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에노모토 기하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노모토 기하치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로, 1955년부터 1972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1960년과 1966년에 수위 타자를 차지했으며, 통산 4번의 최다 안타, 9번의 베스트 나인, 1955년 신인왕을 수상했다. 에노모토는 뛰어난 타격 기술과 선구안을 바탕으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61년에는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 1000안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1972년 은퇴 후, 2016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다이마이 오리온스 선수 - 스기시타 시게루
    스기시타 시게루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 코치, 감독으로 투수로서 활약했으며,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6년 연속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고, 일본 시리즈 MVP와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수상했으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다이마이 오리온스 선수 - 도이 쇼스케
    도이 쇼스케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 고쿠테쓰 스왈로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다이마이 오리온스에서 유격수로 활동했고, 은퇴 후 일본과 대만, 한국 프로 야구팀 코치를 맡아 지도자로서 KBO 리그 발전에 기여하며 한국 야구계에 영향을 미쳤다.
  • 도쿄 오리온스 선수 - 무라타 조지
    무라타 조지는 1967년 도쿄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1990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하며 통산 215승을 기록하고, 1985년 컴백상을 수상했으며,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지도자로 활동하다 200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22년 사망했다.
  • 도쿄 오리온스 선수 - 오사와 게이지
    오사와 게이지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로서 난카이 호크스와 도쿄 오리온스에서 외야수로 활동했고 롯데 오리온스와 닛폰햄 파이터스 감독을 역임하며 닛폰햄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오야붕'이라는 별명으로 사랑받았고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마이니치 오리온스 선수 - 사토 헤이시치
    사토 헤이시치는 홋카이도 출신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퍼시픽 리그 첫 우승에 기여했고 1951년 올스타전에도 출전한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였다.
  • 마이니치 오리온스 선수 - 고 쇼세이
    고 쇼세이는 가노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활약하며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은 대만 출신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요미우리와 한신에서 모두 주력 선수로 활약, 2년 연속 수위 타자 및 최우수 훈장 선수 수상, 은퇴 후 사업가, 귀화 후 이시이 마사유키로 개명,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에노모토 기하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입단 당시의 에노모토 기하치 (1955년 촬영)
입단 당시의 에노모토 기하치 (1955년 촬영)
출생일1936년 12월 5일
출생지도쿄부 도쿄시 나카노구 (현재의 도쿄도 나카노구)
사망일2012년 3월 14일 (향년 75세)
신장172cm
체중71kg
수비 위치1루수
투구좌투
타석좌타
선수 경력
고등학교와세다 실업학교 고등부
프로 입단1955년 (테스트 입단)
소속 구단마이니치 오리온스 (1955~1971)
니시테쓰 라이온스 (1972)
첫 출장1955년 3월 26일
마지막 경기1972년 10월 4일
국가대표
선출 국가일본
명예의 전당 헌액선출년: 2016년
득표율: 75.5% (110표 중 83표)
선출 방법: 전문가 표창
통계
리그NPB
통산 성적타율: 0.298
안타: 2,314개
홈런: 246개
타점: 979점
도루: 153개
수상 내역
신인왕1955년
올스타12회 (1955~1964, 1966, 1968)
베스트 나인9회 (1956, 1959~1964, 1966, 1968)
기록NPB 최연소 2,000안타 달성 (31세 7개월)
기타 정보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헌액
등재 연도2016년

2. 선수 경력

1956년의 에노모토


에노모토는 1955년 아라카와 히로시의 도움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 입단 테스트를 거쳐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였던 에노모토는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과 함께 등번호 '3번'을 받으며 구단의 기대를 받았다.[63]

입단 첫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한 에노모토는 데뷔전에서 고의사구를 얻어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6월 7일부터는 3번 타자로 자리를 굳혔으며, 팬 투표를 통해 올스타전에도 선발 출전했다. 3할 타율에 1안타가 모자란 타율 0.298, 홈런, 타점 등 타격 전반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리며 신인왕을 차지했다.[56] 87개의 볼넷은 신인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자 퍼시픽 리그 기록이었다.

이듬해인 1956년에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가며 리그 9위의 타율과 리그 4위의 홈런을 기록, 2년 연속 타격 3개 부문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들었다. 또한 2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1루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프로 3년 차부터는 슬럼프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성적에 대한 부담감, 팬들의 야유 등이 겹치면서 타격 폼이 무너지고 부진을 겪었다.[64]

1959년 시즌 후 합기도를 배우며 정신적인 강화를 꾀했고, 타석에서 힘을 빼는 방법을 체득하면서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에는 3번 타자 겸 1루수로 복귀하여 타율 0.344로 '''수위 타자'''를 차지하고 리그 5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야마우치 가즈히로, 다미야 겐지로, 가쓰라기 다카오 등과 함께 '다이마이 미사일 타선'의 일원이었다.

1961년에는 주로 1, 2번 타자로 출전하며 시즌 종반까지 하리모토 이사오와 수위 타자 경쟁을 펼쳤다. 9월에는 24세 9개월의 나이로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 일본 프로 야구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1962년부터 다시 3번 타자로 돌아온 에노모토는 1963년에도 리그 2위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다. 1964년 이후에는 팀의 간판 타자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에는 리그 1위의 타율(0.351), 리그 4위의 홈런, 리그 3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남기고 두 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통산 843개의 4사구를 기록하며 통산 네 번째 최다 안타도 기록했다.

1968년 7월 21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스즈키 게이시를 상대로 2루타를 치며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이자 '''최연소'''(31세 7개월)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58] 그러나 같은 날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 도중 상대 선수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가격당해 의식을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70년에는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7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1972년, 니시테쓰 라이온스로 이적하여 61경기에 출전, 0.233의 타율을 기록하고 은퇴하였다.

2. 1. 유년 시절과 아마추어 야구

1936년 도쿄도 나카노구농가에서 태어났다. 에노모토 가문에는 남자아이에게 모두 '하치'(八일본어)라는 글자를 붙이는 습관이 있어서, '기하치'(喜八일본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59]

1941년 다섯 살 때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어머니는 에노모토를 소개 장소로 보내는 날에 병으로 사망했다.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종전 후에도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과 함께 살았던 유년 시절은 가난 때문에 힘들었다. 비가 새는 것을 방치하면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침실에는 빗물이 떨어졌다. 다다미에는 버섯이 생기고, 우산을 받친 채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도 있었다. 전차를 탈 수도 없어서 당시 근처를 달리는 세이부 전차를 타는 것을 동경했다고 한다.

1943년 이웃집 친구 누나를 따라 고라쿠엔 구장에 직업 야구를 보러 간 것을 계기로 야구를 시작했다. 도쿄 교진군고 쇼세이, 아오타 노보루야마토군가리타 히사노리의 플레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직업 야구는 에노모토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고, ‘할머니를 따뜻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다’는 의지로 프로 야구 선수를 목표로 했다.

1952년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세 번이나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강타자로서 두각을 나타내 2학년 봄에는 4번 타자를 맡았다. 방망이를 길게 잡고 풀스윙을 하는 타격 스타일을 고수했고, 밀어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의 스타일은 방망이를 짧게 잡고 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OB가 에노모토의 타격을 교정하려 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보결로 밀려나기도 했다.

1953년 춘계 선발 대회에 출전했으나 1차전에서 도사 고등학교 (고치현)에게 완봉패[59]를 당했고, 자신도 무안타에 그쳤다. 1년 선배 팀 동료 중에는 내야수 다나카 준지(다카하시), 외야수 사이토 기요히로(니시테쓰), 포수 쓰쿠다 아키타다 등이 훗날 프로에 입단했다.

1954년 춘계 선발 대회에도 팀 동기이자 에이스인 가와니시 히로카즈(다이에이 스타스)와 함께 출전하여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센요 고등학교(오사카부)에게 패했다. 같은 해 여름 도쿄도 예선 결승에서 구와타 다케시를 중심으로 하는 에바라 고등학교를 꺾고 하계 선수권 대회 출전을 결정지었다. 하계 선수권 대회 1차전에서는 고쿠라 고등학교 (후쿠오카현)의 하타 다카유키를 누르고 완봉승, 2차전에서는 에이스 요시하라 다케토시를 앞세운 요나고히가시 고등학교 (돗토리현)를 꺾었다. 준준결승에서는 가와니시와 고치 상업고등학교 (고치현)의 가타다 겐지가 투수전을 펼쳤지만, 9회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60]

1953년 춘계 선발 대회 1차전과 1954년 춘계 선발 대회 준준결승전에서는 각각 4번 타자와 3번 타자를 맡았지만, 주축 타자로서의 책임감과 중압감, 찬스에 약한 면모를 보였다. 3번이나 4번 타자로 출전하면 고의 사구를 얻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강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는 1번 타자로 출전했다. 와세다 실업고등학교는 에노모토가 출루하고 후속 타자가 득점하는 스타일을 확립하여, 같은 해 하계 대회에서 8강에 진출했다. 고시엔 대회 마지막 경기 후 인터뷰에서 다른 선수들이 ‘단단해졌다’고 말한 반면, 에노모토는 “결코 잘 하지는 못했다. 안타도 한 개만 쳤다”고 말했다.

지방 대회에서는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고, 1954년 하계 전국 대회를 앞두고 아사히 신문 기자와의 좌담회(8월 12일자)에서는 출전 선수 중 에노모토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타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전국 대회에서는 컨디션 난조로 통산 타율 1할 4푼 3리(21타수 3안타 4볼넷)에 그쳤다. 같은 해 홋카이도 국민 체육 대회에서는 준준결승전에서 홋카이 고등학교를 상대로 홈런과 3루타를 치며 활약했지만, 준결승전에서 고치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했다.

훗날 에노모토는 고등학교 시절의 자신을 “390피트(약 119미터)라고 쓰여진 외야 쪽 담장에 ‘쿵’하고 부딪치는 라이너성 타구인 3루타를 한번 쳤을 뿐인, 단순히 크게 휘두르는 타자였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후배였던 오 사다하루는 고교 시절의 에노모토에 대해서 “타구가 잘 날아가는 대단한 강타자였다”라고 말했다. 고교 1학년 때에는 우측 장외에 있는 밭에까지 공을 날려 보냈고, 타구의 최장 비거리를 나타내는 표시로 나무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나중에 오 사다하루가 경신). 합숙 중 야간에 다른 부원들이 교과서를 펼치는 흉내를 내는 동안, 에노모토는 소 뼈로 방망이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당시 팀 동료는 에노모토에 대해 ‘머릿 속엔 온통 야구 밖에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61]

당시에는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고, 선수 영입은 각 팀이 알아서 해야 했다. 에노모토는 ‘거칠고 난폭한 타자’라는 평판 때문에 어느 팀에서도 영입 제의를 받지 못했다. 프로에 들어가길 원했던 에노모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선배이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이 확정됐던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오리온스 입단을 부탁했다. 아라카와는 “지금부터 3년 간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등교하기 전까지 방망이 500개를 휘두르면 도와주겠다”라고 가볍게 말했지만, 에노모토는 이를 굳게 믿고 고교 생활 3년 동안 방망이를 휘두르는 연습을 반복했다. 3학년 가을에 에노모토는 아라카와의 자택을 직접 방문해 “매일 같이 방망이를 휘둘렀습니다. 프로 입단을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무릎을 꿇고 간절히 부탁했고, 아라카와는 입단 테스트를 주선했다.

에노모토는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의 힘든 연습으로 지쳐 집에 돌아온 후에도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으면 마음을 추스르고 잘 수 없다”는 이유로 취침 전에도 500번 이상 방망이를 휘두른 후에야 잠들었다고 한다.

1955년 아라카와의 노력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입단 테스트를 보게 되었다. 에노모토의 몇 타석을 보는 것만으로도 벳토 가오루 감독이나 1루수 니시모토 유키오가 좋은 평가를 내렸고, 입단 테스트에 합격했다. 벳토는 에노모토의 타격폼에 대해 “고등학교를 막 나온 사람치고는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는 타격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63] 니시모토는 “에노모토 기하치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타격에 뛰어날 정도의 천성적인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에노모토는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여 첫 급여로 할머니에게 프랑스 인형을 사 드렸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이 붙었고, 등번호는 ‘'''3'''’번으로 정해졌다.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에노모토는 1955년 아라카와 히로시의 도움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입단 테스트를 거쳐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타격 실력을 보였던 에노모토는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과 함께 등번호 '3번'을 받으며 구단의 기대를 받았다.

입단 첫 해부터 주전으로 활약한 에노모토는 데뷔전에서 고의사구를 얻어내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6월 7일부터는 3번 타자로 자리를 굳혔으며, 팬 투표를 통해 올스타전에도 선발 출전했다. 비록 3할 타율에는 1안타가 모자랐지만, 타율, 홈런, 타점 등 타격 전반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이름을 올리며 신인왕을 차지했다.[56] 87개의 볼넷은 신인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자 퍼시픽 리그 기록이었다.

이듬해인 1956년에도 뛰어난 활약을 이어가며 리그 9위의 타율과 리그 4위의 홈런을 기록, 2년 연속 타격 3개 부문에서 리그 10위권 안에 들었다. 또한 2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하며 베스트 나인(1루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프로 3년차부터는 슬럼프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성적에 대한 부담감, 팬들의 야유 등이 겹치면서 타격 폼이 무너지고 부진을 겪었다.[64]

하지만 1959년 시즌 후 합기도를 배우며 정신적인 강화를 꾀했고, 타석에서 힘을 빼는 방법을 체득하면서 부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에는 3번 타자 겸 1루수로 복귀하여 타율 0.344로 '''수위 타자'''를 차지하고 리그 5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야마우치 가즈히로, 다미야 겐지로, 가쓰라기 다카오 등과 함께 '다이마이 미사일 타선'의 일원이었다.

1961년에는 주로 1, 2번 타자로 출전하며 시즌 종반까지 하리모토 이사오와 수위 타자 경쟁을 펼쳤다. 9월에는 24세 9개월의 나이로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 일본 프로 야구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1962년부터 다시 3번 타자로 돌아온 에노모토는 1963년에도 리그 2위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팀의 중심 타자로서 활약했다. 1964년 이후에는 팀의 간판 타자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에는 리그 1위의 타율(0.351), 리그 4위의 홈런, 리그 3위의 타점을 기록하며 개인 최고 성적을 남기고 두 번째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당시 퍼시픽 리그 신기록인 통산 843개의 4사구를 기록하며 통산 네 번째 최다 안타도 기록했다.

1968년 7월 21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 스즈키 게이시를 상대로 2루타를 치며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이자 '''최연소'''(31세 7개월)로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그러나 같은 날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 도중 상대 선수에게 방망이로 머리를 가격당해 의식을 잃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1970년에는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7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2. 2. 1. 마이니치/다이마이/도쿄/롯데 오리온스 (1955년 ~ 1971년)

현역 시절에 오리온스(마이니치·다이마이·도쿄·롯데)의 주축 선수로서 활약했으며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최초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로도 알려져 있다.[56] 개인 통산 1000안타, 2000안타를 비롯한 최연소 기록[57](31세 7개월[58])을 보유하는 등 고졸 신인으로서의 수많은 기록도 가졌다. 안타 부문에서의 역대 기록에 남는 타자는 광각으로 쳐내는 타자가 많았지만 끌어 잡아당기는 타법의 풀 스윙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쌓아 올려 통산 2314안타를 기록했다.

1955년, 아라카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입단 테스트를 무리하게 잡아 합격하여 마이니치 오리온스에 입단하게 됐다. 에노모토는 첫 급여로 할머니에게 프랑스 인형을 사드렸다고 한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이 불리기도 했고 구단측에서도 기대감을 나타내며 등번호는 ‘'''3'''’번으로 정했다.

에노모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55년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수상하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올스타로 선정되었으며, 리그에서 볼넷 1위를 기록했다. 타율은 .298로 10위를 기록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진출한 타자 중 득점, 안타, 2루타, 볼넷, 출루율에서 기록을 세웠다.[2] 이듬해인 1956년 에노모토는 다시 한 번 볼넷에서 리그 1위를 차지했고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그는 또한 첫 번째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다. 1957년에는 약간의 성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올스타 팀에 합류했다. 1958년에는 그의 성적이 더욱 감소했지만, 여전히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다. 1958년은 그가 볼넷보다 삼진을 더 많이 기록한 첫 해였다. 1959년에는 .276의 타율을 기록하며 5년 연속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고 두 번째 베스트 나인 상을 받으며 그의 성적이 상승했다.

1960년에는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여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지만, 타율(.344), 득점(94), 안타(170), 2루타(37)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MVP의 강력한 후보이기도 했다. 그의 팀 동료인 야마우치 가즈히로가 이 타이틀을 차지했다. 에노모토는 또한 1960년 일본 시리즈에서 15타수 3안타를 기록했고, 오리온즈는 다이요 웨일스에 휩쓸렸다. 1961년에도 이러한 모습을 이어가 .331(리그 2위, 하리모토 이사오 뒤)의 타율을 기록하며 7년 연속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고 3년 연속 베스트 나인 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는 17개의 홈런을 쳐서 당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는 160개의 안타로 리그 1위를 기록했고, 다시 한 번 올스타와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다. 그는 1963년과 1964년까지 올스타와 베스트 나인 기록을 이어갔으며, 1964년에는 볼넷과 몸에 맞는 볼에서 리그 1위를 기록했다. 1965년에는 .268의 타율을 기록하며 두 기록을 모두 끝냈는데, 이는 1958년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이었다.

1966년에는 부진한 이전 시즌과 달리 안타(167개), 2루타(31개), 루타수(272개), 출루율(.434), 장타율(.571), 타율(.351)에서 리그 1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는 베스트 나인 상을 받았고 11번째 올스타로 선정되었지만, MVP는 노무라 가쓰야에게 돌아갔다. 1967년은 그가 83개의 볼넷으로 주요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마지막 해였다. 1968년은 그가 올스타(12번째) 또는 베스트 나인(9번째, 기록)으로 선정된 마지막 해였다. 1968년 7월 21일, 에노모토는 명예의 전당 헌액 선수인 스즈키 케이시를 상대로 2루타를 쳐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31세 7개월의 나이로 그는 이 기록을 달성한 가장 어린 선수이자 역대 3번째였다.[2] 그는 1967년부터 1968년까지 1,516번의 에러 없는 수비 기회와 1968년 1루에서 .999의 수비율을 기록하는 등 더 많은 기록을 세웠다. 1969년에는 .273의 타율을 기록했고, 1970년에는 .284로 상승했다. 오리온즈에서의 마지막 해인 1971년에는 단 45경기에서 .244의 타율을 기록했다. 오리온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일본 시리즈에서 패했고, 에노모토는 일본 시리즈 우승 타이틀을 얻지 못했다.

2. 2. 2. 니시테쓰 라이온스 (1972년)

1972년, 에노모토 기하치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였다. 61경기에 출전하여 .233의 타율을 기록하였다.

3. 은퇴 이후

1972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에노모토 기하치는 명구회에 가입할 자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회원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오치아이 히로미츠 또한 명구회 가입을 거부한 유일한 선수이다. 은퇴 후에는 주차장 관리 회사에서 일했으며, 야구에 관한 글을 썼다.[12]

은퇴 후 10년 동안, 타격 코치 직책을 맡기 위해 자택과 예전 오리온스의 본거지였던 도쿄 스타디움 사이 약 42km를 격일로 달렸다. 그러나 현역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국 코치 취임 제의는 없었다. 1977년 도쿄 스타디움이 철거되었을 때 매일 공사 현장에 와서 그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만년에는 아파트를 경영하며 생활했고, 달리기는 고희를 넘어서도 가끔 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야구계와 일절 접촉을 끊었다.

2011년 11월 하순, 대장암이 발견되어 입원했다. 2개월 후 자택 요양을 하다가 2012년 3월 14일, 결장암으로 인해 도쿄도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2016년 1월 18일,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전문가 표창)로 선정되었다.[13][14]

4. 플레이 스타일

에노모토 기하치는 뛰어난 타격 능력과 선구안을 겸비한 선수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였다.


  • 뛰어난 선구안과 적은 삼진: 볼넷을 많이 얻어내는 동시에 삼진은 매우 적었다. 1964년에는 641타석에서 86개의 볼넷을 얻었으나 삼진은 19개에 불과했다.
  • 강력한 풀 히터: 그립 엔드를 잡고 풀 스윙을 하는 전형적인 풀 히터였다. 아웃코스 공도 당겨치는 타격을 구사했다.
  • 라인드라이브 히터: 강렬한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많이 만들어냈다.
  • 아름다운 타격 폼: 폼이 무너지지 않고 축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타격 폼을 가졌다. 야마우치 가즈히로는 그의 타격 폼을 "이것이야말로 배팅이라는 완벽한 폼"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특징들을 바탕으로 에노모토는 타저투고 시대에도 꾸준히 좋은 성적을 기록했으며, 세이버메트릭스 지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 1. 타격

현역 시절 오리온스의 주축 선수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최초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선수이다.[56] 장훈이치로 등이 그렇게 불리고 있다. 통산 1000안타, 2000안타를 비롯한 최연소 기록[57](31세 7개월[58])을 보유하는 등 고졸 신인으로서의 수많은 기록도 가졌다. 안타 부문에서의 역대 기록에 남는 타자는 광각으로 쳐내는 타자가 많았지만 끌어 잡아당기는 타법의 풀 스윙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쌓아 올려 통산 2314안타를 기록했다.

4. 2. 수비

에노모토는 재능과 감성에 뒷받침된 타격 이론을 가졌고, 어떤 투수의 공이라도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면 반응했으며, 특히 선구안이 매우 뛰어났다. 고졸 신인으로서는 2년 연속 리그 최다 볼넷이라는 매우 드문 기록을 갖고 있다. 프로 1년 차인 19세 때(시즌 기간 중에는 18세)에 기록한 97개의 4사구는 신인 선수 기록으로서는 2위인 다베 데루오가 기록했던 65개의 4사구(1950년)를 크게 웃돈 역대 1위이다. 볼넷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삼진은 극히 적었다. 1964년에는 641차례 타석에 들어서서 86개의 볼넷에 대해 삼진은 겨우 19개였으며, 시즌 BB/K에서는 1951년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뒤를 이은 역대 2위를 기록했다(가와카미는 424타석). 1966년에는 홈런을 24개나 쳤지만 삼진은 20개였다.

타저투고 시대에 좋은 성적을 계속 남겼고, 세이버메트릭스에서 통산 RCWIN 걸출도는 역대 7위, RC27 걸출도는 역대 8위를 기록한 강타자였다.[72][73] 통산 BB/K 걸출도는 2.80배를 기록했으며 4000타석 이상의 선수 가운데에서는 역대 1위이다.[74] 통산 타율 2할 9푼 8리는 7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선수 가운데 일본 프로 야구 역대 7위이다.

에노모토는 그립 엔드(방망이를 쥔 손가락)를 잡고 풀 스윙을 많이 하는 풀 히터였다. 아웃코스로 들어오는 공에도 모두 감아서 호쾌하게 당겨 쳤으며, 당시 같은 리그에서 좌우로 노려서 때리는 ‘스프레이 타법’이라는 별명을 얻은 하리모토 이사오와는 대조적으로 노려 쳐서 타율을 끌어올리는 유형은 아니었다.[75] 임팩트 시에 강하게 버티고 몸을 낮춰서 하반신의 힘으로 휘두르는 타자였으며, 라이너성의 강렬한 타구가 매우 많은 ‘라인드라이브 히터’였다. 모양새가 무너지지 않고 축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아름다운 타격 폼이 특징이었다. 팀 동료로서 에노모토와 함께 클린업 타자로 활약했던 야마우치 가즈히로는 에노모토의 폼에 대해서 “이거야말로 배팅이라는 완벽한 폼”이라고 말했다.

1962년 시즌 중간부터 1972년까지 오리온스의 홈구장이었던 도쿄 스타디움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때렸던 선수이다. 퍼시픽 리그에서만 통산 2루타 409개는 후쿠모토 유타카의 통산 449개에 이어 퍼시픽 리그 역대 2위이며, 통산 볼넷 1062개는 퍼시픽 리그 역대 5위이다. 1960년부터 1962년까지 3년 연속을 포함하여 통산 4차례 최다 안타를 기록했다. 시즌 안타 개수 리그 1위를 4차례나 차지한 것은 후쿠모토 유타카, 부머 웰스와 함께 퍼시픽 리그 역대 2위에 해당된다(이치로에 기록이 깨질 때까지는 퍼시픽 리그 기록).

2루타는 409차례나 기록했다.[76]

5. 주요 기록 및 수상

에노모토 기하치는 현역 시절 오리온스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프로 야구 선수 최초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56] 1961년 9월 27일에 통산 1000안타, 1968년 7월 21일에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최연소 기록(31세 7개월[58])을 세웠다.[57]

1963년 7월 7일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요네다 데쓰야 투수를 상대로 자신의 신체 움직임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다음 공의 코스와 구종을 예측하는 경험을 했다. 이후 8월 1일 도에이 플라이어스전에서 부상으로 결장할 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4번 타자로 출전하여 19경기에서 타율 .411(73타수 30안타), 특히 14일 이후 11경기에서는 타율 .558(43타수 24안타)를 기록했다. 에노모토는 이 시기를 "천국에서 신에게 머리를 계속 어루만질 수 있는 나날"이라고 표현했다.

이후 이러한 경험에 대해 "제하단전에 자신의 타격 자세가 비치게 된 것"이라며, "투수와의 타이밍이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1963년 시즌에는 리그 2위인 타율 .318을 기록했고, 같은 해 7월 23일 올스타전 2차전에서는 올스타전 사상 최초의 만루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8월 1일 부상 이후 이러한 감각을 잃고 고뇌했다고 한다.

입단 초기에는 수비가 서툴렀지만, 니시모토 유키오의 지도로 프로 2년 차인 1956년에 1루수 시즌 수비 기회와 시즌 척살 수 일본 기록을 세웠다. 1965년에는 시즌 보살 수 122개로 1루수 일본 프로 야구 기록(당시)을 세웠고,[77] 1967년 8월부터 1968년 9월까지 1516차례 수비 기회 무실책이라는 일본 기록(당시)을 세웠다.[78] 1968년 시즌에는 1루수 수비율(0.9992) 일본 프로 야구 기록(당시)을 수립했다.

1루수 통산 기록은 2147경기, 20859차례 수비 기회, 19625개 척살, 1137개 보살, 1489개 병살로 모두 1루수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통산 수비율(0.9953)은 1000경기 이상 기준 1루수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1500경기 이상 또는 13000차례 수비 기회 이상 기준 1루수 프로 야구 역대 1위이다. 1959년에는 우익수로 13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오리온스의 선수 명감에는 에노모토에 대해 '타격과 함께 수비에도 능숙한 간판 선수'라고 소개되어 있다.[79] 그러나 무라타 조지는 에노모토의 수비력에 대해 "최소한의 움직임 밖에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지만, 타격에 대한 자세에는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80]

5. 1. 타이틀


  • 수위 타자: 2회 (1960년, 1966년)
  • 최고 출루율: 2회 (1960년, 1966년) ※ 타이틀 제정은 1962년.
  • 최다 안타: 4회 (1960년 - 1962년, 1966년) ※ 당시 연맹 표창 없음.

5. 2. 수상


  • 신인왕(1955년)
  • 베스트 나인 : 9회 (1956년, 1959년 ~ 1964년, 1966년, 1968년) ※1루수 부문 통산 9회 수상은 퍼시픽 리그 기록이며, 오 사다하루가와카미 데쓰하루에 이어 역대 3위이다. (6년 연속 수상은 오 사다하루에 이어 역대 2위이자 퍼시픽 리그 최장 기록이다.)
  • 올스타전 MVP : 1회 (1966년 제2전)
  • 야구 명예의 전당 엑스퍼트 부문 (2016년)

5. 3. 개인 기록

다이마이
도쿄
롯데1395924908414624716232671290587510557.298.414.473.88719561526315247414829815238664122695644114.282.396.454.851195712853144668120226918150495768254610.269.372.406.778195812349243163112271131804365435252684.260.342.418.760195913658149668137232111974986746915478.276.370.397.76719601335764949417037511250661511267512339.344.435.506.941196113759754393180287824642980243292216.331.390.453.8431962125524483791602821724366520336022810.331.380.503.8831963143587532701692501824864830348342310.318.378.466.8451964149641540831612511723971176058611101912.298.404.443.84719651395624936413230410200571690360462910.268.354.406.76019661335584768116731124272741461668872015.351.439.5711.01119671174683725510813115168501030583108338.290.430.452.8811968129554487701493102124377710362102628.306.387.499.886196912346240060109171211916692075421426.273.360.478.83819701103543034286100151413971014951465.284.385.465.851197145102901022314391811021010153.244.320.433.7531972세이부611901631138601471410002512164.233.342.288.630통산:18년2222900277631169231440947246355597915384206710628190645159.298.386.458.844



현역 시절에는 오리온스의 중심 선수로서 오랫동안 활약했다.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처음으로 얻은 선수이다.[3] 통산 1000안타·2000안타의 최연소 기록[4](31세 7개월[5])을 보유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고졸 신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안타를 많이 친 타자 중에는 넓은 범위로 타구를 쳐내는 타자가 많았지만, 에노모토는 당겨치는 타법과 풀 스윙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많이 쳐서 통산 2314안타를 기록했다.

1963년 7월 7일 한큐전에서 요네다 테츠야와 대결했을 때, 자신의 신체 움직임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인식되고, 다음에는 어떤 코스로 어떤 공이 올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는 기묘한 감각을 체험했다. 이때 에노모토는 심신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충만감을 느꼈고, 투수와의 타이밍이라는 개념이 필요 없어질 정도의 극한 집중력을 항상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8월 1일 도에이전에서 발목을 삐끗하여 이후 7경기를 결장할 때까지 이 상태가 지속되었고, 아웃된 타구도 모두 배트 중심에 맞은 완벽한 타구였다. 훗날 에노모토는 이때의 상황을 "야구의 신으로부터 '신의 영역'에 도달할 기회를 얻었다", "'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이 기간은 모두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여, 19경기 (더블헤더를 4회 포함)에서 타율 .411 (73타수 30안타)를 기록했다. 특히 14일 이후 11경기의 타율은 .558 (43타수 24안타)이다. 이 11경기 동안 4안타 2경기, 3안타 2경기, 2안타 4경기로 맹타를 휘둘렀다. 에노모토는 이 기간에 대해 "천국에서 신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날들이었다"라고 표현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자세히 이야기했으며, "배꼽 아래 단전에, 자신의 타격 폼이 비치게 되었다. 마치 물을 담은 쟁반에, 달이 예쁘게 비치는 느낌처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까지 잘 알 수 있었다.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부터, 배트에 실리는 과정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어떤 공에도 자신의 뜻대로 칠 수 있게 된다. 그전까지는 타이밍이 맞았다, 틀렸다 하며 일희일비했지만, 이 시기에는 상대와의 타이밍이 없어졌다. 처음부터 타이밍이 없으니, 타이밍도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타석에서 망설이는 일도 없어졌다.", "정말 꿈을 꾸는 상태로 주위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이 되었다. 프로에 들어온 이후, 타격 생각밖에 없어서 텔레비전을 봐도 진심으로 웃은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웃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전까지는 아무리 자연스러운 자세를 만들고, 거기에 혼을 불어넣어 타석에 섰다 해도, 결국 '타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안타를 치거나 빗맞거나 할 때마다, 타이밍이 맞았다, 틀렸다 하며 일희일비했다. 그러나, 단전에 자신의 타격 폼이 비치게 되자, 투수와의 타이밍이 없어졌다.", "투수가 던진 공이,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쪽은 여유를 가지고 공을 기다리고, 여유를 가지고 저스트 미트(Just Meet)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타이밍 같은 건 없어졌다. 처음부터 없으니, 타이밍이 틀리지 않게 되었다.", "26살 때, 본질로 가는 데까지 가게 되었다. 본질이라는 것은, 자신의 뇌리에 자신의 타격 모습이 잘 비치는 것이다. 눈으로 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전으로 공을 감지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빠른 공이라도 느린 공이라도 정신적으로 천천히 배트를 휘둘러도 괜찮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상태로 치고 끝난다. 그 모습은 확실히 뇌리에 비치면서, 치고 나면 스르륵 꿈에서 깨어나 제정신으로 돌아와 달리기 시작하는, 그런 데까지 가게 되었다"라고도 말했다.

1963년 시즌은 리그 2위의 타율 .318이었다. 이 숫자에 대해 "숫자는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내용은 좋았다. 그 당시, 그저 안타를 치면 된다, 타이밍이 맞아서 안타가 되면 된다, 라는 단계에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납득이 가는, 1 더하기 1은 2라는 방정식이 딱 들어맞는 타격을 원하게 되어서,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더니, 어느 날, 무의식 중에 그것이 되었다. 무심의 움직임이니까, 밥을 먹는 것과 같다. 이제, 얼마든지 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체험 중 기간인 7월 23일 올스타전 제2전에서는, 1회 말에 우익수 스탠드에 올스타 사상 최초의 만루 홈런을 쳤다. 에노모토는 같은 시합의 제3타석에서도 우익으로 솔로 홈런을 쳐, 5타점을 기록했다.

1963년 8월 1일, 수비 시에 1루 땅볼을 잡고 1루 베이스로 달려가다가, 왼쪽 발목을 삐어 결장했다. 에노모토는 10일 시합부터 복귀했지만, 7월 7일부터 시작된 일련의 감각을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이때, 에노모토는 강렬한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졌다. 그 후 통곡하며, 성적도 떨어졌다. 한때 숫자는 회복되었지만, 구장에서 집까지 계속 울면서 돌아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후, 두 번 다시 '신의 영역'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고뇌의 연속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7월 14일부터 약 2주 동안 계속된 '본질의 타격' 상태가 사라진 것에 대해, 에노모토는 "부서졌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입단 당시 타격과는 대조적으로 수비는 서툴렀다. 그 때문에 당시 1루수였던 니시모토 유키오는 에노모토가 자신의 포지션을 빼앗을지도 모르는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에노모토에게 철저하게 수비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에노모토는 2년 차인 1956년에 1루수 시즌 수비 기회와 시즌 자살 수에서 일본 기록을 수립했다. 1965년에는 시즌 보살 수 122개로 1루수 NPB 기록(당시)을 남겼고,[19] 1967년 8월부터 1968년 9월에 걸쳐서는 한 번도 실책하지 않아, 1516 수비 기회 무실책의 일본 기록(당시)을 남겼다.[20] 1968년 시즌도 9월에 기록한 실책 하나만으로 마치며 시즌 1루수 수비율 .9992의 NPB 기록(당시)을 수립했다.

1루수로서 퍼시픽 리그에서만 남긴 통산 수비 기록은 2,147경기, 20,859 수비 기회, 19,625 자살, 1,137 보살, 1,489 병살이며, 모두 1루수 퍼시픽 리그 기록이다. 1루수 프로 야구 역대에서는 경기, 수비 기회, 자살 수가 2위, 병살 수가 3위, 보살 수가 4위에 위치한다. 실책은 97개로 적고, 통산 수비율 .9953은 1,000경기 이상 대상에서 1루수 퍼시픽 리그 역대 2위, 1500경기 이상 대상 또는 13,000 수비 기회 이상 대상의 경우 1루수 프로 야구 역대 1위가 된다. 또한 1루수 외에 1959년에 우익수로 13경기 출장했다.

젊은 시절의 오리온스의 선수 명감에는, 에노모토의 선수 소개에 "(타격과 함께) 수비도 잘하는 간판 선수"라는 취지가 적혀 있다.[22] 수비 지표에서도 높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한편 1969년부터 팀의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한 투수인 무라타 쵸지는, 선수 생활 말년의 에노모토의 수비력에 대해 "수비에서는 (에노모토) 자신의 닿는 타구에만 움직여 주었고, 솔직히 힘들었다", "과장해서 말하면, 잘한다고는 할 수 없었다. 최소한의 움직임밖에 하지 않으니까."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 후에 "타격에 관해서는,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나 잡음에 눈길도 주지 않고, 한눈 팔지 않고 타격에 몰두하는 모습에, 이것이야말로 프로다, 라고 감명받았다"라고 덧붙이며, 에노모토의 타격에 대한 자세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23]

6. 평가 및 영향

에노모토 기하치는 현역 시절 오리온스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으며, 프로 야구 선수 최초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다.[56] 오 사다하루의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3년 선배이며,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지도를 받았다. 통산 2314안타, 개인 통산 1000안타 및 2000안타 최연소 기록(31세 7개월[58])을 보유하는 등 고졸 신인으로서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은퇴 후 10년 동안 타격 코치를 목표로 자택과 도쿄 스타디움 사이 약 42km를 격일로 달렸지만, 현역 복귀를 목표로 한다는 소문이 돌아 결국 코치 제의는 없었다. 1977년 도쿄 스타디움 철거 과정을 매일 지켜보았다. 만년에는 아파트 경영으로 생활했으며, 고희 이후에도 달리기를 했다. 은퇴 후 야구계와 접촉을 끊었고,[12]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회원이지만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아 탈회 처리되었다.

2011년 11월 대장암 발견 후 입원, 2012년 3월 14일 도쿄도 내 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2016년 1월 18일,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13][14]

하리모토 이사오는 에노모토를 "좌타자로서 완벽", "교과서가 될 만한 타격 폼"이라고 평가했다.[89][90] 도요다 야스미쓰는 "타격의 능숙함으로는 사상 최고의 1루수"라고 평가했으며,[91] 아리토 미치요는 "천재 중의 천재"라고 회상했다.[92]

노무라 가쓰야는 현역 시절 가장 두려워한 타자 중 한 명으로,[93] 에노모토의 독특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속삭임 전술을 쓸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나오 가즈히사는 에노모토를 상대하기 위해 포크볼을 익혔다고 회상했다.[94] 아다치 미쓰히로는 에노모토를 "야구계의 미야모토 무사시"라고 평가했다.

히로세 요시노리는 에노모토의 뛰어난 선구안을 칭찬했다.[95] 조 스탠카는 에노모토를 미국과 일본을 통틀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로 꼽았다.[96] 쓰지 야스히코는 에노모토의 정확한 선구안에 놀랐던 경험을 이야기했다.[97]

벳토 가오루는 에노모토가 볼에 손을 대지 않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니시모토 유키오는 에노모토를 가장 정확한 타자로 꼽았고,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에노모토를 "'타격의 신'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아라카와 히로시는 에노모토를 "최고의 제자"라고 칭찬했다.

스포츠 저널리스트 니노미야 세이준은 여러 투수들의 증언과 자료 분석을 통해 에노모토의 위대함을 설명했다. 에노모토는 현역 시절 인상 깊었던 투수로 이나오 가즈히사, 스기우라 다다시, 아다치 미쓰히로를 꼽았다.

7. 에피소드

에노모토는 현역 시절 무술을 활용한 트레이닝을 실천했고, 구도적인 스타일로 인해 많은 일화를 남겼다. 프로 5년 차인 1959년 시즌 오프 이후, 아라카와 히로시 등과 함께 후지히라 코이치나 검도가인 하가 쥰이치의 도장에 다니며 합기도와 거합을 익혀 타격에 도입,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훈련을 "게이코(稽古)", 타격 폼을 "카타(形)"라고 불렀으며, 시합 전에 좌선을 하기도 했다. 또한, 자택 정원에 전용 타격 연습장을 만들었다.

아라카와 히로시는 1959년 무렵의 에노모토에 대해 "매일 우리 집에 와서 배트를 휘두르고, 나의 합기도 수행에도 따라와 도장 구석에 정좌해서 견학하는 등, 프로 야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 "몇 달 동안 우리 집에 묵으면서, 외출할 때는 내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다니는 상태로 타격의 극의를 목표로 훈련했다. 시합이 끝나면 나와 함께 돌아와 내가 '이제 괜찮다'고 할 때까지 수백 번씩 배트를 휘두르며 자세, 간격, 다리 허리 위치 등을 철저하게 연구했다"라고 회고했다.

젊은 시절, 아라카와 히로시의 자택 정원에서 에노모토가 낮부터 맨손 휘두르기를 하다가 아라카와가 잊고 있었는데, 밤늦게 생각나 정원을 보니 에노모토는 아직도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24] 아라카와는 "정말 성실한 남자라서 구도심 덩어리 같았다", "의 10배는 바보처럼 성실했다. 섣달 그믐에도 설날에도 우리 집에 연습하러 왔다"라고 말했다. 에노모토는 시합 후 자택 다다미 방에서 몇 시간씩 맨손 휘두르기를 반복했고, 때로는 진검을 휘둘러 단련했다고 한다.[25]

아라카와에게 배운 합기도 타법에 대해 훗날 에노모토는 "타자석 안에 성을 쌓는 것과 같다. 몸 앞, 투수 방향에 해자와 내호가 있고, 그 사이에서 공을 처리하면 배트는 빠른 공에도 지지 않는다. 해자와 내호의 폭은 합쳐서 30~40cm 정도다", "입단 후 몇 년 동안 2할 6, 7푼이 계속되면서 3할 타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3할을 치고 싶었다. 죽기 살기로 배트를 휘두르는 동안 내호와 외호를 알게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또한, 입단 이후 데이터나 상대 투수에 대한 메모, 일기 등은 일절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에노모토의 타격 폼 조정 방법은 신인 시절부터 특이했는데, 아라카와에게 배운 "배트를 손으로 휘두르지 마라, 몸으로 휘두르지 마라, 마음으로 휘둘러라"라는 정신론을 충실히 실행했고, 폼 조정에서는 맨손 휘두르기를 하는 것 자체가 적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합 전에 배트를 한 번도 휘두르지 않고 시합에 임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26] 큰 거울 앞에서 배트를 든 채 미동도 없이 30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자세를 풀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좋은 연습이 되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훗날 에노모토는 든 배트의 끝이 오른쪽 눈의 시야 가장자리에 스치는 상태가 타격에서의 이상형이었고, 그 미세 조정을 했다고 한다. "공을 최단 거리로 맞힐 수 있는 위치에 배트 헤드가 있는지가 중요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데 스윙할 필요는 없다"라고 설명했다.

콘도 타다유키에 따르면, 폼 조정 연습 중 에노모토는 "멍하니 자세를 잡고 있으면 몸이 죽는다. 머릿속으로 날아오는 공을 그린다. 그러면 양팔 안의 피가 배트로 흘러 들어온다. 그래서 배트를 부러뜨리면 안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7]

현역 시절 에노모토는 타격에 대해 "몸(타이)이 살아 있고, 간격(마)이 맞으면 반드시 안타가 된다"라고 자주 중얼거렸다. 4타수 3안타여도 완벽한 타구가 아니면 "4분의 1인가"라며 실망하고, 4타수 무안타여도 납득이 가면 "4분의 4다"라며 기뻐했다. 텍사스 안타(포텐 히트)나 땅볼로 외야로 빠진 안타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팀 동료였던 다이고 타케오는 "4타수 4안타라면 누구라도 기뻐하며 맥주라도 마시고 행운을 축하하겠지만, 에노모토 씨는 다르다. 방 안에서 그립을 잡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어째서 치지 못했을까'라고 말한다. 치지 못했다고 해도 4분의 4다"라고 말했다.

1959년 오프 이후, 배꼽 아래 단전(세이카탄덴)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곳을 몸의 중심으로 손가락, 발가락 등 몸 구석구석을 연결(오체를 연결)시키는 트레이닝을 했다. 이 트레이닝으로 에노모토는 몸 구석구석이 의식되고, 장기 위치까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효율적인 몸 사용이 가능해졌고, "이전에는 불필요한 힘이 너무 들어갔었다", "배트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배트 자체의 무게로 아래로 떨어지는 힘도 이용한다"는 것을 깨닫고 타격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1961년 인터뷰에서 에노모토는 "매일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격렬한 프로의 세계에서 패자와 승자의 무상함은 내 사고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 괴로워하는 마음의 안정을 합기도에서 구했다. 합기도는 무술로서라기보다는 정신 수양의 길로서 구했다"라고 말했다. 인터뷰어는 "지독할 정도로 성실해서 25세의 화려한 프로 야구 선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28][29]

1966년 시즌 중 마이니치 신문 기자 인터뷰에서 에노모토는 "'정신이 들면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라는 것이 이상적이다. 나 같은 엉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은 없다. 아라카와 씨나 가와카미 씨 같은 사람에게 물어봐라. 하지만 일본인은 젓가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능숙하게 밥을 먹는다. 타격의 궁극도 거기일 것이다. 작년 시즌 오프에 아라카와 씨에게 몸을 던져 게이코를 했다. 게이코는 시간이 아니라 내용이다. 그래서 형태가 고쳐졌다"라고 말했다.

에노모토의 신조는 "구계를 대표하는 투수의 가장 자신 있는 공을 완벽하게 쳐내는 것"이었다. 펜스 직격 타구를 쳐도 "어째서 펜스를 넘지 못하는 거야"라고 루상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고민했다. 이상적인 타격 이론에 집착하여 타격이 잘 되지 않아 초조할 때는 집 안에서 배트를 들고 날뛰기도 했다.[30] 타격에 활용할 수 없을까 하는 이유로 영화를 보거나, 고양이의 움직임을 공부하거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2시간 정도 바라보기도 했다. 슬럼프 때에는 자면서도 끙끙 앓고, 배트를 보는 것도 싫을 때가 있었지만, "내 몸이 망가져서 죽어도 좋다"라는 강렬한 연습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타격에 쇠퇴가 보였던 현역 마지막 해에는 "오리온스의 에노모토는 이제 죽었다"라고 말했다.

에노모토의 사후, 장남 기에이는 "밖에서의 아버지 언행은 모른다. 집에 있는 아버지는 매우 상냥했다. 위키백과에는 여러 가지가 쓰여 있지만 전부 진짜는 아니다. 다만, 스트로익하고 서툴렀기 때문에 이해받지 못한다는 갈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여러 아버지 이야기가 실리면서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이 집에 오거나 편지를 받거나, 꼭 사인을 해서 돌려달라고 사인판이 집으로 보내져 왔다. 아버지는 '나는 은퇴하고 나서 더 인기가 많아졌네'라고 말하며 정성껏 사인을 해 보냈다. 우리 두 아들에게 '야구를 해라'라고 말하지도 않으셨고, 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손자가 지금 3명 있다. 할아버지가 대단한 야구 선수였다는 것을 아들들도 왠지 알고 있어서 그들이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54][55]

7. 1. 기행

에노모토는 1936년 도쿄도 나카노구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에노모토 가문은 남자아이에게 '하치'(八) 자를 붙이는 풍습이 있었고, 그도 '기하치'(喜八)라는 이름을 얻었다.[62]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 비가 새는 집에서 버섯이 자라는 다다미 위에서 우산을 쓰고 아침을 맞기도 했다.[63]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야구는 에노모토에게 희망이었다. 1943년 이웃집 누나를 따라 고라쿠엔 구장에서 프로 야구를 관전한 것을 계기로 야구를 시작했다. 도쿄 교진군고 쇼세이, 아오타 노보루 등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할머니를 따뜻한 집에서 살게 해 드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프로 선수를 꿈꿨다.

1952년 와세다실업고등학교에 입학, 세 번이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며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방망이를 길게 잡고 풀스윙하는 타격 스타일은 학교의 방식과 달랐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1953년 춘계 선발 대회 1차전에서 도사 고등학교에 완봉패[59]를 당했고, 이듬해 춘계 선발 대회 준준결승에서도 센요 고등학교에 패했다. 그해 여름 도쿄도 예선 결승에서 구와타 다케시의 에바라 고등학교를 꺾고 하계 선수권 대회에 진출, 1차전에서 고쿠라 고등학교를 꺾고 하타 다카유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었다. 2차전에서는 요나고히가시 고등학교를 꺾었으나 준준결승에서 가타다 겐지의 고치 상업고등학교에 9회말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60]

1953년 춘계 대회 1차전에서 4번 타자로 나섰으나 무안타에 그쳤고, 1954년 춘계 대회 준준결승에서는 3번 타자로 나섰지만 중압감과 찬스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1번 타자로 자신의 위치를 확립, 와세다실업고등학교는 그가 출루하고 후속 타자가 득점하는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해 하계 대회(제36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팀은 준준결승에 진출, 전후 최초로 하계 대회 8강에 진입했다.

지방 대회에서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지만, 전국 대회에서는 컨디션 난조로 통산 타율 1할 4푼 3리(21타수 3안타 4볼넷)에 그쳤다. 같은 해 제9회 국민 체육 대회(홋카이도 국민 체육 대회) 준준결승전에서는 홈런과 3루타를 기록하며 4강 진출에 기여했으나, 준결승전에서 고치 상업고등학교에 패했다.

훗날 에노모토는 고교 시절 자신을 "단순히 크게 휘두르는 타자"였다고 회상했고, 후배 오 사다하루는 "타구가 잘 날아가는 대단한 강타자"였다고 평가했다. 당시 팀 동료는 에노모토를 '머릿속엔 온통 야구 밖에 없는 아이'라고 말했다.[61]

당시에는 드래프트 제도가 없었기에 선수 영입은 각 팀의 재량이었다. 에노모토는 '거칠고 난폭한 타자'라는 평판 때문에 어느 팀에서도 제의를 받지 못했다. 프로 진출을 원했던 그는 와세다실업고등학교 선배이자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마이니치 오리온스 입단이 확정된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입단을 부탁했다. 아라카와는 3년 간 매일 아침 방망이 500개를 휘두르면 돕겠다고 했고, 에노모토는 이를 굳게 믿고 연습했다. 3학년 가을, 에노모토는 아라카와의 집을 찾아가 간절히 부탁했고, 결국 입단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아라카와는 "에노모토는 바보같이 솔직해서 1,000개를 휘두르라고 했으면 1,000개를 휘둘렀을 것"이라고 회상했다.[62] 에노모토는 지친 몸으로도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으면 마음을 추스리고 잘 수 없다"며 취침 전에도 500번 이상 방망이를 휘둘렀다고 한다.

1955년, 아라카와의 도움으로 마이니치 오리온스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벳토 가오루 감독과 1루수 니시모토 유키오가 그의 타격을 지켜봤고, 뛰어난 선구안과 완성된 타격폼으로 합격했다. 벳토는 "고등학교를 막 나온 사람치고는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는 타격폼"이라고 평가했다. 니시모토는 "에노모토 기하치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타격에 뛰어날 정도의 천성적인 것이었다"고 회상했다.[63] 에노모토는 첫 급여로 할머니에게 프랑스 인형을 선물했고, '가와카미 데쓰하루 2세'라는 별명과 함께 등번호 '3'번을 받았다.

7. 2.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관계

에노모토는 오 사다하루(왕정치)와 나가시마 시게오와 같은 등번호 '3'번을 사용했으며, 나가시마 시게오에게는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 지바 시게루는 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나가시마를 '서커스사자'로, 상대적으로 수수했던 에노모토를 '신관'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오 사다하루가 슬럼프를 겪던 1962년,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은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에게 "에노모토를 키운 것처럼 오 사다하루를 키워달라"고 지시했다. 아라카와 코치의 부탁으로 에노모토는 오 사다하루의 타격폼을 보고 "오른쪽 무릎이 벌어지는(열리는) 탓에 힘 있는 타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후 오 사다하루의 오른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밟으면서 타격 연습을 시켜 자세 교정을 지도했다. 오 사다하루는 에노모토에 대해 "4살 위의 선배로, 아라카와 도장에서 함께 연습했다. 프로의 엄격함을 눈앞에서 보고 힘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1962년 11월, 아라카와 히로시의 권유로 오 사다하루, 히로오카 다쓰로, 스도 유타카와 함께 검도를 배울 때의 일화가 있다. 진검으로 짚단을 베는 연습에서 모두 실패했지만, 일주일 후 에노모토와 오 사다하루만이 다시 연습 기회를 얻었다. 오 사다하루는 단번에 짚단을 베었지만 에노모토는 실패했고, 이에 좌절감과 조급함을 느껴 눈물을 흘렸다. 이후 집에서 짚단을 구해 연습했지만 잘 되지 않자 아라카와 코치에게 지도를 받아 저녁이 되어서야 짚단을 벨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에노모토는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는 스윙'을 체득하고 타격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고 한다.

아라카와 히로시는 에노모토와 오 사다하루의 차이에 대해 "기술적으로는 에노모토가 위였지만, 지나치게 파고드는 성격 탓에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가 되었다. 반면 오 사다하루는 적당히 여유를 가질 줄 알았다"고 평가했다.[98]

이나오 가즈히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에노모토와 나가시마를 상대하기 어려웠던 타자로 꼽았다. 두 선수 모두 심리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에노모토는 시선은 자신을 향하지만 눈을 마주치지 않아 섬뜩했고, 나가시마는 허점이 많아 보였지만 갑작스럽게 반응하여 장타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노무라 가쓰야 역시 에노모토와 나가시마를 상대하기 어려웠던 타자로 꼽았다.

7. 3. 인물상

현역 시절에는 오리온즈의 중심 선수로서 오랫동안 활약했다.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처음으로 얻은 선수이다.[3] 통산 1000안타·2000안타의 최연소 기록(31세 7개월)[5]을 보유하고 있으며,[4] 그 외에도 수많은 고졸 신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안타의 역대 기록에 남는 타자는 넓은 범위로 타구를 쳐내는 타자가 많았지만, 에노모토는 당겨치는 타법의 풀 스윙에도 불구하고 안타를 쌓아 통산 2314안타를 기록했다.

홈런 세계 기록 보유자 오 사다하루의 선배이다. 와세다 실업학교의 3년 선배이며,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오 사다하루가 아라카와에게 코치를 받게 된 것은 에노모토의 활약을 본 요미우리 감독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코치로 불렀기 때문이다.

1936년, 농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신파치, 아버지는 야오, 남동생은 쇼하치, 선조는 야소하치, 야사에몬 등 에노모토 가문에는 남자아이에게 모두 '팔(八)' 자를 붙이는 관습이 있었고, 자신도 기하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41년, 5세 때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집단 소개를 떠나는 날, 33세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는 종전 후에도 시베리아 억류되어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할머니와 어린 남동생과 셋이서 생활했던 유년 시절의 에노모토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비가 새는 것을 방치하면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침실에는 비가 내렸다. 다다미에는 버섯이 피어났고, 집 안에서 우산을 쓰고 서서 아침을 맞이한 날도 있었다. 전철을 타는 것도 불가능했고, 당시에는 근처를 달리는 세이부 철도(구·세이부 철도, 현재의 세이부 신주쿠선)를 타는 것을 동경했다.

1943년 3월, 근처 친구의 누나에게 이끌려 직업 야구를 고라쿠엔 구장에 관전하러 간 것이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구장의 아름다움과 요미우리 자이언츠고 쇼세이, 아오타 노보루나 야마토 군의 가리타 히사노리의 플레이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배고픔과 혹한의 날들 속에서 직업 야구는 에노모토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고, "할머니를 따뜻한 집에 살게 해드리고 싶다"는 강한 의지에서 프로 야구 선수를 목표로 하게 된다.

1972년, 트레이드를 통해 니시테쓰 라이온즈로 이적했다. 이미 은퇴하고 니시테츠의 감독으로 취임한 이나오 가즈히사는 "에노모토의 세련된 기술과 타격 이론은 아직 젊은 니시테쓰 선수들에게 산 교육이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기대를 걸었다. 에노모토도 이나오의 이러한 의도를 헤아려 "앞으로는 일개 병졸로서 감독을 돕겠다"라고 발언했고, "에노모토는 선수로서의 정점을 지나 더욱 까다로워지고 기행을 반복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듣고 있던 니시테츠의 수뇌진을 안도하게 했다. 하지만 젊은 선수들에게 에노모토의 타격 이론은 너무 난해했고, 그 이론과 직결된 기술도 거의 전달되지 않았다. 실망한 에노모토는 젊은 선수들에 대한 지도를 포기하고, 경기 전 연습 중에 객석에서 "저기, 힘내라"라고 큰 소리를 질러 이나오 등을 곤혹스럽게 하는 등, 점점 자포자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선수로서는 주로 대타의 비장의 카드로 기용되어 일정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오리온스 시대의 빛을 되찾지는 못하고, 같은 해에 현역 은퇴했다. 통산 2314안타는 은퇴 당시 퍼시픽 리그 기록이었으며, 프로 야구 역사상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이어 역대 2위였다. 등번호 3번을 18시즌에 걸쳐 사용했는데, 이는 퍼시픽 리그 역사상 최장 기록이다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장 기록은 다쓰나미 가즈요시의 22년).

현역 시절에는 무술을 활용한 트레이닝을 실천했고, 그 구도적인 스타일도 맞물려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프로 5년차인 1959년 시즌 오프 이후, 아라카와 히로시 등과 함께 후지히라 코이치나 검도가인 하가 쥰이치의 도장에 다니며 합기도와 거합을 습득하여 타격에 도입,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때문에 트레이닝을 "게이코(稽古)", 타격 폼을 "카타(形)"라고 불렀다. 시합 전에 좌선을 하기도 했다. 자택 정원에 전용 타격 연습장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다.

아라카와 히로시는 1959년 오프 즈음의 에노모토에 대해 "에노모토는 매일 나의 집에 와서 배트를 휘두르고, 나의 합기도 수행에도 따라와서, 도장 구석에 정좌해서 견학하는 등, 하드한 프로 야구 선수의 길을 걸었다", "에노모토는 나의 집에 수개월이나 묵으면서, 외출할 때는 나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따라다니는 상태로, 타격의 극의를 목표로, 맹훈련을 거듭하게 되었다. 시합이 끝나고 나서, 나와 함께 돌아와서, 내가 '이제 괜찮다'고 말할 때까지, 수백 번이나 배트의 맨손 휘두르기를 하고, 자세·간격의 취함·다리 허리의 위치 등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매일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젊은 시절의 일화로, "아라카와 히로시의 자택 정원에서 에노모토가 낮부터 맨손 휘두르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라카와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심야에 떠올리고 정원을 보니 에노모토는 아직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라는 것이 있다[24]. 아라카와는 에노모토에 대해 "정말로 성실한 남자라서, 구도심 덩어리 같은 면이 있다"라고 평하며, "오(사다하루)의 10배, 바보처럼 성실했다. 섣달 그믐도 설날도 우리 집에 연습하러 왔다"라고 말했다. 에노모토는 시합 후에 자택 다다미 방에서 몇 시간씩 맨손 휘두르기를 반복했고, 때로는 진검을 휘둘러 단련했다고 한다[25].

아라카와에게 배운 합기도 타법에 대해, 후년에 에노모토는 "타자석 안에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 몸의 앞, 투수 방향에 해자와 내호가 있고, 그 사이에서 공을 처리하면, 배트는 빠른 공에도 지지 않는다. 해자와 내호의 폭은 합쳐서 30~40cm 정도일 것이다"라고 설명했으며, "입단하고 몇 년 동안 2할 6, 7푼이 계속되면서, 도저히 3할 타자가 되고 싶었다. 일찍 3할 타자가 되면 금방 죽어버릴 텐데. 하지만 아이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3할을 치고 싶었다. 죽기 살기로 배트를 휘두르는 동안, 내호와 외호에 대해 알게 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또한, 입단 이후 데이터나 상대 투수에 대한 메모·일기 등은 일절 쓰지 않았다고 한다.

에노모토의 타격 폼 조정 방법은, 신인 시절부터 특이했는데, 아라카와에게 배운 정신론인 "배트를 손으로 휘두르지 마라, 몸으로 휘두르지 마라, 마음으로 휘둘러라"라는 이미지를 충실히 실행했고, 폼 조정에서는 맨손 휘두르기를 하는 것 자체가 적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합 전에 배트를 한 번도 휘두르지 않고 시합에 임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26]. 에노모토의 시합 전 조정 방법에 관한 일화로, 큰 거울 앞에서 배트를 든 채 미동도 없이 30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세를 풀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좋은 연습이 되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있다. 후년, 에노모토 본인이 말한 바에 따르면, 든 배트의 선단이 오른쪽 눈의 시야 가장자리에 스치는 상태가 타격에서의 이상형이었고, 그 미세 조정을 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에노모토는 "요컨대 공을 최단 거리로 미트할 수 있는 위치에 배트의 헤드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고, 그것을 확인하는 데 스윙할 필요는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취재를 했던 콘도 타다유키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폼 조정 연습 중, 에노모토는 콘도에게 "멍하니 자세를 잡고 있으면 몸이 죽습니다. 머릿속으로 날아오는 공을 그립니다. 그러면 양팔 안의 피가 지잉 하고 배트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래서 배트를 부러뜨리면 안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27].

현역 시절, 에노모토는 타격에 대해, "몸(타이)이 살아 있고, 간격(마)이 맞으면, 반드시 안타가 된다"라고 자주 중얼거렸다. 4타수 3안타여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완벽한 타구가 아니면 "4분의 1인가"라며 실망하고, 4타수 노히트여도 납득이 가면 "4분의 4다"라며 기뻐했다. 텍사스 안타 (포텐 히트)나 공이 굴러서 땅볼로 외야로 빠진 안타에서는 납득하지 않았다. 에노모토의 팀 동료였던 다이고 타케오는, "보테보테여도, 텍사스여도, 4타수 4안타라면 누구라도 기뻐한다. 맥주라도 마시고 행운을 축하하겠지만, 에노모토 씨는 다르다. 방 안에서 그립을 잡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 '어째서 치지 못했을까'라고 말하면서. 치지 못했다고 해도 4분의 4다"라고 말하고 있다.

1959년의 오프 이후, 배꼽 아래 단전 (세이카탄덴)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곳을 몸의 중심으로서 손가락이나 발가락 등 몸 구석구석을 배꼽 아래 단전과 연결(오체를 연결)시키는 트레이닝 방법을 실천하게 된다. 이 트레이닝을 함으로써, 에노모토는 몸 구석구석이 의식되고, 자신의 장기 위치까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효율적인 몸 사용이 가능해졌고, "이전의 자신은 불필요한 힘이 너무 들어갔었다"는 것과, "배트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배트 자신의 무게로 아래로 떨어지는 힘도 이용한다"는 것을 깨닫고, 타격에 대한 이해를 깊게 했다.

1961년의 인터뷰에서, 에노모토는 "매일이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격렬한 프로의 세계이다. 패자, 승자의 무상관은, 어느 시기의 나의 사고력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 무상관에 괴로워하는 마음의 안정을 나는 합기도에서 구했다. 합기도는 무술로서라기보다는, 정신 수양의 길로서, 나는 구했던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인터뷰어는 그러한 에노모토의 인상에 대해, "지독할 정도로 성실해서, 이것이 25세의 화려한 프로 야구 선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28][29].

1966년 시즌 중,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에 의한 인터뷰에서, 에노모토는 "'정신이 들면 배트를 휘두르고 있었다'라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 같은 엉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은 없다. 아라카와(히로시) 씨나 가와카미(테츠지) 씨 같은 사람에게 물어봐라. 하지만, 일본인으로 젓가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능숙하게 밥을 먹고 있다. 타격의 궁극도 거기일 것이다……라고, 이것은 나의 생각이다. 작년 시즌 오프에 아라카와 씨에게 몸을 던져 게이코를 했다. 게이코는 시간이 아니라 내용이다. 그래서 형태가 고쳐졌다"라고 말했다.

에노모토의 신조는 "구계를 대표하는 투수의 가장 자신 있는 공을 완벽하게 쳐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펜스 직격의 타구를 쳐도, "어째서 펜스를 넘지 못하는 거야"라고 루상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계속 고민했다. 이상으로 하는 타격 이론에 집착하여, 타격이 잘 되지 않아 초조했을 때에는, 집 안에서 배트를 들고 날뛰기도 했다[30]. 또한, 타격에 뭔가 활용할 수 없을까 하는 이유로 영화를 보거나, 고양이의 움직임을 공부하거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2시간 정도 바라보기도 했다. 슬럼프 때에는 자면서도 끙끙 앓고, 배트를 보는 것도 싫을 때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내 몸이 망가져서, 죽어도 좋다"라는 강렬한 연습을 여러 번 했다고 말하고 있다. 커리어의 정점을 넘고, 타격에 쇠퇴가 보였던 현역 마지막 해에는, "오리온스의 에노모토는 이제 죽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에노모토의 사후, 장남 기에이는 에노모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밖에서의 아버지의 언행을 알지 못한다. 집에 있는 아버지는 매우 상냥한 분이셨다. 위키백과에는 여러 가지가 쓰여 있지만, 전부가 다 진짜는 아니다. 다만, 스트로익하고 서툴렀기 때문에 이해받지 못한다는 갈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에서 여러 아버지 이야기가 실리게 되면서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이 집에 오거나, 편지를 받거나, 꼭 사인을 해서 돌려달라고 사인판이 집으로 보내져 왔다. 아버지는 '나는 은퇴하고 나서 더 인기가 많아졌네'라고 말하며 정성껏 사인을 해 보냈습니다. 저희 두 아들에게 '야구를 해라'라고 말하지도 않으셨고, 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손자가 지금 3명 있다. 할아버지가 대단한 야구 선수였다는 것을 아들들도 왠지 알고 있어서요. 그들이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될지도 모른다."[54][55]

참조

[1] 웹사이트 ENOMOTO, Kihachi http://english.baseb[...] 2019-11-09
[2] 웹사이트 Who is Kihachi Enomoto & why he deserves to be in Hall of Fame https://jballallen.c[...] 2019-11-09
[3] 간행물 ツーシームみたいに『[[週刊ベースボール]]』2011年9月12日号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1
[4] 웹사이트 【野球】2000安打ラッシュとなるか。大記録まで残り100本を切った5選手たち https://www.daily.co[...] 데일리스포츠 online 2022-08-23
[5] 뉴스 巨人の坂本が通算2000安打 史上2番目の年少記録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3-03-22
[6] 서적 選抜高等学校野球大会60年史 毎日新聞社編 1989
[7] 서적 全国高等学校野球選手権大会70年史 朝日新聞社編 1989
[8] 웹사이트 早実 新たな挑戦 (2)猛練習で歴史築く(2006/02/02) http://www.yomiuri.c[...]
[9] 서적 敗れざる者たち 1979
[10] 웹사이트 通算2314安打「ミスターオリオンズ」榎本喜八氏死去 https://www.sponichi[...]
[11] 서적 打撃の真髄 榎本喜八伝 講談社 2005
[12] 뉴스 毎日新聞 2012-03-29
[13] 웹사이트 斎藤雅樹氏、工藤公康氏、榎本喜八氏ら野球殿堂入り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6-01-18
[14] 뉴스 工藤、斎藤氏ら殿堂入り 山中、故榎本、故松本氏も 2016-01-19
[15] 웹사이트 RC・WIN 通算 http://www16.plala.o[...] 日本プロ野球記録統計解析試案「Total Baseballのすすめ」 2014-04-17
[16] 웹사이트 RC27傑出度 http://www16.plala.o[...] 日本プロ野球記録統計解析試案「Total Baseballのすすめ」 2014-04-17
[17] 웹사이트 球団史上最高の4人を選ぶ 千葉ロッテマリーンズ編 http://ranzankeikoku[...] 日本プロ野球RCAA&PitchingRunまとめ 2015-09-06
[18] 간행물 Number PLUS - プロ野球 大いなる白球の軌跡 - 文藝春秋 1999
[19] 웹사이트 1960年代の内野守備指標 http://ranzankeikoku[...] 日本プロ野球RCAA&PitchingRunまとめ 2016-02-09
[20] 웹사이트 DeNA・ロペス 1517連続守備機会無失策でプロ野球記録更新 榎本喜八の記録を51年ぶり塗り替える https://www.sponichi[...] Sponichi Annex 2019-05-16
[21] 문서 パ・リーグ歴代1位は柏原純一
[22] 문서 1957年、1959年オリオンズ選手名鑑
[23] 서적 先発完投わが人生 徳間書店 1990
[24] 뉴스 スポーツ報知 2012-03-30
[25] 웹사이트 <野球殿堂>榎本氏 首位打者2度「安打製造機」 http://headlines.yah[...] 毎日新聞 2016-01-28
[26] 서적 豪打列伝 文春文庫ビジュアル版 1986
[27] 서적 プロ野球名人列伝 PHP文庫 1996
[28]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1961-07-31
[29] 웹사이트 【週ベ60周年記念企画174】稲尾和久は卑怯者?【1961年7月31日号】 https://web.archive.[...]
[30] 웹사이트 【12月8日】1971年(昭46)奇行で?トレードされた“安打製造機”榎本喜八 やはり噂は… https://web.archive.[...]
[31] 방송 サンデーモーニング 2012-04
[32] 웹사이트 殿堂入りした故・榎本喜八氏こそが「打撃の神様」だった! https://news.yahoo.c[...] Yahoo! 2016-01-19
[33] 웹사이트 【張本勲氏が語る榎本喜八氏】この人には勝てないとただ一人思った打者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6-01-19
[34]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 2012-04-23
[35] 뉴스 スポーツ報知 2012-03-29
[36] 서적 私が見た最高の選手、最低の選手 東邦出版 2013-12
[37] 간행물 野村克也の目 週刊朝日
[38] 간행물 Number 468호 Sports Graphic Number 1999-04-22
[39] 서적 南海ホークス ナンバ栄光と哀しみの故郷(追憶の球団)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4
[40] 뉴스 巨人・坂本が及ばなかった史上最年少2000安打 「榎本喜八」伝説 期待されないコネ入団で新人王、24時間野球漬け 須藤豊氏が証言 https://www.zakzak.c[...]
[41] 웹사이트 パ・リーグのつわものたち<後編>山内、榎本…審判についても少し【ダンプ辻のキャッチャーはつらいよ】 https://column.sp.ba[...]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21-03-25
[42] 서적 スポーツ伝説13 栄光のアウトロー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0
[43] 뉴스 榎本喜八氏は一番弟子 王&長嶋と教え子三羽がらす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6-01-19
[44] 간행물 新サムライ伝説 Number 1993-08-20
[45] 간행물 榎本喜八 もののふの真実 Sports Graphic Number PLUS 20世紀スポーツ最強伝説③ - プロ野球 大いなる白球の軌跡 -
[46] 웹사이트 王貞治選手と榎本喜八選手の違い https://toyokeizai.n[...]
[47] 서적 プロ野球 無頼派 選手読本 宝島SUGOI文庫 2008
[48] 웹사이트 野村克也「攻略法がなかった…」伝説の打者・榎本喜八が極めた道 https://gendai.media[...]
[49] 서적 強打者列伝 KADOKAWA 2014
[50] 웹사이트 ついに殿堂入りの榎本喜八――「変人」との噂も、60年代最強の安打製造機 http://www.baseballc[...]
[51] 뉴스 巨人・坂本が及ばなかった史上最年少2000安打 「榎本喜八」伝説 期待されないコネ入団で新人王、24時間野球漬け 須藤豊氏が証言 https://www.zakzak.c[...]
[52] 뉴스 【12月26日】1963年(昭38) 小山正明と山内一弘“世紀のトレード”異例の同席発表 https://web.archive.[...]
[53] 서적 豊田泰光 108の遺言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3
[54] 뉴스 ベンチで座禅…榎本喜八氏 殿堂入りで孤高の大打者に光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16-01-19
[55] 뉴스 張本勲氏、榎本喜八さんを絶賛「理想的なフォーム」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16-01-19
[56] 간행물 ‘투심처럼’ 슈칸 베이스볼 2011-09-12
[57] 웹인용 【野球】2000安打ラッシュとなるか。大記録まで残り100本を切った5選手たち https://www.daily.co[...] 데일리 스포츠 online 2017-05-09
[58] 뉴스 巨人の坂本が通算2000安打 史上2番目の年少記録 https://www.daily.co[...] 株式会社デイリースポーツ 2020-11-08
[59] 서적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 60년사 마이니치 신문사 1989
[60] 서적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70년사 아사히 신문사 1989
[61] 뉴스 早実 新たな挑戦 (2)猛練習で歴史築く(2006/02/02) 요미우리 신문
[62] 서적 질 수 없는 사람들 1979
[63] 뉴스 通算2314安打「ミスターオリオンズ」榎本喜八氏死去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2012-03-30
[64] 서적 타격의 진수 에노모토 기하치전 고단샤 2005
[65] 뉴스 【5月16日】1977年(昭52) 解体工事中の東京スタジアムへ 榎本喜八、深夜の42キロ走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66] 뉴스 마이니치 신문 2012-03-29
[67] 웹인용 平成28年 野球殿堂入り発表 斎藤氏、工藤氏、榎本氏、松本氏、山中氏が殿堂入り http://www.baseball-[...] 2016-01-18
[68] 뉴스 斎藤雅樹氏、工藤公康氏、榎本喜八氏ら野球殿堂入り http://www.nikkanspo[...] 닛칸 스포츠 2016-01-18
[69] 뉴스 工藤、斎藤氏ら殿堂入り 山中、故榎本、故松本氏も 주니치 신문 2016-01-19
[70] 뉴스 野球殿堂入り 工藤公康氏や斎藤雅樹氏ら5人 http://www3.nhk.or.j[...] NHK 뉴스 2016-01-18
[71] 뉴스 【野球殿堂】榎本喜八氏、引退から44年エキスパート表彰 http://www.hochi.co.[...] 스포츠 호치 2016-01-19
[72] 웹사이트 RC・WIN 通算 http://www16.plala.o[...] 2014-04-17
[73] 웹사이트 RC27傑出度 http://www16.plala.o[...] 2014-04-17
[74] 웹사이트 球団史上最高の4人を選ぶ 千葉ロッテマリーンズ編 http://ranzankeikoku[...] 2015-09-06
[75] 간행물 Sports Graphic Number PLUS - 프로 야구 위대한 백구의 궤적 분게이슌주 1999
[76] 웹인용 巨人・坂本 2つ大記録に並んだ 歴代10位タイ二塁打&歴代7位タイ猛打賞 https://www.daily.co[...] 데일리 스포츠 online 2022-06-19
[77] 웹사이트 1960年代の内野守備指標 http://ranzankeikoku[...] 2016-02-09
[78] 웹인용 DeNA・ロペス 1517連続守備機会無失策でプロ野球記録更新 榎本喜八の記録を51年ぶり塗り替える https://www.sponichi[...] Sponichi Annex 2019-05-16
[79] 문서 1957년, 1959년 오리온스 선수 명감
[80] 서적 선발 완투 우리 인생 도쿠마 쇼텐 1990
[81] 뉴스 스포츠 호치 2012-03-30
[82] 웹인용 <野球殿堂>榎本氏 首位打者2度「安打製造機」 http://headlines.yah[...] 마이니치 신문 2016-01-28
[83] 서적 호타열전 분슌분코 비주얼판 1986
[84] 서적 프로 야구 명인 열전 PHP 문고 1996
[85]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1961-07-31
[86] 웹인용 【週ベ60周年記念企画174】稲尾和久は卑怯者?【1961年7月31日号】 https://news.goo.ne.[...] 2018-05-10
[87] 뉴스 【12月8日】1971年(昭46)奇行で?トレードされた“安打製造機”榎本喜八 やはり噂は…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88] 방송 선데이 모닝 TBS 2012-04
[89] 웹사이트 殿堂入りした故・榎本喜八氏こそが「打撃の神様」だった! http://bylines.news.[...] 2016-01-19
[90] 뉴스 【張本勲氏が語る榎本喜八氏】この人には勝てないとただ一人思った打者 https://www.sponichi[...] 스포니치아넥스(스포츠 닛폰) 2016-01-19
[91] 간행물 슈칸 베이스볼 2012-04-23
[92] 뉴스 스포츠 호치 2012-03-29
[93] 서적 내가 본 최고의 선수, 최악의 선수 도호 출판 2013-12
[94] 간행물 Number 1999-04-22
[95] 서적 난카이 호크스 - 넘버 영광과 슬픔의 고향(추억의 구단)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4
[96] 웹사이트 巨人・坂本が及ばなかった史上最年少2000安打 「榎本喜八」伝説 期待されないコネ入団で新人王、24時間野球漬け 須藤豊氏が証言 https://www.zakzak.c[...] 석간 후지 2020-07-30
[97] 웹인용 パ・リーグのつわものたち<後編>山内、榎本…審判についても少し【ダンプ辻のキャッチャーはつらいよ】 https://column.sp.ba[...] 슈칸 베이스볼 ONLINE 2021-03-25
[98] 서적 스포츠 전설 13 - 영광의 아우트로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0
[99] 뉴스 【榎本喜八氏は一番弟子 王&長嶋と教え子三羽がらす】 https://www.sponichi[...] 스포니치아넥스(스포츠 닛폰) 2016-01-19
[100] 간행물 Sports Graphic Number 1993-08-20
[101] 서적 에노모토 기하치 무사의 진실
[102] 웹사이트 王貞治選手と榎本喜八選手の違い http://toyokeizai.ne[...] 도요케이자이
[103] 서적 프로 야구 무뢰파 선수 독본 다카라지마 SUGOI 문고 2008
[104] 웹사이트 野村克也「攻略法がなかった…」伝説の打者・榎本喜八が極めた道 https://gendai.ismed[...] 겐다이 비즈니스 2017-05-01
[105] 서적 강타자 열전 KADOKAWA 2014
[106] 뉴스 ついに殿堂入りの榎本喜八――「変人」との噂も、60年代最強の安打製造機 http://www.baseballc[...] 베이스볼 채널 2016-01-23
[107] 뉴스 巨人・坂本が及ばなかった史上最年少2000安打 「榎本喜八」伝説 期待されないコネ入団で新人王、24時間野球漬け 須藤豊氏が証言 https://www.zakzak.c[...] 석간 후지 2020-07-30
[108] 웹인용 【12月26日】1963年(昭38) 小山正明と山内一弘“世紀のトレード”異例の同席発表 http://www.sponichi.[...] 스포츠 닛폰
[109] 서적 도요다 야스미쓰 108의 유언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3
[110] 뉴스 ベンチで座禅…榎本喜八氏 殿堂入りで孤高の大打者に光 https://www.sponichi[...] 스포니치아넥스(스포츠 닛폰) 2016-01-19
[111] 뉴스 張本勲氏、榎本喜八さんを絶賛「理想的なフォーム」 https://www.nikkansp[...] 닛칸 스포츠 2016-01-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