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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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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바우어는 빈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다. 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사회민주노동자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오스트리아 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외무장관을 역임하며 독일과의 합병을 추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사회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사회주의화를 추구했다. 그는 민족 문제에 대한 '문화적 자치' 개념을 제시하고, 사회주의의 통합을 주장했으나 실패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 내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하여 저항 운동을 이어갔고,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사망했다. 그의 사상은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영향을 미쳤으며, 민족 문제와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중요한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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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바우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19년의 바우어
1919년의 바우어
출생일1881년 9월 5일
출생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망일1938년 7월 4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정당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 (SDAP)
모교빈 대학교
경력
군 복무오스트리아-헝가리군 (1902–1918)
계급[[File:Kuk Oberleutnant.svg|23px]] 중위 (예비역)
정치 경력
직책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총리카를 레너
임기 시작1918년 11월 21일
임기 종료1919년 7월 26일
이전빅토르 아들러
이후카를 레너

2. 생애

오토 바우어는 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1] 빈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 활동에 참여했으며,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카를 레너 등과 교류하며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4] 1907년에는 주요 저서 『민족 문제와 사회 민주주의』(Die Nationalitätenfrage und die Sozialdemokratie|디 나치오날리테텐프라게 운트 디 조치알데모크라티deu)를 발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민족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며 이론가로서 주목받았다. 그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전간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좌파 및 빈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다.

2. 1. 청년 시절

에서 태어났으며, 조부모는 보헤미아 출신 유대인이었다. 아버지는 섬유 공장을 소유한 실업가 필립(필리프) 바우어였고, 어머니는 카타리나(캐테) 바우어(결혼 전 성 게르버)였다.[1]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메라노[2]와 라이헤텐베르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김나지움 재학 시절부터 이미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관련 연구를 시작했으며,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지 『노이에 차이트』(Die Neue Zeitde)에 「마르크스의 경제 공황 이론」이라는 논문을 처음으로 투고하기도 했다.

이후 빈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학 외에도 철학, 경제학, 역사학, 언어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고, 1906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일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를 구사했으며, 이후 전쟁 포로 생활을 거치며 러시아어도 익히게 되었다.[3] 1902년에는 1년 자원병으로 티롤 소총 연대 제3연대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시작했고, 예비 장교 시험에 합격한 후 현역 복무를 마쳤다.

1900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1945년 이전의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의 명칭)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는 사회주의 학생 자유 협회의 회원이 되었고, 이곳에서 막스 아들러, 루돌프 힐퍼딩, 카를 레너 등 다소 나이가 많은 사회주의 당원들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좌익 학생 서클 활동을 했는데, 이 서클은 훗날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집단의 핵심이 되었다.[4] 또한 빈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로서 '미래'(Zukunftde)라는 협회를 공동으로 설립하기도 했다.[4]

1907년에는 불과 26세의 나이로 600페이지에 달하는 저서 『민족 문제와 사회 민주주의』(Nationalitätenfrage und Sozialdemokratiede)를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에서 그는 문화적 자율성의 원칙을 적용하여,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안고 있던 민족 문제에 대한 건설적인 해결책을 모색했다.

2. 2. 제정 치하

오토 바우어의 저서 ''민족 문제와 사회민주주의'' (1924년판)


오토 바우어는 사회민주당 지도부 빅토어 아들러의 지원 아래 장래가 촉망되는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성장했다. 1897년 사회민주당이 브르노 강령을 채택하면서 당내 민족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고, 바우어는 레너와 함께 당의 민족 정책을 이론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1907년 그는 주요 저서인 『민족 문제와 사회민주주의』(Die Nationalitätenfrage und die Sozialdemokratie|디 나치오날리테텐프라게 운트 디 조치알데모크라티de)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바우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속지주의에 기반한 자치 조직과 속인주의에 기반한 문화적 자치 제도를 결합하는 '문화적 자치'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민족의 본질을 영토와 언어의 공통성으로 본 카를 카우츠키블라디미르 레닌 등과의 이론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1907년), 바우어는 제국의회 내 사회민주당 의원단의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당의 이론지인 『데어 캄프』(Der Kampf|데어 캄프de)를 공동 창간하여 1914년까지 편집장을 맡았다. 또한 1912년부터 1914년까지는 당 기관지 『아르바이테어-차이퉁』(Arbeiter-Zeitung|아르바이터 차이퉁de)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바우어는 예비역 장교로 소집되어 종군했다.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과의 전투 중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수감되었다. 포로 생활 동안 그는 러시아 혁명의 전개 과정을 목격했다. 빅토어 아들러 등 당 지도부의 노력으로 1917년 9월,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되어 오스트리아로 귀국했다.

귀국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내에서는 프리드리히 아들러(빅토어 아들러의 아들) 등이 이끄는 좌파 세력이 반전 운동을 벌이며 지지를 얻고 있었다. 바우어는 이전의 전쟁 지지 입장을 철회하고 이들 좌파 반전 운동에 합류했다. 1918년에는 '좌익 민족 강령' 초안 작성에 참여하며, 기존의 입장을 일부 수정하여 제국 내 소수 민족의 민족 자결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2. 3. 제1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는 오스트리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사회민주당(SDAP)은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바우어는 당내 좌파의 젊고 역동적인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1918년 11월 11일 빅토어 아들러가 사망하자, 37세의 바우어는 당 지도부에 합류했다. 사회민주당은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하여 오스트리아 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1920년 카를 레너


1918년 11월 12일, 당의 제안으로 바우어는 빅토어 아들러의 뒤를 이어 신생 독일-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사회민주당 우파의 지도자인 카를 레너는 총리직을 맡았다. 1919년 2월 제헌 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40.76%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었고, 기독사회당과의 연립 정부를 이어갔다.

외무장관으로서 바우어는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합병(안슐루스)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는 민족적, 국제적 관점에서 합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며, 의회 연설에서는 합병 반대자를 국가 반역자로 규정하기도 했다. 1918년 11월 임시 국민 의회는 합병에 찬성했고, 바우어는 승전국에 합병의 당위성을 알리는 외교 문서를 보냈다. 1919년 초 독일 외무장관 울리히 폰 브로크도르프-란차우와 비밀 협상도 진행했으나, 독일 측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생제르맹 조약을 통해 연합국이 합병을 금지하면서 바우어의 통일 정책은 좌절되었다. 그는 1919년 7월 26일 외무장관직에서 사임했고, 레너 총리가 외무부를 겸임하게 되었다. 바우어는 이후에도 1933년까지 합병을 지지했다.

사임 후 바우어는 1919년 3월부터 10월까지 의회가 임명한 사회화 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기독사회당의 이그나츠 자이펠과 함께 일했다. 이 위원회는 노동자 평의회 법안 초안을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12], 사기업 사회화는 연립 파트너 간의 이견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바우어와 사회민주당 좌파는 볼셰비키식의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 대신, 의회 정치를 통한 점진적인 "사회화"를 통해 당의 세력을 확장하고 미래의 혁명 기회를 모색하는 '대기주의적' 방침을 채택했다. 그는 율리우스 도이치, 프리드리히 아들러 등과 함께 노동자들을 당 노선에 묶어두고 공산주의 쿠데타 시도를 막는 데 성공했다. 이는 전후 경제 호황과 붉은 빈으로 대표되는 사회민주당 시 정부의 사회 복지 정책에 힘입은 바도 컸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 이후 국제 노동운동·국제 사회주의 운동볼셰비키(코민테른)와 수정주의파(제2인터내셔널)로 분열되자, 바우어는 이를 우려하여 양측의 재통합을 목표로 조정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제2½인터내셔널(빈 인터내셔널, 국제 사회당 행동 동맹) 결성을 주도하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율리우스 도이치


1920년 전후 경제 호황이 둔화되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민생고가 심화되면서 1920년 10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기독사회당에 밀려 제2당이 되었다. 바우어의 주장에 따라 사회민주당은 기독사회당과의 연립 정부에서 탈퇴했다. 이 결정으로 율리우스 도이치는 육군 장관직을 잃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사회민주당의 통제에서 벗어나 14년 후 사회 민주주의 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사회민주당은 1945년까지 연방 정부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당 집행위원회에서 연정 유지를 주장했던 카를 레너는 바우어의 강경 노선이 사회민주당의 장기적인 야당 생활을 초래했다고 비판했다.[13] 연정 붕괴와 함께 제2½인터내셔널을 통한 통합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1930년 빈 시청 앞에서 연설하는 바우어


바우어는 1920년부터 1934년까지 사회민주당 소속 국민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26년 당의 새로운 강령인 린츠 강령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4] 린츠 강령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투쟁 이념에 기반하여, 당시 점증하던 성직자 파시스트 성향의 기독교 사회당 및 준군사조직 Heimwehr와의 대립 구도를 명확히 했다. 강령은 부르주아 계급과의 협력을 일시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를 통해 생산 수단을 "전 인민의 공동 재산"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우어는 이 강령을 통해 개량주의와 볼셰비즘 사이의 제3의 길로서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제시하며, 전간기 사회민주당의 사실상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강령의 혁명적 수사는 반대파에게 볼셰비즘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바우어는 과격한 행동과는 거리를 두었지만, 볼셰비키 사상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15] 훗날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강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이 당에 부정적인 꼬리표를 달아주었다고 평가했다.

제2½인터내셔널이 실패한 후, 이를 흡수하여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이 발족하자 바우어는 프리드리히 아들러와 함께 여기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 4. 망명과 죽음

1927년 이후 바우어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1930년대 독일에서 나치즘이 세력을 얻자 오스트리아에서도 오스트로파시즘이 힘을 키우며 사회민주당과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1934년 엥겔베르트 돌푸스의 독재 정권이 수립되고 파시스트 조직인 보국단의 도발에 맞서, 바우어 등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산하 민병 조직인 방위동맹( Republikanischer Schutzbunddeu )과 함께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시가전에서 패배했다. 이 사건(오스트리아 내전) 이후 사회민주당은 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활동이 금지되었다.

바우어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망명하여 국외 조직인 '혁명적 사회주의자'를 조직하고 저항 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망명 중에도 『Arbeiter Zeitung』( Arbeiter Zeitung|노동자 신문deu )과 『Der Kampf』( Der Kampf|투쟁deu )의 간행을 계속했다.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한 안슐루스(Anschluss)가 일어나자, 바우어는 이에 저항할 것을 주장하며 합병을 용인한 레너를 비판했다. 같은 해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사실상 해체되자 프랑스로 다시 망명지를 옮겼다. 프랑스에서 바우어는 나치의 위협 아래 놓인 30만 명의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을 구출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같은 해 파리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3. 사상과 이론

오토 바우어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사상은 객관적인 분석과 마르크스주의 이론, 그리고 당대의 시대적 특수성을 반영하는 복합적인 특징을 지닌다.

1907년, 그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발표한 방대한 저서 Nationalitätenfrage und Sozialdemokratie|민족 문제와 사회 민주주의deu를 통해 학계와 정치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4] 이 저작은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안고 있던 복잡한 민족 문제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적 해법을 모색하려는 시도였다. (자세한 내용은 #민족 문제와 문화적 자치 참조)

바우어 사상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문화적 이상주의와 독일 민족주의: 그의 민족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과 1919년 독일과의 통일 문제에 대한 태도에서 문화적 이상주의에 기반한 독일 민족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
  • 재정적 보수성: 특정 재정 원칙에 대한 고수는 대공황 시기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재정 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게 만들었다.
  • 마르크스주의적 '객관적 조건'과 관망주의: 정치적 행동의 가능성을 '객관적 조건'에 따라 판단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은, 때로는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이는 혁명적 언어 사용과 현실적 한계 인식 사이의 긴장을 보여준다.


바우어는 1930년대 후반, 세계가 두 세계 대전 사이에 놓여 있다는 통찰과 함께 합리화 및 잘못된 합리화 문제 등 다양한 정치적 분석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들이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 지침으로 이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는 전간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내 좌파를 이끌었으며, 빈 인터내셔널 및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과 같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자세한 내용은 #통합 사회주의 참조)

3. 1. 민족 문제와 문화적 자치

오토 바우어는 1907년, 그의 나이 26세에 발표한 저서 Nationalitätenfrage und Sozialdemokratie|민족 문제와 사회 민주주의deu를 통해 학계와 정치계의 주목을 받았다.[4] 이 저서에서 그는 민족을 '공통의 운명을 통해 형성된 공통의 성격을 가진 공동체'로 정의하였다. 당시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복잡한 민족 문제를 안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상황 속에서, 바우어는 민족 자결권을 옹호하는 동시에 다민족 국가 내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화적 자치'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문화적 자치는 특정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속지주의적 자치와 더불어, 개인이 속한 민족 정체성에 따라 자율적인 문화, 교육, 언어 정책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속인주의적 원칙을 결합한 제도이다. 이는 각 민족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보장함으로써, 민족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다양한 민족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다. 바우어의 이러한 이론은 이후 다문화주의나 소수자 권리 논의에도 영향을 미치며 현대 사회의 민족 및 문화 관련 쟁점을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3. 2. 통합 사회주의

국제적인 차원에서 바우어는 사회주의의 승리가 유물사관의 법칙에 부합한다는 생각을 유지하려 했다. 볼셰비키와 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자를 재결합하려는 중기적 목표를 가진 그의 통합 사회주의 사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재결합을 위해 사회주의 정당 국제 노동 연합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제2 인터내셔널(사회주의)과 제3 인터내셔널(공산주의)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제3 인터내셔널의 구성원들은 내부 민주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권장되었고, 제2 인터내셔널의 구성원들은 개량주의에서 벗어나도록 권장되었다. 제3 인터내셔널 소속의 폴란드 당료인 카를 라데크가 이 프로젝트를 "세계 혁명의 배설물"(decoctus historiae|데콕투스 히스토리아이la)이라고 비웃으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4. 평가와 영향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오토 바우어는 전간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DAPÖ, 당시 사회민주노동자당) 좌파와 빈 인터내셔널,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26년 린츠 강령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강령의 일부 내용은 보수 진영으로부터 "오스트로볼셰비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의 정치적 결정, 특히 기독교 사회당과의 연립 정부 구성 거부[13]나 1934년 2월 봉기 과정에서의 국외 망명 등은 당 안팎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론가로서 바우어는 마르크스주의의 '객관적 관계'와 '역사적 필연성'을 중시했으나, 때로는 현실 정치와 괴리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그의 정치적 판단력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국제적으로 바우어의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는 볼셰비즘과 개혁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 독자적인 제3의 길을 모색하며, 소련의 민주화를 통해 양 진영의 통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냉전이라는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으로 남게 되었다.

4. 1. 오스트리아에서의 평가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오토 바우어는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이론가이자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좌파의 지도자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의 정치적 노선과 결정은 당내외에서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1920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이 상대 다수당 지위를 잃자, 바우어는 기독교 사회당과의 연정 탈퇴를 주도했다. 이 결정으로 율리우스 도이치 육군 장관이 오스트리아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는 14년 후 군대가 사회 민주주의 탄압에 동원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연정 유지를 주장했던 카를 레너는 바우어의 완고함이 사회민주당의 연정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공화국을 "순수한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13] 사회민주당은 이 결정 이후 1945년까지 연방 정부에 참여하지 못했다.

1926년, 바우어의 주도로 린츠에서 채택된 새로운 당 강령은 마르크스주의와 계급 투쟁 이념을 강조하며, 점증하는 성직자 파시즘 성향의 기독교 사회당 및 Heimwehr와의 대립 구도를 명확히 했다.[14] 강령은 부르주아 계급과의 협력을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목표로 제시했다. 그러나 바우어의 혁명적 수사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역사적 필연성으로 규정하면서 구체적인 정책 요구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고, 반대 세력에게는 볼셰비즘의 위협으로 해석될 여지를 주었다. 바우어 자신은 과격 행동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볼셰비키의 성공 가능성에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15]

이러한 급진적 언어는 카를 자이츠 시장 하의 붉은 빈에서 보여준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실제 정치와는 괴리가 있었다. 후일 총리가 된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표현이 당에 부정적인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으며, 강령의 다른 내용과도 모순되는 "끔찍한 언어적 실수"였다고 언급했다.

엥겔베르트 돌푸스


바우어는 1931년과 1932년, 이그나츠 자이펠과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제안한 연립 정부 구성을 거부했는데, 이는 훗날 오스트리아 민주주의를 구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치명적인 실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크라이스키는 이를 "오스트리아 민주주의를 구할 마지막 기회였다"고 회고했다. 1933년 3월 의회 기능이 정지되는 소위 '의사규칙 위기' 상황에서도 바우어는 카를 레너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 사임을 조언했으며, 돌푸스 정부가 의회 해산을 선언하고 재소집을 막았음에도 당 규약에 명시된 총파업은 실행되지 않았다.

바우어는 역사 유물론적 관점에서 오스트리아의 경제 위기가 혁명을 위한 객관적 조건을 성숙시키고 있으며, 당은 이를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SDAP이 결국 선거에서 절대 다수를 확보할 것이며, "붉은 빈"의 성과를 기반으로 경제의 사회화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러한 신념은 당내 좌파를 통제하는 데 기여했지만, 1933년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에는 파시즘의 부상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1933년 10월 사회민주당 대회에서 발표된 "좌파 선언"은 바우어 지도부의 "기다림의 정책"과 적에게 주도권을 내주는 전술을 강하게 비판하며, "기어가는 파시즘"에 맞서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했다.[20]

테오도어 쾨르너 장군은 1934년 2월 내전 직전, 공화주의 보호 연맹의 상황을 검토한 후 정부군과의 충돌 시 필패할 것이라며 바우어에게 무력 충돌을 피하라고 간청하기도 했다.[16]

요제프 부팅거는 바우어가 마르크스가 싸워 이기라고 가르친 '현실'과 '객관적 관계'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현실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때로는 개혁주의나 혁명적 정치의 반대조차 '상황'에 부합한다면 사회주의 승리에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18] 빌헬름 엘렌보겐은 바우어를 뛰어난 이론가이자 웅변가로 평가하면서도, 정치적 상황을 본능적으로 판단하는 '정치적 코'가 부족했다고 평했다.[19]

1934년 이후 지하 활동과 망명 중에도 바우어의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45년 재창당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PÖ)은 바우어의 이념적 경쟁자였던 카를 레너를 중심으로 실용주의적 노선을 채택했다. 바우어의 마르크스주의는 당명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라는 문구가 잠시 포함되는 등 형식적으로 존중받았으나, 공산주의와의 연관성을 경계하는 당내 분위기와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국민당(ÖVP)의 견제 속에서 점차 영향력을 잃었다.

사회 철학자 노르베르트 레서는 바우어가 1945년 이후까지 생존했다면 과거 지도부의 오류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불가피했을 것이나, 그의 부재로 인해 그는 "명절에는 소환되지만 일상에서는 부인되는 죽은 아이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21] 브루노 크라이스키는 1975년 바우어의 저작 전집 출간을 후원하며 그를 기렸지만, 그의 사상이 더 이상 당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고 선을 그었다. 1986년 크라이스키는 바우어를 "몇 가지 잘못된 판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성을 가진" 훌륭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국제적으로 바우어의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는 볼셰비키와 개혁적 사회민주주의 사이에서 중도 노선을 모색하며 소련의 민주화를 통해 양자를 통합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가졌으나, 냉전 시대에는 실현 불가능한 희망으로 남았다.

4. 2. 한국에 미친 영향

(작성할 내용 없음 -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오토 바우어가 한국에 미친 영향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5. 주요 저작


  • ''민족 문제와 사회 민주주의'' (Die Nationalitätenfrage und die Sozialdemokratiede, 1907)
  • ''세계 혁명'' (The World Revolution영어, 1919)
  • ''사회주의로 가는 길'' (The Road to Socialism영어, 1919)
  • ''볼셰비즘인가 사회 민주주의인가?'' (Bolshevism or Social Democracy?영어, 1920)
  • ''소비에트 러시아의 새로운 노선'' (The New Course of Soviet Russia영어, 1921)
  • ''오스트리아 혁명'' (Die österreichische Revolutionde, 1923)
  • ''파시즘'' (Fascism영어, 1936)
  • ''민주주의의 위기'' (The Crisis of Democracy영어, 1936)
  • ''두 세계 대전 사이?'' (Zwischen zwei Weltkriegen?de, 1936)

참조

[1] 웹사이트 Familienblatt von Filipp (Philipp) Bauer/Katharina (Käthe) Gerber (F5251) https://www.hohenems[...] 2021-03-08
[2] 뉴스 Tirolisches https://digital.tess[...] Meraner Zeitung 1917-08-16
[3] 서적 Im Strom der Politik. Der Memoiren zweiter Teil Kremayr & Scheriau
[4] 웹사이트 Bauer, Otto https://austria-foru[...] 2023-02-01
[5] 서적 Der Kampf um die österreichische Identität Böhlau
[6] 웹사이트 Helene Bauer: Die Interessenharmonie, der "gemeine Mann" und ein besserer Herr (1923) https://www.klahrges[...] 2005
[7] 서적 Der große Illusionist. Otto Bauer (1881–1938) Böhlau
[8] 서적 Karl Seitz: Waisenknabe – Staatspräsident – Bürgermeister von Wien Franz Deuticke
[9] 서적 Vom Gestern ins Heute. Aus dem Kaiserreich in die Republik Herold-Verlag
[10] 뉴스 Amtlicher Teil https://anno.onb.ac.[...] Wiener Zeitung 1919-07-29
[11] 서적 Zwischen den Zeiten. Erinnerungen aus fünf Jahrzehnten Siedler
[12] 간행물 Gesetz vom 15. Mai 1919, betreffend die Errichtung von Betriebsräten https://alex.onb.ac.[...]
[13] 서적 Nachgelassene Werke Verlag der Wiener Volksbuchhandlung
[14] 웹사이트 Linzer Programm (1926) https://litkult1920e[...]
[15] 서적 Werkausgabe Europaverlag
[16] 서적 Theodor Körner. Militär und Politik Verlag für Geschichte und Politik
[17] 서적 Revolutionäre Kleinarbeit
[18] 서적 Am Beispiel Österreichs. Ein geschichtlicher Beitrag zur Krise der sozialistischen Bewegung Verlag für Politik und Wirtschaft
[19] 서적 Als Zaungäste der Politik. Österreichische Zeitgeschichte in Konfrontationen Jugend und Volk
[20] 웹사이트 Erklärung der Linken am sozialdemokratischen Parteitag 1933 (Auszug); Parteitagsrede von Otto Bauer am 14. 10. 1933 (Auszug) https://www.uibk.ac.[...]
[21] 서적 "...auf halben Wegen und zu halber Tat..." Politische Auswirkungen einer österreichischen Befindlichkeit Amalthea
[22] 웹사이트 Arisierung (und "Restitution") in Mariahilf https://www.bezirksm[...] 2018-06-10
[23] 웹사이트 Otto Bauer https://www.geschich[...]
[24] 간행물 Das große "Aha" 201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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