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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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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철승은 1922년 경성부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해방 후에는 반탁 운동과 학생 운동을 주도했다. 195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민주당, 신민당 소속으로 5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1970년대에는 중도 통합론을 주장하며 유신 독재에 반대했고, 1980년대에는 미군 철수 반대 운동을 펼쳤다. 1988년 정계 은퇴 후에는 우익 및 반공 운동에 헌신했으며, 2016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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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승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인 정보
이름이철승
출생일1922년 5월 15일
출생지서울, 한국
사망일2016년 2월 27일 (93세)
사망지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묘지국립서울현충원
국적대한민국
배우자김창희
자녀이양희(딸)
로마자 표기I Chul-seung
한자 표기李哲承
소석 (素石)
본관전의
학력
대학교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전공정치학 석사
정치 경력
소속 정당1954 무소속
1958 민주당
1971 신민당
1973 신민당
1976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1978 신민당
1985 신민당
직업학생운동가, 정치가, 보수주의 운동가, 저술가
의원 대수3, 4, 5, 8, 9, 10, 12대
의원 선수7선
경력대한민국 헌정회 명예회장
주요 활동신탁 통치 반대 운동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
국회 활동
선거구 (1954)전주, 무소속
선거구 (1958–1961)전주, 민주당
선거구 (1971)전주, 신민당
선거구 (1973)전주, 신민당
선거구 (1978)전주, 완주, 신민당
선거구 (1985)전주, 신민당
임기 (1954)제3대 국회의원
임기 (1958–1961)제4, 5대 국회의원
임기 (1971)제8대 국회의원
임기 (1973)제9대 국회의원 및 국회부의장
임기 (1978)제10대 국회의원
임기 (1985)제12대 국회의원
수상
훈장국민훈장 무궁화장
종교
종교유교(성리학) → 불교
기타 정보
관련 인물이석주(부친)
김택기
김영삼
김대중

2. 생애

이철승은 1949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수학했다.[10] 1995년 우석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199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0]

1922년 5월 15일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에서 태어나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성장했다. 3.1 운동에 참여했던 아버지 이석규의 영향으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을 지녔다.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이석주가 그의 둘째 큰아버지였다.

이철승의 집안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탁의 후손으로, 숙종 때 우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지낸 이상진은 그의 10대 방계 선조였다.[10] 13대조 이정란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주성을 지키는데 참여했다.

1928년 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여러 학교를 거쳐 1936년 2월 전주 제2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재학 시절 축구, 야구, 농구 등 다양한 운동에 능했으며, 경성제국대학이 주최한 전국중학교 축구대회에 골키퍼로 출전하기도 했다.

전주북중학교 재학 중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일본인 학생들과 맞서 싸우기도 했다. 1942년 전주고보 5학년 때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이다'라며 한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를 내동댕이쳐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후 불령(不逞)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교장 인촌 김성수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 (오른쪽 맨 끝에 서있는 이가 이철승)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


둘째 큰아버지 이석주의 제안으로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1943년 안호상에게서 일본 패전이 확실하니 학병에 지원하지 말라는 언질을 듣고 학병을 기피했다. 조선총독부의 학병 징집령에 반발하여 동료들과 학병거부운동을 계획했으나 발각되어 조선총독 고이소와 면담했다. 이철승은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강제 차출되어 일본 도쿄로 끌려갔다. 1945년 8월 10일 자살폭격대로 출정하기 직전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귀국했다.

1946년 반탁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전국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직위
반탁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
전국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



1945년 12월 전국반탁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1월 2일 경성부 종로구의 한청빌딩에서 반탁한국학생 총연맹 결성준비대회를 주관[11] 하였다. 1월 7일, 우익을 대표하는 학생들의 총연합체로서 결성된 '반탁전국학생연맹'의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화장에서 이승만, 프란체스카 도너와 함께 촬영 (1948년)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 결정이 나자, 반탁학련을 조직했다. 김구는 '반탁승리'라는 휘호를 써주며 그를 격려했다.

1946년 1월 18일 이철승이 이끄는 반탁학련이 참여한 반탁 대회가 인민당 본부 습격으로 이어져 좌우익간의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1946년 7월,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이 된 이철승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5월에는 미소 공동위원회 학생대표 예비회담에 한국 우익진영 대표로 참석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자 서윤복고려대학교 총장의 허락 없이 스카우트하여 올림픽에 출전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1947년 6월 23일, 서윤복 선수의 귀국 환영대회를 기회로 삼아 반탁 운동을 계획했다. 환영인사로 가장한 반탁 시위대가 덕수궁을 점령했고, 이철승은 미소공동위 미국 대표 브라운 소장에게 분리독립과 이승만 지지를 주장했다.

이철승은 1954년 무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전주)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1]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민주당 소속으로 제4대 및 제5대 국회의원(전주)을 지냈다.[1] 1961년에는 제15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 한국체육협의회 회장, 대한역도연맹 회장을 역임했다.[1] 1966년과 1969년에는 아시아역도연맹 회장을 맡았다.[1]

연도주요 경력
1954년제3대 국회의원(전주, 무소속)
1958년~1961년제4대 국회의원(전주, 민주당), 제5대 국회의원(전주, 민주당)
1961년제15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 한국체육협의회 회장, 대한역도연맹 회장
1966년, 1969년아시아역도연맹 회장
1971년~1973년제8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1973년제9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 국회 부의장
1975년제30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
1976년신민당 최고위원
1978년제10대 국회의원(전주, 완주, 신민당)
1984년~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회장
1985년제12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
1987년자유민주총연맹 총재



1972년 "중도통합론"을 제창하여 박정희 정권과의 타협을 도모하였다. 1975년 3월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내 고립주의자, 주한미군 철수론자들을 설득하고, 3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주일특파 기자들과 면담한 뒤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고립정책 철회를 설득하고 3월 28일 귀국했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총재 측에 대립하였으나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26] 이 과정에서 김태촌을 매수해 김영삼을 공격하게 했으며, 김영삼 역시 조직폭력배를 매수해 이철승을 공격하게 하여 양측 조직폭력배들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이를 신민당 각목 사건이라 한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1978년 박동선 게이트를 계기로 미국 내 주한미군 철수론자들은 미군 철수를 감행하였고,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철승은 양측을 설득하며 미군 철수 불가론을 주장, 미국 내 강경파 인사들을 설득하여 미군 철수를 철회시켰다.

1984년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1985년 대한체육회 고문을 역임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전주, 완주 지역구에 출마하여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자, 김대중김영삼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철승은 양김에 맞서 이민우를 지지하였다.

1987년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여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강하게 반발하였다. 1987년 자유민주총연맹 총재로 추대되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 전주에서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평화민주당 돌풍에 휩쓸려 낙선하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 1989년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고, 1990년 다시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 정계에서 은퇴, 각종 우익운동과 반북반공운동에 앞장섰다. 이후 제3대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민족정론소식 회장을 맡았다.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하였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1995년 한국노년유권자연맹 고문, 1996년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997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서울역광장에서 민족진영구국안보총궐기대회를 주관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에 선임되고, 1999년 운석 장면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이 되어 장면 기념사업회 창설에 참여하였다.[11]

2002년 2002 월드컵조직위원회 조직위원에 재위촉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되었다. 2008년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2010년 1월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에 연임되었다.[11]

이철승의 사회단체 활동 경력
연도직책
1990년
1993년여순사건 희생자 추모위원회 위원장
1994년~자유민주국민회의 공동의장
1995년~한국 유권자 연합 고문
1996년~
1998년대한민국 건국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위원장
2005년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대표의장
2007년대한민국 국회의원회 회장
2011년~2016년대한민국 국회의원회 원로회의 회장



2016년 2월 27일 새벽 3시, 지병으로 향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1]

2. 1. 생애 초기

1949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수학했다.[10] 1995년 우석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199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10]

2. 1. 1. 출생과 가계

1922년 5월 15일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에서 이석규(李錫圭)의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본적지인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 이석규는 일제강점기 3.1 운동에 참여했다. 이철승은 어려서부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의 둘째 큰아버지는 훗날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이석주였다.

이철승의 집안은 양반 가문 출신으로, 형조 정랑을 지내고 사후 병조참판추증된 이직간(李直幹)의 18대손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탁은 15대 방조였고, 숙종 때 우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지낸 충정공 만암 이상진(李尙眞)은 그의 10대 방계 선조였다.[10]

13대조 이정란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주성을 지키는데 참여한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였다. 11대조 이영선은 지역의 명망 있던 인사로 사후 반곡서원에 배향되었다. 10대 방조 이상진은 서인 중진으로 우의정과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등을 지냈지만, 서인노론소론으로 분열될 때 소론이 되었다. 이상진의 동생인 이상민의 5대손이자 이철승의 6대조인 이진희는 정조 때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기도 했다.

이철승의 본적지는 전라북도 전주시 서신동 290번지였는데, 17대조 때 완주군 구이면 장판리 모악산 아래에 정착하였고, 그 뒤 아버지 대에 경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2. 1. 2. 유년기와 소년기

그는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는데, 할아버지 이시형은 전주 지방의 3대 거유(巨儒) 중 한 사람인 저명한 유학자였다. 아버지 가석 이석규는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 3학년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하여 제적당한 후, 형 이석주와 더불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절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 아버지 이석규는 후일 6·25 전쟁 때 퇴각하는 남로당 공비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중부(仲父)인 우농 이석주는 훗날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는데, 그를 인촌 김성수에게 찾아가게 한 사람이 바로 이석주였다. 그에게는 1명의 남동생과 5명의 자매가 있었다.

소년 시절


중부 우농 이석주는 여수에 큰 광산을 갖고 있어서, 밖으로는 비밀리에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계하고 국내에서는 고하 송진우, 인촌 김성수 등과 연대하며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11]

1928년 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군산 소화보통학교로 전학갔다가 다시 전주로 돌아오면서 전주 제2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 1936년 2월 전주 제2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북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 재학 시절의 이철승은 운동을 좋아했는데, 축구, 야구, 농구, 철봉, 평행봉, 역도, 달리기, 검도, 투원반 던지기 등 여러 운동에 만능이었다. 전주북중 재학 중 그는 경성제국대학이 주최한 전국중학교 축구대회에 골키퍼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업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주목받은 문제 학생이었다.

전주북중학교(5년제) 재학 중,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을 거절했고, 일본어인 당시 국어(國語: 일본어)도 하지 않으면서 민족 차별을 하는 일본인 학생들을 두들겨 패기도 하여 가정 근신 또는 정학 등을 당하기도 하여 중학교 2학년 때 낙제했다고 한다.

당시 전주북중은 조선인 학생이 많이 다녔고 전주남중은 일본인 학생이 많이 다녔는데, 전주남중의 학생 오야붕이라 자칭하는 불량학생 마쓰오 다이사는 자주 전주북중 학생을 이유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마쓰오 다이사는 당시 전주에서 큰 '태양당'이라는 문방구 겸 인쇄소를 경영하는 일본인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는데, 가끔 이 일본인의 태양당 문방구에는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노트나 연필을 팔지 않을 정도로 조선인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기도 했다. 마쓰오 다이사와 그의 꼬붕을 자처하는 학생들은 주변의 불량배로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쓰오 다이사의 패거리가 학생들을 이유없이 괴롭히는 것에 분노한 이철승은 수업을 마친 뒤 하굣길에 목검을 들고 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마쓰오 다이사를 붙잡아 놓고 신나게 두들겨 패주었다. 그 뒤로 이 사건으로 전주 시내 조선인 학생들의 사기는 한껏 높아졌고 불량 학생들로 인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이철승 자신은 '조행이정'이라 하여 태도 불량이란 명목으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일제강점기 후반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철승은 일제에 항거하여 잠재적 불령선인으로 찍혀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탄압과 견제,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불이익과 차별 대우에도 굴복하지 않고 반일 의식과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계속하였다.

1942년 전주고보 5학년 졸업반 때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이다'라며 한국인을 극도로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사건을 일으켜 무기정학을 당했다. 이후 불령(不逞)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둘째 큰아버지 이석주민족학교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하라고 제안했고, 그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43년 10월, 일본은 학병제를 공표하여 태평양 전쟁에 자원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1943년 안호상에게서 패전이 확실하니 지원하지 말라는 언질을 듣고 학병을 기피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학도병 징집령에 반발한 이철승은 동료들과 학병거부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총독부 첩자들의 감시로 발각되면서 조선총독 고이소에게까지 전해졌다. 고이소 총독은 면담을 요청했고, 이철승은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으며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하겠다'고 일갈했다.

2. 2. 1. 학창 시절

일제강점기 후반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일제에 항거하였으므로 잠재적 불령선인으로 찍히면서 총독부 학무국의 탄압과 견제,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이런 저런 불이익과 차별대우에도 굴복하지 않고 반일의식과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계속 고수하였다.

1942년 전주고보 5학년 졸업반 때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이다'라며 한국인을 극도로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사건을 일으켜 무기정학을 당했다. 노다는 중일전쟁에 참전했다가 1942년 그가 전주고보 5학년일 때 상이군인으로 돌아와 지리 교사로 임용되었다.

어느 수업시간 중 그의 동문 송경진이 "선생님이 상급 학교 입학시험에 지리과목이 없다고 하여 지리공부를 안한다며 낙제 점수를 주겠다 했습니까?"하고 항의를 하자 노다가 목검을 들고 달려와 그를 내려치려는 순간 이철승이 목검을 받아 빼앗고는 노다 교사를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쳤다.[11]

이후 불령(不逞)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평소 조선인을 무시하며 학생들에게 폭행을 일삼던 일본인 선생을 들어 내동댕이쳤던 일로 그는 퇴학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단체로 시험 거부를 하며 감싸준 친구들 덕에 겨우 퇴학은 면했으나 품행 성적은 갑을병정 중 ‘정’이었다. 이철승은 불령학생이자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고 일부러 교사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여, 졸업성적은 최하점이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그를 기피했고, 그런 그를 받아 준 것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였다.

그의 둘째 큰아버지 이석주(李錫柱)는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사상이 나쁜 너는 평생 형무소생활을 거듭하거나 불량배로 전락하기 쉽다. 민족학교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하라'고 제안했다.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김성수가 교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인촌의 증조모가 이철승 집안의 규수였던 인연으로 김성수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1943년 10월, 일본은 학병제를 공표하여 태평양 전쟁에 자원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각급 교육청과 학교에서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지원에 응하도록 갖은 협박과 압력을 일삼았고,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친일파를 앞세워 지원병 가입을 선동하기도 했다.

1943년 안호상에게서 패전이 확실하니 지원하지 말고 기피하라는 언질을 듣고 학병을 기피하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학도병 징집령에 반발한 이철승은 비밀리에 동료들과 학병거부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총독부 첩자들의 감시, 추적 때문에 발각되면서 고이소 총독에게까지 전해졌다. 고이소 총독은 그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이철승 일행과 만난 자리에서 조선총독 고이소는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이기에 내선일체가 되어야 한다’며 터무니없는 식민지 이론을 역설한다. 이에 이철승은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으며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하겠다'고 일갈했다.

1946년

  • 반탁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
  • 전국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

2. 2. 2. 태평양 전쟁 후반과 학병 거부

일제강점기 후반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철승은 일제에 항거하여 잠재적 불령선인으로 찍히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탄압과 견제, 감시를 받았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불이익과 차별대우에도 굴복하지 않고 반일의식과 일제에 대한 항거를 계속 고수하였다.

1942년 전주고보 5학년 졸업반 때, '한글은 야만인이 쓰는 부호이다'라며 한국인을 극도로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 노다(野田)를 교실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사건을 일으켜 무기정학을 당했다. 노다는 중일전쟁에 참전했다가 1942년 그가 전주고보 5학년일 때 상이군인으로 돌아와 지리 교사로 임용되었다.

어느 수업시간 중 그의 동문 송경진이 "선생님이 상급 학교 입학시험에 지리과목이 없다고 하여 지리공부를 안한다며 낙제 점수를 주겠다 했습니까?"하고 항의하자, 노다가 목검을 들고 달려와 그를 내려치려는 순간 이철승이 목검을 받아 빼앗고는 노다 교사를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쳤다.[11]

이후 불령(不逞)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출세길이 열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 평소 조선인을 무시하며 학생들에게 폭행을 일삼던 일본인 선생을 들어 내동댕이쳤던 일로 그는 퇴학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단체로 시험 거부를 하며 감싸준 친구들 덕에 겨우 퇴학은 면했으나 품행 성적은 갑을병정 중 ‘정’이었다. 이철승은 불령학생이자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고 일부러 교사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여, 졸업성적은 최하점이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그를 기피했고, 그런 그를 받아 준 것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였다.

그의 둘째 큰아버지 이석주는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학교에 진학하게 되면 사상이 나쁜 너는 평생 형무소생활을 거듭하거나 불량배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지도자, 우리 힘으로 세운 민족학교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하라'고 제안했다. 둘째 큰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마침 당시 김성수가 교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인촌의 증조모가 이철승 집안의 규수였던 인연으로 김성수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1943년 10월, 일본은 학병제를 공표하여 태평양 전쟁에 자원할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각급 교육청과 학교에서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지원에 응하도록 갖은 협박과 압력을 일삼았고,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친일파를 앞세워 지원병 가입을 선동하기도 했다. 1943년 병을 핑계로 입원중인 철학자 안호상의 문병을 갔다. 안호상에게서 패전이 확실하니 지원하지 말고 기피하라는 언질을 듣고 학병을 기피하게 되었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학도병 징집령에 반발한 이철승은 비밀리에 동료들과 학병거부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총독부 첩자들의 감시, 추적 때문에 발각되면서 고이소 총독에게까지 전해졌다. 뜻밖에도 고이소 총독은 그들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이철승 일행과 만난 자리에서 조선총독 고이소는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이기에 내선일체가 되어야 한다’며 터무니없는 식민지 이론을 역설한다. 이에 이철승은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으며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하겠다'고 일갈했다.

2. 2. 3. 강제 징집과 귀국

1943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에 투신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학도병 징집령에 반발한 이철승은 비밀리에 동료들과 학병거부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총독부 첩자들의 감시와 추적 때문에 발각되어 조선총독 고이소에게까지 전해졌다.

안호상의 언질을 받은 뒤 이철승은 바로 연희전문학교나 모의 하숙집에서 경성제대 이혁기(광복 직후 좌익의 국군준비대 사령관) 등과 학병거부운동을 결의, 이 운동을 조직화해서 강력히 전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비밀이 혜화전문학교의 金모 군에 의해 새어나가 김모의 친척인 문모라는 친일파 거두에 의해 고이소 당시 조선총독에게 알려졌다. 그는 일의 심각함을 감지한 탓인지 바로 文씨를 통하여 우리 대표들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다. 이철승은 학생 대표들을 이끌고 난상토의 끝에 면담에 참석하기로 결의함으로써 총독과의 면담은 이루어졌다.

이철승과 학생들은 '일본은 대동아 성전(聖戰)이라고 하면서 동남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조선만 독립시키지 않는가?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고이소 총독은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되어야 해, 제군들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고이소는 옆에 있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 학교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보성전문 李哲承입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1944년 12월 5일 거행된 장행회(壯行會)는 죽음의 길로 떠나는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을 전송하는 행사였다. 장행회가 끝나자 본관 앞 운동장에서 학생들은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지막 술잔을 들며 이아주 여사가 손수 만들어 준 「카레라이스」를 먹었다. 학생들은 통한의 울분을 「스톰(storm·폭풍)」으로 폭발시켜 스크럼을 짜고 「입실렌트·체이호」의 교호(校號)를 외쳤다. 그 순간 누군가 『일본놈의 경찰서를 쳐부수자』 라고 소리쳤고, 학생들은 시위대를 형성하여 안암동을 빠져나갔다.

2. 3. 해방 이후

1944년 1월 20일 이철승은 학도병으로 강제 차출되어 전주역에서 할머니의 배웅을 받고 일본 도쿄로 끌려갔다. 오사카 사카이시 병참부대에 배속되었는데, 그곳에는 전주북중 19회 동기동창생인 임인영이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창씨개명을 계속 거부하여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그에게 고된 훈련과 기합이 계속되었고, 자살폭격대에 강제로 투입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0일 자살폭격대로 출정하기 직전 라디오에서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접하였다. 혼란 중에 일본군을 탈출한 그는 배편으로 귀국하였는데, 많은 한국인 학병들이 귀국해야 했기에 배가 정원을 훌쩍 넘어 귀국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배편으로 부산항을 거쳐 고향인 전라북도 전주에 도착했다.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사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이철승은 김성수 교장의 호출을 받았다. 김성수는 “오늘이 있듯이 내일도 있네. 설움 속에서 시름을 씻고 일어서는 것이 우리 조선민족이야! 단칼에 베려 하지 말고 매사를 길게 보게”라며 그를 설득했다. 김성수의 설득으로 그는 흥분된 시위대의 선두를 다시 학교로 돌리고 수습하였다.

2. 3. 1. 광복 직후와 학병동맹

이철승은 1946년에 반탁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전국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직위
반탁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
전국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


2. 3. 2. 신탁통치 반대 운동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확인하고 학병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학병동맹의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며,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학병 동맹원 모집을 위해 설득과 연설, 웅변 등으로 부단하게 노력하여 고려대학교 외에도 많은 학교에서 학병 동맹원들을 가입시켰다. 학병동맹은 우익 청년단체, 우익 학생운동 단체의 전범이 되었다. 9월 2일 학병 동지들과 함께 상경하여 계동(桂洞)에 있던 김성수의 댁을 찾았다. 김성수는 그가 살아 돌아온 것과 여러 젊은이들을 우익 진영으로 끌어온 수완력에 깊이 감동하였다. 이철승은 한민당에 참여하였고, 김성수, 백관수, 원세훈, 서상일 등 한민당의 민족진영 원로들과 함께 한민당 본부 경비대장을 맡게 되었다.

학교가 건준, 좌익 전위대 손아귀에 들어가자 윤원구, 박석규 등 우익 청년들이 보성전문학교에 복교하였고, 이철승에게도 복교를 권유하였다. 특히 김성수의 부인 이아주 여사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 간곡히 복교를 권유하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1945년 11월 보성전문 제1전문부 정치과 3학년에 복교하였다.

1945년 12월 전국반탁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에는 반탁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 전국학생총운동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 3. 3. 해방 정국의 학생 운동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확인하고 학병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학병동맹의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며 혼란한 해방 정국에서 학병 동맹원들 모집을 위해 설득과 연설, 웅변 등으로 부단하게 노력, 고려대학교 이외에도 많은 학교에서 많은 학병 동맹원들을 가입시켰다. 학병동맹은 우익 청년단체, 우익 학생운동 단체의 전범이 되었다. 9월 2일 그는 학병 동지들과 함께 상경하여 계동(桂洞)에 있던 김성수의 댁을 찾았다. 다시 그를 만난 인촌 김성수는 그가 살아돌아온 것과 여러 젊은이들을 우익 진영으로 끌어온 수완력에 깊이 감동하였다. 이어 그는 한민당에 참여하였고 한민당에 있던 민족진영의 원로인 김성수, 백관수, 원세훈, 서상일 등과 한민당 본부를 경비하는 경비대장을 맡게 되었다.

학교가 건준, 좌익 전위대 손아귀에 들어가자 윤원구(尹元求), 박석규(朴錫圭) 등 우익 청년들이 보성전문학교에 복교하였고, 그들로부터 복교 권유를 받았다. 특히 김성수의 사모님인 이아주 여사가 사람들을 데리고 그를 찾아와 간곡히 복교를 권유하자 그는 처음에는 거절하였다가 나중에 1945년 11월 보성전문 제1전문부 정치과 3학년에 복교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전국반탁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우파인 한국민주당학생조직을 맡다가, 김구, 김성수의 주도로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적극 가담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영소중 4개국이 5년 동안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결정이 났다. 이철승은 당장 학생들을 모아 반탁학련을 조직했다. 그는 특별히 경교장에 호출되었다. 백범 김구는 '반탁승리'라는 휘호를 써주며 그를 격려했다.

1946년 1월 2일 경성부 종로구의 한청빌딩에서 반탁한국학생 총연맹 결성준비대회를 주관[11] 하였다. 1월 7일, 우익을 대표하는 학생들의 총연합체로서 결성된 '반탁전국학생연맹'의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반탁전국학생총연맹이 전국학생총연맹으로 개편될때도 중앙위원장으로 재추대되면서 계속 이 단체를 이끌어갔다.

그는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김성수 댁을 시작으로 전용순 댁에서 활동지원금을 받았고, 김구경교장, 신익희조소앙 등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12][13] 당시 인촌(김성수)의 주머니가 곧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이 있었다고도 한다.[14]

1946년 1월 18일 이철승이 이끄는 반탁학련이 참여한 반탁 대회가 인민당 본부 습격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좌우익간의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2. 4. 정치 활동

1946년 7월, 전국학생총연맹 위원장이 된 이철승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좌우익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에 그는 예술인들을 통해 국민들의 호감을 얻고, 무력 충돌에 대비해 운동선수들을 포섭했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5월에는 미소 공동위원회 학생대표 예비회담에 한국 우익진영 대표로 참석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우승자 서윤복고려대학교 총장의 허락 없이 스카우트하여 올림픽에 출전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서윤복이 우승하자 이승만, 김구 등 주요 인사들이 그의 집을 찾아 축하했다. 현상윤 총장은 이승만의 축전을 받고서야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지만, 이철승은 학교를 세계에 알렸다며 맞섰다.

1947년 6월 23일, 서윤복 선수의 귀국 환영대회를 기회로 삼아 반탁 운동을 계획했다. 환영인사로 가장한 반탁 시위대가 덕수궁을 점령했고, 이철승은 미소공동위 미국 대표 브라운 소장에게 분리독립과 이승만 지지를 주장했다. 브라운 소장은 분노했으나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2. 4. 1. 정치 활동 초기와 야당 정치인

이철승은 1954년 무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전주)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1] 1958년부터 1961년까지 민주당 소속으로 제4대 및 제5대 국회의원(전주)을 지냈다.[1]

1961년에는 제15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활동했으며,[1] 같은 해 한국체육협의회 회장과 대한역도연맹 회장을 역임했다.[1] 1966년과 1969년에는 아시아역도연맹 회장을 맡았다.[1]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신민당 소속 제8대 국회의원(전주)을 지냈고,[1] 한국정책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1] 1973년에는 제9대 국회의원(전주)에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을 맡았다.[1] 1975년에는 제30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1]

1976년 신민당 최고위원이 되었고,[1]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전주, 완주)에 당선되었다.[1] 1985년에는 신민당 소속으로 제12대 국회의원(전주)이 되었다.[1]

1984년부터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으며,[1] 1987년에는 자유민주총연맹 총재를 역임했다.[1]

이철승의 초기 정치 활동 및 야당 정치인 시절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주요 경력
1954년제3대 국회의원(전주, 무소속)
1958년~1961년제4대 국회의원(전주, 민주당), 제5대 국회의원(전주, 민주당)
1961년제15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 한국체육협의회 회장, 대한역도연맹 회장
1966년, 1969년아시아역도연맹 회장
1971년~1973년제8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 한국정책연구원 원장
1973년제9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 국회 부의장
1975년제30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
1976년신민당 최고위원
1978년제10대 국회의원(전주, 완주, 신민당)
1984년~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회장
1985년제12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
1987년자유민주총연맹 총재


2. 4. 2. 3공, 4공 시절

1969년 아시아역도연맹 회장에 재선되었다.[1]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제8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을 지냈으며, 한국정책연구원 원장을 역임하였다.[1] 1973년 제9대 국회의원(전주, 신민당)에 당선되었고,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1]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1] 1976년 신민당 최고위원이 되었고,[1]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전주, 완주, 신민당)에 당선되었다.[1]

2. 4. 3. 중도통합론과 미군철수 사태 중재

1972년 국제테니스클럽 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중도통합론"을 제창하여 유신독재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는 윤보선,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 등과 대립하면서 박정희 정권과의 타협을 도모하였다. 1975년 3월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내 고립주의자, 주한미군 철수론자들과 기타 미국 정치 인사들을 설득하고, 3월 15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주일특파 기자들과 면담한 뒤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고립정책 철회를 설득하고 3월 28일 귀국했다.

1976년 신민당을 어용야당으로 만들려는 차지철에게 매수되어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비주류 대표로 주류인 김영삼 총재 측에 대립하였으나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26] 이 과정에서 서방파 두목 김태촌을 매수해 김영삼을 공격하게 했으며, 김영삼 역시 조직폭력배를 매수해 이철승을 공격하게 하여 양측 조직폭력배들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이를 신민당 각목 사건이라 한다.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이었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1978년 박동선의 미국 상하원 의원 로비 사건, 이른바 박동선 게이트를 계기로 미국 내 주한미군 철수론자들은 미군 철수를 감행하였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던 박정희는 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철승은 야당 의원들을 모아 일본과 미국을 돌며 미군 철수는 안 된다며 미군 철수 정책 추진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일본 총리, 미국 상원 의원들을 만나 주한미군 주둔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뉴욕타임즈에 그의 인터뷰 내용이 실렸는데, 미국 상원의원 의장인 험프리는 당과 노선을 떠나 국방과 국익을 위해 애쓴다며 특별히 이철승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철승은 양측을 설득하며 미군 철수 불가론을 주장, 미국 내 강경파 인사들을 설득하여 미군 철수를 철회시켰다.

2. 4. 4. 5, 6공 시절

1984년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에 추대되고 1985년 대한체육회 고문이 되었다. 신군부 집권 후에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잠시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국회에 참여할 수 없었으나, 1985년 정치 규제가 풀리면서 그해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전주, 완주 지역구에 출마하여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5년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민주화를 위한 몇가지 선행 조건을 수행한다면 내각제를 고려해볼 수도 있다'며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였다. 김대중김영삼 양 김 세력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철승은 양김에 맞서 이민우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 뒤 이민우 총재와 함께 변절자, 사쿠라, 유진산, 장면 등과 함께 비난을 받고 수모를 당했지만 이민우를 지지하였다.

1987년 당시 직선제 개헌을 위해 선명투쟁을 주장하는 양김씨 틈새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였고, 이에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때 다시 "사쿠라"라는 별명이 언급되었고 양김 세력은 이철승을 제명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결국 이민우 총재는 양김 세력의 압력에 '해당 행위'를 이유로 이철승을 제명하려 하였으나, 정치깡패 김용남의 방해로 인해 제명하지 못했고 이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으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87년 자유민주총연맹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이듬해 1988년 4월 26일의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고향 전주에서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호남지역을 휩쓴 이른바 황색바람(김대중의 평화민주당 돌풍)에 휩쓸려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 신한민주당은 와해되어 통일민주당에 흡수되고 만다. 그는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에 위촉되었고, 1989년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1990년 다시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2. 5. 생애 후반

1984년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에 추대되고 1985년 대한체육회 고문이 되었다. 신군부 집권 후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잠시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국회에 참여할 수 없었으나, 1985년 정치 규제가 풀리면서 그해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전주, 완주 지역구에 출마하여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5년말 신민당 총재 이민우가 '민주화를 위한 몇가지 선행 조건을 수행한다면 내각제를 고려해볼 수도 있다'며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자, 김대중김영삼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철승은 양김에 맞서 이민우를 지지하며, 변절자, 사쿠라, 유진산, 장면 등과 함께 비난을 받았지만 이민우를 지지하였다.

1987년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여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때 "사쿠라"라는 별명이 다시 언급되었고 양김 세력은 이철승을 제명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민우 총재는 양김 세력의 압력에 '해당 행위'를 이유로 이철승을 제명하려 하였으나, 정치깡패 김용남의 방해로 인해 제명하지 못했고 이는 통일민주당 창당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87년 자유민주총연맹 총재로 추대되었다.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고향 전주에서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평화민주당 돌풍에 휩쓸려 낙선하고 통일민주당에 입당 권고를 물리치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 1989년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고, 1990년 다시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2. 5. 1. 정계은퇴 후 시민사회단체 활동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이후로 정계 일선을 은퇴하고 각종 우익운동과 반북반공운동에 앞장서면서 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등에 선출되었다. 이후 제3대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민족정론소식 회장을 맡았다. 그 뒤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하였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여러 우익 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강연 활동 등을 하였다.[11]

1995년 한국노년유권자연맹 고문, 1996년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997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서울역광장에서 민족진영애국단체연합 등 범 우파단체를 소집, 민족진영구국안보총궐기대회를 주관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에 선임되고, 1999년 운석 장면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이 되어 장면 기념사업회 창설에 참여하였다.[11]

2002년 2002 월드컵조직위원회 조직위원에 재위촉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되었다. 2008년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2010년 1월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에 연임되었다.[11]

이철승의 사회단체 활동 경력
연도직책
1990년
1993년여순사건 희생자 추모위원회 위원장
1994년~자유민주국민회의 공동의장
1995년~한국 유권자 연합 고문
1996년~
1998년대한민국 건국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위원장
2005년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대표의장
2007년대한민국 국회의원회 회장
2011년~2016년대한민국 국회의원회 원로회의 회장


2. 5. 2. 사망

2016년 2월 27일 새벽 3시, 지병으로 향년 9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1]

3. 학력

3. 1. 명예 박사 학위

1995년 2월 24일 전주우석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1998년 11월 4일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4. 약력


  •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전북 전주) 선거 낙선
  • 1950년 5월 10일: 제2대 국회의원(전북 전주) 선거 낙선
  • 1985년 12월: 제12대 국회의원(전북 전주) 당선

5. 기타

이민우는 이철승을 애국자라고 칭찬하며, 과거 민주당과 신민당 시절 자주 부딪쳤지만, 그의 중도통합노선을 반대했던 자신과 달리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철승이 건강하게 자유민주주의 운동 일선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27]

2009년 5월 국가원로회의에서 이철승은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장 결정에 대해, 투신자살한 대통령을 이승만 대통령이나 김구 선생과 같은 반열에 놓고 국민장을 치르는 것은 국가 관례에 혼란을 줄 수 있다며 반대했다.[28]

5. 1. 상훈

국민훈장 무궁화장|국민훈장 무궁화장한국어(1991년)

6. 저서


  • 《절망에의 도전》
  • 《민주의 장정》
  • 《전국학련》
  • 《중도통합론》
  • 《대한민국과 나》 (2011)
  • 《오! 대한민국 누가 지키리》 (2002)
  • 《혼란기의 논리》
  • 《한국 학생 민족운동사》
  • 《대한민국 건국사》 (1998)
  • 《민주발전을 위한 나의 정치사상》

6. 1. 공저


  • 박정희 시대〉 (공저)
  • 〈대한민국 건국 50년! 이렇게 세웠다〉 (박갑동과 공저, 계명사)

7. 가족 관계

관계이름
할아버지이시형
백부이석주
사촌이헌승
아버지이석규(李錫圭, ? - 1950년)
어머니청주 한씨
형제자매2남 5녀
배우자김창희(金昌熙, 1925년 ~ 2018년)[29]
아들이동우(李東祐, 1951년~ )
며느리허은미(許恩美)
손녀이은선(李垠宣)
손녀이희선(李熙宣)
손자이학렬(李學烈)
이양희(李亮喜, 1956년 - , 김택기의 전처)


8. 평가

이철승에 대한 평가는 아직 구체적으로 작성되지 않았다. 내용을 추가하여 문서를 완성할 수 있다. (내용 추가 필요)

참조

[1] 웹사이트 7선 의원 지낸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 별세 http://news.chosun.c[...] The Chosun Ilbo
[2] 웹사이트 Former 7-term lawmaker dies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Los Angeles)
[3] 웹사이트 See news video clip: '40대 기수론' 이철승, YS-DJ 잠든 서울현충원 영면.Lee Chul-seun, YS-DJ Rest Together at Seoul Nat'l Cemetery http://news.ichannel[...] news.ichannela.com
[4] 웹사이트 Lee Chul-seung http://www.spp.or.kr[...]
[5]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3-11
[6] 웹사이트 이석주(李錫柱) https://encykorea.ak[...] 2023-09-08
[7] 웹사이트 통합당 감사위원장에 '이철승의 딸' 이양희 https://www.yna.co.k[...] 2020-07-09
[8] 웹사이트 YS·DJ와 ‘40대기수론’ 경쟁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 별세 https://www.hani.co.[...] 2016-02-27
[9] 웹사이트 사상 초유의 與 대표 중징계…이양희 윤리위원장은 누구? https://biz.chosun.c[...] 2022-07-08
[10] 기타
[11] 뉴스 '한국 정치사의 충격 '40대 기수론'의 맏형' 전북중앙 2002-11-07
[1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3]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해방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전선 역사비평사 1991
[1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15] 기타
[16] 뉴스 동아일보 1949-03-11
[17] 서적 산하 한길사 2006
[18] 서적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19]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20] 뉴스 백악관앞에서데모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63-03-22
[21] 웹사이트 한국현대사 증언:19회, 이철승 4부 - 박정희 시대와 신민당 http://www.kbs.co.kr[...]
[22] 뉴스 경향신문 1967-01-25
[23] 뉴스 경향신문 1973-09-29
[24] 뉴스 동아일보 1973-09-29
[25] 서적 민연 2000-02-01
[26] 웹사이트 http://www.hani.co.k[...]
[27] 웹사이트 http://monthly.chosu[...]
[28] 웹사이트 http://news.kukinews[...]
[29] 뉴스 이철승 신민당대표최고위원 http://dna.naver.com[...] 매일경제 197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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