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리오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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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나리오테스는 "파나르의 사람들"을 의미하며, 15세기부터 오스만 제국 치하의 이스탄불 파나르 지구에 거주하며 금융업과 외교 등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그리스계 귀족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18세기부터 루마니아 공국의 공작으로 임명되어 지배했으며, 서유럽의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독립 전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리스 독립 이후 오스만 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잃고 몰락했으며, 루마니아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는 비판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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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리오테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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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정의 | 오스만 제국 시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파나르 지역 출신 그리스인 귀족 |
역할 | 오스만 제국 내에서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공작을 역임 |
역사적 배경 | |
기원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의 고위직에 진출한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 |
주요 가문 | 마브로코르다토스 가문, 기카 가문, 칸타쿠제노스 가문, 모루지 가문 등 |
정치적 역할 |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작 임명, 외교관, 통역관 등 오스만 제국 내 요직 담당 |
특징 | |
문화적 특징 | 그리스 문화와 교육을 장려하고, 서유럽과의 연결 고리 역할 |
사회적 특징 | 부와 권력을 축적하며, 오스만 사회 내에서 독특한 지위 형성 |
비판 | 부패, 과도한 세금 징수, 자국 이익 추구 등의 부정적인 면모도 존재 |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작 | |
임명 방식 | 오스만 제국에 의해 임명되었으며, 종종 뇌물을 통해 지위를 얻음 |
영향력 | 두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근대 루마니아 역사에 중요한 역할 |
평가 |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며, 루마니아 역사에 대한 논쟁적인 주제 |
몰락 | |
원인 |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오스만 제국의 불신,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부상, 내부 권력 다툼 등 |
결과 |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의 지위 상실, 정치적 영향력 감소, 사회적 지위 하락 |
유산 | |
긍정적 유산 | 그리스 문화 보존 및 발전, 서유럽과의 교류 촉진, 루마니아 근대화에 기여 |
부정적 유산 | 부패, 착취, 권력 남용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 |
관련 정보 | |
관련 인물 | 콘스탄틴 마브로코르다트, 알렉산드루 이프실란티스 |
관련 지역 | 파나르, 콘스탄티노폴리스, 왈라키아, 몰다비아 |
2. 역사적 배경
파나리오테스는 "파나르의 사람들"을 의미하며, 이스탄불 구시가지 북서부 골든 혼에 면한 파나르 지구(Phanar,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페넬)에서 유래했다. 이 지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오스만 제국이 성 소피아 대성당에 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를 이전한 곳이다. 15세기 이래 이 지구에는 그리스계 정교도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 중 이슬람법으로 이자를 금지한 무슬림을 대신해 금융업으로 부를 쌓고, 오스만 제국 관료로 봉사하는 가문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귀족 계층이 되어 오스만 제국 하 정교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파나리오테스로 총칭되었다.
17세기부터 이미 오스만 제국의 정책과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 고위직을 맡아 부와 영향력을 가진 가문들이 있었다.[33] 1669년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 전인 1821년까지, 그리스인들은 교육 수준이 높아 오스만 정부에서 드라고만(중동인과 유럽인 사이의 통역사)이나 대사관으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교회 성직자, 지역 유지, 대상인 출신으로, 그리스 독립 전쟁 이전까지 오스만 통치 기간 동안 교육받은 그리스인 계급을 대표했다.[33]
1711년 프루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의 속국 몰다비아 공국의 드미트리 칸테미르 공이 러시아 표트르 1세에게 협력하여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가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이후 루마니아인과 같은 정교도이면서 제국에 충실한 파나리오테스 중에서 몰다비아 공을 선출했다. 1715년 몰다비아 남쪽 왈라키아에서도 파나리오테스가 공으로 임명되면서, 이후 100년간 루마니아 양 공국은 그리스인 파나리오테스 지배를 받았다.
18세기 말, 통역관으로서 서유럽 제국 외교관들과 접촉하던 파나리오테스 사이에서 서유럽에서 탄생한 민족주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민족으로서 자각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후 파나리오테스 일부가 지원한 비밀 결사 필리키 에테리아가 1821년 루마니아에서 봉기하자 펠로폰네소스 반도 그리스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1830년 반도 지역이 그리스 왕국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독립 전쟁 관여로 파나리오테스에 대한 제국의 신뢰가 하락했고, 루마니아 양 공국 공직 임명도 중단되었다. 그리스 독립 후, 많은 파나리오테스가 이스탄불을 떠나 그리스로 이주했다.
오스만 제국은 파나리오테스를 대신할 통역관으로 무슬림, 튀르키예인 젊은 관료에게 프랑스어 등 유럽 언어와 학문을 가르쳤고, 이들은 탄지마트 주역으로 제국 근대화를 추진했다.
2. 1.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나리오테스는 주로 파나르 지구에 거주하며 활동했던 그리스인 집단을 말한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오스만 제국 내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메흐메트 2세는 도시의 기독교인들을 추방하고 발라트의 유대인들만 남겨두었다.[5] 그는 제국 전역과 새로 정복한 영토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을 데려와 도시를 다시 채웠으며,[5] 파나르는 펠로폰네소스의 무클리온에서 온 그리스인들과 트라페준타 제국 시민들로 재건되었다.[6]
파나리오테스 가문들 중 일부는 17세기에 이미 오스만 제국의 정책과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 고위직을 맡아 부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33] 1669년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는 1821년까지, 그리스인들은 교육 수준이 높아 오스만 정부에서 드라고만(통역관)이나 대사관으로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교회 성직자, 지역 유지, 대상인 출신으로, 그리스 독립 전쟁 이전까지 오스만 통치 기간 동안 교육받은 그리스인 계급을 대표했다.[33]
18세기 파나리오테스는 총대주교령의 사무를 관할하며 세습적인 관료 집단으로 성장했고, 오스만 제국 내 그리스인들의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동시에 오스만 제국 내의 중요한 정치 주체로 성장하여 외교관으로서 대 브리튼 왕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 관련 업무에서 중요한 위치를 수행했다.[44]
파나리오테스는 오스만 행정부의 요직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여기에는 제국 세금 징수, 상업적 독점 유지, 다양한 사업 계약, 궁정 식품 납입, 도나우 공국(몰다비아와 왈라키아) 지배자 등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흑해 밀 무역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상업 활동을 헝가리 왕국과 중부 유럽 전체로 확대하며 서유럽과의 접촉을 통해 서유럽 언어와 문화에 익숙해졌다.[39]
그리스 상인들은 도서관과 학교에 기부했으며, 그리스 독립 전쟁 직전 그리스 학문의 중심지 세 곳은 그리스 상인이 집중되었던 키오스, 스미르나, 아이발리(터키 아이발륵)에 있었다.[43] 이러한 광범위한 그리스 상인 계층의 부는 그리스 사회에서 지적 부흥의 물질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리스 독립 전쟁 직후, 파나리오테스는 그리스 문화 엘리트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리스 역사가 콘스탄티노스 파파리요풀로스에 따르면, 이는 제국 관리 경험과 높은 교육 수준 때문이었다.[38]
2. 1. 1. 드라고만 (Dragoman)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무력보다는 협상에 의존하게 되자, 숙련된 협상가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이 부상하였다.[31] 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은 국제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오스만 궁정(Porte)은 외교적 협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오스만 관료들은 서유럽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다룰 능력이 없었다.[35] 오스만 궁정은 상업 및 교육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이 역할을 맡겼고, 그 결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또는 그리스화된 가문들인 파나리오테스가 오스만의 고위 시종직이나 통역관, 공직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36]
1669년부터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 전까지 파나리오테스는 오스만 정부(포르테)와 외국 외교 공관 사이의 드라고만 다수를 차지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이 일반 오스만 인구보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4]
2. 1. 2.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의 관계
1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리스인 총대주교는 인종에 관계없이 제국 내 모든 정교회 신자들의 종교적, 정치적 지배자였다.[36] 1557년 복원된 세르비아 대주교 관구를 포함하여, 이전에는 독립적이었던 정교회 대주교 관구들은 모두 그리스 정교회의 권위 아래에 놓였다.[36] 대부분의 그리스 총대주교는 파나리오테스 출신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술탄이 사실상 그리고 법적으로 비잔티움 황제를 대체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술탄으로부터 그리스인과 그리스 정교 밀레트 내 모든 민족의 종교적, 민족적 지도자(에트나르크)로 인정받았다.[40] 오스만 제국은 법적으로 민족과 종교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정교도는 하나의 실체로 취급되었고, 총대주교 관구는 제국 내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41]
오스만 제국 내에서 총대주교 관구의 위상은 비잔티움 제국의 부활과 재건을 목표로 하는 그리스인 '르네상스'의 상징이었다. 총대주교와 그를 둘러싼 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오스만 제국 내 그리스인 권력의 핵심이었으며, 이후 제국 조직에 침투하여 구 비잔티움 귀족들을 끌어들였다.[41]
2. 2. 도나우 공국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1711년-1716년부터 1821년까지 파나리오테스 가문 출신 인사들이 외교관(Dragoman) 직책에 대한 보상으로 도나우 공국(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군주(Hospodar; 보이보데 혹은 공)직을 맡았다.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파나리오테스 시대'''라고 부른다.[31]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협상에 의존하게 되자, 숙련된 협상가들이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이 부상했다.[31] 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은 국제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고, 서유럽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오스만 관리들은 외교적 협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35] 오스만 궁정은 상업과 교육적 전통을 가진 그리스인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맡겼고, ''파나리오테스''라고 불리는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하며 고위 공직을 차지했다.[36]
표트르 대제 치하 러시아 제국의 팽창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카르파티아 국경 확대로 인해, 지역 공작들의 불복종은 오스만 제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동방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의 보호 제안은 오스만 제국에게 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미하이 라코비차의 몰다비아 통치 시기에 이러한 상황이 명백해졌고, 그는 표트르 대제와 공모하여 오스만의 통치를 벗어나려 했다. 니콜라오스 마브로코르다토스가 몰다비아의 첫 파나리오테스 공작이 되었고, 왈라키아에서도 슈테판 칸타쿠지노를 대신하여 첫 파나리오테스 군주가 되었다.
디미트리에 칸테미르 재위 시 러시아-투르크 전쟁(1710~1713)에서 러시아 편에 섰던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러시아가 패배하고 칸테미르가 추방된 후, 오스만 제국은 몰다비아 공작 계승권을 주장했다. 왈라키아에서도 슈테판 칸타쿠지노가 대튀르크 전쟁에서 사보이 공 외젠과 동맹을 맺으면서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다.

새로운 공작은 주로 수석 외교관(Dragoman) 출신으로, 오스만 정치와 정책에 정통했다. 이들은 뇌물로 지위를 얻었고, 가족, 총신, 채권자들과 함께 야쉬(몰다비아 공국의 수도)나 부쿠레슈티로 이동했다. 공작과 그 측근들은 빠른 보상을 기대하며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재산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두 공국을 통틀어, 파나리오테스 시대에는 11개 가문 출신 31명의 공작이 통치했다. 이들 중 다수가 추방되거나 처형되었으며, 7명은 비명횡사했다. 공작들의 불충 사례 때문에, 간택은 몇몇 가문으로 제한되었고, 통치자들이 한 공국에서 다른 공국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콘스탄디노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총 10번 통치했다. 이 빚은 술탄이 아닌 채권자들에게 진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공작을 중앙에서 임명하여 두 공국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려 했으며, 아흐메드 3세는 니콜라오스 마브로코르다토스의 뇌물 일부를 지불하기도 했다.
파나리오테스 시대는 오스만 제국의 필요와 군주들의 야심에 따라 재정 정책에 치우쳤다. 공작들은 오스만 궁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통치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강탈에 의존했고, 주민들은 가난에 빠졌다. 그러나 근대 루마니아 사료에서 파나리오테스의 잘못으로 여겨지는 가혹한 세금은 1580년 얀쿠 사술이 부과한 ''바카리트''(văcărit)처럼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파나리오테스 통치의 실수는 콘스탄디노스 마브로코르다토스(1746년 왈라키아, 1749년 몰다비아에서 농노제 폐지)나 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의 성취와 대조된다. 입실란디스는 법 체계를 개편하고 행정직에 봉급제를 도입하여 뇌물로 인한 예산 고갈을 막으려 했다. 그의 근대적인 법전인 ''프라빌니체아스카 콘디카''(Pravilniceasca condică)는 보야르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러한 조치의 초점은 국가 구조 개량에 있었다. 당시 문서에 따르면 디반(Divan) 구성원의 80%가 지역 가문 출신이었다.[49] 이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보야르들은 세금 면제를 위해 압력을 가했다.[50]
쿠추크-카이나르지 조약(1774년)으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면서, 오스만 궁정의 정치적 압박 수단이 무력화되었다. 오스만 궁정은 두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양보해야 했다. 이 조약은 연공 증가를 막았고, 1774년부터 1820년대까지 왈라키아의 연공은 금화(오스트리아 금화 통화와 동등한 기준) 50,000닢에서 20,000닢으로, 몰다비아는 3,100닢으로 줄었다.[51]
러시아는 새로운 특권을 이용했다. 왈라키아에서 콘스탄티노스 입실란디스가, 몰다비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무루시스가 프랑스 제국 특사 오라스 세바스티아니(Horace Sébastiani)의 요구로 술탄 셀림 3세에 의해 쫓겨나자, 1806년-1812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다(러시아 장군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밀로라도비치(Mikhail Andreyevich Miloradovich)는 왈라키아 원정에서 입실란디스를 복귀시켰다).
이는 러시아 속국 시대를 열었고, 1830년대 "조직화 법령(Organic Statute)"[52]으로 절정에 달했다. 다뉴브 공국들은 나폴레옹 전쟁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인해 중요성이 커졌다. 새로운 대사관이 설립되었고, 보야르(boyars)들은 오스만 궁정이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탄원했지만, 대부분 러시아 감독을 필요로 했다. 보야르들은 부패와 실정을 언급하면서도 보수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이들은 귀족제 공화정 설립을 희망했다.[54]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몰다비아 반란,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반란, 필리키 에타리아의 소란, 기카, 바카레스쿠(그리스계 파나리오테스), 골레스쿠 가문이 참여한 1820년 그리스계 공작들의 반란(그리스 독립 전쟁 참고)으로[55]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궁정의 신용을 잃으면서 파나르 사회 출신들의 출세가 사라졌다.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반란은 부쿠레슈티의 마지막 파나리오테스 군주 스카를라트 칼리마키의 즉위를 막으려는 보야르 섭정들과 올테니아 판두르들의 협력 결과였다.[56]
2. 2. 1. 루마니아 민족주의와의 대립
18세기 동안 파나리오테스는 총대주교청의 사무를 맡으며 세습적 관료 집단으로 성장했고, 오스만 제국 내에서 그리스인들의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외교관으로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의 업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4]파나리오테스는 오스만 행정부의 핵심 부서들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 이들은 제국의 세금 징수, 상업 독점 유지, 다양한 사업 계약, 궁정 식품 납품, 심지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공작직까지 맡았다. 또한, 흑해 밀 무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상업 활동을 헝가리 왕국과 중부 유럽으로 확장했다. 이를 통해 서유럽과의 접촉이 긴밀해졌고, 서유럽 언어와 문화에도 익숙해졌다.[39]
그리스 독립 전쟁 직전, 파나리오테스는 그리스 문화의 엘리트로 자리 잡았다. 그리스 역사가 콘스탄티노스 파파리요풀로스는 이들이 제국 관리 경험과 높은 교육 수준 덕분에 자연스럽게 이러한 위치에 올랐다고 평가했다.[38] 그러나 스보로노스는 파나리오테스가 정복자와 피정복자 간의 평화로운 공존만을 추구하여 민족 정체성이 계급 정체성에 종속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들이 그리스 민족 정체성 함양에 실패하고, 초기 클레프테스나 민병대와 같은 오스만 제국에 맞선 그룹의 기반을 잃게 했다고 주장했다.[45]
이 시기가 그리스인들이 두 공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18세기 이전에 공동체를 건설하고 통치자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파나리오테스 시대 이후, 1848년 왈라키아 혁명에서 급진적 민족주의자였던 C. A. 루세티가 속한 루세티(Russeti) 가문처럼 많은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출신 파나리오테스가 자신을 루마니아인으로 정체화하고 루마니아 사회에 남았다. 기카스(Ghicas) 가문도 마찬가지였다(1821년 이후 왈라키아 공으로 즉위한 그레고리 4세(Grigore IV)와 알렉산드루 2세(Alexandru II)는 최초의 '비(非)-파나리오테스' 공작으로 구분된다). 바카레스쿠(Vacarescu) 가문 역시 초기 루마니아 문학을 저술했다.
파나리오테스는 비(非)무슬림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직책과,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자치적인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도나우 공작령을 차지하려 했다.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곳을 상업 활동과 정치적 성장에 유리한 곳으로 여겼고, 혼인을 통해 왈라키아나 몰다비아 보야르 가문에 편입되었다.
지방 공작들의 통치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화된 루마니아 귀족 가문인 칼리마키스(Callimachis)와 라코비차스(Racoviţăs)는 파나르 지역에 침투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대부분의 사료는 1711년경 전통 제도의 점진적 침식이 최종 단계에 이르렀다고 동의하지만, 파나리오테스 시대의 특징은 그 이전부터 나타났다.[46] 오스만 제국은 15세기부터 군주 간택을 실시했고, 그리스인이나 레반트 출신 외국인 보야르들은 16세기 후반부터 지역 보야르들과 경쟁했다. 몰다비아의 칸타쿠지노(Cantacuzino)와 왈라키아의 그리스계 통치자 요르요스 두카스(1673년생) 이후, 가족 구성원 전원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양 공국의 전통적인 선거 제도는 장기간의 정치 불안을 야기했고, 소수 가문들이 권력 다툼을 벌였다.[47] 1711년까지 크라이오베슈티(Craioveşti) 가문과 칸타쿠지노 가문의 대립이 대표적이었다.
파나리오테스 시대는 오스만 제국의 필요나 군주들의 야심에 따라 지나치게 재정 정책에 치우쳤다. 오스만 궁정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자신의 통치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공작들은 강탈에 의존했고, 주민들을 가난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근대 루마니아 사료에서 파나리오테스의 잘못으로 정의된 가혹한 세금은 1580년 얀쿠 사술(lancu Sasul)이 부과한 ''바카리트''(văcărit)처럼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다.
파나리오테스 통치의 실수는 콘스탄디노스 마브로코르다토스(1746년 왈라키아, 1749년 몰다비아에서 농노제 폐지)나 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의 성취와 대조된다. 입실란디스는 법 체계를 개편하고 행정직에 봉급제를 도입하여 뇌물로 인한 예산 고갈을 막으려 했다. 그의 근대적인 법전인 ''프라빌니체아스카 콘디카''(Pravilniceasca condică)는 보야르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런 조치의 초점은 국가 구조 개량에 있었다. 리더십 변화와 보야르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당시 문서에 따르면 디반(Divan) 구성원의 80%가 지역 가문 출신이었다.[49] 이는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야기했다. 보야르들은 세금 면제를 위해 압력을 가했다.[50]
쿠추크-카이나르지 조약(1774년)으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면서, 오스만 궁정의 정치적 압박 수단이 무력화되었다. 오스만 궁정은 두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양보해야 했다. 이 조약은 연공 증가를 막았고, 1774년부터 1820년대까지 왈라키아의 연공은 금화(오스트리아 금화 통화와 동등한 기준) 50,000닢에서 20,000닢으로, 몰다비아는 3,100닢으로 줄었다.[51]
러시아는 새로운 특권을 이용했다. 왈라키아에서 콘스탄티노스 입실란디스가, 몰다비아에서 알렉산드로스 무루시스가 프랑스 제국 특사 오라스 세바스티아니(Horace Sébastiani)의 요구로 술탄 셀림 3세에 의해 쫓겨나자, 1806년-1812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했다(러시아 장군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밀로라도비치(Mikhail Andreyevich Miloradovich)는 왈라키아 원정에서 입실란디스를 복귀시켰다).
이는 러시아 속국 시대를 열었고, 1830년대 "조직화 법령(Organic Statute)"[52]으로 절정에 달했다. 다뉴브 공국들은 나폴레옹 전쟁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인해 중요성이 커졌다. 새로운 대사관이 설립되었고, 보야르(boyars)들은 오스만 궁정이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탄원했지만, 대부분 러시아 감독을 필요로 했다. 보야르들은 부패와 실정을 언급하면서도 보수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이들은 귀족제 공화정 설립을 희망했다.[54]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몰다비아 반란과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반란, 필리키 에타리아의 소란, 기카, 바카레스쿠(Vacarescu;그리스계 파나리오테스), 골레스쿠 가문이 참여한 1820년 그리스계 공작들의 반란(그리스 독립 전쟁 참고)으로[55]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궁정의 신용을 잃으면서 파나르 사회 출신들의 출세가 사라졌다.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반란은 부쿠레슈티의 마지막 파나리오테스 군주 스카를라트 칼리마키( Scarlat Callimachi)의 즉위를 막으려는 보야르 섭정들과 올테니아 판두르(Oltenian panders)들의 협력 결과였다.[56]
몰다비아의 이오안 스투르자(Ioan Sturdza)와 왈라키아의 게오르기 4세 기카는 새로운 시대의 첫 군주로 평가된다. 새로운 통치 체제는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에 점령당하고, 러시아 영향권 아래 놓인다(조직화 법령 보기).
대부분의 파나리오테스는 그리스 문화, 교육, 미술의 후원자였다. 이들은 정교회 사회 전체의 교육자와 학생들을 매료시킨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합스부르크 군주국 등의 지적 사조와 접촉했다.[31] 많은 파나리오테스 군주들이 유능했다. 콘스탄디노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1746년(왈라키아), 1749년(몰다비아)에 농노제를 폐지했고, 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재위: 1774~1782)는 행정, 법률 개혁을 주도했다. 그의 통치는 경제, 사회 변화와 서구화 개혁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정신적, 지적 영감의 등장이었다.[57]
파나리오테스에 대한 비판은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통합한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초점이었다. 이 풍조는 친/반 근대화 세력을 통합했다. 파나리오테스 그리스인들은 잔혹하고 기회주의적인 변화의 상징(미하이 에미네스쿠(Mihai Eminescu)의 ''Scrisoarea a III-a'')이자 반동적 요소(루마니아 사회주의자들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3. 주요 가문
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정책과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 고위직을 맡은 파나리오테스 가문들은 막대한 부와 영향력을 가졌다. 1669년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1821년)까지 그리스인들은 높은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오스만 정부에서 드라고만(중동-유럽 간 통역사)이나 대사관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교회 성직자, 지역 유지, 대상인 출신으로, 그리스 독립 전쟁 이전 오스만 통치 기간 동안 교육받은 그리스인 계급을 대표했다.[33] 파나리오테스는 그리스 독립 전쟁(1821~1829) 동안 그리스 의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33][38]
1711년~1716년부터 1821년까지 파나리오테스 가문 중 상당수는 외교관(Dragoman) 직책에 대한 보상으로 도나우 공국(몰다비아, 왈라키아)의 군주(Hospodar; 보이보데 혹은 공)직을 맡았다.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파나리오치 시대'''라고 부른다.[31]
다음은 주요 파나리오테스 가문이다. (각 가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위 섹션인 '주요 가문 목록' 참고)
- '''그리스계'''
- 아르이로풀로스
- 카라쟈스
- 마노스
- 마브로코르다토스
- 마브로예니스
- 무수로스(Mousouros)
- 입실란티스
- 블라스토스
- '''루마니아계'''
- 칼리마키스
- 칸타쿠지노
- 라코비자
- 로세티스
- 바카레스쿠
- '''알바니아계'''
- 기카스
- '''아로마니아계'''
- 수초스
- '''트라페주스 제국계'''
- 무루시스
3. 1. 주요 가문 목록
다음은 주요 파나리오테스 가문 목록이다.가문명 | 설명 |
---|---|
아르이로풀로스 | 그리스 혈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오래 거주했다. 비잔티움 제국 시절 명망있는 학자, 관료 가문 출신이었다. 제국 멸망 후에는 러시아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의 사절로 활약했다. 요안네스 아르이로풀로스(1418~1487)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르네상스를 이끈 학자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이탈리아에서 유명했다.[29] |
칼리마키스 | 원래 몰다비아의 루마니아 귀족 가문으로, 베사라비아(몰도바 공화국) 출신이다. 본래 루마니아어 이름은 칼마쉴(Călmaşul)이며, 칼리마키스를 루마니아 식으로 부른 것이 칼리마키(Callimachi)이다. 칼리마키스는 파나리오테스 일원이 되기 위해 헬레니즘화한 그리스식 성이다.[29] |
칸타쿠지노 | 원래 왈라키아의 루마니아계 귀족 가문으로, 요안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의 후손이라 주장했다(사실상 혈연 관계는 없다는 것이 정설). 비잔티움 황실 칸타쿠제노스 가문은 제국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에 잔류한 사람들은 루마니아에 주로 이주했고, 러시아 제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혈통이 단절되고 서유럽과 미국에만 2개의 분가가 거주한다.[29] |
카라쟈스 | 슬라브인이나 루마니아가 부르는 이름은 카라쟈스, 그리스어로는 카라짜스(Karatsas 혹은 카라자스 Karatzas)이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시절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거주한 그리스계 혈통이다.[29] |
기카스 | 마케도니아 출신 알바니아 가문. 기카(Gjika)는 오스만 제국 시대 알바니아인들 사이에서 흔한 성씨였다. 왈라키아의 기카스 공가(公家) 시조 게오르게 기카는 왈라키아 수도를 타르고비슈테에서 부쿠레슈티로 옮겼다. 루마니아 역사상 매우 중요한 가문으로, 파나리오테스의 중요한 일원임에도 루마니아의 파나리오테스 시대를 끝낸 가문으로 평가받는다.[29] |
마노스 | 그리스 혈통으로, 19세기에 활발하게 활동한 가문이다. 그리스 국왕 알렉산드로스 1세의 왕비 아스파시아 마노스를 배출했다.[29] ![]() |
마브로코르다토스 | 그리스 혈통으로, 루마니아어로는 마브로코르다트(Mavrocordat), 터키어로는 마브로코르다토(Mavrocordato)이다. 최고의 파나리오테스 가문으로, 오스만 제국의 다뉴브 공작 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1세로부터 제국 백작(Reichsgraf) 작위를 받았다. 루마니아, 그리스, 터키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리스 총리도 여러번 역임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에 외교관으로 관여했다.[29] ![]() |
마브로예니스 | 그리스 혈통으로, 구성원 중 한 명이 왈라키아 공작을 역임했다. 만토 마브로예네스(Manto Mavrogenes)는 그리스 독립 전쟁의 여걸이다. 마브로게네스라고도 불리나, 비잔티움이나 고전식 발음이다.[29] |
무루시스 | 루마니아어로는 모루지(Moruzi)이다. 트라페주스 제국 귀족 출신 가문으로,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왈라키아에 이주하여 정치 활동을 펼쳤다.[29] |
무수로스(Mousouros) | 그리스 학자 가문으로, 크레타 섬 출신이다.[29] |
라코비자 | 루마니아어로는 라코비차(Racoviţă)이다. 왈라키아 보야르 가문 출신으로, 현재까지 혈통이 이어진다.[29] |
로세티스 | 루세트(Ruset), 루세티(Russeti)라고도 불리는 왈라키아 출신 가문이다.[29] ![]() |
수초스 | 수조스(Soutzos)라고도 하며, 아로마니아인(Aromanian) 출신이다. 루마니아어로는 수추(Suţu)이다. 아로마니아인은 루마니아인이지만 비잔티움 제국 시기 그리스 지역, 테살리아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테살리아에 공동체를 이루고 루마니아와 긴밀히 연락하며 동질감을 느낀다. 역사적으로 그리스인에게 호의적이며, 타국 지배자보다 비잔티움 제국에 충성했다.[29] |
입실란티스 | 그리스계 혈통으로, 루마니아어로는 입실란티(Ipsilanti)이다. 트라페주스 제국과 가까운 흑해 남안 출신이다. 오스만 제국 시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하여 오스만 제국 후기 가장 영향력 있는 파나리오테스 가문 중 하나였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작을 오가며 활약했고,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 시 가문 힘을 그리스 독립군에 쏟아부어 신생 그리스 왕국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군대에 봉사한 경험으로 필리키 에타리아를 결성했다.[29] |
바카레스쿠 | 루마니아인이지만 그리스인 후손이다. 팔라이올로고스 황가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자칭으로 추정된다. 팔레올로그(Paléologue)로 성을 바꾸는 사람도 나온다. 루마니아 독립 후 루마니아에 잔류하여 문필가로 활약했다.[29] ![]() |
블라스토스 | 그리스인 혈통으로, 서기 1세기 로마에서 이주한 귀족 후손이라고 한다. 파나리오테스 중 가장 오랜 전통을 가졌으며, 11세기 문헌에 비잔티움 장교로 복무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입지를 굳혔다고 나타난다.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때도 거주했다. 오스만 제국 내에서는 문인, 의사, 학자로 일했으며, 현재는 이스탄불보다 크레타와 키오스 섬에 주로 거주한다.[29] |
4. 그리스 독립 전쟁과 몰락
17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에서 고위 관직을 맡으며 부와 영향력을 누렸던 파나리오테스는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33] 교육 수준이 높았던 이들은 오스만 정부에서 통역관이나 외교관으로 활동했고, 교회 성직자, 지역 유지, 대상인 출신으로서 그리스 사회를 대표했다.[33]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파나리오테스는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총 6번 열린 그리스 혁명 대표 기구인 그리스 국민 의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33][38]
1711년(또는 1716년)부터 1821년까지 파나리오테스 중 다수는 도나우 공국(몰다비아, 왈라키아)의 군주(Hospodar; 보이보데 혹은 공)로 임명되기도 했다.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파나리오치 시대'라고 부른다.[31] 1774년 쿠추크-카이나르지 조약으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 내 정교도 문제에 개입할 수 있게 되면서 오스만 궁정의 정치적 도구는 유명무실해졌다. 오스만 궁정은 두 공국을 유지하기 위해 양보해야 했고, 조약으로 연공이 줄었다.[51] 러시아는 이 특권을 이용해 콘스탄디노스 입실란디스와 알렉산드로스 무루시스를 셀림 3세에 의해 쫓겨나게 했고, 이는 1806년-1812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러시아의 속국 시대를 열었고, 1830년대 "조직화 법령"[52]으로 정점에 달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오스만 제국의 쇠퇴로 다뉴브 공국은 중요해졌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유럽 국가들이 관심을 가졌다. 러시아-터키 관계를 감시하기 위해 새로운 대사관이 설립되었고, 보야르들은 오스만 궁정이나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구애했지만, 대부분 러시아의 감독을 필요로 했다.[53] 보야르들은 귀족제 공화정 설립을 소망하며 개혁 시도를 의심했다.[54]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몰다비아의 반란,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가 이끈 왈라키아의 반란, 필리키 에타리아에 의한 소란, 그리스계 공작들의 반란(1820년, 그리스 독립 전쟁 참고)으로[55]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궁정의 신용을 잃으면서 파나리오테스의 출세는 사라졌다.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반란은 올테니아 판두르와 섭정들의 협력으로, 스카를라트 칼리마키의 즉위를 막으려 했다.[56] 이오안 스투르자와 게오르기 4세 기카는 새로운 시대의 첫 군주로 평가되지만, 러시아-투르크 전쟁으로 러시아에 점령당하고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놓인다.
대부분의 파나리오테스는 그리스 문화, 교육, 인쇄술의 후원자였다. 정교회 사회 전체의 교육자들과 학생들을 매료시킨 아카데미를 설립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이나 중부 유럽의 지적인 사조와 접촉했다.[31] 콘스탄디노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1746년(왈라키아), 1749년(몰다비아)에 농노제를 폐지했고, 알렉산드로스 입실란디스(재위: 1774~1782)는 행정 및 법률 개혁을 주도했다. 그의 통치는 경제와 사회 변화, 서구화 개혁에 초점을 맞춘 정신적, 지적인 영감의 등장이었다.[57]
파나리오테스에 대한 비판은 루마니아 민족주의의 초점이었고,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통합했다. 이 풍조는 친 혹은 반 근대화 세력을 통합했다. 파나리오테스 그리스인들은 잔혹하고 기회주의적인 변화의 상징(미하이 에미네스쿠의 ''Scrisoarea a III-a'')이자 반동적 요소(루마니아 사회주의자들에게 부여받은 이미지)로 묘사된다.
18세기 말경, 서유럽 제국의 외교관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던 파나리오테스 사이에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 민족으로서의 자각을 갖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필리키 에테리아가 1821년 루마니아에서 봉기한 것을 계기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인이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1830년 그리스 왕국으로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독립 전쟁 관여는 파나리오테스에 대한 제국의 신뢰를 잃게 했고, 루마니아 양 공국의 공 임명도 중단되었다. 그리스 독립 이후, 많은 파나리오티스가 이스탄불을 떠나 그리스로 이주했다. 오스만 제국은 파나리오티스를 대신할 통역관으로서 무슬림, 튀르키예인 관료에게 프랑스어 등 유럽 언어와 학문을 가르쳤고, 이들은 탄지마트의 주역으로 제국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스탄불에서의 금융업은 아르메니아인이 이어받아 19세기 말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맞이한다.
4. 1. 필리키 에타리아 (Filiki Eteria)
오스만 제국에 대한 몰다비아의 반란과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가 이끈 왈라키아의 반란에 이어 필리키 에타리아에 의해 일어난 소란과 함께 기카 가문, 바카레스쿠 가문, 골레스쿠 가문이 적극적인 구성원이 되어 그리스계 공작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1820년(그리스 독립 전쟁 참고) 이후,[55] 그리스인이 오스만 궁정의 신용을 잃음에 따라 파나르 사회에 속한 사람의 출세가 사라졌다.1820년 이후 그리스 공작들이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필리키 에타리아 (기카, 바카레스쿠, 골레스쿠 가문이 회원으로 활동)[26]는 몰다비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봉기하고,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의 왈라키아 봉기가 일어나면서 파나르 공동체 출신자들의 승진이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그리스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27]
5. 유산
파나리오테스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이스탄불의 파나르(Phanar,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페넬) 지역에 거주하며 부와 영향력을 쌓은 그리스인 가문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이 파나르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이 지역에 모여 살게 되었고, 금융업과 오스만 제국 관료로 봉사하며 귀족적인 계층으로 성장했다.[4]
17세기부터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한 1821년까지, 파나리오테스는 오스만 제국의 드라구만(중동인과 유럽인 사이의 통역사)이나 대사관 직원으로 활동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높은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오스만 정부와 외국 외교 공관 사이의 소통을 담당했다.[33]
1711년부터 1821년까지는 도나우 공국(몰다비아와 왈라키아)의 군주(보이보데 혹은 공)직을 맡기도 했다. 루마니아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파나리오치 시대'라고 부른다.[31] 파나리오테스 군주들은 그리스 문화, 교육, 예술을 후원했으며, 동방 정교회 사회에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서유럽의 지적 사조를 받아들였다.[31] 콘스탄디노스 마브로코르다토스는 1746년(왈라키아)과 1749년(몰다비아)에 농노제를 폐지했고,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는 행정 및 법률 개혁을 추진하는 등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57]
그러나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파나리오테스는 오스만 제국의 신뢰를 잃고 몰락했다. 필리키 에타리아의 봉기와 왈라키아 봉기에 파나리오테스 가문들이 연루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이들을 요직에 등용하지 않았다.[55][56]
그리스 독립 전쟁 이후, 많은 파나리오테스 가문은 그리스 왕국으로 이주했다. 오스만 제국은 파나리오테스를 대신하여 튀르키예인 관료에게 유럽의 언어와 학문을 가르쳐 탄지마트 개혁을 추진하게 했다.
파나리오테스에 대한 평가는 루마니아 민족주의에서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이들은 외국인 지배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근대화와 개혁을 추진한 주역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미하이 에미네스쿠와 같은 루마니아 문학 작품에서는 파나리오테스가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이들의 역사적 역할은 복합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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