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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 (나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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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로스 2세 (나바라)는 에브뢰 백작 필리프와 나바라 여왕 조안 2세의 아들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외교적, 군사적 갈등을 겪었다. 그는 프랑스 원수 암살을 계획하고,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 등 변덕스러운 행보를 보였으며, 프랑스 왕 샤를 5세와의 갈등으로 노르망디 영토를 상실했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나바라의 이익을 추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프랑스 왕위를 포기했다. 그는 말년에 사고로 인해 사망했으며, 그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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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2세 (나바라)
기본 정보
군주 칭호나바라 국왕
통치 기간1349년 10월 6일 – 1387년 1월 1일
대관식1350년 6월 27일 팜플로나 대성당
섭정필리프 6세 (1349–1350)
장 2세 (1350–1352)
이전 군주호아나 2세
다음 군주카를로스 3세
출생일1332년 10월 10일
출생지에브뢰
사망일1387년 1월 1일 (향년 54세)
사망지팜플로나
매장지팜플로나 대성당
별칭악인 (프랑스어: le Mauvais, 스페인어: el Malo)
가문
왕가에브뢰
결혼 및 자녀
배우자잔 드 프랑스 (1352년 결혼, 1373년 사망)
자녀마리, 간디아 공작 부인
카를로스 3세 "엘 노블레" (고귀한 자)
페드로, 모르탱 백작
호아나, 잉글랜드 왕비
부모
아버지펠리페 3세
어머니호아나 2세

2. 생애

카를로스 2세는 에브뢰의 필리프와 나바라의 조안 2세의 아들로, 양친 모두 프랑스 왕족(카페 왕조) 혈통을 이어받았다. 어머니 조안 2세가 프랑스 왕 루이 10세의 유일한 적녀였기에, 카를로스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강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일생 동안 프랑스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다. 1349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나바라의 왕이 되었으나, 그의 주된 관심사는 프랑스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왕위 계승권 확보에 있었다.[1]

그는 프랑스 왕 장 2세의 총신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을 사주하고(1354년),[3]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거나 파기하는 것을 반복하며 프랑스 왕가를 압박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이고 때로는 배신에 가까운 행보는 '악인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했다. 장 2세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투옥되기도 했으나,[5]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포로로 잡힌 혼란을 틈타 에티엔 마르셀 등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파리에서 권력을 잡으려 시도하기도 했다.[7]

1361년에는 부르고뉴 공작위 계승권을 주장했으나 장 2세에게 돌아가면서 실패했고,[8] 1364년 코슈렐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패배하면서 프랑스 내에서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9] 이후에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고 프랑스 왕 샤를 5세 암살을 기도하는 등[10] 끊임없이 프랑스 및 주변국 정세에 개입하며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 했으나, 1378년 음모 발각으로 프랑스 내 영지를 모두 상실하고 1379년 브리오네스 조약으로 카스티야와 프랑스에 굴복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었다.[10]

말년은 불운했다. 1387년 팜플로나에서 병 치료 중 부주의로 인한 화재 사고로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2][3][4] 그의 생애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집착과 끊임없는 배신, 음모로 점철되었으며, 결국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지 못한 채 비극적으로 끝났다.

2. 1. 초기 생애

카를로스는 에브뢰에서 에브뢰의 필리프와 나바라의 조안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필리프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사촌이었고, 어머니 조안은 프랑스 왕 루이 10세의 유일한 딸이었다. 카를로스 본인이 언급했듯이 그는 "양쪽 모두 백합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 영토 상속에 있어서는 제한적인 권리만을 가졌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17세에 왕으로 선포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성장했으며, 즉위 당시에는 나바라의 로망스어를 구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1349년 10월, 카를로스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그는 나바라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즉위 서약을 하고 성유를 받기 위해 1350년 여름 나바라를 방문했다. 이때 처음으로 즉위 서약이 전통적인 라틴어나 옥시탄어가 아닌 나바라-아라곤어로 이루어졌다. 카를로스는 통치 초기 12년 동안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는 나바라를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자원의 공급처 정도로 여겼다.[1] 그는 어머니를 통해 필리프 4세의 정당한 상속자이며, 아버지를 통해 카페 왕조의 후손이라는 점을 내세워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인정받기를 오랫동안 원했다. 그러나 부계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자신보다 우선권을 가진 발루아의 사촌들로부터 왕위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1]

2. 2.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과 갈등

카를로스 2세는 에브뢰에서 에브뢰의 필리프와 나바라의 조안 2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사촌이었고, 어머니 조안은 프랑스 왕 루이 10세의 유일한 적녀였다. 카를로스 본인이 언급했듯이 양쪽 부모 모두 프랑스 왕족, 즉 '백합' 가문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영토 상속에서는 제한적인 부분만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17세에 왕으로 선포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성장했으며, 즉위 당시에는 나바라의 로망스어를 구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349년 어머니 조안 2세가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1350년 여름 나바라를 방문하여 즉위 서약을 하고 성유를 받았다. 이때 처음으로 서약은 전통적인 라틴어나 옥시탄어가 아닌 나바라-아라곤어로 이루어졌다. 그는 통치 초기 12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나바라를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야망을 위한 자원 공급처로 여겼다.[1] 카를로스는 어머니를 통해 필리프 4세의 직계 후손이자, 아버지를 통해 카페 왕조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인정되기를 오랫동안 갈망했다. 그러나 살리카 법에 기반한 부계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사촌인 발루아 왕가가 우선권을 가졌기에 왕위를 직접적으로 차지하기는 어려웠다.[1]

카를로스 2세는 아버지로부터 에브뢰 백작령을, 어머니로부터 피레네 산맥 기슭의 나바라 왕국 외에도 코탕탱 반도 일부, 모르탕 백작령, 벡상의 퐁투아즈, 보몽 쉬르 우아즈, 아스니에르 쉬르 우아즈 등 프랑스 내 여러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 영지들은 1328년 그의 어머니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 및 샹파뉴브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획득한 것이었다. 루이 10세의 외손자로서 카를로스는 프랑스 왕위를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또한 에브뢰 가문은 필리프 3세의 남계 후손이었기에, 발루아 왕가의 대가 끊어질 경우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로 여겨졌다.

프랑스 왕가는 이러한 카를로스 2세의 잠재적 위협을 인지하고 초기에는 회유책을 사용했다. 그의 누나 블랑슈는 프랑스 왕 장 2세의 후처가 되었고, 카를로스 자신도 프랑스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장 2세는 1352년 자신의 딸 잔을 카를로스 2세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 2세는 점차 프랑스 왕위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야심은 프랑스 왕가와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이어졌다. 1354년 1월 8일,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왕의 총신이자 코네타블(왕군 사령관)인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암살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질 예정이었던 앙굴렘 백작령을 라 세르다가 차지했거나, 궁정 내에서의 대우 문제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사건은 장 2세의 보복을 불렀고, 카를로스 2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모색하며 맞섰다. 결국 양측은 망트 조약을 체결하여 카를로스 2세는 처벌을 면하고 오히려 영토를 확장했지만, 이는 프랑스 왕가와의 불신과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카를로스 2세는 잉글랜드와의 동맹 가능성을 내세워 프랑스 왕가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거나, 프랑스 내부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했다. 또한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부르고뉴 공국 계승권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프랑스 왕가와 대립하는 등, 그의 통치 기간 내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2. 2. 1.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 사건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왕 장 2세의 사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나바라 여왕이 샹파뉴브리를 포기하는 대가로 얻었으나 프랑스 왕가에 빼앗겼다고 생각한 앙굴렘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이 영지가 장 2세의 총신이자 코네타블(왕군 사령관)인 샤를 드 라 세르다에게 주어지자, 카를로스 2세는 그에 대한 강한 질투심과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궁정 내에서 자신의 대우가 라 세르다보다 낮아진 것에 대한 분노도 암살의 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1353년 크리스마스에 파리에서 샤를 드 라 세르다와 공개적으로 다툰 후, 카를로스 2세는 그의 암살을 계획했다. 1354년 1월 8일, 레글 마을에서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필리프가 이끄는 이들에 의해 샤를 드 라 세르다는 살해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이 암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숨기지 않았으며, 며칠 지나지 않아 장인인 장 2세에게 대항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군사적 동맹을 모색했다.

장 2세는 처음에는 보복으로 카를로스 2세의 영지인 에브뢰나바라를 침공하려 했으나, 카를로스 2세가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우려하여 태도를 바꾸었다. 결국 1354년 2월 22일, 망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해 카를로스 2세는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게 되었으며, 보몽 르 로제 백작령과 코탕탱 반도의 일부를 추가로 획득하여 노르망디 지역에서의 영지를 확장했다. 겉으로는 장 2세와 화해한 모양새였지만, 이 과정에서 프랑스 침공을 위해 카를로스 2세와 협력하려던 영국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카를로스 2세는 이후에도 종종 영국과의 동맹 가능성을 내세워 프랑스 왕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외교적 수완을 보였다.

카를로스 2세와 장 2세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1354년 말, 장 2세는 노르망디에 있는 카를로스 2세의 영토를 침략했고, 카를로스 2세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와 접촉하며 영국과의 관계를 다시 모색했다. 그는 1354년에서 1355년 겨울 아비뇽에서 열린 영국과 프랑스 간의 평화 협상에 에드워드 3세의 사절단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다시 한번 입장을 바꾸어 영국의 재침공 위협을 이용하여 장 2세와 화해하는 데 합의했고, 이는 1355년 9월 10일 발로뉴 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합의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카를로스 2세는 왕세자(도팽)인 미래의 샤를 5세와 가까워지며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1355년 12월에는 장 2세를 폐위하고 도팽을 왕위에 앉히려 한 것으로 추정되는 실패한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았다. 장 2세는 아들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임명하여 상황을 통제하려 했지만, 카를로스 2세는 계속해서 도팽에게 조언하며 프랑스 왕정에 대한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356년 4월 5일, 장 2세와 그의 지지자들은 루앙에 있는 도팽의 성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고 투옥했다. 그의 주요 지지자 4명(그중 2명은 라 세르다 암살에 가담했던 인물)은 참수되었고 시신은 쇠사슬에 매달렸다. 카를로스 2세는 파리로 이송되어 더 안전한 감옥으로 옮겨지며 수감 생활을 시작했다.

2. 2. 2. 잉글랜드와의 동맹과 파기

카를로스 2세는 1352년 프랑스 왕 장 2세의 딸인 발루아의 잔과 결혼했다.[1] 그는 프랑스 원수이자 왕의 총신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앙굴렘 영지를 받게 되자 이를 질투했다. 카를로스는 이 영지가 원래 자신의 어머니 나바라 여왕 잔 2세의 소유였으나 프랑스 왕에게 빼앗겼다고 여겨 자신이 상속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2]

1354년 1월 8일, 카를로스 2세는 노르망디 레글에서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암살하도록 동생 롱게빌 백작 필리프에게 지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암살의 원인은 앙굴렘 백작령 문제 또는 라 세르다보다 낮은 대우에 대한 불만 때문으로 추정된다. 카를로스는 암살에 자신의 역할이 있음을 숨기지 않았고, 장인인 장 2세의 보복에 대비해 잉글랜드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3] 장 2세는 처음에는 사위의 영지를 공격하려 했으나, 카를로스가 에드워드 3세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입장을 바꾸었다. 결국 1354년 2월 22일 망트 조약이 체결되어 카를로스는 라 세르다 암살 사건을 문제 삼지 않는 대가로 영토를 확장하고 장 2세와 표면적으로 화해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던 잉글랜드는 카를로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이는 카를로스가 잉글랜드와의 동맹 가능성을 이용해 프랑스로부터 양보를 얻어낸 첫 사례였다.

그러나 카를로스와 장 2세의 관계는 곧 다시 악화되었다. 1354년 말, 장 2세는 노르망디에 있는 카를로스의 영토를 침략했다. 이에 카를로스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와 함께 에드워드 3세의 사절로서 1354년부터 1355년 겨울까지 아비뇽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평화 협상에 참여하며 다시 한번 입장을 바꾸었다. 잉글랜드의 재침공 위협이 커지자 장 2세는 다시 카를로스와 화해하기로 했고, 이는 1355년 9월 10일 발로뉴 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합의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당시 도팽(왕세자)이었던 미래의 샤를 5세와 가까워지며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1355년 12월 장 2세를 폐위시키고 도팽을 왕위에 앉히려던 실패한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았다.[4] 장 2세는 아들인 도팽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임명하여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카를로스는 계속해서 도팽에게 노르망디 통치에 대해 조언하며 관계를 유지했다.

카를로스가 프랑스 왕에 대항해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자, 1356년 4월 5일 장 2세는 예고 없이 도팽의 루앙 성을 급습하여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고 투옥했다. 그의 주요 지지자 4명(그중 2명은 라 세르다 암살범)은 참수당하고 시신은 쇠사슬에 매달렸다. 카를로스는 파리로 이송되어 여러 감옥을 전전했다.[5]

그러나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잉글랜드 군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357년 11월 9일, 파리 상인 조합의 대표로 삼부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에티엔 마르셀 등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카를로스 2세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백년 전쟁 기간 동안 카를로스는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르셀과 손을 잡거나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는 등 프랑스 왕실을 위협하는 행보를 보였다. 한편으로는 자크리의 난 진압에 참여한 귀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1358년 마르셀의 도움으로 파리 총사령관 격인 '성대'(Capitaine général)가 되었으나, 그의 군대가 약탈을 일삼아 파리 시민들의 반감을 샀고 결국 파리에서 도망쳤다. 7월 31일 마르셀마저 살해당하면서 파리는 왕세자 샤를(도팽)이 장악했다. 프랑스 내 주도권을 상실한 카를로스 2세는 1359년 8월 21일 왕세자와 퐁투아즈 조약을 맺고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7]

1361년, 그의 사촌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카를로스 2세는 자신이 로베르 2세의 장녀 마르그리트의 손자임을 내세워 부르고뉴 공작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공작위는 로베르 2세의 차녀 잔의 아들인 장 2세에게 돌아갔고, 부르고뉴는 왕령에 편입되었다가 이후 장 2세의 막내아들 필리프 2세에게 넘어갔다.[8]

이에 불만을 품은 카를로스 2세는 1364년 부르고뉴 공작위 계승 문제를 다시 제기하며 새로 즉위한 샤를 5세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다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5월 16일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코슈렐 전투에서 카를로스 2세 휘하의 잉글랜드-나바라 연합군이 프랑스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에게 패배했다. 결국 카를로스 2세는 1365년 생 드니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 요구를 포기했고, 같은 해 3월 아비뇽에서 샤를 5세와 별도 조약을 맺어 부르고뉴 공작위 계승권도 포기했다.[9] 이 조약의 대가로 그는 센 강 하류의 망트, 묄랑, 롱그빌 백작령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노르망디 영지를 포기하는 대신, 남프랑스의 몽펠리에 영주권을 받았다.

2. 2. 3. 장 2세 체포와 석방

카를로스 2세와 장 2세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도팽 샤를(훗날 샤를 5세)과 가까워졌고, 1355년 12월에는 장 2세를 폐위시키고 도팽을 왕위에 앉히려 했던 실패한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았다.[7] 장 2세는 아들인 도팽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임명하여 상황을 수습하려 했으나, 카를로스 2세는 계속해서 도팽에게 노르망디 통치에 대해 조언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카를로스 2세가 국왕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자, 1356년 4월 5일 장 2세와 그의 지지자들은 예고 없이 도팽의 루앙 성에 들이닥쳐 카를로스 2세를 체포하고 투옥했다. 그의 주요 지지자 4명(그중 2명은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에 가담했던 인물)은 참수되었고 시신은 쇠사슬에 매달렸다. 카를로스 2세는 파리로 이송되어 여러 감옥을 전전하며 구금되었다.[7]

그러나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잉글랜드 군대에 포로로 잡히면서 상황이 변했다. 왕의 부재 속에서 프랑스는 혼란에 빠졌고, 삼부회가 국정 운영과 개혁을 시도했다. 카를로스 2세의 지지자들은 삼부회 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도팽에게 그의 석방을 끊임없이 압박했다. 한편, 카를로스 2세의 동생인 나바라의 필리프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 침공군에 합류하여 노르망디에서 도팽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마침내 1357년 11월 9일, 카를로스 2세는 장 드 피키니가 이끄는 아미앵 출신 30명의 도움으로 아를뢰 성 감옥에서 탈출했다.[7]

아미앵에서 영웅으로 환영받은 카를로스 2세는 삼부회의 초청으로 파리에 입성했으며, 많은 지지자들과 함께 '새로 즉위한 군주처럼' 환영받았다. 그는 11월 30일 대중 연설을 통해 자신을 투옥한 이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파리 상인 대표였던 에티엔 마르셀은 도팽이 저항하기 어려운 '나바라 왕에 대한 정의 요구'를 주도했다. 카를로스 2세는 투옥 기간 동안 자신의 영지에 가해진 모든 피해에 대한 배상, 자신과 지지자들의 모든 범죄에 대한 사면, 루앙에서 처형된 동료들의 명예로운 장례를 요구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북부 프랑스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만들어 줄 노르망디 공작령과 샹파뉴 백국을 요구했다.

도팽은 사실상 무력했지만, 카를로스 2세와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가 평화 협정에 근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한 카를로스 2세는 파리의 모든 감옥을 열어 혼란을 조장하고, 노르망디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그가 없는 동안 도팽은 군대를 소집하려 했다. 카를로스 2세는 1358년 1월 10일 루앙 대성당에서 처형된 추종자들을 위한 장엄한 장례식을 치르고, 잉글랜드-나바라 연합군을 이끌고 도팽의 수비대에 맞서며 사실상 내전을 선포했다.

이후 카를로스 2세는 파리에서 반란을 일으킨 에티엔 마르셀과 연계하고, 자크리의 난 진압에 참여하는 등 복잡한 행보를 보였다. 1358년 마르셀의 도움으로 파리 총사령관(성주)이 되었으나, 그의 군대가 약탈을 일삼아 파리 시민들의 반감을 사 도망쳤다. 7월 31일 마르셀이 시민들에게 살해당하자 도팽은 파리를 장악했다. 결국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에서의 주도권을 잃고 1359년 8월 21일 도팽과 퐁투아즈 조약을 맺어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단절해야 했다.[7]

2. 2. 4. 부르고뉴 공위 계승 분쟁

1361년, 카를로스 2세의 육촌인 필리프 1세 드 부르고뉴 공작이 자녀 없이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1306년 사망)의 장녀였던 할머니 마르그리트를 통해 상속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8] 하지만 공국은 피의 근친성(consanguinity)을 근거로 로베르 2세의 차녀 잔의 아들인 프랑스 국왕 장 2세에게 돌아갔다. 장 2세는 공국을 왕령으로 편입시킨 뒤, 자신이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 필리프 2세에게 물려주었다.[8]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다면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있었을 것이라 기대했던 카를로스에게 이 결정은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의 주장을 호소했으나 실패했고, 1361년 11월 나바라로 돌아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362년 5월 노르망디에서 지지자들의 봉기를 계획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363년, 카를로스는 두 개의 군대를 조직하여 1364년에 프랑스를 공격할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하나는 해로를 통해 노르망디로 보내고, 다른 하나는 동생 루이 드 나바라 휘하의 가스코뉴인들과 대 용병대(Great Company)를 중부 프랑스에서 합류시켜 부르고뉴를 침공, 프랑스 국왕을 양쪽에서 압박하려는 구상이었다. 1364년 1월, 카를로스는 아쟁에서 에드워드 흑태자를 만나 아키텐 공국 영토를 통과하는 군대의 통행 허가를 얻었다. 흑태자는 카를로스의 새로운 군사 고문이자 자신의 친구인 장 3세 드 그라일리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승인했다. 장 3세는 카를로스의 누이와 약혼한 상태였으며, 노르망디로 향하는 군대를 이끌기로 되어 있었다. 1364년 3월, 장 3세는 카를로스의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진격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하기 위해 런던에 가 있었고, 프랑스 방어는 다시 도팽 샤를(훗날 샤를 5세)에게 맡겨졌다. 노르망디에는 이미 롤르부아즈를 포위하고 있는 왕실 군대가 있었는데, 명목상 지휘관은 오세르 백작이었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맡고 있었다. 카를로스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고, 1364년 4월 장 3세가 노르망디에 도착하기 전에 왕실 군대는 카를로스의 남은 요새 대부분을 점령했다. 장 3세는 도착 후 에브뢰 주변에 병력을 모아 왕실 군대에 맞섰으나, 1364년 5월 16일 코셰렐 전투에서 뒤 게클랭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포로로 잡혔다. 공교롭게도 장 2세는 4월에 잉글랜드에서 사망했고, 코셰렐 전투의 승전보는 5월 18일 랭스에서 도팽에게 전해졌으며, 그는 다음 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로 즉위했다. 샤를 5세는 즉시 동생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확정지었다.

이 패배에도 카를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1364년 8월, 그의 군대는 노르망디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로데리고 데 우리스가 이끄는 소규모 나바라 군대가 바욘에서 셰르부르로 항해했다. 한편, 동생 루이 드 나바라는 흑태자의 영토를 가로질러 프랑스를 횡단하며 대 용병대와 자유 용병 세귄 드 바데폴의 병력으로 증강된 군대를 이끌고 9월 23일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러나 9월 29일 오레 전투 소식을 듣고 브르타뉴 내전이 종결되자, 루이는 부르고뉴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코탕탱을 재정복하는 데 집중했다. 세귄 드 바데폴과 그의 동료들은 부르고뉴 국경의 앙스를 점령했지만, 그곳을 약탈 거점으로 삼았을 뿐 카를로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결국 교황 우르바노 5세에게 파문당했다. 카를로스는 알브레 영주 베르나르-에이즈 5세에게 거액을 제안하며 부르고뉴 주변 군대의 지휘를 맡기려 했으나, 결국 프랑스 왕에게 맞설 수 없음을 깨닫고 화해를 모색해야 했다.

1365년 5월, 팜플로나에서 카를로스는 샤를 5세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혹은 같은 해 3월 아비뇽 조약 및 생 드니 조약)을 통해 카를로스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과 부르고뉴 공위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1364년 정복지를 유지하고 랑그도크몽펠리에 영주권을 얻었다. 대신 센강 하류의 전략적 요충지인 뫼랑, 망트, 롱그빌 백작령을 프랑스에 양도해야 했으며, 뫼랑 요새는 철거되었다.[9] 부르고뉴 공위에 대한 그의 주장은 교황의 중재에 넘겨졌으나, 실질적인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영지를 확보하려던 카를로스의 15년간의 투쟁이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후 그는 주로 나바라 왕국에 머물렀다.

1365년 말, 세귄 드 바데폴은 부르고뉴에서의 활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나바라에 도착했다. 카를로스는 실질적인 성과 없이 약탈만 일삼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사적인 자리에서 독이 든 배를 먹여 그를 독살했다.

2. 3. 프랑스와의 대립과 좌절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왕위를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프랑스와 대립각을 세웠다. 제1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1366년 잉글랜드의 흑태자 에드워드,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으나, 1367년 나헤라 전투 이후의 복잡한 상황 변화 속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1371년 프랑스의 샤를 5세와 잠시 화해하기도 했지만, 1378년 샤를 5세와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 암살을 시도하고 잉글랜드와 다시 손을 잡으려 한 계획이 드러나면서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이 사건으로 아들 카를로스(훗날 카를로스 3세)가 프랑스에 인질로 잡혔고, 노르망디몽펠리에 등 프랑스 내 영지를 모두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빼앗겼다. 이듬해인 1379년에는 카스티야의 침공을 받아 나바라 본토마저 위태로워졌고, 결국 브리오네스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위 주장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10]

1387년 불의의 사고로 화염에 휩싸여 사망했다.

2. 3. 1. 코슈렐 전투 패배와 영토 상실

1361년, 그의 육촌인 필리프 1세 드 부르고뉴 공작이 사망하자, 카를로스 2세는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1306년 사망)의 장녀였던 마르그리트의 손자였다. 하지만 공국은 피의 근친성을 근거로 로베르 2세의 차녀 잔의 아들이자, 프랑스 국왕인 장 2세에게 넘어갔다. 장 2세는 공국을 자신이 아끼는 아들 필리프 2세에게 물려주었다.

부르고뉴 공작 지위는 카를로스가 갈망하던 프랑스 정치 중심부로의 진입을 의미했기에, 그의 주장이 거부당하자 새로운 분노를 느꼈다.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의 주장을 호소했으나 실패하자, 카를로스는 1361년 11월 나바라로 돌아가 프랑스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1362년 5월 노르망디에서 지지자들의 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363년, 그는 1364년에 두 개의 군대를 동원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하나는 해로를 통해 노르망디로, 다른 하나는 그의 동생 루이 휘하의 가스코뉴인들과 대 용병대가 중부 프랑스에서 합류하여 부르고뉴를 침공, 프랑스 국왕을 양면에서 압박하는 것이었다. 1364년 1월, 카를로스는 아키텐 공국 영토 통과를 위해 에드워드 흑태자아쟁에서 만났다. 흑태자는 카를로스의 새로운 군사 고문이자 카를로스의 누이와 약혼한 뷔슈의 캡탈 장 3세 드 그라일리와의 친분으로 통과를 허락했다. 장 3세는 노르망디로 향하는 군대를 이끌기로 했다. 1364년 3월, 뷔슈의 캡탈은 카를로스의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진격했다.

당시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에드워드 3세와 협상하기 위해 런던에 있었고, 프랑스 방어는 다시 도팽 샤를에게 맡겨졌다. 노르망디에는 이미 롤르부아즈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왕실 군대가 있었는데, 명목상 오세르 백작이 지휘했지만 실질적인 지휘관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었다. 카를로스의 계획은 사전에 파악되었고, 1364년 4월 초 뷔슈의 캡탈이 노르망디에 도착하기 전에 왕실 군대는 카를로스의 남은 요새들을 점령했다. 뷔슈의 캡탈은 도착 후 에브뢰 주변에 병력을 모으고 왕실 군대에 맞서 동쪽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1364년 5월 16일, 그는 코셰렐 전투에서 뒤 게클랭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장 2세는 4월 런던에서 사망했고, 코셰렐 전투 승리 소식은 5월 18일 랭스에서 도팽에게 전해졌으며, 그는 다음 날 프랑스의 샤를 5세로 즉위했다. 샤를 5세는 즉시 동생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확정했다.

코셰렐에서의 패배에도 카를로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1364년 8월, 그의 병사들은 노르망디에서 반격을 시작했고, 로데리고 데 우리스가 이끄는 소규모 나바라 군대가 바욘에서 셰르부르로 항해했다. 한편, 카를로스의 동생 루이 드 나바르는 대 용병대와 세귄 드 바데폴 휘하의 자유 용병 부대로 강화된 군대를 이끌고 흑태자의 영토를 지나 프랑스를 횡단, 9월 23일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러나 오레 전투(9월 29일) 이후 브르타뉴 내전이 종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루이는 부르고뉴 침공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코탕탱을 재정복하는 데 집중했다. 한편 세귄 드 바데폴과 그의 용병들은 부르고뉴 국경의 앙스 마을을 점령했지만, 약탈에만 몰두하며 카를로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세귄을 파문했다. 카를로스는 알브레 영주 베르나르-에이즈 5세에게 거액을 제안하며 부르고뉴 군 지휘를 맡기려 했으나, 결국 프랑스 왕에게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화해를 모색해야 했다. 1365년 5월, 팜플로나에서 그는 프랑스 왕과 조약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그의 지지자들에 대한 일반 사면, 처형된 나바라인 유해의 가족 인도, 포로 상호 석방 등이 이루어졌다. 카를로스는 1364년에 점령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뫼랑 요새는 철거해야 했다. 보상으로 그는 랑그도크몽펠리에를 받았다. 부르고뉴 계승권 주장은 교황의 중재에 넘겨졌으나, 교황은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 내 영지를 확보하려던 카를로스의 15년간의 투쟁이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후 그는 주로 자신의 왕국에 머물렀다.

1365년 말, 세귄 드 바데폴은 부르고뉴에서의 활동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나바라에 도착했다. 별다른 성과가 없었기에 카를로스는 그를 냉대했고, 은밀히 그를 독살했다.

이후에도 프랑스에 대한 도전을 반복했다. 1371년 샤를 5세와 일시적으로 화해했지만, 1378년 샤를 5세와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 암살 음모 및 잉글랜드와의 밀약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아들 카를로스(훗날 카를로스 3세)가 프랑스에 구금되었고, 노르망디 영지는 샤를 5세의 명령을 받은 뒤 게클랭에게 모두 빼앗겼으며, 몽펠리에도 몰수당했다. 이듬해 1379년에는 카스티야의 공격을 받아 나바라 본토까지 점령당하는 위기에 처했고, 결국 3월 브리오네스 조약을 통해 카스티야 및 프랑스와 대(對)잉글랜드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이로써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10]

2. 3. 2.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개입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나면서 일자리를 잃은 프랑스, 잉글랜드, 가스코뉴, 나바라 출신의 수많은 용병들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나바라는 두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에, 카를로스 2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양측과 협정을 맺어 나바라에 큰 피해 없이 영토 확장을 시도했다.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의 페드로 1세와 동맹 관계였으나, 1365년 말에는 아라곤의 페드로 4세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휴 칼벌리가 이끄는 용병대가 페드로 1세를 몰아내고 그의 이복형제인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를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남부 나바라를 통과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후 카를로스 2세는 양측과의 약속을 모두 어기며 나바라 국경을 지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침략자들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하여 피해를 최소화해야만 했다.

엔리케가 성공적으로 카스티야 왕위를 차지하자, 폐위된 페드로 1세는 아키텐에드워드 흑태자에게 망명했다. 흑태자는 페드로 1세의 복위를 돕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는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1366년 7월, 카를로스 2세는 보르도로 직접 가서 페드로 1세 및 흑태자와 만나, 흑태자 군대의 나바라 통과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그 대가로 카스티야의 기푸스코아와 알라바 지방, 추가 요새, 그리고 막대한 현금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그는 나바라 국경에서 엔리케 2세를 만나 이번에는 흑태자 군대의 통과를 막아주는 대가로 국경 도시 로그로뇨와 추가 현금을 받기로 약속했다.

이 소식을 들은 흑태자는 휴 칼벌리에게 북부 카스티야에서 나바라를 침공하여 원래의 협정을 강제로 이행시키도록 명령했다. 카를로스 2세는 즉시 항복하며 엔리케와의 거래는 진심이 아니었다고 변명했고, 흑태자 군대의 통행을 허락했다. 카를로스 2세는 흑태자 군대와 동행했지만, 직접적인 전투 참여를 피하기 위해 올리비에 드 모니에게 자신이 '포로'로 잡히는 위장 매복 작전을 꾸미게 하여, 카스티야 재정복 작전이 끝날 때까지 형식적으로 억류되었다. 이 명백한 책략은 카를로스 2세를 서유럽 전역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1367년 나헤라 전투에서 흑태자가 엔리케 2세에게 승리했지만, 전쟁 후 흑태자는 페드로 1세와의 불화로 아키텐으로 철수했다. 지원군을 잃고 고립된 페드로 1세는 1369년 몬티엘 전투에서 엔리케 2세에게 패배하고 살해당했다. 결국 카를로스 2세의 복잡한 외교 술책과 거듭된 배신은 아무런 소득 없는 헛수고로 끝났다.

이후 1371년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의 샤를 5세와 일단 화해했지만, 1378년 샤를 5세와 엔리케 2세의 암살을 계획하고 또다시 잉글랜드와 비밀 동맹을 맺으려 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그의 아들 카를로스 (훗날 나바라의 카를로스 3세)는 프랑스에 인질로 잡혔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노르망디 영토를 차례로 빼앗겼으며 몽펠리에 역시 몰수당했다. 1379년에는 카스티야의 공격을 받아 나바라가 점령당하는 등 군사적으로 열세에 놓였다. 결국 그해 3월 브리오레스 조약을 통해 카스티야 및 프랑스와 (對)잉글랜드 동맹을 강제로 맺게 되었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야심을 최종적으로 포기해야만 했다[10]

2. 3. 3. 샤를 5세 암살 미수와 몰락

1369년 프랑스잉글랜드 간의 전쟁이 재개되자, 카를로스 2세는 이를 프랑스 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할 기회로 삼으려 했다. 그는 나바라를 떠나 낭트에서 브르타뉴 공작 존 5세를 만나 프랑스의 공격 시 상호 지원을 약속했다. 이후 노르망디에 남은 자신의 주요 거점인 셰르부르에 머물며 프랑스 왕 샤를 5세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 양측에 사절을 보냈다. 프랑스에는 노르망디의 옛 영토 반환, 부르고뉴에 대한 자신의 권리 인정, 약속된 몽펠리에 영지 하사를 조건으로 협력을 제안했다. 반면 잉글랜드에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하며 자신의 노르망디 영토를 공격 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 군대가 자신의 영토에 주둔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단지 잉글랜드 군대의 위협을 이용해 샤를 5세를 압박하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샤를 5세는 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카를로스 2세의 제안에 고무된 에드워드 3세는 1370년 7월, 로버트 놀스 경이 이끄는 원정군을 센 강 하구로 파견했다. 에드워드 3세는 카를로스 2세에게 직접 잉글랜드로 올 것을 요청했고, 카를로스는 같은 달 클래런던 궁전에서 에드워드 3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으나 구체적인 약속은 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샤를 5세와도 계속 협상했는데, 샤를 5세는 카를로스가 북부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놀스 군대와 합류할 것을 우려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70년 12월 2일 나바라와 조약 초안을 마련했지만, 며칠 후 퐁발랭 전투에서 놀스 군대가 패배하면서 이 조약은 사실상 무효가 되었다. 결국 1371년 3월,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고 판단한 카를로스 2세는 샤를 5세와 만나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러한 활동에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카를로스 2세는 1372년 초 나바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최소 두 차례 이상 샤를 5세를 독살하려는 시도에 연루되었고, 다른 이들이 프랑스 왕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도록 부추겼다. 다음으로 그는 카스티야의 왕위를 노리던 존 오브 곤트(페드로 1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1373년, 이미 카스티야 왕위를 확고히 하고 잉글랜드의 동맹인 포르투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는 카를로스 2세에게 결혼 동맹 체결, 카스티야 내전 이후 점유하고 있던 국경 요새 반환, 존 오브 곤트 군대에 대한 국경 봉쇄를 강요했다. 그럼에도 1374년 3월, 카를로스 2세는 가스코뉴의 다스에서 존 오브 곤트를 만나, 엔리케에게 넘겨준 도시들을 되찾는 조건으로 나바라를 카스티야 침공 기지로 사용하도록 합의했다. 하지만 며칠 후 곤트가 갑자기 계획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자, 카를로스 2세는 이를 개인적인 배신으로 여겼다. 결국 그는 카스티야 왕을 달래기 위해 1375년 5월, 자신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카를로스를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의 딸 레오노라와 결혼시키는 데 동의했다.

1377년, 카를로스 2세는 다시 잉글랜드에 접근하여 자신이 노르망디로 돌아가 여전히 통제하고 있는 항구와 성들을 프랑스에 대한 공동 공격 기지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자신의 딸을 새로운 잉글랜드 왕인 어린 리처드 2세와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카스티야의 공격 위협 때문에 나바라를 떠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장남을 노르망디로 보내면서, 잉글랜드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성을 준비할 실내관 자크 드 뤼 등 여러 관리와 함께 파리의 왕실 주방에 잠입하여 프랑스 왕을 독살할 임무를 맡은 시종을 포함시켰다. 동시에 그는 카스티야군과 싸우기 위해 가스코뉴의 잉글랜드군에게 증원을 급히 요청했다.

하지만 1378년 3월, 그의 모든 음모가 발각되었다. 노르망디로 가던 나바라 대표단이 느무르에서 체포되었고, 그들의 짐에서 발견된 잉글랜드와의 조약 초안과 서신, 그리고 자크 드 뤼의 심문 중 자백은 샤를 5세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샤를 5세는 즉시 군대를 보내 북부 노르망디에 남아있던 카를로스 2세의 영토를 모두 점령했다(1378년 4월~6월). 셰르부르만이 저항했지만, 카를로스 2세가 잉글랜드에 증원을 간청하자 잉글랜드는 오히려 셰르부르를 직접 점령하여 프랑스에 대항하는 자신들의 주둔지로 삼았다. 카를로스 2세의 아들은 프랑스 왕에게 항복하고 부르고뉴 공작의 보호 아래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자크 드 뤼를 비롯한 프랑스 내 나바라의 주요 관리들은 처형되었다. 샤를 5세의 명령을 받은 뒤 게클랭은 노르망디 영토를 차례로 점령했으며, 몽펠리에 역시 몰수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78년 6월~7월, 트라스타마라의 후안(엔리케 2세의 아들)이 이끄는 카스티야 군대가 나바라를 침공하여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카를로스 2세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생장피에드포르로 후퇴했고, 10월에는 보르도로 가서 가스코뉴 주둔 잉글랜드군 사령관 존 네빌 경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네빌은 토마스 트리베트 경 휘하의 소규모 병력을 파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79년 2월, 엔리케 데 트라스타마라는 봄에 다시 나바라를 침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더 이상 의지할 동맹도, 선택지도 없었던 카를로스 2세는 휴전을 요청했고, 1379년 3월 31일 브리오네스 조약을 통해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카스티야 및 프랑스와 영구적인 군사 동맹을 맺고, 투델라 시를 포함한 남부 나바라의 요새 20곳을 카스티야 수비대에 넘겨주라는 엔리케의 요구에 굴복했다.[10]

이로써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의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정치 경력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는 왕위와 나라는 유지했지만, 적들의 굴욕적인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고 프랑스 내 영토를 모두 잃었으며, 그의 왕국은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빈곤해졌다. 이후에도 그는 음모를 꾸미고 스스로를 프랑스의 정당한 왕이라 여겼지만, 1387년 사고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한 상태로 남았다.

2. 4. 최후

카를로스 2세는 54세의 나이로 팜플로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끔찍한 죽음은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으며, 도덕주의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었고 때로는 채색 필사본 연대기에 삽화로 그려지기도 했다.[2]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세부적인 내용에서 차이가 있는 여러 버전으로 전해진다.

1803년 프랜시스 윌리엄 블래그던은 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악인 카를로스는 몸이 쇠약해져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의사는 브랜디에 적신 린넨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 목까지 자루처럼 덮는 처방을 내렸다. 이 처방은 밤에 시행되었다. 왕의 몸을 감싼 천을 꿰매던 궁녀 중 한 명이 목 부분까지 와서 실을 매듭지었다. 그런데 남은 실 끝을 가위 대신 촛불로 자르려다 그만 천 전체에 불이 붙고 말았다. 겁에 질린 궁녀는 도망쳤고, 왕은 궁궐에서 산 채로 불타 죽었다고 한다.[3]

한편, 존 캐슬은 좀 더 도덕적인 관점에서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는 당시 60세였으며, 평소의 악한 습관 때문에 병든 상태였다. 의사는 체온 유지를 위해 알코올에 적신 린넨으로 몸을 감싸고, 침대 밑에 뜨거운 석탄을 담은 화로를 두라고 지시했다. 그는 한동안 이 처방 덕분에 괜찮았지만, 왕국의 대표들에게 잔혹 행위를 저지르려 했을 때, 프로아사르의 말을 빌리자면 '신의 뜻인지 악마의 뜻인지' 불이 침대 시트에 옮겨붙었고, 불붙기 쉬운 천에 싸여 있던 그의 몸까지 번졌다. 그는 끔찍하게 화상을 입었고, 거의 2주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다 죽었다.[4]

3. 가족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국왕 요한 2세의 딸인 프랑스의 조안(1343–1373)과 결혼하여 다음과 같은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마리아 (Marie프랑스어 / Maríaes)1360년 ~ 1400년 이후아라곤의 알폰소와 결혼
카를로스 (Carloses)1361년 ~ 1425년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 에브뢰 백작
보나 (Bonne프랑스어 / Bonaes)1364년 ~ 1389년 이후
페드로 (Pedroes / Pierre프랑스어)1366년 3월 31일경 ~ 1412년 7월 29일모르탱 백작, 알랑송의 카트린 (알랑송 백작 피에르 2세의 딸)과 결혼
필리페 (Philippe프랑스어 / Felipees)1368년 출생요절
호아나 (Joan영어 / Juanaes)1370년 ~ 1437년장 4세와 결혼 후, 헨리 4세와 재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됨
블랑슈 (Blanche프랑스어 / Blancaes)1372년 ~ 1385년



또한 카를로스 2세는 두 명의 애인에게서 각각 서자를 두었다.


  • 카타리나 데 리사로(Catalina de Lizasoes)와의 사이:
  • * 레오넬(Leoneles, 1378년 ~ 1413년): 무르사발 데 안디온(Muruzábal de Andiónes) 자작. 에피파니아 데 루나(Epifanía de Lunaes)와 결혼했다.
  • 카타리나 데 에스파르사(Catalina de Esparzaes)와의 사이:
  • * 호아나(Joanna영어 / Juanaes, 1378년경 ~ 1413년): 루르드 성주이자 비고르 백작인 장 드 베아른(Jean de Béarn프랑스어)과 결혼했다.

4. 평가

(내용 없음)

참조

[1] 웹사이트 King Charles II Died a Horrible, Unfortunate Death https://historycolle[...] 2017-06-08
[2] 서적 A Distant Mirror https://archive.org/[...] Alfred A. Knopf 1978
[3] 서적 Paris as it was and as it is https://archive.org/[...] C. and R. Baldwin 1803
[4] 서적 Illustrated History of England https://books.google[...] W. Kent & Co. 1857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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