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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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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정복은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 시작되어, 브리타니아는 로마와 외교 및 무역 관계를 맺었다.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 브리타니아는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였지만,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침공이 실패했다.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고,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의 지휘 하에 메드웨이 전투와 템스강 전투를 거쳐 브리타니아 남동부를 점령했다. 이후 로마군은 영토를 확장하며 베스파시아누스, 아그리콜라 등의 지휘 아래 웨일스와 북부 지역을 정복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에 방어 가능한 국경선인 타인 강-솔웨이 만 지역으로 후퇴하여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국경을 북쪽으로 확장하여 안토니누스 방벽을 건설했지만, 결국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돌아갔다. 3세기 이후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쇠퇴했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원정 이후에도 브리타니아는 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4세기에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브리타니아 역시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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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정복 - [전쟁]에 관한 문서
로마 제국의 브리타니아 정복
로마 제국의 브리튼섬 정복 전개도. 각 화살표의 색상은 해당 시기에 제위한 로마 황제이다.
로마 제국의 브리튼섬 정복 전개도. 각 화살표의 색상은 해당 시기에 제위한 로마 황제이다.
날짜서기 43년~84년
장소브리타니아 (잉글랜드웨일스)
칼레도니아 (스코틀랜드)
결과로마군의 승리, 브리튼섬 남부 정복
교전국 1로마 제국
교전국 2켈트인
지휘관 1클라우디아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베스파시아누스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지휘관 2토고둠누스
카라타쿠스
부디카
칼가쿠스
사상자 1부디카 측 피해: 30,000명~40,000명 사망 (병사 7,000명 사망)
사상자 2100,000명~250,000명 사망

2. 배경

로마의 침공 이전 남부 브리타니아 부족들


브리타니아로마 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원전 55년과 54년 원정 이후 한 세기 동안 로마와 외교 및 무역 관계를 맺어왔다. 로마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은 브리타니아 후기 철기 시대, 특히 남부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16]

기원전 55년과 서기 40년대 사이에는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침공으로 시작된 조공, 인질, 그리고 직접적인 군사 점령 없는 속국이라는 상태가 대체로 유지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4년, 기원전 27년, 기원전 25년에 침공을 준비했으나,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과 브리튼족과의 타협 등으로 인해 취소되었다.[16] 아우구스투스의 ''업적 기록''에 따르면, 두 명의 브리튼 왕, 두브노벨라우누스와 틴코마루스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숭배자로 로마로 도망쳤고,[17] 이 시기에 쓰여진 스트라보의 ''지리誌''는 브리타니아가 섬을 정복했을 때 세금으로 거둘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관세와 의무를 지불했다고 전한다.[18]

서기 40년대에 브리타니아의 정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카투벨라우니족은 남동부 브리타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트리노반테스족을 대체했으며, 이전 트리노반테스족의 수도인 카물로두눔 (콜체스터)을 점령했다. 아트레바테스족은 로마와 우호적인 무역 및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베리카는 로마에 의해 그들의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카라타쿠스의 카투벨라우니족은 서기 40년 이후 어느 시점에 이 왕국 전체를 정복했고, 베리카는 브리타니아에서 추방되었다.[19][20]

칼리굴라는 서기 40년에 브리튼족을 상대로 원정을 계획했을 수 있지만, 그 실행은 불분명했다. 수에토니우스의 ''열두 명의 카이사르''에 따르면, 그는 병사들을 영국 해협을 향해 전투 대형으로 배치한 후, 병력들이 혼란스러워지자 조개 껍데기를 모으라고 명령했고, 이를 "카피톨과 궁전에 대한 바다의 전리품"이라고 언급했다.[21] 칼리굴라의 이러한 행동은 실제로는 "오두막"을 모으라는 명령이었을 수도 있는데, 'musculi'는 병사들의 속어로 엔지니어의 오두막을 뜻하기도 했고, 칼리굴라 자신도 제국의 병사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 칼리굴라의 원정 계획은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3년 후 클라우디우스의 침공을 가능하게 할 병력과 시설을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칼리굴라는 보노니아(현대 불로뉴쉬르메르)에 등대 ''투르 도르드르''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곧 두브리스 (도버)에 건설된 등대의 모델이 되었다.

2. 1.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 (기원전 55년~54년)

브리튼섬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55년~54년 브리튼 원정으로 로마인과 처음 충돌하였다. 이후 브리튼섬은 로마 제국의 다른 변방 지역처럼 로마와 외교 관계를 맺고 무역을 하였다. 이 시기 브리튼섬은 후기 철기 시대를 겪고 있었는데, 로마 제국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은 특히 남부 지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카이사르의 브리튼 침공으로 브리튼섬의 여러 부족 왕국들은 로마에 공물과 인질을 바치되, 직접 군사 통치는 받지 않는 예속국이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기원후 40년대까지 대체로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4년, 기원전 27년, 기원전 25년에 각각 브리튼섬 침공을 준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세 차례의 시도 중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제국 내 다른 반란 사건 때문에 취소되었고, 두 번째 시도는 브리튼인들이 타협에 나서면서 중단되었다.[75]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업적록》에서, 두브노벨라우누스와 틴코마루스라는 브리튼의 두 왕이 자신을 달래기 위해 직접 로마로 찾아왔다고 기록하였다.[76] 스트라본의 《지리지》에서는 브리튼 사람들이 로마에 바친 세금과 노역이 로마가 섬을 정복하고 거둘 수 있는 세금보다 더 많다고 설명하였다.[77]

이 시기 브리튼섬 내의 정치 구도는 혼란스러웠다. 브리튼섬 남동부의 최대 세력이던 트리노반트족의 수도 카물로두눔(오늘날의 콜체스터)을 카투벨라우니족이 점령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아트레바트족은 실체스터를 수도로 삼아 로마와 우호적인 외교 관계와 무역을 유지하던 부족으로, 그 우두머리 베리카는 로마에게 국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서기 40년경 카투벨라우니족의 카락타쿠스가 아트레바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면서 베리카는 브리튼섬에서 추방되었다.[78][79]

2. 2. 브리타니아의 정치적 상황 (기원전 55년~서기 40년대)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55년~54년 브리튼 원정 이후, 브리튼섬은 로마 제국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맺었다. 이 시기 브리튼섬은 후기 철기 시대를 겪었으며, 로마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은 특히 남부 지역에서 중요했다.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브리튼섬의 여러 부족 왕국들은 로마에 공물과 인질을 바치는 예속국이 되었고, 이 상태는 기원후 40년대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4년, 27년, 25년에 브리튼섬 침공을 준비했으나, 여러 이유로 취소되었다.[75]업적록》에 따르면, 두브노벨라우누스와 틴코마루스라는 두 브리튼 왕이 로마로 찾아왔으며,[76] 스트라본의 《지리지》에서는 브리튼 사람들이 로마에 바친 세금이 섬 정복으로 얻을 수 있는 세금보다 더 많다고 기록했다.[77]

이 시기 브리튼섬 내의 정치 구도는 복잡했다. 카투벨라우니족이 트리노반트족의 수도 카물로두눔(오늘날의 콜체스터)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아트레바트족은 실체스터를 수도로 삼아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서기 40년경 카투벨라우니족의 카락타쿠스가 아트레바트 왕국 전체를 정복하면서 베리카 왕이 추방되었다.[78][79]

2. 3. 칼리굴라 황제의 원정 계획 (서기 4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55년~54년 브리튼 원정 이후, 브리타니아는 로마 제국과 외교 및 무역 관계를 맺으며 경제적, 문화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남부 지역은 로마의 영향이 컸다.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침공으로 브리튼섬의 여러 부족은 로마에 공물과 인질을 바치는 예속국이 되었고, 이 상태는 기원후 40년대까지 대체로 유지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4년, 27년, 25년에 브리튼섬 침공을 준비했으나, 다른 지역 반란과 브리튼족과의 타협으로 인해 취소되었다.[75]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에는 두브노벨라우누스와 틴코마루스라는 두 브리튼 왕이 로마로 찾아온 기록이 있으며,[76] 스트라본의 《지리지》에는 브리튼 사람들이 로마에 바친 세금과 노역이 로마가 섬을 정복하고 거둘 수 있는 세금보다 더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77]

서기 40년대 브리타니아의 정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카투벨라우니족은 트리노반트족을 몰아내고 남동부 브리타니아의 최강자가 되었으며, 카물로두눔 (콜체스터)을 점령했다. 아트레바트족은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베리카가 왕으로 인정받았으나, 카라타쿠스의 카투벨라우니족에게 정복당하고 베리카는 추방되었다.[78][79]

칼리굴라는 서기 40년에 브리튼족 원정을 계획했지만, 그 실체는 불분명하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군대를 영국 해협에 전투 대형으로 배치한 후, 조개 껍데기를 모으라고 명령하며 "성전황궁을 노리러 바다에서 올라온 약탈자가 여기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80] '조개'(musculi)가 로마군 공병 막사를 뜻하는 속어였다는 점에서, '막사를 모으라'는 명령이었다는 해석도 있다.[81]

칼리굴라의 작전 계획으로 갖춰진 부대와 군사 시설은 3년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브리튼섬 침공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칼리굴라는 갈리아의 보노니아(오늘날 프랑스 불로뉴쉬르메르)에 '질서의 탑'(Tour d'Ordre)이라는 등대를 지었고, 이는 두브리스 (영국 도버)에 세워진 등대의 모델이 되었다.

3.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브리타니아 침공 (서기 43년)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원로원 의원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브리타니아 침략군을 조직했다.[23] 침략 명분은 추방된 아트레바테스의 왕 베리카를 복위시키는 것이었다.

정확히 몇 개의 군단이 파견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미래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지휘한 제2 아우구스타 군단la(Legio II Augusta)은 직접 참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24] 제9 히스파나 군단la(Legio IX Hispana),[25] 제14 게미나 군단la(Legio XIV Gemina, 후에 Martia Victrixla 칭호 획득),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la(Legio XX Valeria Victrix, 후에 Valeria Victrixla 칭호 획득)[26]은 부디카 반란 기간(60~61년) 동안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초기 침략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로마군은 융통성이 있어 필요에 따라 코호트와 보조 부대가 이동했다.

군단을 지휘할 적절한 계급의 인물로 카시우스 디오는 제9 히스파나 군단la을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와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제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더 영거를 언급했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언급했지만, 전직 집정관이었기 때문에 너무 고위직이었을 수 있으며, 아마도 나중에 클라우디우스를 수행했을 것이다.[27]

3. 1. 침공 준비

서기 40년, 칼리굴라 황제는 브리튼섬 정복 작전을 세웠으나,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에 따르면 실제로는 조개를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에 대해서는 '조개'가 로마군 내에서 공병 막사를 뜻하는 속어였다는 해석도 있다.[80][81]

칼리굴라의 작전 계획으로 갖춰진 부대와 군시설은 3년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브리튼섬 침공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칼리굴라가 갈리아의 보노니아(오늘날 프랑스 불로뉴쉬르메르)에 세운 '질서의 탑'이라는 등대는 두브리스(영국 도버)에 세워진 등대의 본보기가 되었다.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는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브리타니아 정복을 위한 군대를 배치하였다.[82] 침공 명분은 브리튼섬에서 추방된 아트레바트족의 왕 베리카를 다시 옹립하는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제2군단 아우구스타가 작전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입증되었다.[83] 제9군단 히스파니아,[84] 제15군단 게마니아(이후 명칭 마르티아 빅트리스), 제20군단(이후 명칭 발레리아 빅트리스)[85]도 부디카의 반란 당시 브리타니아에 배치된 것으로 보아, 클라우디우스 재위기 침공 때부터 브리타니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문헌에 따르면, 군단 지휘관급 인물 중 브리타니아 침공에 관여한 인물은 세 명이다. 디오 카시우스는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와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제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 2세를 언급한다. 에우트로피우스는 그나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를 언급하지만, 그는 집정관 출신이라 전투 지휘보다는 나중에 클라우디우스와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6]

3. 2. 해협 횡단과 브리튼섬 진출

서기 40년, 칼리굴라 황제는 브리튼섬 정복 작전을 세웠으나, 그 실체는 불분명하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에 따르면, 칼리굴라는 영국 해협에서 군대에게 조개를 모으라는 기이한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80] 이 일화는 칼리굴라의 변덕스러움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조개'가 로마군 내에서 공병 막사를 뜻하는 속어였다는 점에서 '막사를 모으라'는 명령이었다는 해석도 있다.[81]

칼리굴라의 작전 계획으로 갖춰진 부대와 군사 시설은 3년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브리튼섬 침공에 기반이 되었다. 칼리굴라가 갈리아의 보노니아(오늘날 프랑스 불로뉴쉬르메르)에 건설한 '질서의 탑'이라는 등대는 두브리스(Dubris, 영국 도버)에 세워진 등대의 본보기가 되었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휘하의 작전과 브리타니아 부족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가 지휘하는 정복군은 3개 사단으로 나누어 브리튼섬으로 진군하였다. 당시 로마군의 출발항은 보노니아(오늘날의 프랑스 불로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고, 주요 상륙지는 루투피아이(Rutupiae, 잉글랜드 켄트주 동부 연안)라는 설이 주류이다. 하지만 정확한 출발지와 상륙지는 어느 쪽도 밝혀진 바가 없다. 카시우스는 출발항을 따로 언급하지 않았고, 수에토니우스클라우디우스 휘하의 2차 상륙군이 보노니아에서 출항했다는 기록을 남겼지만,[87] 이것이 전군에 똑같이 해당됐다고 볼 수는 없다.

영국 잉글랜드의 리치버러에는 거대한 규모의 자연항이 남아 있는데, 로마군의 상륙 지점으로 추정되는 후보 중 하나다. 그러나 불로뉴에서 출발해 리치버러에 상륙하려면 남북 방향으로 항해해야 하는데, 카시우스는 로마군이 동서로 항해했다고 기록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불로뉴에서 솔런트 해협을 건너 영국 치체스터(당시 명칭으로 노비오마구스)나 사우샘프턴 인근에 상륙했다는 설을 제기하는데, 여기서 치체스터, 즉 노비오마구스는 베리카 여왕이 통치했던 지역이기도 하다.[88]

3. 3. 주요 전투

메드웨이 전투는 켄트주 로체스터 인근 메드웨이 강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으며, 로마군 지휘관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는 포로가 될 뻔했으나 곧바로 벗어나 전투의 흐름을 바꾸고 로마군에게 결정적 승리를 안겼다. 바타비아족 출신 지원군 최소 한 사단이 별개의 병력으로 강을 헤엄쳐 건넜다고 전해진다.[89]

브리튼군은 템스강으로 후퇴하였고, 로마군도 브리튼군을 뒤쫓아 강을 건너갔다. 이 과정에서 에식스 습지대를 지나가던 로마군의 병력 손실이 다소 발생했다. 로마군이 도강할 때 기존 다리를 이용했는지, 아니면 임시 가교를 지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템스강에서 벌어진 2차 전투 직후 브리튼군의 토고둠누스는 사망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친위대를 이끌고 브리튼섬으로 건너가 마지막 공세에 합류했다. 클라우디우스 개선문에는 황제가 아무런 사상자 없이 브리튼 왕 11인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90]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전》에도 클라우디우스가 전투나 유혈 사태 없이 브리튼인의 항복을 받았다고 전해진다.[91] 카투벨라우니족은 이미 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카물로두눔으로 마지막 진격을 할 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전장에 참여해 정복자로 기록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시우스 디오는 당시 로마군이 브리튼인의 마지막 저항을 압도할 수 있도록 전투 코끼리와 중무장을 준비해 왔다고 기록했다.

4. 브리타니아 점령과 로마화 (서기 44년~60년)

서기 43년부터 60년까지의 로마 원정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서쪽으로 이끌며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오피둠' 정착지를 점령했다. 이 군대는 적어도 엑세터까지 진격했으며, 이곳은 55년부터 75년까지 아우구스타 제2군단의 기지가 되었다.[34] 히스파니아 제9군단은 링컨(Lindum Colonia|린둠 콜로니아la) 북쪽으로 파견되었으며, 47년까지 험버강에서 세번강 하구를 잇는 선의 남쪽 지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선을 따라 포스 가도가 건설되었는데, 많은 역사학자는 이 도로가 초기 점령 기간 동안 편리한 국경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47년 말, 브리타니아의 새 총독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는 오늘날의 웨일스 부족들과 체셔 평원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웨일스 남동부의 실루레스족은 오스토리우스에게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다. 카라타쿠스는 게릴라전을 이끌었으나,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고 페나인산맥의 브리간테스족에게 도망쳤다. 그러나 브리간테스족의 여왕 카르티만두아는 로마와의 관계 때문에 그를 로마에 넘겨주었다.[34]

오스토리우스 사후,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가 총독직을 이어받아 웨일스 국경을 통제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 고지대에서 소모적인 전쟁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군은 없었다.[34] 54년에 네로가 황제가 되자, 아나톨리아 산악 부족을 상대한 경험이 있는 퀸투스 베라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브리타니아 침략을 계속하려 했다. 베라니우스와 그의 후임자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는 북웨일스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고, 60년 앵글시 섬을 침략하여 많은 드루이드를 살해했다.[34] 그러나 부디카의 반란으로 60년 또는 61년에 로마인들이 동남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웨일스 점령은 연기되었다.

4. 1. 영토 확장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서쪽으로 이끌고 가면서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오피둠' 정착지를 점령했다. 이 군대는 적어도 엑세터까지 진격했으며, 엑세터는 55년부터 75년까지 아우구스타 제2군단의 기지가 되었다.[34] 히스파니아 제9군단은 링컨(Lindum Colonia|린둠 콜로니아la) 북쪽으로 파견되었으며, 47년까지 험버강에서 세번강 하구를 잇는 선의 남쪽 지역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선을 따라 포스 가도가 건설되었는데, 많은 역사학자는 이 도로가 초기 점령 기간 동안 편리한 국경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 시기에 로마와 철기 시대 브리타니아 사이의 경계가 현대적 정확성을 가지고 고정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47년 말, 브리타니아의 새로운 총독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는 오늘날의 웨일스 부족들과 체셔 평원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 웨일스 남동부의 실루레스족은 오스토리우스에게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고, 그들의 국경 지역을 격렬하게 방어했다. 카라타쿠스 자신이 이 게릴라전을 이끌었지만, 결국 결정적인 전투를 선택했을 때 패배했다. 그는 페나인산맥을 점령한 로마의 종속 부족인 브리간테스족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의 여왕 카르티만두아는 로마인들과의 타협 때문에 그를 보호할 수 없거나 원하지 않았고, 그를 침략자들에게 넘겨주었다. 오스토리우스는 사망했고,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가 그 뒤를 이어 현재의 웨일스 국경을 통제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고지대 브리타니아의 산악 지형에서 실질적인 이득 없이 어렵고 지루한 전쟁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더 북쪽이나 서쪽으로 진군하지 않았다. 54년에 네로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침략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듯하며, 아나톨리아의 산악 부족들을 다루는 데 경험이 풍부한 퀸투스 베라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했다. 베라니우스와 그의 후임자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는 북웨일스 전역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으며, 60년에 앵글시섬을 침략했을 때 많은 드루이드를 살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부디카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인들이 60년 또는 61년에 동남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웨일스의 최종 점령은 연기되었다.

60년~61년 부디카 여왕의 반란을 진압한 뒤로 로마는 여러 총독을 거치면서도 브리튼섬 북부로 전진하면서 정복을 계속했다.



당시 브리튼섬 북부에 자리한 브리간트족의 지도자는 카르티만두아 여왕이었다.[94] 그 남편은 베누티우스였는데, 두 사람의 출신과 인연은 불확실하다. 서기 69년에는 베누티우스가 브리튼 저항군의 선봉장에 서서 봉기를 일으키고, 브리간트족의 영토를 장악해 나갔다. 카르티만두아는 로마군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4황제 난립기로 혼란스러운 실정에 놓여 있던 로마군은 진압을 단념하고 카르티만두아를 대피시켰다.

타키투스는 이 사건 이후 서기 71년에 퀸투스 페틸리우스 세리알리스 (총독 재임기간: 71년~74년)가 브리간트족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96] 브리튼섬 북부의 정복은 베티우스 볼라누스 (재임기간: 69년~71년)와 세리알리스 총독이 주도적으로 나섰을 것으로 추정된다.[97] 루구발리움 (오늘날 잉글랜드 최북단 칼라일)에 있는 로마군 요새의 관문에서 발견된 목재를 탄소 연대 측정으로 조사한 결과, 서기 72년 세리알리스 총독 재임기에 무너진 정황이 밝혀졌다.[98] 또 한편으로 체셔주 체스터의 로마 요새인 데바 빅트릭스에서 발굴된 주괴를 통해, 요새가 서기 74년까지 건설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99]

정복 당시 서쪽 전선에 주둔하던 발레리아 빅트릭스 제20군단은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가 이끌고 있었으며, 동쪽 전선에서는 히스파니아 제9군단을 세리알리스 총독이 직접 지휘하였다. 또 아디우트릭스 제2군단이 체스터에서 하구를 따라 거슬러 항해하여, 이를 예상하지 못한 적에게 충격을 안겼다.

서쪽 공세는 지금의 랭커스터 일대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곳에서 세리알레스의 군단이 머무른 흔적이 발굴되었다. 이후 로보로 브리지와 브로검 (브로카붐)을 거쳐 룬강과 에덴강 계곡을 따라 진격하였다. 컴브리아주 연안의 레이븐글래스와 블레너해싯 마을에서도 당시 로마군의 컴브리아 지역 정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발굴된 바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벡풋과 메리포트 일대까지도 초반 진격의 범위로 추정된다.[100]

서기 72년~73년경에는 세리알리스 군단의 일부 병력이 오늘날 코브리지 서쪽에서 스테인모어 고개를 가로질러 아그리콜라의 군단에 합류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 볼라누스가 거점으로 삼았던 레이크로스, 크래큰소프, 커크비소어, 플럼턴헤드 일대에 군영을 세운 흔적을 남겼다. 또한 스테인모어 지역 (메이든캐슬, 보스무어, 로퍼캐슬)에서도 경계탑, 감시탑을 지은 흔적을 남겼다.[101] 세리알리스 군단과 아그리콜라의 군단은 펜리스 인근에서 칼라일로 이동하여 요새를 지었다.[102]

서기 74년에는 세리알리스가 브리타니아 총독에서 물러나고, 율리우스 프론티누스가 브리타니아로 파견되어 후임 총독으로 나섰다. 프론티누스는 몇 년 전 중단되었던 웨일스 정복에 다시 눈길을 돌렸고, 차근차근 나아간 끝에 76년경에는 실루레스족과 기타 적대적인 부족을 정복하였다. 이에 앞서 75년에는 카일레온에 아우구스타 제2군단의 주둔 기지를 세우고, 그로부터 15~20km 떨어진 부지에 지원 부대용으로 소규모 요새망을 구축하였다. 이후 프론티누스는 돌라이커티 금광 개발을 위해 웨일스 서부의 펌세인트에 요새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4. 2. 부족 정복

푸블리우스 오스토리우스 스카풀라는 47년 말 브리타니아의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하여 오늘날의 웨일스 부족들과 체셔 평원을 상대로 원정을 시작했다.[34] 실루레스족은 격렬하게 저항하여 오스토리우스에게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카락타쿠스는 게릴라전을 이끌었으나, 결국 전투에서 패배하고 페나인 산맥의 브리간테스족에게 도망쳤다. 그러나 브리간테스족의 여왕 카르티만두아는 로마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카락타쿠스를 보호하지 않고 로마에 넘겨주었다.[34]

오스토리우스 사후, 아울루스 디디우스 갈루스가 총독직을 이어받아 웨일스 국경을 통제했다. 그러나 당시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 고지대의 산악 지형에서 소모적인 전쟁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4]

4. 3. 드루이드 학살

퀸투스 베라니우스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는 북웨일스 전역에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다. 특히 60년에 앵글시 섬을 침략했을 때 많은 드루이드를 살해한 것으로 유명하다.[34] 그러나 부디카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인들이 60년 또는 61년에 동남부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웨일스의 최종 점령은 연기되었다.

5. 북부 지역 정복과 방어 (서기 60년~117년)

보우디카의 봉기가 진압된 후, 로마 총독들은 북쪽으로 진출하며 정복을 계속했다.[35] 브리간테스의 지도자였던 여왕 카르티만두아와 그녀의 남편 베누티우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69년 베누티우스의 반란이 일어났고 로마는 카르티만두아를 지원했다.[35][36]

타키투스는 71년에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가 브리간테스를 상대로 성공적인 전쟁을 벌였다고 기록했다.[37] 북부 정복의 대부분은 베티우스 볼라누스와 케리알리스의 총독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38] 이 시기에 칼라일의 로마 요새 루구발리움과 체스터의 데바 빅트릭스 건설이 이루어졌다.[36][39]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와 케리알리스는 각각 서부와 동부에서 군단을 이끌고 진격했다. 서부 공격은 랭커스터에서 시작되었으며, 룬 강과 에덴 강 계곡을 따라 브로엄 (브로카붐)까지 이어졌다. 컴브리아 해안의 래번글래스, 블레너헤셋, 벡풋, 메리포트 등지에 초기 로마 점령지가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40] 72년과 73년 사이에 케리알리스 군대는 스타인모어 패스를 넘어 아그리콜라와 합류했고, 이후 두 군대는 펜리스 부근에서 칼라일로 이동하여 요새를 세웠다.[36][41]

서기 78년 이후의 상황은 아그리콜라의 원정 (서기 78년~84년)에 상세히 나와있다.

서기 87년,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에서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고, 칼라일코브리지 사이의 '스테인게이트' 도로를 기준으로 방어선을 굳히기로 결정했다.[113] 칼라일은 '켄투리오 레기오나리우스'(지역 백부장)가 담당하는 지역이었다. 스테인게이트를 새로운 국경으로 삼으면서 빈돌라다와 같은 대형 요새를 짓고, 뉴보로, 매그니스, 브램턴올드처치에는 행군 시 반나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간격으로 요새들을 건설했다.[113]

브리타니아의 새 국경선으로 설정된 스테인게이트 (붉은색). 바로 윗쪽으로는 훗날 건설될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표시되어 있다.


서기 90년대 중반 이후, 로마군은 정규 요새의 규모를 축소하고 그 사이에 소규모 요새와 망루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스타인게이트 국경선의 방어 시설을 개편했다.[114] 스타인게이트 국경선 외에도 솔웨이 연안을 따라 벡풋, 메리포트, 버로월스, 모스비에도 요새를 두었다. [115]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재위: 서기 98년~117년)에는 트로트벡에 요새가 세워졌으며, 앰블사이드의 요새도 이 시기에 지어져 레이크디스트릭트의 요새에 수운 보급을 담당했다. 또한 하드노트 요새까지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앰블사이드에서 올드펜리스 / 브로검까지 이어지는 도로도 이때부터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기 84년경 북부 로마 군사 조직


아그리콜라 이후 브리타니아 총독들은 브리타니아 최북단까지 정복하거나 제압할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치터틸에서는 로마군 요새가 공사 도중 철거되었고,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의 후속 조치로 스코틀랜드 영토 방어를 위해 건설해 둔 퍼스셔 지방의 개스크 산맥 일대 요새들도 수년간 버려졌다.

5. 1. 브리간트족 정복

보우디카의 봉기를 진압한 후, 로마 총독들은 북쪽으로 진출하며 정복을 계속했다.[35]

브리간테스족의 지도자는 여왕 카르티만두아였다.[35] 그녀의 남편은 베누티우스였는데, 그는 카르베티 출신으로 추정되며, 솔웨이-타인 선을 따라 브리튼 섬에 걸쳐 있는 브리간테스 연맹에 컴브리아를 통합하는 데 책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카르티만두아는 펜닌 산맥 동쪽, 베누티우스는 서쪽의 브리간테스인을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6] 69년, 카르티만두아는 베누티우스의 반란으로 인해 로마에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그녀를 대피시키고 베누티우스를 권력에 남겨두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71년에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가 브리간테스를 상대로 성공적인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37]

북부 정복의 대부분은 베티우스 볼라누스와 케리알리스의 총독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38] 칼라일의 로마 요새 루구발리움의 관문 목재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케리알리스 총독 재임 기간인 72년에 벌목되었다는 증거를 제시한다.[36] 체스터의 로마 요새인 데바 빅트릭스에서 나온 납괴는 74년에 건설이 진행 중이었음을 나타낸다.[39]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는 제20군단 발레리아 빅트릭스의 사령관으로서 서부에서, 케리알리스는 동부에서 히스파니아 제9군단을 이끌며 역할을 했다. 아디우트릭스 제2군단은 체스터에서 강 어귀를 따라 항해하여 적을 기습했다.

서부 공격은 랭커스터에서 시작되었으며, 룬 강과 에덴 강 계곡을 따라 로우 보로우 브리지와 브로엄 (브로카붐)을 거쳐갔다. 컴브리아 해안에서는 래번글래스와 블레너헤셋이 초기 로마 점령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벡풋과 메리포트도 초기에 등장했을 수 있다.[40] 72년과 73년 사이에 케리알리스 군대의 일부는 스타인모어 패스를 건너 코르브리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그리콜라와 합류했다. 스타인모어 지역에는 신호탑 또는 감시탑도 나타나고 있다.[36] 그 후 두 군대는 펜리스 부근에서 칼라일로 이동하여 72–73년에 그곳에 요새를 세웠다.[41]

5. 2. 브리타니아 북부 정복

보우디카의 봉기를 진압한 후, 로마 총독들은 북쪽으로 진출하며 정복을 계속했다.[35]

브리간테스의 지도자는 여왕 카르티만두아였고, 그녀의 남편은 베누티우스였다.[35] 69년, 베누티우스의 반란으로 카르티만두아는 로마의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그녀를 대피시키고 베누티우스를 권력에 남겨두었다.[35]

타키투스는 71년에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 (총독 AD 71–74)가 브리간테스를 상대로 성공적인 전쟁을 벌였다고 기록했다.[37]

북부 정복의 대부분은 베티우스 볼라누스 (총독 AD 69–71)와 케리알리스의 총독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38] 칼라일의 로마 요새 루구발리움의 관문 목재는 AD 72년에 벌목되었다는 증거가 있으며,[36] 체스터의 로마 요새인 데바 빅트릭스는 AD 74년에 건설이 진행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39]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는 발레리아 빅트릭스 제20군단 (71–73)의 사령관으로서 서부에서, 케리알리스는 히스파니아 제9군단을 이끌고 동부에서 역할을 했다. 아디우트릭스 제2군단은 체스터에서 강 어귀를 따라 항해하여 적을 기습했다.

서부 공격은 랭커스터에서 시작되었으며, 룬 강과 에덴 강 계곡을 따라 로우 보로우 브리지와 브로엄 (브로카붐)을 거쳐갔다. 컴브리아 해안에서는 래번글래스와 블레너헤셋이 초기 로마 점령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벡풋과 메리포트도 초기에 등장했을 수 있다.[40] 72년과 73년 사이에 케리알리스 군대의 일부는 스타인모어 패스를 건너 코르브리지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그리콜라와 합류했다.[36] 그 후 두 군대는 펜리스 부근에서 칼라일로 이동하여 AD 72–73년에 그곳에 요새를 세웠다.[41]

5. 3. 아그리콜라의 원정 (서기 78년~84년)

서기 78년, 브리튼섬 북부 원정의 장군이었던 아그리콜라가 신임 총독으로 임명되어 브리타니아로 돌아왔다. 당시 아그리콜라는 사위였던 타키투스가 쓴 전기 덕분에 명성을 얻고 있었다.[103][42] 그해 여름 브리타니아에 도착한 아그리콜라는 로마 지원군의 기병대를 격파한 오르도비스족을 무찌르고 웨일스 정복을 완료하였다.[103][42] 아그리콜라는 브리타니아에서 군 복무를 한 경험으로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이동하여 부족민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후 앵글시섬을 침공하여 섬 주민들이 평화 조약을 맺도록 하였다.[104][43]

이듬해 아그리콜라는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간트족과 스코틀랜드 남부 연안 지역을 차지하던 셀고바인에 맞서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로마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105][44] 타키투스는 아그리콜라 장군이 이전에 정복된 브리튼인의 저항에 무력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평화를 정착시키려 노력하는 동시에, 서기 79년에는 브리타니아 영토 각지에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한다. 서기 80년, 아그리콜라는 칼레도니아 서쪽 연안 (지금의 스코틀랜드 테이만)[106]으로 진격한 다음, 이듬해 서기 81년이 되어서야 남쪽으로 돌아와, 자신이 새로 정복한 영토와 반란이 진압된 영토에서 이득을 공고히 하였다.[107][108][45][46]

서기 82년에는 킨타이어나 아가일 연안을 따라 항해하였으며, 서기 83년~서기 84년에는 육군과 해군을 모두 동원하여 스코틀랜드의 동부와 북부 연안을 따라 북방 영토로 진출, 그곳 부족민들에 맞서 승전하였다. 특히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에서 칼가쿠스가 이끄는 브리튼 북부 부족민에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일대에서 이루어진 발굴 조사 결과, 로마군은 개스크 산맥을 따라 북부 영토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여,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스코틀랜드 북동부 저지대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협곡들을 지배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그리콜라는 로마군의 정복 작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군사 도로와 요새망을 구축하였다. 기존의 요새를 보강하는 것은 물론 지금의 스코틀랜드 북동부의 하이랜드 지방 경계선을 따라 요새를 새로 구축하여, 스코틀랜드 고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협곡의 지배력을 하나로 묶었다. 스코틀랜드 남동부와 잉글랜드 북동부를 따라서는 군사 통신망과 보급 전선을 잘 다져 놓는 작업도 병행하였다. 칼레도니아 최남단 (오늘날 덤프리스셔 일대)을 차지하던 셀고바이인에 맞서 요새를 집중 구축하여 그 일대의 효과적인 지배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스코틀랜드 중남부 (서던업랜드 대다수 지역)의 군사 포위선을 완성하게 되었다.[109][47] 다만 셀고바이인과는 달리 인근의 부족민인 노반타이인, 담노니인, 보타디니인에 대해서는 요새를 세우지 않았으며 로마군과의 충돌 흔적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2019년 아이라이아 아라바올라자 (Iraia Arabaolaza)가 이끄는 발굴 조사단이 아그리콜라 장군의 침공 당시 로마 군단이 사용했던 서기 1세기경의 행군 야영지를 발굴하였다. 아라바올라자 발굴단장에 따르면 현장에서 발견된 불구덩이가 두 개의 평행선으로 30m 떨어져 분리된 모습으로 발견되었으며, 숯을 넣은 돔형 테라코타 오븐과 26개의 화덕도 발견되었는데 그 연대를 서기 77년~서기 86년, 서기 90년경으로 추정하였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일대가 오늘날 잉글랜드 에어셔주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로마군의 전략 거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했다.[110][111][112]

이 모든 작전을 완수한 아그리콜라 장군은 서기 84년 로마로 소환되었다.

5. 4. 방어선 강화

서기 87년,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에서 더 이상 영토 확장을 하지 않고, 칼라일코브리지 사이의 '스테인게이트' 도로를 기준으로 방어선을 굳히는 결정을 내렸다.[113] 칼라일은 '켄투리오 레기오나리우스'(지역 백부장)가 담당하는 지역이었다. 스테인게이트를 새로운 국경으로 삼으면서 빈돌라다와 같은 대형 요새를 짓고, 뉴보로, 매그니스, 브램턴올드처치에는 행군 시 반나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간격으로 요새들을 건설했다.[113]

서기 87년부터 117년까지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의 기존 영토를 보강하는 작업을 반복했으며, 스테인게이트 국경선 너머 북쪽으로는 일부 거점만 유지한 가운데, 솔웨이-타인 일대로 조금씩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부족민과의 전투나 그로 인한 패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113]

서기 90년대 중반 이후, 로마군은 정규 요새의 규모를 축소하고 그 사이에 소규모 요새와 망루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스타인게이트 국경선의 방어 시설을 개편했다.[114] 스타인게이트 국경선 외에도 솔웨이 연안을 따라 벡풋, 메리포트, 버로월스, 모스비에도 요새를 두었다. 이 지역에 요새를 구축한 것은 로마군의 주둔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115]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재위: 서기 98년~117년)에는 트로트벡에 요새가 세워졌으며, 앰블사이드의 요새도 이 시기에 지어져 레이크디스트릭트의 요새에 수운 보급을 담당했다. 또한 하드노트 요새까지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앰블사이드에서 올드펜리스 / 브로검까지 이어지는 도로도 이때부터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그리콜라 이후 브리타니아 총독들은 브리타니아 최북단까지 정복하거나 제압할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치터틸에서는 로마군 요새가 공사 도중 철거되었고,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의 후속 조치로 스코틀랜드 영토 방어를 위해 건설해 둔 퍼스셔 지방의 개스크 산맥 일대 요새들도 수년간 버려졌다. 전쟁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있으며, 칼레도니아인들을 명목상으로나마 복종 상태에 두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6.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 (2세기)

브리타니아 내에서 로마화된 지역의 범위를 시기별로 나타낸 지도


하드리아누스 황제 (Hadrianusla, 재위 117년~138년) 시대에는 제국 전역의 영토를 정리하고 통합하는 정책에 따라 브리타니아의 영토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정리되기 시작하였다. 122년경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건설되면서 로마령 브리타니아의 북방한계선도 방어가 수월한 타인강~솔웨이퍼스 일대로 축소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즉위 후 전임 황제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나섰다. 139년 브리간트인을 물리친[116]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브리타니아 총독은 황제의 명에 따라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쪽으로 진군하여 오타디니인, 셀고바이인, 담노니인이 살고 있던 칼레도니아 저지대를 정복하고 국경선을 북쪽으로 이동시켰다.[117][118][119]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총독은 3개 군단을 동원해 코리아와 브레메니움에 보급로를 구축하고, 139년~140년경 카일레온의 아우구스타 제2군단, 에보라쿰의 빅트릭스 제6군단, 데바빅트릭스의 발레리아 빅트릭스 제20군단을 투입하여 진군했다. 140년 이후 롤리우스 우르비쿠스는 최소 16,500명 규모의 병력을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쪽으로 이동시켰다.[120]

셀고바이인과 오타디니인은 롤리우스 우르비쿠스의 군단과 처음 마주한 칼레도니아 부족 중 하나였다. 로마군은 언덕 지형 전투에 능숙하여 전략적 요충지와 고지대를 빠르게 점령했는데, 이 중에는 번스워크힐과 같이 칼레도니아 부족민들이 이미 요새화한 지역도 있었다. 번스워크힐은 칼레도니아 북부로 가는 서쪽 길목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발굴 조사 결과 실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121]

142년, 군사 작전을 중단한 로마군은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쪽의 클라이드강-포스강 지역을 국경선으로 삼아 안토니누스 방벽을 건설했다. 그러나 20년 뒤인 162년, 로마군은 안토니누스 방벽을 포기하고 기존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강화했다. 이후 안토니누스 방벽 일대는 가끔씩만 점령했다가 포기하는 것을 반복했다.

영토를 지속적으로 관리하지는 않았지만, 로마군은 스코틀랜드 북부 깊숙한 지역까지 여러 차례 진군했다. 스코틀랜드에는 로마군이 행군하면서 세운 군영 흔적이 유럽 전역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로마군의 칼레도니아 정복 작전이 최소 네 차례는 벌어졌음을 보여준다.

6. 1.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년–138년) 시대에 로마의 점령은 방어 가능한 국경선인 타인 강-솔웨이 만 지역으로 철수하여 122년경부터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건설했다.[113]

아그리콜라 이후의 브리타니아 총독들은 브리타니아 최북단까지 정복하거나 제압할 의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몬스 그라우피우스 전투의 후속 조치로 스코틀랜드 일대 영토 방어를 위해 건설해 둔 개스크 산맥 일대 요새들도 수년간 버려진 상태가 되었다. 전쟁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높으며, 칼레도니아인들을 건드리지 않고 명목상으로나마 복종 상태에 두는 것이 더 유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기 87년, 스테인게이트 도로를 기준으로 그 이하의 영토를 굳혀나간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스타인게이트를 새 국경으로 삼는 과정에서 빈돌라다 등지에 대형 요새를 짓고, 뉴보로, 매그니스, 브램턴올드처치 일대에는 행군 시 반나절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간격으로 요새들을 촘촘히 건설했다.

서기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정규 요새의 규모를 축소하고 그 사이에 소규모 요새와 망루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스테인게이트 국경선의 방어 시설을 개편했다.[114] 스타인게이트 국경선 외에도 솔웨이 연안을 따라 벡풋, 메리포트, 버로월스, 모스비 일대에도 요새를 두었다.[115]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 (재위: 서기 98년~117년)에는 트로트벡에 요새가 세워졌으며, 앰블사이드의 요새도 이 시기에 지어져 레이크디스트릭트의 요새에 수운 보급을 담당했다. 또한 하드노트 요새까지 도로가 건설되었으며, 앰블사이드에서 올드펜리스 / 브로검까지 이어지는 도로도 이때부터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6. 2.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정책 변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황위에 오르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설치한 제국의 국경 시스템을 신속하게 뒤집으려 했다. 139년에 브리간테스를 물리친[116]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브리타니아 총독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쪽으로 진군하여 오타디니인, 셀고바이인, 담노니인이 살고 있던 칼레도니아 저지대를 정복하고 국경선을 북쪽으로 밀어붙였다.[117][118][119]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총독은 3개 군단을 동원해 코리아와 브레메니움에 보급로를 구축한 뒤, 서기 139년~140년경 카일레온의 아우구스타 제2군단, 에보라쿰의 빅트릭스 제6군단, 데바빅트릭스의 발레리아 빅트릭스 제20군단을 전역으로 진군시켰다. 서기 140년 이래 롤리우스 우르비쿠스는 최소 16,500명 규모에 달하는 동원병력을 전부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 북쪽으로 진군시켰다.[120]

롤리우스 우르비쿠스의 군단을 처음 맞이한 칼레도니아 부족은 셀고바이인과 오타디니인이었다. 로마군은 언덕 지형에서의 전투에 능숙했기에 전략적 요충지와 고지대의 점령에 나섰는데, 그 중에는 칼레도니아 부족민들이 이미 요새화했던 지역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번스워크힐은 칼레도니아 북부로 나아가는 서쪽 진로를 좌우할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발굴조사 결과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121]

6. 3. 안토니누스 방벽 건설과 포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전임 황제의 정책을 반전시키기 위하여 즉각적인 군사행동에 나섰다. 서기 139년 브리간트인을 물리친[116] 퀸투스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브리타니아 총독은 황제의 명에 따라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쪽으로 진군하여 오타디니인, 셀고바이인, 담노니인이 살고 있던 칼레도니아 저지대를 정복하고, 국경선을 북쪽으로 밀어나갔다.[117][118][119]

롤리우스 우르비쿠스 총독은 3개 군단을 동원해 코리아 (Coria)와 브레메니움 (Bremenium)에 보급로를 구축한 뒤, 서기 139년~140년경 카일레온 (Caeleon)의 아우구스타 제2군단, 에보라쿰 (Eboracum)의 빅트릭스 제6군단, 데바빅트릭스 (Deva Victrix)의 발레리아 빅트릭스 제20군단을 전역으로 진군시켰다. 서기 140년 이래 롤리우스 우르비쿠스는 최소 16,500명 규모의 동원병력을 전부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 북쪽으로 진군시켰다.[120]

롤리우스 우르비쿠스의 군단을 처음 맞이한 칼레도니아 부족은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 북서쪽 일대 (오늘날 커크커드브라이트셔, 덤프리스셔 일대)를 차지하던 셀고바이인 (Selgovae)과 오타디니인 (Otadini)이었다. 로마 건국 이래 언덕 지형에서의 전투에 정통했던 로마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전략적 요충지와 고지대의 점령에 나섰는데, 그 중에는 칼레도니아 부족민들이 이미 요새화했던 지역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번스워크힐 (Burnswark Hill)은 칼레도니아 북부로 나아가는 서쪽 진로를 좌우할 전략적 거점이었으며, 발굴조사 결과 실제로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다.[121]

서기 142년 전 지역에 걸쳐 군사작전을 중단한 로마군은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쪽의 클라이드강-포스강 지역을 국경선 삼아 안토니누스 방벽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20년 뒤인 서기 162년 로마군은 안토니누스 방벽을 포기하고, 기존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더욱 강화하는 쪽을 택했다. 이 시기 안토니누스 방벽 일대 지역은 가끔씩만 점령하였다가 포기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영토의 지속적인 관리를 포기했을지언정 침투 작전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늘날 스코틀랜드 북부 깊숙한 지역까지 수차례 더 진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에는 로마군이 행군하면서 군영을 세운 흔적이 유럽 전 지역을 통틀어서도 최다 규모로 남아 있는데, 이는 당시 로마군의 칼레도니아 정복작전이 최소 네 차례는 벌어졌음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7. 브리타니아의 쇠퇴와 로마 제국의 멸망 (3세기~4세기)

칼레도니아 로마 원정 (208–211)


3세기 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칼레도니아 연맹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칼레도니아 연맹은 브리튼어족 픽트족[57] 부족들의 연합체였다. 세베루스는 브리타니아 주둔군 3개 군단, 기병 지원을 받는 9,000명의 황실 근위대, 브리타니아 함대, 라인 함대, 다뉴브에서 파견된 2개 함대의 지원을 받았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원주민들에게 학살을 가했고, 게릴라전 전술에 따른 소모전으로 5만 명의 병력을 잃은 후 하드리아누스 장벽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는 장벽을 철저하게 수리하고 보강하여, 후대 로마 작가들이 장벽 건설의 공을 그에게 돌리게 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는 칼레도니아 여성들의 성적 도덕을 비판했다. 칼레도니아 족장 아르젠토콕소스의 아내는 "우리는 최고의 남자들과 공개적으로 교제하는 반면, 당신들은 최악의 남자들에게 은밀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58] 이는 현재 스코틀랜드로 알려진 지역의 원주민이 한 말로 자신 있게 추정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세베루스 황제는 다시 적대 행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던 중 요크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카라칼라가 이 계획을 포기했다.

카라우시우스 반란 이후, 황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306년 군대를 이끌고 브리타니아로 와 북부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없어 그의 원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역사 자료에 따르면 그는 브리타니아 최북단에 도달하여 초여름에 주요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남쪽으로 돌아왔다.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버지와 함께 북부 브리타니아에서 1년을 보내며 여름과 가을에 하드리아누스 장벽 너머의 픽트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59][60]

이후 로마인들은 스코틀랜드 원정 대신 ''탐험가(exploratores)''의 정찰, 교역, 뇌물, 기독교 확산 등으로 제한했다. 로마인들이 고이델어를 사용하는 섬 히베르니아 (현대 아일랜드)와 어느 정도 교류했는지는 아일랜드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7. 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원정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 황제 (서기 209년 브리타니아 북부 정벌)


서기 209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칼레도니아 부족연합 정벌에 나섰다.[122] 칼레도니아 부족연합은 브리타니아 북부의 픽트어계 부족 연합이었다. 세베루스는 마이타이인의 호전성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제국 내 불안을 잠재우려는 목적도 있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현지 주둔군 3개 군단,[123] 기병대를 동반한 로마 근위대 9000명, 브리타니아 함대, 라인강 함대, 다뉴브강 함대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당시 로마 제국의 군사력을 총동원한 것이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칼레도니아 부족민들에게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124] 그러나 칼레도니아 전사들은 게릴라 전술로 맞섰고, 로마군은 5만 명의 병력을 잃는 큰 피해를 보았다.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철수했다.

로마군 철수 전, 양측은 휴전 협상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황후 율리아 돔나는 칼레도니아 여성들의 성적 문란함을 비난했다. 이에 칼레도니아 추장 아르겐토콕소스의 아내는 "당신네들은 최악의 남자와 불륜을 저지를진 몰라도, 우린 최고의 남자와 당당히 교제한다"고 맞받아쳤다.[124] 이는 스코틀랜드인의 발언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철수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강화했다. 후대 기록에는 그가 방벽을 건설했다고 묘사될 정도였다. 그는 칼레도니아 정벌을 재개하려 했으나, 잉글랜드 요크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카라칼라는 정벌 계획을 포기했다.

7. 2.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원정

306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는 카라우스 반란 이후 복구된 방어선을 점검하고 브리타니아 북부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군단을 이끌고 브리타니아로 건너왔다. 콘스탄티우스의 정복 작전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조사로 드러난 바가 거의 없지만, 문헌에 따르면 초여름 브리타니아 최북단에 도달하여 큰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125]

콘스탄티누스 1세도 아버지 곁에서 브리타니아 북부에서 1년을 보내며, 여름과 가을에 하드리아누스 방벽 너머 픽트족 정벌에 나섰다고 전해진다.[126]

이후 로마인들은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탐험대(exploratores)를 보내거나, 부족민과 무역을 하거나, 공물을 바쳐 침입을 막거나, 기독교 선교사들이 포교 활동을 하는 정도로만 교류하였다. 게일어 부족들이 살던 히베르니아섬 (오늘날의 아일랜드)과의 교류 정도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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