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니아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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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오니아 반란은 기원전 5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에 대항하여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도시들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은 미케네 문명 붕괴 이후 소아시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의 도시들이 페르시아의 참주 통치에 불만을 품고 시작되었다.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낙소스 원정 실패 후 반란을 주도했으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사르디스를 공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키프로스, 카리아 등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라데 해전에서의 패배로 이오니아는 페르시아에 굴복했다. 이오니아 반란은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페르시아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고, 이는 그리스 본토 침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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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니아 반란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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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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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이오니아 반란 |
일부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시기 | 기원전 499년 – 기원전 493년 |
장소 | 소아시아 (현재의 튀르키예) 및 키프로스 |
결과 | 페르시아의 승리 |
영향 | 페르시아, 소아시아와 키프로스의 그리스 지역에 대한 통제 재확립 |
교전 세력 | |
반군 | 이오니아 아이올리스 도리스 카리아 아테나이 에레트리아 키프로스 |
페르시아 제국 | 아케메네스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반군 | 아리스타고라스 에우알키데스 포카이아의 디오뉘시오스 히스티아이오스 오네실루스 아리스토키프로스 카로피노스 헤르모판테스 멜란티오스 |
페르시아 제국 | 메가바테스 아르타페르네스 다우리세스 휘아메에스 오타네스 다티스 아르티비우스 |
2. 배경
기원전 6세기 중반,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역에 위치한 그리스 도시들은 리디아 왕국에 이어 신흥 강대국인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었다.[115][116][15][16] 페르시아는 이 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각 도시에 그리스인 참주를 임명하여 다스리는 간접 통치 방식을 선택했다.[3][20] 그러나 이 참주들은 페르시아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동족인 그리스 시민들의 불만을 억눌러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이들의 통치는 이오니아인들의 반감을 샀다.[20]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반란의 직접적인 계기는 밀레토스의 참주 대행이었던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아 낙소스 섬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22][23][24] 원정 실패로 실각 위기에 처한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오니아 도시들을 선동하여 다리우스 1세에 대항하는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2. 1. 페르시아의 이오니아 지배
미케네 문명 붕괴 이후 그리스 암흑기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로 이주했으며, 그중 이오니아 인들은 리디아와 카리아 해안 지역에 정착하여 12개의 도시를 세웠다.[111][11] 이 도시들은 카리아의 밀레투스, 미우스, 프리에네, 리디아의 에페소스, 콜로폰, 레베도스, 테오스, 클라조메나이, 포카이아, 에리트라이 등이었으며, 사모스와 키오스 섬도 포함되었다.[112][12] 이 도시들은 독립적이었지만, 파니오니온이라는 공동의 사원과 회합 장소를 중심으로 '문화적 동맹'을 형성했다.[113][114][13][14] 기원전 560년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독립을 유지했으며,[115][15] 이후 리디아가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되면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116][16]
키루스 대왕은 리디아와 전쟁 중 이오니아인들에게 리디아에 반란을 일으키라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16] 리디아 정복 후, 이오니아 도시들은 크로이소스 시절과 같은 조건으로 페르시아의 신하가 되기를 원했으나, 키루스는 이전에 자신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16] 결국 이오니아인들은 저항을 준비했고, 키루스는 메디아 장군 하르파고스를 보내 이오니아를 정복하게 했다.[17] 하르파고스는 포카이아, 테오스 등 여러 도시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일부 주민들은 페르시아 지배를 피해 망명하기도 했다.[18][19]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그리스 도시에는 페르시아 통치에 협력할 만한 단일한 지배 엘리트 집단이 없었고, 귀족들은 분열되어 있었다.[20] 이에 페르시아는 각 도시에 참주를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3] 이는 이오니아인들의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고, 참주들은 시민들의 반감을 사지 않으면서 페르시아의 환심을 사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20] 이오니아인들은 페르시아가 임명한 참주 정치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는 반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지배가 반드시 가혹했던 것은 아니며, 일부 도시들은 오히려 번영을 누리기도 했지만, 참주를 통한 내정 간섭은 불만의 소지가 되었다.
기원전 500년경, 밀레토스의 참주 대리였던 아리스타고라스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21] 그의 삼촌이자 전임 참주였던 히스티아이오스는 다리우스 대왕의 원정에 참여한 공으로 트라키아 영토 일부를 받았으나, 그의 야심을 경계한 다리우스에 의해 사실상 수사에 억류된 상태였다.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섬에서 추방된 망명자들로부터 섬을 장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22]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리디아의 태수인 아르타페르네스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며, 낙소스 정복 후 전리품을 나누겠다고 제안했다.[23] 아르타페르네스는 다리우스 대왕의 승인을 얻어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원전 499년 낙소스 공격을 위한 원정대가 조직되었다.[24] 그러나 이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자신의 실각을 두려워한 아리스타고라스는 책임을 회피하고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이오니아 전체의 봉기를 선동하게 되었다.
2. 2.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상황
미케네 그리스 문명이 청동기 시대 종말과 함께 몰락한 후, 많은 그리스인들이 소아시아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들은 주로 아이올리아인, 도리아인, 이오니아인 부족 출신이었다.[11] 특히 이오니아인들은 리디아와 카리아 해안 지역에 자리 잡아 이오니아를 이루는 12개의 도시를 세웠다.[11] 이 도시들은 카리아의 밀레투스, 미우스, 프리에네, 리디아의 에페소스, 콜로폰, 레베도스, 테오스, 클라조메네, 포카이아, 에리트라이였으며, 사모스와 키오스 섬도 포함되었다.[12] 이 도시들은 이오니아 동맹을 형성하여 정치적으로는 독립적이었지만, 파니오니온이라는 공동의 사원과 회합 장소를 중심으로 문화적 유대감을 공유했다.[13][14]이오니아 도시들은 기원전 560년경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독립을 유지했다.[15] 이후 리디아가 신생 아케메네스 제국의 키루스 대왕에게 정복되면서 이오니아 도시들 역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16] 키루스는 리디아와의 전쟁 중 이오니아인들에게 반란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 리디아 정복 후 이오니아 도시들이 크로이소스 치하와 동일한 조건으로 복속하려 하자 이를 거부했다.[16] 결국 키루스는 메디아 출신 장군 하르파고스를 보내 이오니아를 정복하게 했다.[17] 하르파고스의 공격에 포카이아 주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시칠리아로 망명했으며, 테오스 주민 일부도 이주를 택했다. 나머지 이오니아 도시들은 저항 끝에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18][19]
페르시아는 이오니아를 통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제국 지역과 달리 그리스 도시에는 페르시아의 통치를 도울 만한 통합된 지배 계층이 없었고, 귀족들은 분열된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20] 이에 페르시아는 각 도시에 참주를 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이는 도시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참주들 역시 독립적인 성향을 보여 교체해야 할 수도 있었다.[3] 참주들은 페르시아의 비위를 맞추면서 동시에 동료 시민들의 반감을 사지 않아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20]
페르시아의 이오니아 정복 약 40년 후, 다리우스 대왕 통치 시기에 밀레투스의 참주 대행이었던 아리스타고라스가 이러한 곤경에 처했다.[21] 그의 삼촌이자 전임 참주였던 히스티아에우스는 기원전 513년 다리우스의 트라키아 원정에 동행한 후 그 공으로 트라키아 영토 일부를 하사받았으나, 그의 야심을 경계한 다리우스의 측근들 때문에 사실상 수사에 억류되어 있었다. 히스티아에우스를 대신해 밀레투스를 다스리던 아리스타고라스는 기원전 500년, 낙소스 섬에서 추방된 망명자들로부터 섬을 점령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22] 아리스타고라스는 이를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확장할 기회로 보고, 리디아의 사트라프(총독)인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접근했다. 그는 아르타페르네스가 군대를 지원해주면 낙소스를 정복하고 전리품을 나누어 군대 비용을 충당하겠다고 제안했다.[23]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에 동의하고 다리우스에게 허가를 요청했으며, 다리우스가 이를 승인하면서 다음 해 낙소스 공격을 위한 200척의 삼단 노선이 준비되었다.[24]
3. 반란
기원전 499년 낙소스 정복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원정을 주도했던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는 정치적, 재정적으로 큰 위기에 처했다.[26] 그는 페르시아 제국 리디아의 사트라프였던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원정 비용을 갚을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의 지위마저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여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이오니아인들의 반란을 선동하기로 결심했다.[27]
기원전 499년 가을, 아리스타고라스는 밀레토스에서 회의를 열어 반란을 공식 제안했고, 역사가 헤카타이오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동의했다.[28] 그는 스스로 참주 자리에서 물러나 밀레토스에 민주주의를 선포하며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29][30] 또한, 낙소스 원정에 동원되었던 군대에 포함된 다른 이오니아 도시 출신 병사들을 설득하고, 각 도시에 파견된 페르시아 임명 참주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여 반란 동참을 유도했다.[30][31][32] 헤로도토스는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을 아리스타고라스와 히스티아에우스의 개인적인 동기에서 찾지만,[27] 당시 이오니아 지역에는 페르시아가 세운 참주들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아 반란의 기운이 이미 무르익은 상태였다.[2]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은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지폈고, 반란은 이오니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각 도시에서 참주정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29]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외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아리스타고라스는 먼저 군사 강국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클레오메네스 1세 왕은 이를 거절했다.[33] 이후 그는 아테네로 향했다. 당시 아테네는 참주 히피아스를 축출하고 민주정을 수립한 상태였으며, 페르시아가 히피아스의 복위를 도우려 하자 페르시아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35][33] 아테네는 이오니아 도시들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모델로 삼았다는 점, 역사적 유대감,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적대 관계를 고려하여 삼단노선 20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33] 또한 상업적 이해관계와 과거 밀레토스와의 관계를 고려한 에레트리아도 5척의 함선을 지원했다.[33][36] 헤로도토스는 이들 함대의 도착을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본격적인 갈등의 시작으로 보았다.[31]
기원전 498년 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함대는 이오니아군과 합류하여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를 기습 공격했다. 그리스 연합군은 도시의 하부를 점령하고 불을 질렀으나, 아르타페르네스가 지키는 아크로폴리스는 함락시키지 못했다.[111][120] 그리스군은 결국 사르디스에서 퇴각했고, 추격해 온 페르시아군에게 에페소스 근처에서 패배했다.[111] 이 패배 이후 아테네는 더 이상의 지원을 중단하고 철수했다.[45] 사르디스 화재 소식을 들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아테네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고 전해진다.[121]
아테네의 지원 중단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헬레스폰트, 프로폰티스, 카리아, 키프로스 등 다른 지역으로 계속 확산되었다.[45][46] 특히 키프로스에서는 대부분의 왕국이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페르시아에 저항했으나, 결국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50][51][52] 카리아 지역에서도 격렬한 저항이 이어졌다.[3]
3. 1. 낙소스 침공 (기원전 499년)
기원전 499년 봄, 밀레토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의 요청에 따라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 1세의 사촌인 메가바테스가 지휘하는 삼단노선 200척 규모의 함대를 낙소스 섬 점령을 위해 파견했다.[25] 페르시아는 리디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가 군대를 준비시켰고, 아리스타고라스가 징집한 이오니아 군대도 함대에 합류했다.[25] 함대는 처음에 헬레스폰토스로 향하는 척하며 낙소스를 속이려 했으나, 낙소스로 가는 도중 아리스타고라스와 메가바테스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다툼 끝에 메가바테스가 몰래 낙소스인들에게 페르시아 함대의 공격 계획을 알리는 전령을 보냈다고 한다.[25] 이 이야기가 후에 원정 실패의 책임을 돌리기 위해 아리스타고라스가 퍼뜨린 것일 가능성도 제기되지만,[3] 어쨌든 낙소스는 페르시아의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26]낙소스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형 또한 험준하여 방어에 유리했다. 낙소스인들은 그리스 본토에서 오는 상선들을 통해 보급품을 받으며 4개월 동안 성공적으로 농성했다.[26] 결국 페르시아군은 군자금이 바닥나 포위를 풀고 아무런 성과 없이 본토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26]
밀레토스는 이번 원정에 막대한 비용을 부담했으나, 원정 실패로 인해 자금 회수가 불가능해졌다. 자신의 지위에 불안을 느낀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국가에 있던 참주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고 민주정을 수립하여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동시에 외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아리스타고라스는 아테네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 아이기나, 보이오티아, 테베 등 주변 폴리스들과 적대 관계에 놓여 있었다. 아테네의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는 페르시아와의 동맹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아테네 민회는 페르시아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가 과거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던 참주 히피아스를 다시 복위시키려 하자, 이에 반발한 아테네 민회는 아리스타고라스의 요청을 받아들여 밀레토스 지원을 결정했다. 낙소스 침공의 실패는 결과적으로 아리스타고라스가 이오니아 반란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3. 2. 반란의 시작과 확산
낙소스 공방전의 실패는 아리스타고라스를 정치적,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는 리디아의 사트라프였던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약속했던 원정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고, 페르시아 왕실과의 관계도 틀어지면서 자신의 지위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26] 절박한 상황에 처한 아리스타고라스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밀레투스 시민들을 선동하여 페르시아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이오니아 반란의 시작이었다.[27]
기원전 499년 가을, 아리스타고라스는 밀레투스에서 지지자들과 회의를 열고 반란을 주장했다. 역사가 헤카타이오스만이 반대했지만, 다른 모든 이들은 동의했다.[28] 마침 수사에 억류되어 있던 전 밀레토스 참주 히스티아에우스로부터 페르시아에 대항하라는 비밀 메시지가 도착하면서 반란 계획은 더욱 힘을 얻었다. 헤로도토스는 히스티아에우스가 반란이 일어나면 자신이 이오니아로 돌아갈 기회가 생길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7] 아리스타고라스는 공개적으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을 선언하고, 스스로 참주 자리에서 물러나 밀레투스에 민주주의를 선포했다.[29] 이는 표면적으로 권력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밀레토스 시민들의 적극적인 반란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행보였다.[30]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원정에 참여했던 군대가 여전히 무이우스에 주둔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했다. 이 군대에는 미틸레네, 밀라사, 테르메라, 키메 등 소아시아의 다른 그리스 도시들(아이올리아와 도리스 포함) 출신 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30] 그는 군대에 있던 각 도시의 참주들을 체포하여 해당 도시에 넘겨주는 방식으로 이들의 협력을 확보했다.[30] 대부분의 참주들은 유혈 사태 없이 추방되었지만, 미틸레네의 참주는 돌에 맞아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31][32] 일부에서는 아리스타고라스가 군대 전체를 반란에 가담시키고 페르시아가 제공한 함선까지 장악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29]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페르시아가 초기에 해상 공격을 신속하게 개시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즉, 새로운 함대를 건조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39]
헤로도토스는 반란의 직접적인 원인을 아리스타고라스와 히스티아에우스의 개인적인 동기에서 찾지만, 이오니아 지역 사회 전반에는 이미 반란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다. 가장 큰 불만은 페르시아 제국이 임명한 참주들의 통치 방식이었다.[2] 과거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서도 참주 정치가 존재했지만, 점차 사라져가는 추세였다. 더욱이 페르시아가 세운 참주들은 과거의 유능한 지도자들과 달리 단순히 페르시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리인에 불과했다. 이들은 페르시아의 군사력을 등에 업고 민중의 지지 없이 독재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2] 따라서 아리스타고라스의 행동은 이미 준비된 불씨에 불을 붙인 격이었고, 반란은 이오니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각 도시에서는 참주정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다.[29]
헬레네계 소아시아 전체를 반란으로 이끈 아리스타고라스는 강력한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기 위해 그리스 본토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32][33] 기원전 499년 겨울, 그는 먼저 군사 강국인 스파르타로 가서 클레오메네스 1세 왕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클레오메네스 1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거절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다음으로 아테네로 향했다.[33]
아테네는 최근 독재자 히피아스를 축출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한 상태였다.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아테네는 페르시아에 도움을 요청하며 복종을 약속한 적이 있었으나, 실제 도움은 받지 않았다.[34] 몇 년 후, 히피아스가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의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그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망명하여 아테네 정복을 부추겼다.[35] 아테네는 사절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지만, 아르타페르네스는 오히려 히피아스를 다시 참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33] 아테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시아와 공개적인 적대 관계에 들어섰다.[35] 따라서 아테네는 이미 페르시아의 적이었기에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할 명분이 있었다.[33] 또한, 이오니아의 민주주의 운동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그리고 이오니아 도시들이 역사적으로 아테네의 식민지였다는 인식도 아테네의 지원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33]
아리스타고라스는 에레트리아로부터도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에레트리아는 상업 도시로서 에게 해에서 페르시아의 영향력 확대가 자신들의 무역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33] 헤로도토스는 에레트리아가 과거 렐란틴 전쟁 당시 밀레투스로부터 받았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지원을 결정했다고 기록했다.[36] 아테네는 삼단노선 20척을, 에레트리아는 5척을 파견했다. 헤로도토스는 이 함대의 도착을 그리스인과 비(非)그리스인(바르바로이) 사이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계기로 평가했다.[31]
겨울 동안 아리스타고라스는 반란을 계속 선동했다. 그는 다리우스에 의해 프리기아로 이주된 파이오니아인(원래 트라키아 출신)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부추겼는데, 헤로도토스는 이를 페르시아 최고 사령부를 교란시키려는 의도였다고 설명한다.[37] 반란은 헬레스폰트와 프로폰티스 지역으로 확산되어 비잔티움과 주변 도시들이 반란군에 점령되었다.[45] 또한 카리아인들도 설득되어 반란에 합류했다.[45] 더 나아가, 반란의 확산을 지켜본 키프로스의 왕국들도 외부의 설득 없이 자발적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봉기했다.[46]
3. 3. 사르디스 침공 (기원전 498년)
기원전 498년 봄,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하기 위해 아테나이에서 파견된 삼단노선 20척과 에레트리아에서 보낸 5척이 이오니아에 도착했다.[117] 이들은 에베소 근처에서 이오니아 주력군과 합류했다.[118] 반란의 주도자 아리스타고라스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대신, 자신의 형제인 카로피노스와 또 다른 밀레토스 출신 헤르모판토스를 장군으로 임명했다.[119]
연합군은 에베소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 산맥을 넘어 페르시아 제국 리디아 사트라프의 수도인 사르디스로 기습적으로 진격했다.[111]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고, 연합군은 비교적 쉽게 사르디스의 하부 도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리디아 총독 아르타페르네스는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도시 중심부의 아크로폴리스(성채)에서 방어 태세를 유지했다.[111]

점령된 하부 도시에서는 큰 화재가 발생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화재가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기록했으며, 불길은 빠르게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다.[120] 아크로폴리스에서 농성하던 아르타페르네스와 페르시아 병력은 불타는 도시에 포위되자, 사르디스 시장으로 나와 그리스 연합군과 격렬하게 싸웠다. 예상치 못한 페르시아군의 반격과 도시를 삼킨 화재로 인해 그리스 연합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결국 사르디스 점령을 포기하고 에베소를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120]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제는 사르디스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그는 아테네인들이 누구인지 물어본 후, 그들에게 반드시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그리고 자신의 맹세를 잊지 않기 위해 시종에게 매일 식사 때마다 세 번씩 "주인님, 아테네인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외치게 했다고 전해진다.[45] 아테네인들은 사르디스 원정 이후 페르시아의 강력함을 깨닫고 이오니아인들과의 동맹을 끝냈다.[45]
3. 4. 에페소스 전투 (기원전 498년)
기원전 498년 봄, 아테네에서 보낸 삼단노선 20척과 에레트리아에서 보낸 5척의 함대가 이오니아로 항해하여 에페소스 근처에서 이오니아 주력군과 합류했다.[117][118] 아리스타고라스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지 않고, 그의 형제 카로피노스와 밀레토스 출신의 헤르모판토스를 장군으로 임명했다.[119]이 연합군은 에페소스인들의 안내를 받아 산맥을 넘어 리디아 사트라피의 수도인 사르디스로 진격했다.[111]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이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하여 도시의 아랫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트라프인 아르타페르네스는 여전히 상당한 병력과 함께 도시 중심부의 아크로폴리스를 지키고 있었다.[111] 이때 도시 아랫부분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헤로도토스는 이것이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기록했다. 불길은 빠르게 번져나갔다.[120] 아크로폴리스에 있던 페르시아인들은 불타는 도시에 포위되자 사르디스 시장으로 나와 그리스군과 교전했다.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의 반격에 사기가 꺾여 도시에서 물러나 에페소스로 퇴각하기 시작했다.[120]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 대제는 사르디스가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아테네인들이 누구인지 물어본 뒤, 그들에게 복수할 것을 맹세하며 신하에게 매일 식사 때마다 세 번씩 "주인님, 아테네인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하게 했다고 한다.[121]
소아시아에 있던 페르시아 군대는 사르디스 공격 소식을 듣고 집결하여 아르타페르네스에게 합류했다.[121] 이들이 사르디스에 도착했을 때 그리스군은 이미 퇴각한 뒤였으므로, 페르시아군은 즉시 에페소스 방향으로 추격을 시작했다.[111] 에페소스 외곽에서 그리스군을 따라잡은 페르시아군은 이들을 공격했고, 그리스군은 어쩔 수 없이 맞서 싸워야 했다.[111] 역사가 톰 홀랜드는 페르시아 군이 주로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어 행군 속도가 느린 그리스 보병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111] 당시 페르시아 기병은 주로 투창 기병이었으며, 이들은 정지해 있는 적에게 접근하여 투창을 던져 제압하는 전술을 사용했다.[122]

이미 사기가 꺾이고 지친 상태였던 그리스군은 강력한 페르시아 기병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에페소스 전투에서 완패했다.[111] 이 전투에서 많은 그리스군이 전사했으며, 그중에는 에레트리아의 장군 에우알키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111]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오니아인들은 각자의 도시로 흩어져 돌아갔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지원군은 간신히 배를 타고 그리스 본토로 철수했다.[111][45] 아테네인들은 이 패배 이후 이오니아 반란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45]
3. 5. 반란의 확대
아리스토라고라스가 밀레투스에서 반란을 선포하고 민주주의를 선언하자[29], 반란은 이오니아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여러 도시에서 페르시아가 세운 참주들이 축출되고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다.[29] 이오니아를 넘어 다른 지역의 그리스 도시들도 반란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특히 키프로스에서는 아마투스를 제외한 모든 왕국이 페르시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46] 반란은 살라미스의 왕 고르구스의 동생인 오네실루스가 주도했는데, 그는 반란을 원치 않던 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46] 오네실루스는 다른 키프로스 도시들을 설득하여 반란에 동참하게 했고, 유일하게 저항하는 아마투스를 포위했다.[46] 페르시아의 개입이 예상되자 오네실루스는 이오니아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했고, 이오니아 도시들은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파견했다.[50]
기원전 497년, 아르티비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육군과 페니키아 함대가 키프로스에 도착했다.[50][51] 이오니아 함대는 해전에서 페니키아 함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51] 그러나 살라미스 인근에서 벌어진 육상 전투에서는 키프로스 군대가 초반에 페르시아 지휘관 아르티비우스를 죽이며 선전했지만, 일부 부대가 페르시아 측으로 돌아서면서 전세가 뒤집혔다.[52] 결국 키프로스-이오니아 연합군은 패배했고, 오네실루스와 솔리의 왕 아리스토키프로스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들이 전사했다. 이 전투로 키프로스의 반란은 사실상 진압되었고, 이오니아 함대는 본국으로 철수했다.[52] 이후 키프로스의 여러 도시들은 페르시아군에 포위되어 함락되었다.
한편 소아시아 본토에서는 페르시아가 반격을 준비했다. 기원전 497년, 다리우스 1세의 사위들인 다우리세스, 히마에스, 오타네스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49] 다우리세스는 헬레스폰트 지역으로 진군하여 다르다누스, 아비도스, 페르코테, 람프사쿠스, 파에수스 등 여러 도시를 빠르게 함락시켰다. 그러나 카리아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남쪽으로 돌렸다.[3] 히마에스는 프로폰티스 해안의 키우스를 점령한 뒤 헬레스폰트 지역의 아이올리아 도시들과 트로아스 일부를 점령했으나, 이후 병으로 사망하여 작전이 중단되었다.[53] 오타네스는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이오니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54]
카리아에서는 기원전 497년 페르시아 토벌 부대와 반란군 사이에 마이안드로스 강의 지류인 마르시아스 강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격전 끝에 카리아 군대는 패배하여 라브라운다의 제우스 스트라티오스 신역으로 후퇴했다.[3] 그러나 그곳에서 이오니아로부터 온 지원군과 합류한 카리아 군대는 전열을 정비하여 페다소스의 가도로 진군, 야간에 페르시아군을 급습하여 전멸시키는 데 성공하며 저항을 이어나갔다.[3]
4. 페르시아의 반격
기원전 497년, 페르시아군은 소아시아에서 군대를 재편성한 것으로 보인다. 다리우스의 사위인 다우리세스, 히마에스, 그리고 오타네스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49]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세 장군은 반란이 일어난 지역을 나누어 각자 맡은 구역을 공격했다고 한다.[47] 다우리세스는 초기에 헬레스폰트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으나, 이후 카리아의 반란 진압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했다.[49][3]
히마에스는 프로폰티스 지역으로 가서 키우스를 점령하고, 이후 헬레스폰트 지역에서 여러 아이올리아 도시들과 트로아스 일부를 점령했으나 병으로 사망했다.[53] 한편, 오타네스는 아르타페르네스와 함께 이오니아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54]
4. 1. 키프로스 전투 (기원전 497년)
키프로스 섬 역시 이오니아 반란에 동참하여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그러나 섬의 모든 도시가 참여한 것은 아니어서, 아마투스는 유일하게 반란 참여를 거부했다. 이에 반란군은 아마투스를 포위 공격했다.아마투스 포위 중 페르시아 함대가 지원을 오자, 키프로스군은 이오니아에서 온 원군과 합류하여 키프로스 북부 살라미스 근교에 진을 치고 페르시아군을 맞이했다. 살라미스의 왕이었던 오네실로스가 이끄는 키프로스 반란군은 해전에서 페르시아의 동맹인 페니키아 함대를 격파했다. 육전에서도 페르시아 지휘관 아르튀비오스를 전사시키는 등 초반에는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하지만 전투 중 일부 키프로스 부대가 페르시아 측으로 돌아서면서 전세는 급격히 역전되었다. 결국 키프로스와 이오니아 연합군은 패배하여 흩어졌고, 오네실로스 역시 전사했다. 이후 페르시아군은 키프로스의 여러 도시들을 차례로 포위하여 함락시켰고, 이로써 키프로스의 반란은 진압되었다.
4. 2. 카리아 전투 (기원전 496년)

기원전 497년, 다리우스 1세의 사위인 다우리세스, 히마에스, 오타네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군대는 이오니아 반란 진압을 위해 재편성되었다.[49] 다우리세스는 가장 큰 군대를 이끌고 처음에는 헬레스폰트로 향하여 다르다누스, 아비도스, 페르코테, 람프사쿠스, 파에수스 등의 도시들을 빠르게 점령했다. 그러나 카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다우리세스는 군대를 남쪽으로 돌려 카리아를 진압하려 했다.[3] 이는 카리아 반란이 기원전 497년 초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49]
카리아인들은 마이안드로스강의 지류인 마르시아스강(현재의 시네강) 근처의 "하얀 기둥"이라 불리는 곳에 집결했다.[55] 킬리키아 왕의 친척인 픽소다루스는 카리아 군에게 강을 등지고 싸워 후퇴를 막고 용맹하게 싸울 것을 제안했으나, 카리아인들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페르시아 군이 강을 건너오도록 유도하여 싸우기로 결정했다.[55]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어진 마르시아스 강 전투는 매우 치열했으며 카리아인들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군에게 패배했고, 이 전투에서 카리아인 10,000명과 페르시아인 2,000명이 사망했다고 전한다.[56]
마르시아스 강 전투에서 살아남은 카리아인들은 제우스 신의 신성한 숲이 있는 라브라운다로 후퇴하여 페르시아에 항복할지, 아니면 소아시아를 떠나 피신할지를 논의했다.[56] 논의 도중 밀레토스 군대가 지원군으로 도착하자, 카리아인들은 다시 힘을 얻어 싸움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페르시아 군은 라브라운다의 카리아-밀레토스 연합군을 공격했고, 이 전투에서 카리아 군은 다시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밀레토스 군의 사상자가 매우 컸다.[57]
4. 3. 라데 해전 (기원전 494년)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군대와 해군은 다시 집결하여 반란의 진원지인 밀레토스를 향해 직접 진격하였다. 이에 반란군은 이오니아에서 회의를 열어 육상 방어를 포기하고, 함대만을 편성하여 밀레토스 앞바다의 라데 섬 해역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페르시아 해군은 페니키아 함대를 중심으로 키프로스, 이집트 등에서 동원한 함선들로 구성되어 라데 섬 앞바다로 진입했다. 이오니아 연합 함대는 포카이아 출신 디오니시오스의 지휘 아래 페르시아 함대와 대치했다. 디오니시오스는 삼단노선을 이용한 돌파 전술 훈련을 실시하려 했으나, 훈련이 너무 엄격하다는 불만이 나와 밀레토스 함대를 중심으로 일부가 훈련을 거부했다.
이러한 내부 분열 상황을 지켜본 사모스 함대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동맹을 저버리고 전선을 이탈했다. 레스보스 섬의 함대 역시 사모스 함대를 따라 이탈했다. 키오스 섬의 함대만이 남아 페르시아 함대와 용감하게 싸웠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퇴했다. 이로써 이오니아 연합 함대의 주력은 페르시아 함대에 의해 궤멸되었다.
라데 해전에서의 대패로 이오니아 반란군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해상 방어선이 무너지자 밀레토스는 페르시아군에게 포위되어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노예 신세가 되었다. 이 패배는 반란의 종결을 알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이후 카리아 등 다른 지역들도 페르시아에 항복하게 되었다. 전투에서 이탈했던 사모스 섬을 제외한 이오니아와 도서의 여러 도시들은 페르시아군에게 철저히 약탈당했다.
4. 4. 밀레투스 함락 (기원전 493년)
기원전 494년, 페르시아 군대와 해군은 반란의 중심지였던 밀레토스를 향해 진격했다. 이오니아 함대는 바다에서 밀레토스를 방어하려 했으나, 사모스 함대의 이탈로 인해 라데 해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해상 방어선이 무너지자 밀레토스는 페르시아군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함락되었다. 페르시아는 밀레토스 주민 대부분을 노예로 삼았다.[84] 이 패배와 밀레토스의 함락은 이오니아 반란이 사실상 끝났음을 의미했으며, 카리아 역시 페르시아에 항복했다.기원전 493년, 페르시아는 아직 저항하던 서쪽 해안의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반란의 남은 불씨를 껐다. 페르시아 함대와 육군은 밀레토스에서 겨울을 보낸 후, 키오스, 레스보스, 테네도스 섬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각 섬에서는 병사들이 팔을 잡고 늘어서 섬 전체를 훑으며 숨어있는 반란군을 색출하는 '인간 그물' 작전을 펼쳤다.[83] 이후 본토로 이동하여 남은 이오니아 도시들을 점령하고 같은 방식으로 반란군을 소탕했다.[83]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는 점령한 도시들에서 가장 잘생긴 소년들을 골라 거세시키고, 가장 아름다운 소녀들을 왕의 하렘으로 보냈으며, 도시의 신전들을 불태웠다고 기록했다.[84] 이는 사르디스의 키벨레 신전을 불태운 것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특히 밀레토스의 파괴는 그리스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헤로도토스는 밀레토스의 주요 성역이 파괴되고 남자들은 학살당했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수사로 끌려가 밀레토스에서 밀레토스인이 사라졌다고 전했다.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의 파괴 규모를 다소 과장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2] 실제로 몇 년 후 이오니아 도시들은 상당 부분 회복하여 제2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당시 페르시아를 위해 대규모 함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2][85]
페르시아 육군은 마르마라 해(프로폰티스) 남쪽 해안의 도시들을 재정복했고, 함대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이로써 소아시아 전역이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오니아 반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86]
5. 반란의 진압과 영향
이오니아 반란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첫 번째 주요 충돌이었으며,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으로 여겨진다. 페르시아는 반란을 진압하고 소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보했지만, 이 과정에서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는 반란을 지원했던 아테나이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응징을 결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수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제국의 안정에 지속적인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리스 전체를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결정은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원정군 파견과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
반란이 진압된 후, 리디아의 사트라프였던 아르타페르네스는 이오니아 도시 대표들을 사르디스로 소집했다. 그는 도시들 간의 분쟁을 사법적 절차를 통해 해결하도록 강제하는 상호 협정을 맺게 했으며, 세금 징수 체제도 재검토했다. 다만, 세금 부담 자체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페르시아가 기존의 참주를 내세워 각 도시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던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점이다. 이는 경제 발전에 따라 새롭게 부상한 사회 계층을 참주제로 억누르는 것이 오히려 불안정을 야기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페르시아 측이 인식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 결과, 반란 이후 이오니아 도시들에서는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에서도 민주제가 실시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나타났다.
한편, 아테나이에서는 이오니아 반란군이 에페소스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자 한때 페르시아와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는 유화파의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에 가담했던 에게해 섬들의 폴리스들이 페르시아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고, 그리스 본토마저 페르시아의 직접적인 위협에 놓이게 되자 아테네 민회는 결국 유화 정책을 포기하고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여기에는 페르시아의 탄압을 피해 아테네로 망명한 이오니아인들의 호소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경험은 그리스 전역에 페르시아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심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이오니아의 저항 세력을 성공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그리스 본토 침공을 가로막던 주요 장애물을 없앤 셈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492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반란에 가담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마르도니우스가 지휘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하며 본격적인 그리스 침공을 시작했다.
6. 이오니아 반란의 의의와 현대적 해석
이오니아 반란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서진 정책과 고대 그리스 세계의 자유 수호 의지가 처음으로 정면 충돌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단순히 지역적인 봉기를 넘어, 이후 수십 년간 지속될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반란의 발발 원인과 전개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한 이해는 주로 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기반하지만, 그의 서술 방식과 내용에 대해서는 현대에 와서 다양한 해석과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2][99] 헤로도토스는 아리스타고라스와 같은 주요 인물들의 개인적인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99], 현대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압제에 대한 이오니아 도시들의 구조적인 저항, 즉 자유와 자치를 향한 열망이라는 더 넓은 시각에서 반란의 동기를 찾으려 한다.
또한, 헤로도토스가 기록하지 않았거나 알지 못했을 수 있는 정치적 이면, 예를 들어 밀레투스 내부의 권력 다툼[99][100]이나 페르시아 제국 전체의 전략적 구상에 미친 영향 등 다양한 측면에서 반란의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다각적인 접근은 이오니아 반란을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고대 지중해 세계의 역동적인 변화 과정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6. 1. 역사적 의의
이오니아 반란은 고대 그리스 역사, 특히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히 한 지역의 봉기를 넘어, 이후 벌어질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반란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현대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압제에 맞서 자유와 자치를 지키려는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의 열망을 주요 동기로 해석한다.[99] 이는 거대 제국과 도시 국가 간의 충돌이라는 큰 틀에서 반란을 이해하는 관점이다. 반면, 반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를 남긴 헤로도토스는 아리스타고라스나 히스티아에우스와 같은 주요 인물들의 개인적인 야망, 탐욕, 두려움 등을 반란의 직접적인 계기로 묘사한다.[99] 헤로도토스는 개인적 동기 부여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이를 통해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 내부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페르시아 지배 하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보여준다.[3][20] 일부 학자(P. B. Manville)는 헤로도토스가 기록하지 않은, 아리스타고라스와 히스티아에우스 사이의 권력 다툼과 같은 숨겨진 정치적 맥락이 반란의 중요한 배경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99][100]

비록 반란은 라데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패배와 밀레투스의 처참한 파괴로 끝났지만,[71][74] 그 영향은 컸다. 밀레투스의 함락과 주민들에 대한 페르시아의 잔혹한 처사[74][75][77]는 그리스 본토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페르시아의 위협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오니아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자유를 향한 그리스인들의 열망과 거대 제국의 지배에 대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그리스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6. 2. 현대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서쪽으로 팽창하던 페르시아와 고대 그리스 문명이 충돌한 이 시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의 설명은 때때로 정보가 부족하거나 불확실하며, 특히 이오니아 반란이 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99]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반란의 이유는 페르시아가 그리스 도시와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확장하려 했고, 이에 맞서 헬레네스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던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경제적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폴리스를 지키고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려는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반란의 동기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이러한 거시적인 원인보다는 아리스타고라스나 히스티아에우스와 같은 주요 인물들의 개인적인 동기(탐욕, 야망, 두려움 등)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서술하는 경향을 보인다.[99] 역사가 P. B. 맨빌(P. B. Manville)은 헤로도토스가 개인적인 동기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헤로도토스가 알지 못했던 숨겨진 정치적 맥락이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맨빌은 헤로도토스가 기록하지 않은 부분을 추론하여, 아리스타고라스와 히스티아에우스 사이에 밀레투스의 지배권을 둘러싼 숨겨진 권력 다툼이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타고라스가 낙소스 섬 원정 실패 후 반란을 일으킨 것은 히스티아에우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99][100] 이러한 해석은 헤로도토스의 기록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작가 고어 비달은 그의 역사 소설 ''창조''에서 페르시아인의 시각으로 이오니아 반란을 묘사하며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비달은 다리우스 대왕이 본래 부유한 인도를 정복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오니아 반란으로 인해 제국의 서쪽 변방에 군사력을 집중해야 했고, 결국 인도 원정 계획이 무산되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반란이 그리스 세계를 넘어 페르시아 제국 전체의 전략에 예상치 못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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