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계 러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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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계 러시아인은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인해 해외로 망명한 러시아인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주로 러시아 제정 붕괴 후 공산주의 정권에 반대하며 망명했으며, 러시아 민족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 출신을 포함한다. 이들은 주로 반공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며, 러시아 문화와 생활 방식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유럽, 아시아, 북미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으며, 정치, 군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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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계 러시아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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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지도 | |
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러시아 이민자 백군 백계 러시아인 백러시아 이민자 하케로시아진 (일본어: 白系ロシア人) 하케로진 (일본어: 白系露人) 바이 어 (중국어: 白俄) |
정의 | |
정의 | 러시아 제국에서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 이후에 이주한 사람들. |
관련 용어 | 러시아 이민, 러시아 내전 이민자 |
주요 이주 시기 | 주로 1917년부터 1920년대까지 |
역사적 배경 | |
원인 |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 공산주의 정권 수립 |
이주 동기 | 정치적 박해 피난 사회 경제적 불안 피난 공산주의 반대 |
주요 이주 지역 | 유럽 국가들 아시아 지역 미국 |
문화 및 사회적 영향 | |
문화적 영향 | 현지 러시아 문화 보존 러시아 문화 전파 망명 문학 발전 사회 및 정치적 활동 |
사회적 영향 | 이민자 사회 형성 러시아 문화적 정체성 유지 모국 문화 전파 |
용어 사용 | |
"백계 러시아인" 용어 | 러시아 혁명 이후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 특히 반볼셰비키 성향을 가진 이민자들을 지칭. |
"백군"과의 관계 |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에 속했던 인물들 중 일부도 "백계 러시아인"에 포함됨. |
다양한 국적 이민자 포함 여부 | 러시아 제국에 거주하던 다양한 민족 출신 이민자들도 "백계 러시아인"에 포함될 수 있음. |
관련 주제 | |
관련 주제 |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 러시아 이민 망명 문학 |
2. 명칭 및 정의
"백계(白系)"라는 용어는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赤色)에 대응하여 러시아 제국을 나타내는 백색(白色)을 의미하며, 백색테러와 같은 어원을 갖는다. 제정 복고를 희망하며 적군과 각지에서 내전을 일으켰던 군인·군벌도 "백군(白軍)"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백인(白人)이나 백러시아와는 무관하다.
Белая эмиграцияru는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의 러시아 내전으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망명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지식인, 기술자, 귀족, 백군(백위군), 제정 지지 시민들이 조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했다.
"러시아인"은 구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망명자를 대략적으로 총칭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 구성원이 반드시 러시아 민족이나 슬라브인인 것은 아니며, 러시아 영토 내에 거주했던 여러 민족 출신자도 많이 포함되었다. 특히 소비에트 정부의 탄압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 유대인 망명자가 많았다.
보다 중립적인 호칭으로는 "제1차 이민(first-wave émigré, Эмигрант первой волныru)"이 있다. 이 용어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 당사자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었고, 1980년대 후반 이후 러시아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3. 역사적 배경
3. 1. 러시아 혁명과 내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고 이후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지식인, 기술자, 귀족, 백군(백위군), 제정 지지 시민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멘셰비키, 에스에르 등 다른 정당 구성원들과 반혁명은 아니지만 소비에트 정권의 박해를 우려한 사람들도 망명에 참여했다. 1917년부터 1920년 사이에 9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러시아를 떠났다.[2]
3. 2. 망명과 무국적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고 뒤이은 러시아 내전으로 많은 지식인, 기술자, 귀족, 백군, 제정 지지 시민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볼셰비키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멘셰비키나 에스에르 등 다른 정당, 반혁명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위험을 느낀 사람들도 해외로 망명하였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밖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9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경위로 인해, 그들은 러시아 국적자로서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고, 폴란드인과 같은 예외를 제외하고 현지 정부의 국적 취득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 무국적자가 되었다. 출생지주의 국가에서 태어난 백계 러시아인의 자녀에게는 현지 정부의 국적이 무조건 부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1940년대 후반 이후 요시프 스탈린 및 그 후의 정부 지도자들의 호소에 따라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스탈린 등은 각지의 소련 영사관을 통해 백계 러시아인들에게 반혁명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하고, 희망자에게는 소련 국적을 부여하며, 소련 연방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선전하며, 함께 조국을 재건하자고 호소하였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및 기타 소련 연방에서 등록을 받은 종교 단체는 서신 교환, 인력 파견 및 간행물 발송을 통해 이러한 선전에 협력하였다. 이에 따라 귀국한 사람들 중에는 시베리아의 처녀지 개척 등에서 고된 생활을 강요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유럽이나 만주 등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이후 소련군이 진주한 지역에서는 반소 활동 등을 죄명으로 체포되어 처벌받은 백계 러시아인도 있었다.
3. 3. 종교적 망명
볼셰비키는 무신론을 내세워 반소적으로 간주한 종교 조직을 탄압했기 때문에 많은 종교인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정교도, 특히 러시아 정교회 관계자들은 다수가 망명하여 해외에 재외 시노드를 형성하게 되었다.[32] 그러나 재외 시노드가 아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관계를 유지하는 교회를 형성하거나, 기존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관할하의 정교회에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망명한 정교도 중에는 세르게이 불가코프,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블라디미르 로스키, 파벨 예프도키모프처럼 망명지에서 신학 교육에 종사하여 저명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본 정교회에 소속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그 후손들은 현재도 고베 그리스도 정교회나 니콜라이 성당 등 일본의 몇몇 정교회 내에서, 일정한 망명자의 후손들(민족적으로는 비러시아인, 예를 들어 그루지야인계 등을 포함)로 구성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32]
4. 이념 및 활동
백계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반공주의자였으며,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유산을 러시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1917년부터 1991년까지의 기간을 소비에트 정권의 반기독교적 점령 시기로 여겼다. 예를 들어, 그들은 혁명 이전의 삼색기(백색-청색-적색)를 깃발로 사용했고, 일부 단체는 러시아 제국 해군의 군기를 사용했다.[4]
상당수의 백계 러시아인들은 군주주의자로 묘사될 수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정치 구조는 국민 투표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믿는 "결정되지 않은 자들"("nepredreshentsi")의 입장을 취했다.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은 자신의 사명이 소련 붕괴 후 러시아 문화에 이 영향을 되돌리기 위해 해외에서 혁명 이전의 러시아 문화와 생활 방식을 보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비잔티움 독수리와 러시아 삼색기와 같이 백계 러시아인들의 많은 상징들이 소비에트 이후 러시아의 상징으로 재도입되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종교적 사명은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의 요한 주교( 러시아 정교회 해외 교구의 성인으로 시성됨)와 같은 사람들이 1938년 전 이민자 회의에서 언급한 또 다른 개념이었다.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은 또한 러시아를 해방시키기를 바라면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활동적인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이 이데올로기는 백군의 패배 후 "러시아를 위한 전투는 끝나지 않았고, 단지 새로운 형태를 취했을 뿐"이라고 말한 프요트르 블랑겔 장군에게서 크게 영감을 받았다.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정권과의 투쟁을 목적으로 전러시아 군사 연합, 러시아 진리의 형제단, NTS 등 다양한 단체를 결성했다. 이로 인해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비밀경찰의 침투 대상이 되었는데 (예: 트레스트 작전 및 내선 등). 백군 출신 수십 명(72명에서 180명까지 수치가 다양함)이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원하는 자원병으로 복무했다. 일부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비에트 애국자"로 불리며 친소 성향을 보였고, 이들은 믈라도로시, 예브라지이치, 스메노베호프츠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1933년 이후에는 NSDAP을 모방하고 독일 국민 사회주의자들과 가까워지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결과 독일에서는 ROND(러시아 인민 해방 운동)와 같은 단명한 정당들이 생겨났다.[5]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이 러시아 해방 운동에 참여했다. 백계 러시아인들이 행동으로 독일 세력을 지지하도록 몰아넣은 주된 이유는 "봄 공세", 즉 소련에 대한 무력 개입으로 내전을 계속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자는 많은 러시아 장교들이 망명한 날부터 끝나지 않은 지속적인 사건으로 인식했다.[7]
러시아 이민자들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활동 중 하나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러시아인들을 위한 기념비 건립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4년부터 1917년까지 200만 명의 러시아인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이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탄했기에 소비에트 연방이 이들에 대한 기념비를 건립하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전사자 기념비 외에도 다른 기념비들이 세워졌다. 브뤼셀, 시애틀, 하얼빈에는 처형된 니콜라이 2세 황제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상하이에는 러시아의 국민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전사자 기념비의 인기는 전쟁으로 인한 슬픔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북미 전역에 흩어져 종종 심하게 분열된 이민자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수단이기도 했다.
5. 지역별 분포 및 활동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처음에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에서 터키로 피난한 후 유럽의 다른 슬라브 국가들(유고슬라비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폴란드 제2공화국)로 이동했다. 또한 많은 수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 이란, 바이마르 공화국(독일), 프랑스로 피난했다. 일부 이주민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루마니아 왕국,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이탈리아로도 피난했다. 베를린과 파리는 번영하는 이주민 공동체를 형성했다.
미국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 이후,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 전역에서 적군과 싸우거나 주둔하거나 생활하던 많은 군인과 민간 관리들은 가족과 함께 하얼빈(하얼빈 러시아인 참조), 상하이(상하이 러시아인 참조) 및 중국,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의 다른 도시들로 이동했다. 일부 이주민들은 일본으로 이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 많은 러시아 이주민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페루,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이완, 호주로 이동했으며, 그들의 많은 공동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많은 사람들[2]은 베르마흐트 또는 바펜-SS에서, 종종 통역관으로 복무했다.[3]
5. 1. 유럽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되고 뒤이은 러시아 내전으로 많은 지식인, 기술자, 귀족, 백군, 제정 지지 시민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볼셰비키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멘셰비키나 에스에르 등 다른 정당, 반혁명이 아니었음에도 소비에트 정권으로부터 박해받을 위험을 느낀 사람들도 해외로 망명하였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러시아 밖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9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추정된다.5. 2. 오스만 제국
혁명 이후 약 15만 명의 백계 러시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피난했다. 이들 중에는 왕족, 장군, 고위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인구 약 90만 명이었던 이스탄불은 이들에게 문을 열었다. 1917년 전쟁으로 인한 이주민들은 크림 타타르인이나 코카서스 무슬림이 아닌, 수 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과 싸워 온 차르 러시아의 '귀족'들과 군인들이었다. 1917년 말 소규모 집단부터 시작된 이주는 1920년 볼셰비키에게 크림반도가 함락되면서 더욱 커졌다.[26]러시아에서 작위와 돈, 저택을 버리고 이스탄불에 온 수만 명의 사람들은 도시 전역에 흩어져 생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어떤 이들은 책을 팔았고, 어떤 이들은 수공예품이나 꽃을 팔았다. 예전에 Hristaki Passage로 알려졌던 곳은 러시아 여성들이 꽃을 팔면서 치체크 파사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1919년에 온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더 나은 상황이었다. 초기에 온 사람들은 이스탄불의 프랑스와 영국 대표부, 위원회 또는 그 옆에서 공무원, 통역사, 심지어 군 또는 경찰 부대에서 일자리를 찾았다.[27][28]
5. 3. 아시아
미국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 이후,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 전역에서 적군과 싸우거나 주둔하거나 생활하던 많은 군인과 민간 관리들은 가족과 함께 하얼빈(하얼빈 러시아인 참조), 상하이(상하이 러시아인 참조) 및 중국, 중앙아시아, 중국 서부의 다른 도시들로 이동했다. 일부 이주민들은 일본으로 이동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와 1920년대 초, 백계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백인 이주민들이 중국으로 대거 유입되었다.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만주(특히 당시 러시아 이외 지역 중 러시아인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였던 하얼빈)와 상하이와 같은 조계로 향했지만, 일부는 베이징으로 향하기도 했다. 1924년 중국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 정부를 승인하였고, 소련 시민권을 거부한 대다수의 중국 내 백계 러시아인들은 무국적자가 되었으며, 따라서 다른 유럽인, 미국인, 일본인들과 달리 치외법권을 누리지 못하고 중국 법의 적용을 받았다. 중국에서 태어난 백계 러시아인들도 중국 시민이 될 자격이 없었다.[2]
일부 백계 러시아인들은 재산을 유지한 채 중국에 도착했지만, 대부분은 무일푼이었고, 민족적 편견과 중국어 구사 능력 부족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젊은 여성들은 매춘부나 택시댄서가 되었다. 외국 여성이 부족했던 당시 외국 남성들과 중국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1935년 국제연맹의 상하이 조사에 따르면 16세에서 45세 사이의 러시아 여성의 22%가 어느 정도 매춘에 종사하고 있었다.[2]
백계 러시아 여성들은 대부분 베이징 공사관 구역 동쪽에 인접한 “악명 높은 지역(Badlands)”에서 일했는데, 그 중심은 촨반 후통(Chuanban Hutong)이라는 골목이었다. 미국의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는 탐험가 스벤 헤딘과 과학자 데이비드슨 블랙과 함께 “약간 평판이 좋지 않은 카페”를 자주 찾아 “스크램블 에그를 먹고 러시아 여성들과 춤을 추었다”고 말했다.[2]
음악이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등 전문적인 일을 찾은 여성들도 있었다. 다른 여성들은 재봉사, 점원, 미용사로 일했다. 많은 남성들은 상하이 자원 봉사단 내 유일한 정규 부대인 상하이 러시아 연대의 군인이 되었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체는 상당한 결속력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두 개의 러시아 학교와 다양한 문화 및 스포츠 클럽이 있었다. 러시아어 신문과 라디오 방송국도 있었다.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의 성 요한의 지도 아래 현지 러시아 정교회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2]
일본군 장교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는 백계 러시아 여성들을 매춘과 마약 중독에 강제로 몰아넣어 중국인 남성 고객들에게 스파이 활동을 하도록 하고 마약을 유포하게 했다. 그는 처음에는 러시아 내전 중 백계 러시아인 반볼셰비키 운동의 패배와 협상국과 일본군의 시베리아 철수 후 극동에 피난 온 수만 명의 백계 러시아 여성 이주민들에게 식량과 숙소를 제공했다. 생계를 잃고 대부분 과부가 된 이 여성들을 도이하라는 매춘에 강제로 끌어들여 중국 전역에 매춘굴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이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일했다. 헤로인과 아편 사용이 비참한 운명을 견디는 방법으로 장려되었다. 중독된 여성들은 중국인 고객에게 판매하는 6개의 아편 파이프당 하나의 무료 아편 파이프를 받아 아편 사용을 중국 인구에 더욱 확산시키는 데 이용되었다.[2]
일본 과학자들은 731부대와 100부대에서 백계 러시아 남성, 여성,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가스를 사용하고 주사를 놓고 생체 해부를 하는 등 인체 실험을 실시했다. 731부대의 러시아인 희생자는 여러 명이었고, 증언과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 소녀와 어머니가 가스로 살해당했고, 한 러시아 남성은 몸이 두 동강 나서 포르말린으로 보존되었다.[2]
일부 어린이들은 매독에 감염된 채 731부대 벽 안에서 자랐다. 731부대에서 훈련을 받기 위해 파견된 청년단원은 매독 검사를 받을 대상자들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하나는 4, 5세 딸을 둔 백계 러시아 여성이었고, 마지막은 약 6, 7세 아들을 둔 백계 러시아 여성이었다." 이 여성들의 자녀들은 부모와 비슷한 방식으로 검사를 받았으며, 감염 기간이 치료 효과에 미치는 영향을 특히 중점적으로 조사했다.[2]
미토모 가즈오(三友一夫) 상사는 100부대의 인체 실험 중 일부를 설명했다.
>나는 일부 포로들에게 메꽃, 박테리아 및 피마자 기름 씨앗의 작용을 시험하는 실험을 5~6회 실시했다. 러시아 국적의 포로 중 한 명은 실험으로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마쓰이(松井)는 내게 그 러시아인에게 시안화칼륨 주사를 놓아 죽이라고 명령했다. 주사 후 그 남자는 즉시 사망했다. 시체는 부대의 가축 매장지에 매장되었다.
100부대 직원들은 러시아인들에게 헤로인, 피마자 기름, 담배 및 기타 물질을 수주 동안 투여했다. 실험 도중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생존자들이 더 이상 실험에 유용하지 않다고 판단되고 질병을 호소했을 때, 직원들은 그들에게 약물 주사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대신 시안화칼륨 주사로 처형했다. 총격으로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2]
필리핀은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의 위험으로부터 도피한 러시아인 800명을 받아들였다. 많은 이들이 나중에 다른 곳으로 이주했지만, 일부는 마닐라나 필리핀 다른 지역에 정착했고, 250명은 민다나오섬의 아바카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갔다.[29]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엘피디오 키리노(Elpidio Quirino) 대통령 재임 시절 필리핀은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중국에서 탈출한 백계 러시아인 6,000명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사마르(Samar)(현 동사마르) 귀후안(Guiuan) 투바바오(Tubabao) 섬에 정착했다.[30][31]
5. 4. 북미 및 기타 지역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이 영국, 미국, 캐나다, 페루,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타이완, 호주로 이주했으며, 이들이 세운 많은 공동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한다.[2] 수십만 명에서 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인원[2]이 베르마흐트 또는 바펜-SS에서, 종종 통역관으로 복무했다.[3]6. 일본 내 백계 러시아인
일본으로 망명한 구 러시아 제국 국민은 많았다. 그 내역에는 민족 러시아인 외에도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등 비(非)러시아인이 다수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들 비러시아인들은 일본어에서 통용되지 않는 우크라이나어나 폴란드어 대신, 상대적으로 통용이 쉬운 러시아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들을 러시아인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8년 독립한 폴란드 정부로부터 국적을 부여받아 재일 폴란드인으로 취급된 사례도 있었다. 또한 일본에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 중 일부는 이후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재이주했다.[33]
1936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 내 백계 러시아인은 1,294명이었다.[33]
극동 러시아에서는 백계 러시아인의 일파인 반(反)혁명파 우크라이나인들이 녹색 우크라이나를 건국했으나, 적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멸망했다. 일본의 괴뢰 국가였던 만주국에도 백계 러시아인이 존재했으며, 관동군은 백계 러시아인 사무국을 설치하여 이들을 관리했다. 또한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백계 러시아인들을 모아 만주국군에 아사노 부대라는 일본·러시아·만주 혼성 부대를 조직했다. 이들 부대가 공동으로 소련에 항전할 계획도 있었지만,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패전으로 무산되었다.
백계 러시아인 후손에 의한 이익 단체는 결성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3국으로 재이주하는 경우가 늘면서 망명자가 소수가 되었고, 일본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적 집단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 내 소수 민족 문제로 거론되는 일도 없으며, 백계 러시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일본인의 수도 극소수이다.
일본에 온 백계 러시아인을 연구하는 단체로 1995년 12월, 일본 및 러시아인 연구자들에 의해 재일 러시아인 연구회가 결성되어[34][35] 2016년까지 활동했다.[36]
일본에서는 아케이드 게임 및 오락시설 업계의 대기업인 타이토의 창업자 미하일 코간, 양과자 제조업체 모로조프의 창업자 표도르 드미트리예비치 모로조프와 그 일족, 일본 프로야구 구단 자이언츠의 초기 주력 선수였던 빅토르 스타르힌 등이 저명한 백계 러시아인으로 꼽힌다. 일본 발레계의 어머니라 불리는 엘리아나 파블로바도 1937년에 일본 국적을 취득한 대표적인 백계 러시아 출신 일본인이다. 요코즈나 다이호 고키의 아버지 마르키얀 보리슈코 역시 혁명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이다.
7. 주요 인물
백계 러시아인에 속하는 주요 인물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정치 및 종교 | 군인 | 역사 및 철학자 | 예술 | 과학자 및 발명가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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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 정치 및 종교
백계 러시아인들은 대체로 반공주의 성향을 보였으며, 소비에트 연방과 그 유산을 러시아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점령군으로 간주했다.[4] 그들은 1917년부터 1991년까지의 기간을 소비에트 정권의 반기독교적 점령 시기로 여겼다. 예를 들어, 혁명 이전의 삼색기(백색-청색-적색)를 깃발로 사용했고, 일부는 러시아 제국 해군의 군기를 사용했다.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은 군주주의자로 묘사될 수 있지만, 러시아의 정치 구조는 국민 투표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믿는 "결정되지 않은 자들"("nepredreshentsi")의 입장을 취한 사람들도 많았다.
비잔티움 독수리와 러시아 삼색기처럼 백계 러시아인들의 상징 다수가 소비에트 이후 러시아의 상징으로 재도입되었다.
상하이와 샌프란시스코의 요한 주교와 같은 사람들은 1938년 전 이민자 회의에서 종교적 사명을 언급하기도 했다.
많은 백계 러시아인들은 소련 붕괴 후 러시아 문화에 이 영향을 되돌리기 위해 해외에서 혁명 이전의 러시아 문화와 생활 방식을 보존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또한, 러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활동적인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다.
볼셰비키가 무신론을 내세워 종교 조직을 탄압했기 때문에, 많은 종교인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정교도, 특히 러시아 정교회 관계자들의 망명자는 다수였으며, 해외에 재외 시노드를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재외 시노드가 아닌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관계를 유지하는 교회를 형성하거나, 기존의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관할하의 정교회에 가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망명한 정교도 중에는 세르게이 불가코프 등의 인물들처럼 망명지에서 신학 교육에 종사하여 저명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나타났다.
정치 및 종교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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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즈의 안토니 대주교 |
알렉산더 케렌스키 |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
상하이 및 샌프란시스코의 요한 |
7. 2. 군인
- 자크 바그라투니
- 니콜라이 바라토프
- 미하일 베렌스
-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
- 라자르 비체라호프
- 바실리 비스쿠프스키
- 스타니스와프 뷰락-바와호비치
- 안톤 데니킨
- 미하일 디테리히스
- 알렉산더 두토프
- 바실리 플루그
- 우르진 가르마예프
- 바실리 구르코
- 드미트리 호르바트
-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케드로프
- 블라디미르 키슬리친
- 표트르 크라스노프
- 콘스탄틴 크로미아디
- 알렉산더 쿠테포프
- 미하일 크베친스키
- 아나톨리 리에벤
- 알렉산더 루콤스키
- 예브게니 밀러
- 빅토린 몰차노프
- 콘스탄틴 표트로비치 네차예프
- 파벨 파펭구트
- 빅토르 포크로프스키
- 알렉산더 로잔코
- 아나톨리 로고진
- 그리고리 세묘노프
- 안드레이 슈쿠로
- 미하일 스코로두모프
- 보리스 슈테이폰
- 드미트리 셰르바체프
- 보리스 스미슬로프스키
- 브세볼로드 스타로셀스키
- 빅토르 표트로비치 타라놉스키
- 세르게이 보이체호프스키
-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브랑겔
- 미첼 웨벨 3세
- 이반 예르마첸카
- 니콜라이 유데니치
7. 3. 예술가
- 마크 알다노프[34]
- 이반 부닌[34]
- 마르크 샤갈[34]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34]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34]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34]
7. 4. 과학자 및 발명가
- 이고르 시코르스키: 우크라이나 출신의 항공기 설계자로, 1913년에 세계 최초의 4발 기종인 이리야 무로메츠를 개발했다. 혁명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시코르스키 사를 설립, 헬리콥터 개발 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 블라디미르 K. 즈보리킨
- 블라디미르 이파티예프
- 알렉산더 M. 포니아토프
- 일리아 프리고진
- 알렉산더 프로코피예프 드 세베르스키
- 오토 스트루베
- 블라디미르 유르케비치
8. 관련 단체
전러시아 군사 연합은 망명 백색 정부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조직이다.[7] 이 외에도 해외 러시아 정교회, 러시아계 미국인 의회, 톨스토이 재단 등이 백계 러시아인과 관련된 단체이다.
정교회 관할 구역은 다음과 같다.
조직명(러시아어 표기) | 설명 |
---|---|
미국 정교회 (АПЦ, Митрополия) | 백계 러시아인에 의해 전적으로 설립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백계 러시아인 교구를 포함하고 있다. |
서유럽 러시아 전통 정교회 교구 총대주교구 (Парижский Экзархат) | |
해외 러시아 정교회 (РПЦЗ, Зарубежная Церковь) | 1924년 설립. 해외 러시아 정교회 공동체의 정신적, 문화적 중심지 역할. 2007년 5월 17일 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의 교회 일치 행위를 통해 80년 이상의 분리 끝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러시아 교회와 교회적 유대 재확립. |
군사 및 준군사 조직은 다음과 같다.
조직명 | 설명 |
---|---|
전러시아 군사 연합 (РОВС) | 망명 백색 정부를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조직 |
내선 | |
러시아 해방 운동 | |
러시아 해방군 (РОА) | |
러시아 인민 해방 위원회 (КОНР) | |
러시아 군단 전투원 (Союз Чинов Русского Корпуса) | |
카데트 협회 (Объединение Кадет Российских Корпусов за Рубежом) | |
돈 코사크 군 | |
쿠반 코사크 군 | |
테렉 코사크 군 | |
러시아 진리의 형제단 | |
상하이 자원 봉사단 |
정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조직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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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 연합-명령 | 군주제 백계 러시아인을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조직 |
입헌민주당 | |
10월 17일 연합 | |
사회혁명당 |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 |
멘셰비키 | |
러시아계 미국인 의회 | |
고등 군주제 연합 (Высший Монархический Совет) | |
믈라도로시 | |
러시아 연대주의자 전국 동맹 (НТС) | |
전러시아 민족 인민 국가 운동 (РОНДД) | |
러시아 인민 해방 투쟁 연합 (СБОНР) | "제2차 망명파"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많은 백계 러시아인도 포함되었다. |
스메노베호프츠 | |
전러시아 파시스트 조직 | |
러시아 파시스트 조직 | |
러시아 파시스트당 | |
러시아 여성 파시스트 운동 |
청소년 단체는 다음과 같다.
조직명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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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레인저(또는 "기사") 조직 (НОВ, Витязи) | |
러시아 탐험가 전국 협회 (НОРР) | |
러시아 스카우트 전국 조직 (НОРС) | |
러시아 청년 길잡이 조직 (ОРЮР) | |
러시아 파시스트당 소속 단체 | |
파시스트 청년 연합 | |
청년 파시스트 연합 – 선봉대 (남자) | |
청년 파시스트 연합 – 선봉대 (여자) | |
파시스트 어린이 연합 | |
정교회 러시아 길잡이 조직 (ПОРР) | |
러시아 기독교 학생 운동 (РСХД) | |
러시아 소콜 운동 (Русский Сокол) | |
VSHSON |
자선 단체는 다음과 같다.
조직명 |
---|
미국 러시아 귀족 협회 |
차르 망명자 구호 협회 |
톨스토이 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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