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총력전은 한 국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1935년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저서에서 처음 개념화되었다. 이는 전쟁의 목표, 수단, 동원, 통제, 변화의 전면적인 확대를 특징으로 하며, 프랑스 혁명 전쟁,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발전했다. 특히 20세기에는 산업화와 기술 발전에 따라 전략 폭격, 경제 통제, 민간인 동원 등이 나타났으며, 냉전 시대에는 핵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대리전 양상으로 변화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군사경제학 - 경제전
경제전은 봉쇄, 약탈, 무역로 차단 등 경제 공격을 통해 상대방의 경제를 마비시키는 행위를 의미하며,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군사경제학 - 전시 경제
전시 경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체제로, 군수 물자 우선 생산, 국가 통제 강화, 자원 배분 통제, 생산 체제 전환, 노동력 동원 등의 특징을 가지며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등 다양한 전쟁 상황에서 나타났다. - 경제전 - 카이베르파크툰크와 반란
카이베르파크툰크와 반란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파키스탄 북서부 국경 지역에서 발생한 복잡한 무장 분쟁으로, 파슈툰족 소외감, 이슬람화 정책, 탈레반 은신처 제공 등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파키스탄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야기하고 현재까지 안보 위협으로 남아있다. - 경제전 - 대륙봉쇄령
나폴레옹 1세가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유럽 대륙과 영국 간 무역을 차단한 경제 제재 조치인 대륙봉쇄령은 영국 경제 고립을 목표로 했으나, 유럽 각국의 경제적 어려움 가중 및 반나폴레옹 감정 확산, 나폴레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 전시 체제 - 원천징수
원천징수란 소득을 지급하는 자가 소득자(납세의무자)를 대신하여 소득세를 징수하여 국세청에 납부하는 제도로, 소득세법에 따라 근로소득, 사업소득, 이자소득, 배당소득 등에 적용되며 세금 납부의 편의성을 높이고자 시행된다. - 전시 체제 - 민방위
민방위는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활동 및 체계로, 과거 핵전쟁 대비에서 현재는 다양한 재난에 대응하는 광범위한 임무를 수행하며 국가별 특성에 따라 운영 방식이 다르다.
총력전 | |
---|---|
지도 정보 | |
개요 | |
정의 | 한 국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전쟁 |
특징 | 전쟁 목표 달성을 위해 국가의 모든 자원과 역량을 동원하는 것이 특징이며, 민간인과 민간 시설도 공격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
관련 개념 | 국가총력전 총동원 전시경제 |
역사적 배경 | |
발생 시기 | 19세기 후반 |
이론 발전 | 20세기 초, 에리히 루덴도르프 등의 군사 이론가들에 의해 발전 |
주요 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주요 특징 | |
동원 | 국가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 동원 군수 생산 극대화 국민 총동원 |
경제 | 전시 경제 체제 전환 모든 산업 군수 생산 중심 물자 배급제 실시 |
사회 | 국민의 생활 수준 저하 검열 강화 선전 활동 강화 국가주의 강화 |
군사 | 무차별적인 공격 민간인 사상자 발생 새로운 무기 및 기술 개발 |
주요 비판 | |
윤리적 문제 |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전쟁 범죄 발생 가능성 증가 |
비인간적 측면 | 인간의 존엄성 경시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한 개인 희생 강요 |
관련 용어 | |
총력전 (독일어) | Totaler Krieg (토탈러 크리크) |
총력전 (영어) | Total War |
참고 문헌 | |
주요 저서 | 루덴도르프, 《총력전》(Der totale Krieg) |
참고 서적 | |
기타 | |
관련 문서 | 전쟁 군사 정치 경제 |
2. 총력전의 개념과 특징
"총력전"이라는 용어는 1935년 독일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쓴 제1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처음 등장했다.[65] 하지만 총력전의 개념은 이보다 앞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저서 전쟁론에서 언급된 "절대전" 개념과 연관 짓기도 한다.[65]
원자시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공군 장성 커티스 르메이는 핵무기를 이용한 총력전 개념을 새롭게 제시했다. 1949년, 그는 국가의 모든 핵무기를 동원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국가를 죽이는 것"이 총력전이라고 주장했다.[66]
전면전(Total war)은 갈등 및 전쟁 연구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연구되어 온 개념이다. 스티그 퍼스터(Stig Förster)는 전면전의 네 가지 차원을 다음과 같이 규명했다.[3][4]
차원 | 설명 |
---|---|
전면적 목표 | 관련 당사자들의 권력 지속적 성장 및 패권적 비전을 목표로 함. |
전면적 수단 |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국가들 간의 유사하고 공통적인 방법론. |
전면적 동원 | 전통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 아동, 비무장 부대원 등 다양한 당사자들의 갈등 참여. |
전면적 통제 | 권력의 중앙 집중화 및 소수 독재자 또는 과두정치 세력에 의한 국가 활동 조정. 교육, 문화, 미디어/선전, 경제, 정치 활동 등에 대한 통제. |
티치아노 페치아(Tiziano Peccia)는 퍼스터의 연구에 "전면적 변화"라는 다섯 번째 차원을 추가했다. 그는 전면전이 갈등 이후에도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영역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3][4] 즉, "전면전은 세계를 진원지로 하는 지진과 같다."[5][6]
차원 | 설명 |
---|---|
전면적 변화 | 사회적 태도, 문화적 규범, 정치 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포함. |
19세기 이후 전면전 개념을 특징짓는 행위에는 다음이 포함될 수 있다.
- 전략폭격 (예: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봉쇄 및 인구 밀집 지역 포위 (예: 연합국의 독일 봉쇄, 레닌그라드 포위전)
- 초토화 작전 (예: 해안 진격, 삼광 작전)
- 통상 침해, 톤수 전, 무제한 잠수함 작전 (예: 사략선, U보트)
- 집단 처벌, 평정 작전 및 적대적 인구에 대한 보복 (예: 코뮌 파리 시민 처형 및 추방, 저항 세력 진압)
- 산업전
- 민간인 및 포로 강제 노동 (예: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통치 하의 강제 노동)
- 항복 거부 (예: 코만도 명령)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시대와 기술 혁신은 전쟁의 질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의 능력과 군대 규모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산업과 민중까지 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2. 1. 총력전의 개념
"총력전"이라는 단어는 1935년 독일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제1차 세계 대전 회고록인 "Der totale Krieg"("총력전쟁")에서 처음 등장한다.[65] 일부 학자들은 총력전 개념이 이보다 훨씬 전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저작 전쟁론에서 쓰인 "absoluter Krieg"(절대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에 대한 다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65]미국 공군 장성 커티스 르메이는 핵무기 개발이 시작됨에 따라 원자시대에 맞게 총력전의 개념을 수정했다. 1949년, 그는 원자시대의 총력전은 국가 전체의 모든 핵무기를 동원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국가를 죽이는 것"이 될 것이라고 개념을 소개했다.[66]
전면전(Total war)은 갈등 및 전쟁 연구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연구되어 온 개념이다. 이 연구 분야에 가장 주목할 만한 공헌 중 하나는 스티그 퍼스터(Stig Förster)의 연구로, 그는 전면전의 네 가지 차원을 규명했다. 즉, 전면적 목표, 전면적 수단, 전면적 동원, 전면적 통제이다. 티치아노 페치아(Tiziano Peccia)는 퍼스터의 연구를 바탕으로 다섯 번째 차원인 "전면적 변화"를 추가했다. 페치아는 전면전이 갈등의 결과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갈등 종식 이후에도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영역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페치아의 말처럼 "전면전은 세계를 진원지로 하는 지진과 같다."[3][4]
퍼스터가 규명한 전면전의 네 가지 차원은 다음과 같다.
차원 | 설명 |
---|---|
전면적 목표 | 관련 당사자들의 권력 지속적 성장 및 패권적 비전을 목표로 한다. |
전면적 수단 |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국가들 간의 유사하고 공통적인 방법론. |
전면적 동원 | 전통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당사자들(예: 여성, 아동 또는 무장 부대에 속하지 않은 개인)의 갈등 참여. |
전면적 통제 | 여러 부문에 걸친 권력의 중앙 집중화 및 소수 독재자 또는 과두정치 세력에 의한 국가 활동의 조정, 교육 및 문화, 미디어/선전, 경제 및 정치 활동에 대한 기능 간 통제. |
페치아가 추가한 "전면적 변화"는 전면전의 사회에 대한 장기적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이 틀에 기여한다.
- 전면적 변화: 사회적 태도, 문화적 규범, 정치 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포함한다.
페치아의 견해에 따르면, 전면전은 군사 및 정치적 환경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다.[5][6]
"총력전"이라는 용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작가들 사이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프랑스 작가 레옹 도데는 1918년에 ''La Guerre Totale''("총력전")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출판했다.[8][9]
2. 2. 총력전의 특징
"총력전"이라는 용어는 1935년 독일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쓴 제1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처음 등장했다.[65] 하지만 총력전의 개념은 이보다 앞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저서 전쟁론에서 언급된 "절대전쟁" 개념과 연관 짓기도 한다.[65]원자시대에 들어서면서, 미국 공군 장성 커티스 르메이는 핵무기를 이용한 총력전 개념을 새롭게 제시했다. 1949년, 그는 국가의 모든 핵무기를 동원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국가를 죽이는 것"이 총력전이라고 주장했다.[66]
전면전(Total war)은 갈등 및 전쟁 연구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연구되어 온 개념이다. 스티그 퍼스터(Stig Förster)는 전면전의 네 가지 차원을 다음과 같이 규명했다.[3][4]
차원 | 설명 |
---|---|
전면적 목표 | 관련 당사자들의 권력 지속적 성장 및 패권적 비전을 목표로 함. |
전면적 수단 |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국가들 간의 유사하고 공통적인 방법론. |
전면적 동원 | 전통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여성, 아동, 비무장 부대원 등 다양한 당사자들의 갈등 참여. |
전면적 통제 | 권력의 중앙 집중화 및 소수 독재자 또는 과두정치 세력에 의한 국가 활동 조정. 교육, 문화, 미디어/선전, 경제, 정치 활동 등에 대한 통제. |
티치아노 페치아(Tiziano Peccia)는 퍼스터의 연구에 "전면적 변화"라는 다섯 번째 차원을 추가했다. 그는 전면전이 갈등 이후에도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영역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3][4] 즉, "전면전은 세계를 진원지로 하는 지진과 같다."[5][6]
차원 | 설명 |
---|---|
전면적 변화 | 사회적 태도, 문화적 규범, 정치 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포함. |
19세기 이후 전면전 개념을 특징짓는 행위에는 다음이 포함될 수 있다.
- 전략폭격 (예: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봉쇄 및 인구 밀집 지역 포위 (예: 연합국의 독일 봉쇄, 레닌그라드 포위전)
- 초토화 작전 (예: 해안 진격, 삼광 작전)
- 통상 침해, 톤수 전, 무제한 잠수함 작전 (예: 사략선, U보트)
- 집단 처벌, 평정 작전 및 적대적 인구에 대한 보복 (예: 코뮌 파리 시민 처형 및 추방, 저항 세력 진압)
- 산업전
- 민간인 및 포로 강제 노동 (예: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통치 하의 강제 노동)
- 항복 거부 (예: 코만도 명령)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시대와 기술 혁신은 전쟁의 질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의 능력과 군대 규모가 중요했지만, 이제는 산업과 민중까지 전쟁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2. 3. 총력전의 양상
나치 독일은 전격전 개념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1943년 2월 18일 요제프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총력전 상태에 있지 않았다.[69] 1942년 3월, 괴벨스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국내 전선 전체를 전시 체제에 두는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고, 히틀러는 동의했지만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1942년 10월,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경제장관 발터 풍크, 독일노동전선 총재 로베르트 라이는 괴벨스를 지지하며 히틀러에게 압력을 가했지만, 히틀러는 계속 주저했다. 1943년 1월 13일, 히틀러는 괴벨스가 제안한 법령에 서명했고, 마르틴 보어만, 한스 라머스, 빌헬름 카이텔이 감독하고 괴벨스와 슈페어가 자문하는 운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총력전 계획에 무관심했다. 그 다음 달인 2월, 베를린 스포츠궁전에서 열린 나치당 집권 10주년 기념 집회에서 괴벨스는 유명한 총력전 연설을 했다.[69]
전면전(Total war)은 갈등과 전쟁 연구 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연구되어 온 개념이다. 스티그 퍼스터(Stig Förster)는 전면전의 네 가지 차원인 전면적 목표(total purposes), 전면적 수단(total methods), 전면적 동원(total mobilisation), 전면적 통제(total control)를 규명했다. 티치아노 페치아(Tiziano Peccia)는 퍼스터의 연구를 바탕으로 다섯 번째 차원인 "전면적 변화(total change)"를 추가했다. 페치아는 전면전이 갈등의 결과뿐만 아니라, 갈등 종식 이후에도 정치, 문화, 경제, 사회 영역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3][4]
퍼스터가 규명한 전면전의 네 가지 차원은 다음과 같다.
1) 전면적 목표: 관련 당사자들의 권력 지속적 성장 및 패권적 비전을 목표로 한다.
2) 전면적 수단: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국가들 간의 유사하고 공통적인 방법론.
3) 전면적 동원: 여성과 어린이 등, 전통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당사자들의 갈등 참여.
4) 전면적 통제: 여러 부문에 걸친 권력의 중앙 집중화 및 소수 독재자 또는 과두정치 세력에 의한 국가 활동의 조정, 교육 및 문화, 미디어/선전, 경제 및 정치 활동에 대한 기능 간 통제.
페치아가 추가한 "전면적 변화"는 전면전의 사회에 대한 장기적 영향을 강조함으로써 이 틀에 기여한다.
5) 전면적 변화: 사회적 태도, 문화적 규범, 정치 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경제적, 기술적 발전을 포함한다.[5][6]
19세기 이후 전면전 개념을 특징짓는 행위에는 다음이 포함될 수 있다.
- 전략폭격 (예: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봉쇄 및 인구 밀집 지역의 포위 (예: 연합국의 독일 봉쇄 및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 중 레닌그라드 포위전)
- 초토화 작전 (예: 해안 진격 (미국 남북 전쟁) 및 제2차 중일 전쟁 중 일본의 "삼광 작전")
- 통상 침해, 톤수 전, 무제한 잠수함 작전 (예: 사략선,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U보트 작전,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의 일본에 대한 잠수함 작전)
- 집단 처벌, 평정 작전 및 적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인구에 대한 보복 (예: 1871년 파리 코뮌 붕괴 후 의심되는 코뮌 파리 시민의 처형 및 추방 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저항 세력, 반군 및 인간 이하의 존재(예: 프랑스 (예: 마이예 학살) 및 폴란드))
- 산업전, 제1차 세계 대전 및 제2차 세계 대전 중 각 참전국의 자국 전선에서
- 민간인 및 포로를 군사 작전을 위한 강제 노동으로 사용 (예: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소련 및 독일의 다른 국가 강제 노동자의 대규모 사용 (일본의 노예제 및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통치 하의 강제 노동 참조))[7]
- 항복 거부 (즉, 포로를 사로잡지 않음) (예: 제2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의 코만도 명령)
산업혁명 이전의 전쟁에서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의 능력과 군대의 규모가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산업이나 민중은 전쟁과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시대와 기술 혁신은 전쟁의 질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3. 총력전의 역사
"총력전"이라는 용어는 1935년 독일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쓴 제1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Der totale Krieg"("총력전쟁")이라는 표현으로 처음 등장한다.[65] 몇몇 저자들은 총력전 개념을 이보다 훨씬 전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저작 전쟁론에서 쓰인 "absoluter Krieg"(절대전쟁)에서도 찾았다고 하지만, 다른 이들은 이것이 클라우제비츠의 개념과는 다른 해석이라고도 한다.[12]
미국 공군(United States Air Force) 장군 커티스 르메이는 핵무기 개발에 발맞춰 원자시대에 맞게 총력전 개념을 수정했다. 1949년 그는 원자시대의 총력전은 국가의 모든 핵무기를 동원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국가를 죽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66]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최근에 체결된 1864년 제네바 협약을 위반하여 벌어졌는데, 당시 "유럽 여론은 민간인과 군인 모두 전쟁에서 인도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22]
1864년 12월 24일, 미합중국 남북 전쟁 당시 참모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군 장군 윌리엄 테컴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은 북군이 "적대적인 군대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국민과 싸우고 있으며, 조직된 군대뿐만 아니라 노인과 젊은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전쟁의 혹독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고 썼는데, 이는 조지아주에서 광범위한 인프라 파괴를 초래한 셔먼의 애틀랜타 진격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16]
이스트 미시간 대학교 학자들이 집필한 ''Cengage Advantage Books: World History'' 교과서는 총력전이 "전통적으로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관련되어 있지만… 총력전의 사례는 20세기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근대적 무기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쟁에서는,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고도로 훈련된 병사의 능력이라는 「질」과, 군대의 규모와 병력이라는 「량」을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었다. 그곳에서는 군대가 용병으로 구성되고 통제가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면, 산업이나 민중은 전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의 대량생산 시대와 기술혁신은 전쟁의 질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3. 1. 18세기와 19세기
프랑스 혁명 전쟁은 대륙 유럽에 대규모 징병과 같은 총력전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19][20] 새로운 공화국은 강력한 유럽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위협받고 있었고, 레베 앙 마스(대규모 징병)를 포함한 전례 없는 전쟁 노력에 국가 전체의 자원을 사용했다. 1793년 8월 23일까지 프랑스 전선 부대는 약 80만 명으로 증가했고, 모든 부대를 합치면 150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서구 역사상 100만 명이 넘는 군대가 동원된 최초의 사례였다.levée en masse프랑스어는 다음과 같이 선언되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의 보급을 어렵게 하고 효과적으로 방해하기 위해 기반 시설과 농업을 파괴하면서 후퇴했다. 1813년 독일 전선에서만 연합군은 100만 명에 가까웠고, 2년 후 백일 천하 동안 프랑스는 약 250만 명의 완전 동원령을 내렸다(하지만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배할 당시에는 이 중 최대 5분의 1만이 동원되었다). 1808년부터 1814년까지 장기간 지속된 반도 전쟁에서는 약 30만 명의 프랑스 군대가 수십만 명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정규군 외에 거대하고 지속적인 게릴라전에 끊임없이 묶여 있었고, 결국 프랑스군 사망자는 반도 전쟁에서만 30만 명에 달했다.[21]
1779년의 설리번 원정은 총력전의 한 예였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성왕당원 세력이 뉴욕주 북부의 외딴 변경 지역에서 미국 농민들을 학살하고 가축을 죽이며 건물을 불태우자, 조지 워싱턴 장군은 존 설리번 장군에게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그들의 정착촌을 완전히 파괴하고 황폐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원정군이 "14개의 마을과 대부분의 무성하게 자란 옥수수 밭"을 황폐화시켰지만, 작은 전투는 단 한 번만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캐나다로 도망쳐 영국군의 지원을 받았고, 전쟁 후에도 그곳에 남았다.[23][24][25]
셔먼의 애틀랜타 함락 작전(Sherman's March to the Sea)은 1864년 11월 15일부터 12월 21일까지 진행된 미국 남북 전쟁의 일부로, 때때로 셔먼이 "'''가혹한 전쟁'''"이라고 부른 총력전의 예로 여겨진다. 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셔먼의 작전이 주로 군사 목표를 공격했고 셔먼이 병사들에게 민간인 주택을 보호하라고 명령했던 점을 들어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26]
3. 2. 20세기
"총력전"이라는 단어는 1935년 독일 장군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쓴 제1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Der totale Krieg"("총력전쟁")이라는 표현으로 처음 등장한다.[65]커티스 르메이는 핵무기 개발에 발맞춰 원자시대에 맞게 총력전 개념을 수정했다. 1949년 그는 원자시대의 총력전은 국가의 모든 핵무기를 동원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국가를 죽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66]
근대적 무기 등장 이전에는 고도로 훈련된 병사의 능력(질)과 군대 규모 및 병력(양)이 군사력을 좌우했다. 당시에는 군대가 용병으로 구성되어 통제가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면 산업과 민중은 전쟁에서 거리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전차와 항공기등장으로, 대량생산과 기술혁신은 전쟁의 질을 크게 바꾸었고, 국가에 큰 부담이 되었다.
3. 2. 1. 제1차 세계 대전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시대와 기술혁신은 전쟁의 질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여전히 육군 병력이 군사력의 주요 원천이었다. 하지만 기관총을 갖춘 견고한 야전 축성과 국내 물자·인원 수송에 있어서 철도의 효과로 인해 방어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되면서 필연적으로 장기전으로 발전했다.[64]이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장 이외에서 대량으로 필요하게 된 무기·탄약 생산 및 보급과 관련된 산업 시설, 인원 및 물자 수송과 관련된 철도와 터널, 일반 선박 등이 차츰 공격 대상이 되어 갔다.[64]
방어 측 우위의 전황, 집중 사격과 참호전이라는 새로운 전술, 주전장 이외의 공격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지금까지 하나의 회전에서 소모되는 것과 같은 막대한 자원과 병력이 소비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64]
- 탄약·연료 소비량 증가
- 무기 파괴·소모 증가
- 전투원 사상자 증가
- 민간 시설·비전투원 피해 증가
- 이러한 증가와 전쟁 장기화에 따른 전쟁 비용의 급격한 증가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명확한 증가의 연쇄는 막대한 소비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특히 전비 증가에 있어서는 패전의 의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국가들은 참전국 전체의 전쟁 비용·손해에 대한 책임을 지는 형태로, 패전국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난 배상 책임을 지게 되었다.[64]
이 4년간의 전쟁을 통해 전사자 900만 명, 부상자 2200만 명, 그 외 비전투원 1000만 명이 사망했다.[64]
3. 2. 2. 제2차 세계 대전
나치 독일은 전격전 개념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1943년 2월 18일, 베를린 스포츠궁전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총력전 연설이 있기 전까지 나치 독일은 공식적인 총력전 상태에 있지 않았다.[69]1942년 3월, 요제프 괴벨스와 아돌프 히틀러는 국내 전선 전체를 전시체제에 두는 괴벨스의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히틀러는 괴벨스가 제시한 개념에 동의했지만 실질적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1942년 10월,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경제장관 발터 풍크와 독일노동전선의 총재 로베르트 라이는 괴벨스를 지지하며 히틀러가 행동을 개시하도록 압박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표면적으로만 동의할 뿐 계속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1942년 휴가 시즌 이후, 히틀러는 그의 개인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을 요제프 괴벨스와 국가수상부장 한스 라머스와 함께 주어진 질의들을 논의하도록 보냈다. 결과적으로 보어만은 괴벨스에게 필요한 칙령의 초안을 작성하도록 했다. 히틀러는 괴벨스와 총력전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 지 거의 1년 뒤인 1943년 1월 13일, 해당 법령에 서명했다. 법안이 발효됨에 따라 마르틴 보어만, 한스 라머스, 빌헬름 카이텔이 감독자로, 요제프 괴벨스와 알베르트 슈페어를 자문으로 하는 운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한편 히틀러는 이러한 총력전 계획에 대해 무관심했다. 다음 달 2월, 베를린 스포츠궁전에서 열린 나치당 집권 10주년 기념 집회에서 요제프 괴벨스는 유명한 "총력전 연설"을 한다.[69]
제2차 세계 대전은 현대의 전형적인 총력전이었다.[32][33][34][35] 모든 참전국이 자원을 총동원한 수준, 전투가 벌어진 전장, 징병을 통해 규모가 커진 육군, 해군, 공군, 비전투원(및 비전투원의 재산)을 적극적으로 공격한 행위, 부수적 피해에 대한 일반적인 무관심, 그리고 교전국들의 무제한적인 목표는 전례 없고 극복할 수 없는 다대륙 규모의 총력전을 보여주었다.[36]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본격적으로 국가 총력전으로 이행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성능과 수량 모두 부족했던 전차와 항공기 등의 근대적 병기가 큰 위력을 발휘했고, 전쟁에서 더욱 강력하고 대량의 병기, 생산력, 병참, 기술력, 자금력이 요구됨에 따라, 국력과 국부의 대부분을 민간을 압박해서라도 전쟁에 할당해야 할 필요성에 몰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쟁 자체가 국력과 국부를 다 써버리는 형태가 되었기에 전쟁의 성격은 일변, 교전국의 국력과 국부를 파괴하고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폭격 등에 의한 산업 및 생활 기반의 파괴와 통상파괴와 같은 보급로의 파괴 등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게 되어, 필연적으로 민간인 희생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해도, 패전하면 점령·영토 상실과 참전국 전체의 전쟁 비용·손실을 부담하는 형태로 천문학적인 수치라고 할 수 있는 막대한 배상금이라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어느 나라도 일단 시작한 전쟁은 이길 때까지 그만둘 수 없었고, 어느 한쪽이 항복할 때까지 자국의 국력을 다 써서 상대국의 국력을 섬멸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전쟁 중의 전략적 필요성과 전쟁 후 예상되는 점령·배상 회피라는 양면에서 강력하게 지지받았던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선전으로 이용되었다.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일본제국은 약 100만 명 이상의 무임금 노역자들을 이용하였고,[67] 1,800만 명의 동아시아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였다.[68]
3. 2. 3. 냉전 시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제1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처음 사용한 "총력전" 개념은, 커티스 르메이에 의해 핵무기 시대에 맞게 수정되었다. 1949년 르메이는 국가의 모든 핵무기를 동원한 단 한 번의 공격으로 "국가를 죽이는 것"이 핵 시대의 총력전이라고 정의했다.[66]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산업 국가들은 핵무기의 파괴력 때문에 이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58] 핵무기의 빠른 배치는 국가 자원의 완전한 동원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었다.
1950년대 말,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 양측은 서로에게 수천 개의 핵무기를 겨누었다. 양측의 파괴력 균형은 상호확증파괴(MAD) 교리로 나타났는데, 이는 한쪽의 핵 공격이 상대방의 핵 반격을 초래하여 결국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부러워할"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야기할 것이라는 개념이다.[59][60]
냉전 기간 동안, 두 초강대국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대리전쟁, 군비 증강, 외교적 대치를 통해 갈등했다. 베트남 전쟁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대리전의 예시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61] 이란-이라크 전쟁,[6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63] 등이 총력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4. 총력전과 대한민국
총력전은 대한민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개념이다.
5. 총력전의 억제
국제 사회는 역사적으로 투쟁과 협조,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왔지만, 인류는 전쟁 없는 영원한 평화를 추구해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유엔이라는 세계기구가 설립되어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전후 동서 냉전과 국제 정치 구조의 양극화,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다원화되는 과정에서 유엔은 그 주요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의 보편적 집단 안보 체제는 유명무실해지고, 지역적 집단 안보 기구가 많이 창설되었으나, 이는 대립 진영 간의 동맹과 반동맹을 촉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존재는 파국적인 제3차 세계 대전의 발생을 억제하는 도의적 안전판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무기의 발전은 '공포의 균형'을 낳아 상호 군사력 억제 효과를 가져왔고, 이는 세계 대전으로의 확전을 막는 자제 기능으로 작용했다.[58]
1950년대 말까지, 서방 세계와 소련 간의 냉전 이념 대립은 양측이 서로를 향해 수천 개의 핵무기를 겨누는 상황을 초래했다. 전략적으로 양측의 파괴력 균형은 상호확증파괴(MAD) 독트린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한 초강대국의 핵 공격이 다른 초강대국의 핵 반격을 초래하여 결국 양측 모두 파멸할 것이라는 개념이다.[59] 이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말처럼 "살아남은 자는 죽은 자를 부러워할" 정도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60]
냉전 동안, 두 초강대국은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 했다. 양측 모두 그러한 충돌이 핵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대신 초강대국들은 대리 전쟁, 군사력 증강, 외교적 대치를 통해 갈등을 겪었다. 베트남 전쟁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이 대리 전쟁의 예시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1948-1949),[61]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6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현재)[63] 등이 "총력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Total war
https://www.oxfordre[...]
2022-03-03
[2]
논문
The Moral Dilemma of Atomic Warfare
http://www.otterbein[...]
2006-03-01
[3]
웹사이트
Rivista n.25 – Rivista Italiana di Conflittologia
https://www.conflitt[...]
2015-05-01
[4]
간행물
Guerra Totale: interpretazione delle quattro dimensioni di Stig Förster ed il radicalecambiamento della società post-conflitto
2015-01-01
[5]
웹사이트
https://www.conflitt[...]
[6]
간행물
Guerra Totale: interpretazione delle quattro dimensioni di Stig Förster – Il radicale cambiamento della società post-conflitto
Cuam University Press Edizioni Labrys
2015-01-01
[7]
서적
On the Road to Total War: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 (Publications of the German Historical Institute)
German Historical Institute
2002-08-22
[8]
논문
Total War
http://www.jstor.org[...]
2008-01-01
[9]
웹사이트
Controversy: Total War / 1.0 / handbook
https://encyclopedia[...]
2024-09-22
[10]
서적
The "total" war
https://archive.org/[...]
London : Friends of Europe
1936-01-01
[11]
서적
Erich Ludendorff Der Totale Krieg ( 1935, 130 S., Scan, Fraktur)
https://archive.org/[...]
1935-01-01
[12]
서적
Clausewitz in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13]
서적
The shadows of total war: Europe, East Asia, and the United States, 1919–1939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Defeated flesh: welfare, warfare and the making of modern Franc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5]
서적
On the Road to Total War: The American Civil War and the German Wars of Unification, 1861–1871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
웹사이트
Letter of William T. Sherman to Henry Halleck, December 24, 1864
https://cwnc.omeka.c[...]
Civil War Era NC
2020-03-28
[17]
서적
The bomb: a life
https://books.google[...]
Harvard
[18]
서적
World History: Since 1500: The Age of Global Integration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1-01-01
[19]
서적
The First Total War: Napoleon's Europe and the Birth of Warfare as We Know It
https://books.google[...]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7-01-19
[20]
서적
The First Total War? The Place of the Napoleonic Wars in the History of Warfare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3-01-01
[21]
논문
The Concept of 'Total War' in the Revolutionary – Napoleonic Period
2008-01-01
[22]
블로그
Was the Franco-Prussian War a Modern or Total War?
https://francehistor[...]
2018-06-03
[23]
웹사이트
From George Washington to Major General John Sullivan, 31 May 1779
https://founders.arc[...]
National Archives
[24]
서적
A Well-Executed Failure: The Sullivan Campaign against the Iroquois, July–September 1779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1997-01-01
[25]
서적
Understanding U.S. Military Conflicts through Primary Sources
ABC-CLIO
2016-01-01
[26]
서적
Sherman's March in Myth and Memory
Rowman and Littlefield Publishers
[27]
서적
The first air campaign, August 1914 – November 1918
Da Capo Press
1996-01-01
[28]
웹사이트
World War One: Music hall entertainers with the 'X factor'
https://www.bbc.com/[...]
2023-09-07
[29]
웹사이트
The National Archives - 'The tragedy of the shells'
https://blog.nationa[...]
2024-12-12
[30]
논문
Propaganda and Caricature in the First World War
[31]
서적
Facing total war: German society, 1914–1918
1984-01-01
[32]
서적
Stress of War, Conflict and Disaster
https://books.google[...]
Academic Press
2010-01-01
[33]
논문
Total Victory Through Total War
https://publications[...]
2014-04-15
[34]
논문
Did The Second World War, More So Than The First World War, Exemplify The Character Of 'Total War'?
https://www.mindef.g[...]
2022-01-01
[35]
논문
DID THE SECOND WORLD WAR, MORE SO THAN THE FIRST WORLD WAR, EXEMPLIFY THE CHARACTER OF 'TOTAL WAR'?
https://www.mindef.g[...]
2024-03-01
[36]
서적
Taste of war: World War II and the battle for food
Penguin
[37]
서적
Japan's War Economy
[38]
간행물
World Economic And Social Survey 2004: International Migration
[39]
웹사이트
Japan's atrocities of conscripting and abusing north China draftees after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http://lcweb2.loc.go[...]
Library of Congress
2007-02-09
[40]
웹사이트
The People's War: Britain 1939–45
https://archive.org/[...]
[41]
웹사이트
The Few
http://www.winstonch[...]
The Churchill Centre
2014-09-23
[42]
서적
[43]
서적
War and Economy in the Third Reich
Clarendon Press
[44]
기타
Statement from the banner in Sportpalast
Bundesarchiv
1943-02-18
[45]
서적
Goebbels
Harcourt Brace
[46]
논문
The End of the Blitzkrieg
[47]
웹사이트
Canada and the war : manpower and a total war effort : national selective service : broadcast by Right Hon. W.L. MacKenzie King, M.P. Prime Minister of Canada
https://searcharchiv[...]
2023-02-13
[48]
뉴스
Leaders mourn Soviet wartime dead
http://news.bbc.co.u[...]
2015-08-05
[49]
서적
Deutsche militärische Verluste im Zweiten Weltkrieg
Oldenbourg
[50]
서적
Stalingrad
Penguin books
[51]
웹사이트
Roosevelt: The soldier of freedom (1940–1945). Vol. 2
https://archive.org/[...]
[52]
서적
Americans at War: Society, Culture, and the Homefront
[53]
서적
Freedom's Forge: How American Business Produced Victory in World War II
Random House
[54]
서적
The world since 1945: a history of international relations
Lynne Rienner Publishers
[55]
서적
The Bombers
Hutchins & Co
[56]
웹사이트
The Casablanca Conference, 1943
https://history.stat[...]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2017-01-19
[57]
웹사이트
Judicial Overreach
https://web.archive.[...]
2008-05-29
[58]
웹사이트
World War II (1939–1945)
https://www2.gwu.edu[...]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2017-01-19
[59]
뉴스
How did we forget about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https://www.bbc.com/[...]
2017-01-19
[60]
웹사이트
1257.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1894–1971). Respectfully Quoted: A Dictionary of Quotations. 1989
http://www.bartleby.[...]
2015-08-05
[61]
논문
Israel's 1948 War of Independence as a Total War
[62]
논문
Growing up in the Iran–Iraq war and preferences for strong defense
[63]
웹사이트
Russian Total War in Ukraine: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https://rusi.org/exp[...]
2023-03-19
[64]
서적
[新版] 昭和史
岩波書店
[65]
서적
Clausewitz in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66]
서적
The bomb: a life
https://books.google[...]
Harvard
[67]
간행물
World Economic And Social Survey 2004: International Migration
[68]
웹사이트
Japan's atrocities of conscripting and abusing north China draftees after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http://lcweb2.loc.go[...]
Library of Congress
2007-02-09
[69]
서적
Goebbels
Harcourt Brac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