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키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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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토키리》는 1969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로, 막부 말 도사 번의 하급 무사 오카다 이조의 삶을 다룬 시대극이다. 고샤 히데오가 감독하고, 가쓰 신타로, 나카다이 타츠야, 이시하라 유지로, 미시마 유키오 등이 출연했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 《인간 도살자 이조》를 원작으로 하며, 이조가 도사 근왕당의 암살자로 활동하며 겪는 갈등과 비극적인 최후를 그린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으며, 미시마 유키오의 출연과 그의 연기, 그리고 작품의 주제가 그의 사상과 연결되어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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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키리 (영화) - [영화]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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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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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人斬り (히토키리) |
감독 | 고샤 히데오 |
각본 | 하시모토 시노부 |
원작 | 시바 료타로 《히토키리 이조》 |
제작 | 후지 TV 가쓰 프로덕션 |
출연 | 가쓰 신타로 나카다이 타츠야 미시마 유키오 이시하라 유지로 바이쇼 미츠코 신조 다쿠미 나카야 노보루 시모모토 쓰토무 야마모토 케이 이토 다카오 가와하라 나쓰코 다나카 구니에 야마우치 아키라 하기모토 킨이치 사카가미 지로 다쓰미 류타로 |
촬영 | 모리타 후지오 |
편집 | 스가누마 간지 |
음악 | 사토 마사루 |
배급사 | 다이에이 영화 (일본) Japanese Film Exchange (미국) Daiei International Films (미국) |
개봉일 | 1969년 8월 9일 |
상영 시간 | 140분 |
국가 | 일본 |
언어 | 일본어 |
흥행 정보 | |
배급 수입 | 3억 5천만 엔 |
2. 줄거리
오카다 이조는 가난한 낭인으로, 다케치 한페이타가 이끄는 토사 근왕당에 합류하여 암살자로 활동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이조에게 한페이타에게 이용당할 뿐이라 경고하지만, 이조는 한페이타에게 충성을 바친다.[6]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7][11][16][26][81]
분큐 2년(1862년), 이조는 검술 재능은 있었지만 신분제의 벽에 막혀 출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갑옷을 팔려 했지만 실패하고, 한페이타에게 불려가 요시다 도요 암살을 지켜보게 된다. 이조는 사람을 베는 것에 대한 본능을 깨닫고 "천주"라는 말을 되풀이한다.[6]
그해 여름, 도사 근왕당은 교토로 상경하고, 한페이타는 즈이잔이라 자칭하며 근왕파의 중심인물이 된다. 이조는 "인간 백정 이조"로 불리며 암살에 가담하고, 료마는 이조에게 인간 백정을 그만두라고 충고한다. 이조는 아네코지 킨토모의 여동생 아야히메에게 "짐승"이라 멸시받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품고 출세와 새로운 시대를 꿈꾼다.[6]
이조는 이시베주쿠 습격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료마의 부탁으로 가쓰 가이슈를 호위한 일로 한페이타의 분노를 사 도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조는 한페이타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실패하고, 기생 오미노의 권유로 한페이타에게 돌아간다.[6]
한페이타는 타나카 신베이의 칼을 이조에게 주며 아네코지 킨토모 암살을 명령한다. 이조는 명령을 실행하고, 신베는 자신의 칼이 증거로 제시되자 할복한다. 이조는 죄책감에 술에 빠져 명성이 쇠퇴한다.[6]
낭인 사냥에 걸린 이조는 로쿠카쿠 감옥에 투옥되어 한페이타에게 버려지고, "무숙자 호라조"라는 이름으로 고문받는다. 료마의 도움으로 8개월 후 사면된 이조는 료마와 함께 규슈로 가기로 약속한다.[6]
한편, 한페이타는 도요 암살 혐의로 구속되고, 근왕당은 이조를 제거하려 한다. 한페이타는 이조의 동생 미나가와 이치로에게 독살을 명령하고, 이조는 독이 든 술을 마시고 간신히 살아남는다.[6]
이조는 자신이 해왔던 모든 것을 고백하고, 오미노에게 돈을 건넨 후 능지형에 처해진다. 이조는 한페이타가 할복을 명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며 죽음을 맞이한다.[6]
3. 등장인물
오카다 이조를 둘러싼 여성으로, 이조가 동경하는 높은 신분의 공주 아네노코지 아야히메 역에 신조 타쿠미가, 이조의 단골 유녀 오미 역에는 쇼치쿠 가극단 출신 바이쇼 미츠코가 출연했다.[16][26] 타츠미 류타로는 작품 도입부에서 요시다 토요 역을 맡았다.[14][16] 컨트 55호의 하기모토 킨이치와 사카가미 지로는 이조가 갇히는 롯카쿠 감옥 안의 단역으로 출연했다.[16][26]
그 외 배역은 다음과 같다.
배우 | 역할 |
---|---|
나카야 노보루 | 아네코지 긴토모 |
시모모토 츠토무 | 마츠다 |
타키타 유스케 | 히라마츠 |
다나카 쿠니에 | 롯카쿠 감옥 관리인 |
야마모토 케이 | 미나가와 이치로 |
이토 타카오 | 아마노 토오루 |
야마우치 아키라 | 가츠 가이슈 |
가하라 나츠코 | 오타키 |
나카타니 이치로 | 교토 쇼시다이요리키 |
하타노 겐 | 구사카 겐즈이 |
니이타 마사하루 | 이지치 산자에몬 |
시미즈 에이 | 이노우에 사시로 |
미야모토 코지 | 와타나베 킨사부로 |
다테 타케시 | 교토 시중 순찰 조 요인 |
키타무라 에이조 | 요코가와 타이가 |
이부키 소타로 | 혼마 세이이치로 |
히가시 다이지로 | 환전상 번두 |
치바 쵸사부로 | 고물상 주인 |
후쿠야마 렌 | 미야베 테이조 |
후지모리 타츠오 | 기타자키 스스무 |
쿠로키 겐 | 쿠도 |
미야자와 겐 | 형사 분키치 |
오카 나츠코 | 소녀 |
고바야시 카나에 | 할머니 |
미야지마 마코토 | 오카와라 주조 |
미카게 신스케 | 모리 손로쿠 |
사토 쿄이치 | 자객 |
미야마 신파치 | 야스오카 가스케 |
카츠무라 준 | 나스 신고 |
안도 진이치로 | 오이시 단조 |
타츠미 류타로 | 요시다 토요 |
유아사 켄보쿠회 | 살진 |
3. 1. 주요 인물
- '''오카다 이조''' (가쓰 신타로 분)
: 25세. 도사국의 가난한 향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전 검법을 익혀 늑대와 같은 맹렬함을 가진 난폭한 인물이다. 도사 근왕당에서 암살자로 활동하며, 뛰어난 솜씨로 "인간 백정 이조"로 쿄에서 알려져 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무지하지만 마음씨는 착하다.[7][11][16][26][81]
- '''다케치 즈이잔''' (나카다이 타츠야 분)
: 34세. 도사 근왕당의 수령으로, 냉혹한 혁명가이다. 교토에서 도막 정책을 짠다. 검술이 뛰어난 이조를 "개"로 길들이며 보수파를 암살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7][11][16][26][81]
: 22세. 사쓰마 번의 암살자. "인간 백정 신베"로 불리며, 시현류 검법을 사용한다. 다케치의 음모로 아네코지 경 암살 혐의를 받고 할복한다.[7][11][16][26][81]
: 28세. 전 도사 근왕당원이었으나 탈번 후, 다케치와 다른 방식으로 도막을 추구한다. 이조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으며, 이조에게 살인을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낭인 사냥으로 로쿠카쿠 감옥에 갇힌 이조의 석방을 돕는다.[7][11][16][26][81]
- '''오미노''' (바이쇼 미츠코 분)
: 고조 신치 유곽 "야마시로야"의 창기로, 이조의 애인이다.[7][11][16][26][81]
- '''아네코지 아야히메''' (신조 타쿠미 분)
: 아네코지 긴치의 여동생으로, 아름다운 공주이다. 다케치와 함께 온 이조를 "짐승!"이라며 멸시한다. 이조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7][11][16][26][81]
- '''아네코지 긴토모''' (나카야 노보루 분)
: 27세. 천황 측근 양이파 공경. 다케치와 함께 했으나, 도사 근왕당의 암살 수법을 우려하여 의견이 갈린다. 다케치의 밀명으로 이조에게 살해된다.[7][11][16][26][81]
- '''미나가와 이치로''' (야마모토 케이 분)
: 도사 근왕당원이자 이조의 동생 같은 존재. 투옥된 다케치에게서 이조 독살 명령을 받는다.[7][11][16][26][81]
3. 2. 기타 인물
배우 | 역할 | 설명 |
---|---|---|
나카야 노보루 | 아네가코지 긴토모 | 천황 측근 양이파 공경 |
시모모토 츠토무 | 마츠다 | 도사 근황당 부령주, 다케치 측근 |
타키타 유스케 | 히라마츠 | 도사 번 감찰두, 모든 암살 자백을 듣고 이조에게 능지형 선고 |
신조 타쿠미 | 미나카와 | 도사 근황당 동지, 이조의 동생 같은 존재 |
타나카 쿠니에 | 롯카쿠 감옥 관리인 | 롯카쿠 거리 감옥 관리인 |
야마모토 케이 | 미나가와 이치로 | 도사 근황당 동지, 이조의 동생 같은 존재 |
이토 타카오 | 아마노 토오루 | 도사 근황당 동지 |
야마우치 아키라 | 가츠 가이슈 | 막신, 이조가 료마의 부탁으로 호위 |
가하라 나츠코 | 오타키 | 산조코바시 근처 술집 "오타키" 여주인, 근황파 아지트 |
나카타니 이치로 | 교토 쇼시다이요리키 | 아네코지 경 암살 사건 조사 |
하타노 겐 | 구사카 겐즈이 | 조슈 번사, 존왕양이파 |
니이타 마사하루 | 이지치 산자에몬 | 사쓰마 번사, 존왕양이파 |
시미즈 에이 | 이노우에 사시로 | 도사 번사, 요시다 토요 살해 범인 탐색 |
미야모토 코지 | 와타나베 킨사부로 | 교토 니시마치 봉행소 요리키 |
다테 타케시 | 교토 시중 순찰 조 요인 | 낭인 단속 |
키타무라 에이조 | 요코가와 타이가 | 도사 번 감찰역 |
이부키 소타로 | 혼마 세이이치로 | 에치고국 출신 존왕양이파 지사 |
히가시 다이지로 | 환전상 번두 | 이조가 보상 30량을 오미노에게 보낸 고치성 아래 환전상 |
치바 쵸사부로 | 고물상 주인 | 도사 구니야 사토고 고물상 주인 |
후쿠야마 렌 | 미야베 테이조 | 구마모토 번사, 존왕양이파 |
후지모리 타츠오 | 기타자키 스스무 | 도사 근황당 동지 |
쿠로키 겐 | 쿠도 | 도사 근황당 동지 |
미야자와 겐 | 형사 분키치 | 이조가 벤 남자 |
오카 나츠코 | 소녀 | 선술집 "오타키" 소녀 |
고바야시 카나에 | 할머니 | 유곽 "야마시로야" 할머니 |
미야지마 마코토 | 오카와라 주조 | 교토 히가시마치 봉행소 요리키 |
미카게 신스케 | 모리 손로쿠 | 교토 히가시마치 봉행소 요리키 |
사토 쿄이치 | 자객 | 가츠 가이슈 습격 자객 |
미야마 신파치 | 야스오카 가스케 | 요시다 토요 암살 자객 |
카츠무라 준 | 나스 신고 | 요시다 토요 암살 자객 |
안도 진이치로 | 오이시 단조 | 요시다 토요 암살 자객 |
하기모토 킨이치 (컨트 55호) | 감옥 간수 | 롯카쿠 감옥 죄수 |
사카가미 지로 (컨트 55호) | 곰 수염 | 롯카쿠 감옥 죄수, 간수 부하 |
타츠미 류타로 | 요시다 토요 | 도사 번 집정 |
유아사 켄보쿠회 | 살진 |
4. 제작진
- 원작: 시바 료타로[12][13]
- 감독: 고샤 히데오[12]
- 각본: 하시모토 시노부[12][13]
- 제작: 무라카미 시치로, 노리타카 요지
- 촬영: 모리타 후지오
- 음악: 사토 마사루
- 미술: 니시오카 요시노부
- 조명: 미마 히로시
- 편집: 스게누마 간지, 타니구치 토시오 (제반 사정으로 인해 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음)
- 조감독: 도이 시게루
- 녹음: 오오스미 마사오
- 의상 고증: 우에노 요시오
- 음향 효과: 쿠라시마 토오루
- 제작 주임: 사나다 마사노리
- 스틸: 오야마다 코우키
- 현상: 토요 현상소
- 무술 지도: 유아사 켄타로 (유아사 검목회)
5. 제작 배경
오카다 이조는 도사 번을 기반으로 다케치 한페이타가 이끄는 토사 근왕당에 합류한 가난한 낭인 출신 암살자였다. 사카모토 료마는 이조에게 그가 다케치의 개일 뿐이며 결국 배신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조는 긴노토의 야간 공격을 망친 후 한페이타에게 충성심을 시험받는다. 한페이타를 버리고 후회한 이조는 사과하고 타나카 신베이의 칼로 아네가코지 긴토모를 암살한다. 타나카는 심문 과정에서 할복하고, 한페이타는 이조를 희생시켜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키려 한다. 이조는 배신당하고 독살될 뻔하지만 살아남아 자백하고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그는 죽기 전에 한페이타가 할복을 강요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6]
5. 1. 후지 TV 제작 영화
(이전 출력과 동일하게, 주어진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내용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출력하지 않습니다.)5. 2. 미시마 유키오의 출연
미시마 유키오는 이 영화에서 사쓰마 번의 검객 다나카 신베에 역을 맡았다.[12] 시현류의 달인인 다나카 신베에의 격투 장면 촬영을 위해, 미시마는 가고시마에서 시현류 전문가를 초빙하여 직접 지도를 받았다.[12][44][66] 미시마는 거합(居合) 실력이 뛰어나 촬영 스태프들을 놀라게 했다.[18][67]미시마는 진검 사용을 고집하여 격투 장면 촬영에 임했고, 상대 배우들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62] 그는 "내 검법은 살인검이다"라고 말하며 촬영에 몰입했다.[46] 격투 장면은 많은 양의 피가 사용되어 화제가 되었는데, 미시마는 이러한 피의 묘사에서 일본 문화의 정수를 찾았다.[69][70]
미시마는 할복 장면 촬영을 마지막 날로 해달라고 요청했고, 고샤 히데오 감독은 이 장면의 연출을 그에게 일임했다.[37][46] 미시마는 리허설 때부터 진지하게 연기하여 실제 자신의 배를 조금 베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12][34][45] 본 촬영에서는 온몸을 피로 물들이며 열연했고, 촬영 후에는 "영화는 좋군. 아무리 배를 찔러도 죽지 않잖아"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12][34][41][45]
미시마의 출연은 영화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였으며, 그의 연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5. 3. 촬영 현장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에서 『히토키리』 촬영은 1969년 5월 16일에 시작되었다.[12] 텔레비전 출신 고샤 히데오 감독은 기존 시대극의 양식미보다 현실적인 연출을 추구했다.[12][14][58] 다이에이 스태프들은 고샤 감독의 자극적이고 박력 있는 연출에 압도되었고, 고샤는 다이에이의 뛰어난 미술 기술에 감탄했다.[14][37][57][58] 특히 미술 감독 니시오카 요시노부는 폭우 속 암살 장면에서 실제 돌길을 만드는 등 세트 완성도를 높였다.[58]고샤 감독은 과거 다이에이 입사에 실패했지만,[59] 『히토키리』를 통해 다이에이 스태프들과 협력하며 수준 높은 영상을 만들었다.[42] 그는 촬영 당시 다나카 도쿠조와 미스미 겐지의 따뜻한 조언 덕분에 편안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60]
미시마 유키오는 다나카 신베에 역을 맡아 시현류 검술을 연마하고, 격투 장면에서 진검 사용을 고집하는 등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62] 할복 장면 촬영에서는 고샤 감독에게 연출을 일임받을 정도로 배역에 몰입했다.[37][46]
6월 초, 가쓰 신타로, 나카다이 타츠야, 미시마 유키오, 이시하라 유지로 등 주연 배우 4인이 모여 선전용 사진 촬영을 했다.[23] 이때 미야가와 가즈오가 미시마를 응원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 스태프들이 긴장하기도 했다.[23]
5. 3. 1. 요시다 도요 암살 장면
다쓰미 류타로가 연기한 요시다 도요가 폭우 속에서 습격당하는 장면은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에서 5월 16일에 크랭크인하여 촬영되었다.[12] 이 장면은 자객들과의 사투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칼을 고쳐 잡는 도요의 모습과 단말마를 담고 있으며, 고샤 히데오와 다이에이 스태프 간의 첫 협업이었다.[14] [37] [57] [58]당시 다이에이 영화 시대극은 양식미를 중시한 살진이 주를 이루었으나, 텔레비전 출신인 고샤는 현실적인 살인 장면을 추구했다.[12] [14] [58] 다이에이 스태프들은 고샤의 자극적이고 박력 있는 연출에 압도되었고, 고샤는 다이에이 미술의 우수함에 감탄했다.[14] [37] [57] [58]
미술 담당 니시오카 요시노부는 폭우가 돌길 비탈길에서 튕겨 격렬하게 물보라가 치는 효과를 위해, 세트에 전차 돌 수십 톤을 들여와 진짜 돌길을 조성했다.[58] 이로 인해 튕겨진 빗물은 더욱 흠뻑 젖은 느낌을 주며 암살 장면에 현장감을 더했다.[58]
5. 3. 2. 다나카 신베의 등장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에서 1969년 5월 16일에 크랭크인한[12] 『히토키리』 촬영은, 고샤 히데오 감독과 다이에이 스태프들의 첫 만남이었다. 다이에이는 라쇼몽, 우게츠 이야기 등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은 명작들을 배출한, 시대극 영화의 보수 본류였다.[37][42][57] 미술 담당 니시오카 요시노부, 카메라 담당 모리타 후지로 등 뛰어난 기술자들이 다이에이에 포진해 있었다.[37][42][58]첫날 촬영은 다쓰미 류타로가 연기한 요시다 도요가 폭우 속에서 습격당하는 장면이었다.[14][57] 텔레비전 출신인 고샤 감독은 양식미를 중시한 기존 시대극과 달리 현실적인 살인 장면을 추구했고,[12][14][58] 다이에이 스태프들은 그의 연출에 압도되었다.[14][37][57][58] 미술 담당 니시오카는 폭우가 돌길에서 튕기는 효과를 위해 수십 톤의 전차 돌을 사용해 실제 돌길을 만들어 현장감을 높였다.[58]
고샤 감독은 다이에이의 큰 세트와 미술 수준에 힘입어 더욱 역동적인 연출을 할 수 있게 되었다.[12][14][42][58] 과거 다이에이 입사에 실패했던[59] 그는 『히토키리』 촬영 당시 대부분의 감독들에게 거만한 태도로 무시당했지만,[60] 다나카 도쿠조와 미스미 겐지는 그에게 따뜻한 조언을 해주었고, 고샤 감독은 편안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60]
5. 3. 3. 가쓰 신타로의 전력 질주
오카다 이조 역을 맡은 가쓰 신타로는 영화 중반, 무토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교토에서 이시베 역참까지 9리 13정(37km)을 쏜살같이 달려가는 장면을 연기했다.[37] 이 장면은 관객에게 이조의 비애를 전달하기 위해, 고샤 히데오 감독은 가쓰에게 "헐떡거리면서 슬프게 달려달라"고 요청했다.[37][40]촬영은 트럭에 카메라를 싣고 가쓰의 바로 뒤를 쫓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관객과 이조의 시선을 겹쳐 현장감을 높였다.[37][40][65] 하지만 촬영 전날 과음으로 숙취 상태였던 가쓰는 휴식 없이 필사적으로 달려야 했다.[37][65] 가쓰는 "도중에 쉬어도 된다고 말하는데, 컷이 안 걸리고, 어쨌든 계속 달려야" 했다고 회상하며, "안 달리면 (촬영 트럭에) 치여 죽을 테니까"라고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65]
5. 3. 4. 이시베주쿠 격투 장면
1969년 6월 15일, 가쓰 신타로가 오카다 이조 역을 맡아 전력 질주하는 장면 이후, 이시베 역참에서의 격투 장면 촬영이 진행되었다.[12] 이 오미국 암살 사건은 안세이 대옥에서 쓰러진 지사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도사, 사쓰마, 조슈 3개 번 연합 25명으로 결성된 자객단의 천벌이었다.[12][13] 이들은 "어용 소환" 명목으로 에도로 끌려가려던 교토 동・서 마치부교소의 요리키 4명을 노렸다.[12][13]다케치 즈이잔은 이조를 자객단에서 제외했지만, 이조는 출발 소식을 듣고 교토에서 이시베 역참까지 9리 13정을 달려가 결투 중 "도사의 오카다 이조다!"라고 외치며 덤벼드는 영화 특유의 호쾌한 연출을 보였다.[13] 이 3개 번 연합에는 사쓰마 사무라이 다나카 신베에도 참여하여 화려한 검술을 선보였다.[12][13]
미시마 유키오는 다나카 신베에 역을 위해 가고시마의 제11대 소케사범 도고 시게마사와 제자 하마다 이치로를 도쿄로 초청, 5월 16일 조후시 다이에이 도쿄 촬영소에서 사쓰마 시현류 연습을 받았다.[12][44][66] 미시마는 시현류 기본기를 익혀 역팔상 자세에서 순식간에 2명 베기를 선보였다.[13][18] 그의 이아이 베기는 다이에이 프로듀서 후지이 히로아키와 가쓰 신타로를 놀라게 할 정도였으며, 진검을 다루는 솜씨에 가쓰는 혀를 내둘렀다.[18][67][68]
촬영 전 세트 구석에서 진검 이아이 연습을 하던 미시마는 "진검을 쓰고 싶다"고 말해 베어지는 역 배우들을 술렁이게 했다.[62] 고샤 히데오 감독은 미시마가 혼자 자세를 취할 때만 진검 사용을 승낙하고, 합을 맞출 때는 피했다.[62]
미시마는 요코 부인과 친구들을 교토 촬영소에 불러 이시베 역참 격투 장면 촬영을 견학하게 했다.[18][34][44][45] 그는 이 장면을 마음에 들어 여러 번 리허설을 원했고, 본 촬영에서 고샤 감독이 OK를 해도 "한 번 더 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며 "이게 누구누구, 저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베니 통쾌하다"고 말했다.[18][45]
미시마의 살기에 격투 배우들은 무서워했으며, 실제로 합을 맞춘 격투가들은 복고테를 착용했음에도 부상을 입었다.[37][46] 고샤 감독은 "미시마 씨가 울분을 발산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34][45]
이 격투 장면에서는 피칠갑이 풍성하게 사용되어, 사람이 베어져 피가 튀는 사실적인 격투를 연출했다.[55][69]
스포츠 신문 기자는 미시마의 기백, 번뜩이는 눈, 육체, 동작을 칭찬하며 아마추어 같지 않다고 보도했다.[12][71] 요코 부인은 잔혹한 장면에 대한 생각과 함께 미시마의 눈빛과 몸놀림에 압도되었다고 논평했고, 고샤 감독은 "사람을 베는 눈"이라고 놀라워했다.[12][71]
가쓰 신타로는 미시마의 격투에 대해 "체력 단련으로 얻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느낌이다. 진지함이 있고 무서워 보인다. 소설가인데 팔 굵기가 엄청나고 연기 감은 고수 수준이다"라고 극찬했다.[12][71] 미시마는 프로들 사이에서 실패가 두려워 진지하게 연기했고, 감독에게 칭찬받고 싶은 자존심도 있었다고 답했다.[12][71]
5. 3. 5.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다나카 신베이는 아네가코지 긴토모 암살 사건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칼이 증거로 제시되자 할복한다.[6]6. 원작과의 차이점
영화 《히토키리》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인간 도살자 이조》를 원작으로 하지만, 각색 과정에서 여러 차이가 나타난다.
- '''오카다 이조의 성격 묘사''': 원작 소설에서 이조는 냉혹하고 어두운 암살자로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가츠 신타로가 연기하여 인간적이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인물로 묘사된다. 이조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좌절을 겪으며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모습, 사카모토 료마나 다나카 신베에와의 우정, 기생 오미에 대한 애정 등이 추가되었다.[16][24][13]
- '''다케치 한페이타의 성격 변화''': 나카다이 타츠야가 연기한 다케치는 원작과 달리 이조와 정반대 성격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전반부에서는 청렴한 혁명가로 묘사되지만, 후반부에는 냉혹하고 비정한 독재자이자 테러의 주모자처럼 묘사된다.[13][16][30]
- '''사카모토 료마의 역할''': 이시하라 유지로가 연기한 료마는 이조가 다케치의 "사냥개"가 되어 암살자의 길을 가는 것을 조용히 간하며, 이조의 고난을 구원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다케치의 냉혹함과 대조되는 따뜻한 우애를 보여주는 인물로 연출되었다.[13][16][32][33]
- '''다나카 신베에의 묘사''': 미시마 유키오가 연기한 신베에는 살기가 넘치는 인물로 등장하며, 뛰어난 검술 실력, 이조와의 우정, 갑작스러운 할복 등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존재로 그려진다.[13][34]
7. 평가
미시마 유키오는 이 영화에서 다나카 신베에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가츠 신타로와의 첫 대면 장면에서 긴장된 연기는 프로 배우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실감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63] 가츠는 미시마의 연기에 대해 "자신이 인간 백정 신베에라고 생각하면, 이제 인간 백정 신베에인 거다. 감독이 이러쿵저러쿵하면, 웃기지 마, 나는 인간 백정 신베에라고 말해 버려"라고 격려하며 그의 연기를 칭찬했다.[63]
미시마는 첫 등장 장면에서 이시하라 유지로와 대등한 연기를 펼치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12] 촬영 후에도 스스로 재촬영을 요청할 정도로 연기에 대한 열정을 보였으며, "가츠 신타로가 이렇게 친절한 남자일 줄은 몰랐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19] 고샤 감독은 미시마의 연기에 대해 "테러리스트의 분위기는 미시마 씨 외에는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연기를 하고 있어도 살기가 있었고, 장면によっては勝新太郎을 압도했다"라고 극찬했다.[45]
『인정』은 막부 말기의 동란기를 무대로 격렬한 삶을 살아간 인물들을 다룬 영화로, 오카다 이조와 다케치 즈이잔의 인간관계는 현대에도 통하는 남자의 야망이 얽힌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파란만장한 스토리 전개와 역동적인 칼싸움 연출은 시대극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호화로운 오락 대작 영화로 평가받았다.[12][16][37]
7. 1. 흥행 및 비평
『인정』은 막부 말기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오카다 이조와 다케치 즈이잔의 인간관계를 통해 현대에도 통하는 남성들의 야망을 그려내, 파란만장한 이야기 전개와 역동적인 칼싸움 장면으로 시대극의 매력을 살린 오락 영화로 평가받는다.[12][16][37]흥행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어 1969년 흥행 순위 4위를 기록했다.[9][10][12] 키네마 준보 베스트 10에는 들지 못했지만 14위를 차지했다.[9][10] 총 49점을 얻었으며, 다카자와 에이이치가 6점으로 최고점을 주었고, 구사베 큐시로, 쓰무라 히데오, 토다 타카오가 5점을 주었다.[9] 『고용금』에 이어 『인정』의 흥행 성공으로 고샤 히데오는 영화계의 흥행 보증수표로 떠올랐다.[37]
오자키 히데키는 『인정』의 흥행 요인으로 대중이 원하는 재미를 솔직하고 대담하게 제시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더한 점을 꼽았으며, 70년 안보를 앞둔 시대적 상황과의 연관성을 언급하며 호평했다.[12][85] 그는 이 영화가 당시 대중의 폐쇄적인 의식에 창을 열어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85]
주연 배우 가츠 신타로의 매력적인 연기도 호평을 받았다. 그는 친근하고 밝은 성격을 가진 오카다 이조를 연기하여, 잔혹한 '인정' 행위 속에서도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끼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24]
신인 여배우 바이쇼 미츠코는 유녀 역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교토 시민 영화제 신인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16][36] 미시마 유키오는 다나카 신페이 역을 맡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호평을 받았다. 과거 영화 『바람둥이』에서는 연기력 논란이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12][23] 고샤 히데오 감독은 미시마 유키오의 캐스팅이 다나카 신페이 역을 빛나게 했다고 회상했다.[12][45]
사이토 마사하루는 『인정』의 주제가 미시마 유키오의 『문화방위론』과 맞닿아 있으며, 독단적인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고 평했다.[12][86] 그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점이 천황제 회복을 목표로 하는 방패의 모임과 토사 근황당의 천벌 사상과 공통된다고 언급했다.[86]
마스무라 야스조는 과거 미시마 유키오의 연기를 혹평했지만, 『인정』에서의 할복 장면 연기를 보고 그의 표현력에 감탄하며 호평했다.[87]
『인정』은 1970년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미시마 사건) 이후, 그의 사상과 연관 지어 더욱 화제가 되었다. 미시마 유키오가 출연한 영화들이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인물을 연기하고 있으며, 점차 현실감과 살기를 더해가는 연기 변화가 주목받았다.[35][88]
오기 마사히로는 『인정』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주변 배우들을 압도하는 현실적인 연기로 유신 전야의 테러리스트를 훌륭하게 연기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행동 미학과 겹쳐서 죽음의 행위가 반복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논평했다.[88]
시나다 유키치는 영화 개봉 16년 후,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 15년 후에 재상영된 『인정』을 보고, 가츠 신타로의 매력과 미시마 유키오의 박력 있는 연기를 호평하면서, 미시마 유키오가 다나카 신페이가 아닌 미시마 유키오 자신을 연기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평했다.[12][24]
야마우치 유키토는 미시마 유키오의 출연으로 인해 『인정』의 주제가 그의 사상과 미학에 겹쳐진 것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미시마 유키오의 인상적인 연기가 감독의 의도를 넘어선 선전 효과를 가져왔으며, "미시마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 양상이 되었다고 분석했다.[12]
7. 2. 미시마 유키오의 연기 평가
미시마 유키오는 영화 『인정』에서 다나카 신페이 역을 맡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호평을 받았다.[12][16] 과거 영화 『바람둥이』에서는 아마추어 연기라는 혹평을 받았지만, 『인정』에서는 훌륭한 연기력을 선보였다.[12][23] 고샤 히데오 감독은 미시마 유키오의 기용으로 다나카 신페이 역이 빛났다고 회상하며, 그의 연기가 가츠 신타로를 압도하는 살기를 띠었다고 평가했다.[12][45]사이토 마사하루는 『인정』의 주제가 미시마의 『문화방위론』과 겹쳐지며, 그의 미학과 사상이 독단의 카타르시스를 동반한다고 해설했다.[12][86]
마스무라 야스조는 『바람둥이』에서 미시마를 혹평했지만, 『인정』에서의 할복 연기는 높이 평가했다.[87]
1970년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이후, 『인정』은 미시마와 더욱 일체화되어 회자되었다.[35][88] 과거 출연작(『바람둥이』, 『우국』)과 함께 『인정』에서의 죽음은 점차 현실성을 더해갔다는 평가를 받는다.[35][88]
오기 마사히로는 미시마가 『인정』에서 보여준 "살기의 리얼리티"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행동 미학과 겹쳐서 "반복되는 죽음의 행위"에 주목해야 한다고 평했다.[88]
시나다 유키치는 영화 개봉 16년 후, 미시마의 죽음 15년 후 『인정』을 재감상하고, 미시마의 연기가 이치가야에서의 자결과 무관하지 않은 긴장감을 띠고 있다고 평가했다.[12][24]
야마우치 유키토는 미시마의 출연으로 인해 『인정』의 주제가 그의 사상과 미학에 겹쳐진 것은 필연적이라고 평가했다. 미시마의 인상적인 연기는 감독의 의도 이상의 선전 효과를 가져왔으며, "미시마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 양상이 되었다고 분석했다.[12] 야마우치 유키토는 다음과 같이 미시마와 영화의 관계를 설명했다.
> 미시마는 배우로서 출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정』은 작가로서의 미시마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짊어진 운명이었다. 그 운명은, 더 나아가 미시마의 죽음으로 인해 증폭되어 간다. 더 이상 숙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미시마와 일체화된 영화로서 이야기되는 것이다. (중략) 미시마는 작품 세계의 현실에서 실생활의 현실로 들어가, 그 사상이나 미학을 현실화하는 타입의 작가이다. 즉 현실의 인생 그 자체가, 문학적 허구의 투영인 것이다. (중략) 그러한 소설가가 이번에는 영화라는 허구 속에서,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하게 된다면, 더 이상 그것은 시나다가 말하는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 자신에게 있어야 할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면, 『인정』에는 미시마의 죽음과 행동의 수수께끼를 푸는 하나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12]
8. 재상영
1985년 11월 쇼치쿠 배급으로 재상영되었다.[12][16] 동시 상영작은 고샤 히데오 감독의 《세 마리의 사무라이》였다.[12][16] 재상영 당시 문구는 "때·대·는 챔버라", "벤다! 벤다! 벤다! 문답 무용으로 벤다! 베어야 할 놈이 있다. 살기 위해 사람을 벤다……", "지금, 불가능한 캐스팅의 묘!", "오로지 과격하게……오로지 미적으로……동란의 막말을 달려나간 젊은 남자들의 뜨거운 전설"이었다.[16][26]
세라 마사노리의 곡 '발라드가 들려'가 재상영 당시 이미지송으로 사용되었다.[16] 이 곡은 세라의 앨범 《Fine, and you?》(캐니언 레코드)에 수록되어 있다.[16] 세라는 《인정》에 대해 "ROCK 스피릿"이나 "젊은이의 숨결의 훌륭함"이 있다고 평하며, 영화를 다 보고 "몸 어딘가에 힘이 솟아나는 것이 기뻤다"고 감상했다.[82] 초슈 리키는 "승부의 세계에 사는 남자로서 이조의 맹렬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공감했다"며, "칼을 들고 사람을 베는 위엄"이 영화에 가득 차 자신도 링 위에서 "인정 리키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83]
하지만 재상영 배급 수입은 1.5억엔에 미치지 못했다.[84]
9. 에피소드
미시마 유키오는 영화 촬영 기간 동안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와 도쿄를 오가며 나병왕의 테라스, 춘설 궁장월 연습, 방패의 모임 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23] 오사카행 비행기에서 나카다이 타츠야가 보디빌딩을 하는 이유를 묻자, 미시마는 할복할 때 지방이 나오는 것이 싫기 때문이라고 답했고, 나카다이는 이를 농담으로 생각했다.[31][90]
촬영 후, 출연자들은 기온 등에서 술을 마셨는데, 야마모토 케이는 미시마가 술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이야기할 때 눈 깜빡임을 하지 않아 자신도 따라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62] 야마모토 케이가 연기한 미나가와가 독주를 마시고 죽는 장면은 와카야마현 호반에서 촬영되었는데, 시체가 된 야마모토의 목젖이 움직여 필름을 수정해야 했다.[62]
고샤 히데오 감독은 촬영이 끝난 후 미시마의 요청으로 할복 장면과 격투 장면의 스틸 사진 100장 정도를 건네주었다.[12][34][45] 미시마는 돌아오는 신칸센에서 이 사진들을 몰래 보며 씩 웃었고, 이를 고샤에게 들킨 후에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고 말했다.[12][34][45]
9. 1. 고샤 히데오와 미시마 유키오
다이에이 교토 촬영소에서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에서 자신의 작품 활동과 방패의 모임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23] 어느 날, 오사카행 비행기 안에서 나카다이 타츠야가 미시마에게 왜 보디빌딩을 하는지 묻자, 미시마는 "나는 죽을 때 할복할 거야. 할복해서 지방이 나오면 싫잖아."라고 답했다.[31][90] 나카다이는 이 말을 농담으로 생각했다고 한다.매일 촬영이 끝나면 출연자들은 기온 등에서 술을 마셨는데, 야마모토 케이는 미시마가 술은 거의 마시지 않지만 이야기를 할 때 눈 깜빡임을 하지 않아 자신도 따라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62]
영화 촬영이 끝난 후, 고샤 히데오 감독은 미시마에게 할복 장면과 격투 장면의 스틸 사진 100장 정도를 건네주었다.[12][34][45] 돌아가는 신칸센에서 고샤, 미시마, 카츠, 나카다이가 함께 탔고, 미시마를 제외한 3명은 나고야에서 내렸다.[12][34][45] 고샤가 미시마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미시마는 혼자 가방에서 스틸 사진을 꺼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얼굴로 씩 웃으며 보고 있었다"고 한다.[12][34][45] 미시마는 쑥스러워하며 소년처럼 웃으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도쿄로 돌아간 후, 미시마는 고샤에게 "신칸센 안에서 그걸 보인 건, 내 나르시시즘의 원점 같은 것을 완전히 눈 앞에서 본 듯한 느낌이었어. 그렇게 부끄러운 경험은 처음이야."라고 말했다.[12][34][45]
고샤 히데오는 전시 중 특공대에 지원했으나 일본뇌염 초기 증상으로 입대가 늦어져 실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본토 결전을 위한 훈련을 받았다.[59] 많은 동기생들이 대만이나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전사했지만, 고샤는 후쿠치야마에서 패전을 맞이했다.[59] 고샤는 미시마 유키오에게 자신의 전쟁 체험을 이야기했고, 미시마는 "실제로 자신의 목숨을 던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지만, 그런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일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34][45]
고샤 감독이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미시마는 "아이에게는 아이의 인생이 있다. 아이를 귀여워하는 마음에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이데올로기를 굽히거나, 아이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좌우되거나 영향을 받는다면 훌륭한 연출가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68]
영화 공개 16년 후이자 미시마 사후 15년째인 1985년, 고샤 감독은 『인정』 재상영에 즈음하여 "나보다, 더욱 뛰어넘는 곳에서 이 재공개를 기뻐해 줄 사람은 틀림없이 고 미시마 유키오 씨입니다."라고 말했다.[12][41]
9. 2. 가쓰 신타로와 미시마 유키오
가쓰 신타로는 미시마 유키오를 다나카 신베이 역으로 추천했고, 미시마는 이를 수락했다. 가쓰는 미시마가 배우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미시마와의 대화 장면을 담은 카세트 테이프를 미리 준비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23] 미시마는 가쓰의 도움 덕분에 처음으로 "역에 몰입하는 심경과 기쁨"을 느꼈다고 밝혔다.[91]촬영장에서 가쓰는 미시마에게 검술을 해보라고 권유하며 긴장을 풀어주는 등, 미시마가 편안하게 촬영에 임할 수 있도록 도왔다.[23] 미시마는 가쓰와의 공동 출연을 통해 영화에 대한 재미를 느꼈다고 언급하며, 가쓰를 "좋은 선생님"이라고 칭했다.[55][64]
나카다이 타츠야는 비행기에서 미시마에게 보디빌딩을 하는 이유를 물었고, 미시마는 할복할 때 지방이 나오는 것이 싫어서라고 답했다.[31][90]
촬영이 끝난 후, 고샤 히데오 감독은 미시마에게 할복 장면 등의 스틸 사진을 건넸다. 신칸센에서 미시마는 이 사진들을 보며 씩 웃었고, 이를 본 고샤에게 자신의 나르시시즘의 원점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고 말했다.[12][34][45]
야마모토 케이는 미시마가 촬영장에서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이야기할 때 눈 깜빡임을 하지 않아 자신도 따라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62]
9. 3. 미시마 유키오의 개인사
미시마 유키오는 1966년 자신이 제작한 영화 《우국》을 본 고샤 히데오 감독이 떠올렸고, 각색을 맡은 하시모토 시노부도 찬성하면서 영화 《인간참극》에 다나카 신베에 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34][45] 처음에는 가츠 신타로가 다이에이 기획 부장 후지이 히로아키를 통해 미시마에게 출연을 제안했고, 미시마는 즉시 승낙했다.[23] 고샤 감독이 정식으로 출연을 의뢰했을 때도 미시마는 기뻐하며, "가발은 괜찮을까?"라고 웃으면서도 바로 승낙 전화를 걸었다.[34][45]미시마는 자신이 다나카 신베에 역에 캐스팅된 이유에 대해, 검도를 하고 테러리즘을 예찬하는 듯한 이미지, 그리고 자신을 기용하면 선전비를 아낄 수 있다는 계산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면서도 "지적인 부분"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 자신을 기쁘게 했다고 말했다.[47]
당시 미시마는 다테노카이를 이끌고 자위대 체험 입대를 하는 등, 자신의 사상과 미학을 실천하는 모습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 "슈퍼스타"로 불렸다.[12][34][48] 잡지 『헤이본 펀치』의 독자 인기 투표에서는 미후네 도시로를 제치고 "미스터 댄디"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48][49]
1969년 4월 25일, 영화 제작 기자 회견에서 미시마는 땋은 머리 사무라이 차림으로 참석했다.[12] 프로듀서는 미시마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가츠 신타로, 나카다이 타츠야, 이시하라 유지로 등 개성이 강한 배우들과 대적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12][52] 미시마는 시대극 출연이 처음이지만, 존왕 지사의 심정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어 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55] 또한 검도 5단의 실력자였던 미시마는 가고시마의 시현류를 배울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12][18][56]
미시마는 고샤 감독에게 테러리스트 연기에 대해 질문했고, 고샤는 "광기에 가까운 당신의 눈"과 "얼굴 골상"이 범죄자와 닮았다고 답했다.[37][46] 미시마는 크게 웃으며 고샤 감독에게 신뢰를 갖게 되었다.[37][46]
촬영이 끝난 후, 미시마는 고샤 감독에게 할복 장면과 격투 장면의 스틸 사진을 요청했고, 고샤는 이를 미시마에게 전달했다. 신칸센에서 미시마는 스틸 사진을 몰래 보며 씩 웃었고, 이를 들킨 후에는 소년처럼 웃으며 자신의 나르시시즘의 원점을 본 것 같아 부끄러웠다고 말했다.[12][34][45]
오사카행 비행기 안에서 나카다이 타츠야가 미시마에게 보디빌딩을 하는 이유를 묻자, 미시마는 "할복할 때 지방이 나오면 싫잖아"라고 답해, 나카다이는 농담으로 받아들였다.[31][90]
10. 극화
1969년 8월부터 9월까지 히라타 히로시가 소년화보사의 『주간 소년 킹』에 극화(만화)를 연재했다.[106] 히라타 히로시의 극화 시리즈 제3탄으로, 제1탄은 『자토이치 바다를 건너다』, 제2탄은 『고용금』이었다.[106] 미시마 유키오는 히라타 히로시의 그림을 좋아했다.[107]
단행본 수록 정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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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好きな日本映画男優プロフィール――勝新太郎
2014
[29]
서적
第8章 騒がしくも、ゆるやかな下降 1961-70――大映のスター路線
2014
[30]
서적
私の好きな日本映画男優プロフィール――仲代達矢
2014
[31]
서적
五社さんはイタリアンだと思います
2014
[32]
서적
私の好きな日本映画男優プロフィール――石原裕次郎
2014
[33]
서적
風林火山
2015
[34]
서적
第二章 映画『人斬り』と三島由紀夫――田中新兵衛と永井尚志
2011
[35]
서적
映画出演
2000
[36]
간행물
私の好きな日本映画女優プロフィール――倍賞美津子
[37]
간행물
第二章 突進
[38]
간행물
自分の作品について
1973-06
[39]
간행물
人斬り以蔵
[40]
간행물
映画は誰のためになぜ作られるのか
1969-10
[41]
간행물
'『人斬り』について――人斬り以蔵は十六年前の私の分身といっていい'
[42]
간행물
演出家・五社英雄の歩み
[43]
간행물
三匹の侍
[44]
간행물
第五章 文と武の人――映画『人斬り』
[45]
간행물
演出家の眼
1972-12
[46]
뉴스
内外タイムス
1971-11-26
[47]
뉴스
“殺意”の無上の興奮――映画『人斬り』田中新兵衛にふんして
読売新聞
1969-07-01
[48]
간행물
第一章 “キムタク”なみのアイドルだった
[49]
간행물
三島由紀夫はパンチ世代のアイドルである
1967-05-08
[50]
간행물
ミスター・インターナショナル
1968-08-26
[51]
간행물
第三章 スーパースター第一号誕生!
[52]
뉴스
法亢堯次談話
東京新聞
1969-04-26
[53]
뉴스
“サムライ”誕生・殺し屋を演ずる三島由紀夫
週刊大衆
1969-05-15
[54]
뉴스
'『人斬り』に三島由紀夫氏、薩摩の刺客 田中新兵衛、北辰一刀流の腕生かす'
報知新聞
1969-04-26
[55]
간행물
『人斬り』出演の記
1969-08
[56]
뉴스
三島談話
スポーツニッポン
1969-04-26
[57]
간행물
大映どんでんがえ史
[58]
서적
映画美術とは何か――美術監督・西岡善信と巨匠たちとの仕事
平凡社
2000-02
[59]
간행물
第一章 情念
[60]
간행물
第三章 転落
[61]
뉴스
週刊サンケイ
1976-11-08
[62]
간행물
左翼青年役の研究を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ですよ
[63]
간행물
風景に負けなかった座頭市と狂四郎
[64]
뉴스
撮影風景報道
報知新聞
1969-06-06
[65]
간행물
武士道とは生きることと見たり
1969-10
[66]
뉴스
現代を斬るか三島“新兵衛”」「異色作家、示現流の特訓
夕刊フジ
1969-05-17
[67]
뉴스
あの人はもういない
1970-12-12
[68]
간행물
『からっ風野郎』
[69]
간행물
第五章 “ひどいから、いい”感覚
[70]
간행물
残酷美について
1963-08
[71]
뉴스
血も凍る“残酷殺陣”プロとアマの競演
サンケイスポーツ
1969-06-16
[72]
잡지
三島由紀夫氏、暗殺者を演ず
週刊現代
1969-07-03
[73]
서적
川島
1996
[74]
서적
映画論
1999
[75]
간행물
ムック
2014
[76]
서적
35巻
2003
[77]
서적
年表
1990
[78]
서적
山内・左
2012
[79]
신문
武市半平太――映画『人斬り』で思うこと
サンケイ新聞
1969-08-02
[80]
뉴스
侍姿の三島由紀夫、写真を初公開 10月12日、京都国際映画祭で
https://web.archive.[...]
共同通信
2017-09-27
[81]
웹사이트
「人斬り」クレジット
https://www.allcinem[...]
[82]
서적
このチャンバラ映画に熱い8ビートを感じた
1985
[83]
서적
久しぶりに胸がスカッとする映画だった
1985
[84]
학술지
1985年度日本映画・外国映画業界総決算 日本映画
キネマ旬報社
1986-02
[85]
잡지
“人斬り”の剣――いかなる状況をたち切るのか
映画芸術
1969-10
[86]
잡지
日本映画批評
1969-09
[87]
잡지
三島由紀夫さんのこと
1986-05
[88]
잡지
映画で予習かさねた死の行為――“からっ風野郎”から“人斬り”まで
新評
1971-01
[89]
잡지
小説とは何か 十一
波
1970-05
[90]
신문
時代の証言者〈役者の条件20〉――三島由紀夫 肉体の美学
読売新聞
2015-06-29
[91]
잡지
ごりっぱ! 俳優三島由紀夫
週刊読売
1969-08-22
[92]
신문
三島由紀夫映画を語る/『人斬り』撮影中をたずねて
読売新聞夕刊
1969-06-07
[93]
잡지
広域重要人物きき込み捜査『エッ! 三島由紀夫??』
平凡パンチ
1969-06-23
[94]
잡지
感想――広域重要人物きき込み捜査『エッ! 三島由紀夫??』
平凡パンチ
1969-06-23
[95]
서적
II 三島由紀夫の祖先を彩る武家・華族・学者の血脈
1983
[96]
서신
林房雄宛ての書簡
1969-06-13
[97]
서신
ドナルド・キーン宛ての書簡
1968-01-18
[98]
강연
国家革新の原理――学生とのティーチ・イン その三
1968-11-16
[99]
서적
討論 三島由紀夫vs.東大全共闘―美と共同体と東大闘争
新潮社
1969-06
[100]
서적
対話・日本人論
番町書房
1966-10
[101]
잡지
現代における右翼と左翼――リモコン左翼に誠なし
1969-12
[102]
서적
砂漠の住民への論理的弔辞――討論を終へて
新潮社
1969-06
[103]
신문
維新の若者
報知新聞
1969-01-01
[104]
서적
おわりに
2016
[105]
간행물
三島映画略説――雑誌、新聞記事から
2006
[106]
간행물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週刊少年キング1969 7(36)巻
[107]
뉴스
劇画における若者論
サンデー毎日
197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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