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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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대관식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새 교황의 즉위를 기념하는 의식이다. 1143년 교황 첼레스티노 2세의 대관식 이후, 초기에는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거행되었으나, 아비뇽 교황청 시대에는 아비뇽에서도 여러 차례 열렸다. 1800년 교황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의 로마 점령으로 인해 베네치아에서 대관식을 치렀으며, 이후 모든 대관식은 로마에서 거행되었다. 20세기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대관식을 중단하고, 그의 후임자들은 대관식 대신 취임 미사를 통해 교황직을 시작했다. 현재는 새 교황의 "교황 즉위의 장엄한 의식"에 대관식이 포함될지는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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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식 - 천상의 모후
천상의 모후는 가톨릭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부여하는 '하늘과 땅의 여왕'이라는 칭호로, 마리아가 하늘로 들어 올려져 모후로서 영예를 누린다는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으며, 8월 22일에 기념되지만, 고대 여신 숭배 논쟁과 개신교의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 교황 - 콘클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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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대관식 | |
---|---|
개요 | |
![]() | |
종류 | 의례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사용 시기 | 새 교황 즉위 시 |
중단 시기 | 1963년 |
상세 정보 | |
다른 이름 | 교황 성하의 대관, 교황 대관 |
유래 | 교황의 세속적 권위 상징 |
설명 | 교황 대관식은 새 교황이 즉위할 때 교황관을 쓰는 로마 가톨릭교회 의례이다. 마지막 대관식은 1963년 바오로 6세의 대관식이었다. 그 후 모든 교황들은 대관식을 포기했다. 마지막 교황관은 요한 바오로 2세가 1996년에 미국 가톨릭 대학교에 기증했다. |
역사 | |
기원 | 교황 대관식은 교황의 세속적 권위를 상징하는 의식으로 시작되었다. 교황 첼레스티노 5세 (1294년)가 대관식을 거행한 첫 번째 교황이었다. |
마지막 대관식 | 바오로 6세(1963년) |
중단 이유 | 교황의 세속적 권위 상징에 대한 비판, 의례의 복잡성, 현대 사회와의 부조화 등 |
교황관 | |
재료 | 금, 보석 |
상징 | 교황의 권위 (아버지, 목자, 스승) |
대관식 진행 | |
장소 | 과거: 라테라노 대성전, 성 베드로 대성전 현대: 성 베드로 광장 |
집전자 | 수석 부제 추기경 |
주요 예식 | 교황관 수여 "교황 성하, 부디 이 관을 받으시고, 교황의 권위를 가지십시오. 당신은 세상의 아버지, 목자, 스승입니다." 선언 |
대관식 이후 | |
교황 즉위 미사 | 대관식 이후 교황의 첫 미사 집전 |
기타 | |
현재 | 대관식은 더 이상 시행되지 않지만, 교황 즉위 미사로 대체되었다. 교황들은 교황관 대신 주교관을 쓰고 있다. |
2. 역사
교황 대관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주로 거행되었으나, 아비뇽 유수 시기에는 아비뇽에서, 그리고 대립교황 시대에는 여러 장소에서 대관식이 이루어졌다.
1143년 교황 첼레스티노 2세의 대관식부터 시작된 교황 대관식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 보니파시오 8세 등 중세 교황권 전성기를 거치며 그 형식이 정립되었다.
14세기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교황청은 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교황 클레멘스 5세, 교황 요한 22세 등 여러 교황의 대관식이 아비뇽에서 거행되었다. 또한 대립교황 시대에는 대립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대립교황들이 피사, 폰디, 페니스콜라, 바젤 등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황 레오 10세의 대관식(1513년)과 같이 화려함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 이후 교황권이 도전을 받으면서, 대관식은 단순한 종교 의식을 넘어 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는 교황권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1800년 교황 비오 7세는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수도원 성당에서 파피에마셰로 만든 임시 교황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1878년 교황 레오 13세와 1914년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로마와의 관계 악화로 바티칸 시국 내 시스티나 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의 대관식은 최초로 촬영되었고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마지막으로 교황 대관식을 치른 교황이다. 이후 교황들은 대관식 대신 즉위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최고 목자로서의 사역 시작을 기념하는 장엄 미사"를 거행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미사 강론에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 1. 초기 교황 대관식 (1143년 ~ 15세기)
1143년 교황 첼레스티노 2세의 대관식부터 초기 교황 대관식이 시작되었다. 초기 교황 대관식은 로마뿐만 아니라 아비뇽, 피사 등 다양한 장소에서 거행되었는데, 이는 당시 교황청의 상황과 정치적 배경에 따라 결정되었다.
14세기에는 아비뇽 유수로 인해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가면서, 여러 교황들의 대관식이 아비뇽에서 거행되었다. 또한 대립교황 시대에는 여러 명의 대립교황들이 피사, 폰디, 페니스콜라, 바젤 등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2. 2.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시기 (16세기 ~ 17세기)
교황 레오 10세의 대관식(1513년)은 르네상스 시대 교황 대관식의 화려함을 잘 보여준다. 레오 10세의 대관식은 1513년 3월 19일에 거행되었다.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은 교황권에 큰 도전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교황 대관식은 단순한 종교 의식을 넘어 교황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대관식 장소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이 일반적이었지만, 정치적 상황에 따라 리용, 아비뇽 등 다른 장소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5년 11월 14일에 리용에서, 교황 요한 22세는 1316년 9월 5일에 리용에서,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1335년 1월 8일에 아비뇽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2. 3. 바로크 시대와 근대 (18세기 ~ 19세기)
18세기와 19세기의 교황 대관식은 바로크 시대의 화려함과 웅장함을 반영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치면서 교황권은 위기를 맞았고, 대관식에도 변화가 생겼다.1789년 프랑스 혁명은 가톨릭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다. 1799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교황 비오 6세를 프랑스로 압송하면서 교황권은 더욱 약화되었다.[1]
1800년 선출된 교황 비오 7세는 로마가 아닌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수도원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해야 했다. 프랑스군이 이전 교황의 티아라를 압수했기 때문에, 비오 7세는 파피에마셰로 만든 임시 티아라를 쓰고 대관식을 치렀다. 베네치아 귀부인들은 자신들의 보석을 기증하여 티아라를 장식했다.
항목 | 내용 |
---|---|
일자 | 1800년 3월 21일 |
장소 | 베네치아 산 조르조 수도원 성당 |
교황 | 교황 비오 7세 |
주례 추기경 | 안토니오 도리아 팜필리 |
비고 | 프랑스군이 티아라를 압수하여 파피에마셰 티아라를 사용. 베네치아 귀부인들이 보석 기증. |
이후 19세기 교황들은 다시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2. 4. 근현대 교황 대관식 (20세기)
1878년 교황 레오 13세는 로마와의 관계 악화로 인해 바티칸 시국 내 시스티나 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29] 1914년 교황 베네딕토 15세 역시 시스티나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29]1922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앞 광장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1939년 교황 비오 12세의 대관식은 최초로 촬영되었고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29] 1958년 교황 요한 23세 역시 성 베드로 대성전 앞 광장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는 마지막으로 교황 대관식을 치른 교황이다. 그는 대관식 이후 "겸손"의 표시로 자신의 교황관을 성 베드로 대성전 제단에 올려놓았다.[29] 그의 1975년 사도 헌장 ''로마 교황 선출''은 "새 교황은 수석 추기경 부제에 의해 대관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29]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대관식 대신 "최고 목자로서의 사역 시작을 기념하는 장엄 미사"를 거행했다.[30][3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 미사 강론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교황관 착용 여부를 "후임자들이 결정하도록 남겨두었다"고 언급하며, "지금은 잘못된 생각이지만 교황의 세속적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의식과 물건으로 되돌아갈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32]
여러 개의 교황관이 미래의 교황이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34]
3. 교황 대관식 의식
교황 대관식은 새로 선출된 교황이 즉위 후 첫 번째 일요일이나 축일에 거행하는 엄숙한 의식이다. 이 행사는 교황 미사로 시작되며, 삼시경을 읊는 동안 모든 추기경들은 교황에게 '첫 경의'를 표하며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대주교와 주교들은 그의 발에 입을 맞춘다.[6]
이후, 새로 선출된 교황은 세디아 게스타토리아에 앉아 성 베드로 대성당을 행진한다. 이때 교황은 교황관 대신 보석이 박힌 미트라를 착용하며, 양옆에는 교황 플라벨룸(의례용 부채)이 놓이고 흰색 캐노피가 씌워진다. 행렬은 세 번 멈추는데, 의전장은 교황 앞에서 금색 지팡이에 묶인 삼 묶음을 태우며 "Pater Sancte, sic transit gloria mundi|파테르 상테, 식 트란시트 글로리아 문디la" (거룩한 아버지, 세상의 영광은 이렇게 지나간다)라고 말하며 물질주의와 허영심을 경계하라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6]
주 제대에 도착하면, 교황은 교황 의례로 장엄 미사를 시작한다. ''고백'' 후, 세 명의 선임 추기경 주교들이 미트라를 쓰고 교황에게 다가가 차례로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Super electum Pontificem|수페르 엘렉툼 폰티피쳄la" (선출된 교황에게) 기도를 한다.[7] 이어서 선임 추기경 부제는 팔리움을 교황의 어깨에 얹으며 교황 직무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말을 전한다.[10][11] 11세기와 12세기에는 ''임마타티오''라 하여 새로 선출된 교황에게 만툼을 수여하기도 했다.[12]
팔리움 수여 후, 교황은 주 제단에 향을 피운 다음, 합창단 측에 있는 옥좌로 가서 추기경, 대주교 및 주교들로부터 다시 경의를 받는다. 영광송과 ''Pax vobis|팍스 보비스la'' 후, 교황은 그날의 본기도를 읊고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한다.[13] 이후 교황 ''라데스''가 불려진다.[14]
모든 교황 장엄 미사와 마찬가지로, 서간과 복음은 그리스어[21]와 라틴어로 모두 읽히며, 교황은 그의 옥좌에서 성체를 모신다.[22]
미사 후에는 새 교황에게 교황 삼중관을 씌우는 대관식이 거행된다. 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다. 추기경단 단장이 기도를 암송한 후, 최고위 추기경 부제가 교황의 주교관을 벗기고 삼중관을 씌우며 교황의 권위와 책임을 상징하는 말을 전한다.[23][24]
대관식 후, 교황은 엄숙한 교황 강복 ''우르비 에트 오르비''를 내린다. 1929년 이후에는 이탈리아군과 스위스 근위대, 귀족 근위대의 명예 경례와 함께 군악대의 교황 찬가와 이탈리아 찬가 연주가 이어졌다.[23][24]
다음은 역대 교황 대관식에 대한 표이다.
3. 1. 콘클라베와 교황 선출
콘클라베에서 새 교황이 선출되면, 그는 선출을 수락하는 즉시 교황직의 모든 권한을 갖게 된다.[3] 그러나 교황들은 전통적으로 재위 연도를 대관식 날짜부터 계산해 왔다.[3]새로 선출된 교황이 주교가 아니라면, 그는 즉시 서품을 받는다. 전통에 따라 서품권은 추기경단 단장에게 있으며, 단장이 부재 시 부단장에게, 둘 다 부재 시 선임 추기경 주교에게 있다.[4] 새로운 교황이 이미 주교인 경우(이는 보통의 경우이다), 그의 선출은 즉시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발표되고 그는 그들에게 축복을 내린다.
3. 2. 교황의 로마 주교좌 착좌식
새 교황 즉위의 마지막 절차는 성 요한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의 주교좌를 공식적으로 차지하는 것(''possessio'')이다. 이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 칙서 교황 대좌 공석 및 로마 교황 선출에 관한 교황 칙서에 언급된 마지막 의식이다.[25] 교황은 다른 주교들과 같은 방식으로 즉위한다. 주교좌로 엄숙하게 인도되어 그곳에 앉음으로써 취임하며, 평화의 입맞춤을 받고 성경 구절을 낭독한 후 예전에는 ''sermo inthronisticus''라고 불렸던 연설을 한다.교황의 주교 좌 승은 그의 주교좌 성당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거행된다. 이 의식은 한때 대관식과 결합되었다. 아비뇽 유수 시대 동안, 교황은 프랑스에 있었기에 로마에 있는 주교좌 성당에서 좌승할 수 없었다. 대관식은 계속되었지만, 좌승은 로마로 귀환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왔을 때, 라테라노 궁전이 보수가 절실히 필요했기에 교황들은 바티칸을 거처로 삼고 대관식을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겼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여전히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며, 좌승은 그곳에서 거행된다.[5] "바티칸 감금" 기간 동안에는 좌승이 거행되지 않았다.

고대에는 교황이 같은 신앙 안에서 그들과의 친교 표시로 총대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litterae inthronisticae'' 또는 ''syllabai enthronistikai''라고 불렀다.[26]
3. 3. 대관 미사
삼시경을 읊는 동안 교황은 옥좌에 앉았고, 모든 추기경들은 그에게 '첫 경의'를 표하며 한 명씩 다가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대주교와 주교들은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6]이후, 새로 선출된 교황은 세디아 게스타토리아 위에 앉아 성 베드로 대성당을 행진했다. 양옆에는 교황 플라벨룸(의례용 부채)이 있었고, 흰색 캐노피가 씌워졌다. 교황은 교황관 대신 보석이 박힌 미트라를 착용했다. 행렬은 세 번 멈췄고, 의전장은 교황 앞에서 금색 지팡이에 묶인 삼 묶음을 태우며 "Pater Sancte, sic transit gloria mundila" (거룩한 아버지, 세상의 영광은 이렇게 지나간다)라고 말하며 물질주의와 허영심을 버리라는 상징적인 경고를 했다.[6] 주 제대에 도착하면, 그는 교황 의례로 장엄 미사를 시작했다.
''고백'' 후, 교황은 세디아 게스타토리아에 앉았고, 세 명의 선임 추기경 주교들이 미트라를 쓰고 그에게 다가갔다. 각 추기경은 차례로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Super electum Pontificemla" (선출된 교황에게) 기도를 했다. 알바노 추기경 주교는 "하느님, 경건한 마음이 당신을 부를 때마다 차별 없이 임재하시니, 당신의 백성의 재판관으로 사도 공동체의 정상에 선 이 당신의 종 __에게 저희가 간구하오니, 이 지점에 도달한 그가 당신의 선물을 체험하도록 최고의 축복을 부어주소서."라고 기도했다.[7] 포르토 추기경 주교는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간청하오니, 당신의 습관적인 헌신을 행하시고, 우리 교회의 머리로 신비의 종으로 구성된 당신의 종 __에게 성령의 은총을 부으시어, 그를 덕의 충만함으로 강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8] 오스티아 추기경 주교는 "하느님, 사도 베드로가 사도들의 내적 친교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여 보편적인 기독교가 악을 이기도록 하셨으니, 저희가 간구하오니, 당신의 종 __를 굽어보시고, 그는 겸손한 자리에서 갑자기 이 같은 숭고함으로 사도들과 함께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이 고귀한 품위에 올라온 것처럼, 또한 덕을 쌓을 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라나이다. 보편 교회의 짐을 지고, 그를 도우시며, 그를 합당하게 하시며, 복되신 당신을 위해 미덕이 악덕을 대체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9]
그러고 나서, 선임 추기경 부제는 팔리움을 그의 어깨에 얹으며 "전능하신 하느님과 가장 영광스러운 성모 마리아, 그의 어머니, 그리고 복된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거룩한 로마 교회의 영광을 위해 교황 직무의 충만함을 나타내는 팔리움을 받아들이소서."라고 말했다.[10][11] 11세기와 12세기에는 새로 선출된 교황에게 만툼을 수여하는 ''임마타티오''가 있었는데, 이는 "나는 너에게 로마 교황직을 수여하노니, 너는 도시와 세상을 다스리라"는 말과 함께 수여되었다.[12]
팔리움 수여 후, 교황은 주 제단에 향을 피운 다음, 합창단 측에 있는 옥좌로 가서 추기경, 대주교 및 주교들로부터 다시 경의를 받았다. 영광송과 ''Pax vobisla'' 후, 교황은 그날의 본기도를 읊은 다음 자신을 위한 기도를 했다.[13] 교황이 다시 자리에 앉은 후 교황 ''라데스''가 불려졌다.
모든 교황 장엄 미사와 마찬가지로, 서간과 복음은 그리스어[21]와 라틴어로 모두 읽혔으며, 교황은 그의 옥좌에서 성체를 모셨다.[22]
3. 4. 교황관 수여식
미사 후에 새 교황은 교황 삼중관을 받았다. 이는 종종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서 열렸으며,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들이 이를 지켜보았다. 교황은 양쪽에 부채가 놓인 교황의 옥좌에 앉았다. 추기경단 단장이 주기도문과 수집 기도문을 포함한 몇 가지 기도를 암송한 후, 최고위 추기경 부제인 수석 부제가 교황의 주교관을 벗기고 삼중관을 교황의 머리에 씌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Accipe tiaram tribus coronis ornatam, et scias te esse patrem principum et regum, rectorem orbis in terra vicarium Salvatoris nostri Jesu Christi, cui est honor et gloria in saecula saeculorum.|세 개의 왕관으로 장식된 티아라를 받으시오. 당신은 군주와 왕들의 아버지이며, 세상의 통치자이며,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아십시오. 영원히 모든 존경과 영광을 받으소서.la
대관식 후, 교황은 엄숙한 교황 강복 ''우르비 에트 오르비''를 내렸다. 1929년 이후, 새 교황은 이탈리아군과 스위스 근위대, 귀족 근위대의 명예 경례를 받았으며, 군악대는 교황 찬가와 이탈리아 찬가(1946년까지는 마르차 레알레와 사르데냐 국가)를 연주했다.[23][24]
4. 교황 대관식의 중단과 현대 교황 즉위식
교황 바오로 6세는 마지막으로 대관식을 치른 교황이다. 그는 "겸손"의 표시로 자신의 교황관을 성 베드로 대성전 제단에 올려놓고 교황관 착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29] 그의 후임인 교황 요한 바오로 1세는 1978년 9월에 대관식 대신 "최고 목자로서의 사역 시작을 기념하는 장엄 미사"를 거행했다.[30][31]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33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전임자의 의식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취임 미사 강론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교황관 착용 여부를 "후임자들이 결정하도록 남겨두었다"고 말했다.[32] 또한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우리 마음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교황관을 쓰기를 원치 않았고, 그의 후임자도 오늘날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지금은 잘못된 생각이지만 교황의 세속적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의식과 물건으로 되돌아갈 때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1996년 사도 헌장인 ''Universi Dominici gregis''는 새 교황의 "교황 즉위의 장엄한 의식"[33]이 대관식을 포함할지 여부를 명시하지 않는다. 미래의 교황이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교황관이 준비되어 있다.[34]
5. 역대 교황 대관식 목록 (1143년 ~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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