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백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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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백제 전쟁은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와 백제 간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4세기 중반 고구려 미천왕의 한사군 정복 이후 대립이 시작되어, 369년 치양 전투를 시작으로 고국원왕이 전사한 371년 평양성 전투 등 잦은 공방전이 벌어졌다. 4세기 후반에는 진사왕과 광개토대왕 시기에 관미성 전투, 패수 전투 등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5세기에는 나제동맹의 강화와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인해 475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사망하는 등 백제가 큰 피해를 입었다. 6세기 초반에는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는 틈을 타 백제가 반격하기도 했으나, 551년 신라와의 연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고구려-백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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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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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 전쟁 | |
개요 | |
교전 세력 | 고구려 백제 |
주요 전투 | 치양 전투 독산성 전투 평양성 전투 관산성 전투 |
배경 | |
주요 원인 | 한강 유역의 전략적 중요성 고구려의 남진 정책 백제의 복수심 (과거 패배) |
경과 | |
초기 (5세기) | 고구려의 우세 백제의 방어 |
중기 (6세기) | 백제의 반격 신라와의 연합 |
후기 (7세기) | 고구려의 쇠퇴 백제의 멸망 |
결과 | |
주요 결과 | 백제의 국력 약화 및 멸망의 간접적 원인 고구려의 국력 소모 나당 연합군의 삼국 통일 기반 마련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삼국 간의 복잡한 외교 관계 형성 신라의 부상 |
군사적 영향 | 각국의 군사력 강화 성곽 축조 기술 발전 |
기타 | |
관련 인물 | 장수왕 개로왕 근초고왕 고국원왕 |
2. 배경
4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와 백제는 직접적인 충돌이 거의 없었다.[1] 그러나 고구려의 미천왕이 한사군의 마지막 세력인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면서 상황이 변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백제는 국경을 직접 맞대게 되었고, 특히 옛 대방군 지역의 영유권을 둘러싼 양국 간의 긴장이 높아졌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의 전연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국력이 약화된 틈을 타 백제가 옛 대방군 지역으로 적극적으로 세력을 넓히면서 양국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369년, 백제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마한을 정복하는 사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이 틈을 노려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백제의 치양(雉壤)을 공격하며 제1차 고구려-백제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구려군은 주변 민가를 약탈했으나, 백제의 근초고왕은 즉시 태자 구수(근구수왕)를 보내 반격에 나섰다. 백제군은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수곡성까지 영토를 넓히며 초기 승기를 잡았다.
3. 4세기 중반 (제1차 고구려-백제 전쟁, 369년~377년)
371년, 치양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고국원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시 백제를 침공했다. 그러나 근초고왕은 패하(浿河) 인근에 군사를 매복시켜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쳤다. 기세를 몰아 근초고왕은 그해 겨울, 정예병 3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백제군은 평양성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왕의 죽음으로 결사항전에 나선 고구려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물러났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375년 7월, 백제의 북쪽 변경인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2] 근초고왕이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대규모 보복 공격을 준비하던 중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1월 근초고왕이 사망하고 태자 구수가 근구수왕으로 즉위했다.
376년 11월, 소수림왕은 다시 백제의 북쪽 국경을 침공했다.[3] 이에 근구수왕은 377년 10월, 직접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이미 전열을 가다듬은 고구려군에게 패배하고 물러났다. 고구려는 그해 11월 백제를 공격하며 보복전에 나섰다.[4] 이후 양국 모두 흉년과 이상 기후를 겪으면서 전쟁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고, 전쟁은 점차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사실상의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 전쟁은 전반적으로 백제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으며, 특히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고구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3. 1. 주요 전투
369년,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는 사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동원하여 치양(雉壤)을 공격하고 주변 민가를 약탈하였다. 이에 백제의 근초고왕은 태자 구수에게 군사를 주어 반격하게 했다. 태자 구수는 지름길을 통해 치양에 도착했고, 이때 백제 사람 사기가 고구려 군사의 기밀 정보를 알려주어 백제군은 고구려군을 쉽게 격파하고 수곡성까지 영토를 넓혔다. 태자 구수가 더 추격하려 했으나, 장군 막고해가 도가(道家)의 말을 인용하며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만류하여 추격을 멈췄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고구려군 5천여 명을 사살하거나 사로잡았으며, 포로는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371년, 고국원왕은 치양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공했다. 그러나 근초고왕은 패하(浿河, 현재의 예성강으로 추정) 강가에 군사를 매복시켜 고구려군을 크게 물리쳤다. 기세를 탄 근초고왕은 그해 겨울, 정예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항전했으나, 이 과정에서 고국원왕이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백제군은 평양성을 함락하기 직전까지 갔으나, 왕의 죽음으로 격분한 고구려군의 저항이 거세지자 군사를 물렸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수림왕은 375년 7월, 군대를 정비하여 백제의 북쪽 변경인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2] 근초고왕이 반격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다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어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11월 근초고왕이 사망하고 태자 구수가 왕위에 올랐다.
376년 11월, 소수림왕은 다시 백제의 북쪽 국경 지역을 침공했다.[3] 이에 근구수왕은 377년 10월, 군사 3만 명을 직접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다시 공격했으나, 이미 방비가 갖춰진 고구려군에게 패배하고 물러났다. 고구려는 그해 11월 백제를 공격하며 보복했다.[4] 이후 양국 모두 흉년과 이상 기후를 겪으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사실상 휴전 상태가 되었다.
4. 4세기 후반 (제2차 고구려-백제 전쟁, 389년~396년)
385년 새로 즉위한 백제의 진사왕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였으나, 386년 8월 고구려 고국양왕의 침공을 받았다.[5] 이후 양국 간의 소규모 충돌이 이어지다가 389년 9월, 진사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면서[6] 본격적인 전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90년에는 백제가 고구려의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키는 등[7] 일시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전세는 고구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392년 7월, 광개토대왕은 직접 군사 4만 명을 동원하여 백제 북쪽을 공격,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8]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의 군사적 능력에 위축되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한강 북쪽의 여러 부락이 고구려에 점령당했다. 같은 해 10월, 고구려는 20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백제 북방의 중요 거점인 관미성(關彌城)마저 함락시켰다.[9]
관미성 함락 이후 전황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392년 11월, 진사왕이 암살당하고 아신왕이 즉위하였다. 아신왕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393년 관미성, 394년 수곡성(水谷城)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구려에 연이어 패배했다. 고구려는 394년 남쪽 변경에 7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였다.[10] 395년에는 패수(浿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백제군 8,000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11]
결정적으로 396년, 광개토대왕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아리수(阿利水) 이북의 58개 성과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수도인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결국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였고, 아신왕의 동생(왕제)과 백제 대신 10명을 인질로 삼고 노비 1천 명을 바치는 조건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이로써 제2차 고구려-백제 전쟁은 고구려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 이후에도 아신왕은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고 복수를 꾀했다. 399년에는 군사를 크게 징발하려 했으나 백성들이 과도한 부담에 시달려 신라로 도망가는 등 내부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이후 400년, 403년, 404년에는 가야,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신라나 대방 지역을 공격했으나 모두 고구려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4. 1. 주요 전투
385년 백제의 진사왕이 즉위하여 고구려의 침략에 대비하자, 386년 8월 고구려의 고국양왕이 침공해왔다.[5] 389년 9월에는 백제의 진사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등[6] 소규모 국지전이 이어졌다.=== 도곤성 전투 (390년) ===
390년 9월, 백제의 진사왕은 달솔 진가모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 도곤성(都坤城)을 함락시키고 200명을 사로잡는 승리를 거두었다.[7] 진사왕은 이 공으로 진가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임명하였다.
391년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의 공세가 본격화되었다. 392년 7월, 광개토대왕은 직접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백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8] 진사왕은 광개토대왕의 군사적 역량에 압도되어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한강 북쪽의 여러 부락이 고구려에 점령당했다.
=== 관미성 전투 (392년) ===
같은 해 10월, 고구려는 백제 북방의 전략적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을 20일간의 치열한 포위 공격 끝에 함락시켰다. 이 전투는 고구려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승리였으나, 고구려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9] 관미성 함락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392년 11월, 진사왕은 내부 세력에 의해 암살되고 아신왕이 새롭게 즉위하였다.
아신왕은 빼앗긴 성을 되찾기 위해 393년과 394년에 걸쳐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광개토대왕은 각각 관미성과 수곡성(水谷城)에서 백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394년 남쪽 국경 지대에 7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추가 침입에 대비하였다.[10]
=== 패수 전투 (395년) ===
395년, 광개토대왕은 패수(浿水, 현재의 임진강 또는 예성강으로 추정됨)에서 백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여 8,000여 명을 사로잡거나 섬멸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1] 이 패배로 백제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고구려의 우위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러한 주요 전투들을 거치며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이는 396년 고구려의 대대적인 백제 침공과 위례성 포위, 아신왕의 항복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5. 5세기 (제3차 고구려-백제 전쟁, 455년~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며 남진 정책을 본격화하자, 위협을 느낀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 마립간은 433년 나제동맹을 맺었다. 초기에는 양국 간의 오랜 적대 관계로 인해 실질적인 군사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455년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했을 때 신라가 군사 지원을 하면서 동맹 관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의 실직주성을 함락시키는 등(468년) 남진을 계속했고, 이에 백제는 고구려 남쪽 변경을 공격하고 방어 시설을 강화하며(469년) 나제동맹의 공동 대응 태세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백제의 움직임은 장수왕을 자극하여 대대적인 백제 공격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간첩으로 백제에 보내 개로왕의 신임을 얻게 한 뒤, 무리한 토목 공사를 부추겨 백제의 국력을 소모시키고 민심을 이반시키는 공작을 펼쳤다.
475년 9월, 내부 정탐을 통해 백제의 상황을 파악한 장수왕은 고구려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위례성)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의 지휘 아래 7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켰다. 성을 탈출하여 도주하던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 걸루 등에게 붙잡혀 아차성 부근에서 살해되었다. 이 결정적인 패배로 백제는 수도를 상실하고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목협만치, 조미걸취와 함께 남쪽의 웅진(현재의 공주시)으로 천도하여 왕위를 이어야 했다. 이 전쟁은 고구려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며 한반도 중부 지역의 패권이 고구려에게 넘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5. 1. 주요 전투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는 등 남하 정책을 추진하자 위협을 느낀 백제의 비유왕과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433년 나제동맹을 체결했다. 하지만 오랜 적대 관계로 인해 초기에는 군사적 협력이 원활하지 않았다. 454년 신라가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동맹의 중요성을 깨달은 눌지 마립간은 455년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했을 때 군사를 보내 지원하면서 양국 관계 개선의 계기를 마련했다.468년 고구려가 신라의 실직주성을 함락시키자, 동맹국인 백제는 469년 8월 장수를 보내 고구려 남쪽 국경을 공격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고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을 설치하여 북한산성의 군사력으로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 이로써 나제동맹은 실질적인 군사 동맹으로 발전했지만, 이는 장수왕의 분노를 사 백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장수왕은 백제 정벌을 계획하며 승려 도림을 간첩으로 백제에 보냈다. 바둑을 좋아했던 개로왕은 도림을 신임하게 되었고, 도림은 개로왕에게 대규모 토목 공사를 부추겨 국력을 낭비시키고 민심을 이반시켰다. 475년 9월, 도림이 고구려로 돌아와 백제의 내부 사정을 보고하자 장수왕은 즉시 백제 공격을 명령했다. 위기를 직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피신시켰다.
: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왕은 목협만치, 조미걸취와 함께 남쪽으로 피신했다. 곧이어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이끄는 군대가 한성의 북쪽 성인 하북위례성을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쪽 성인 하남위례성으로 진격했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개로왕은 성을 빠져나와 도주했으나, 고구려 장수 걸루(桀婁) 등에게 사로잡혔다. 걸루 등은 개로왕의 죄를 꾸짖고 아차성 아래로 끌고 가 처형했다. 이 전투의 결과 백제는 수도 한성을 잃고 웅진(현재의 공주시)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6. 6세기 초반 (제4차 고구려-백제 전쟁, 495년~529년)
5세기 말 고구려는 주된 공격 방향을 신라로 돌리면서 백제와는 비교적 소강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482년 9월에는 말갈을 동원하여 백제의 한산성(漢山城)을 습격해 300여 가구를 사로잡는 등 간접적인 압박은 계속되었다.
고구려의 지속적인 위협에 맞서 백제와 신라는 다시 동맹을 강화했다. 493년, 백제 동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고, 신라 소지왕은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을 보내 나제동맹은 더욱 굳건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동성왕은 494년 신라를 도와 살수 전투에 참여하고, 견아성(犬牙城)이 포위되었을 때는 군사를 보내 구원하기도 했다. 495년에는 고구려 문자명왕이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했으나, 신라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물러났다. 다만 이 전투는 고구려-신라 전쟁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많다.
501년 백가의 난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며 왕권을 강화한 무령왕은 고구려에 대한 공세로 전환했다. 502년 고구려 국경을 침범한 데 이어, 503년 11월, 달솔(達率) 우영(優永)이 군사 5천 명으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며 제4차 고구려-백제 전쟁이 본격화되었으나, 고구려는 이를 막아냈다. 506년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했으나 큰 눈 때문에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했다. 이듬해인 507년 10월, 고구려는 장수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군과 함께 한성 인근의 횡악(橫岳)까지 진격했지만, 백제군의 반격에 막혀 물러났다.
512년 9월, 고구려가 가불(加弗)과 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켰으나, 이어진 위천(葦川) 전투에서 무령왕이 이끈 백제 기병의 기습에 크게 패했다.
이후 한동안 소강 상태가 이어지다가 523년 무령왕이 사망하자, 고구려는 그해 8월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패수(浿水)까지 진격했다. 새로 즉위한 백제 성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을 보내 이를 격퇴했다.[12] 하지만 529년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혈성(穴城)을 함락시켰고, 이어진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는 백제 좌평(佐平) 연모(燕謨)가 이끈 군대가 크게 패했다.[13]
이처럼 6세기 초반의 전쟁은 고구려의 공세와 백제의 반격이 반복되었으며, 백제가 고구려의 대규모 침공을 여러 차례 막아내는 양상을 보였다.
6. 1. 주요 전투
495년 8월, 고구려 문자명왕은 군사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는 장군 덕지(德智)를 보내 구원하였고 고구려군은 물러났다. 다만 이 전투는 고구려-신라 전쟁의 일부로, 제4차 고구려-백제 전쟁의 시작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501년 백가의 난을 진압한 백제 무령왕은 503년 11월, 달솔 우영(優永)에게 군사 5천 명을 주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공격을 제4차 고구려-백제 전쟁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는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을 지켜냈다. 506년 11월,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했으나 큰 눈으로 인해 병사들이 동상을 입어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났다.
507년 10월, 고구려는 다시 말갈과 연합하여 백제의 한성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장수 고노(高老)가 이끄는 고구려군은 횡악(橫岳) 아래에 주둔했으나, 백제군의 반격에 부딪혀 물러났다. 512년 9월, 고구려는 백제를 다시 침략하여 가불(加弗)과 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1천여 명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령왕이 직접 이끈 백제 기병 3천 명이 위천(葦川) 북쪽에서 고구려군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고구려군은 백제군의 수가 적다고 얕보아 진(陣)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는데, 이때 무령왕이 기습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후 소강 상태가 이어지다가 523년 무령왕이 사망한 틈을 타 고구려는 그해 8월 백제의 패수(浿水)까지 진격했다. 백제 성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주어 이를 막아내게 했다.[12] 529년 10월에는 고구려 안장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이에 백제 성왕은 좌평(佐平) 연모(燕謨)에게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주어 맞서게 했으나, 오곡원(五谷原)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2천여 명의 병사를 잃었다.[13]
7. 6세기 중반
백제 성왕의 고토회복운동으로 인해 고구려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안라국의 이간질로 더욱 확대되었다. 540년 9월, 성왕이 고구려의 우산성을 포위했으나, 고구려 양원왕이 보낸 기병 5천 명에게 격퇴당했다.[14] 이후 안라국은 고구려를 부추겨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548년 1월, 고구려 양원왕은 예(濊)와 연합하여 한강 북쪽의 독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군사 3천 명을 주어 파견했다. 주진은 신속히 이동하여 독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했다.[15]
550년 1월, 성왕은 장군 달기(達己)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고구려 군대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했다.[16] 이 시기 신라는 혼란을 틈타 이득을 보기도 했다.
551년,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백제는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다시 연합했다. 백제군은 한성을 비롯한 한강 상류 유역의 6개 군을 차지했다.[17] 백제는 여세를 몰아 신라에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한편, 고구려는 신라에게 접근하여,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 지역을 신라 영토로 인정해주는 대신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 것을 제안했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안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영토를 확장한 후 백제로 진군하려 했으나, 백제가 화해를 시도하자 진군을 멈추었다.
하지만 백제는 점령한 한강 유역을 지킬 힘이 부족하여 스스로 철수했고, 결국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신라와 협력하여 백제에 복수하고자 554년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백제는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했으며, 고구려와 백제 간의 직접적인 대규모 충돌은 줄어들게 되었다.
8.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반
(내용 미완성)
9. 결과
(내용 없음)
참조
[1]
뉴스
(2) 파주시 탄현면 ‘오두산성’
https://www.khan.co.[...]
경향신문
2007-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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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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