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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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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이초 사절단은 1613년 다테 마사무네가 파견한 일본 사절단으로, 루이스 소테로를 정사로,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부사로 하여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스페인, 로마를 방문했다. 사절단의 주요 목적은 센다이 번과 스페인 간의 통상 교섭이었으나, 루이스 소테로의 선교 목적도 있었다. 사절단은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본인이 유럽에 파견한 최초의 외교 사절단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사절단의 여정, 로마 시민권 증서, 초상화 등 관련 자료는 센다이 시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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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초 사절단
게이초 겐오 시세쓰
하세쿠라 쓰네나가
하세쿠라 쓰네나가
파견 시기1613년 - 1620년
파견 주체센다이 번
목적지에스파냐 왕국
주요 인물하세쿠라 쓰네나가
관련 인물다테 마사무네
루이스 소테로
배경
시대적 배경에도 시대 초기
파견 이유다테 마사무네의 에스파냐와의 직접 무역 추진
기독교 포교 승인 요청
여정
출발지일본, 오슈, 쓰키노우라
경유지누에바에스파냐 (현재의 멕시코)
에스파냐
로마
귀환지일본
결과 및 영향
교역 실패에스파냐와의 교역 협상 결렬
기독교 탄압 심화에도 막부의 기독교 금교 정책 강화
문화 교류유럽 문화의 일본 소개
외교 관계 변화일본의 쇄국 정책 강화에 영향
기타
기념이탈리아, 치비타베키아에 하세쿠라 쓰네나가 기념비 건립

2. 역사적 배경

대항해 시대에 유럽의 여러 나라는 세계 각지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포르투갈이 이러한 활동을 주도하며 아시아 지역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1] 스페인은 필리핀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거점으로 삼았다. 한편, 개신교 국가인 영국네덜란드도 뒤늦게 아시아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일본의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 호를 타고 일본에 표착한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미우라 안진)를 외교 고문으로 삼아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게이초 14년(1609년) 전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 돈 로드리고가 탄 배가 일본 해안에 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게이초 16년(1611년)에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친서를 가진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가 답례 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스페인의 가톨릭 포교 요구가 장차 일본의 식민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4][5] 스페인과의 전면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는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러한 국제 정세와 일본 내부의 상황은 다테 마사무네가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모색하는 배경이 되었다.

2. 1. 사절단 파견 목적

대항해 시대에 유럽 세력은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는데,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포르투갈이 선두에 있었다.[1] 스페인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아 이익을 얻었고,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뒤늦게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개신교 국가 영국네덜란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네덜란드 상선 리프데 호로 분고국(현 오이타현)에 표착한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미우라 안진)를 외교 고문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게이초 14년(1609년) 전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 돈 로드리고가 탄 산 프란시스코 호가 가즈사국 이와와다 촌(현 오노주쿠 정)에 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게이초 16년(1611년)에는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가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친서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했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스페인 측이 요구하는 가톨릭 포교를 허용할 경우, 이것이 스페인의 식민지화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윌리엄 애덤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전면적인 외교 관계 수립에는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로부터 허가를 받아 독자적으로 유럽에 사절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게이초 사절단의 주된 목적은 센다이 번과 스페인 간의 직접적인 통상 교섭을 여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른 목적에 대한 여러 가지 설도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마사무네가 스페인과 군사 동맹을 맺고, 이를 이용해 에도 막부를 타도하려 했다는 주장(도바쿠(일본어: 倒幕))도 제기되었으나[2][3],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4][5] 한편, 사절단의 정사였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테로가 자신의 선교 활동 확대를 위해 마사무네의 권위를 이용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5]

사절단 파견을 위해 마사무네는 센다이 영내에서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의 기술 협력을 받아 직접 갤리언선인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건조했다. 이 배의 건조에는 에도 막부에서 파견된 목수들도 참여했다.[6] 당시 세계 최대의 식민 제국이었던 스페인은 갤리언선 건조 기술을 국가 최고 기밀로 취급하여 외국에 기술을 누설한 자는 사형에 처할 정도로 보안에 신경 썼다. 마사무네는 루이스 소테로를 정사(정식 사절 대표)로, 자신의 가신인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부사로 임명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180여 명의 사절단을 누에바 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 스페인 본국 및 로마로 파견했다.

3. 사절단의 여정

게이초 사절단은 1613년 10월 28일(게이초 18년 9월 15일)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를 타고 일본 쓰키노우라(현재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를 출발하여 태평양을 건넜다. 약 3개월 후인 1614년 1월 28일 누에바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의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이후 멕시코시티를 거쳐 같은 해 6월 10일 대서양 연안의 베라크루스에서 스페인 함대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다.

쿠바아바나를 잠시 거쳐 1614년 10월 5일 스페인 남부의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 도착했으며, 세비야를 거쳐 12월 20일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1615년 1월 30일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했다. 같은 해 8월 22일 마드리드를 떠나 10월 25일 로마에 도착하여 11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했다.

1616년 1월 7일 로마를 출발하여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가, 1617년 7월 4일 세비야를 떠나 누에바에스파냐로 귀환길에 올랐다. 1618년 4월 2일 마중 나온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아카풀코를 출항, 같은 해 8월 10일 필리핀마닐라에 도착했다.

쓰네나가는 마닐라에서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매각한 후 다른 배편으로 1620년 9월 20일(겐나 6년 8월 24일) 일본에 귀국했으나, 1622년 8월 7일(겐나 8년 7월 1일) 사망했다. 한편, 사절단을 이끌었던 소테로 신부는 1622년 10월 22일(겐나 8년 9월 18일)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체포되어 1624년 8월 25일(간에이 원년 7월 12일) 나가사키현 오무라에서 화형으로 순교했다.

3. 1. 일본 출발 및 누에바에스파냐 체류

게이초 사절단은 1613년 10월 28일(게이초 18년 9월 15일)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를 타고 오시카 반도의 쓰키노우라(현재의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를 출항하여 누에바에스파냐(현재의 멕시코) 태평양 연안의 아카풀코로 향했다.

출항 약 3개월 후인 1614년 1월 28일, 사절단은 아카풀코에 도착했다. 3월 4일에는 사절단의 선발대가 멕시코시티에 먼저 도착했다. 그러나 선발대 소속 무사 일부가 멕시코시티에서 현지인과 마찰을 빚어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쓰네나가를 포함한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무기를 압수당하는 일을 겪었다. 3월 24일, 쓰네나가를 포함한 본대가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사절단은 멕시코시티에서 약 두 달간 머무른 뒤, 5월 8일에 출발하여 대서양 연안으로 이동했다. 6월 10일, 사절단은 스페인 함대의 산 호세 호를 타고 누에바에스파냐의 베라크루스 항구인 산 후안 데 울루아에서 스페인을 향해 출항했다.

3. 2. 에스파냐 체류

1614년 6월 10일, 사절단은 에스파냐 함대의 산 호세 호를 타고 누에바 에스파냐대서양 연안 베라크루스에 있는 산 후안 데 울루아 요새 항구를 출발하여 유럽으로 향했다. 항해 도중 7월 23일에는 쿠바아바나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고, 8월 7일에 다시 출항했다.

약 2개월간의 항해 끝에 10월 5일, 사절단은 에스파냐 남부의 항구 도시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 도착했다. 이후 사절단을 안내한 소테로 신부의 연고지인 세비야로 이동했다. 10월 27일, 쓰네나가는 세비야 임시 시의회에 참석하여 사절단의 목적을 설명했다. 세비야에서 약 한 달 반 정도 머무른 뒤, 11월 25일에 사절단은 수도 마드리드를 향해 출발했다.

12월 20일, 사절단은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1615년 1월 30일, 쓰네나가를 비롯한 사절단 대표들은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했다. 이후 2월 17일, 쓰네나가는 펠리페 3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왕립 수도원 부속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에스파냐에서의 주요 임무를 마친 사절단은 8월 22일, 로마로 가기 위해 마드리드를 떠났다.

3. 3. 로마 체류

1615년 10월 25일, 사절단은 로마에 도착했다. 10월 29일에는 로마에서 영예로운 입성식을 거행했다. 11월 3일, 쓰네나가와 소테로 등 사절단 대표들은 교황 바오로 5세를 알현하였다. 이어 11월 20일, 쓰네나가를 비롯한 사절단 일원들에게 로마 시민권 증서가 수여되었다. 사절단은 1616년 1월 7일까지 로마에 머물다가, 다시 스페인세비야로 향했다.

3. 4. 귀국

1616년 1월 7일, 사절단은 로마를 출발하여 다시 스페인세비야로 향했다. 1617년 7월 4일, 사절단은 세비야를 떠나 누에바에스파냐로 돌아왔다.

1618년 4월 2일, 사절단을 마중 나온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타고 아카풀코를 출항하여 같은 해 8월 10일 필리핀마닐라에 도착했다. 쓰네나가는 마닐라에서 산 후안 바우티스타 호를 매각하고, 편선을 이용하여 겐나 6년 8월 24일 (1620년 9월 20일) 일본으로 귀국했다. 쓰네나가는 귀국 2년 후인 겐나 8년 7월 1일 (1622년 8월 7일)에 사망했다.

4. 결과 및 영향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로마 시 시민권 증서 (센다이시 박물관 소장)


다테 마사무네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서신


사절단의 주요 목적이었던 스페인과의 통상 교섭은 일본 내에서의 기독교 탄압 강화로 인해 성공하지 못했다.[5]

사절단의 부사였던 하세쿠라 쓰네나가겐나 6년(1620년) 마닐라를 거쳐 귀국했으나, 당시 일본은 에도 막부의 방침에 따라 기독교 금지 시대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귀국 2년 후 실의 속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미야기현 센다이시의 고묘지에 있다. 로마에서 세례를 받고 기리시탄이 된 쓰네나가는 평생 기독교 신앙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아들 시대에는 가신의 기독교 신앙이 발각되어 가문이 일시적으로 단절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사절단의 정사였던 루이스 소테로는 겐나 8년(1622년) 기독교 금지령 하의 일본에 잠입하려다 체포되었고, 간에이 원년(1624년) 화형에 처해졌다.

비록 외교적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게이초 사절단은 "일본인이 처음으로 유럽의 나라에 가서 외교 교섭을 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9] 하세쿠라 쓰네나가는 "처음으로 태평양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일본인"으로 기록되었다.

사절단의 존재는 일본 내에서 점차 잊혔으나, 에도 막부 붕괴 후 메이지 신정부가 파견한 이와쿠라 사절단이 유럽에서 쓰네나가 등의 유적을 발견하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서구 문물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던 메이지 신정부의 수뇌들은 250여 년 전 일본의 외교 사절이 유럽에서 외교 교섭을 하고 로마까지 다녀갔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다고 한다.

다테 마사무네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서신, 교황 바오로 5세의 초상화,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초상화와 로마 시민권 증서, 쓰네나가가 유럽과 필리핀 등지에서 가져온 물품 등 사절단 관련 자료들은 현재 센다이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게이초 켄오 사절 관계 자료'[10]로서, 역사 자료로는 일본 최초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2013년 6월 18일에는 미도 간파쿠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11]

이 사절단과 관련 유물들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멀리 떨어진 동방에 고도의 문화와 기술을 가진 나라가 존재함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일행의 당당한 태도는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일례로 그들이 일본 종이(시로이시 화지)로 코를 풀고 버리자 유럽인들이 그 종이를 얻으려고 몰려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12]

'''"게이초 켄오 사절 관계 자료"(센다이시 박물관 소장, 국보)의 이미지'''

(위부터)단검(크리스형), 동 칼집, 단검(호권부)


하세쿠라 쓰네나가상


십자가와 메달


묵주

5. 관련 유물 및 기록

센다이시 박물관에는 게이초 사절단과 관련된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이는 "게이초 켄오 사절 관계 자료"[10]로 불린다. 이 자료들은 역사 자료로서는 일본 최초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2013년 6월 18일, "게이초 켄오 사절 관계 자료"는 미도 간파쿠기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11]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자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사절단이 7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 일본으로 가져온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로마시 공민증서, 쓰네나가의 초상화, 그리고 교황 바오로 5세의 초상화 등이다. 둘째는 스페인의 기록보관소 두 곳에 보관되어 있는 사절단 관련 문헌 94점으로, 여기에는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스페인 국왕에게 보낸 여러 편지들과 스페인 및 로마 체류에 관한 상세한 기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센다이시 박물관에 소장된 주요 유물은 다음과 같다.


  • 다테 마사무네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서신
  • 하세쿠라 쓰네나가 관련 유물: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멀리 떨어진 동양에도 고도의 문화와 기술을 가진 나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하세쿠라 쓰네나가를 비롯한 사절단 일행의 당당한 태도와 행동은 유럽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예를 들어, 그들이 일본 종이(시로이시 화지)로 코를 푼 뒤 버리자, 유럽인들이 그 종이를 주우려고 몰려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2]

6. 현대의 교류

게이초 견 유럽 사절단은 에스파냐 남서부 도시 세비야 근처에 있는 코리아 델 리오에 장기간 체류했다. 이 작은 항구 도시에는 다테 무네나리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이 마을에는 하폰(Japón) 또는 Xapón 성을 가진 수백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사절단 중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정착한 가톨릭 신자인 센다이 번의 번사, 사절단의 현지인 뱃사공, 그리고 그들을 지원했던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하폰의 표기 중 Xapón은 에스파냐 북부 갈리시아 지방의 갈리시아어에서도 사용되는 표기이다.

1996년, 주 에스파냐 일본 대사였던 사카모토 주타로가 라디오를 통해 호소하여 하폰 성을 가진 주민 650명과 사절단 파견에 관여했던 우라센케 관계자들을 모아 세비야에서 "하폰 파티"를 개최했다.[13]

2013년 6월, 일본과 에스파냐의 국교 수립 400주년을 기념하여 당시 일본의 황태자가 코리아 델 리오를 방문하여 기념 식수 행사를 가졌다.[14][15]

2014년 7월, 게이초 견구 사절단 출범 4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미야기현 내의 고등학생 10명 등으로 구성된 "헤이세이 청소년 견구 사절단"이 에스파냐를 방문하였다.[16]

참조

[1] 문서 南蛮人
[2] 서적 支倉常長 慶長遣欧使節の悲劇
[3] 논문 伊達政宗羅馬遣使の目的 1901
[4] 서적 伊達政宗の研究 吉川弘文館 2008
[5] 문서 松田(1987)
[6] 문서 松田(1987)
[7] 문서 高山右近
[8] 문서 大坂夏の陣
[9] 문서 徳川秀忠がムニョス神父に託した手紙
[10] 웹사이트 慶長遣欧使節関係資料 https://bunka.nii.ac[...]
[11] 웹사이트 「御堂関白記」及び「慶長遣欧使節関係資料」のユネスコ記憶遺産登録審議結果について http://www.mext.go.j[...] 文部科学省 2013-06-19
[12] 문서 常長が鼻をかんだ懐紙
[13] 뉴스 朝日新聞 1994-12-02
[14] 웹사이트 皇太子さまのスペイン訪問決定 http://www.jiji.com/[...] 時事通信社 2013-05-21
[15] 웹사이트 皇太子さま、スペインで桜植樹 支倉常長ゆかりの地 https://web.archive.[...] 共同通信 2013-06-14
[16] 뉴스 平成遣欧使節団いざ出帆 大使に抱負 http://www.kahoku.co[...]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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