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역사
1. 개요
필리핀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어, 칼라오 동굴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의 유해와 타본 동굴의 유물들을 통해 초기 인류의 흔적을 보여준다. 네그리토와 오스트로네시아인의 도래, 그리고 인도 문화의 전파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었다. 고대에는 톤도 왕국과 같은 정치체가 등장하여 해상 무역을 통해 번성했으며, 14세기에는 이슬람교가 유입되었다.
16세기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시작으로, 필리핀은 갤리온 무역의 중심지이자 스페인령 동인도의 일부가 되었다. 스페인 통치에 대한 저항과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으로의 지배권 이전을 거쳐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 통치 시기에는 자치령 정부인 필리핀 코먼웰스가 수립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점령을 겪었다.
1946년 독립 이후 필리핀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적 불안정, 공산주의 반란,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변화를 겪었다.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인권 탄압과 부패가 심화되었다. 1986년 피플 파워 혁명으로 민주주의가 회복되었고, 코라손 아키노 정부를 거쳐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2022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인 봉봉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재까지 제5공화국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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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사건 | 초기 호미닌 활동 호모 루조넨시스 타본인 오스트로네시아 확장 앙고노 암각화 랄로 및 가타란 조개 무덤 비취 문화 사후인 문화 식민지 이전 바랑가이 해상 실크 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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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유물 | 발랑가이 코르딜레라 계단식 논 무덤 용품 칼라나이 동굴 마이툼 인형 모양 도자기 마눙굴 항아리 선사 시대 구슬 조개 도구 |
| 역사적으로 기록된 국가/정치 체제 (북쪽에서 남쪽으로) | 팡가시난 카인타 톤도 나마얀 마닐라 이발론 마이 풀릴루 산다오 마드자-아스 세부 보홀 부투안 산말란 마긴다나오 술탄국 부아얀 술탄국 라나오 술탄국 술루 술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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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사건/유물 | 마라가타스 라구나 동판 비문 부투안 상아 도장 캄한틱 석회암 무덤 카바얀 미라 바 이 바인 바타네스 이장 요새 아구산 황금 타라 몬레알 돌 부투안 은색 고문자 필론시토스 교환 반지 루조네스 마젤란 탐험 막탄 전투 |
| 주요 사건 |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의 항해 산두고 세부 조약 세부 봉쇄 스페인의 마닐라 점령 방쿠사이 전투 누에바에스파냐 스페인령 동인도 총독령 톤도 음모 마닐라 갤리온 반란 및 봉기 스페인 식민지화에 대한 이고로트 저항 스페인-모로 분쟁 라 나발 데 마닐라 전투 영국 침공 선전 운동 1872년 카비테 반란 라 리가 필리피나 카티푸난 푸가드 라윈의 외침 필리핀 혁명 테헤로스 협약 비악나바토 공화국 미국-스페인 전쟁 파리 조약 (1898) 마닐라 만 해전 독립 선언 미국의 마닐라 점령 말로로스 의회 제1공화국 필리핀-미국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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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유물 | 복서 코덱스 기독교 교리 UST 바 이 바인 문서 벨라르데 지도 |
| 주요 사건 | 타갈로그 공화국 네그로스 공화국 잠보앙가 공화국 군정 모로 반란 제도 정부 존스 법 타이딩스-맥더피 법 자치령 제2차 세계 대전 일본 점령 바탄 전투 코레히도르 전투 제2공화국 필리핀 저항 후크발라합 레이테 만 해전 필리핀 전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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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사건 | 제3공화국 마닐라 조약 상호 방위 조약 후크발라합 반란 필리핀 우선 정책 북보르네오 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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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사건 | 공산주의 반란 모로 분쟁 계엄령 제4공화국 국민의 힘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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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사건 | 제5공화국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2000년 MILF에 대한 캠페인 제2차 국민의 힘 혁명 EDSA III 오크우드 반란 필리핀 마약 전쟁 영토 분쟁 마라위 포위전 방사모로 코로나19 범유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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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 고대 종교 통치자 왕비 행정 구역 농업 고고학 통신 분쟁 문화적 업적 식단과 건강 교육 경제 지리 역사학 언어 의학 군사 이름 정치 과학 기술 세계 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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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
북일로코스주
북일로코스주는 루손섬 북서쪽 끝에 위치하여 서필리핀해와 루손 해협에 접하고,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이어진 역사 속에서 저항과 변화를 겪었으며, 필리핀 독립 후에는 담배 산업 부흥과 마르코스 대통령의 고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농업, 어업, 가내 수공업이 주요 산업이고, 방기 풍력 발전소가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며, 일로카노어를 사용하고 로마 가톨릭과 아글리파야 교회가 주요 종교이다. -
아시아의 역사 -
연호
연호는 군주의 권위와 통치권을 상징하며, 군주의 즉위와 함께 사용되는 칭호로,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동아시아 국가들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는 일본, 중화민국, 북한 등에서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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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1920년대 아시아에서 근대 교육을 통해 새로운 사고방식과 문화를 선도한 여성을 지칭하는 신여성은, 특히 한국에서 여성주의 운동과 결합하여 여성 의식 개혁과 권익 향상에 기여했다. -
아시아 -
브루나이
브루나이는 보르네오 섬에 위치한 동남아시아 국가로, 이슬람 술탄국으로 독립하여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을 기반으로 높은 국민 소득을 유지하며, 국왕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입헌 군주국이다. -
아시아 -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을 포함하며 다양한 지형과 기후,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서의 역사, 그리고 지정학적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다.
2. 선사 시대
카가얀주 페냐블라카의 칼라오 동굴에서 67,000년 전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인 칼라오 원인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팔라완주의 타본 동굴에서는 약 1만 65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타본인의 인골과 석기, 박쥐나 작은 포유류 뼈 등이 발견되었다. 인골은 옹관에 담긴 채 매장되어 있었으며, 이를 중국 풍습의 영향으로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리살주에서는 기원전 3000년 이전의 앙고노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7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석기와 도살된 동물 유해 화석은 초기 인류의 존재를 증명한다. 코뿔소 뼈 근처에서 발견된 57개의 석기는 초기 인류가 골수를 얻으려고 뼈를 깨뜨렸음을 시사한다.
네그리토는 초기 정착민이었지만, 필리핀에 나타난 시기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최초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기원전 3000~2200년경에 필리핀에 도착하여 바탄 제도와 루손섬 북부에 정착했다. 그들은 초기 오스트랄로멜라네시아인 네그리토들을 동화시켜 다양한 비율의 유전자 혼합을 보이는 현대 필리핀 민족 집단을 형성했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은 "타이완 기원" 모델로, 신석기 시대에 타이완에서 시작된 해양 이동을 통해 인도-태평양의 섬들로 퍼져나간 오스트로네시아인의 확장을 따른다. 이들은 중국 남동부 해안의 장강 삼각주에 있는 신석기 시대 벼농사를 짓던 오스트로네시아 이전 문명에서 유래했는데, 여기에는 량주 문화, 험두 문화, 마지방 문화와 같은 문명이 포함된다.
2021년 유전자 연구는 적어도 5차례의 독립적인 초기 인류 이동의 증거를 발견했다. 루손과 민다나오에 있는 네그리토 집단은 하나의 파동에서 유래하여 나중에 갈라졌거나 두 개의 별개의 파동을 통해 갈라졌을 수 있다. 또 다른 네그리토 이동은 민다나오에 들어왔다. 두 개의 초기 동아시아 파동이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민다나오 내륙에 사는 마노보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술루 제도, 삼보앙가 반도, 팔라완의 사마-바자우와 관련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중국 남부 또는 타이완 출신의 오스트로네시아인은 적어도 두 개의 별개의 파동으로 들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기원전 1000년경까지 필리핀 제도의 주민들은 수렵 채집에 의존하는 부족, 전사 사회, 금권정치, 섬 간 해양 무역에 참여하는 항구 공국 등 여러 집단으로 나뉘어졌다. 기원전 1천년기에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초기 야금술이 해양 동남아시아 제도에 도달했다
서기 300~700년경에 발랑가이를 타고 여행하는 섬들의 항해민들은 말레이 제도의 인도화된 왕국과 인근 동아시아 공국과 무역을 시작하여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2.1. 네그리토의 도래
필리핀 제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인류 집단 중 하나는 네그리토이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오스트랄로이드 인종으로 분류되었으나, 최근 유전자 연구에서는 몽골로이드와 오스트랄로이드의 혼혈로 보는 견해도 있다. 네그리토가 필리핀 제도에 언제부터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2만 년 전쯤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카가얀주 페냐블라카의 칼라오 동굴에서는 67,000년 전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인 칼라오 원인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팔라완주의 타본 동굴에서는 약 1만 6500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타본만 인골과 석기, 박쥐나 작은 포유류 뼈 등이 발견되었다. 리살주에서는 기원전 3000년 이전의 앙고노 암각화가 발견되었는데, 이 암각화를 남긴 사람들은 네그리토나 오스트로네시아어족보다 먼저 필리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로 추측된다.
2.2. 오스트로네시아인의 도래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에 속하는 말레이 폴리네시아 어족 사람들이 기원전 4000년경 필리핀에 도래하였다. 이들은 네그리토를 산악 지대로 몰아내고 해안 지역에 정착했다. 원시 말레이인들은 간단한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3. 인도 문화의 도래
300년부터 700년경에는 동남아시아의 섬에서 해양 민족이 활약했으며, 이들은 인도 문화권의 불교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국과 자바섬의 마자파힛 왕국(모두 현 인도네시아)은 교역을 통해 문화를 전파했으며, 필리핀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오늘날 필리핀의 모국어인 타갈로그어에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단어가 많다.
3. 고대
필리핀의 고대 역사에 대한 기록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지리적 위치와 유물이 보존되기 어려운 열대 기후 때문에 매우 부족하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스페인 식민지 시대 이전의 필리핀 역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기도 한다.
남인도 팔라바 왕조와 북인도 굽타 제국 시대에 인도 문화가 필리핀으로 전파되면서 인도화된 왕국들이 세워졌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필리핀 문서인 라구나 구리판 명문은 카위 문자로 쓰여졌으며, 900년에 작성되었다. 이 문서에는 톤도의 통치자가 빚을 탕감해 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필리핀 사회에서 수학, 측정, 천문학 지식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문서에 나타난 산스크리트어 용어와 칭호는 당시 마닐라 만의 문화가 힌두교와 구말레이 문화가 혼합된 형태였음을 보여준다.
10세기 초부터 14세기 초까지의 부투안 출토 상아 인장과 16세기 초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바인 문자가 새겨진 칼라타간 항아리 등 카위 문자와 바이바인 문자가 새겨진 다른 유물들도 발견되었다.
1000년 이전에는 필리핀 군도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 국가는 없었지만, 여러 해양 사회가 존재했다. 이 지역은 다투, 왕, 라자, 술탄, 라칸 등이 통치하는 바랑가이라고 불리는 반자치적인 정착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푸가오와 망얀의 고지대 사회와 함께 여러 국가가 존재했다. 이들 중 일부는 스리비자야, 마자파힛, 브루나이와 같은 말레이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
3.1. 톤도 왕국
1990년 루손섬의 바에 호수(라구나 호수)에서 샤카 기원 822년(서기 900년)의 날짜가 새겨진 라구나 동판 비문이라는 금속판이 발견되었다. 카위 문자로 쓰여진 이 비문은 재판 기록의 일종으로, 당시 필리핀에 어느 정도 문명 사회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비록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필리핀에서 가장 오래된 고문서로 알려져 있다.
라구나 동판 비문에 따르면, 900년경 마닐라만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톤도 왕국은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이 비문에는 앙카탄 부인과 남와란의 아들 부카에게 장관급 채무 면제 증서를 증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후 중국이 해상 무역을 금지하자, 톤도 왕국은 밀수와 관련된 역할을 했다.
톤도 왕국은 중국,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영한 해양 국가였다. 중국 기록에는 “루송국”이 수도를 “톤도”(동도)에 둔다는 기록이 있으며, 몽골 제국에 패한 남송의 잔당이 바다를 건너 건국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3.2. 기타 고대 국가
982년 청나라 기록에 따르면, 필리핀으로 추정되는 '마일국' 상인들이 광저우를 방문했다.
14세기 후반, 이슬람교가 필리핀 남부에 전파되었다. 1380년 메카에서 온 마크둠 카림(Makhdum Karim)이 시무눌(Simunul, 현재 타위타위주, 술루 제도)에 이슬람교를 전파하고 필리핀 최초의 모스크인 셰이크 카리말 마크둠 모스크(Sheik Karimal Makdum Mosque)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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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루 제도에는 술루 왕국이 건국되었다. 1450년경 팔렘방에서 온 아부 바크르(Abu Bakr)(Sharif ul-Hāshim of Sulu)가 술루 왕국을 건국했다.
민다나오섬에는 마긴다나오 왕국이 건국되었다.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에는 조호르 왕국(현 조호르)에서 온 세리프 카분수완(Sharif Kabungsuwan)이 마긴다나오 왕국을 건국했다.
4. 스페인 식민지 시대 (1565-1898)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1521년 필리핀에 도착했을 당시, 그는 무력을 앞세워 필리핀 부족장들에게 스페인 왕에 대한 복속, 조공, 기독교 개종을 요구했다. 세부섬의 라자 후마본은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필리핀인으로 알려졌으나, 라푸라푸는 이를 거부하고 막탄 전투에서 마젤란을 살해했다.
이후 스페인은 1543년 루이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를 파견, 사마르와 레이테섬을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 라스 이슬라스 필리피나스(Las Islas Filipinas)로 명명했다. 1565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가 세부에 최초의 유럽인 거주지를 세우고, 1571년 마닐라 왕국과 톤도 왕국을 정복하여 마닐라를 스페인령 동인도의 수도로 삼았다. 라자 술라이만은 이에 저항했으나 방쿠사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스페인은 필리핀과 멕시코를 잇는 갤리온 무역을 시작했고, 필리핀 원주민은 엔코미엔다 제도 하에 가톨릭 선교를 강요받았으나, 이 제도는 17세기 전반에 폐지되었다. 필리핀 총독령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일부로서, 총독 아래 행정 조직이 체계화되었다.
1573년부터 갤리온 무역을 통해 중국 교역품이 멕시코로 수출되었다. 1585년 〈차이나 대왕국지〉에는 중국에서 필리핀으로 비단, 도자기 등이 싸게 들어오고, 필리핀에서 중국으로 금과 스페인 은화가 지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인선 무역으로 일본과 스페인 간 무역이 발전, 마닐라 등에 일본인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쇄국령으로 쇠퇴했다.
갤리온 무역으로 중국인, 일본인, 흑인 등이 마닐라에 유입되었고, 특히 중국인은 필리핀 식민지 경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도회 역시 갤리온 무역에 참여, 필리핀 식민지 경제를 지원했다. 그러나 스페인 본토에서 필리핀으로의 이주는 활발하지 않았다.
스페인은 필리핀 전역을 식민지화하지 못하고, 남부 이슬람 세력과 모로 전쟁을 벌였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공격, 18세기 영국 동인도 회사의 마닐라 점령(1762~1764) 등 외부 위협도 있었다. 1834년 마닐라 개항 이후 아시엔다라 불리는 대토지 소유제도가 확립되어 농민의 소작농화가 진행되었다.
4.1. 스페인의 필리핀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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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 도착한 최초의 스페인인은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스페인 함대였다. 마젤란은 필리핀에 도착하자 갑옷과 창, 화승총, 대포 등 무기의 위력을 배경으로 부족장들에게 스페인 왕에 대한 복속과 조공,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세부 왕에 대한 복종과 기독교 개종을 요구하며 부족장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그러나 이슬람 부족장 라푸라푸는 이를 거절했다. 격분한 마젤란은 1521년 4월 27일 라푸라푸 토벌을 위해 막탄섬에 군대를 파견했다. 라푸라푸 군은 갑옷으로 무장한 스페인 병사들의 발이 무방비인 점을 간파하는 등 교묘한 전술로 마젤란 군을 격파하고 마침내 마젤란 자신을 살해했다. 지도자를 잃은 마젤란의 부하들은 후퇴했다(막탄 전투).
스페인은 1529년 사라고사 조약에서 포르투갈에 필리핀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1543년에는 루이스 로페스 데 비야로보스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사마르섬과 레이테섬에 도착하여 이 섬들에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라스 이슬라스 펠리피나스(Las Islas Felipinas, 펠리페나스 제도)"라고 명명했다(필리핀이라는 국명의 유래).
1565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원정대가 멕시코에서 세부섬에 도착하여 이를 점령하고 식민 기지를 건설했다. 세부섬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일부가 되었다. 레가스피는 귀환길에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향하는 항로를 발견했고(당시에는 범선이었기 때문에 왔던 항로를 그대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와 필리핀 사이에 갤리온 무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필리핀 원주민에게 최초의 거점 세부(Cebu)를 빼앗기고 본격적인 지배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후안 데 살세도 등에 의한 1570년 마닐라 정복과 1571년 마닐라시 설치 이후였다. 당시 마닐라에는 일본인도 약 2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초기 식민지 시대의 엔코미엔다 제도하에서 정복된 필리핀 원주민들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분배되었다. 분배된 조세권과 노동징발권과 바꿔 스페인인들은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가톨릭 전파를 의무화했다. 그러나 엔코미엔다 제도는 원주민 조직에 대한 타격이 컸기 때문에 17세기 전반에 폐지되었다.
4.2. 스페인의 식민 통치
필리핀 총독령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령의 일부였으며, 총독 아래 행정 조직이 체계화되었다. 스페인은 갤리온 무역을 통해 필리핀을 중계 무역 거점으로 활용했다. 1573년 처음으로 중국 교역품이 멕시코까지 수출되는 갤리온 무역이 시작되었다. 갤리온 무역은 계절풍을 이용하여 1년에 1척의 갤리온이 마닐라에서 멕시코 아카풀코까지 태평양을 횡단했다. 아카풀코에서 산을 넘어 카리브해 연안의 베라크루즈까지 중계를 하여 아시아 물품을 유럽까지 보냈다. 1581년과 1582년에 마닐라에서 남미 페루 부왕령의 칼라오까지 갤리온이 보내졌지만, 페루와 마닐라의 무역은 1631년에 금지되었다. 갤리온 무역에서 스페인의 결제는 멕시코 은(멕시코 달러)이 사용되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주인선 무역이 이루어져 일본이 스페인 상인을 상대로 하는 무역이 발전했다. 무역에 종사하는 많은 일본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옮겨 각지에서 일본인 마을을 형성했고, 필리핀 마닐라 등에도 일본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1570년에는 20명 정도였던 일본인 거주자도 17세기에는 1500명, 전성기에는 3000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1633년부터 순차적으로 시행된 일본의 쇄국령으로 이러한 도시는 쇠퇴했다.
스페인은 필리핀 식민지화 과정에서 필리핀 전역을 식민지화하지는 못했다. 특히 남부 홀로섬과 민다나오의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에 대해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300년 이상에 걸쳐 모로 전쟁이라는 스페인과 이슬람 세력 간의 항쟁이 계속되었다.
4.3. 필리핀 민족 운동의 전개
무역 자유화에 따른 미국 및 영국과의 무역 확대는 18세기 이후 고등 교육의 확충과 함께 19세기에는 자유주의 사상을 필리핀 원주민 사이에 유입시켰다. 19세기 말이 되면서, 필리핀에서 유산 계급이 성장하고 세계 각지를 연결하는 항로가 정비된 것을 배경으로, 필리핀에서 스페인으로 유학하는 층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필리핀의 민족주의 형성의 중요성을 느낀 유학생 지식인은 점차 본국 정부에 대한 개혁 요구를 강화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운동은 처음에는 필리핀인 신부에 의해 시작되었다. 1872년 카비테 반란을 계기로, 총독은 진보적인 필리핀 신부와 지식인을 탄압하였고, 이는 스페인 당국이 필리핀 민족주의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882년에는 마르셀로 델 필라에 의해 타갈로그어 일간지 《타갈로그 매일》이 창간되었고, 필리핀 본토와 스페인에 유학하고 있던 필리핀 유학생에 의해 ‘프로파간다 운동’이라는 민족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호세 리잘이 1887년 스페인에서 발표한 《놀리 미 탕그레》는 식민지 지배하에 필리핀의 여러 문제를 심각하게 고발하는 것이었으며, 민족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1888년 바르셀로나에서 필리핀 결사단체 '단결'이 결성되었다. 1892년에는 호세 리잘이 필리핀에 귀국해 라 리가 필리피나(필리핀 민족 동맹)를 결성하지만, 이내 스페인에 대한 반역죄로 체포되는 등 탄압도 강화되었다.
4.4. 필리핀 독립 혁명
1892년 호세 리잘 체포를 계기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에 의해 비밀결사 카티푸난이 결성되었다. 카티푸난은 본국 정부에 대해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며 1896년 무력봉기를 감행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같은 해 호세 리잘을 처형하고 본국에서 스페인군을 파병하여 혁명 진압을 시도했다. 한편, 혁명 세력 측에서는 보니파시오와 에밀리오 아기날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발생하여 혁명 운동의 통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실권을 장악한 아기날도가 보니파시오를 처형하고 스페인과의 전투에 임했지만, 혁명 세력과 스페인 모두 쇠약해진 가운데 1897년 12월 비악나바토 조약이 체결되어 아기날도는 홍콩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보니파시오 처형에서 볼 수 있듯이 혁명 세력은 단결되지 못했기 때문에, 조약 체결 후에도 각지에서 반스페인 투쟁이 계속되었다.
1898년 하바나에서 발생한 미국 전함 메인호의 의문의 침몰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제2차 쿠바 독립 전쟁에 개입, 4월에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은 필리핀 독립에 전면 협력한다는 조건으로 홍콩으로 망명했던 아기날도에게 스페인-미국 전쟁에 협력하고 필리핀 상륙을 안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기날도는 이를 받아들여 5월에 미국 함대와 함께 필리핀으로 귀국하여 독립 운동을 재개했고, 같은 해 1898년 6월 12일 현재 카비테의 자택에서 필리핀 독립을 선포했다(현재도 6월 12일은 필리핀 독립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같은 해 8월 13일, 미군과 함께 마닐라에 있던 스페인 총독부를 함락시켜 스페인과의 전투를 종결지었다.
5. 미국 통치 시대 (1898-1946)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필리핀 독립을 돕겠다는 조건으로 홍콩에 망명 중이던 에밀리오 아기날도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아기날도는 이를 수락하고 필리핀으로 돌아와 독립 운동을 다시 시작하여, 1898년 6월 12일 카비테에서 필리핀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미군과 함께 마닐라의 스페인 총독부를 함락시켜 스페인과의 전투를 끝냈다.
하지만, 1898년 12월 10일 스페인은 파리 강화 조약을 통해 필리핀을 미국에 양도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고, 1899년 1월 23일 아기날도는 제1공화국을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결국 미군에 체포되어 미국의 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1902년까지 미군은 필리핀 주요 지역을 점령하여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미국-필리핀 전쟁 이후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 통치하면서, 1916년 존스 법을 통해 필리핀의 자치 확대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미국에 종속되는 구조가 심화되었다.
1934년 미국의 필리핀 독립법 통과로 10년 후 독립이 승인되었고, 1935년 마누엘 케손을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코몬웰스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면서, 1943년 호세 라우렐을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1944년 미군이 레이테섬에 상륙하고 레이테 만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1945년 마닐라를 탈환하고 일본군을 몰아냈다. 이후 필리핀 코몬웰스가 부활하고, 후크발라합은 무장 해제되었다.
5.1. 미국-필리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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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2월 10일, 스페인은 파리 강화 조약을 통해 미국에 필리핀 영유권을 약 20에 양도했다.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필리핀 제도는 미국의 자유로운 깃발 아래 놓여져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비롯한 필리핀 국민들은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미국과 필리핀 사이에 필리핀-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1899년 1월 23일, 아기날도는 말롤로스 헌법을 공포하고 제1공화국을 수립하여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00년에는 수도 말롤로스가 함락되고 정규군은 해산되어 게릴라전을 전개했지만, 1901년 3월, 이사벨라주 파라난에서 아기날도는 미군에 체포되어 미국의 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1902년까지 미군은 필리핀 주요 지역을 점령했고,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필리핀-미국 전쟁에는 12만 명의 미군이 투입되었고, 4,500명의 미군 사망자와 20만 명의 필리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시 「필라델피아 레저」지는 필리핀-미국 전쟁 2년 동안 루손섬 주민 6분의 1(약 61만 6,000명)이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전쟁 말기에는 게릴라화된 혁명군 진압이 계속되었고, 1901년 7월에는 미군의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었다. 1902년 7월 미국 의회에서 제정된 필리핀 행정법을 법적 근거로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의 주도로 필리핀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5.2. 미국의 식민 통치
미국-필리핀 전쟁 이후, 미국은 필리핀 주요 지역을 점령하여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1902년 미국 의회는 〈필리핀 조직법〉을 통과시켜 필리핀 식민지화를 추진했다.
1905년 7월 29일, 윌리엄 태프트는 일본을 방문하여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1916년 미국 의회는 존스 법을 통과시켜 필리핀의 자치 확대를 약속했다. 이에 따라 필리핀은 상하 양원 의회를 구성하고, 행정 기구와 장관을 필리핀인으로 임명하는 등 자치권을 확대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필리핀 간의 자유 무역 체제가 확립되면서, 필리핀은 사탕수수와 마닐라삼을 중심으로 한 수출 작물 편중(모노컬처) 경제 구조가 심화되었다.
5.3. 필리핀 연방 성립
1934년 미국 민주당 프랭클린 D. 루즈벨트 행정부 하에 미래의 독립을 인정하는 필리핀 독립법 (타이딩스-맥더피 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어 10년 후 필리핀 독립을 승인했다. 1935년 5월에는 헌법이 비준되었고, 같은 해 9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마누엘 케손을 대통령으로 하는 미국의 자치령 정부(독립 준비 정부) 필리핀 코몬웰스가 성립되었다. 케손 정권 하에서는 미국군 더글러스 맥아더 전 참모총장에 의해 필리핀군이 창설되었지만, 기능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1938년 2월 케손은 일본에 대해 필리핀의 중립화를 선언했다.
한편, 친미적인 코몬웰스 성립의 이면에는 미국 통치 하에 모노컬처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빈곤화된 소작농과 도시 노동자들에 의해 노동 운동의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필리핀 전국 농민 조합과 노동자 총동맹 등의 노동 조합이 만들어졌으며, 1929년에는 필리핀 사회당, 1930년에는 필리핀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두 당은 인민 전선 전술 하에 1938년에 합병하여 필리핀 공산당 (PKP)이 성립되었다.
5.4. 제2차 세계 대전과 일본의 점령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남방 작전의 일환으로 일본군 제14군이 필리핀에 상륙, 1942년 1월 2일 마닐라를 점령했다. 이후 바탄 반도(4월)와 코레히도르섬(5월)의 미·필리핀 연합군을 항복시켰고, 이듬해 5월 7일 미국 극동 육군 전군이 항복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함께 호주로 피신했던 마누엘 케손 대통령은 미국 워싱턴 D.C.에서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일본은 기존 통치기구를 활용하려 했으나, 정치적 결정은 대부분 일본이 했다.
미군 항복 후, 미국은 맥아더 직속의 필리핀 후사페 게릴라를 조직해 일본에 저항했다. 1942년 3월, 루이스 타루크는 후크발라합(항일 인민군)을 결성, 농촌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 후사페 게릴라는 후크발라합을 적대시해 양측 간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 군정은 이웃조(DANAS)를 조직하고, 1942년 말 신생 필리핀 봉사단(KALIBAPI)으로 재편했다. 그러나 게릴라 운동과 경제 정책 실패로 기아가 발생했고, 군표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식량 부족을 가속화했다.
방사모로에서 일본 군정은 무슬림을 기독교도보다 낮게 보는 태도를 이어갔다. 미군 지원 항일 게릴라는 "불령 모로"로 불렸고, 군사적 제압 대상이었다.
일본은 1943년 10월 14일 호세 라우렐을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제2공화국 독립을 인정했다. 라우렐 정권과 동맹 조약을 체결, 형식상 일본 군정은 끝났다. 라우렐은 11월 도쿄 대동아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라우렐 정권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 지주 지배 유지는 필리핀 친일 세력 이반을 초래했고, 라우렐 정권도 일본 협력을 거부해, 일본은 1944년 12월 베니그노 라모스, 아르테미오 리카르테의 마카필리를 새 협력자로 삼았다.
1944년 10월 20일 미군 레이테섬 상륙, 레이테 만 전투 승리. 1945년 1월 마닐라 대학살 발생. 1945년 2월 3일 마닐라 시가전 시작, 3월 3일 미군 마닐라 점령. 루손섬 북부 일본군 추격, 9월 3일 항복. 마카필리는 괴멸. 필리핀인 희생자는 110만 명이었다.
레이테 전투에서 미군과 함께 귀환한 필리핀 코몬웰스 세르히오 오스메냐 대통령에게 권력이 이양, 미국 자치령 정부 부활. 후크발라합은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해 무장 해제당했다.
6. 필리핀 제3공화국 (1946-196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6년 4월 선거에서 마누엘 로하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7월 4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제3공화국은 경제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구조였고, 군사적으로도 1947년 필미 군사기지 협정을 통해 냉전 속 미국의 반공주의 전선 기지로 자리 잡아 사실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1946년 필리핀항공은 아시아 민간 항공사 최초로 태평양 횡단 운항을 시작했다.
6.1. 독립과 미국의 영향력
1946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마누엘 로하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지주 계급을 기반으로 한 국민당과 노동 운동, 후크발라합을 기반으로 한 민주동맹과의 경쟁에서 승리했다. 같은 해 7월 4일, 필리핀은 주권을 획득하고 제3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필리핀은 경제적으로 미국에 크게 의존했다. 미국 고위 판무관 폴 맥넛은 필리핀 경제가 미국의 어떤 주보다 미국 시장에 더 종속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필리핀 무역법(벨 무역법)은 미국으로부터 전쟁 재활 보조금을 받기 위한 조건으로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두 나라 경제를 더욱 묶어 종속을 심화시켰다.
군사적으로도 필리핀은 1947년 필미 군사기지 협정을 통해 미국에 종속되었다. 이 협정은 미국이 99년간 지정된 기지를 임대하는 것을 보장했고, 필리핀은 냉전 속에서 미국의 반공주의 전진 기지가 되었다.
1946년 필리핀 항공이 아시아 민간 항공사 최초로 태평양 횡단 운항을 시작했다.
한편, 전후 필리핀 정부는 후크발라합을 적대시했다. 1948년 3월, 로하스 정권은 후크발라합과 전국농민동맹을 불법 단체로 규정했다. 루손섬에서는 정부군, 지주 사병, 후크발라합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로하스 사후 엘피디오 키리노 정권이 평화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렬되었다. 후크발라합은 수도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고, 미국은 필리핀 정부에 군사 지원을 강화했다. 라몬 막사이사이 국방 장관의 토벌 작전으로 1950년 10월 필리핀 공산당 (PKP)이 붕괴되었고, 1951년에는 후크발라합도 사실상 궤멸되었다.
6.2. 민족주의 운동과 경제 발전
1953년 11월, 후크발라합 토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당의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막사이사이 정권은 농지 개혁을 추진했으나, 1955년에 제정된 〈농지개혁법〉은 허점이 많아 1960년 인구조사에서 1948년보다 소작농의 수가 증가했다. 1963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 대통령도 농지개혁법을 제정했지만, 이 개혁 법안도 실효성이 부족했고, 오히려 농촌에서의 계급 대립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1966년부터 민족주의청년동맹(KM)에 의해 문화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제2차 프로파간다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문화와 교육의 필리핀화가 시작되었다. 1956년에는 일필 배상 협정이 체결되어 균열된 국교가 회복되었다.
7. 마르코스 정권 (1965-1986)
1965년 대통령에 당선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기 집권했다. 마르코스 정권은 독재 정치, 부정부패,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경제난과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1969년 부정 선거로 재선된 마르코스는 반란을 이유로 1972년에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7.1. 마르코스의 권위주의 통치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강권 정치를 펼쳤다. 1966년에는 ABS-CBN이 컬러 텔레비전 본방송을 시작했다. 1968년 마오쩌둥주의에 기반한 필리핀 공산당이 재건되었고, 1969년에는 군사 조직인 신인민군을 결성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남부에서는 1970년 무슬림들이 모로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하여 민다나오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1969년 부정 선거로 재선된 마르코스는 이러한 반란을 이유로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여 군부가 정부 기능을 장악했다. 마르코스 정권의 농지 개혁은 실효성을 거두어 자작농이 생겨났고, 쌀 자급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외국 자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경제 정책으로 1970년대 연평균 6-7%의 GNP 성장을 달성했다.
1975년 마르코스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과 국교를 수립했고, 1976년에는 소련과도 국교를 수립했다. 모로 민족해방전선과는 잠정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1979년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초전자머신 볼테스V"가 필리핀에서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나, 마르코스 대통령에 의해 방영 금지령이 내려졌다.
7.2. 민주화 운동과 마르코스 정권 붕괴
1965년 국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강권 통치를 펼쳤다. 1969년 부정 선거로 재선된 마르코스는 1972년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군대가 정부 기능을 장악하게 했다. 이러한 독재 정치는 마르코스와 그의 측근들의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1983년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1986년 2월, 에드사 혁명이 일어나 마르코스 부부는 하와이로 망명했고, 1989년 마르코스는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8. 필리핀 제5공화국 (1986-현재)
1981년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나, 1983년 야당 상원의원이었던 베니그노 아키노 주니어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었다. 이는 반체제 세력의 분노를 증폭시켰다. 이러한 국민적 불만의 폭발로 1986년 2월 선거를 계기로 에두사 혁명이 발발하여 마르코스 부부는 하와이로 망명하였고, 1989년 하와이에서 사망하였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여러 개혁을 추진했지만, 잦은 쿠데타 시도와 자연재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역대 정부는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해 노력했지만, 빈부 격차, 부정부패, 정치 불안 등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1997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사망하였다. 2006년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었다. 필리핀-일본 수교 50주년이었다.
8.1. 민주주의 회복과 개혁
코라손 아키노는 대통령 취임 이후 7차례의 쿠데타 미수와 1989년 군 반란 사건을 겪었으나, 미군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진압하였다.
1990년 루손섬 중부에서 바기오 대지진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91년에는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하여 이 재난을 계기로 필리핀에서 미군 기지가 철수하였다.
1992년 대통령에 취임한 피델 라모스는 신자유주의적인 민영화 정책과 규제 완화를 철저히 시행하여 경제 성장률을 높였으나, 한편으로 이러한 경제 성장은 고용을 확대하지 못했고, 해외 취업에 의존하는 필리핀 경제의 구조는 유지되었다. 같은 해 미군 철수가 완료되었다.
1995년 각지의 군사 반란이 종식되었고, 1996년 모로 민족해방전선과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en:Peace process with the Bangsamoro in the Philippines).
8.2. 경제 발전과 사회 문제
1998년 조세프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2000년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하원에서 진행되었다. 시민 시위(피플 파워)가 활발해지면서 2001년 제2차 인민혁명(:en:EDSA Revolution of 2001)이 발생하였다.
2004년 글로리아 아로요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후 아로요는 선거 부정을 인정하고 국민에게 사과하였다. 2005년에는 수빅 만에서 성폭행 사건이 발생하여 주둔 미군 4명이 체포되었고, 부가가치세가 인상되었다.
2010년 베니그노 아키노 3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16년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8.3. 봉봉 마르코스 정부 (2022-현재)
2022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봉봉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