2년 연속 타격 3개 부문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들었다. 또한 2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1루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프로 3년차부터는 슬럼프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성적에 대한 부담감, 팬들의 야유 등이 겹치면서 타격 폼이 무너지고 부진을 겪었다.[64]
하지만 1959년 시즌 후 합기도를 배우며 정신적인 강화를 꾀했고, 타석에서 힘을 빼는 방법을 체득하면서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에는 3번 타자 겸 1루수로 복귀하여 타율 0.344로 '''수위 타자'''를 차지하고 리그 5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야마우치 가즈히로, 다미야 겐지로, 가쓰라기 다카오 등과 함께 '다이마이 미사일 타선'의 일원이었다.
1961년에는 주로 1, 2번 타자로 출전하며 시즌 종반까지 하리모토 이사오와 수위 타자 경쟁을 펼쳤다. 9월에는 24세 9개월의 나이로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 일본 프로 야구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1962년부터 다시 3번 타자로 돌아온 에노모토는 1963년에도 리그 2위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다. 1964년 이후에는 팀의 간판 타자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에는 리그 1위의 타율(0.351), 리그 4위의 홈런, 리그 3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남기고 두 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통산 843개의 4사구를 기록하며 통산 네 번째 최다 안타도 기록했다.
1968년 7월 21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스즈키 게이시를 상대로 2루타를 치며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이자 '''최연소'''(31세 7개월)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그러나 같은 날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 도중 상대 선수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가격당해 의식을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70년에는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7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2. 2. 1. 마이니치/다이마이/도쿄/롯데 오리온스 (1955년 ~ 1971년)
현역 시절에 오리온스(마이니치·다이마이·도쿄·롯데)의 주축 선수로서 활약했으며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최초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56] 개인 통산 1000안타, 2000안타를 비롯한 최연소 기록[57](31세 7개월[58])을 보유하는 등 고졸 신인으로서의 수많은 기록도 가졌다. 안타 부문에서의 역대 기록에 남는 타자는 광각으로 쳐내는 타자가 많았지만 끌어 잡아당기는 타법의 풀 스윙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쌓아 올려 통산 2314안타를 기록했다.1955년, 아라카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입단 테스트를 무리하게 잡아 합격하여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게 됐다. 에노모토는 첫 급여로 할머니에게 프랑스 인형을 사드렸다고 한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이 불리기도 했고 구단측에서도 기대감을 나타내며 등번호는 ‘'''3'''’번으로 정했다.
에노모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55년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수상하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올스타로 선정되었으며, 리그에서 볼넷 1위를 기록했다. 타율은 .298로 10위를 기록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진출한 타자 중 득점, 안타, 2루타, 볼넷, 출루율에서 기록을 세웠다.[2] 이듬해인 1956년 에노모토는 다시 한 번 볼넷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고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첫 번째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다. 1957년에는 약간의 성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스타 팀에 합류했다. 1958년에는 그의 성적이 더욱 감소했지만, 여전히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1958년은 그가 볼넷보다 삼진을 더 많이 기록한 첫 해였다. 1959년에는 .276의 타율을 기록하며 5년 연속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고 두 번째 베스트 나인 상을 받으며 그의 성적이 상승했다.
1960년에는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여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지만, 타율(.344), 득점(94), 안타(170), 2루타(37)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MVP의 강력한 후보이기도 했다. 그의 팀 동료인 야마우치 가즈히로가 이 타이틀을 차지했다. 에노모토는 또한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 15타수 3안타를 기록했고, 오리온즈는 다이요 웨일스에 휩쓸렸다. 1961년에도 이러한 모습을 이어가 .331(리그 2위, 하리모토 이사오 뒤)의 타율을 기록하며 7년 연속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고 3년 연속 베스트 나인 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는 17개의 홈런을 쳐서 당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160개의 안타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다시 한 번 올스타와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다. 그는 1963년과 1964년까지 올스타와 베스트 나인 기록을 이어갔으며, 1964년에는 볼넷과 몸에 맞는 볼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1965년에는 .268의 타율을 기록하며 두 기록을 모두 끝냈는데, 이는 1958년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이었다.
1966년에는 부진한 이전 시즌과 달리 안타(167개), 2루타(31개), 루타수(272개), 출루율(.434), 장타율(.571), 타율(.351)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는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고 11번째 올스타로 선정되었지만, MVP는 노무라 가쓰야에게 돌아갔다. 1967년은 그가 83개의 볼넷으로 주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마지막 해였다. 1968년은 그가 올스타(12번째) 또는 베스트 나인(9번째, 기록)으로 선정된 마지막 해였다. 1968년 7월 21일, 에노모토는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인 스즈키 케이시를 상대로 2루타를 쳐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31세 7개월의 나이로 그는 이 기록을 달성한 가장 어린 선수이자 역대 3번째였다.[2] 그는 1967년부터 1968년까지 1,516번의 에러 없는 수비 기회와 1968년 1루에서 .999의 수비율을 기록하는 등 더 많은 기록을 세웠다. 1969년에는 .273의 타율을 기록했고, 1970년에는 .284로 상승했다. 오리온즈에서의 마지막 해인 1971년에는 단 45경기에서 .244의 타율을 기록했다. 오리온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일본 시리즈에서 패했고, 에노모토는 일본 시리즈 우승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2. 2. 2. 니시테쓰 라이온스 (1972년)
1972년, 에노모토 기하치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다. 61경기에 출전하여 .233의 타율을 기록하였다.3. 은퇴 이후
197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에노모토 기하치는 명구회에 가입할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오치아이 히로미츠 또한 명구회 가입을 거부한 유일한 선수이다. 은퇴 후에는 주차장 관리 회사에서 일했으며, 야구에 관한 글을 썼다.[12]
은퇴 후 10년 동안, 타격 코치 직책을 맡기 위해 자택과 예전 오리온스의 본거지였던 도쿄 스타디움 사이 약 42km를 격일로 달렸다. 그러나 현역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코치 취임 제의는 없었다. 1977년 도쿄 스타디움이 철거되었을 때 매일 공사 현장에 와서 그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만년에는 아파트를 경영하며 생활했고, 달리기는 고희를 넘어서도 가끔 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야구계와 일절 접촉을 끊었다.
2011년 11월 하순, 대장암이 발견되어 입원했다. 2개월 후 자택 요양을 하다가 2012년 3월 14일, 결장암으로 인해 도쿄도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2016년 1월 18일,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전문가 표창)로 선정되었다.[13][14]
4. 플레이 스타일
에노모토 기하치는 뛰어난 타격 능력과 선구안을 겸비한 선수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 뛰어난 선구안과 적은 삼진: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동시에 삼진은 매우 적었다. 1964년에는 641타석에서 86개의 볼넷을 얻었으나 삼진은 19개에 불과했다.
- 강력한 풀 히터: 그립 엔드를 잡고 풀 스윙을 하는 전형적인 풀 히터였다. 아웃코스 공도 당겨치는 타격을 구사했다.
- 라인드라이브 히터: 강렬한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많이 만들어냈다.
- 아름다운 타격 폼: 폼이 무너지지 않고 축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타격 폼을 가졌다. 야마우치 가즈히로는 그의 타격 폼을 "이것이야말로 배팅이라는 완벽한 폼"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특징들을 바탕으로 에노모토는 타저투고 시대에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기록했으며, 세이버메트릭스 지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 1. 타격
현역 시절 오리온스의 주축 선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최초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이다.[56] 장훈과 이치로 등이 그렇게 불리고 있다. 통산 1000안타, 2000안타를 비롯한 최연소 기록[57](31세 7개월[58])을 보유하는 등 고졸 신인으로서의 수많은 기록도 가졌다. 안타 부문에서의 역대 기록에 남는 타자는 광각으로 쳐내는 타자가 많았지만 끌어 잡아당기는 타법의 풀 스윙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쌓아 올려 통산 2314안타를 기록했다.4. 2. 수비
에노모토는 재능과 감성에 뒷받침된 타격 이론을 가졌고, 어떤 투수의 공이라도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면 반응했으며, 특히 선구안이 매우 뛰어났다. 고졸 신인으로서는 2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이라는 매우 드문 기록을 갖고 있다. 프로 1년 차인 19세 때(시즌 기간 중에는 18세)에 기록한 97개의 4사구는 신인 선수 기록으로서는 2위인 다베 데루오가 기록했던 65개의 4사구(1950년)를 크게 웃돈 역대 1위이다. 볼넷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삼진은 극히 적었다. 1964년에는 641차례 타석에 들어서서 86개의 볼넷에 대해 삼진은 겨우 19개였으며, 시즌 BB/K에서는 1951년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뒤를 이은 역대 2위를 기록했다(가와카미는 424타석). 1966년에는 홈런을 24개나 쳤지만 삼진은 20개였다.타저투고 시대에 좋은 성적을 계속 남겼고, 세이버메트릭스에서 통산 RCWIN 걸출도는 역대 7위, RC27 걸출도는 역대 8위를 기록한 강타자였다.[72][73] 통산 BB/K 걸출도는 2.80배를 기록했으며 4000타석 이상의 선수 가운데에서는 역대 1위이다.[74] 통산 타율 2할 9푼 8리는 7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일본 프로 야구 역대 7위이다.
에노모토는 그립 엔드(방망이를 쥔 손가락)를 잡고 풀 스윙을 많이 하는 풀 히터였다. 아웃코스로 들어오는 공에도 모두 감아서 호쾌하게 당겨 쳤으며, 당시 같은 리그에서 좌우로 노려서 때리는 ‘스프레이 타법’이라는 별명을 얻은 하리모토 이사오와는 대조적으로 노려 쳐서 타율을 끌어올리는 유형은 아니었다.[75] 임팩트 시에 강하게 버티고 몸을 낮춰서 하반신의 힘으로 휘두르는 타자였으며, 라이너성의 강렬한 타구가 매우 많은 ‘라인드라이브 히터’였다. 모양새가 무너지지 않고 축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운 타격 폼이 특징이었다. 팀 동료로서 에노모토와 함께 클린업 타자로 활약했던 야마우치 가즈히로는 에노모토의 폼에 대해서 “이거야말로 배팅이라는 완벽한 폼”이라고 말했다.
1962년 시즌 중간부터 1972년까지 오리온스의 홈구장이었던 도쿄 스타디움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렸던 선수이다. 퍼시픽 리그에서만 통산 2루타 409개는 후쿠모토 유타카의 통산 449개에 이어 퍼시픽 리그 역대 2위이며, 통산 볼넷 1062개는 퍼시픽 리그 역대 5위이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 3년 연속을 포함하여 통산 4차례 최다 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안타 개수 리그 1위를 4차례나 차지한 것은 후쿠모토 유타카, 부머 웰스와 함께 퍼시픽 리그 역대 2위에 해당된다(이치로에 기록이 깨질 때까지는 퍼시픽 리그 기록).
2루타는 409차례나 기록했다.[76]
5. 주요 기록 및 수상
에노모토 기하치는 현역 시절 오리온스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프로 야구 선수 최초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56] 1961년 9월 27일에 통산 1000안타, 1968년 7월 21일에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최연소 기록(31세 7개월[58])을 세웠다.[57]
1963년 7월 7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요네다 데쓰야 투수를 상대로 자신의 신체 움직임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다음 공의 코스와 구종을 예측하는 경험을 했다. 이후 8월 1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 부상으로 결장할 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4번 타자로 출전하여 19경기에서 타율 .411(73타수 30안타), 특히 14일 이후 11경기에서는 타율 .558(43타수 24안타)를 기록했다. 에노모토는 이 시기를 "천국에서 신에게 머리를 계속 어루만질 수 있는 나날"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이러한 경험에 대해 "제하단전에 자신의 타격 자세가 비치게 된 것"이라며, "투수와의 타이밍이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1963년 시즌에는 리그 2위인 타율 .318을 기록했고, 같은 해 7월 23일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올스타전 사상 최초의 만루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1일 부상 이후 이러한 감각을 잃고 고뇌했다고 한다.
입단 초기에는 수비가 서툴렀지만, 니시모토 유키오의 지도로 프로 2년 차인 1956년에 1루수 시즌 수비 기회와 시즌 척살 수 일본 기록을 세웠다. 1965년에는 시즌 보살 수 122개로 1루수 일본 프로 야구 기록(당시)을 세웠고,[77] 1967년 8월부터 1968년 9월까지 1516차례 수비 기회 무실책이라는 일본 기록(당시)을 세웠다.[78] 1968년 시즌에는 1루수 수비율(0.9992) 일본 프로 야구 기록(당시)을 수립했다.
1루수 통산 기록은 2147경기, 20859차례 수비 기회, 19625개 척살, 1137개 보살, 1489개 병살로 모두 1루수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통산 수비율(0.9953)은 1000경기 이상 기준 1루수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1500경기 이상 또는 13000차례 수비 기회 이상 기준 1루수 프로 야구 역대 1위이다. 1959년에는 우익수로 13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오리온스의 선수 명감에는 에노모토에 대해 '타격과 함께 수비에도 능숙한 간판 선수'라고 소개되어 있다.[79] 그러나 무라타 조지는 에노모토의 수비력에 대해 "최소한의 움직임 밖에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지만, 타격에 대한 자세에는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80]
5. 1. 타이틀
- 수위 타자: 2회 (1960년, 1966년)
- 최고 출루율: 2회 (1960년, 1966년) ※ 타이틀 제정은 1962년.
- 최다 안타: 4회 (1960년 - 1962년, 1966년) ※ 당시 연맹 표창 없음.
5. 2. 수상
- 신인왕(1955년)
- 베스트 나인 : 9회 (1956년, 1959년 ~ 1964년, 1966년, 1968년) ※1루수 부문 통산 9회 수상은 퍼시픽 리그 기록이며, 오 사다하루와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이어 역대 3위이다. (6년 연속 수상은 오 사다하루에 이어 역대 2위이자 퍼시픽 리그 최장 기록이다.)
- 올스타전 MVP : 1회 (1966년 제2전)
- 야구 명예의 전당 엑스퍼트 부문 (2016년)
5. 3. 개인 기록
다이마이도쿄
롯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