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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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레아 원정은 1828년 프랑스가 그리스 독립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파견한 군사 원정이다.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유럽 열강의 개입이 이루어졌고,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뿐 아니라 행정, 사회 기반 시설, 도시 계획, 과학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원을 제공했다. 원정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올림피아 등지에서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하여 고대 유적을 연구하고, 지도를 제작하여 그리스의 지형을 과학적으로 분석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그리스의 근대 국가 건설과 학문적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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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레아 원정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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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모레아 원정 |
전체 | 그리스 독립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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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828년 - 1833년 |
장소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반도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
지원 대상국 | 그리스 제1공화국 |
지원국 | (-1829) |
교전국 2 | 이집트 속주 |
지휘관 | |
지휘관 1 | 샤를 10세 니콜라 조제프 메종 |
지휘관 2 | 마흐무트 2세 무함마드 알리 이브라힘 파샤 |
전투 정보 | |
사상자 1 | 1,500명 사망 |
사상자 2 | 알 수 없음 |
관련 전투 | 칼라마타 파트라 알라마나 제1차 아크로폴리스 그라비아 발테치 도리아나 드라가샤니 스쿨레니 바실리카 참호전 트리폴리차 제1차 히오스 페타 데르베나키아 제1차 메솔롱기 카르페시니 프사라 섬 나우플리아 제2차 메솔롱기 그리스 내전 사모스 섬 제론타스 스팍테리아 수다 알렉산드리아 네오카스트로 마니아키 레르나 방앗간 제3차 메솔롱기 마니 제2차 아크로폴리스 아라초바 카마테로 팔레론 나바리노 제2차 히오스 페트라 |
기타 정보 | 러시아-튀르크 전쟁 |
2. 배경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1822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는 빈 회의와 신성 동맹의 원칙에 위배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동방 정교회라는 종교적 연대와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 통제라는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봉기에 우호적이었다. 프랑스는 그리스인들을 기독교인으로 보았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를 새로운 십자군으로 보아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3] 영국은 영국 동인도 회사로 가는 경로에 있었기에 이 지역 상황에 관심을 가졌다.[4]
그리스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술탄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아들 이브라힘 파샤를 파견했다.[5] 이브라힘의 개입으로 1825년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재정복되었고, 미솔롱기는 1826년에, 아테네는 1827년에 함락되었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나플리오 등 일부 지역에서만 저항했다.[4][5][6]
서유럽에서는 친헬레니즘이 발전했다. 1827년 7월 런던 조약을 통해,[10]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고, 오스만 제국이 조약을 수락하도록 제한적인 개입에 동의했다. 나바리노 해전에서 연합 함대가 오스만-이집트 함대를 궤멸시켰다.[11][12]
계몽주의 철학은 서유럽인들의 그리스에 대한 관심, 특히 고대 그리스 이상화에 영향을 주었다. 요한 요아힘 빈켈만은 고대 예술 해석 이론과 체계를 고안하여 유럽의 취향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그리스 예술을 고대(고대 시대), 숭고(페이디아스), 아름다운(프락시텔레스), 퇴폐적(로마 시대)의 네 시기로 분류했다.
2. 1. 군사 및 정치적 배경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 승리 후 1822년 1월 1일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는 빈 회의와 신성 동맹의 원칙에 위배되었다. 신성 동맹은 유럽의 현상 유지를 강요했기에, 자유주의적인 그리스 반군을 막기 위해 개입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불만을 표했지만, 러시아 제국은 동방 정교회라는 종교적 연대와 다르다넬스 해협 및 보스포루스 해협 통제라는 전략적 이해관계 때문에 봉기에 우호적이었다. 프랑스는 자유주의적 그리스인들을 기독교인으로 보았고, 이슬람교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를 새로운 십자군으로 보아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3] 영국은 영국 동인도 회사로 가는 경로에 있었기에 이 지역 상황에 관심을 가졌고, 통제 형태를 행사하기를 원했다.[4]
그리스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술탄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아들 이브라힘 파샤를 함대와 함께 그리스로 파견했다.[5] 이브라힘의 개입은 결정적이었다. 1825년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재정복되었고, 미솔롱기는 1826년에 함락되었으며, 아테네는 1827년에 점령되었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나플리오, 마니 반도, 히드라 섬, 스페체스, 에게나 섬에서만 저항했다.[4][5][6]
서유럽에서는 친헬레니즘이 발전했다. 1827년 7월 런던 조약을 통해,[10]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했고, 오스만 제국이 조약을 수락하도록 제한적인 개입에 동의했다. 해군 원정을 보내기로 했고, 연합 함대가 파견되어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이집트 함대를 궤멸시켰다.[11][12]
2. 1. 1.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그리스 독립 운동
1821년,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1822년 1월 1일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독립 선언은 빈 회의와 신성 동맹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신성 동맹은 유럽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변화를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다른 유럽 지역과는 달리, 신성 동맹은 자유주의적인 그리스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개입하지 않았다.[3]오스트리아 제국의 재상이자 신성 동맹의 주요 설계자인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그리스의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봉기에 불만을 가졌다. 반면 러시아 제국은 동방 정교회라는 종교적 동질성과 다르다넬스 해협 및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려는 전략적 이익 때문에 그리스 반군에게 우호적이었다. 프랑스는 트로카데로 전투에서 스페인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싸웠지만, 자유주의적인 그리스 반군이 기독교도라는 점을 들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를 새로운 십자군으로 간주하는 등 모호한 입장을 보였다.[3] 영국은 영국 동인도 회사로 가는 경로를 통제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 지역 상황에 관심을 가졌다.[4]

하지만 그리스 반군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술탄은 무함마드 알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알리는 아들 이브라힘 파샤를 보내 함대와 8,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이후 병력은 25,000명으로 늘어났다.[5] 이브라힘 파샤의 개입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다. 1825년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다시 점령되었고, 1826년에는 미솔롱기가 함락되었으며, 1827년에는 아테네가 함락되었다.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나플리오, 마니반도, 히드라섬, 스페체스, 에게나 섬에서만 저항을 계속했다.[4][5][6]
서유럽에서는 친헬레니즘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1826년 미솔롱기 함락과 1824년 바이런 경의 사망 이후 더욱 강해졌다.[4]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7] 빅토르 위고,[8] 알렉산드르 푸시킨, 조아키노 로시니, 엑토르 베를리오즈,[9] 외젠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미솔롱기의 폐허 위의 그리스'') 등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유럽 열강은 결국 이슬람 세력 확장을 막는 전략적 요충지인 동방의 기독교 국가 그리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1827년 7월 6일 런던 조약을 통해,[10]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은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했지만, 그리스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남았다. 세 강대국은 오스만 포르테가 조약을 수용하도록 제한적인 개입에 합의했다. 해군 원정을 통해 무력 시위를 하기로 결정되었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 연합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4] 1827년 10월 20일 나바리노 해전에서 연합 함대는 오스만-이집트 함대를 완전히 격파했다.[11][12]

2. 1. 2. 유럽 열강들의 개입과 런던 조약
빈 회의와 신성 동맹은 유럽 국가들의 균형을 유지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신성 동맹은 자유주의적인 그리스 반군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다르다넬스 해협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지하고 싶은 지정학적 이익과 동방 정교회라는 종교적 동질성으로 인해 그리스 반란을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영국은 초기에 아서 웰즐리 경과 로버트 젱킨슨 총리가 오스만 제국의 통합성을 중시하여 개입에 반대했으나, 조지 캐닝을 비롯한 휘그당이 정부를 이끌면서 그리스 반란군을 돕기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스페인 자유주의자들과 맞서 트로카데로 전투에서만 싸웠지만, 파리 정치가들은 자유주의적인 그리스 반군들이 기독교도임을 우선적으로 생각해 오스만 제국에 맞선 봉기를 새로운 십자군으로 보고 있었다.서유럽에서는 친그리스주의가 발현되었으며, 1827년 7월 런던 조약을 통해 실현되었다.[119]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은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며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종주권을 가진다고 밝혔다. 열강 삼국은 오스만 제국이 조약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제한적인 개입을 허용했다. 삼국은 오스만 제국이 조약을 거부하자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갔으며, 이곳에서 오스만 제국 함대와 충돌했다. 이것이 나바리노 해전으로 오스만-이집트 함대는 삼국 연합함대에게 궤멸되었다.
2. 1. 3. 나바리노 해전과 그 영향
1821년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으나, 초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술탄의 요청을 받은 이집트의 이브라힘 파샤가 개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5] 1825년 펠로폰네소스반도가 함락되고, 1826년 미솔롱기가 함락되었으며, 1827년에는 아테네가 함락되었다.[6]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나플리오 등 일부 지역에서만 항전을 이어갔다.[6]
이러한 상황에서 서유럽에서는 친헬레니즘 운동이 확산되었고, 특히 1826년 미솔롱기 함락과 바이런 경의 사망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4]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7] 빅토르 위고,[8] 알렉산드르 푸시킨 등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그리스 독립을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했다.[9]
결국 1827년 7월 6일 런던 조약을 통해[10] 프랑스, 러시아 제국, 영국은 그리스의 자치를 인정하고 오스만 제국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연합 함대를 파견했다. 1827년 10월 20일, 나바리노 해전에서 연합 함대는 오스만-이집트 함대를 궤멸시켰다.[11][12]
1828년, 이브라힘 파샤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나바리노 해전 패배 이후 연합 함대의 봉쇄로 보급과 증원이 차단되었고, 봉급을 받지 못한 알바니아 군대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의 그리스 군대 보호 하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1828년 8월 6일,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와 영국 제독 에드워드 코드링턴 사이의 알렉산드리아 협약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했으나, 협정을 거부하고 그리스 일부 지역을 계속 통제하며 트리폴리를 파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13]
2. 2. 지적 배경
계몽주의 철학은 서유럽인들의 그리스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는데, 정확히는 고대 그리스를 이상화한 것에 대한 관심이었다. 고대 그리스는 학계에서 인식되고 가르쳐지던 고전 고대의 핵심이었다. 자연과 이성의 개념이 매우 중요했던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것이 고전 아테네의 근본적인 가치였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특히 아테네는 모범이 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시대의 정치적,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아베 바르텔레미의 저서 ''젊은 아나카르시스의 여행''(1788)과 같은 작품은 유럽이 에게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17]요한 요아힘 빈켈만이 고안한 고대 예술 해석의 이론과 체계는 수십 년 동안 유럽의 취향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저서인 ''고대 예술사''는 1764년에 출판되었고 1766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영어 번역은 1881년에나 등장했다). 이 주요 저서에서 빈켈만은 고대 예술을 시대별로 나누고, 작품을 연대순 및 양식별로 분류하는 전통을 시작했다.
빈켈만의 예술에 대한 견해는 문명의 전체를 포괄했다. 그는 문명의 일반적인 발전 수준과 예술의 진화 사이에 평행선을 그렸다. 그는 이러한 예술적 진화를 동시대 사람들이 진보, 전성기, 쇠퇴의 관점에서 문명의 생애 주기를 바라보던 방식과 동일하게 해석했다.[18]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 예술의 황금기는 예술적 성취의 절정이었으며,[19]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경력으로 절정에 달했다. 또한 빈켈만은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 예술 작품이 이상적인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 환경에서 제작되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랫동안 유럽의 지적 생활을 지배했다. 그는 그리스 예술을 고대(고대 시대), 숭고(페이디아스), 아름다운(프락시텔레스), 퇴폐적(로마 시대)의 네 시기로 분류했다.

빈켈만은 정치적, 종교적 자유의 시대에 구상된 그리스 예술의 숭고한 시기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예술 진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결론지었다. 그의 이론은 고대 그리스를 이상화했으며 유럽인들의 현대 그리스 여행에 대한 욕구를 증폭시켰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좋은 취향'이 그리스 하늘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믿는 것은 매혹적이었다. 그는 18세기 유럽에 고대 그리스의 삶이 순수하고 단순하며 도덕적이었고, 고전 헬라스가 예술가들이 "고귀한 단순함과 차분한 웅장함"의 아이디어를 얻어야 할 근원이라는 것을 설득했다.[20] 그리스는 "예술의 모국"이자 "취향의 스승"이 되었다.[21]
프랑스 정부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레베트의 작품을 완성하려는 의도와 같은 맥락에서 모레아 원정을 계획했다. 딜레탄티 협회가 위임하고 자금을 지원한 반(半) 과학적 원정은 벤치마크 역할을 했다. 이것들은 고대 그리스를 재발견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스튜어트와 레베트의 아테네와 섬으로의 첫 번째 원정은 1751-1753년에 이루어졌으며, 정제된 "그리스풍" 신고전주의의 모델을 위해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참고한 저서인 ''아테네의 고대 유물''의 출판으로 이어졌다. 레베트, 리처드 챈들러, 윌리엄 파스의 소아시아 원정은 1764년에서 1766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엘긴 백작이 파르테논 신전의 현존하는 대리석 조각의 절반과 다른 건물들의 조각들을 제거하여 19세기 초 영국으로 운송한 사건은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영광에 대한 더 큰 친헬레니즘적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서유럽에서 고대 예술의 거대한 컬렉션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 보였다.
3. 모레아 원정
모레아 원정은 프랑스의 군사 및 과학 탐사 활동으로, 그리스 독립 전쟁 기간 중 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전개되었다. 이 원정에 대한 정보는 루이-외젠 카베냐크, 알렉상드르 뒤욤, 자크 망제르, 가스파르 루 등 원정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얻을 수 있다.[22][27][23][24]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소수의 터키군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핑계를 대며 철수를 지연시켰다.[22][27][33] 프랑스 장교들은 병사들의 전투적인 열정을 억제해야 했고, 병사들은 열병과 이질로 고통받았다.[24][34] 루이 외젠 카베냑은 공병대 400명 중 30명이 열병에 걸렸다고 기록했다.[22]
메종 장군과 연합군 제독들의 회의 후, 이브라힘 파샤는 9월 9일부터 철군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27] 이집트군은 무기와 짐, 말을 가지고 떠나되, 그리스 노예나 포로는 데려갈 수 없었다.[22][23] 이집트 함대가 한 번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육지에 남아있는 군대를 위한 보급품은 허가되었다.[36] 첫 번째 이집트 사단은 9월 16일에 연합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출항했다.[27][23] 프랑스군은 메세니아 반도를 가로질러 나바리노 근처 ''잘로바'' 만 북쪽에 새로운 캠프를 설치했다.[27][23] 10월 1일, 메종 장군은 이브라힘 파샤와 니키타라스가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군 전체를 사열했다.[23]
철수는 9월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10월 5일 이브라힘 파샤를 태운 마지막 수송선이 떠났다. 그는 4만 명의 병력 중 2만 1천 명 정도만 데리고 돌아갔다.[27][37] 소수의 오스만 병사(2,500명)가 펠로폰네소스의 요새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3. 1. 원정 준비

프랑스 하원은 원정 수행을 위해 8천만 금 프랑 프랑의 차관을 승인했다.[25] 니콜라 조제프 메종 장군이 지휘하는 13,000~15,000명 규모의 원정군이 편성되었다.[26] 이 부대는 3개 여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여단의 지휘관과 구성은 다음과 같다.
지휘관 | 부대 | 구성 |
---|---|---|
앙투안 시몽 뒤리외 장군 | 참모총장 | |
티부르스 세바스티아니 (오라세 프랑수아 바스티앙 세바스티아니 드 라 포르타 원수의 형제) | 제1여단 | 제3 샤쇠 연대 (286명, 폴-외젠 드 포도아-바르바잔 대령 지휘) |
필리프 이고네 장군 | 제2여단 | |
비르질 슈나이더 장군 | 제3여단 | |
포병대 | 제3 및 제8 포병 연대 소속 4개 포병 중대 (484명, 공성용 12문, 야전용 8문, 산악용 12문) | |
공병대 | 사페(공병)와 광부 800명으로 구성된 2개 공병 중대 |
총 60척으로 구성된 수송 함대가 군함의 보호를 받으며 출항했다.[27] 이 함대는 장비, 식량, 탄약, 말 1,300마리, 그리고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의 그리스 임시 정부를 위한 무기, 탄약, 자금을 운송했다.[28] 프랑스는 자유 그리스의 군대 개발을 지원하고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했다.
니콜라 조제프 메종 사령관은 출항 전날 소집된 중대에 간결하고 힘찬 포고를 낭독했다. 이후 제1여단은 8월 17일 툴롱을 출발했고, 이틀 뒤 제2여단, 9월 2일에는 제3여단이 두 번째 별도의 호송선으로 출발했다.[23] 메종 사령관은 전열함 ''빌 드 마르세유''에 제1여단과 함께 탑승했다.[27] 첫 번째 호송선은 상선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리깃함 ''아가멤논'', ''벨론''[29], ''시벨''의 호위를 받았다. 두 번째 호송선은 전열함 ''뒤켄''과 프리깃함 ''이피게니''와 ''아르미데''의 호위를 받았다.[30]
3. 2. 군사 작전


1828년 8월, 프랑스군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나바리노만에 상륙했다. 이브라힘 파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메세니아만으로 이동, 코로니 인근에 상륙했다.[22][24][27] 알렉산드리아 협약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철군해야 했지만, 여러 핑계를 대며 지연시켰다.[22][27][33] 메종 장군과 연합군 제독들의 회의 후, 1828년 9월 9일부터 철군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27]
이집트군은 9월 16일부터 10월 5일까지 순차적으로 철수했고, 이브라힘 파샤는 4만 명 중 2만 1천여 명만 데리고 돌아갔다.[27][37] 11월 5일에는 모레아에 남아있던 2,500여 명의 오스만군[37]과 이집트군 잔존 병력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프랑스군은 한 달 만에 모레아 요새들을 점령했다.[37]
이후 프랑스군은 그리스 독립 전쟁에 개입하여, 중앙 그리스에서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디미트리오스 입실란티스는 리바데아를 점령하고, 아우구스티노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나프팍토스와 메솔롱기를 탈환했다.[47] 페트라 전투에서 그리스군이 승리하면서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4][48] 그러나 그리스의 완전한 독립은 러시아-튀르크 전쟁 (1828년~1829년)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고 아드리아노폴 조약과 콘스탄티노플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새로운 그리스 왕국의 영토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 섬, 중앙 그리스로 제한되었다.[48]
3. 2. 1. 펠로폰네소스 상륙과 초기 작전
별다른 문제 없이 항해한 후, 2개 여단으로 구성된 첫 번째 프랑스군 수송대는 1828년 8월 28일 나바리노만에 도착했다. 이 만에는 프랑스-러시아-영국 연합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22]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군이 나바리노와 메토니 사이에 주둔하고 있어 상륙은 위험했다. 메종 장군과 앙리 드 리니 제독은 ''콩케랑''호에서 두 시간 동안 회담을 가졌고, 이후 함대는 메세니아만으로 이동했다. 만의 남쪽 입구는 코로니의 오스만 제국군 요새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 8월 29일 저녁, 원정군은 만 북서부에 도착하여 아무런 저항 없이 상륙을 시작했고, 8월 30~31일에 상륙을 완료했다.[27][24][22]프랑스군은 코로니 평원 북쪽, 고대 코로네아 유적(페탈리디 근처)에서 북쪽으로 10분 거리인 ''자네''(사령부), ''카라카실리-카르야'', ''벨리카'' 강둑에 야영지를 설치했다.[24][22]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총독의 포고문은 프랑스 원정군의 도착을 그리스인들에게 알렸고, 현지인들은 프랑스군이 그리스 땅을 밟자마자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달려왔다고 한다.[31]
9월 8일, 티부르스 세바스티아니가 지휘하는 제1여단은 코로니로 야영지를 떠나 그곳 고지에 야영지를 설치했다.[24][22] 9월 16일 밤 폭풍으로 3척의 배(제3 샤쇠르 연대의 말 22마리를 수송하던 브리그 ''아미블 소피'' 포함)를 잃은 제3여단(제2 호송대)은 9월 22일 페탈리디에 상륙했다.[23] 9월 26일, 제2여단은 이미 9월 15일 페탈리디에서 육로로 이동하여 나바리노 근처 '잘로바 야영지'를 설치한 후 바닷길로 합류했다.
프랑스군은 그리스 땅에 도착했을 때, 이브라힘 파샤의 군대에 의해 막 파괴된 나라를 발견했다.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농작물은 완전히 불탔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에 떨며 동굴에 숨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66][32] 에드가 키네는 모돈에서 베네치아 길을 따라 재와 올리브 나무의 석탄 층을 지나갔고, 몇몇 동굴이 슬프게 열려 있었으며, 마을, 키오스크, 산 중턱에 걸려 있던 탑 대신 검게 탄 긴 벽과 산기슭에 정박한 점토 배 형태의 파샤 군대의 오두막만 보였다고 기록했다.[66] 아모리-뒤발은 나바리노 도시 바깥 해안에 세워진 몇 개의 나무 오두막 가운데 폐허만 남아 있는 곳에서,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못한 남녀와 아이들이 돌아다녔고, 그들의 모습에는 인간적인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그는 코가 없고, 귀가 없었고, 모두 크고 작은 흉터가 있었으며, 특히 눈이 도려내진 어린아이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32]
이집트 부왕(Viceroy) 무함마드 알리와 영국 해군 제독 에드워드 코드리턴이 서명한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그곳에 남아있는 소수의 터키군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식량 공급, 수송 문제, 요새 인계의 어려움 등 여러 핑계를 대며 철수를 지연시켰다.[22][27][33] 프랑스 장교들은 병사들의 전투적인 열정을 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프랑스 군인들은 야영지에 텐트를 적시는 가을 비에 시달리며 열병과 이질 확산에 고통받았다.[24][34] 9월 24일, 루이 외젠 카베냑은 자신의 공병대 400명 중 30명이 이미 열병에 걸렸다고 썼다.[22] 메종 장군은 자신의 병사들을 요새의 병영에 배치할 수 있기를 바랐다.[35]
9월 7일, 메종 장군과 세 명의 연합 제독이 참석한 가운데 콩케랑호에서 긴 회의가 열렸고,[27] 이브라힘 파샤는 9월 9일부터 군대를 철수하기로 동의했다. 이집트인들은 무기, 짐, 말을 가지고 떠나지만 그리스 노예나 포로는 데려갈 수 없었다.[22][23] 이집트 함대가 한 번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육지에 남아있는 군대를 위한 보급품이 허가되었다.[36] 5,500명의 병력과 27척의 배로 구성된 첫 번째 이집트 사단은 9월 16일에 출항했으며, 연합 함대에서 3척의 배(영국 2척과 프랑스 프리깃함 ''시렌'')의 호위를 받았다. 9월 15일, 프랑스군은 캠프를 ''페탈리디''에서 메세니아 반도를 서쪽으로 가로질러 나바리노에서 북쪽으로 두 리그 떨어진 습지 평원인 ''잘로바'' 만 북쪽에 새로운 캠프를 설치했다.[27][23] 10월 1일, 메종 장군은 이브라힘 파샤(호위병 없이)와 그리스 장군 니키타라스가 참석한 가운데 해안에서 프랑스군 전체를 사열했다.[23]
3. 2. 2. 이집트 군 철수 협상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해야 했지만, 여러 핑계를 대며 지연시켰다.[22][27][33] 프랑스 군인들은 전투에 대한 열망과 열병, 이질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2][24][34]메종 장군과 연합 함대 제독들의 회의 후, 이브라힘 파샤는 9월 9일부터 철수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22][27] 이집트군은 무기와 짐, 말을 가지고 떠나되, 그리스 노예나 포로는 데려갈 수 없었다.[22][23] 첫 번째 이집트 사단은 9월 16일에 연합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출항했다.[27][23]
철수는 9월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10월 5일 이브라힘 파샤를 태운 마지막 수송선이 떠났다. 그는 4만 명의 병력 중 2만 1천 명 정도만 데리고 돌아갔다.[27][37] 1828년 11월 5일, 마지막 터키인과 이집트인들이 모레아를 완전히 떠났고, 총 26,000~27,000명의 남성이 며칠 만에 이 지역과 요새에서 쫓겨났다.[37] 소수의 오스만 병사(2,500명)가 펠로폰네소스의 요새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3. 2. 3. 주요 거점 점령
별다른 문제 없이 항해를 마친 후, 2개 여단으로 구성된 첫 번째 호송대가 8월 28일 나바리노만에 도착했다. 이브라힘 파샤의 이집트군이 나바리노와 메토니 사이에 주둔하고 있어 상륙은 위험했다. 앙리 드 리니 제독과 메종 장군 간의 회담 후, 함대는 메세니아만으로 이동하여 8월 29일 저녁부터 8월 30~31일에 걸쳐 코로니 인근에 상륙했다.[27][24][22] 병사들은 코로니 평원 북쪽, 고대 코로네아 유적(페탈리디 근처)에서 북쪽으로 10분 거리에 있는 ''자네''(사령부), ''카라카실리-카르야'', ''벨리카'' 강둑에 야영지를 설치했다.[24]
이집트 부왕과 영국 해군 제독 에드워드 코드리턴이 서명한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그곳에 남아있는 소수의 터키군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나 이브라힘 파샤는 여러 핑계를 대며 철수를 지연시켰다.[22][27][33] 9월 7일, 메종 장군과 연합군 제독들의 회의 후, 이브라힘 파샤는 9월 9일부터 군대 철수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이집트 함대가 한 번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없었기에, 육지에 남은 군대를 위한 보급은 허가되었다.[36] 5,500명의 병력과 27척의 배로 구성된 첫 번째 이집트 사단은 9월 16일에 출항했으며, 연합 함대의 호위를 받았다.[27][23] 철수는 9월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10월 5일 이브라힘 파샤를 태운 마지막 이집트 수송선이 출항했다. 그는 4만 명의 병력 중 2만 1천 명 정도만 데리고 돌아갔다.[27][37]
소수의 오스만 병사(2,500명)가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요새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프랑스군의 다음 임무는 그들을 확보하고 독립 그리스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1828년 11월 5일, 마지막 터키인과 이집트인들이 모레아를 완전히 떠났고, 총 26,000~27,000명의 남성이 며칠 만에 이 지역과 요새에서 쫓겨났다. 프랑스 원정군이 모레아 요새를 점령하는 데는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37]
3. 3. 점령지 통치 및 민간 지원
프랑스군은 그리스 땅에 도착했을 때 이브라힘 파샤의 군대에 의해 막 파괴된 나라를 발견했다.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농작물은 완전히 불탔으며, 사람들은 여전히 공포에 떨며 동굴에 숨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66][32]에드가 키네는 모돈에서 베네치아 길을 따라 재와 한때 그 계곡을 그늘지게 했던 올리브 나무의 석탄 층을 지나갔다고 묘사했다. 몇몇 동굴이 슬프게 열려 있었고, 마을, 키오스크, 산의 중간 경사면에 걸려 있던 탑 대신, 이제는 검게 탄 긴 벽과 산기슭에 정박한 점토 배 형태의 파샤 군대의 오두막만 보였다고 한다. 한 번은 붕괴된 대리석을 본 것 같았던 비잔틴 교회 유적지로 향했지만, 그곳에는 현관과 순환로가 하얀 해골로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66]
아모리-뒤발은 나바리노 도시 바깥 해안에 세워진 몇 개의 나무 오두막 가운데, 폐허만 남아 있는 곳에서, 서둘러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남녀, 아이들이 돌아다녔고, 그들의 모습에는 인간적인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어떤 사람은 코가 없고, 어떤 사람은 귀가 없었고, 모두 크고 작게 흉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를 감동시킨 것은 네다섯 살쯤 된 어린 아이가 형의 손에 이끌려가는 모습이었는데, 그에게 다가가자 그의 눈이 도려내져 있었다고 한다. 터키인과 이집트인은 이 전쟁에서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고 그는 덧붙였다.[32]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군은 점령지 통치와 민간 지원에 힘썼다.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총독의 포고문은 프랑스 원정군의 임박한 도착을 그리스인들에게 알렸고, 현지인들은 프랑스군이 그리스 땅을 밟자마자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달려들었다고 한다.[31]
이집트 부왕(Viceroy) 무함마드 알리와 영국 해군 제독 에드워드 코드리턴이 서명한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그곳에 남아있는 소수의 터키군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나 이브라힘 파샤는 여러 핑계를 대며 철수를 지연시켰고, 프랑스 장교들은 병사들의 전투적인 열정을 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2][27][33] 또한 프랑스 군인들은 야영지에 텐트를 적시고 열병과 이질 확산을 촉진하는 가을 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24][34] 루이 외젠 카베냑은 1828년 9월 24일, 자신의 공병대 400명 중 30명이 이미 열병에 걸렸다고 썼다.[22] 메종 장군은 자신의 병사들을 요새의 병영에 배치할 수 있기를 바랐다.[35]
결국 1828년 11월 5일, 마지막 터키인과 이집트인들이 모레아를 완전히 떠났고, 2,500명의 남성과 그 가족들이 스미르나로 향하는 프랑스 선박에 탑승했다. 프랑스 원정군은 모레아 요새를 점령하는 데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37]
3. 4. 과학 탐사
계몽주의 철학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아테네는 모범적인 사례로 여겨졌다. 요한 요아힘 빈켈만은 그리스 예술을 고대, 숭고(페이디아스), 아름다운(프락시텔레스), 퇴폐적(로마 시대)의 네 시기로 분류하고, 예술과 문명의 발전을 연관지었다. 그는 페이디아스 시대가 그리스 예술의 황금기라고 보았으며, 이상적인 환경에서 최고의 예술 작품이 만들어졌다고 믿었다.[17][18][19] 이러한 관점은 유럽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고대 그리스를 "예술의 모국"이자 "취향의 스승"으로 여기게 했다.[20][21]프랑스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레베트의 작업을 보완하고자 모레아 원정을 계획했다. 이들의 원정은 딜레탄티 협회의 후원을 받아 고대 그리스를 재발견하려는 중요한 시도였다. 엘긴 백작이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들을 영국으로 가져간 사건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웠다.
모레아 원정의 과학 탐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지시에 따라 지리학(피에르 페티에, 피에르 M. 라피, 아리스티드-카미유 세르비에), 지질학(피에르 테오도르 비를레 다우스트, 에밀 퓌용 보블레, 제라르 폴 데셰), 식물학(장 바티스트 보리 드 생뱅상, 루이 데스프레오 생소베르, 프로스페르 바케), 동물학(가스파르-오귀스트 브륄레, 가브리엘 비브롱, 섹스티우스 들로네, 앙투안 뱅상 펙토르) 등 여러 분야를 포함했다.

프랑스 탐사대는 고대 유적뿐만 아니라 비잔틴 기념물에도 주목했다. 아벨 블루에는 나바리노의 구세주 변용 교회, 오스피노, 모돈의 성 바실 교회, 안드루사의 성 조지 교회와 사마리 교회, 부르카노 수도원 등 다양한 비잔틴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1][113]
모레아 과학 탐험은 학문적 연구를 지속할 안정적인 기반의 필요성을 보여주었다. 1846년 리카베투스 산 기슭에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모레아 원정대의 작업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114]
하지만 원정대 과학 부문 구성원들은 열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지형 측량대는 18명의 장교 중 3명이 사망하고 10명이 건강 악화로 퇴직해야 했다.[115] 장-바티스트 보리 드 생-뱅상은 7월의 더위로 지형 측량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했다.[116] 에밀 퓌이용 보블레는 측지 서비스에 고용된 12명의 장교 중 2명이 사망하고 모두 병을 앓았다고 전했다.[117] 자연 과학 부문 역시 에우로타스 하구 탐사 중 쿠렉스 코누피 Br. 종 모기에 물려 많은 구성원이 열병에 시달렸다.[72] 장-바티스트 비에티와 피에르 페티에만이 각각 1831년과 1836년까지 그리스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3. 4. 1. 지리학 및 지도 제작

프랑스 정부는 과학적 목적뿐만 아니라 경제적 및 군사적 이유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정확한 지도를 그리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1] 당시 활용할 수 있던 지도는 장 드니 바르비에 뒤 보카주가 제작한 지도(1808년, 1:500,000 축척)는 비교적 불완전했고, 피에르 라피가 제작한 지도(1826년, 1:400,000 축척)는 상세한 레이아웃에 더 정확했으며 원정대 구성원들이 사용했다.[79][80]

프랑스 육군 지형 부대의 피에르 페티에 대위는 1828년 5월, 모레아 군사 원정 4개월 전에 그리스로 파견되어 젊은 그리스 지형 기술자를 훈련시켰다.[79] 1829년 3월 3일, 모레아의 과학 원정대가 펠로폰네소스의 나바리노에 상륙했을 때 페티에는 그곳에 배속되었다. 3월 초, 티린스의 폐허에서 아리아 마을의 낡은 집까지, 아르골리스에 3,500미터의 기선이 그어져, 펠로폰네소스의 지형 및 측지 독서를 위한 모든 삼각 측량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다.[81] 페티에와 퓔론-보블레는 기선과 사용된 자에 대한 수많은 검증을 수행하여 오차 범위를 15킬로미터마다 1미터로 줄였다.[82] 티린스 기점의 경도와 위도를 읽고 확인하여 오차 범위를 가능한 한 0.2 초로 줄였다.[83] 에게나, 히드라, 나플리오뿐만 아니라 반도의 산에도 134개의 측지점을 설치했다. 변의 길이가 약 20 km인 정삼각형을 그렸으며, 각도는 갬비의 경위의로 측정했다.[84] 과학 원정대가 그리스에서 철수한 후에도 페티에는 1831년 7월 31일까지 그곳에 남아 모레아 지도 작성을 위한 삼각법, 지형학 및 통계 작업을 완료했다.
1:200,000 축척으로 6장의 시트(키클라데스 제도의 일부 섬을 묘사한 시트 2장 추가)로 매우 정확하게 그려진 ''1832년 지도''는 과학적이고 측지 원리에 따라 제작된 그리스 영토의 최초의 지도였다.[79][80]

1833년 1월에 오토 1세가 도착한후, 프랑스에 지형 여단이 왕국 전체의 지도를 조사하도록 요청했고, 페티에는 1833년 3월 28일에 그리스로 돌아와 1836년 3월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완전한 지도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작업을 지휘했다. 1:200,000 축척의 ''1852년 지도''도 1852년 페티에의 지휘하에 최종적으로 출판되었다.[79][80] 1945년 이후 그리스 육군 지리 서비스에서 현재의 1:50,000 축척 지도를 출판할 때까지 이 1852년 지도는 그리스 전체 영토를 다루는 유일한 지도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 지리학자이자 그리스 전문가인 미셸 시비뇽은 이 지도가 처음으로 지형, 강 레이아웃, 산의 높이, 거주지의 분포 및 인구 규모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79]

페티에는 도시 풍경, 기념물, 의상 및 당시 그리스 주민들을 묘사한 연필 드로잉, 세피아 및 수채화로 구성된 앨범을 남겼다.[85]
그리스 총독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는 피에르 테오도르 비를레 다우스트에게 코린토스 지협에 운하를 건설하여 배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고 말레아 곶과 마타판(테이나론)의 위험한 해협을 거치는 여정을 절약할 수 있는지 평가하도록 의뢰했다.[86] 비를레 다우스트는 이 프로젝트의 추정치를 제시했는데, 자금 조달에 대한 이자를 고려하지 않고 당시 약 4천만 금 프랑으로 평가했다. 헬레닉 정부 단독으로는 너무 큰 이 비용으로 인해 그는 공사 착수를 포기하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결코 수행되지 않았지만 비를레는 그리스 정부에 잠재적인 노선을 제공했는데, 이는 로마인이 ''루트라키''와 ''칼라마키'' 사이에 구축한 노선을 따랐으며, 과학 원정대의 ''1:200,000 축척 지질 지도''에 표시되어 있었다. 코린토스 운하가 마침내 개통된 것은 1893년이 되어서였다.
3. 4. 2. 고고학 발굴
요한 요아힘 빈켈만이 고안한 고대 예술 해석 이론은 유럽의 취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대 예술을 시대별로 나누고, 작품을 연대순 및 양식별로 분류하는 전통을 시작했다.[17] 빈켈만은 그리스 예술의 황금기를 예술적 성취의 절정으로 보았으며,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경력으로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했다.[19] 그는 그리스 예술을 고대, 숭고, 아름다운, 퇴폐적인의 네 시기로 분류했다.빈켈만은 정치적, 종교적 자유의 시대에 구상된 그리스 예술의 숭고한 시기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예술 진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완성했다. 그의 이론은 고대 그리스를 이상화했으며, 유럽인들의 현대 그리스 여행에 대한 욕구를 증폭시켰다. 딜레탄티 협회가 위임하고 자금을 지원한 제임스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레베트의 반(半) 과학적 원정은 고대 그리스 재발견의 벤치마크가 되었다. 엘긴 백작이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 등을 영국으로 운송한 사건은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친헬레니즘적 갈망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프랑스 정부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레베트의 작업을 완성하려는 의도와 같은 맥락에서 모레아 원정을 계획했다. 이 원정대의 고고학 부문은 아카데미 데 쟁스크립시옹 에 벨르 레트르에서 샤를-베누아 하세와 데지레-라울 로셰트의 감독 하에, 레옹-장-조제프 뒤부아 (감독)와 샤를 레노르망 (부감독), 역사학자 에드가 키네, 화가 외젠-엠마뉘엘 아마우리-뒤발과 피에르 펠릭스 트레젤로 구성되었다. 그리스 작가이자 언어학자인 미셸 시나스가 동행했다.
이들의 임무는 고대 문헌의 설명을 참고하여 80개의 고대 유적지 (아카이아, 아르카디아, 엘리스 및 메세니아)를 찾는 것이었다. 파우사니아스 페리에게테스의 기록을 따라 유적지들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량하고, 건물과 장식품을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비잔틴 수도원들도 여정에 추가되어, 수도원에서 몇 권의 필사본을 구매하려는 임무도 맡았다.[73]

그러나 고고학 부문은 처음 계획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구성원들은 질병과 불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샤를 레노르망은 레옹-장-조제프 뒤부아의 지시를 받는 것을 거부하고 혼자 여행을 떠났고, 에드가 키네 역시 공동 저술에 관심이 없어 독자적인 행보를 택했다.[32] 조각가 장-바티스트 비에티도 원정대와 আলাদা হয়ে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따로 여행했다.[94]
결국 고고학 부문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고, 레옹-장-조제프 뒤부아는 이를 막지 못했다. 주요 고고학 작업은 건축 및 조각 부문에서 수행되었고, 고고학 부문의 나머지 구성원들이 합류했다.[1][73]
3. 4. 3. 건축 및 예술 연구
요한 요아힘 빈켈만이 고안한 고대 예술 해석 체계는 유럽의 취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저서 ''고대 예술사''는 1764년에 출판되어 1766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이 책에서 빈켈만은 고대 예술을 시대별로 나누고, 작품을 연대순 및 양식별로 분류하는 전통을 세웠다.[17] 그는 그리스 예술의 황금기를 예술적 성취의 절정으로 보았으며,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경력으로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했다.[19]프랑스 정부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레베트의 작품을 완성하려는 의도로 모레아 원정을 계획했다. 딜레탄티 협회가 위임하고 자금을 지원한 이 원정은 고대 그리스를 재발견하려는 초기 시도 중 하나였다. 스튜어트와 레베트의 아테네와 섬으로의 첫 번째 원정(1751-1753)은 ''아테네의 고대 유물'' 출판으로 이어졌고, 이는 신고전주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에게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다.
모레아 원정대는 고대 문헌을 바탕으로 80개의 고대 유적지를 찾고자 했다. 이들의 여정은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을 따랐다. 유적지들은 정밀한 삼각 측량을 통해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하고, 건축 섹션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세우고, 건물과 장식품을 도면으로 제작하고, 주조하며,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73]
프랑스인들은 고대 유적뿐만 아니라 비잔틴 기념물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교회를 묘사하고, 계획을 보고하며, 세밀하게 그렸다.[1] 아벨 블루에는 그의 저서 ''모레아 원정 과학 보고서; 펠로폰네소스, 키클라데스, 아티케의 건축, 조각, 비문 및 조망''에서 나바리노 (새 요새 네오카스트로 안의 구세주 변용 교회), 오스피노, 모돈 (성 바실 교회), 안드루사 (성 조지 교회), 사마리 (조오도초우 피지 교회) 또는 부르카노 수도원 등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제공했다.[113]
4. 원정의 결과 및 영향
모레아 원정은 군사적 성공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독립과 근대 국가 건설, 그리고 학문적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군사적 성과 및 그리스 독립 지원: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이집트군 철수 이후, 프랑스군은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남아있는 소수의 오스만군을 몰아내고 그리스의 독립을 굳건히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프랑스-그리스 관계 강화: 모레아 원정은 프랑스와 그리스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의 군사적 지원과 더불어, 과학 원정대의 활동은 양국 간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고 상호 이해를 증진시켰다.
- 학문적 성과: 모레아 원정의 과학 원정대는 고고학, 건축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메세네와 올림피아 유적 발굴은 고대 그리스 문명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블루에는 기념물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는 발굴을 거부했고, 엘긴이 파르테논 신전에서 했던 것처럼, 나머지 부분과 상관없이 조각의 일부를 떼어내려는 의도로 조각상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했다.[111]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제우스 신전의 세 개의 메토프는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그리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 루브르 박물관으로 통째로 옮겨졌다.[108][112]
4. 1. 그리스 독립에 대한 기여
이집트 부왕(Viceroy) 무함마드 알리와 영국 해군 제독 에드워드 코드링턴이 서명한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그곳에 남아있는 소수의 터키군에게 넘겨야 했다.[22][27][33] 그러나 이브라힘 파샤는 여러 핑계를 대며 철수를 지연시켰고, 프랑스 장교들은 병사들의 전투적인 열정을 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2][27][33] 프랑스 군대의 조급함과 야영지의 질병 확산은 이집트 사령관이 철수하도록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24][34]1828년 9월 7일, 콩케랑호에서 열린 회의 이후,[27] 이브라힘 파샤는 9월 9일부터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22][23] 이집트 함대가 한 번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육지에 남아있는 군대를 위한 보급품은 허가되었다.[36] 1828년 10월 5일, 이브라힘 파샤를 태운 마지막 이집트 수송선이 떠났고, 그는 4만 명의 병력 중 2만 1천 명 정도만을 데리고 돌아갔다.[27][37] 펠로폰네소스에는 소수의 오스만 병사(2,500명)가 여러 요새를 지키기 위해 남았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확보하고 독립 그리스에 넘겨주는 임무를 수행했다.
4. 2. 프랑스-그리스 관계 강화
이집트 부왕 무함마드 알리와 영국 해군 제독 에드워드 코드리턴이 서명한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그곳에 남아있는 소수의 터키군에게 넘겨야 했다. 이브라힘 파샤는 식량 공급이나 수송 문제, 요새 인계의 예상치 못한 어려움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철수를 지연시켰다. 프랑스 장교들은 병사들의 전투적인 열정을 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는데, 예를 들어 (거짓) 아테네 진군 소식에 흥분하기도 했다.[22][27][33] 프랑스 군대의 조급함은 이집트 사령관이 그의 의무를 존중하도록 설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 군인들은 야영지에 텐트를 적시고 열병과 이질 확산을 촉진하는 가을 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24][34] 1828년 9월 24일, 루이 외젠 카베냑은 자신의 공병대 400명 중 30명이 이미 열병에 걸렸다고 썼다.[22] 메종 장군은 자신의 병사들을 요새의 병영에 배치할 수 있기를 바랐다.[35]1828년 9월 7일, 메종 장군과 세 명의 연합 제독이 참석한 가운데 콩케랑호에서 열린 긴 회의 이후[27], 이브라힘 파샤는 9월 9일부터 군대를 철수하기로 동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이집트인들은 무기, 짐, 말을 가지고 떠나지만 그리스 노예나 포로 없이 떠나야 했다.[22][23] 이집트 함대가 한 번의 작전으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육지에 남아있는 군대를 위한 보급품이 허가되었고, 이들은 긴 봉쇄를 막 겪었다.[36] 5,500명의 병력과 27척의 배로 구성된 첫 번째 이집트 사단은 9월 16일에 출항했으며, 연합 함대에서 3척의 배(영국 2척과 프랑스 프리깃함 ''시렌'')의 호위를 받았다. 그 전날인 9월 15일, 프랑스군은 캠프를 ''페탈리디''에서 옮겨 메세니아 반도를 서쪽으로 가로질러 나바리노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은 나바리노에서 북쪽으로 두 리그 떨어진 습지 평원인 ''잘로바'' 만 북쪽에 새로운 캠프를 설치했다.[27][23] 10월 1일, 메종 장군은 이브라힘 파샤(호위병 없이)와 그리스 장군 니키타라스가 참석한 가운데 해안에서 프랑스군 전체를 사열했다. 프랑스 인쇄공 자크 망제르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 사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했다.[23]
철수는 9월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마지막 이집트 수송선은 10월 5일에 이브라힘 파샤를 태우고 떠났다. 이브라힘 파샤가 이집트에서 데려온 4만 명의 병력 중 그는 2만 1천 명 정도만을 데리고 돌아갔다.[27][37] 소수의 오스만 병사(2,500명)가 펠로폰네소스의 여러 요새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프랑스군의 다음 임무는 그들을 확보하고 독립 그리스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이 부서는 장-니콜라 위요(Jean-Nicolas Huyot)와 장-앙투안 르트론(Jean-Antoine Letronne)에 의해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 설립되었으며, 건축가 기욤-아벨 블루에(Guillaume-Abel Blouet)를 책임자로 임명했다.[1] 그를 돕기 위해, 국립 연구소는 고고학자 아마블 라부아지에(Amable Ravoisié)와 화가 프레데릭 드 고르네(Frédéric de Gournay)와 피에르 아킬 포와로(Pierre Achille Poirot)를 파견했다. 고고학 부서가 해산된 후 고고학자 레옹-장-조제프 뒤부아(Léon-Jean-Joseph Dubois)와 화가 피에르 펠릭스 트레젤(Pierre Félix Trézel)과 외젠 에마뉘엘 아모리 뒤발](Eugène Emmanuel Amaury Duval)이 합류했다.
장-니콜라 위요는 이 부서에 매우 정확한 지침을 내렸다.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및 중동에서 형성된 광범위한 경험을 바탕으로 엔지니어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그들에게 시계와 나침반으로 측정한 정확한 측정을 기록하는 발굴에 대한 진정한 일기를 유지하고, 여행한 지역의 지도를 그리고, 지형의 배치를 묘사하도록 요청했다.[95]
고고학 및 예술 작품의 출판은 물리 및 자연 과학 작품 출판과 동일한 패턴을 따랐다. 즉, 여행한 도로, 이 경로를 따라 주목할 만한 기념물에 대한 설명, 목적지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 여정이었다. 따라서, ''모레아 원정. 미술 섹션'' 제1권은 나바리노(1-7쪽[96])를 6페이지의 그림(분수, 교회, 나바리노 요새 및 네스토르의 도시[97])과 함께 설명하고, 9-10페이지에서는 나바리노-메토니[98] 도로가 4페이지의 판화(폐허가 된 교회와 프레스코, 그리고 독자에게 장면이 아르카디아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목가적인 풍경)와 함께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99] 마지막으로 3페이지의 메토니[100]와 4페이지의 그림이 있다.[101]
고고학 원정대는 나바리노(필로스), 메토니, 코로니, 메세네, 올림피아(출판물의 첫 번째 권에 설명됨)를 거쳐 바세, 메갈로폴리스, 스파르타, 만티네이아, 아르고스, 미케네, 티린스 및 나플리오(두 번째 권의 주제), 키클라데스(시로스, 케아,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및 밀로스), 수니온, 에기나, 에피다우로스, 트로이젠, 네메아, 코린토스, 시키온, 파트라스, 엘리스, 칼라마타, 마니 반도, 마타판 곶, 모넴바시아, 아테네, 살라미스 섬 및 엘레우시스(세 번째 권에 포함)를 여행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예술적, 고고학적 탐사는 당시 그리스에서 고고학 연구가 진행되던 방식대로 전개되었다.[1] 첫 번째 단계는 항상 고대 작가인 호메로스, 파우사니아스 또는 스트라본의 텍스트를 참조하여 현장 확인(헤로도토스의 방식과 유사한 부검)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호메로스 시대의 네스토르 왕의 도시인 유명한 필로스가 위치한 나바리노(''Paleokastro, 올드 나바리노 또는 Zonchio'') 근처의 코리파시움 곶에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사용된 "접근 불가능한"과 "모래가 많은"(''ἠμαθόεις'')이라는 형용사로부터 처음으로 그 위치가 결정되었다. 블루엣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어떤 현대 여행자도 언급하지 않았고, 내가 이전 방문에서 알아차렸던 이러한 헬레니즘 건축물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발견이었고, 우리가 메세니아의 필로스를 보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주는 매우 그럴듯한 이유였다."[103] 마찬가지로, 조금 더 가면 그는 메토니 도시, 즉 호메로스 시대의 페다수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우사니아스의 설명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항구의 고대 유적은 고대 도시의 위치를 확실하게 결정하기에 충분하다."[104]
4. 3. 그리스 근대 국가 건설 지원
알렉산드리아 협약(1828년 8월 6일)에 따라 이브라힘 파샤는 이집트군을 철수시키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소수의 터키군에게 넘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여러 핑계를 대며 철수를 지연시켰고, 프랑스 장교들은 병사들의 전투적인 열정을 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22][27][33] 또한 프랑스 군인들은 열병과 이질 확산에 시달렸다.[24][34]
1828년 9월 7일, 메종 장군과 연합군 제독들의 회의 이후[27], 이브라힘 파샤는 9월 9일부터 군대를 철수하기로 동의했다. 이집트 함대가 한 번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육지에 남아있는 군대를 위한 보급품은 허가되었다.[36] 철수는 9월 한 달 동안 계속되었고, 마지막 이집트 수송선은 10월 5일에 이브라힘 파샤를 태우고 떠났다.[27][37] 이후 프랑스군은 펠로폰네소스에 남아있는 오스만 병사(2,500명)들을 확보하고 독립 그리스에 넘겨주는 임무를 수행했다.

장-니콜라 위요(Jean-Nicolas Huyot)와 장-앙투안 르트론(Jean-Antoine Letronne)에 의해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에 설립된 부서는 건축가 기욤-아벨 블루에(Guillaume-Abel Blouet)를 책임자로 임명했다.[1] 그를 돕기 위해 국립 연구소는 고고학자 아마블 라부아지에(Amable Ravoisié)와 화가 프레데릭 드 고르네(Frédéric de Gournay)와 피에르 아킬 포와로(Pierre Achille Poirot)를 파견했다. 고고학 부서가 해산된 후에는 고고학자 레옹-장-조제프 뒤부아(Léon-Jean-Joseph Dubois)와 화가 피에르 펠릭스 트레젤(Pierre Félix Trézel), 외젠 에마뉘엘 아모리 뒤발(Eugène Emmanuel Amaury Duval)이 합류했다.
건축가 장-니콜라 위요(Jean-Nicolas Huyot)는 이 부서에 시계와 나침반으로 측정한 정확한 측정을 기록하는 발굴 일기를 유지하고, 여행 지역 지도를 그리며, 지형 배치를 묘사하도록 지시했다.[95]
고고학 원정대는 나바리노(필로스), 메토니, 코로니, 메세네, 올림피아, 바세, 메갈로폴리스, 스파르타, 만티네이아, 아르고스, 미케네, 티린스, 나플리오, 키클라데스(시로스, 케아, 미코노스, 델로스, 낙소스, 밀로스), 수니온, 에기나, 에피다우로스, 트로이젠, 네메아, 코린토스, 시키온, 파트라스, 엘리스, 칼라마타, 마니 반도, 마타판 곶, 모넴바시아, 아테네, 살라미스 섬, 엘레우시스를 여행했다.

모레아 원정대 일행은 메세네에서 최초로 과학적인 발굴 조사를 수행했다.[105] 그들은 에파미논다스가 건설한 요새화된 성벽과 치성벽을 발견하고, 성벽에 있는 두 개의 문 중 하나를 "아마도 그리스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으로 묘사했다.[106] 그들은 유적지의 경계를 정하고 메세네의 일반적인 계획을 제시했으며,[102] 본격적인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경기장 관람석 파편, 기둥, 주랑, 제단, 부조, 조각품, 비문 등을 발굴했다. 참호를 파서 진행된 발굴을 통해 기념물의 기초에 대한 정확한 계획을 결정하고, 경기장과 헤로온, 작은 극장 또는 에클레시아스테리온의 복원된 모형을 제안했다.

4. 4. 학문적 성과
요한 요아힘 빈켈만은 고대 예술 해석 이론과 체계를 통해 유럽의 취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대 예술을 시대별로 나누고, 작품을 연대순 및 양식별로 분류하는 전통을 시작했다.[17] 그는 그리스 예술의 황금기를 페이디아스의 경력으로 절정에 달한 예술적 성취의 절정으로 보았다.[19] 빈켈만은 정치적, 종교적 자유의 시대에 구상된 그리스 예술의 숭고한 시기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예술 진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완성했다. 그의 이론은 고대 그리스를 이상화했고, 유럽인들의 현대 그리스 여행에 대한 욕구를 증폭시켰다.[20]프랑스 정부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니콜라스 레베트의 작품을 완성하려는 의도와 같은 맥락에서 모레아 원정을 계획했다. 딜레탄티 협회가 위임하고 자금을 지원한 반(半) 과학적 원정은 고대 그리스 재발견의 벤치마크 역할을 했다.[1]
고고학 및 예술 작품의 출판은 물리 및 자연 과학 작품 출판과 동일한 패턴을 따랐다. 즉, 여행한 도로, 이 경로를 따라 주목할 만한 기념물에 대한 설명, 목적지에 대한 설명이 포함된 여정이었다.
고고학 원정대는 나바리노(필로스), 메토니, 코로니, 메세네, 올림피아, 바세, 메갈로폴리스, 스파르타, 만티네이아, 아르고스, 미케네, 티린스, 나플리오, 키클라데스, 수니온, 에기나, 에피다우로스, 트로이젠, 네메아, 코린토스, 시키온, 파트라스, 엘리스, 칼라마타, 마니 반도, 마타판 곶, 모넴바시아, 아테네, 살라미스 섬, 엘레우시스를 여행했다.

원정대는 1829년 5월 10일부터 6주 동안 올림피아에서 머물렀다.[1][32][107] 레옹-장-조제프 뒤부아와 아벨 블루에가 그곳에서 첫 번째 발굴 작업을 수행했다. 올림피아 유적지는 1766년 영국의 고대 유물 수집가 리처드 챈들러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그 이후로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모레아 원정대의 고고학자들은 에드워드 도드웰과 존 스펜서 스탠호프의 더 정확한 묘사 덕분에 이곳의 일반적인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들은 알페이오스 강과 클라데오스 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해 두꺼운 퇴적층에 덮여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블루에는 기념물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는 발굴을 거부했고, 엘긴이 파르테논 신전에서 했던 것처럼, 나머지 부분과 상관없이 조각의 일부를 떼어내려는 의도로 조각상을 훼손하는 것을 금지했다.[111] 올림피아에서 발견된 제우스 신전의 세 개의 메토프는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그리스 정부의 승인을 받아 루브르 박물관으로 통째로 옮겨졌다.[108][112] 그러나 아마우리-뒤발의 직접적인 증언에 따르면, 그들이 발굴한 많은 귀중한 작품들이 보호를 위해 다시 묻혔다.
5.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해석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 독립 전쟁에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개입한 모레아 원정은 단순한 군사 작전을 넘어, 고고학, 지리학, 자연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학술 탐사였다.
프랑스 탐험대는 고대 그리스 유적뿐만 아니라 비잔틴 시대의 유적까지 상세하게 조사하고 기록했다.[1] 이전까지 여행자들은 주로 고대 그리스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중세 및 근대 그리스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벨 블루에는 나바리노(새 요새 네오카스트로 안)의 구세주 변용 교회, 오스피노, 모돈의 성 바실 교회, 안드루사의 성 조지 교회와 사마리의 조오도초우 피지 교회, 부르카노 수도원 등 다양한 비잔틴 건축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남겼다.[113]
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고적조사사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한국의 고대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기록했지만, 그 목적은 한국 문화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일본 문화의 영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레아 원정 역시 프랑스의 문화적 우월성을 과시하고, 그리스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의도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정을 통해 그리스의 다양한 문화유산이 보존되고 연구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모레아 원정은 외세 개입의 양면성과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5. 1. 외세 개입의 양면성
장-니콜라 위요(Jean-Nicolas Huyot)와 장-앙투안 르트론(Jean-Antoine Letronne)은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에 이 부서를 설립하고, 건축가 기욤-아벨 블루에(Guillaume-Abel Blouet)를 책임자로 임명했다.[1] 국립 연구소는 아마블 라부아지에(Amable Ravoisié), 프레데릭 드 고르네(Frédéric de Gournay), 피에르 아킬 포와로(Pierre Achille Poirot)를 파견하여 그를 도왔다. 고고학 부서가 해산된 후에는 레옹-장-조제프 뒤부아(Léon-Jean-Joseph Dubois), 피에르 펠릭스 트레젤(Pierre Félix Trézel), 외젠 에마뉘엘 아모리 뒤발(Eugène Emmanuel Amaury Duval)이 합류했다.장-니콜라 위요(Jean-Nicolas Huyot)는 이 부서에 매우 정확한 지침을 내렸다. 그는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중동에서의 광범위한 경험을 바탕으로, 엔지니어의 영향을 받아 시계와 나침반으로 측정한 정확한 기록을 유지하고, 여행 지역의 지도를 그리며, 지형 배치를 묘사하는 발굴 일기를 작성하도록 요청했다.[95]
모레아 과학 탐험대의 결과는 이 작업의 지속을 가능하게 할 영구적이고 안정적인 구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846년부터 리카베투스 산 기슭의 디도 거리에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가 설립되어, 모레아 과학 탐험대가 시작한 작업을 체계적이고 영구적으로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114]
5. 2. 자주적 근대화의 중요성
장-니콜라 위요(Jean-Nicolas Huyot)와 장-앙투안 르트론(Jean-Antoine Letronne)이 설립하고 건축가 기욤-아벨 블루에(Guillaume-Abel Blouet)가 이끈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émie des Beaux-arts)의 부서는 정확한 측량 기록, 여행 지역 지도 작성, 지형 묘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1] [95] 그러나 원정대 과학 부문 대다수는 열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지형 측량대는 18명의 장교 중 3명이 사망하고 10명이 퇴직을 강요받았으며,[115] 장-바티스트 보리 드 생-뱅상은 "7월에 우리를 괴롭힌 끔찍한 더위로 인해 지형 측량대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고 기록했다.[116] 에밀 퓌이용 보블레는 측지 서비스에 고용된 12명의 장교 중 2명이 사망하고 모두 병을 앓았다고 덧붙였다.[117]자연 과학 부문에서는 에우로타스 하구 탐사 중 모기장을 설치하지 않아 구성원들이 ''쿠렉스 코누피 Br.'' 종의 모기에 물려 열병에 시달렸다.[72] 이로 인해 말보이지로의 출발이 앞당겨지고 작업이 중단되었다. 레옹-장-조제프 뒤부아, 에드가 키네, 아모리-뒤발 등도 열병으로 조기 귀국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장-바티스트 비에티와 피에르 페티에는 각각 1831년 8월과 1836년 3월까지 이 나라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외부의 지원을 받는 상황에서도, 자주적인 역량 강화와 개혁을 통해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5. 3. 문화유산 보존의 중요성
장-니콜라 위요와 장-앙투안 르트론은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 이 부서를 설립하고, 건축가 기욤-아벨 블루에를 책임자로 임명했다.[1] 국립 연구소는 이들을 돕기 위해 고고학자 아마블 라부아지에와 화가 프레데릭 드 고르네, 피에르 아킬 포와로를 파견했다. 고고학 부서가 해산된 후에는 고고학자 레옹-장-조제프 뒤부아와 화가 피에르 펠릭스 트레젤, 외젠 에마뉘엘 아모리 뒤발이 합류했다.건축가 장-니콜라 위요는 이 부서에 매우 정확한 지침을 내렸다. 이탈리아, 그리스, 이집트, 중동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시계와 나침반으로 측정한 정확한 측정을 기록하는 발굴 일지를 작성하고, 여행 지역의 지도를 그리며, 지형 배치를 묘사하도록 요청했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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