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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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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륙사관은 한국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이었다는 주장을 포괄하는 다양한 역사관을 의미한다. 고조선, 삼국 시대 국가들의 위치, 나아가 고려와 조선의 영토까지 대륙으로 확장하여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민족주의적 역사관과 결합되어 만주 지역의 고토 회복, 고대 국가의 영역 확장을 강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관련 사료의 위작 여부, 학술적 근거 부족, 그리고 일제강점기 반도사관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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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사관
개요
명칭대륙사관
한자 표기大陸史觀
영문 표기Continental history
내용
정의한민족의 활동 무대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만주를 포함한 대륙에 걸쳐 있었다는 역사관
주장고조선만주 지역을 통치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요서 지역까지 진출했다.
발해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다.
배경민족주의사학의 영향
비판식민사학의 만선사관과 유사하다는 비판이 있다.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국수주의적 역사 해석이라는 비판이 있다.
관련 용어
유사 용어재야사학
반대 용어반도사관

2. 대륙사관의 유형 및 주장

대륙사관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역사를 만주와 현 중국대륙으로 확장하며, 다른 일부에서는 한국의 역사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서 진행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반도 중심의 역사를 부정하는 대륙사관론자들은 고조선·삼국 시대까지는 중국 대륙에 해당 국가가 있었다는 데에서는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 시대에도 대륙사관이 적용되는지 여부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남북국 시대 이후는 반도사관으로 규정하기도 하며, 고려까지 심지어 근세 조선까지 중국 대륙에 있었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아울러 고대 기록에 나오는 왜(倭)가 현대의 일본이 아니라, 삼국과 마찬가지로 현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만주를 고토(故土)로 인식하고, 만주 회복을 통해 민족의 강성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12][13] 신채호는 고구려의 멸망과 "조선"이 반도 밖의 영토 지배를 잃은 것이 민족 쇠퇴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11] 그는 "조선 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조선 민족은 강하고 번영할 것이다."라고 썼다.[12]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영역을 요서, 베이징 지역까지 확장하고, 단군을 실존 인물로 간주하며, 한사군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한다.[28][29][30][31][32] 1981년 안호상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한국어은 단군이 실존 인물이며, 단군의 영토가 베이징까지 존재했고, 왕검성은 중국 랴오닝성에 있었으며, 한사군이 중국 베이징에 있었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26][27] 주류 역사학계는 재야사학계의 주장이 "위대한 상고사의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며, 역사적 고증이 부족하고 민족주의에 호응한다고 비판한다.[28][29][30][31][32]

백제가 일본 문화를 구축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26] 안호상은 백제가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베이징에서 상하이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을 통치했다는 주장을 국회에 제출했다.[26][27]

이외에도 대륙사관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최남선은 조선이 중앙아시아에 걸친 "불함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6] 김교헌은 만주 출신 왕조들이 단군의 자손이며, 이들이 정복한 땅이 조선 민족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24] 이상룡은 만주족은 사실 조선인이었고, 한사군은 요동에 위치했으며, 만주를 포함한 대조선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허경영은 잃어버린 고구려발해의 옛 영토를 되찾고 싶다고 주장했다.[33]

2. 1. 대륙삼국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삼국시대의 나라들이 모두 중국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이다.[43] 이들이 주로 인용하는 자료 중 하나는 바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등장하는 메뚜기 관련 기사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메뚜기 떼가 지금도 존재하는 중국 대륙에 삼국시대의 나라들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네티즌들의 반박 주장을 통해 메뚜기 관련 기사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것이 알려지자 조선도 중국에 위치해 있었다는 주장으로 변하기도 했다.

2. 1. 1. 삼국 초기의 천문기록

1996년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새로운 연구방법으로 천문 기록을 분석, 삼국의 관측지가 현 중국 대륙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천문학자로서 '고고천문학'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사학계에 제시하였으며, 그 결론에 대한 판단은 사학자들이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에 이문규 교수 등은 토론과 학술발표를 통하여 천문학의 역사 연구를 위한 도구로서의 유용성은 인정하였으나, 결과의 해석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1996년,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가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천문 기록을 분석하여 삼국 시대 사서에 기록된 천체 현상의 관측지가 현재의 중국 대륙에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박창범 교수는 천문학자로서 '고고천문학'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사학계에 제시하고, 그 결론에 대한 판단은 사학자들이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문규 교수 등은 토론과 학술 발표를 통해 천문학의 역사 연구를 위한 도구로서의 유용성은 인정했지만, 결과 해석에 대해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했다.

2. 2. 대륙고려설

고려의 영토가 중국 대륙에까지 미쳐 있었다는 주장이다.[45] 20년간 강역 연구를 하고 일본 궁내청 왕실도서관에 한국 상고사 서적이 있다고 밝힌 박창화 교수는 <강역고>에서 고려의 영토가 만주를 포함한다고 주장하였다.

대륙고려를 주장하는 이들이 인용하는 주요 자료는 중국 25사 중 하나인 송사에 나오는 북송과 금의 마찰에 대한 부분이다. 북송의 왕족이 금에게 잡혀갔을 때, 남송이 북송으로 가기 위해 고려에게 길을 내달라고 부탁한 것을 보면 고려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인용된다.

  •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파견된 명의 장군 이여송이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출생인 것
  • 태조 시절 오월국(吳越國)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투항한 것
  • 태조 때 거란에서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와 화친을 청했지만 태조가 사신을 가두어 버리고 낙타를 굶겨 죽여버렸는데도 한반도의 넓이도 안된다고 알려진 고려를 막강한 힘을 가진 거란이 이 때 무력으로 응징하지 않은 것.
  • 현종 때 오월국(吳越國) 사람들이 고려로 귀순·투항하고 천축국(天竺國)의 마후라(摩喉羅) 승려와 서천축국(西天竺國)의 홍범대사(洪梵大師)가 1~2 만 여리 거리에 있는 고려에 귀순을 한 것
  • 현종 때 민월(越)사람들이 귀순·투항하고 만 여리나 떨어진 감숙성에 위치한 철리국(鐵利國)에서 한반도의 조그만 나라로 알려진 고려에 조공을 하며 속국이 되기를 자청한 것.
  • 현종 때 중국 복건성의 천주(泉州)사람들이 귀순·투항한 것
  • 고려 인종 14년 기록 : 9월에 김치규(金稚規)와 유대거(劉待擧)를 송나라 명주(明州)에 보내어 첩(牒)을 전하기를, 만약 상국의 울타리인 우리 나라가 없어진다면, 회남(淮南)·절강(浙江)의 언저리가 금나라와 인접될 것이니, 진실로 상국(上國)의 이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46] 고려의 영토를 한반도를 기점으로 볼 때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
  • 1102년(숙종 7년) 10월 ‘왕, 북숭산(北崇山) 신호사(神護寺)에 가서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설치 라는 기록에서 숭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으며 한반도 내에 없다고 주장
  • 1006년 2월 '등주(登州), 용진진(龍津鎭), 귀성(龜城)에 성을 쌓음'에서 등주는 한반도에 위치하지 않았다고 주장
  • ‘1026년(현종17년)윤 5월 거란,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어 동북여진을 치는데 길을 빌려줄 것을 청했으나 불허’ 기존의 고려 영토를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다고 주장.
  • 930년 8월 청주(靑州)에 거대한 나성(羅城)을 쌓았다고 전해지나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 것
  • 고려시대 각종 지진과 가뭄 등의 횟수가 동시대 중국의 자연재해 횟수와 비슷하다는 것
  • 고려의 행정구역 수가 584개로서 조선의 324개에 비해 2배 정도인 것
  • 한반도의 평범한 산에서 화산이 폭발한 것
  • 중국 사천성의 '영릉'에 묻힌 왕건이 고려의 태조 왕건이며 현지인들은 그 무덤을 '카오리 왕젠의 무덤'이라고 부른다는 것[47]


이상과 같은 근거를 들고 있으나, 주류 사학계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 3. 대륙조선설

조선의 영토가 중국 대륙에까지 미쳐 있었고, 한반도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가짜이며 은 조선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다.[48] 이 주장의 증거는 서양의 고지도나 조선왕조실록의 이상한 부분들을 인용하고 있지만, 대륙삼국설이나 대륙고려설보다도 증거가 훨씬 부족하고 명확한 유적과 유산들까지 한반도에 남아있어 일부 대륙사관자들에게조차 고려되지 않는다. 이와는 별개로 청에서 봉금지역으로 해 놓았던 심-요 지역, 서간도, 동/북간도, 연해주 등이 조선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2. 4. 기타 주장

대륙사관에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만주를 고토(故土)로 인식하고, 만주 회복을 통해 민족의 강성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12][13] 신채호는 고구려의 멸망과 "조선"이 반도 밖의 영토의 지배를 잃은 것이 민족 쇠퇴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11] 그는 "조선 민족이 만주를 얻으면 조선 민족은 강하고 번영할 것이다."라고 썼다.[12]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영역을 요서, 베이징 지역까지 확장하고, 단군을 실존 인물로 간주하며, 한사군이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한다.[28][29][30][31][32] 1981년 안호상 대한민국 교육부 장관한국어은 단군이 실존 인물이며, 단군의 영토가 베이징까지 존재했고, 왕검성은 중국 랴오닝성에 있었으며, 한사군이 중국 베이징에 있었다는 내용의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26][27] 주류 역사학계는 재야사학계의 주장이 "위대한 상고사의 환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며, 역사적 고증이 부족하고 민족주의에 호응한다고 비판한다.[28][29][30][31][32]

백제가 일본 문화를 구축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26] 안호상은 백제가 3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베이징에서 상하이에 이르는 중국 동해안을 통치했다는 주장을 국회에 제출했다.[26][27]

이외에도 대륙사관과 관련된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최남선은 조선이 중앙아시아에 걸친 "불함 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6] 김교헌은 만주 출신 왕조들이 단군의 자손이며, 이들이 정복한 땅이 조선 민족의 영토에 포함된다고 생각했다.[24] 이상룡은 만주족이 조선인이었고, 한사군은 요동에 위치했으며, 만주를 포함한 대조선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5] 허경영은 잃어버린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를 되찾고 싶다고 주장했다.[33]

3. 대륙사관의 기원과 전개

한국 대륙사관의 기원은 일본이다. 학계에서 상대로 여기지 않는 민간 재야 사학 중에는 "차지사관" 또는 "차지론"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있었다. 이는 "고대 일본사는 고대 조선사의 모방이고, 고대 조선사는 고대 중국사의 모방이며, 고대 중국사는 고대 오리엔트사의 모방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시마 노보루는 이러한 주장을 개척하고 옹호한 인물로, 한국에서 묻혀 있던 『환단고기』를 1980년대에 입수하여 자신의 일본 출판사에서 발행했다. 이 책은 차지사관에 상당한 페이지를 할애했으며, 평판은 좋지 않았지만 한국으로 역수입되어 화제가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시마 노보루의 차지사관은 초기에는 야키리 토메오의 아류를 벗어나지 못했다. 야키리 토메오의 자료는 전전의 "스메르 학회"(슈메르나 바빌로니아의 자료와 일본 신화의 공통점을 지적하며, 일본인과 황실의 기원은 오리엔트에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였다. 더 자세히 역사를 살펴보면, 차지사관 형태의 역사 해석의 원조는 키무라 타카타로인 것으로 보인다.

4. 비판

기존 역사학계는 대륙사관이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여 학문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륙사관이 근거 자료로 제시하는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의 사서는 서술되었다고 주장되는 시점에서 보았을 때 사리에 맞지 않는 서술들이 있고, 19세기 이후 문호 개방을 통해 들어오거나 의미가 변화한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들 책이 19세기 이후의 위작이거나 변조된 문헌이라고 본다.[49]

또한, 학계는 이 문헌들이 실제로 서술된 시점에서 생각할 때, 문헌들의 서술이 대륙사관론자의 주장처럼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 제국대동아공영권 등의 주장에 영합하는 친일 민족주의적 성격을 띨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49]

대륙사관이 주요 반박의 대상으로 삼는 소위 반도사관은 일제가 만들어낸 반도사관과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 지적된다.[50] 대륙사관은 반도사관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라 일제의 반도사관이 설정해 놓은 틀에 사로잡혀 사고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51]

재야사학계에서도 대륙사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재야사학자 박영규는 자신의 저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통해, 대륙사관을 비판하였다. 즉,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는 갖가지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대륙사관을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인데,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현재 한국에는 없는 기상 이변이나 메뚜기 떼 피해 등 자연재해가 등장한다.

실증주의적인 역사학자들은 대륙사관론자들이 근거로 삼는 규원사화환단고기에 19세기 말 이후 개화기에 사용되기 시작한 신어가 사용되거나, 고대사 용어 사용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서적을 위서로 간주하며, 대륙사관 역시 학술적 근거가 부족한 가치 없는 학설로 간주한다.

재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대륙사관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재야사학자 박영규는 자신의 저서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통해 대륙사관을 비판했다. 즉, 현재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다양한 기상 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는 대륙사관을 주장할 수 없다. 삼국 시대 이후를 다루는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현재 한국에는 없는 기상 이변이나 메뚜기 떼 피해 등 자연재해가 등장한다.

4. 1. 학계의 비판

기존 역사학계는 대륙사관이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여 학문으로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륙사관이 근거 자료로 제시하는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의 사서는 서술되었다고 주장되는 시점에서 보았을 때 사리에 맞지 않는 서술들이 있고, 19세기 이후 문호 개방을 통해 들어오거나 의미가 변화한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들 책이 19세기 이후의 위작이거나 변조된 문헌이라고 본다.[49]

또한, 학계는 이 문헌들이 실제로 서술된 시점에서 생각할 때, 문헌들의 서술이 대륙사관론자의 주장처럼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 제국대동아공영권 등의 주장에 영합하는 친일 민족주의적 성격을 띨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49]

대륙사관이 주요 반박의 대상으로 삼는 소위 반도사관은 일제가 만들어낸 반도사관과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 지적된다.[50] 대륙사관은 반도사관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라 일제의 반도사관이 설정해 놓은 틀에 사로잡혀 사고하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오히려 일제가 만든 반도사관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51]

재야사학계에서도 대륙사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재야사학자 박영규는 자신의 저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통해, 대륙사관을 비판하였다. 즉,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는 갖가지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대륙사관을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인데,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현재 한국에는 없는 기상 이변이나 메뚜기 떼 피해 등 자연재해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적인 역사학자들은 대륙사관론자들이 근거로 삼는 규원사화환단고기에 19세기 말 이후 개화기에 사용되기 시작한 신어가 사용되거나, 고대사 용어 사용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서적을 위서로 간주하며, 대륙사관 역시 학술적 근거가 부족한 가치 없는 학설로 간주한다.

4. 2. 재야사학계 내부의 비판

재야사학자 박영규는 자신의 저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통해 대륙사관을 비판하였다.[49]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는 갖가지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대륙사관을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인데, 삼국시대 이후를 다루고 있는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현재 한국에는 없는 기상이변이나 메뚜기 떼 피해 등 자연재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49]

4. 3. 기타 비판

대륙사관은 학술적으로 근거가 부족하여 학문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는다.[49] 대륙사관이 근거 자료로 제시하는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의 사서는 19세기 이후 문호 개방을 통해 들어오거나 의미가 변화한 단어들이 많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들 책이 19세기 이후의 위작이거나 변조된 문헌이라고 본다.[49] 또한, 이 문헌들이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등의 주장에 영합하는 친일 민족주의적 성격을 띨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49]

대륙사관은 일제가 설정한 반도사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재생산한다는 비판을 받는다.[51] 대륙사관이 주요 반박 대상으로 삼는 소위 반도사관은 일제가 만들어낸 반도사관과 전혀 다른 개념이라는 점이 지적된다.[50]

재야사학자 박영규는 자신의 저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을 통해 대륙사관을 비판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지 않는 갖가지 기상이변이나 자연재해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대륙사관을 주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사조선왕조실록에도 현재 한국에는 없는 기상이변이나 메뚜기 떼 피해 등 자연재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5. 한국 사회와 대륙사관

6. 결론

참조

[1] 뉴스 「대륙의 한」 1∼2권 펴낸 이문열씨(저자와의 대화) https://www.seoul.co[...] 1995-07-25
[2] 서적 정용석,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동신출판사 1994
[3] 뉴스 이덕일 사랑 대륙사관과 반도사관 https://www.chosun.c[...] 2007-02-25
[4] 논문 2000
[5] 논문 2000
[6] 논문 1997
[7] 논문 1990
[8] 논문 1992
[9] 논문 1997
[10] 논문 1997
[11] 논문 2003
[12] 논문 2002
[13] 논문 1992
[14] 논문 1999
[15] 논문 1992
[16] 논문 1997
[17] 논문 2000
[18] 논문 2000
[19] 논문 2009
[20] 논문 2000
[21] 논문 2009
[22] 논문 1992
[23] 논문 1992
[24] 논문 2002
[25] 논문 1992
[26] 서적 国史教科書の波動 ヘアン 1999
[27] 논문 2012
[28] 뉴스 【コラム】韓国史学界の「恐るべき子どもたち」 http://www.chosunonl[...] 2016-09-11
[29] 뉴스 【コラム】韓国史学界の「恐るべき子どもたち」 http://www.chosunonl[...] 2016-09-11
[30] 뉴스 트렌드 돋보기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 https://www.chosun.c[...] 2016-07-27
[31] 뉴스 大古朝鮮か小古朝鮮か、古代史論争が再び激化 http://japanese.join[...] 2016-06-28
[32] 뉴스 大고조선이냐 小고조선이냐 고대사 논쟁 다시 격렬해진다 https://news.joins.c[...] 2016-06-28
[33] 뉴스 허경영 “몽골과 통일해 고구려 옛땅을 되찾겠다” https://news.joins.c[...] 2007-12-28
[34] 뉴스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http://www.kbs.co.kr[...] 2009-09-05
[35] 뉴스 韓国歴史書「上海も韓国の領土だった」中国紙が反論 http://news.searchin[...] 2006-05-10
[36] 뉴스 「広西は韓国の植民地だった」説に「笑わせるな!」 http://news.searchin[...] 2009-11-12
[37] 서적 嘘だらけの日韓近現代史 扶桑社 2013-11-30
[38] 뉴스 「上海は韓国領土だった?」の主張に中国ネチズンが激怒 https://japanese.joi[...] 2006-05-10
[39] 뉴스 100뉴스-영상 어드북스, 단군이 세운 조선이 천축국이라는 ‘동방의 비밀1-조선천축’ 출간 http://nc.asiae.co.k[...] 2018-09-19
[40] 뉴스 “고구려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니다” http://www.mediatoda[...] 2004-09-02
[41] 논문 2007
[42] 뉴스 「대륙의 한」 1∼2권 펴낸 이문열씨(저자와의 대화) http://www.seoul.co.[...] 서울신문 1995-07-25
[43] 서적 고구려·백제·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동신출판사 1994
[44] 뉴스 (이덕일 사랑) 대륙사관과 반도사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7-02-25
[45] 서적 대륙에서 8600년 환에서 고려까지 반도에서 600년 :바로 보는 우리 역사 한국방송출판 2002
[46] 문서
[47] 서적 고려와 조선 역사의 특급비밀 (우리역사 특급비밀 시리즈) 이엘씨미디어 2007
[48] 서적 조선 통사 - 프랑스 신부가 쓴 중국대륙의 조선왕국 경남 2007
[49] 간행물 역비논단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http://www.dbpia.co.[...] 1990-12
[50] 서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51] 간행물 반도적 성격론 비판 일조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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