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트 르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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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르네스트 르낭은 182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역사가, 철학자, 작가이다. 그는 1852년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콜레주 드 프랑스의 히브리어학 교수를 역임하며, 《기독교 기원사》를 저술했다. 특히 예수의 생애를 다룬 《예수전》은 논란을 일으켰다. 르낭은 종교에서 초자연적 설명을 배척하고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국가에 대한 독창적인 정의를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민족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1892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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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트 르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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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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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조제프 에르네스트 르낭 |
출생일 | 1823년 2월 28일 |
출생지 | 트레기에, 프랑스 왕국 |
사망일 | 1892년 10월 2일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제3공화국 |
국적 | 프랑스 |
학문 분야 | |
주요 관심사 | 종교사 종교 철학 정치철학 |
사조 | 대륙 철학 |
주요 아이디어 | 시민 민족주의 |
주요 저서 | 예수의 생애 (1863년) 민족이란 무엇인가? (1882년)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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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848년 9월, 르낭은 철학 교수자격을 취득했고, 1852년 아베로에스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49년부터 1850년까지 이탈리아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29]
1860년 시리아 학술 탐험을 통해 20년에 걸쳐 《기독교 기원사》(1863~83) 7권을 완성했다. 그중 1권 《예수전》은 크리스트를 영감을 받은 철학자로 묘사,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하여 논란을 일으켰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금서 목록에 올렸다.
1862년 1월 콜레주 드 프랑스 히브리어학 교수가 되었으나, 취임 강연에서 예수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 칭하여 신성모독으로 1870년 복직까지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884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 학장을 역임했다.[29]
보불 전쟁(1870~71) 당시 《프랑스의 지적ㆍ도덕적 개혁》(1871)을 저술,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상호 존중을 주장했다. 187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르낭은 종교에서 초자연적 설명을 배척, '자연=신적(神的)'이라 주장, 인간 본래의 자연성을 도덕적이라 보았다. 주요 저서에 《이스라엘 민족사》 등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에르네스트 르낭은 1823년 브르타뉴의 트레기외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7] 그의 할아버지는 어업으로 재산을 모아 어선을 구입하여 트레기외에 정착했고, 그의 아버지는 작은 커터선의 선장이자 공화주의자였다. 르낭이 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12살 연상의 누이 앙리에트가 가계를 이끌었다.[29] 앙리에트는 파리에서 교사로 일하며 르낭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르낭은 1873년 앙리에트를 회상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르낭은 고향의 교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유순하고, 끈기 있고, 부지런하고, 꼼꼼하며, 철저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8][29] 사제들은 그에게 수학과 라틴어를 가르쳤고, 어머니는 그의 교육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르낭의 어머니는 절반은 브르타뉴인이었고, 아버지 쪽 조상은 보르도 출신이었다. 르낭은 자신의 성격에 가스코뉴인과 브르타뉴인의 기질이 섞여 있다고 말했다.[9][29]
1838년 여름, 르낭은 트레기에르 대학에서 모든 상을 휩쓸었다. 그의 누이는 파리의 학교 의사에게 르낭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는 F. A. P. 뒤팡루에게 알렸다. 뒤팡루는 생니콜라 뒤 샤르도네 신학대학을 조직하고 있었는데, 이 학교는 가톨릭 귀족과 신학교의 재능 있는 학생들을 함께 교육하여 귀족과 성직자 간의 우정을 쌓는 것을 목표로 했다. 뒤팡루는 당시 15세였고 브르타뉴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르낭을 파리로 불렀다. 르낭은 파리에서 지식이 교회의 특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재능과 명성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종교가 트레기에르와 파리에서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느꼈고, 아베 뒤팡루를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29][10]
파리의 대학에서 르낭은 계몽주의적인 과학 지식의 세계를 접하고, 가톨릭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는 성직과 지적 성실성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교회의 초자연적이고 전통적인 신앙을 버리고 성직의 길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탁월한 인격에 대한 신앙"을 간직했다.
2. 2. 신앙의 위기와 학문적 여정
1840년, 르낭은 생니콜라 뒤 샤르도네 신학교를 떠나 이시레물리노 신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는 가톨릭 스콜라 철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입학했다. 철학자들 중에서는 토마스 리드와 니콜라 말브랑슈가 그를 처음 매료시켰고, 이후 헤겔, 이마누엘 칸트, 헤르더에게 관심을 돌렸다.[10] 르낭은 자신이 연구했던 형이상학과 자신이 고백했던 믿음 사이의 모순을 발견하기 시작했지만, 검증 가능한 진리에 대한 갈망이 그의 회의론을 억제했다. 그는 앙리에트에게 "철학은 자극적이지만 진리에 대한 갈망을 반만 충족시킨다. 나는 수학에 열중하고 있다"라고 썼다.[29]1844년, 르낭은 이시에서의 과정을 마치고, 성직에 입문하기 전 어문학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생쉴피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히브리어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사야서''의 두 번째 부분이 문체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첫 번째 부분과 다르다는 것, ''오경''의 문법과 역사가 모세 시대보다 늦다는 것, 그리고 ''다니엘서''가 그 배경 시대보다 수 세기 후에 명백히 기록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밤에는 빅토르 위고의 새로운 소설을 읽었고, 낮에는 아르튀르-마리 르 이르에게 히브리어와 시리아어를 배웠다.[10] 1845년 10월, 르낭은 오라토리오회의 평신도 학교인 스타니슬라스를 다니기 위해 생쉴피스를 떠났다. 여전히 교회에 너무 얽매여 있다고 느껴, 그는 마지못해 종교 생활과의 마지막 연관성을 끊고, 교사로서 M. 크루제 학교에 들어갔다.[29]
1848년 9월, 철학 교수자격을 처음으로 받은 르낭은 1852년 무슬림 철학자 아베로에스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1849년부터 1850년까지 르낭은 이탈리아에 사절단으로서 방문했다.
2. 3. 《예수전》과 논란
1860년 기독교의 기원을 밝히기 위하여 시리아로 가서 학술 탐험을 하고 돌아온 에르네스트 르낭은 20년에 걸쳐 《기독교 기원사 Histoire de L'origine du christianisme (1863~83)》 7권을 완성하였다. 그중에서 크리스트를 영감을 받은 철학자로 그린 1권 《예수전》(La vie Jésus)이 유명한데, 이 책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예수를 그렸다.[12][13] 르낭은 이 책의 아이디어를 누이 앙리에트에게서 얻었다고 했는데, 그녀와 함께 오스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여행하던 중 열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르낭은 단지 신약성서와 요세푸스의 사본만을 참고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14] 이 책은 출판된 해에 찰스 E. 윌버에 의해 처음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지난 145년 동안 계속 출판되었다.[15]《예수전》은 예수가 "유대적 특성"을 정화할 수 있었고, 아리아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르낭의 《예수전》은 인종적 사상을 장려하고 인종을 신학과 예수의 인격에 주입했는데, 그는 예수를 유대인에서 기독교인으로 변모한 갈릴리 사람으로 묘사했으며, 기독교는 유대교의 영향에서 정화되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17] 이 책은 주로 요한복음을 기반으로 했으며, 학술적인 저작이었다.[17] 이 책은 예수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묘사했고, 복음서의 기적을 거부했다.[17] 르낭은 예수를 인간화함으로써 그에게 더 큰 존엄성을 부여했다고 믿었다.[18]
《예수전》은 예수의 생애가 다른 역사적 인물의 생애처럼 쓰여야 하고, 성경이 다른 역사적 문서와 마찬가지로 비판적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장을 펼쳐 논란을 일으켰고,[19] 많은 기독교인[20][21][22][23]과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유대교를 어리석고 터무니없이 비논리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예수와 기독교가 우월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17]
1862년 1월 11일 콜레주 드 프랑스의 히브리어학 교수가 되었으나, 2월 21일 취임 강연에서 예수를 가리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그는 이를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 생각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에게는 신성모독이었다. 결국 르낭은 그해 교수직에서 쫓겨난다. 그가 다시 교수직에 복직한 것은 1870년에 이르러서였다.
르낭의 『예수전』은 자연과학으로 이론 체계화가 불가능한 요소는 모두 미신으로 배제한다는 성서 연구의 세속적 전통의 시초가 되었다.
2. 4. 학문적 성취와 말년
1848년 9월, 철학 교수자격을 처음으로 받은 르낭은 1852년 무슬림 철학자 아베로에스에 관한 논문으로 문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1849년부터 1850년까지 르낭은 이탈리아에 사절단으로서 방문했다.[29]1860년 기독교의 기원을 밝히기 위하여, 시리아로 가서 학술 탐험을 하고 돌아왔으며, 20년에 걸쳐 《기독교 기원사 Histoire de L'origine du christianisme (1863~83)》 7권을 완성하였다. 그 중에서 크리스트를 영감을 받은 철학자로 그린 1권의 《예수전》(La vie Jésus)이 유명한데, 이 책은 예수의 생애 가운데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하나의 인간으로서 예수를 그렸다. 이 때문에 많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책을 금서 목록에 올려 놓았다. 1862년 1월 11일 콜레주 드 프랑스의 히브리어학 교수가 되었으나, 2월 21일 취임 강연에서 예수를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지칭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 성직자들에게 신성모독으로 여겨져 그해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1870년에 교수직에 복직되었고, 1884년에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학장을 역임했다.[29] 보불 전쟁(1870~71) 당시 《프랑스의 지적ㆍ도덕적 개혁 Réforme intellectuelle et morale de la France(1871)》을 저술하여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서로 존중함으로써 인류 진보에 공헌할 수 있는데 왜 싸우는가 하며 책망했다. 187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그는 종교에서 초자연적 설명을 배척하고, '자연이 곧 신적(神的)'이라 하였으며 인간 본래의 자연성을 도덕적이라고 보는 점에서 자연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 저서에 《이스라엘 민족사》 등이 있다.
사제에게 교육받은 르낭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 과학적 이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우주의 웅장함에 매료되었다. 만년에 그는 아미엘에 대해 "개인 일기를 쓸 시간이 있는 사람은 결코 우주의 광대함을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썼다. 1846년, 르낭은 당시 18세의 젊은 화학자이자 M. 크루제 학교의 제자였던 마르셀랭 베르텔로로부터 물리학 및 자연 과학의 확실성을 깨달았다. 르낭이 죽는 날까지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르낭은 저녁에만 보조 교사로 일했다. 낮에는 셈어 문헌학 연구를 계속했다. 1847년, 아카데미 데 앙스크립시옹이 수여하는 주요 상 중 하나인 볼네 상을 그의 원고 "셈족 언어의 일반사"로 수상했다. 같은 해, ''아그레제 드 필로소피''(철학 교수 자격)를 취득했으며, 방돔 ''리세''의 교사직을 제안받았다.[29]
1856년, 르낭은 파리에서 헨드릭 셰페르의 딸이자 아리 셰페르의 조카인 코르넬리 셰페르와 결혼했다. 이들은 둘 다 네덜란드 출신의 프랑스 화가였다. 그들은 두 자녀를 두었는데, 1858년에 태어난 아리 르낭은 화가가 되었고, 1862년에 태어난 노에미는 결국 언어학자 야니스 프시카리스와 결혼했다. 1863년, 미국 철학회는 그를 국제 회원으로 선출했다.[11]
그는 사도 바울에 관한 책에서,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더 넓은 사회 생활, 동료 의식, 그리고 《과학의 미래(L'Avenir de la Science)》를 고취했던 민주주의적 감성의 부활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1869년, 모의 의원 선거에서 자유주의 야당 후보로 나섰으나 낙선했다. 제국 해산 직전, 르낭은 제국을 받아들일 준비가 반쯤 되어 있었고,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면 '자유 제국(l'Empire liberal)' 그룹에 합류했을 것이다. 1년 후, 독일과의 전쟁이 선포되었고, 제국은 폐지되었으며 나폴레옹 3세는 망명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르낭에게 큰 전환점이었다. 독일은 항상 그에게 사상과 무사심한 과학의 안식처였으나, 이제 그는 자신의 이상이 탄생한 땅을 파괴하고 망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더 이상 독일인을 사제가 아닌 침략자로 보았다.



1870년대 자유주의의 전망에 대한 비관론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 지식인 엘리트의 필요성을 여전히 믿었던 르낭은 프랑스 제3공화국을 지지하기 위해 나섰고, 자신을 "정당주의자"라고 묘사하면서 "어떤 정부든 정당하다고 여기는 데 약 10년이 걸린다"라고 말했다. 또한 "나는 ''a priori'' 공화주의자가 아니며, 헌법군주제에 기꺼이 적응하려는 단순한 자유주의자로서 새롭게 개종한 공화주의자보다 공화국에 더 충성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27] 공화국 하에서 과학의 발전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관대함은 그의 이전의 많은 두려움을 진정시켰고, 그는 이폴리트 텐과 같은 철학자들의 결정론적이고 숙명론적인 이론에 반대했다.[28]
나이가 들면서 그는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1883년에 자전적 작품인 ''어린 시절과 청춘의 추억''을 출판했을 때 거의 예순 살이었는데, 이 작품은 ''예수의 생애'' 다음으로 그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29]
이 작품은 현대 독자들에게 기독교의 기원만큼이나 시적이고 원시적인 세계가 프랑스 북서부 해안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 속에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고대 로맨스의 켈트 마법과 19세기가 매우 소중히 여겼던 단순함, 자연스러움,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몇 달 전에 출판된 ''전도서'', 1888년에 수집된 ''철학적 드라마''는 그의 까다로운 비판적이고 환멸을 느끼면서도 낙관적인 정신을 더 적절하게 보여준다. 그것들은 신념에 의한 자유주의자, 기질에 의한 귀족인 철학자의 비문화적 사회주의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 안에서 칼리반 (민주주의)이 자신의 책임에 대해 교육받고 결국 적절한 통치자가 되는 방식, 프로스페로 (귀족적 원리 또는 정신)가 칼리반이 효과적인 경찰관임을 증명하고 상사에게 실험실에서 자유로운 손을 주기 때문에 지적 세계의 더 큰 자유를 위해 그의 퇴위를 받아들이는 방식, 아리엘 (종교적 원리)이 삶에 대한 더 확고한 입지를 얻는 방식을 배운다. 종교와 지식은 그것들이 고귀하게 하는 세계만큼이나 썩지 않는다. 따라서 르낭의 본질적인 관념론이 깊은 곳에서 정복되지 않고 일어난다.[29]
르낭은 다작을 했다. 예순 살에 ''기독교의 기원''을 완성한 그는 평생 동안 ''구약''과 르낭의 지휘 아래 1881년부터 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아카데미 데 쟁스크립시옹에서 출판된 ''셈어 비문 집''을 연구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했다. ''이스라엘 역사''의 첫 번째 권은 1887년에, 세 번째 권은 1891년에, 마지막 두 권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사실과 이론의 역사로서 이 책은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지만, 종교적 사상의 진화에 대한 에세이로서 매우 중요하며, 르낭의 정신을 반영하는 가장 생생한 이미지이다. 1891년에 출판된 수집된 에세이집인 ''잎사귀''에서 교리와 무관한 경건의 필요성에 대한 확인과 같은 동일한 정신적 태도를 발견한다. 그는 말년에 많은 영예를 받았으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관리자가 되었고 레지옹 도뇌르의 그랑 오피시에가 되었다. 두 권의 ''이스라엘 역사'', 그의 여동생 앙리에트와의 서신, ''M. 베르텔로에게 보내는 편지'', 결혼 직전에 쓴 ''필리프 르 벨의 종교 정책사''는 19세기의 마지막 8년 동안 모두 출판되었다.[29]
르낭은 1892년 파리에서 며칠 동안 앓다가 사망했으며,[29] 몽마르트르 구역의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혔다.
3. 주요 사상
르낭은 유대인을 뜻하는 셈족이 아리안 인종에 비해 열등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 민족이 독단주의에 갇혀 있고 불완전한 인종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혹자는 그의 사상이 볼테르의 반유대주의에서 왔다고 주장한다.[40] 그는 인종적 특성이 본능적이며 결정론적이라고 믿었다.[35][36] 르낭은 셈족의 정신은 독단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세계 시민적인 문명 개념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38] 르낭에게 셈족은 "불완전한 인종"이었다.[39]
그는 유럽의 아슈케나짐 유대인을 셈족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르낭은 하자르 이론을 제기했는데, 이 이론은 아슈케나짐의 기원이 유대교로 개종한 튀르크계 난민에서 비롯되었으며, 붕괴된 하자르 카간국에서 서쪽으로 라인란트로 이주하여, 그들의 모국어인 하자르어를 이디시어로 바꾸고 유대교를 계속 실천했다는 것이다. 1883년 강연 "인종으로서 그리고 종교로서의 유대교"에서 그는 유대인이 ''생물학적'' 의미에서 통일된 인종적 실체를 구성한다는 개념에 이의를 제기했으며,[41] 이는 그의 견해를 인종적 반유대주의 내에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들었다. 르낭은 또한 반유대주의적 함의를 지닌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 알려져 있었다.[42]
1880년대에 르낭은 이러한 견해에서 벗어나, 1883년 강연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에 세상에 가장 큰 봉사를 했습니다... 유럽의 모든 자유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그것은 인류의 사회적 진보에 탁월하게 기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4][45]
그는 프랑스 제3공화국을 지지하며, "민족의 인종적 위계"를 확신하며[52] 식민주의를 지지했다.[54] 그는 프랑스인이 아프리카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으며,[54] 식민주의를 "문명화의 사명"으로 정당화했다.[59] 그는 또한 "식민지화하지 않는 국가는... 사회주의로... 멸망할 운명"이라고 썼다.[56] 에메 세제르는 『식민주의론』에서 르낭을 비판했고,[59]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학설을 초기 오리엔탈리즘으로 보았다.[60]
3. 1. 종교 연구
르낭은 저녁에만 보조 교사로 일하면서, 낮에는 셈어 문헌학 연구를 계속했다. 1847년, 아카데미 데 앙스크립시옹에서 볼네 상을 그의 원고 "셈족 언어의 일반사"로 수상했다.[29] 같은 해, 그는 ''아그레제 드 필로소피''(철학 교수 자격)를 취득하고, 방돔 ''리세''의 교사직을 제안받았다.[29]그는 생전에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저서 ''예수의 생애''(프랑스어: ''Vie de Jésus'', 1863)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12][13] 르낭은 신약성서와 요세푸스의 사본만을 참고하여 이 책을 썼는데,[14] 오스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여행 중 열병으로 사망한 누이 앙리에트가 집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은 출판된 해에 찰스 E. 윌버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고, 145년 동안 계속 출판되었다.[15]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자신의 저서 ''역사적 예수 탐구''에서 르낭의 ''예수의 생애''를 아이러니하게 칭찬하면서도 비판했다.[16]
르낭은 ''예수의 생애''에서 인종적 사상을 장려하며, 예수를 유대인에서 기독교인으로 변모한 갈릴리 사람으로 묘사하고, 기독교가 유대교의 영향에서 정화되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17] 그는 요한복음을 기반으로 예수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묘사하고 복음서의 기적을 거부했다.[17] 르낭은 예수를 인간화함으로써 그에게 더 큰 존엄성을 부여했다고 믿었다.[18]
이 책은 예수의 생애가 다른 역사적 인물의 생애처럼 쓰여야 하고, 성경이 다른 역사적 문서와 마찬가지로 비판적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다.[19] 많은 기독교인[20][21][22][23]과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어리석고 비논리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예수와 기독교가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에 분노했다.[17] 조지 모세에 따르면, 르낭은 무관용이 기독교적 특성이 아닌 유대교적 특성이며,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성경적 유대교는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중요성을 잃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4]
3. 2. 민족주의와 국민 개념
에르네스트 르낭의 국가(nation)에 대한 정의는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1882년 강연 "Qu'est-ce qu'une nation?"(국가란 무엇인가?)에서 르낭은 피히테와 같은 독일 작가들이 인종이나 "공통적인 특징"(언어 등)을 공유하는 민족 집단으로 국가를 정의한 것과 달리, "함께 위대한 일을 해냈고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하는" 국민의 열망에 따라 국가를 정의했다.[25] 그는 국가의 존재는 "매일의 국민투표"에 기반한다고 선언했다.[25]칼 도이치는 국가를 "과거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이웃에 대한 증오로 결합된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제안했다. 르낭은 "국가의 본질적인 요소는 모든 개인들이 많은 공통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많은 것을 잊어야 한다. 모든 프랑스 시민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학살과 알비 십자군의 13세기 남부 학살을 잊어야 한다"고 썼다.[26]
르낭은 "국가는 영원하지 않다. 그들은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럽 연합으로 대체될 것이다."라고 믿었다.[26]
르낭의 연구는 특히 20세기 민족주의 이론가인 베네딕트 앤더슨에게 영향을 미쳤다. 1882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행한 "Qu'est-ce qu'une nation?"(국가란 무엇인가) 강연에서 르낭은 요한 고트리프 피히테가 강연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제시한 "네이션"과는 다른 개념을 제시했다. 피히테의 "네이션" 개념이 인종, 민족 집단, 언어 등과 같이 명확하게 어떤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에 기초하는 데 반해, 르낭에게 "네이션"이란 정신적 원리이며, 사람들이 과거에 행했고, 앞으로도 할 의향이 있는 희생심에 의해 구성된 연대감에 의해 추구된다고 보았다. 특히 이 강연에서 제시된 "국민의 존재는… 매일의 국민 투표이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르낭의 주장은 프랑스-독일 민족주의의 비교로서 자주 다루어진다. 피히테가 설파한 "민족주의"가 민족에 기초하는 것이라면, 르낭의 주장은 이념에 기초한 민족주의 등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르낭의 주장 역시 보불 전쟁에서 빼앗긴 알자스-로렌(주민 사용 언어는 독일어에 가깝다)이 프랑스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그의 개인적인 신념과도 결부되어 있다. 그는 왕당파이기도 하며 "여러분은 왕권신수설을 믿지 않아도 왕당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3. 3. 인종주의 논란
르낭은 셈족이 아리안 인종에 비해 열등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 민족이 독단주의에 갇혀 있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사상이 볼테르의 반유대주의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40]르낭은 인종적 특성이 본능적이며 결정론적이라고 믿었다.[35][36] 그는 셈족의 정신이 독단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세계 시민적인 문명 개념이 부족한 "불완전한 인종"이라고 주장했다.[38][39]
아슈케나짐 유대인을 셈족으로 보지 않았던 르낭은 하자르 이론을 제시했다. 이 이론은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기원이 하자르 카간국 붕괴 후 서쪽으로 이동해 이디시어를 사용하며 유대교를 믿게 된 튀르크계 난민이라고 보았다. 1883년 강연에서 그는 유대인이 ''생물학적''으로 통일된 인종이라는 개념에 반박했고,[41] 독일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인종적 반유대주의와 거리를 두었다.
르낭은 유대인 박해에 대해 "모든 국가와 모든 시대가 당신을 박해했다면, 그 모든 배후에는 어떤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언급하며, 유대인이 일반법 밖에 머물면서 국가의 부담 없이 이점만을 원했기 때문에 박해가 있었다고 주장했다.[43]
그러나 1880년대에 르낭은 이러한 견해에서 벗어나, 1883년 강연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은 과거에 세상에 가장 큰 봉사를 했습니다... 유럽의 모든 자유 세력과의 협력을 통해, 그것은 인류의 사회적 진보에 탁월하게 기여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4][45] 국가란 무엇인가? 강연에서는 인종에 기반한 국가 이론을 비판하며 "순수한 인종은 존재하지 않으며 민족지학적 분석에 기초하여 정치를 세우는 것은 키메라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46] 그는 또한 "유대교의 적들은, 당신이 그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일반적으로 현대 정신의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7][48]
하지만 르낭은 인종 간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믿었는데, "자연은... 노동자 인종, 중국인을 만들었습니다... 주인이자 군인 인종, 유럽 인종... 각각 그가 만들어진 일을 하게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와 같은 언급은 논란이 되었다.[49] 에메 세제르는 이를 서구 휴머니즘의 위선으로 비판했다.[50]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에 르낭은 자결주의를 옹호하면서도[51] "민족의 인종적 위계"를 확신하며[52] 식민주의를 지지했다.[54] 그는 프랑스인이 아프리카인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으며,[54] 식민주의를 "문명화의 사명"으로 정당화했다.[59] 그는 또한 "식민지화하지 않는 국가는... 사회주의로... 멸망할 운명"이라고 썼다.[56]
에메 세제르는 『식민주의론』에서 르낭을 비판했고,[59]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학설을 초기 오리엔탈리즘으로 보았다.[60]
르낭은 『셈어 일반사 및 비교 체계』(1855)에서 셈족과 아리아족을 구분하고, 아리아 인종이 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썼다.[62] 그는 셈족이 사명을 달성하면 쇠퇴하고 아리아족만이 인류의 운명을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62] 또한, 기독교의 인류애는 아리아인의 조상에게서 나왔으며, 기독교만이 유럽 공통의 윤리와 미학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63]
1863년, 마르셀랭 베르텔로는 르낭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조상의 아리아인"을 언급했고, 이폴리트 텐은 아리아 민족을 찬미했다.[64]
한편, R.F. 그라우[65]는 르낭을 비판하며 셈족은 종교를 독점하는 여성적 존재이고, 신은 셈적 정신과 인도게르만적 성질의 결혼을 결정했다고 주장했다.[66] 골트치어 이그나츠는 르낭을 비판하며 히브리인도 아리아인처럼 인류 역사의 건설자였다고 주장했다.[67]
3. 4. 식민주의 옹호
프랑스 제3 공화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인종차별주의 이론이 대두되면서 르낭은 이 문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민족의 자결주의 개념을 옹호했지만,[51] 한편으로는 "확립된" "민족의 인종적 위계"를 확신했다.[52] 담론적으로 그는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인종적 위계에 종속시켰다.[53] 즉, 그는 프랑스인이 아프리카 국가보다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3 공화국의 식민주의적 팽창과 인종차별적 관점을 지지했다.[54] 질 망세롱이 "공화주의적 인종차별주의"라고 부른[55] 이러한 미묘한 인종차별주의는 제3 공화국 시대 프랑스에서 흔했으며 정치에서도 잘 알려진 옹호 담론이었다. 식민주의 지지자들은 문화적 우월성 개념을 사용하여 식민지적 행동과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문명의 보호자"라고 묘사했다. 또한 그의 식민주의 지지에는 또 다른 동기가 있었는데, 르낭은 "식민지화하지 않는 국가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전쟁인 사회주의로 돌이킬 수 없이 멸망할 운명"이라고 썼다.[56]르낭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의한 침략을 열등한 인종을 문명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Mission civilisatrice|미시오 시빌리자트리스프랑스어(문명화의 사명)으로 정당화하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다음 해인 1871년에 쓴 『지적 도덕적 개혁』에서 우수한 서양 인종이 흑인, 중국인, 아랍인의 "열등한 인종"과 "퇴화한 인종"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59]
마르티니크 출신의 흑인 시인 에메 세제르는 『식민주의론』(1955년)에서 르낭을 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르낭의 학설을 초기 오리엔탈리즘으로 보고 있다.[60]
4. 영향과 유산
르낭은 생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사후에는 서구 문화의 진보적 정신을 구현한 인물로 찬사를 받았다. 아나톨 프랑스는 르낭을 현대성의 화신이라고 썼다. 르낭의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매튜 아놀드, 이디스 워튼, 샤를 오귀스탱 생트뵈브를 포함한 당시 주요 문학가들로부터 읽히고 높이 평가받았다.[30][31] 그의 가장 열렬한 팬 중 한 명은 페루의 마누엘 곤잘레스 프라다로, 그의 반성직주의의 기초로 『예수의 생애』를 삼았다. 1932년 문서 "파시즘 교리"에서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르낭의 "명상록"의 한 구절에서 민주주의와 개인의 권리를 "키메라"이며 본질적으로 "자연의 계획"에 반대한다고 주장한 "파시스트 이전의 직관"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32]
1903년, 장 부셰가 디자인한 기념비가 트레기어에 설치되면서 큰 논란이 일어났다. 지역 대성당 광장에 설치된 이 기념비는 가톨릭교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되었고, 광범위한 시위로 이어졌다. 특히, 이 장소는 전통적인 가톨릭 축제인 성 이브의 속죄 축제에서 임시 설교단이 세워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념비는 그리스 여신 아테나가 르낭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주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모습으로, 대성당을 향해 도전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33][34] 지역 성직자들은 "승리한 울트라몬탄주의 교회의 상징"으로서 이브 에르노가 디자인한 갈보리 조각을 조직하여 항의했다.
5. 저서 목록
De l'orinine du langage프랑스어 (1848). ''언어의 기원에 관하여''.
- Averroës et l'averroïsme프랑스어 (1852). ''아베로에스와 아베로에스주의''.
- De Philosophia Peripatetica, apud Syros프랑스어 (1852). ''시리아인들의 관점에서 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 L'Âme bretonne프랑스어 (1854). ''브르타뉴의 영혼''.
- Histoire générale et systèmes comparés des langues sémitiques프랑스어 (1855). ''셈족 언어의 일반 역사와 비교 시스템''.
- Études d'histoire religieuse프랑스어 (1857). ''종교사 연구''.
- Le Livre de Job프랑스어 (1858). ''욥기''.
- Essais de morale et de critique프랑스어 (1859). ''도덕과 비평의 에세이''.
- Le Cantique des cantiques프랑스어 (1860). ''아가''.
- Henriette Renan, souvenir pour ceux qui l'ont connue프랑스어 (1862). ''앙리에트 르낭, 그녀를 아는 사람들을 위한 추억''.
- Histoire des origines du christianisme프랑스어 (1863–1881). ''기독교 기원사'':
- * Vie de Jésus프랑스어 (1863). ''예수의 생애''.[79]
- * Les Apôtres프랑스어 (1866). ''사도들''.
- * Saint Paul프랑스어 (1869). ''성 바울''.
- * L'Antéchrist프랑스어 (1873). ''적그리스도''.
- * Les Évangiles et la seconde génération chrétienne프랑스어 (1877). ''복음서와 기독교 제2세대''.
- * L'Église chrétienne프랑스어 (1879). ''기독교 교회''.
- * Marc-Aurèle ou la Fin du monde antique프랑스어 (188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또는 고대 세계의 종말''.
- * Index프랑스어 (1883). ''색인''.
- 페니키아 임무 (1865–1874)(Mission de Phénicie프랑스어) (1864).
- [https://www.lexilogos.com/document/renan/acropole.htm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기도'' (Prière sur l'Acropole프랑스어)] (1865).
- Questions contemporaines프랑스어 (1868). ''현대 문제들''.
- La Réforme intellectuelle et morale de la France프랑스어 (1871). ''프랑스의 지적, 도덕적 개혁''.
- Dialogues et fragments philosophiques프랑스어 (1876). ''철학적 대화와 단편''.
- Mélanges d'histoire et de voyages프랑스어 (1878). ''역사와 여행의 혼합''.
- Drames philosophiques프랑스어 (1878–1886). ''철학적 희곡'':
- * Caliban프랑스어 (1878). ''칼리반''.
- * L'Eau de jouvance프랑스어 (1881). ''생명의 물''.
- * Le Prêtre de Némi프랑스어 (1885). ''네미의 사제''.[57]
- * L'Abbesse de Jouarre프랑스어 (1886). ''주아르의 수도원장''.
- Conférences d'Angleterre프랑스어 (1880). ''영국 강연''.
- L'Ecclésiaste프랑스어 (1881). ''코헬렛''.
- ''국가란 무엇인가?'' (Qu'est-ce qu'une Nation?프랑스어) (1882).
- [https://www.mcgill.ca/islamicstudies/files/islamicstudies/renan_islamism_cversion.pdf 이슬람과 과학: 1883년 3월 29일 라 소르본에서 발표된 강연(Islam and Science: A lecture presented at La Sorbonne, 29 March 1883프랑스어)] (1883).[58]
- Souvenirs d'enfance et de jeunesse프랑스어 (1883). ''어린 시절과 청춘의 추억''.
- Nouvelles études d'histoire religieuse프랑스어 (1884). ''종교사 연구 신작''.
- Le Bouddhisme프랑스어 (1884). ''불교''.
- Discours et conférences프랑스어 (1887). ''연설과 강연''.
- Histoire du peuple d'Israël프랑스어 (1887–1893). ''이스라엘 민족사'' [5권].
- Examen de conscience philosophique프랑스어 (1889). ''철학적 양심의 가책''.
- L'Avenir de la science, pensées de 1848프랑스어 (1890). ''과학의 미래, 1848년의 생각''.
- Feuilles détachées프랑스어 (1892). ''떨어진 잎''.
- Études sur la politique religieuse du règne de Philippe le Bel프랑스어 (1899). ''필리프 4세 통치 시대의 종교 정책에 대한 연구''.
- Mélanges religieux et historiques프랑스어 (1904). ''종교적, 역사적 혼합''.
- Patrice프랑스어 (1908). ''파트리스''.
- Fragments intimes et romanesques프랑스어 (1914). ''은밀하고 로맨틱한 단편''.
- Essai psycologique sur Jésus-Christ프랑스어 (192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심리적 에세이''.
- Voyages: Italie, Norvège프랑스어 (1928). ''여행: 이탈리아, 노르웨이''.
- Sur Corneille, Racine et Bossuet프랑스어 (1928). ''코르네유, 라신, 보쉬에에 관하여''.
- Ernest Renan et l'Allemagne프랑스어 (1945). ''에르네스트 르낭과 독일''.
- An Essay on the Age and Antiquity of the Book of Nabathaean Agriculture영어 (1862). ''나바테아 농업서의 시대와 고대성에 관한 에세이''.
- Studies of Religious History and Criticism영어 (1864). ''종교사 연구 및 비평''.
- The Life of Jesus영어 (1864). ''예수의 생애''.
- The Apostles영어 (1866). ''사도들''.
- Saint Paul영어 (1868). ''성 바울''.
- Constitutional Monarchy in France영어 (1871). ''프랑스의 입헌 군주제''.
- Lectures on the Influence of the Institutions, Thought and Culture of Rome, on Christianity and the Development of the Catholic Church영어 (1885). ''로마의 제도, 사상, 문화가 기독교와 가톨릭 교회의 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한 강연''.
- * English Conferences of Ernest Renan영어 (1888). ''에르네스트 르낭의 영어 강연''.
- History of the People of Israel영어 (1888–1895). ''이스라엘 민족사''.
- Marcus-Aurelius영어 (188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The Abbess of Jouarre영어 (1888). ''주아르의 수도원장''.
- The Gospels영어 (1889). ''복음서''.
- The Antichrist영어 (1890). ''적그리스도''.
- Cohelet; or, the Preacher영어 (1890). ''코헬렛, 또는 설교자''.
- The Future of Science영어 (1891). ''과학의 미래''.
- The Song of Songs영어 (1891). ''아가''.
- Recollections and Letters of Ernest Renan영어 (1892). ''에르네스트 르낭의 회고록과 서신''.
- The Book of Job영어 (1893). ''욥기''.
- My Sister Henrietta영어 (1895). ''나의 누이 앙리에타''.
- Brother and Sister: A Memoir and the Letters of Ernest & Henriette Renan영어 (1896). ''형제와 누이: 에르네스트와 앙리에트 르낭의 회고록과 서신''.
- Caliban: A Philosophical Drama영어 (1896). ''칼리반: 철학적 드라마''.
- The Poetry of the Celtic Races, and Other Essays영어 (1896). ''켈트족의 시와 기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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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ooks.google.fr/books?id=tlATAAAAQAAJ&dq=De+l%27origine+du+langage++renan&printsec=frontcover&source=bl&ots=mlPcolF-v1&sig=CGfliYd80RW6NMZfw1I48-rU3F8&hl=fr&ei=X9csS92kI4HbjQfvo_SRBw&sa=X&oi=book_result&ct=result&resnum=1&ved=0CAgQ6AEwAA#v=onepage&q=&f=false 언어 기원에 관하여] (1848-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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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서와 기독교 2세대』(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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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또는 고대 세계의 종말』(1882).
- 『페니키아의 선교』(1864-74).
- 『현대의 문제들』(1868).
- 『프랑스의 지적 및 도덕적 개혁』(1871)
- 『철학 대화와 단편』(1876).
- 『역사와 여행의 혼합』(1878).
- 『철학 드라마』:
- 『칼리반』(1878),
- 『젊음의 물』(1881),
- 국가란 무엇인가? (1882).
- 『국민이란 무엇인가』(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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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미의 사제』(1885),
- 『주아르의 수녀원장』(1886).
- 『영국 강연』(1880).
- 『전도서』(1881).
-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추억』(1883).
- 『추억』(1953)
- 『추억』(1953)
- 『종교사의 새로운 연구』(1884).
- 『불교』(1884), 뤼메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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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설과 회의』(1887).
- 『철학적 양심의 검토』(1889).
- 『과학의 미래, 1848년의 사상』(1890).
- 『단편 잎새』(1892).
공저:
- 『14세기의 프랑스 문학사』(1865), 빅토르 르 클레르크와 공저.
사후 출판:
- 『필리프 4세 통치 시대의 종교 정치에 관한 연구』(1899).
- 『종교 및 역사 혼합』(1904).
- 『파트리스』(1908).
- 『내밀하고 소설적인 단편』(1914).
-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심리적 에세이』(1921).
- 『코르네유, 라신, 보쉬에에 관하여』(1928).
- 『여행: 이탈리아, 노르웨이』(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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