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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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도시로, 수메르 문명의 초기 중심지 중 하나였다. 기원전 5400년경에 건설되어 유프라테스강 어귀 근처에 위치했으나, 현재는 내륙으로 이동했다. 수메르 신화에서 최초의 도시로 여겨지며, 엔키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 에리두는 여러 시대에 걸쳐 다양한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우바이드 시대부터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에리두는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로 여겨진다. 기원전 5400년경 초기 우바이드 시대에 유프라테스강 어귀, 페르시아만과 가까운 곳에 세워졌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해안선이 멀어져 현재는 내륙 깊숙이 위치하게 되었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에리두는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모래 언덕 위에 처음 건설되었다.
2. 역사
에리두는 오랜 역사 동안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거주했던 도시이다. 우바이드 시대와 우루크 시대를 거치며 중요한 종교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여러 겹으로 쌓인 사원 유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초고대 왕조 시대에는 기념비적인 궁전이 건설되기도 했다.[45] 우르 제3왕조 시대에는 특히 번성하여 왕들이 엔키 신전을 건설하고, 고위 여사제를 임명한 것을 기념하는 연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48]
초고대 왕조 III기와 아카드 제국 시대 사이에 잠시 점령이 중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도시는 이후 이신-라르사 시대, 고 바빌로니아 시대, 카시트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대까지 계속해서 명맥을 이어갔다. 여러 시대의 통치자들, 예를 들어 우르-남무, 누르-아다드[49][50], 함무라비, 쿠리갈주 1세[51], 사르곤 2세[53], 네부카드네자르 2세[54] 등의 기록이나 건축 활동의 흔적이 에리두에서 발견되어, 이 도시가 오랫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우르 제1왕조의 엘룰루[46]나 라가쉬의 엔테메나[47]와 같은 초기 왕조 시대 통치자들의 비문도 발견되었다. 제2해안 왕조의 심바르-시팍 통치 시기에도 에리두의 사제가 언급되었다.[52]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에리두는 점차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고 주로 종교적인 장소로 남게 되었다. 특히 우르 제3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 활동은 그 이전 시대의 유적 일부를 파괴하거나 덮어버려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2. 1. 초기 역사 (기원전 6천년기 ~ 기원전 3천년기)

에리두는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 가장 오래된 정착지 중 하나로, 기원전 5400년경 초기 우바이드 시대에 유프라테스강 어귀 근처 페르시아만과 가까운 곳에 세워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해안선이 바뀌어 현대에는 내륙으로 상당히 들어간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발굴 결과, 에리두는 이전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모래 언덕 위에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에리두는 대홍수 이전에 세워진 다섯 도시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도시로 여겨진다. 고고학적으로도 에리두는 기원전 490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강력한 도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문자 기록이 풍부해지기 훨씬 이전이라 구체적인 정치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우바이드 시대 (기원전 6천년기 ~ 4천년기)에리두는 우바이드 시대 동안 약 12ha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이 시기 에리두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세 집단이 교류하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북쪽 사마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농경 집단으로, 관개 농업을 하며 운하를 파고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집을 지었다. 두 번째는 페르시아만 연안의 어로 및 수렵 집단으로, 해안가 조개무덤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며 갈대로 만든 오두막에 살았다. 세 번째는 양과 염소를 치는 유목민 집단으로, 반사막 지역에서 텐트를 치고 살았다. 이 세 집단 외에도 도시 외곽에는 종교 집단이 거주하며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은 대사원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에리두 유적에서는 아마르-신의 미완성 지구라트(기원전 2047–2039년경) 아래에서 18개 층에 걸쳐 겹겹이 쌓인 진흙 벽돌 사원이 발견되었다. 이 중 가장 아래층인 XIX층부터 VI층까지가 우바이드 시대에 해당한다. 또한, 이 시기 지층에서 원시 설형 문자의 전신으로 여겨지는 점토 토큰 12개가 발견되었다.[38][39]
우루크 시대 (기원전 4천년기 ~ 3100년)우루크 시대에 들어서면서 에리두는 더욱 발전했다. 사원 건축은 계속되어, 18개 사원 층 중 V층부터 I층까지가 이 시대에 해당한다.[40] 상당한 규모의 거주지가 발견되었고, 종교 시설 외의 일반 건물들도 확인되었다. 이 시대의 유물로는 구리나 금으로 덮인 장식용 테라코타 원뿔, 현무암으로 만든 사자상 한 쌍, 원뿔과 석고로 장식된 기둥, 다양한 우루크 시대 도자기 등이 출토되었다.[41][42][43][44]
초기 왕조 시대 (기원전 3천년기)기원전 2900년경, 에리두는 8ha에서 10ha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으며, 건물은 벽돌로 지어졌다. 이 시기에는 100m x 100m 크기의 기념비적인 궁전이 건설되었다.[45] 에리두 북쪽 1km 지점에서는 초고대 왕조 III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궁전 두 곳이 발견되었는데, 너비 45m, 길이 65m 규모에 2.6m 두께의 벽을 가졌으며, 당시 표준 건축 방식인 청어뼈 무늬로 벽돌을 쌓아 올렸다.[18]
에리두는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 이후에도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남았지만, 정치적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르 제1왕조의 통치자 엘룰루(기원전 2600년경)의 비문[46]과 라가쉬의 통치자 엔테메나(기원전 2400년경)가 엔키 신을 위해 아브-주파시라(Ab-zupasira)를 건설했다는 내용의 조각상[47]이 발견되어, 당시에도 에리두가 중요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초고대 왕조 III기와 아카드 제국 시대 사이에 잠시 점령이 중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도시는 이후 시대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다만, 기원전 2050년경부터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발굴 과정에서 우르 제3왕조 시대의 지구라트 건설 등으로 인해 일부 초기 구조물이 파괴되거나 덮여 유물 발굴에 어려움이 있었다.
2. 2. 수메르 문명 (기원전 3천년기 ~ 기원전 2천년기)

에리두는 수메르 문명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로, 특히 기원전 3천년기와 2천년기에 걸쳐 번성하였다. 비록 초고대 왕조 III기와 아카드 제국 시대에는 잠시 점령이 중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도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 초기 왕조 시대 ===
초고대 왕조 시대에 에리두의 거주 규모는 더욱 커졌으며, 이 시기에 가로세로 100m 크기의 기념비적인 궁전이 건설되었다.[45] 에리두 북쪽으로 1km 떨어진 지점에서는 초고대 왕조 III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궁전 두 곳이 발견되었는데, 너비 2.6m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당시 표준 건축 방식이었던 청어뼈 무늬로 쌓은 평볼록 벽돌로 지어졌다.[18]
이 시기 에리두는 다른 수메르 도시들과 교류하거나 경쟁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르 제1왕조 통치자 엘룰루(기원전 2600년경)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이 에리두에서 발견되었으며,[46] 라가시 통치자 엔테메나(기원전 2400년경)의 조각상에는 그가 에리두의 주신 엔키를 위해 '아브-주파시라'라는 건물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47]
=== 우르 제3왕조 ===
에리두는 우르 제3왕조(기원전 22세기~21세기) 시대에 크게 번성했다. 특히 우르-남무 왕은 에리두에 엔키 신전을 건설했고, 그가 세운 지구라트에서 발견된 벽돌에는 "우르의 왕 우르-남무가 에리두의 엔키 신전을 건설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48] 그의 아들 아마르-신(기원전 2047–2039년경) 역시 에리두에 지구라트를 건설하려 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40] 우르 제3왕조 시대의 지구라트와 관련 건물들은 이전 시대 구조물을 파괴하고 그 잔해를 땅 고르기용 채움재로 사용하여 건설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 유물은 상대적으로 발견하기 어렵다.
이 시기 에리두는 종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우르 제3왕조의 여러 왕들은 에리두의 엔키 신전에 당시 최고 종교 직위였던 ''en(tu)''-여사제를 임명한 것을 기념하여 연도명을 정하기도 했다.
| 왕 | 연도 | 연도명 내용 | 
|---|---|---|
| 술기 | 28년 | "우르의 강한 남자이자 술기의 아들이며, 우주의 네 모퉁이의 왕인 술기를 위해 중재하는 szita-사제가 에리두의 엔키의 en-사제로 임명된 해" | 
| 아마르-신 | 8년 | "아마르-신의 사랑받는 자(Ennune-kiag-Amar-Sin)인 엔누네가 에리두의 엔키의 en-여사제로 임명된 해" | 
| 이비-신 | 11년 | "이비-신을 위해 경건하게 기도하는 szita-사제가 점을 통해 에리두의 엔키의 en-사제로 선택된 해" | 
=== 이신-라르사 및 고 바빌로니아 시대 ===
우르 제3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에리두는 이신-라르사 시대(기원전 2천년기 초) 동안 계속해서 중요한 도시로 기능했다. 라르사 통치자 누르-아다드는 "에리두의 엔키 사원이 건설된 해"를 자신의 연도명으로 삼았으며,[49] 그의 이름이 새겨진 건설용 벽돌도 에리두에서 발견되었다.[50] 이신 통치자 이쉬비-에라와 이쉬메-다간의 비문에서도 에리두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49]
고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에리두의 중요성은 이어졌다. 함무라비 왕은 자신의 33번째 연도명에서 '함무라비는 백성에게 풍요로움을 준다'는 의미의 운하('함무라비-헤갈')를 파서 니푸르, 에리두, 우르, 라르사, 우루크, 이신 등 주요 도시에 풍요로운 물을 공급했다고 기록하며 에리두를 언급했다. 이는 함무라비가 수메르와 아카드의 옛 도시들을 복원하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안정을 꾀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2. 3.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 (기원전 2천년기 ~ 기원전 6세기)
우르 제3왕조 멸망 이후, 에리두는 이신-라르사 시대 (기원전 2천년기 초) 동안에도 계속 점령되고 활발하게 유지되었다. 이는 라르사의 통치자 누르-아다드의 연도명 "에리두의 엔키 사원이 건설된 해"와, 라르사의 다른 통치자들인 이쉬비-에라와 이쉬메-다간의 비문에서 에리두에 대한 통제권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증명된다.[49] 누르-아다드의 이름이 새겨진 건설 벽돌도 에리두에서 발견되었다.[50]이러한 점령은 고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함무라비는 자신의 33번째 연도명 기록에서 에리두를 언급하며 "함무라비 왕은 운하(이름) '함무라비는 백성에게 풍요로움을 준다'를 팠고, 아누와 엔릴의 사랑을 받아, 니푸르, 에리두, 우르, 라르사, 우루크, 이신의 영원한 풍요의 물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이는 함무라비가 에리두를 포함한 수메르와 아카드의 주요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카시트 왕조의 통치자 쿠리갈주 1세 (기원전 1375년경)의 비문에서도 그의 칭호 중 하나로 "[그는 에리두의 성소를 지]키는 자"라는 구절이 발견되어, 카시트 왕조 시기에도 에리두의 종교적 중요성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51]
제2해안 왕조의 통치자 심바르-시팍 (기원전 1021–1004년경)의 비문에서는 에리두의 사제가 언급되기도 했다.[52]
신아시리아 제국 시대에는 황제 사르곤 2세 (기원전 722–705년)가 에리두에 andurāru||안두라루akk 상태를 부여했다. 이는 "원하는 바에 따라 이탈된 재산과 사람들을 원래 상태로 주기적으로 복귀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조치였다.[53]
에리두는 신바빌로니아 제국 시대까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였으며, 이후 시대에는 주로 종교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신바빌로니아의 통치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 (기원전 605–562년)는 에리두에서 건설 활동을 벌였으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들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54]
2. 4. 페르시아 제국과 그 이후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내용을 뒷받침할 정보가 없습니다.)3. 고고학
현대 이라크 남부의 '''텔 아부 샤흐레인'''(Tell Abu Shahrain) 유적은 고대 도시 에리두로 비정된다. 건설 당시에는 유프라테스강 하구 근처 페르시아만 연안에 위치했으나, 오랜 시간에 걸친 해퇴와 실트 퇴적으로 인해 현재는 해안에서 상당히 떨어진 내륙에 자리하고 있다.
에리두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1855년 존 조지 테일러가 처음 발굴을 시작하여 이곳이 에리두임을 밝히는 명문 벽돌을 발견했으며[9][10], 20세기 초 레지널드 캠벨 톰슨과 H.R. 홀 등이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73][74][75][11][12][13][14][15][16] 보다 체계적인 발굴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라크 고고 유산 관리국의 푸아드 사파르와 세톤 로이드에 의해 이루어졌다.[76][77][18][19][20][21][22]
이러한 발굴들을 통해 도시의 주신 엔키를 모신 신전 터가 여러 시대에 걸쳐 연속적으로 재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는 우바이드 문화에서 수메르 문화로 이어지는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받는다.[23] 이후에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과 조사가 이어졌으며, 2019년부터는 이탈리아, 프랑스, 이라크 공동 발굴팀이 조사를 진행 중이다.[27][28][29]
3. 1. 주요 발굴 지역

에리두 유적은 현대 이라크 남부의 '''텔 아부 샤레인'''(Tell Abu Shahrain)으로 비정된다.[73] 건설 당시에는 유프라테스강 하구 근처 페르시아만 연안에 위치했으나, 해퇴와 천 년 이상에 걸친 실트 퇴적으로 현재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유적은 유프라테스 강과 '하젬'이라는 사암 능선으로 분리된 분지 내 자연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9] 이 분지인 '아스 술라이비야트' 저지대는 우기(11월~4월) 동안 계절성 호수가 형성되며,[6] 동쪽 가장자리는 하마르 늪지와 인접한다. 기원전 3천년기에는 "에리두 평원의 운하"(Id-edin-Eriduga (NUN)ki)가 에리두와 유프라테스 강을 연결했으나, 이후 강의 경로가 변경되었다.[7]
에리두 지역에는 총 8개의 주요 언덕(텔)이 확인되었다.[8]
| 언덕 번호 | 위치 (아부 샤레인 기준) | 크기 | 높이 | 주요 특징 및 발견물 | 
|---|---|---|---|---|
| 1 (아부 샤레인) | - | 580m × 540m | 25m | 엔키 신전, 우르 제3왕조 지구라트(É-u₆-nir) 신성 구역, 초기 왕조 시대 평볼록 벽돌, 우바이드 시대 묘지 | 
| 2 | 북쪽 1km | 350m × 350m | 4.3m | 초기 왕조 시대 궁전, 평볼록 벽돌로 지어진 도시 성벽 잔해 | 
| 3 | 남남서쪽 2.2km | 300m × 150m | 2.5m | 이신-라르사 시대 토기 | 
| 4 | 남서쪽 2.5km | 600m × 300m | - | 카시트 토기 | 
| 5 | 남동쪽 1.5km | 500m × 300m | 3m | 신바빌로니아 시대 및 아케메네스 시대 유물 | 
| 6 | 남서쪽 2.5km | 300m × 200m | 2m | - | 
| 7 | 동쪽 3km | 400m × 200m | 1.5m | - | 
| 8 (우살라) | 북서쪽 8km | 평평한 지역 | - | 하지 모하메드 및 후기 우바이드 유물 | 

에리두 유적에 대한 발굴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 1855년: 바스라의 영국 부영사였던 존 조지 테일러가 처음 발굴을 시작했으며, 이곳이 에리두임을 밝히는 명문 벽돌을 발견했다.[9][10]
 - 1918년~1919년: 레지널드 캠벨 톰슨과 H. R. 홀이 주요 텔과 주변 지역을 조사했다.[11][12][13][14][15][16] 홀은 기원전 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파란색 유리 조각을 발견했는데, 이는 코발트를 사용한 것으로 이집트보다 앞선 기술을 보여준다.[17]
 - 1946년~1949년: 이라크 고고 유산 관리국의 푸아드 사파르와 세톤 로이드가 발굴을 재개했다.[76][77] 이들은 돛을 위한 소켓과 구멍이 있는 우바이드 시대 테라코타 배 모형, 경사면이 있는 림 볼, 우르 왕릉 아래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도마뱀형' 조각상 등을 발견했다. 또한 약 1000기의 무덤이 있는 우바이드 시대 후기(신전 레벨 VI-VII) 묘지를 발굴했다.[18][19][20][21][22] 이 시기 발굴을 통해 17개의 우바이드 시대 신전 층위가 확인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신전은 2m x 3m 크기의 진흙 벽돌 구조물이었다. 신전은 점차 확장되어 레벨 VI에서 최종적인 삼분식 구조(tripartite plan)를 갖추게 되었다. 우르 제3왕조 시대에는 지구라트의 기초가 되는 300m2 넓이의 플랫폼이 건설되었다.[23]
 - 1990년: 앤드루 M. T. 무어가 방문하여 이전 발굴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표면의 토기 가마 두 곳을 발견했다.[25]
 - 2014년: 프랑코 다고스티노가 발굴 재개를 준비하며 표면에서 아마르-신 왕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 조각들을 발견했다.[26]
 - 2019년~현재: 이탈리아(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 프랑스(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이라크 공동 발굴팀이 발굴을 재개했다.[27][28][29] 새로운 지형 및 사진 측량 지도 제작과 함께 우바이드 시대 주거 지역 및 묘지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다.[30]
 

에리두의 중심에는 도시신 엔키(누딤무드)를 모신 사원 𒂍𒍪𒀊|E₂.ZU.ABsux (샘물의 집, 아카드어: ''bītu apsû'')가 있었다. 후대에는 𒂍𒇉|E₂.LAGAB×HALsux (물의 집, 아카드어: ''bītu engurru'')라고도 불렸으며, 이는 엔키의 영역을 나타낸다.[34] 엔키의 배우자 닌후르상의 사원도 우바이드 시대에 근처에 있었다.[35] 우르 제3왕조 시대의 왕 우르-남무는 기존 사원 유적 위에 거대한 지구라트를 건설했다. 발굴된 명문에 따르면 우르의 엘릴루, 우르-남무, 술기, 아마르-신과 라르사의 누르-아다드 등 여러 수메르 왕들이 E-abzu 사원의 건설 또는 재건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36][37]
엔키 신전 터에서는 여러 시대에 걸쳐 18개의 건축 층위가 확인되었다.
| 단계 | 연대 (기원전) | 시대 | 크기 (m) | 비고 | 
|---|---|---|---|---|
| XVIII | 5300 | 우바이드 0 (에리두기) | 3m × 0.3m | 수면 벽 (Hut) | 
| XVII | 5300–5000 | 우바이드 1 (에리두기) | 2.8m × 2.8m | 첫 번째 켈라 (단칸방 신전) | 
| XVI | 5300–4500 | 우바이드 1 (에리두기) | 3.5m × 3.5m | |
| XV | 5000–4500 | 우바이드 2 (하지 무함마드기) | 7.3m × 8.4m | |
| XIV | 5000–4500 | 우바이드 2 (하지 무함마드기) | - | 구조물 발견되지 않음 | 
| XIII | 5000–4500 | 우바이드 2 (하지 무함마드기) | - | 구조물 발견되지 않음 | 
| XII | 5000–4500 | 우바이드 2 (하지 무함마드기) | - | 구조물 발견되지 않음 | 
| XI | 4500–4000 | 우바이드 3 | 4.5m × 12.6m | 첫 번째 플랫폼 위에 건설 | 
| X | 4500–4000 | 우바이드 3 | 5m × 13m | |
| IX | 4500–4000 | 우바이드 3 | 4m × 10m | |
| VIII | 4500–4000 | 우바이드 3 | 18m × 11m | |
| VII | 4000–3800 | 우바이드 4 | 17m × 12m | 삼분식 구조 등장 | 
| VI | 4000–3800 | 우바이드 4 | 22m × 9m | |
| V | 3800–3500 | 초기 우루크 시대 | - | 플랫폼만 남음 | 
| IV | 3800–3500 | 초기 우루크 시대 | - | 플랫폼만 남음 | 
| III | 3800–3500 | 초기 우루크 시대 | - | 플랫폼만 남음 | 
| II | 3500–3200 | 초기 우루크 시대 | - | 플랫폼만 남음 | 
| I | 3200 | 초기 우루크 시대 | - | 플랫폼만 남음 | 
에리두는 기원전 5000년경 최초의 정착지가 형성되어 기원전 2900년경에는 면적 8~10 헥타르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 그러나 기원전 2050년경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600년경에는 완전히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24] A. 레오 오펜하임 등은 이러한 쇠퇴의 원인으로 지속적인 관개 농업으로 인한 토양 염류화를 지적하기도 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에 걸친 신전의 연속적인 재건축과 풍부한 우바이드 문화 유물은 에리두가 수메르 문명의 중요한 발원지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3. 2. 발굴 성과

현대 이라크 남부의 '''텔 아부 샤흐레인'''(Tell Abu Shahrain) 유적이 에리두로 여겨진다. 에리두는 건설 당시에는 유프라테스강 하구 근처의 페르시아만 가까이에 위치했으나, 해퇴 현상과 천 년 이상에 걸친 실트 퇴적으로 인해 현재는 페르시아만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라크 바스라 근교의 텔 아부 샤흐레인 유적은 1855년 J.E. 테일러(J.E.Taylor)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고, 이후 1917년 R. 캠벨 톰슨(R. Campbell Thompson), 1919년 H.R. 홀에 의해 추가 발굴이 이루어졌다.[73][74][75] 본격적인 발굴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라크 고대 유산 총국(Iraqi Directorate General of Antiquites and Heritage) 소속의 푸아드 사파르(Fuad Safar)와 세톤 로이드에 의해 재개되었다.[76][77]
이 발굴들을 통해 도시의 수호신 엔키(누딤무드)를 모시던 신전 터가 발견되었는데, 이 신전 터는 천 년 이상 여러 시대에 걸쳐 연속적으로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이는 우바이드 문화에서 수메르 문화로 이어지는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는다.
한편, 2006년 3월 조반니 페티나토와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의 S. 키오드는 에리두 표면에서 초기 왕조 시대의 역사 및 문학 쐐기 문자 점토판 500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점토판들은 기원전 2600년에서 2100년 사이(에안나툼에서 아마르-신 통치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도서관의 일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라크 고대 유물 및 문화유산 위원회가 현장 조사를 벌였으나 해당 점토판은 발견되지 않았고, 주변 지역에서 가져온 각인된 벽돌만 확인되었다. 실제로는 발굴 허가조차 발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31][32] 페티나토는 이후 실제로는 70개의 비문이 새겨진 벽돌을 발견했다고 말을 바꾸었는데, 이 벽돌들은 레오나드 울리의 우르 원정대 주택을 철거한 뒤 그 자재를 사용하여 현대 에리두 발굴 조사 현장을 건설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미래의 고고학자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1981년 이라크 발굴 보고서에 명시되어 있었다.[33] 문제의 벽돌 대부분은 1962년 복원 작업을 위해 우르로 반환되었다.[8]
4. 주요 도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인류 초기 문명이 발생한 곳으로, 여러 중요한 고대 도시들이 번성했다. 에리두는 이 지역, 특히 수메르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78]
수메르 문명은 에리두 외에도 우르, 우루크, 니푸르, 라가시, 기르수, 키시 등 여러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발전했다.[78] 이들 도시는 각각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반을 이루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수메르 도시들 외에도 다양한 문명의 도시들이 존재했다. 동쪽의 엘람 문명은 수사와 안샨 같은 도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북쪽으로는 아카드 제국의 아카드와 마리, 이후 아시리아의 아수르, 니네베, 님루드, 두르샤루킨 등이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또한 아모리인들은 이신과 라르사 같은 도시를 세웠으며, 바빌로니아는 바빌론을 중심으로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 고대 도시들은 서로 교류하고 경쟁하며 메소포타미아의 풍부하고 복잡한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4. 1. 에리두
에리두는 유프라테스강과 '하젬'이라는 사암 능선으로 분리된, 약 24km 길이, 6m 깊이의 분지에 있는 자연 언덕에 위치해 있다.[9] 이 분지인 '아스 술라이비야트' 저지대(구: '코르 엔-네제이프')는 11월부터 4월까지의 우기 동안 계절성 호수(아랍어: 세브카)가 된다.[6] 이 기간 동안 와디 카네가에서 물이 흘러들어온다. 계절성 호수의 동쪽 가장자리에는 하마르 늪지가 인접해 있다.
기원전 3천 년기에는 운하, Id-edin-Eriduga (NUN)ki "에리두 평원의 운하"가 에리두를 유프라테스 강과 연결했는데, 이후 유프라테스 강은 경로를 변경했다. 운하의 경로는 기원전 2천 년기 표면 토기 및 이후의 매장지가 있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으로 표시되어 있다.[7]
이 지역에는 8개의 언덕(텔)이 있다:[8]
| 언덕 번호 | 이름 | 크기 | 높이 | 주요 특징 | 
|---|---|---|---|---|
| 1 | 아부 샤레인 | 580m x 540m | 25m | 엔키 신전, 우르 제3왕조 지구라트(É-u₆-nir) 신성 구역, 초기 왕조 시대 평볼록 벽돌 발견, 우바이드 시대 묘지 | 
| 2 | - | 350m x 350m | 4.3m | 아부 샤레인 북쪽 1km, 초기 왕조 시대 궁전, 평볼록 벽돌 도시 성벽 잔해 | 
| 3 | - | 300m × 150m | 2.5m | 아부 샤레인 남남서쪽 2.2km, 이신-라르사 토기 발견 | 
| 4 | - | 600m × 300m | - | 아부 샤레인 남서쪽 2.5km, 카시트 토기 발견 | 
| 5 | - | 500m × 300m | 3m | 아부 샤레인 남동쪽 1.5km, 신바빌로니아 시대 및 아케메네스 시대 | 
| 6 | - | 300m × 200m | 2m | 아부 샤레인 남서쪽 2.5km | 
| 7 | - | 400m × 200m | 1.5m | 아부 샤레인 동쪽 3km | 
| 8 | 우살라 | 평평한 지역 | - | 아부 샤레인 북서쪽 8km, 하지 모하메드와 이후 우바이드 | 
이 지역은 1855년 바스라의 영국 부영사였던 존 조지 테일러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9] 발견물 중에는 이 지역이 에리두임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명문 벽돌이 있었다.[10] 주요 텔에 대한 발굴은 1918년 4월 10일부터 5월 8일까지 R. 캠벨 톰슨에 의해, 1919년 4월 21일부터 5월 8일까지 H. R. 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홀은 텔 주변 지역에 대한 조사도 실시했다.[11][12][13][14][15][16] 홀의 흥미로운 발견 중 하나는 기원전 2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제조된 파란색 유리 조각이었다. 이 파란색은 이 기술이 이집트에서 등장하기 오래 전에 코발트를 사용하여 만들어졌다.[17]
이후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라크 고고 유산 관리국의 푸아드 사파르와 세톤 로이드의 지휘 하에 발굴이 재개되었다. 발견물 중에는 돛을 위한 중앙의 소켓과 돛대 및 방향타를 위한 구멍이 있는 우바이드 시대의 테라코타 보트 모델, 경사면이 있는 림 볼, 그리고 우르 왕립 묘지 아래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도마뱀형" 조각상이 있었다. 묘지에서 발굴한 결과, 약 1000개의 무덤이 있었으며, 모두 우바이드 시대 말(신전 레벨 VI 및 VII)의 것이었다.[18][19][20][21][22] 그들은 17개의 우바이드 시대 신전과 동남쪽을 향한 진흙 벽돌 상자 1000개의 무덤이 있는 우바이드 시대 묘지를 발견했다. 신전은 2m x 3m 크기의 진흙 벽돌 사각형으로 시작하여 틈새가 있었다. 레벨 XI에서 재건되었고 결국 레벨 VI에서 최종 삼부 형식에 도달했다. 우르 제3왕조 시대에는 지구라트의 기초로 300m2의 플랫폼이 건설되었다.[23] 이러한 고고학적 조사는 A. 레오 오펜하임에 따르면 "결국 남쪽 전체가 정체에 빠졌고 정치적 주도권을 북부 도시의 통치자들에게 넘겨주었다"고 밝혔는데, 이는 지속적인 관개로 인한 염분 증가의 결과일 것이며, 이 도시는 기원전 600년에 버려졌다.[24] 1990년, 이 지역을 방문한 A. M. T. 무어는 이전 발굴자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표면 토기 가마 두 곳을 발견했다.[25]
2014년 10월, 프랑코 다고스티노는 곧 재개될 발굴을 준비하기 위해 이 지역을 방문하여 표면에서 여러 개의 명문 아마르-신 벽돌 조각을 발견했다.[26] 2019년, 에리두에서 발굴이 이탈리아, 프랑스, 이라크 공동 노력으로 재개되었는데, 이 노력에는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와 스트라스부르 대학교가 참여했다.[27][28][29] 작업에는 새로운 상세한 지형 및 사진 측량 지도 제작이 포함되었으며 주로 우바이드 시대 묘지와 관련된 우바이드 주거 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30]
에리두의 도시 중심부는 엔키의 사원이었으며, 이는 샘물의 집(House of the Aquifer, 𒂍𒍪𒀊sux, E₂.ZU.AB; 수메르어: e₂-abzu; 아카드어: bītu apsû)이라고 불렸다. 이는 후대에는 물의 집(House of the Waters, 𒂍𒇉sux, E₂.LAGAB×HAL; 수메르어: e₂-engur; 아카드어: ''bītu engurru'')라고 불렸다. 이 이름은 엔키의 영역을 지칭한다.[34] 그의 배우자 닌후르상은 우바이드 시대에 근처에 사원을 가지고 있었다.[35]
우르 제3왕조 시대 동안 우르-남무는 이전 사원들의 잔해 위에 지구라트를 건설했다.
아라타 서사시에 언급된 우루크의 엔메르카르 외에도, 여기에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몇몇 후기 역사적 수메르 왕들이 ''e-abzu'' 사원에서 일하거나 재건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우르의 엘릴루, 우르-남무, 술기, 아마르-신과 라르사의 누르-아다드가 포함된다.[36][37]
| 단계 | 시대 (기원전) | 시대 | 크기 (m) | 비고 | 
|---|---|---|---|---|
| XVIII | 5300 | - | 3×0.3 | 수면 벽 | 
| XVII | 5300–5000 | - | 2.8×2.8 | 첫 번째 켈라 | 
| XVI | 5300–4500 | 초기 우바이드 | 3.5×3.5 | |
| XV | 5000–4500 | 초기 우바이드 | 7.3×8.4 | |
| XIV | 5000–4500 | 초기 우바이드 | - | 구조물 발견되지 않음 | 
| XIII | 5000–4500 | 초기 우바이드 | - | 구조물 발견되지 않음 | 
| XII | 5000–4500 | 초기 우바이드 | - | 구조물 발견되지 않음 | 
| XI | 4500–4000 | 우바이드 | 4.5×12.6 | 첫 번째 플랫폼 | 
| X | 4500–4000 | 우바이드 | 5×13 | |
| IX | 4500–4000 | 우바이드 | 4×10 | |
| VIII | 4500–4000 | 우바이드 | 18×11 | |
| VII | 4000–3800 | 우바이드 | 17×12 | |
| VI | 4000–3800 | 우바이드 | 22×9 | |
| V | 3800–3500 | 초기 우루크 | - | 플랫폼만 남음 | 
| IV | 3800–3500 | 초기 우루크 | - | 플랫폼만 남음 | 
| III | 3800–3500 | 초기 우루크 | - | 플랫폼만 남음 | 
| II | 3500–3200 | 초기 우루크 | - | 플랫폼만 남음 | 
| I | 3200 | 초기 우루크 | - | 플랫폼만 남음 | 
에리두는 이 지역에서 가장 초기의 정착지 중 하나로, 기원전 5400년경 이른 우바이드 시대에 유프라테스 강 어귀 근처 페르시아만과 가까운 곳에 세워졌지만, 현대에는 내륙으로 약 약 144.84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발굴을 통해 이 도시는 이전에 사람이 살지 않았던 깨끗한 모래 언덕 부지에 세워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발굴자들에 따르면, 우르 제3왕조 지구라트와 관련 건물 건설은 이전 구조물의 파괴와 그것을 땅을 고르는 채움재로 사용하는 것을 선행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에리두에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작은 언덕에서 초고대 왕조 III기 궁전 두 곳이 발견되었으며, 그 주변에 울타리 벽이 있었다. 이 궁전들은 너비 45m, 길이 65m였으며, 너비 2.6m의 벽이 있었고, 청어뼈 방식으로 배치된 평볼록 벽돌의 표준 초고대 왕조 시대 건축 방식으로 건설되었다.[18]
초고대 왕조 III기와 아카드 제국 시대에 점령 중단 가능성이 있었지만, 이 도시는 신바빌로니아 제국까지 계속 거주되었으며, 이후 시대에는 주로 종교적인 장소였다.
우바이드 시대 동안, 이 장소는 약 12ha(약 30에이커)의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원시 설형 문자의 전신인 12개의 신석기 시대 점토 토큰이 이 장소의 우바이드 시대 층에서 발견되었다.[38][39] 이 장소에서 18개의 겹쳐진 진흙 벽돌 사원이 아마르-신의 미완성된 지구라트 (기원전 2047–2039년경) 아래에 있었다. 층 XIX부터 VI까지는 우바이드 시대의 것이었고, 층 V부터 I까지는 우루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40] 우루크 시대의 상당한 거주지가 발견되었으며, 탐사에서 "비종교적" 건물이 발견되었다. 우루크 시대의 유물에는 구리로 덮인 장식용 테라코타 원뿔, 금으로 덮인 구리 못, 현무암 석사자상 한 쌍, 원뿔과 석고로 덮인 지름이 수 미터에 달하는 기둥, 광범위한 우루크 시대 도자기 등이 포함되었다.[41][42][43][44] 초고대 왕조 시대에 거주가 증가하면서 100m x 100m 규모의 기념비적인 궁전이 건설되었다.[45] 우르 제1왕조의 통치자 엘룰루 (기원전 2600년경)의 비문이 에리두에서 발견되었다.[46] 라가쉬의 초고대 왕조 통치자 엔테메나 (기원전 2400년경)의 조각상에는 "그는 에리두의 왕 엔키를 위해 아브-주파시라를 건설했다..."라고 적혀 있다.[47]
에리두는 우르 제3왕조 (기원전 22세기~21세기)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왕실 건축 활동은 특히 "우르, 우르의 왕, 에리두에서 신 엔키의 사원을 건설한 자"라고 새겨진 우르-남무의 지구라트에서 발견된 비문이 새겨진 벽돌에서 알려져 있다.[48] 세 명의 제3왕조 통치자는 에리두의 엔키 사원의 ''en(tu)''-여사제(고위 여사제) 임명을 기반으로 연도명을 지정했는데, 이는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직위였다. 처음 두 경우 모두 다음 연도명으로도 사용되었다.
- 술기 28년 - "우르의 강한 남자이자 술기의 아들이며, 우주의 네 모퉁이의 왕인 술기를 위해 중재하는 szita-사제가 에리두의 엔키의 en-사제로 임명된 해"
 - 아마르-신 8년 - "아마르-신의 사랑받는 자(Ennune-kiag-Amar-Sin)인 엔누네가 에리두의 엔키의 en-여사제로 임명된 해"
 - 이비-신 11년 - "이비-신을 위해 경건하게 기도하는 szita-사제가 점을 통해 에리두의 엔키의 en-사제로 선택된 해"
 
우르 3왕조 멸망 이후, 이 장소는 이신-라르사 시대 (기원전 2천년기 초) 동안 점령되고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이는 라르사의 통치자 누르-아다드의 연도명 "에리두의 엔키 사원이 건설된 해"와 라르사 통치자 이쉬비-에라와 이쉬메-다간의 비문에서 에리두에 대한 통제권을 보여주는 것으로 증명된다.[49] 누르-아다드의 비문이 새겨진 건설 벽돌도 에리두에서 발견되었다.[50] 이는 고(古) 바빌로니아 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함무라비는 자신의 33번째 연도명에서 "함무라비 왕은 운하(이름) '함무라비는 백성에게 풍요로움을 준다'를 팠고, 아누와 엔릴의 사랑을 받아, 니푸르, 에리두, 우르, 라르사, 우루크, 이신의 영원한 풍요의 물을 세웠고, 흩어졌던 수메르와 아카드를 복원했으며, 마리와 말기움의 군대를 전투에서 무너뜨리고 마리와 그 영토 및 수바르투의 여러 도시들이 그의 권위 아래 우호적으로 거주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카시트 왕조의 통치자 쿠리갈주 1세 (기원전 1375년경)의 비문에서 그의 묘비명 중 하나는 "[그는 에리두의 성소를 지]키는 자"이다.[51]
제2해안 왕조 통치자 심바르-시팍 (기원전 1021–1004년경)의 비문은 에리두의 사제를 언급한다.[52]
신아시리아 제국의 황제 사르곤 2세 (기원전 722–705년)는 에리두에 ''안두라루'' 상태( "원하는 바에 따라 이탈된 재산과 사람들을 원래 상태로 주기적으로 복귀시키는 것"으로 묘사됨)를 부여했다.[53]
신바빌로니아 통치자 네부카드네자르 2세 (기원전 605–562년)는 에리두에서 건설했는데, 이는 그곳에서 발견된 비문이 새겨진 벽돌에서 증명된다.[54]
일부, 그러나 모든 버전의 수메르 왕 목록에서 에리두는 대홍수가 땅을 덮기 전에 왕권이 수여된 다섯 도시 중 첫 번째 도시이다. 이 목록은 초기 왕조 시대의 에리두의 두 통치자, 알룰림과 알랄응가르를 언급한다.[55][56]
''[nam]-lugal 안-ta èd-dè-a-ba''
''[eri]duki nam-lugal-la''
''eridugki a₂-lu-lim lugal''
''mu 28800 i₃-ak''
''a₂-lal₃-ĝar mu 36000 i₃-ak''
하늘에서 왕권이 내려왔을 때,
왕권은 에리두에 있었다
에리두그에서 알룰림이 왕이 되었고,
그는 통치했다
28800년 동안.
알랄자르는 36000년 동안 통치했다[57]
밝은 별 카노푸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알려졌으며, 바빌론 별 목록의 "별 셋"에서 에리두를 나타냈고, 기원전 1100년경 MUL.APIN 서판에도 나타났다.[58] 카노푸스는 바빌로니아인들에게 MUL.NUNKI라고 불렸으며, 이는 "에리두 도시의 별"로 번역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 에리두에서는 남쪽으로 좋은 전망을 볼 수 있었고, 약 6000년 전 지구 자전축의 세차 운동으로 인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카노푸스 별의 첫 번째 출현은 자정 남쪽 자오선에서만 관찰할 수 있었다. 우르에서는 불과 60년 후에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59]
우르에서 발견된 홍수 신화 서판[60]에는 에리두와 알룰림이 신들에 의해 첫 번째 도시와 첫 번째 사제-왕으로 선택된 방법이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61] 다음은 서판의 번역이다:[62]
(앞면)
1 그들 (최고 신)은 인류를 창조했다
2 [동물/해충?]이 땅 아래/땅에서 일제히 번식한 후
3 그들은 초원(에덴나)에 맞는 가축과 사족 보행 동물을 만들었다
4 높은 초원에서 ... 기쁜 식물이 널리 퍼지다
5 그 당시에는 운하가 파지지 않았다 ...
6 제방과 도랑이 [준설되지 않았다(?)...]
7 황소 ... 쟁기/농부/고랑(?) ...
8 땅 ... 하나의 궤도 ...
9 인류 ... 그들의 눈/얼굴 ... [비?]
10 샥칸/수무간은 사막으로 나가지 않았다(?) ...
11 모자/머리 수건(?)을 짜는 것 ...
12 인류 ...
13 그 당시에는 뱀이 없었고, [전갈도 없었다 ...]
14 사자가 없었고, [하이에나도 없었다 ...]
15 개와 늑대가 없었다 ...
16 인류 [적을 가지지 않았다 ...]
17 공포와 [소름(?)이 없었다 ...]
18 ...
19 왕 ...
20 ...
(뒷면)
1 첫 번째 ... [에리두 또는 쿠아라?]를 아살루히에게 주었다.
2 두 번째 ... [바드-티비라를 누기그 조산사에게?] 주었다,
3 세 번째 ... [라라크[를 파빌사그에게 주었다,
4 네 번째 ... [시파르를 우투에게?] 주었다.
5 다섯 번째 ... 수[루파크?]를 [수드?]에게 주었다.
6 그 도시들.. 그들의 정착지...
7 안, 엔릴, [엔키?] 및 닌후르사그
8 그 도시들 중 에리두는... 그들은 맨 앞에/지도자로서(?) 세웠다.
9 그들은 광대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 누워있는(?) 사람을 이끌었다(?) ...
10 안, 엔릴, 그리고 엔키, 신들의 아버지(?)
11 그들은 많은 사람 전체의 목양으로 알룰림/ "붉은 사슴의 씨앗"을 선택했다
12 그들은 그에게(!) 알룰림/ "붉은 사슴의 씨앗"을 이름을 지었다...
13 그들은 영원히(?) 그렇게 확인하라는 명령에 따라 섬긴 후
14 [그래서?] 인류, 이름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발을 잡고(굴복하며)/그의 길을 따랐다(?)
15 그들은 (수도) 범죄와 죄(?)를 그의 손에 넣었다
16 그에게... 주었다
17 ...
18 ...

에리두의 사람인 아다파는 초기 문화 영웅으로 묘사된다. 초기 전통인 메-투란/텔-하다드 서판은 아다파를 홍수 이후 에리두의 통치자로 묘사하지만,[63] 후기 전통에서 아다파는 알룰림의 재상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는 알룰림 왕의 현자로서 도시에 문명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졌다.[64][65]

수메르 신화에서 에리두는 깊은 물, 지혜, 마법의 신인 아카드 신 에아의 수메르 대응물인 신 엔키의 압주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모든 수메르와 바빌론 신들과 마찬가지로 엔키/에아는 지역 신으로 시작하여, 후기 우주론에 따르면 안과 엔릴과 함께 우주의 지배를
4. 2. 바빌론
데이비드 롤 등 일부 학자들은 우르 남쪽에 위치한 에리두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빌론 및 바벨탑의 원형이라고 추정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에리두의 지구라트 유적이 다른 도시의 것보다 훨씬 크고 오래되었으며, 성서에 묘사된 미완성 바벨탑과 유사하다는 점.
 - 에리두의 이름을 나타내는 원통형 인장의 표어 문자 중 하나인 수메르어 "눈·키"(NUN.KI, "강력한 장소"라는 의미)가 후대에 바빌론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
 - 후대의 베로소스가 기록한 그리스어 왕명표의 오래된 판본에는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도시의 이름으로 "에리두" 대신 "바빌론"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
 - 데이비드 롤 등은 성서의 니므롯이 왕명표나 전설에 등장하는 엔메르카르(Enmerkar, 'kar'는 "사냥꾼"을 의미)와 동일 인물이며, 그가 에레크 (우루크)와 바빌론을 건설하고 수도 에레크 및 에리두에 사원을 세웠다고 본다는 점.
 
5. 신화 및 종교
에리두는 수메르 신화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이다. 특히 물과 지혜의 신 엔키(아카드의 에아)의 주요 숭배 중심지였으며, 그의 주 신전인 압주가 이곳에 있었다.[66] 수메르 왕 목록과 여러 신화 기록에 따르면, 에리두는 하늘에서 왕권이 내려온 최초의 도시이자[55][56][57] 대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다섯 도시 중 첫 번째 도시로 여겨진다.[55][56] 이러한 신화들은 에리두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문명의 시작점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도시의 문화 영웅 아다파 이야기,[63][64][65] 우루크의 여신 이난나와의 '메'를 둘러싼 일화,[67][68] 도시의 파괴를 애도하는 에리두에 대한 애가 등 다양한 신화가 전해진다.[69][70] 또한, 에리두는 별 카노푸스와 연관되기도 했으며,[58] 일부에서는 구약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의 기원이 되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5. 1. 주요 신
수메르 신화에 따르면, 에리두는 물, 지혜, 마법의 신 엔키(아카드 신화의 신 에아에 해당)가 세운 도시로 알려져 있다.[66] 엔키의 주된 신전인 압주가 에리두에 있었으며,[66] 이 신전은 '에압수'(깊은 물의 집) 또는 '에엔구라'(지하수의 집)라고도 불렸다. 엔키의 배우자 신으로는 닌키, 닌후르사그, 담갈눈나, 우리아슈, 담키나 등이 언급되며, 담갈눈나의 사원 '에사길라'(성스러운 귀부인의 집)는 엔키의 신전 가까이에 위치했다.초기 수메르 우주론에서 엔키는 하늘의 신 안과 대기의 신 엔릴과 함께 우주를 다스리는 주요 신 중 하나였으며, 그의 영역은 땅 아래의 단물 세계였다.[66] 우르에서 발견된 홍수 신화 서판에는 안, 엔릴, 엔키, 닌후르사그 등 최고 신들이 에리두를 첫 번째 도시로 지정하고 인간 통치자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61][62] 수메르 왕 목록 역시 하늘에서 왕권이 내려왔을 때, 가장 먼저 왕권이 자리 잡은 곳이 에리두라고 명시한다.[55][56][57]
: 하늘에서 왕권이 내려왔을 때,
: 왕권은 에리두에 있었다
: 에리두그에서 알룰림이 왕이 되었고,
: 그는 통치했다
: 28800년 동안.
: 알랄자르는 36000년 동안 통치했다[57]

우루크의 여신 이난나가 문명의 선물(메)을 얻기 위해 에리두의 엔키에게 방문했다는 신화도 전해진다. 엔키는 처음에 자신의 권능을 되찾으려 했으나, 결국 우루크가 새로운 중심지임을 인정하게 된다.[67][68] 또한, 시파르의 주신인 태양신 우투 역시 신화 기록에서 언급된다.[62]
이신-라르사 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에리두에 대한 애가는 도시의 파괴를 신들의 노여움과 연결 짓는다. 이 애가에서는 도시가 파괴되자 아버지 엔키와 그의 배우자이자 에-마흐의 어머니인 거룩한 담갈누나가 도시를 떠나는 모습이 묘사된다.[69][70]
: 그의 왕은 이방 도시인 것처럼 그의 도시 밖에 머물렀다. 그는 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엔키는 이방 도시인 것처럼 그의 도시 밖에 머물렀다. 그는 쓴 눈물을 흘렸다. 해를 입은 도시를 위해 그는 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부인은 날아가는 새처럼 그녀의 도시를 떠났다. 에-마흐의 어머니, 거룩한 담갈누나는 그녀의 도시를 떠났다. 가장 거룩한 신성한 권능의 도시의 신성한 권능이 뒤집혔다. 가장 위대한 신성한 권능의 의식의 신성한 권능이 바뀌었다. 에리두그에서 모든 것이 폐허로 변했고 혼란스러워졌다.[71]
5. 2. 주요 신화
수메르 왕 목록의 일부 판본에 따르면, 대홍수가 땅을 덮기 전에 왕권이 하늘에서 내려온 다섯 도시 중 첫 번째 도시가 바로 에리두였다. 이 목록은 초기 왕조 시대 에리두의 두 통치자로 알룰림과 알랄응가르를 언급한다.[55][56] 수메르 왕 목록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nam]-lugal 안-ta èd-dè-a-ba''
> ''[eri]duki nam-lugal-la''
> ''eridugki a₂-lu-lim lugal''
> ''mu 28800 i₃-ak''
> ''a₂-lal₃-ĝar mu 36000 i₃-ak''
>
> 하늘에서 왕권이 내려왔을 때,
> 왕권은 에리두에 있었다
> 에리두그에서 알룰림이 왕이 되었고,
> 그는 28,800년 동안 통치했다.
> 알랄자르는 36,000년 동안 통치했다[57]
우르에서 발견된 홍수 신화 서판[60]에는 신들이 어떻게 에리두를 첫 번째 도시로, 알룰림을 첫 번째 사제-왕으로 선택했는지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61] 다음은 서판 내용의 일부이다.[62]
> (앞면)
> 1 그들 (최고 신)은 인류를 창조했다
> 2 [동물/해충?]이 땅 아래/땅에서 일제히 번식한 후
> 3 그들은 초원(에덴나)에 맞는 가축과 사족 보행 동물을 만들었다
> (...)
> 13 그 당시에는 뱀이 없었고, [전갈도 없었다 ...]
> 14 사자가 없었고, [하이에나도 없었다 ...]
> 15 개와 늑대가 없었다 ...
> 16 인류 [적을 가지지 않았다 ...]
> 17 공포와 [소름(?)이 없었다 ...]
> (...)
>
> (뒷면)
> 1 첫 번째 ... [에리두 또는 쿠아라?]를 아살루히에게 주었다.
> 2 두 번째 ... 바드-티비라를 누기그 조산사에게?] 주었다,
> 3 세 번째 ... [라라크[를 파빌사그에게 주었다,
> 4 네 번째 ... [시파르를 우투에게?] 주었다.
> 5 다섯 번째 ... 수[루파크?]를 [수드?]에게 주었다.
> 6 그 도시들.. 그들의 정착지...
> 7 안, 엔릴, [엔키?] 및 닌후르사그
> 8 그 도시들 중 에리두는... 그들은 맨 앞에/지도자로서(?) 세웠다.
> 9 그들은 광대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 누워있는(?) 사람을 이끌었다(?) ...
> 10 안, 엔릴, 그리고 엔키, 신들의 아버지(?)
> 11 그들은 많은 사람 전체의 목양으로 알룰림/ "붉은 사슴의 씨앗"을 선택했다
> 12 그들은 그에게(!) 알룰림/ "붉은 사슴의 씨앗"을 이름을 지었다...
> (...)
에리두 출신의 아다파는 초기 문화 영웅으로 묘사된다. 초기 전통인 메-투란/텔-하다드 서판은 아다파를 홍수 이후 에리두의 통치자로 기록하지만,[63] 후기 전통에서는 알룰림 왕의 현명한 재상으로서 도시에 문명을 가져온 인물로 여겨졌다.[64][65] 아다파는 딜문(바레인 근처로 추정)에서 문명을 가져왔다고도 전해지며, 오안네스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에리두에서는 그를 "아브갈루"(Abgallu|아브갈루sux: Ab는 "물", gal은 "위대한", Lu는 "사람"을 의미)라고 불렀다.
수메르 신화에서 에리두는 신 엔키의 압주 신전이 있는 곳이었다. 엔키는 아카드 제국의 신 에아에 해당하는 수메르 신으로, 심연의 물, 지혜, 마법을 관장했다. 다른 수메르와 바빌론의 신들처럼 엔키 역시 지역 신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안, 엔릴과 함께 우주를 다스리는 주요 신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영역은 땅 아래의 단물 세계(수메르어 ''ab''=물; ''zu''=멀리)였다.[66] 엔키의 사원은 '압수'(Abzu|압수sux, 깊은 물의 집) 또는 '에엔구라'(E-engur-ra|에엔구라sux, 지하수의 집)라고 불렸으며, 그의 배우자 신(닌키, 닌후르사그, 담키나 등)의 사원 '에사길라'(Esagila|에사길라sux, 숭고한 머리의 집)도 근처에 있었다.
우루크의 여신 이난나가 문명의 선물(메, Me)을 얻기 위해 에리두로 가서 엔키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신화에 따르면, 엔키는 처음에는 자신의 권능(메)을 되찾으려 했으나, 결국 우루크가 새로운 중심지임을 인정하고 이난나가 '메'를 가져가는 것을 허락했다.[67][68]
초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도시나 제국의 멸망을 신들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신-라르사 시대에는 도시 애가라는 문학 장르가 발달했는데, 우르에 대한 애가가 가장 유명하다. 에리두 역시 멸망 후 애가의 대상이 되었으며, 에리두에 대한 애가의 일부가 발견되었다.[69][70]
> "그의 왕은 이방 도시인 것처럼 그의 도시 밖에 머물렀다. 그는 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엔키는 이방 도시인 것처럼 그의 도시 밖에 머물렀다. 그는 쓴 눈물을 흘렸다. 해를 입은 도시를 위해 그는 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부인은 날아가는 새처럼 그녀의 도시를 떠났다. 에-마흐의 어머니, 거룩한 담갈누나는 그녀의 도시를 떠났다. 가장 거룩한 신성한 권능의 도시의 신성한 권능이 뒤집혔다. 가장 위대한 신성한 권능의 의식의 신성한 권능이 바뀌었다. 에리두그에서 모든 것이 폐허로 변했고 혼란스러워졌다."[71]
밝은 별 카노푸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며, 기원전 1100년경 MUL.APIN 서판과 바빌론 별 목록의 "별 셋" 목록에서 에리두를 상징하는 별로 나타났다.[58] 바빌로니아인들은 카노푸스를 MUL.NUNKI라고 불렀는데, 이는 "에리두 도시의 별"이라는 뜻이다. 메소포타미아 남쪽 끝에 위치한 에리두에서는 남쪽 하늘을 잘 볼 수 있었으며, 약 6000년 전 지축의 세차 운동으로 인해 카노푸스가 처음 나타나는 것을 자정 무렵 남쪽 자오선에서 관측할 수 있었다. 이는 우르보다 약 60년 앞선 현상이었다.[59]
일부 학자들, 특히 데이비드 롤과 관련된 이들은 에리두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에리두의 거대한 지구라트 유적이 성서 속 미완성 바벨탑 묘사와 유사하다는 점, 에리두를 나타내는 표어 문자 '눈·키'(NUN.KI|눈키sux, "강력한 장소")가 후대에 바빌론을 지칭하게 되었다는 점, 베로소스의 기록 중 일부 판본에서 최초의 도시로 에리두 대신 바빌론이 언급된다는 점, 그리고 성서의 니므롯과 동일시되는 엔메르카르가 에리두와 우루크(에레크)에 사원을 건설했다는 전승 등을 든다.
6.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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