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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슈반슈타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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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독일 바이에른주에 위치한 성으로, 19세기 낭만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루트비히 2세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영감을 받아 건설했으며, 중세 기사도와 게르만 신화를 주제로 한 내부 장식이 특징이다. 1868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892년에 완공되었으며, 건설에는 19세기 후반의 최신 기술이 적용되었다. 연간 15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인기 명소로,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영향을 미쳤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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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슈반슈타인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2013년 노이슈반슈타인 성, 북동쪽을 바라보고 있음
2013년 노이슈반슈타인 성, 북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위치호엔슈방가우, 독일
소유주바이에른 궁전 부서
착공일1869년 9월 5일
완공일약 1886년 (개방)
건축 양식로마네스크 리바이벌
건축가에두아르트 리델
기타 설계자루트비히 2세, 크리스티안 얀크
토목 기사에두아르트 리델, 게오르크 폰 돌만, 율리우스 호프만
독일어 명칭Schloss Neuschwanstein
남부 바이에른어 명칭Schloss Neischwanstoa
추가 정보

2. 위치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독일 바이에른주 남서쪽 경계에 있는 슈방가우 자치구에 위치하며, 고도는 약 800m이다.[4] 성이 자리한 곳은 남쪽으로 오스트리아 국경과 가까운 알프스 산기슭이 시작되고, 북쪽으로는 비교적 평탄한 언덕 지형이 펼쳐지는 지점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오스트알고이군 퓌센에서 동남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있다.

중세 시대에는 현재 성이 있는 지역에 3개의 성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슈반슈타인 성이라고 불렸다.[4] 1832년, 훗날 노이슈반슈타인성을 짓게 되는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인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2세가 이 폐허가 된 슈반슈타인 성을 사들여, 네오 고딕 양식의 호엔슈방가우성으로 재건축했다. 1837년에 완공된 이 성은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는 어린 시절의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5]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루트비히 2세가 유년기를 보낸 호엔슈방가우성 위쪽의 험준한 언덕 위에 세워졌다. 이 자리에는 원래 포어더호엔슈방가우 성과 힌터호엔슈방가우 성이라는 두 개의 중세 성채가 있었으나, 19세기에는 폐허만 남아 있었다.[6][7][8] 루트비히 2세는 이 두 폐허 자리에 새로운 성을 짓기로 결정하고, 처음에는 '호엔슈방가우 신성'이라고 불렀다.[37] 성의 이름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노이슈반슈타인de, 새로운 백조의 돌)은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한 후인 1886년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는 현재 호엔슈방가우성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옛 '슈반슈타인 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10][72] 성 주변에는 알프제와 슈반제라는 두 개의 호수가 있다.[6]

3. 역사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에 의해 19세기에 건축된 성이다. 오스트리아 국경에 가까운 오스트알고이군 퓌센의 동남동 방향(직선 거리 약 4km)에 위치하며, 인근에는 루트비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소유했던 호엔슈방가우 성이 있다.

Neu Schwanstein|노이슈반슈타인deu(신백조석)이라는 이름은 현재 호엔슈방가우성이 있는 부지에 과거 존재했던 슈반슈타인 성에서 유래하여 1886년에 붙여진 이름이며, 건설 당시에는 '호엔슈방가우 신성'이라고 불렸다.[72] 루트비히 2세는 중세 기사도 이야기에 대한 강한 동경과 바그너악극 세계에 심취하여, "옛 독일 기사 성의 진정한 모습"[73]을 구현하고자 이 성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는 1867년 바르트부르크 성과 피에르퐁 성 방문에서 영감을 얻었으며,[77]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오페라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을 연상시키는 성을 짓겠다고 밝혔다.[78]

성의 디자인은 건축가가 아닌 궁정 극장의 무대 디자이너 크리스티안 얀크가 초기 구상을 담당했으며, 건축가 에두아르트 리델 등이 이를 구체화했다. 건설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후기 고딕 양식역사주의와 절충주의에 기반하여 1869년부터 시작되었다.[74] 당시 최신 기술을 동원하여 지어진 벽돌조 성으로, 1886년에는 루트비히 2세가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일부 완공되었다. 이후 그는 수도 뮌헨으로 돌아가지 않고 주로 이 성에 머물렀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는 교권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으며 정치에서 점점 멀어졌고,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비롯한 여러 건축 프로젝트에 광적으로 몰두하면서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886년, 그는 정신 질환 판정을 받고 왕위에서 퇴위당했으며, 3일 뒤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이로 인해 그는 성의 완성을 보지 못했으며, 성의 최종 완공은 1892년에 이루어졌다.

대포의 발명으로 성의 군사적 기능이 사라진 시대였기에,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순전히 루트비히 2세의 낭만적인 이상과 취미를 위해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비용은 바이에른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90]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이 죽으면 성을 파괴하라고 유언했지만, 그의 사후 성은 파괴되지 않고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오늘날 성은 로맨틱 가도의 종착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으며,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성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루트비히 2세와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지만, 성은 보존되었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근대에 지어진 성관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세계유산에 등재되지 못했으나, 2015년 린더호프성, 헤렌킴제성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되었고, 2024년 2월 정식 등록 신청이 이루어졌다.[75] 현재 성 내부는 유료로 견학할 수 있다.

3. 1. 건설 배경

노이슈반슈타인성 근처의 호수


루트비히 2세의 아버지였던 막시밀리안 2세는 폐허였던 호엔슈방가우 성('백조의 성')을 사들여 고딕 양식으로 개조하고 재건축했다. 루트비히 2세는 어린 시절을 이 성에서 보냈기 때문에 건축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교류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바그너가 게르만 신화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루트비히 2세 역시 게르만 신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호엔슈방가우 성만으로는 게르만 신화의 세계를 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이에 걸맞은 새로운 성을 짓기로 결심했다.

이 구상은 1862년, 루트비히 2세가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그는 노이슈반슈타인성 건설에 앞서 뮌헨 왕궁 통로에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장면을 벽화로 그리게 했고, 자신의 궁전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했으며, 킴제 호수에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궁전을 짓는 등 건축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린 시절 교류했던 바그너를 다시 불러 자신의 구상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바그너로 인한 국고 낭비에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루트비히 2세는 결국 바그너를 추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의욕을 잃은 루트비히 2세는 퇴위까지 생각했으나, 새로운 구상을 통해 다시 활력을 찾았다. 특히 1867년에 떠난 두 번의 여행은 노이슈반슈타인성 건설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다. 5월에는 아이제나흐 근처의 재건된 바르트부르크 성을 방문했고,[12] 7월에는 피에르퐁 성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외젠 비올레르르 뒤크가 폐허를 역사주의 양식의 궁전으로 복원 중인 곳이었다.[13][14] 루트비히 2세는 이 두 성이 중세 시대의 낭만주의적 해석을 보여줄 뿐 아니라,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의 세계를 구현한다고 믿었다.[15] 그는 "나 자신의 작품"으로서 중세 기사도 이야기에 대한 동경을 구체화하는 낭만적인 성을 짓고자 했다.[77]

노이슈반슈타인 프로젝트 드로잉 (Christian Jank 1869)


1868년 2월, 할아버지인 루트비히 1세 국왕이 사망하면서 그의 세습 재산에 사용되던 상당한 자금이 확보되었다.[37][16] 이를 통해 루트비히 2세는 수도 뮌헨에서 멀리 떨어진 익숙한 풍경 속에 중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현할 개인적인 은신처, 즉 노이슈반슈타인성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1868년 5월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옛 독일 기사들의 성과 같은 진정한 스타일로 푈라트 협곡 근처의 호엔슈방가우 옛 성터 폐허를 재건할 의향"을 밝히며, 성이 "탄호이저"(배경에 성이 보이는 가수들의 홀)와 "로엔그린"(성 안뜰, 열린 복도, 예배당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게 할 것이라고 썼다.[17][78]

그러나 성을 지으려던 지역은 지형이 험난하여 원래 계획대로 건설하기 어려웠다. 이에 성의 설계는 당초 계획과 다른 새로운 형태로 수정되었고, 1868년 건설 작업이 시작되었다. 건축 설계 초안은 궁정 극장의 무대 장치 및 미술 담당 화가였던 크리스티안 얀크가 작성했고, 건축가 에두아르트 리델이 이를 구현했다.[18] 기술적인 문제로 기존 성터의 폐허는 계획에 통합되지 못했다. 초기 아이디어는 뉘른베르크 성 양식을 참고했으나, 거부되고 점차 확장되어 결국 바르트부르크 성을 모델로 한 더 웅장한 궁전으로 계획이 확정되었다.[19] 루트비히 2세는 모든 세부 계획과 초안을 직접 검토하고 승인했으며,[20] 그의 깊은 관여로 인해 노이슈반슈타인성은 건축가들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루트비히 2세 자신의 창조물로 여겨진다.[21]

이후 루트비히 2세는 교권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으며 정치에서 점차 멀어졌고, 건축에 광적으로 몰두했다. 노이슈반슈타인성 외에도 여러 건축물을 동시에 지으면서 국고를 낭비하고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결국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정신 질환 판정을 받고 왕위에서 강제 퇴위당했으며, 3일 뒤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공식 사인은 자살로 발표되었으나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아있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1892년에야 완공되었으므로, 루트비히 2세는 생전에 성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성(城) 낭만주의'로 알려진 동시대 건축 양식과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루트비히 2세의 열정을 구현한다. 19세기는 많은 성들이 새로 지어지거나 재건축되던 시기였으며, 종종 더 그림 같은 모습으로 크게 변경되기도 했다. 노이슈반슈타인성과 유사한 궁전 건설 프로젝트는 독일 여러 주에서 이미 진행 중이었고, 호엔슈방가우 성, 리히텐슈타인 성, 호엔촐레른 성, 라인강의 슈톨첸펠스 성 등이 그 예이다.[11] 동시대 건축 비평가들은 19세기 마지막 대규모 궁전 건설 프로젝트 중 하나인 노이슈반슈타인성을 키치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루트비히 2세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유럽 역사주의의 주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22][23] 재정적인 이유로, 노이슈반슈타인성과 유사한 프로젝트였던 팔켄슈타인 성 건설은 계획 단계에 머물렀다.[24]

궁전 건축 양식은 19세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로마네스크 건축(단순한 기하학적 형태, 반원 아치), 고딕 건축(수직적 선, 뾰족한 탑, 섬세한 장식), 비잔틴 건축 및 미술(왕좌의 홀 장식) 양식이 절충적으로 혼합되었고, 19세기 기술이 접목되었다. 궁전 정면의 ''파르지팔''과 성 게오르기우스 그림은 알고이 지역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레스코 기법인 지역 ''뤼프트말러라이''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기사 회관 갤러리의 미완성 초안은 아르 누보 요소를 예고하기도 했다.[25] 노이슈반슈타인 디자인의 핵심은 연극적인 요소로, 무대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티안 얀크는 자신의 무대 배경 디자인 경험을 활용했다.[47] 초기에는 신고딕 양식으로 계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오페라 주제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에서 ''파르지팔''로 점차 옮겨갔다.[27]

대포의 발명으로 성의 군사적 기능이 사라진 시대였으므로, 루트비히 2세는 순전히 개인적인 취미와 낭만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성을 지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어 바이에른 왕국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90]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이 죽으면 성을 파괴하라고 유언했지만, 그의 사후 성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늘날 바이에른의 중요한 관광 자원이 되었다.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성 역시 이 성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2. 건설 과정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는 어린 시절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고딕 양식으로 개조한 호엔슈방가우 성(일명 '백조의 성')에서 자랐다. 이 경험은 그가 건축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게르만 신화에 심취했다. 바그너는 게르만 신화를 주제로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루트비히 2세는 기존의 호엔슈방가우 성이 이 신화들을 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성을 짓기로 결심했다.

18세에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뮌헨 왕궁 통로에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장면을 벽화로 그리게 하고, 자신의 궁전을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했으며, 킴 호수에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궁전을 짓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바그너를 다시 불러들였으나, 바그너로 인한 국고 낭비 논란과 국민적 반발로 인해 결국 그를 추방해야 했다.

이 일로 잠시 의욕을 잃었던 루트비히 2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 방문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는 호엔슈방가우 성 맞은편에 바르트부르크 성과 같은 양식의 성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건설 중인 노이슈반슈타인성: 아직 보우(Bower)가 없고 직사각형 탑(Rectangular Tower)이 건설 중인 모습 (1882–85년 사진)


건설 중인 노이슈반슈타인성: 위쪽 뜰(c. 1886년 사진)


그러나 건설 예정지의 험준한 지형 때문에 원래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1868년, 중세 시대의 성터 폐허를 완전히 철거하고 폭파한 뒤[26] 1869년 9월 5일에 성의 초석이 놓였다. 1872년에는 지하실이, 1876년에는 1층까지 완공되었고, 게이트하우스가 가장 먼저 완성되었다. 1882년 말 게이트하우스가 완공되고 가구까지 갖춰지자, 루트비히 2세는 이곳에 임시로 머물며 건설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다.[27] 건설 책임자는 1874년 에두아르트 리델에서 게오르크 폰 돌만으로[28], 1884년에는 다시 율리우스 호프만에게 넘어갔다. 성은 벽돌로 뼈대를 세우고 외벽은 다양한 종류의 암석으로 덮었다. 흰색 석회암은 인근 채석장에서, 아치와 돌출 창에 쓰인 사암 벽돌은 뷔르템베르크의 슐라이트도르프에서, 창문, 아치 리브, 기둥, 주두 등에 사용된 잘츠부르크 근처 운터스베르크의 대리석을 가져왔다.[29] 나중에 추가된 왕좌의 홀에는 강철 프레임워크가 필요했다. 건축 자재 운반에는 증기 크레인이 사용되었고, 현장 내에서도 여러 크레인이 활용되었다.

건설 현장은 약 20년간 지역의 주요 고용주 역할을 했다.[30] 1880년에는 약 200명의 장인이 현장에서 일했으며[31], 국왕의 촉박한 마감 요구와 잦은 설계 변경 시에는 최대 300명의 노동자가 석유 램프 불빛 아래 야간 작업을 하기도 했다. 1879-1880년 통계에 따르면 잘츠부르크 대리석 약 421841.02kg, 사암 약 1406136.75kg, 벽돌 40만 개, 비계용 목재 2050m3 등 막대한 양의 자재가 투입되었다. 1870년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보험 협회가 설립되어 국왕이 일부 비용을 지원했으며, 건설 중 사고 사망자(약 30명으로 기록됨)의 유족에게는 소액의 연금이 지급되었다.

루트비히 2세는 정치에서 점차 멀어져 건축에 광적으로 몰두했다. 1884년, 그는 아직 미완성 상태였던 팔라스(Palas, 성의 본관)로 이주했고[32], 1885년에는 어머니 마리의 6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성으로 초대했다.[33] 1886년까지 팔라스의 외부 구조는 거의 완성되었다.[32] 같은 해, 그는 푈라트 협곡 위의 나무 다리였던 마리엔 다리(Marienbrücke)를 강철 구조물로 교체했다. 루트비히 2세에게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왕실 궁정 전체를 수용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자신만의 거주 공간과 하인들의 방만 갖춘, 일종의 '거주 가능한 연극 무대'이자[32], 1883년에 사망하여 성을 방문하지 못한 리하르트 바그너를 기리는 '우정의 사원'이었다.[34] 그는 평생 총 172일 동안 이 성에서 살았다.[35]

1886년 노이슈반슈타인성


국왕의 요구가 늘어나면서 건설 비용은 계속 증가했다. 설계 초안과 예상 비용은 반복적으로 수정되었다.[36] 원래 소규모 서재가 계획되었던 자리에 웅장한 왕좌의 홀이 들어섰고, '무어 홀'과 같은 일부 계획은 자금 부족으로 취소되었다.[36] 완공 예정일은 1872년이었으나 계속 연기되었다.[36] 노이슈반슈타인성 외에도 로코코 양식의 린더호프 궁전과 바로크 양식의 헤렌킴제 궁전 건설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국왕의 재정은 빠르게 고갈되었다.[37] 이 비용은 국왕의 개인 재산과 수입, 그리고 1871년부터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정치적 협력을 제공한 대가로 받은 비밀 자금으로 충당되었으며, 바이에른 국가 재정에 직접적인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32][38][39]

그러나 총 건설 비용은 620만 독일 금 마르크에 달했으며,[40] 이는 초기 예상 비용인 320만 마르크의 거의 두 배에 달했다.[38] 국왕은 계속해서 새로운 신용 한도를 열었다.[41] 1876년에는 지급 불능의 위험을 지적한 궁정 고문이 해고되었다.[42] 1883년까지 그는 이미 700만 마르크의 빚을 졌고,[43] 1884년 봄과 1885년 8월에는 각각 750만 마르크와 650만 마르크의 부채 전환이 필요했다.[41]

빚이 1400만 마르크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트비히 2세 국왕은 건축 프로젝트의 지속을 주장했으며, 채권자들이 그의 궁전을 압류하면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42] 1886년 초, 루트비히는 내각에 600만 마르크의 신용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4월에는 비스마르크의 조언에 따라 의회에 돈을 신청했다. 6월, 바이에른 정부는 당시 노이슈반슈타인성에 머물고 있던 국왕을 폐위하기로 결정했다. 6월 9일, 그는 무능력 선고를 받았고 6월 10일에는 폐위 위원회를 게이트하우스에서 체포했다.[44] 그는 위원회를 예상하고 주변 지역의 헌병대와 소방대에 자신의 보호를 요청했다.[41] 베른하르트 폰 구덴이 이끄는 두 번째 위원회가 다음 날 도착했고, 국왕은 그날 밤 궁전을 떠나야 했다. 루트비히는 구덴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6월 13일, 두 사람은 베르크 성 근처 슈타른베르크 호수의 얕은 호숫가에서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루트비히 2세 사후인 1892년에야 최종 완공되었다. 그는 성의 완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대포의 발명으로 성의 군사적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지어진 이 성은 순전히 루트비히 2세의 개인적인 취미의 산물이었다. 이 취미 활동은 바이에른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다.[90]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이 죽으면 성을 파괴하라고 유언했지만, 성은 파괴되지 않고 오늘날 바이에른의 중요한 관광 자원이 되었다.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 성 역시 이 성을 모델로 삼았다. (아돌프 히틀러 또한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성은 보존되었다.)

3. 3. 루트비히 2세의 퇴위와 죽음

루트비히 2세는 노이슈반슈타인성 외에도 린더호프 성, 헤렌킴제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노이슈반슈타인 성보다 높은 바위산 위에 더욱 웅장한 팔켄슈타인 성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으며, 게다가 오리엔트풍의 궁전도 건설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건설 비용은 프로이센 왕국에 의한 독일 통일을 지지한 대가로 비스마르크로부터 받은 연금(Welfenfonds|벨펜폰트deu)과 왕가의 유산, 왕실 비용에서 지출되었다. 이는 바이에른 정부의 국고와는 별도 회계였지만, 거액의 왕실 공채를 발행하는 등 막대한 부채를 쌓았다[79].

건축에 대한 광적인 몰두는 루트비히 2세를 정치에서 점점 멀어지게 했고, 교권 강화를 둘러싸고 관료들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결국 거액의 부채 해소를 내각에 요구하기에 이르자, 위기감을 느낀 수상 루츠를 비롯한 내각은 루트비히 2세에 대한 정신 감정을 진행했다. 1886년, 루트비히 2세는 의료진으로부터 정신병 진단을 받고 통치 불능으로 선고되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79]. 그는 곧바로 베르크 성에 연금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 지 불과 3일 만인 1886년 6월 13일, 루트비히 2세는 주치의와 함께 슈타른베르크 호수 기슭을 산책하던 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79]. 사인은 자살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여러 정황상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그가 노이슈반슈타인성에 실제로 거주한 기간은 총 172일에 불과했다[79].

3. 4. 루트비히 2세 사후

1886년 6월 13일 루트비히 2세 국왕이 사망했을 당시, 성은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게이트하우스와 팔라스(Pallas)의 외부 구조는 대부분 완성되었지만, 사각 탑에는 여전히 비계가 설치되어 있었고, 왕의 구상 중 일부만 실현된 채 많은 부분이 미완성으로 남아 건설 공사가 중단되었다.[20][72] 성 단지의 핵심 부분으로 계획되었던 90m 높이의 요새와 상부 안뜰의 예배당은 실현되지 못했다.[20] 게이트하우스와 보어(Bower) 사이의 연결 날개, 팔라스 서쪽의 테라스와 분수가 있는 성 정원 계획도 폐기되었다.[45] 왕이 원했던 '무어 홀', 바르트부르크 성의 기사 목욕탕을 본뜬 '기사의 목욕탕', 보어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한 장면을 따서 만들려 했던 '신부 방',[47] 팔라스 1층과 2층의 객실, 그리고 대연회장 역시 미완성 프로젝트로 남았다.[36][31] 루트비히 2세는 성을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32]

1901년 베르크 성의 엽서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정면 외관과 주변 환경(포토크롬 인쇄, c. 1900)


그러나 국왕이 사망한 지 6주도 채 되지 않아, 섭정 루이트폴트 공작은 유료 방문객을 위해 성을 개방하도록 명령했다. 1886년 8월 1일부터 성 내부는 관광 시설로서 유료로 일반에 공개되었고, 성의 이름도 이때 공식적으로 "노이슈반슈타인성"으로 정해져 1886년 8월 5일 발행된 최초의 가이드북에 명시되었다.[72] 섭정공의 의뢰를 받은 건축가 Julius Hofmann|율리우스 호프만de은 1890년부터 1892년까지 최소한의 공사를 속행하여, 왕실 거주 공간의 로비와 복도를 1888년까지 더 단순한 스타일로 칠하고,[46] 보어(Bower)와 사각탑을 계획보다 단순화된 형태로 완성했다. 하지만 첨탑 등의 외부 장식이나 기사관 등은 최소한의 수준에 머물렀다.[80] 루트비히 2세의 유산 관리자들은 성 개방 수입 등으로 1899년까지 건설 부채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48] 이후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비텔스바흐 가문에게 안정적이고 수익성 있는 수입원이 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의 성들은 당시 바이에른 왕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49] 초기에는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구가 빨리 낡기도 했다.

1918년 바이에른이 공화국이 되면서 정부는 왕실 재산 목록(시민 목록, Zivillistede)을 사회화했다. 그 결과 1923년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분쟁 끝에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포함한 루트비히 2세의 성들은 국가에 귀속되었고, 현재 바이에른 주 재무부 산하의 바이에른 궁전 부서(Bayerische Schlösserverwaltung)에서 관리하고 있다. 인근 호엔슈방가우 성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Wittelsbacher Ausgleichsfonds|비텔스바흐 보상 기금de에 귀속되었다.[49] 방문객 수는 계속 증가하여 1939년에는 20만 명에 달했다.[49]

아돌프 히틀러가 1914년에 그린 성 그림


기념물, 미술 및 기록 보존반이 1945년 성에서 나치가 훔쳐간 예술품을 회수하는 모습


성은 외딴 위치 덕분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파괴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까지 이곳은 나치 독일의 점령지 라이히슬라이터 로젠버그 특별부대(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 für die besetzten Gebietede)가 프랑스 등 점령지에서 약탈한 예술품을 보관하는 창고로 악용되었다.[50] 성은 약탈한 예술 작품을 목록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전쟁 후 이곳에서 예술품 압수 규모를 기록한 39개의 사진 앨범이 발견되어 현재 미국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다.[51]

1945년 4월, 나치의 친위대(SS)는 성과 그 안의 예술품이 연합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을 폭파하려 했으나, 임무를 맡은 SS-''Gruppenführer''가 명령을 이행하지 않아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52] 전쟁이 끝날 때 성은 연합군 대표에게 손상되지 않은 채로 넘겨졌다.[52] 연합군 점령 당국은 궁전을 재구성된 바이에른 주 정부에 반환했다. 이후 뮌헨의 건물들이 폭격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바이에른 기록 보관소는 일부 방을 구출된 기록 보관 자료의 임시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53]

4. 구조

궁전 단지 개요; 계획된 예배당 위치는 노란색으로 표시


상부 안뜰 수준을 따라 실현되지 않은 예배당 위치에서 본 모습: 보우어(왼쪽, 엘자 폰 브라반트의 발코니 포함), 궁전 정면, 그리고 기사관(오른쪽), 로엔그린 2막에서 앤트워프 성에 대한 바그너의 무대 지시에 따름


게이트하우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가파른 절벽 능선 꼭대기에 약 150m 길이에 걸쳐 세워진 여러 개의 개별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길쭉한 건물들은 수많은 탑, 장식용 작은 탑, 박공, 발코니, 첨탑, 조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따라 대부분의 창문은 2중창 또는 3중창(triforia) 형태로 만들어졌다.[36] 성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비대칭적인 건물로 계획되었고 단계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중세 기사의 성에 대한 낭만주의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세 귀족 영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실제 요새로서의 방어 기능은 갖추지 않았다.[36]

성의 입구는 두 개의 계단 타워로 둘러싸인 대칭적인 게이트하우스이다. 동쪽을 향한 이 건물은 성에서 유일하게 벽면 색상이 다른 구조물로, 외부 벽은 붉은 벽돌, 안뜰 쪽 정면은 노란 석회암으로 마감되었다. 게이트하우스 상층부에는 루트비히 2세가 건설 과정을 지켜보던 초기 숙소가 있었다.

게이트하우스를 통과하면 두 개 층으로 이루어진 안뜰이 나온다. 낮은 층은 동쪽의 게이트하우스와 북쪽의 사각형 타워 기초 및 갤러리 건물로 둘러싸여 있다. 안뜰의 서쪽 끝에는 벽돌로 된 둑이 있는데, 이곳은 원래 계획되었던 예배당의 합창대 자리였다. 이 예배당은 지어지지 않았지만, 그 기초는 성 전체의 중심이 될 뻔했던 거대한 요새의 토대가 될 예정이었다. 이 요새 역시 왕가의 결정으로 건설되지 않았으며, 그 기초 흔적은 상부 안뜰에서 볼 수 있다.[55]

상부 안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조물은 높이 45m의 사각형 타워로, 주로 장식적인 역할을 하지만 북쪽 알프스 산기슭의 넓은 전망을 제공한다. 안뜰 북쪽에는 '기사관'이 자리한다. 이 3층 건물은 맹아치로 된 갤러리를 통해 사각형 타워 및 게이트하우스와 연결되며, 본래 영지와 서비스 공간으로 구상되었다. 안뜰 남쪽에는 '보우어'가 있는데, 기사관과 함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앤트워프 성'의 모티프를 형성한다. 포장 도로에는 계획되었던 궁전 예배당의 평면도가 새겨져 있다.

안뜰 서쪽 끝에는 성의 실제 주요 건물인 팔라스(Palas)가 있다. 왕의 주요 공간과 하인실을 포함하는 이 거대한 5층 구조물은 평평한 각도로 연결된 두 개의 큰 입방체 모양을 하고 있으며, 능선의 경사를 따라 지어졌다. 건물 모서리에는 두 개의 계단 타워가 있는데, 북쪽 타워는 높이가 65m에 달한다. 팔라스의 서쪽 정면에는 알프제를 조망하는 2층 발코니가 있고, 북쪽으로는 낮은 의자 타워와 온실이 뻗어 있다. 건물 전체는 수많은 장식용 굴뚝과 작은 탑들로 장식되어 있으며, 안뜰 쪽 정면에는 다채로운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

4. 1. 건축 양식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성(城) 낭만주의( Burgenromantikde )로 알려진 동시대 건축 양식과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에 대한 루트비히 2세 국왕의 열정을 모두 담고 있다. 19세기에 많은 성들이 새로 지어지거나 재건되었는데, 종종 더 그림 같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한 변화를 거쳤다. 노이슈반슈타인성과 비슷한 궁전 건설 프로젝트는 독일 여러 주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호엔슈방가우 성, 리히텐슈타인 성, 호엔촐레른 성, 그리고 라인강의 슈톨첸펠스 성 등이 대표적이다.[11] 노이슈반슈타인성 건설의 영감은 루트비히 2세가 1867년에 떠난 두 번의 여행에서 비롯되었다. 5월에는 아이제나흐 근처의 재건된 바르트부르크 성을 방문했고,[12] 7월에는 피에르퐁 성을 방문했는데, 이곳은 외젠 비올레르르 뒤크가 폐허가 된 성을 역사주의 양식의 궁전으로 바꾸고 있었다.[13][14]

루트비히 2세는 이 두 건물이 중세 시대의 낭만주의적 해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친구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의 음악적 신화를 구현한다고 생각했다.[15] 1868년 2월, 할아버지인 루트비히 1세 국왕이 사망하면서 그의 세습 재산에 사용되던 상당한 자금이 확보되었다.[37][16] 이를 통해 루트비히 2세는 수도 뮌헨에서 멀리 떨어진 익숙한 풍경 속에 자신만의 은신처를 짓는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중세 시대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1868년 5월, 바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트비히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나는 옛 독일 기사들의 성과 같은 진정한 스타일로 푈라트 협곡 근처의 호엔슈방가우의 옛 성터 폐허를 재건할 의향이 있으며, 언젠가(3년 안에) 그곳에서 살기를 매우 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고백해야 합니다. ... 당신은 내가 그곳에 머물게 하고 싶은 존경받는 손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위치는 찾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이며, 신성하고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세상에 구원과 진정한 축복을 가져다준 신성한 친구를 위한 가치 있는 성전입니다. 그것은 또한 당신에게 "탄호이저"(배경에 성이 보이는 가수들의 홀), "로엔그린"(성 안뜰, 열린 복도, 예배당으로 가는 길)을 떠올리게 할 것입니다; ... .[17]


건축 설계는 무대 디자이너 크리스티안 얀크가 초안을 작성했고, 건축가 에두아르트 리델이 이를 구현했다.[18] 기술적인 문제로 기존 성터의 폐허는 계획에 포함되지 못했다. 초기 구상은 뉘른베르크 성 양식을 참고하여 옛 포어호엔슈방가우 성 자리에 단순한 건물을 짓는 것이었으나, 이는 거부되고 점점 더 규모가 큰 초안으로 대체되어 결국 바르트부르크 성을 모델로 한 더 큰 궁전으로 결정되었다.[19] 루트비히 2세는 모든 세부 계획과 초안을 직접 검토하고 승인하는 등 건축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20] 그의 통제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노이슈반슈타인성은 건축가들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루트비히 2세 개인의 창조물로 여겨진다.[21] 당시 건축 비평가들은 19세기 마지막 대규모 궁전 건설 프로젝트 중 하나인 노이슈반슈타인성을 키치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루트비히 2세의 다른 건축물들과 함께 유럽 역사주의의 주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22][23] 재정적인 문제로 인해 노이슈반슈타인성과 유사한 프로젝트였던 팔켄슈타인 성은 계획 단계에서 중단되었다.[24]

이 궁전은 19세기 건축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단순한 기하학적 형태, 반원 아치 등), 고딕 건축(수직적 선, 뾰족한 탑, 섬세한 장식), 비잔틴 건축 및 미술(왕좌의 홀 장식) 양식이 절충적으로 혼합되었고, 19세기의 기술적 성과가 더해졌다. 궁전 정면의 ''파르지팔''과 성 게오르기우스 그림은 알고이 지역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레스코 기법인 지역 ''뤼프트말러라이'' 스타일로 그려졌으며, 기사 회관 갤러리의 미완성 초안에서는 아르 누보 양식의 요소가 엿보인다.[25] 노이슈반슈타인 디자인의 특징 중 하나는 연극적인 요소인데, 이는 무대 디자이너였던 크리스티안 얀크가 자신의 무대 배경 디자인을 활용했기 때문이다.[47] 기본 스타일은 처음에는 신고딕 양식으로 계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주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오페라 주제는 점차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에서 ''파르지팔''로 옮겨갔다.[27]

남동쪽에서 바라본 노이슈반슈타인 성


북서쪽에서 바라본 항공 사진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외부와 내부 모두 매우 양식적이다. 설계와 장식에 개인적으로 깊은 관심을 보인 왕의 영향력이 전체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팔라스(Palas)에 있는 로엔그린 벽화에 대해 왕은 "배가 해안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고, 로엔그린의 목이 덜 기울어져 있으며, 배에서 백조로 이어지는 사슬이 장미가 아닌 금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으로 성의 스타일은 중세 시대를 유지하기를 바란다"고 지시하기도 했다.[54]

팔라스(Palas) 내부에는 왕좌의 방, 루트비히 2세의 스위트룸, 가수들의 홀, 그리고 인공 동굴 등이 있다. 내부 장식, 특히 왕좌의 방은 비잔틴-아랍 양식을 따르는데, 이는 팔레르모의 왕실 시칠리아 노르만-슈바벤 시대와 관련된 독일 왕가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예배당과 교회 양식에서 영향을 받았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백조 기사 로엔그린 전설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루트비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호엔슈방가우 성에도 이 전설과 관련된 장식이 있었다. 이러한 주제들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많은 방에는 바그너 오페라의 장면들을 묘사한 테두리 장식이 있으며, 특정 오페라의 무대 세트를 영구적으로 갖춘 극장 공간도 있다. 하지만 많은 내부 공간은 장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된 방은 14개뿐이었다. 왕의 사망으로 성 건설이 중단되면서, 성의 주요 특징 중 하나였던 중앙 요새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원래 상부 안뜰 중앙에 전체 구조물의 가장 높은 지점이자 중심이 될 거대한 요새가 계획되었으나, 왕가의 결정으로 건설되지 않았다. 요새의 기초는 상부 안뜰에서 볼 수 있다.[55]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절벽 능선 꼭대기에 150m 길이에 걸쳐 세워진 여러 개의 개별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길게 늘어선 건물들은 수많은 탑, 장식용 작은 탑, 박공, 발코니, 첨탑, 조각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에 따라 대부분의 창문은 2중창 또는 3중창(triforia) 형태로 만들어졌다. 남쪽으로는 테겔베르크와 푈라트 협곡, 북쪽으로는 호수가 있는 알프스 산기슭을 배경으로 하여, 개별 건물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이는 기사의 성에 대한 낭만적인 이상을 구현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세기에 걸쳐 증축된 실제 성들과 달리,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비대칭적인 건물로 계획되었고, 단계적으로 건설되었다.[36] 성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중세 귀족 영지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실제 요새로서의 방어 기능은 갖추지 않았다.

이 성은 군사적 거점인 "요새"나 정치, 외교적 중심지인 "궁전"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옥좌의 설치를 뒤로 미루고 인공 동굴을 만드는 등, 루트비히 2세의 낭만주의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건설된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4. 2. 건축 자재

궁전은 기본적인 구조를 벽돌로 쌓고, 그 위에 다양한 종류의 암석으로 외장을 마감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 외벽에 사용된 흰색 석회암은 성 근처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이다.[29] 성의 기초 부분은 콘크리트로 단단히 굳혔다.[81]

아치와 돌출 창 등에 사용된 사암 벽돌은 뷔르템베르크의 슐라이트도르프에서 공급되었다. 창문, 아치 리브, 기둥, 주두 등에는 잘츠부르크 인근 운터스베르크에서 채취한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나중에 계획에 추가된 왕좌의 홀은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강철 프레임워크가 필요했으며, 일부 방에는 철 기둥이 지지대로 설치되기도 했다.[83] 또한, 건축 자재 운반에는 증기 크레인이 활용되었다.

궁전 정문인 게이트하우스는 다른 건물과 달리 외벽과 안뜰 쪽 벽의 자재 색상이 다르다. 바깥쪽 벽은 붉은 벽돌로 마감되었고, 안뜰을 향한 벽면은 노란색 석회암으로 덮여 있다.

성의 본관 격인 팔라스(Palas)가 주로 건설되던 1879년과 1880년에 사용된 주요 건축 자재 통계는 다음과 같다.[82][31]

자재 종류사용량출처/비고
모래3600m3 (약 6000톤)[82]
사암약 4127691.75kg뉘르팅겐 산[82] (다른 출처[31]에서는 약 1406136.75kg)
벽돌40만 장 (약 1000톤)[82]
시멘트약 544311.00kg[82]
대리석약 421841.02kg잘츠부르크 산[82]
석회석약 45359.25kg슈반가우 Alterschrofen 지구 산[82]
비계용 목재2050m3[31]



이처럼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중세 성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9세기 후반의 최신 건축 기술을 사용하여 지어진 벽돌 건물이다.[83] 다만 성벽을 덮고 있는 석회석 판은 비바람에 약한 편이어서 주기적인 보수 공사가 필요하다.[84]

4. 3. 주요 공간

3층 평면도, 4층의 가수가 있는 홀의 위치는 빨간색으로 표시됨


복도


왕좌의 홀 세부


성이 완공되었다면 손님과 하인들을 위한 공간, 서비스 및 물류 공간을 포함하여 200개 이상의 내부 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완성된 방과 홀은 약 15개에 불과하다.[56] 팔라스(Palas)의 낮은 층에는 행정실과 하인실이 있으며, 현재는 궁전 행정실로 사용된다. 왕의 응접실은 위층에 자리 잡고 있다. 전면 구조는 3층에 왕의 숙소를, 그 위에 '가수들의 홀'을 포함한다. 서쪽을 향한 후면 구조의 위층은 거의 전부가 왕좌의 홀로 채워져 있다. 모든 층의 총 바닥 면적은 거의 6000m2에 달한다.[56]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독일 역사주의 양식의 중요한 내부 공간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의 최신 기술이 여러 가지 적용되었다.[25][57] 하인을 부르는 배터리 구동식 벨 시스템과 전화선이 설치되었고, 주방에는 열로 꼬치를 돌리며 회전 속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럼포드 오븐이 있었다. 뜨거운 공기를 이용한 중앙 난방 시스템도 갖추었다.[58]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온수 공급 시스템과 자동 수세식 변기도 설치되었다.
가수들의 홀 (Sängersaal)면적 기준으로 성에서 가장 큰 방은 가수들의 홀이며, 크기는 27m x 10m이다.[59] 팔라스 동쪽 궁정 쪽 날개의 4층, 왕의 숙소 위에 위치한다. 이 홀은 바르트부르크 성의 가수들의 홀과 무도회 홀을 합쳐 설계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가 가장 아꼈던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60] 직사각형 모양의 홀은 로엔그린파르지팔 전설을 주제로 장식되었다. 긴 쪽 벽에는 바르트부르크 성을 본뜬 갤러리가 있고, 그 위에는 왕실 관람석이 설치되었다. 동쪽의 좁은 면은 아케이드로 구성된 무대, 즉 'Sängerlaube'로 마무리된다. 이 홀은 실제 궁정 축제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왕좌의 홀처럼 중세 기사도와 궁정 연애 문화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공간으로 의도되었다. 첫 공연은 1933년, 리하르트 바그너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로 열렸다.[38]
왕좌의 홀 (Thronsaal)왕좌의 홀은 20m x 12m 크기로,[61] 팔라스 서쪽 날개에 위치하며 높이는 13m로 3층과 4층에 걸쳐 있다.[61] 율리우스 호프만이 뮌헨 레지덴츠의 알러하이리겐-호프키르체를 모델로 설계했다. 홀의 3면은 화려한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으며, 뒤쪽 앱스에는 원래 루트비히 2세의 왕좌가 놓일 예정이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왕좌가 놓일 자리 주변의 대좌에는 예수, 열두 사도, 그리고 여섯 명의 시성된 왕들(성 루이, 성 스테판, 성 에드워드, 성 벤체슬라오스, 성 올라프, 성 헨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벽화는 빌헬름 하우스실트가 제작했다. 바닥의 모자이크는 왕 사후에 완성되었으며, 샹들리에는 비잔틴 양식의 왕관을 본떠 만들었다. 왕좌의 홀은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는 왕의 바람대로 파르지팔의 성배 홀과 신성한 왕권의 상징을 결합하여, 당시 입헌 군주제 하에서 그가 더 이상 갖지 못했던 절대적인 주권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22]
왕실 숙소
동굴


대형 홀 외에도 루트비히 2세가 개인적으로 사용할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만들어졌다.[46] 왕실 숙소는 팔라스 동쪽 날개 3층에 있으며, 8개의 생활 공간과 여러 개의 작은 부속실로 구성된다. 화려하게 장식되었지만 방의 크기는 비교적 아담하고 소파 등이 놓여 있어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군주의 삶이 대부분 공개되었던 이전 시대와 달리, 루트비히 2세가 사적인 공간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벽화, 태피스트리, 가구 등 실내 장식은 주로 왕이 좋아했던 성배 전설,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작품,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해석을 주제로 한다.

동쪽 응접실은 로엔그린 전설을 테마로 장식되었으며, 편안하고 가정적인 분위기의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응접실 옆에는 서재로 통하는 작은 인공 동굴이 있다. 이 독특한 공간은 원래 인공 폭포와 무지개 조명 기계가 설치될 예정이었고, 작은 온실과 연결된다. 호르셀베르크 동굴을 묘사한 이 방과 인접한 서재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와 관련이 있다. 린더호프 궁전 공원에도 이와 유사하지만 더 큰 규모의 동굴이 있다. 서재 맞은편 식당은 궁정 연애를 주제로 장식되었다. 주방이 세 층 아래에 있어 린더호프 궁전이나 헤렌킴제 성처럼 바닥에서 식탁이 올라오는 장치(소원 테이블)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음식 운반용 엘리베이터로 주방과 연결되었다.

주방


식당과 인접한 침실, 그리고 집 예배당은 성 내부에서 유일하게 신고딕 양식으로 꾸며진 공간이다. 왕의 침실은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거대한 침대가 중심을 이룬다. 14명의 조각가가 4년 이상 작업하여 수많은 첨탑 장식과 참나무 패널로 이루어진 침대 캐노피를 완성했다.[62] 루트비히 2세는 1886년 6월 11일 밤에서 12일 새벽 사이 이 방에서 체포되었다. 침실 옆의 작은 집 예배당은 성의 주인이었던 왕의 세례명 성인인 성 루이에게 봉헌되었다.
하인실 및 기타 공간하인실은 팔라스 지하층에 있으며, 단단한 참나무 가구로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있다. 테이블 하나와 찬장 하나 외에 각 1.8m 길이의 침대 두 개가 전부이다. 반투명 유리창이 복도와 방을 분리하여 왕이 하인들에게 보이지 않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했다. 하인들은 주 계단을 사용할 수 없었고, 훨씬 좁고 가파른 하인 전용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주방 시설에는 당시 최신 기술이었던 럼포드 오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처럼 노이슈반슈타인성은 군사적 요새나 정치적 궁전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왕좌를 뒤로하고 인공 동굴을 만드는 등 루트비히 2세 개인의 낭만주의적 취향을 실현하기 위해 지어진 독특한 공간이다.

4. 4. 내부 장식

궁전이 완공되었다면 손님과 하인들을 위한 공간, 서비스 및 물류 공간을 포함하여 200개 이상의 내부 방이 있었을 것이나, 궁극적으로 약 15개의 방과 홀만이 완공되었다.[56] 팰라스의 낮은 층에는 행정 및 하인실이 있으며, 현재는 궁전 행정실로 사용된다. 왕의 응접실은 위층에 위치한다. 전면 구조는 3층에 숙소가 있고, 그 위에 '가수들의 홀'이 있다. 서쪽을 향한 후면 구조의 위층은 거의 완전히 왕좌의 홀로 채워져 있다. 모든 층의 총 바닥 면적은 거의 6000m2에 달한다.[56]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독일 역사주의의 중요한 내부 공간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궁전에는 19세기 후반의 최신 기술이 여럿 도입되었다.[25][57] 대표적으로 하인을 위한 배터리 구동식 벨 시스템과 전화선이 설치되었다. 주방 설비에는 열을 이용해 꼬치를 돌리고 회전 속도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럼포드 오븐이 포함되었다. 뜨거운 공기는 중앙 난방 시스템에 활용되었다.[58]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던 온수 공급 시스템과 자동 물내림식 변기도 갖추었다.

면적 기준으로 궁전에서 가장 큰 방은 가수들의 홀이며, 그 다음이 왕좌의 홀이다. 27m x 10m 크기의[59] 가수들의 홀은 팰라스의 동쪽 날개 4층, 왕의 숙소 위에 위치한다. 이 홀은 바르트부르크 성의 가수들의 홀과 무도회의 홀을 합쳐 설계되었으며, 루트비히 2세가 가장 아꼈던 공간 중 하나였다.[60] 직사각형의 이 방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파르지팔을 주제로 장식되었다. 긴 쪽 벽면에는 바르트부르크를 본뜬 갤러리가 있고, 그 위에는 왕실 관람석이 설치되었다. 동쪽 끝에는 아케이드로 구성된 무대, 즉 Sängerlaube|젱어라우베de가 있다. 가수들의 홀은 본래 궁정 축제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왕좌의 홀처럼 중세 기사도와 궁정 연애 문화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공간으로 의도되었다. 이 홀에서 첫 공연은 1933년, 바그너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였다.[38]

왕좌의 홀은 20m x 12m 크기로,[61] 팰라스의 서쪽 날개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이는 13m이며,[61] 3층과 4층 전체를 차지한다. 건축가 율리우스 호프만은 뮌헨 레지덴츠의 알러하이리겐-호프키르체를 모델로 이 홀을 설계했다. 홀의 3면은 다채로운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으며, 끝에는 앱스가 있는데, 이곳에 루트비히 2세의 왕좌가 놓일 예정이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왕좌가 놓일 자리 주변은 예수, 열두 사도, 그리고 여섯 명의 시성된 왕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벽화는 빌헬름 하우스실트가 그렸다. 바닥 모자이크는 왕 사후에 완성되었으며, 샹들리에는 비잔틴 양식의 왕관을 본떠 만들었다. 왕좌의 홀은 신성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는 루트비히 2세가 원했던 대로 파르지팔의 성배 홀과 신성한 왕권의 상징성을 결합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는 입헌 군주제 하에서 그가 더 이상 누릴 수 없었던 절대적인 주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22] 성스러움과 왕권의 결합은 앱스에 그려진 여섯 명의 성인 왕들의 초상화(프랑스의 성 루이, 헝가리의 성 스테판, 영국의 에드워드 참회왕, 보헤미아의 성 벤체슬라오스, 노르웨이의 성 올라프, 신성 로마 제국의 성 헨리)를 통해 더욱 강조된다.

궁전 방 (19세기 후반 사진크롬 인쇄)

대형 홀 외에도 루트비히 2세 개인을 위한 여러 개의 작은 방들이 만들어졌다.[46] 왕실 숙소는 팰라스 동쪽 날개 3층에 위치하며, 8개의 생활 공간과 여러 개의 작은 부속실로 구성된다. 화려하게 장식되었지만 방 크기는 적당하고 소파 등이 갖춰져 있어 오늘날 방문객에게는 비교적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루트비히 2세가 과거 군주들처럼 자신의 삶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벽화, 태피스트리, 가구 등 실내 장식은 주로 왕이 좋아했던 성배 전설,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작품, 그리고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해석 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

동쪽 응접실은 로엔그린 전설을 주제로 장식되었다. 소파, 테이블, 안락의자 등이 놓여 편안하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응접실 옆에는 서재로 통하는 작은 인공 동굴이 있다. 이 독특한 공간은 원래 인공 폭포와 무지개 조명 기계가 설치될 예정이었으며, 작은 온실과 연결되어 있다.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등장하는 호르셀베르크 동굴을 묘사한 이 방은 인접한 서재의 장식과도 연결된다. 루트비히 2세는 린더호프 궁전 정원에도 이와 비슷하지만 더 큰 규모의 동굴을 만들었다. 서재 맞은편에는 궁정 연애를 주제로 장식된 식당이 있다. 노이슈반슈타인성의 주방은 식당보다 세 층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린더호프 궁전이나 헤렌킴제 성처럼 바닥에서 식탁이 올라오는 장치(소원 테이블)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식당과 주방은 서비스 승강기로 연결되었다.

식당과 인접한 침실, 그리고 그 옆의 집 예배당은 궁전 내부에서 신고딕 양식이 남아있는 유일한 공간들이다. 왕의 침실은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침대가 중심을 이룬다. 14명의 조각가가 4년 이상 작업하여 수많은 첨탑 장식과 참나무 패널로 이루어진 침대 캐노피를 완성했다.[62] 루트비히 2세는 1886년 6월 11일 밤에서 12일 새벽 사이 이 방에서 체포되었다. 침실 옆의 작은 집 예배당은 성의 주인이었던 왕의 이름을 따 프랑스의 성 루이에게 봉헌되었다.

하인실은 팰라스의 지하실에 있으며, 견고한 참나무 가구로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있다. 테이블 하나와 찬장 하나 외에 각 1.8m 길이의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다. 반투명 유리 창문은 외부 계단과 주 계단을 연결하는 복도에서 하인실을 분리하여, 왕이 하인들과 마주치지 않고 지나다닐 수 있도록 했다. 하인들은 주 계단을 이용할 수 없었고, 훨씬 좁고 가파른 하인 전용 계단을 사용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노이슈반슈타인성은 군사적 목적의 요새도, 정치 외교적 중심지로서의 궁전도 아니었다. 옥좌의 완성을 뒤로 미루고 인공 동굴을 만드는 등, 오롯이 루트비히 2세 개인의 낭만주의적 취미와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지어진 성이라 할 수 있다.

5. 관광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연간 약 150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며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이다.[3][63] 안전상의 이유로 성 내부는 35분간의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방문할 수 있으며,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특정 주제에 초점을 맞춘 특별 가이드 투어도 있다. 여름 성수기인 6월부터 8월까지는 하루 최대 6,000명의 방문객이 찾아오며, 사전 예약 없이 방문할 경우 몇 시간 동안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표가 없는 사람도 산기슭에서 산 정상까지 이어진 긴 진입로를 따라 걸으며 성의 부지와 안뜰을 방문할 수 있지만, 성 내부는 들어갈 수 없다. 2008년 기준으로 총 방문객 수는 6,000만 명을 넘어섰고,[2] 2004년에는 650만유로의 수입을 기록했다.[1]

견학 투어 티켓 판매소


노이슈반슈타인성은 일반에 공개되어 있으며, 4월부터 9월까지의 , 여름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10월부터 3월까지의 가을, 겨울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견학이 가능하다. 성 내부 견학을 위해서는 투어 티켓을 사전에 구매해야 하는데, 티켓은 성 아랫마을인 호엔슈반가우의 티켓 센터에서만 판매하며 성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64][85]

호엔슈반가우 마을까지는 도이치반 퓌센역 앞에서 버스가 운행된다. 성 아랫마을에서 성까지는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가거나, 티켓 판매소 뒤 버스 정류장에서 마리엔 다리 근처까지 운행되는 버스, 또는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출발하는 마차 (모두 유료)를 이용하고 종점에서 성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페라트 계곡에 걸린 마리엔 다리에서 성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2023년 6월 14일, 두 명의 젊은 미국인 관광객이 마리엔 다리 근처에서 30세 미국인 남성에게 공격을 받아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65]

6. 문화적 영향



노이슈반슈타인성은 낭만주의 시대의 세계적인 상징이다. 외딴 위치 덕분에 두 차례의 세계 대전 파괴를 피할 수 있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에 의해 점령지에서 약탈한 예술품 보관 창고로 사용되었다. 이는 나치 당의 하위 조직인 점령지 라이히슬라이터 로젠버그 연구소( 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 für die besetzten Gebietede )가 주로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50] 성은 약탈 예술품 목록화에 이용되었고, 전쟁 후 이곳에서 발견된 39개의 관련 사진 앨범은 현재 미국 국립 문서 기록 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다.[51]

1945년 4월, 친위대(SS)는 성과 예술품이 연합군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폭파를 고려했으나[52], 담당 SS-''Gruppenführer''가 실행하지 않아 성은 손상 없이 연합군에 인계되었다.[52] 이후 성은 바이에른 주 정부에 반환되었고, 뮌헨의 기록 보관소가 폭격으로 파괴되자 일부 공간이 임시 기록 보관소로 활용되기도 했다.[53]

이 성은 루트비히 2세를 다룬 전기 영화인 헬무트 카우트너 감독의 ''루트비히 2세''(1955)와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루트비히''(1972)에 등장했다. 또한 뮤지컬 영화 ''치티 치티 뱅뱅''(1968), 코미디 영화 ''우주전쟁'', 전쟁 영화 ''대탈출''(1963) 등 여러 영화의 배경이 되었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 있는 최초의 디즈니랜드의 잠자는 숲속의 공주 성은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모델로 만들어졌으며, 이는 디즈니랜드 공식 사이트에서도 언급하고 있다.[89] 이 디자인은 이후 다른 디즈니랜드의 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포켓몬스터: 루카리오와 뮤의 수수께끼''(2005)의 카메란 궁전, 『스파이 패밀리』의 "뉴 스톤 성"의 모델이 되었다.

만화 『명탐정 코난』 20권 표지에 성 사진이 사용되었고, 해당 권과 21권에 걸친 "푸른 고성 탐색 사건" 에피소드(애니메이션 136~137화, 1999년 방영)에서는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모델로 한 저택이 등장했다. 게임 ''비스트 위딘: 가브리엘 나이트 미스터리''(1996)에서는 헤렌킴제와 함께 방문 장소로 나온다. 빌헬름 위다의 작품 『뉘른베르크의 난로』에도 등장한다. THE ALFEE의 2015년 앨범 『삼위일체』에는 '혹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전언'이라는 곡이 수록되어 있다.

1977년에는 서독우표 도안으로 사용되었고, 2012년에는 독일 연방주 시리즈의 2유로 기념 주화에 등장했다. 2007년에는 신(新) 세계 7대 불가사의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2002년 4월 6일 호엔슈반가우 근처 오스트리아 국경에 떨어진 운석은 이 성의 이름을 따 '노이슈반슈타인'으로 명명되었다. 총 세 개의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독일 측에서 발견된 '노이슈반슈타인 I' (1.75kg, 2002년 7월)과 '노이슈반슈타인 II' (1.63kg, 2003년 5월), 오스트리아 로이테 근처에서 발견된 '노이슈반슈타인 III' (2.84kg, 2003년 6월)이다.[69] 이 운석은 순수한 함량이 낮고(2.9%), 엔스타타이트와 희귀 광물인 시노아이트(Si2N2O) 비율이 높은 엔스타타이트 콘드라이트로 분류된다.

일본의 히메지 성과는 2015년 관광 우호 교류 협정을 맺었으며[86][87], 히메지시의 타이요 공원에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복제본이 있다. 2024년 2월에는 제74회 삿포로 눈 축제 오도리 공원 행사장에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대형 눈 조각상이 전시되었다.[88]

7. 세계유산 등재 노력

2015년 기준으로,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린더호프 궁전 및 헤렌킴제 궁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한 독일의 잠정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슈베린 궁전을 포함하여 낭만적 역사주의를 대표하는 다른 궁전들과의 공동 등재가 논의되고 있다.[71]

참조

[1] 간행물
[2] 간행물
[3] 간행물
[4] 문서
[5] 서적 The Swan King: Ludwig II of Bavaria I.B. Tauri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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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웹사이트 大通会場 https://www.snowfes.[...] さっぽろ雪まつり実行委員会 2024-02-02
[89] 웹사이트 disneyland sleeping-beauty-castle https://disneyland.d[...]
[90] 서적 판타지 라이브러리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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