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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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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참은 미래의 일, 특히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예언이나 징조를 통칭하는 말이다. 도참은 중국에서 기원했으며, 한국에서는 천문, 풍수지리 등과 결합하여 나타났다. 한국의 도참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멸망을 예언하거나 고려의 흥기를 예언하는 등 정치 사회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나타났다.

2. 정의

도참(圖讖)은 그 내용이나 형식에 관계없이 장래에 일어날 일, 특히 인간 생활의 길흉화복이나 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예언 혹은 징조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2. 1. 도참의 특징

도참(圖讖)은 간단히 도(圖) 또는 참(讖)이라고도 부른다.

'도(圖)'는 본래 지도(map)를 의미했으나, 점차 사인(sign)·시그널(signal)·상징(symbol)·토큰(token)·표징 등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참(讖)'은 '말씀 언(言)'과 '부추 섬(籤)'이 합쳐진 글자이다. '섬(籤)'은 부추·정구지풀·가늘다·섬세하다는 뜻을 가지며, 여기에 '언(言)' 자가 더해져 미어(微語) 또는 은어(隱語), 즉 은밀하거나 신비로운 말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도참은 그 내용·형식에 관계없이, 미래에 일어날 일, 특히 인간 생활의 길흉·화복이라든가 성쇠득실(盛衰得失)에 대한 예언 또는 징조를 통칭하는 말이다. 도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일어날 사실에 대한 예고나 암시이며, 그 내용과 형식이라든가 또 현출의 신비성과 같은 것은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중국에서 유래한 도참은 중국 문자에 의해 표현된 은어가 많기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해석하는 데 곤란을 느끼게 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서 도참서를 흔히 비기(秘記), 밀기(密記) 혹은 비결(秘訣)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원래는 '참(讖)'과 '위(緯)'는 별개의 것이다. '참(讖)'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의미하며, 예언서를 "참기" 등으로 부른다. 그에 반해 '위(緯)'는 유교경전에 대응하는 "위서"라고 불리는 서적군을 가리킨다. 그러나, 후대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예언을 가리키는 말과 그것을 기록한 서적으로 함께 사용되게 되어, "참위"라는 용어가 예언을 가리키게 되었다.

수서』「경적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설자(說者)가 또 말하기를, 공자는 이미 육경을 서술하여 천인(天人)의 도(道)를 밝히었으나, 후세에는 그 뜻에 함께하지 못할 것을 알고, 따로 '''위''' 및 '''참'''을 세워 후세에 남겼다.

3. 기원 및 성격

인간은 생존 본능에 따라 공포, 호기심, 애정, 투쟁 등의 감정을 느끼며, 이러한 본능은 고대 사회일수록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1] 원시 시대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현상에 경외감을 느끼고 질병이나 죽음에 큰 공포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 또한 현대인보다 신비로운 현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여 희로애락의 표현도 강렬했을 것이다.[1] 초기 인류 사회에는 자연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 사상이 보편적이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신 개념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선한 신은 복을 주고 악한 신은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다.[1] 이러한 믿음은 주술, 무축(巫祝, 무당의 축원), 마술, (占), 의약 등의 발생으로 이어졌고, 예술 역시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1] 특정 행위를 금지하는 터부(Taboo)나 신탁(Oracle), 징표(Token) 등도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났을 것이다.[1]

특히 상고시대에는 부족의 정치를 담당했던 족장이나 추장이 신과 소통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여겨져 제사장의 직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신의 계시를 백성에게 전달하고, 백성을 대신하여 신에게 기원하거나 악령을 물리치는 역할을 수행했다.[1] '''도참사상'''(圖讖思想)은 바로 이러한 원시 신앙과 고대 사회의 제정일치적 배경 속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도참사상을 믿고 이를 만들거나 퍼뜨리는 현상은 동양, 특히 중국한국의 역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 더욱이 도참사상은 중국과 한국의 정치사 및 사회사의 이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었다.[1]

도참사상은 신비로운 예언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지배하는 힘을 발휘했으며, 실제 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1] 왕조가 바뀌는 역성혁명과 같은 큰 변동기는 물론이고, 사회가 불안정할 때마다 이러한 종류의 사상이 나타나 널리 퍼지곤 했다.[1] 때로는 정치 개혁이나 민중 운동의 지도자들이 도참사상을 이용하여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하기도 했다.[1]

한국에서 유행했던 도참은 천문, 풍수지리, 불교도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신불, 도교),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역운(曆運) 등 다양한 사상과 결합하여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풍수지리 사상과의 관련성이 매우 깊었다.[1]

원래 참(讖)과 위(緯)는 서로 다른 개념이었다. 참(讖)은 미래를 예언하는 행위나 그 내용을 의미하며, 이러한 예언을 담은 책을 '참기(讖記)' 등으로 불렀다. 반면 위(緯)는 유교의 주요 경전에 대응하는 예언서들을 묶어 '위서(緯書)'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두 개념은 모두 미래에 대한 예언과 그 기록을 가리키는 말로 함께 사용되었고, '참위(讖緯)'라는 용어가 예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 설자(說者)가 또 말하기를, 공자는 이미 육경을 서술하여 천인(天人)의 도(道)를 밝히었으나, 후세에는 그 뜻에 함께하지 못할 것을 알고, 따로 '''위'''(緯) 및 '''참'''(讖)을 세워 후세에 남겼다.

이는 참위가 공자의 가르침을 보완하는 비의(秘意)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참위설이 가장 활발하게 발전한 시기는 왕망이 세운 (新) 시대였다. 왕망의 즉위를 예언하는 상서로운 돌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왕망 자신도 이러한 참위설을 이용하여 전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후한 시대에도 유교 경전에 대한 위서 제작이 활발했으며, 사람들은 이를 성인인 공자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역시 참위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천문점술 등에서 유래한 참기(讖記)들도 위서 속에 포함되면서 점차 공자의 예언으로 간주되었다. 당시 정현이나 마융과 같은 저명한 유학자들조차 참위설 자체에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서를 이용하여 경전을 해석하는 데에는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오경에 대한 위서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경전으로 분류되지 않았던 『논어』에 대한 『논어참』(論語讖)과 같은 책까지 만들어졌다. 반면, 환담이나 장형처럼 참위설을 믿지 않고 비판했던 인물들은 불우한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참위설은 왕망의 신나라 시대 이후 왕조혁명이나 역성혁명과 같은 정치적 격변과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역대 왕조의 지배층에게는 항상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남북조 시대 이후 여러 왕조는 참위 관련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그 유통을 엄격히 금지했다.

4. 발생 및 전래

중국 도참의 발생 기원 역시 원시 시대의 애니미즘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한자가 발명된 이후에 발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고대 전설에는 황하에서 나온 '하도(河圖)'와 낙수(洛水)에서 나온 '낙서(洛書)'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복희씨 시대에 하도가, 하우씨(夏禹氏) 시대에 낙서가 나왔다고 하나 신빙성은 낮다. 하지만 오랜 시절부터 이러한 종류의 도참 사상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하수(河水)에서 도(圖)가 나오지 않고 봉조(鳳鳥)가 이르지 않으니 이제는 할 수 없구나"라고 탄식했는데, 이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인용하며 성왕(聖王)이 나타나지 않는 당시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참은 정치 및 사회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중국 역사의 역성 혁명 시기마다 널리 유포되곤 했다. 특히 왕망(王莽)의 신(新) 왕조 건국 과정에서의 찬위, 후한 광무제의 중흥 과정, 그리고 이후의 황건적, 백련교비밀결사 운동은 모두 도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에서 중국식 도참이 언제부터 유행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 말기에 이미 관련 기록이 나타난다. 고구려의 도참서로 알려진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백제 멸망 시기에는 거북의 등에 "백제는 만월(滿月)과 같고, 신라는 신월(新月)과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는 글귀가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는 백제는 기울고 신라는 흥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예언적 이야기는 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고려의 흥기를 예언했다는 전설과 유사하다. 최치원은 "곡령(鵠嶺)은 푸른 소나무요, 계림(鷄林)은 누른 잎이다(鵠嶺靑松 鷄林黃葉)"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는데, 곡령은 개성의 송악산을, 계림신라를 의미하므로 고려는 흥하고 신라는 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전설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삼국 시대남북국 시대에 도참 사상이 널리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진다.

원래 참(讖)과 위(緯)는 구분되는 개념이었다. 참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을 의미하며, 예언서를 "참기"(讖記) 등으로 부른다. 그에 반해 위는 유교경전에 대응하는 "위서"(緯書)라고 불리는 서적군을 가리킨다. 그러나, 후대에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예언을 가리키는 말과 그것을 기록한 서적으로 함께 사용되게 되어, "참위"라는 용어가 예언을 가리키게 되었다.

수서』「경적지」에는 "설자(說者)가 또 말하기를, 공자는 이미 육경을 서술하여 천인(天人)의 도(道)를 밝히었으나, 후세에는 그 뜻에 함께하지 못할 것을 알고, 따로 (緯) 및 (讖)을 세워 후세에 남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위설이 현저하게 발전한 것은 왕망신(新) 시대였다. 왕망의 즉위를 예언하는 상서로운 돌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왕망 자신도 그것을 이용하여 조를 사실상 찬탈했다.

유교의 경서에 대한 위서가 후한 시대에도 활발하게 저작되었고, 그것들은 모두 성인인 공자의 말로 받아들여졌다. 후한의 광무제도 참위설을 이용하여 즉위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천문점 등에 유래하는 참기도 위서 속에 채택되어, 이윽고 그것들 또한 공자의 말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참위에 비판적인 당시의 대유학자였던 정현이나 마융 등도, 위서를 사용하여 경전을 해석하는 것 자체에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오경에 대한 위서는 물론이고, 당시에는 경전에 포함되지 않았던 『논어』에 대한 『논어참』(論語讖)이라는 것까지 저작하기에 이르렀다. 그 반면 환담이나 장형과 같이 참위설을 믿지 않는 자는 불우한 처지에 놓였다.

참위의 설은 그 비약의 시대인 왕망의 신 시대 이후 왕조혁명, 역성혁명과 깊이 결부되어 밀접하게 연관된 존재였기 때문에, 당시 권력으로부터 항상 위험시되었다. 따라서 남북조 이후 역대 왕조는 참위의 서적을 금서로 취급하고, 그 유통을 금압했다.

5. 한국의 도참설

한국의 도참설은 고대부터 국가의 흥망성쇠나 개인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특히 풍수지리 사상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멸망을 예언한 도참설,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상황을 예언한 《왕창근 경문참》, 그리고 풍수지리에 기반한 도선의 도참설 등이 있다.

5. 1. 주요 도참설

한국의 주요 도참설로는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한 《고구려비기》, 백제의 멸망을 예언한 백제 멸망 도참설, 신라의 멸망을 예언한 신라 멸망 도참설이 있다. 또한 신라의 멸망과 태봉의 붕괴 및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왕창근 경문참》, 풍수지리 사상에 기반한 도선의 도참설 등이 포함된다.

5. 1. 1. 고구려 멸망 도참설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는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한 도참서이다.[3]

668년(고구려 보장왕 27년) 고종(高宗)이 고구려 정벌군을 일으켜 요동으로 진격시키고 있을 때,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은 고종에게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 중 하나로 《고구려비기》를 제시했다. 이 책에는 "900년이 안 되어 80대장(大將)이 이(고구려)를 멸망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3] 가언충은 이 예언을 해석하며, 그 해(668년)가 고구려가 한(漢)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지 900년이 되는 해이고, 당나라 군대의 대총관(大總管)인 이세적(李世勣)의 나이가 80세이므로 예언이 실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3]

5. 1. 2. 백제 멸망 도참설

'''백제망국참언'''(百濟亡國讖言)은 백제 의자왕(義慈王) 20년에 왕도 부여성(扶餘城)에서 있었던 망국을 예언한 참문(讖文)이다.[2]

이 참문에 따르면, 백제가 망한 해에 망국의 흉조가 여러 번 나타났는데, 그중 6월에는 한 귀신이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는 망한다"고 크게 외치고는 땅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2] 이에 의자왕이 땅을 파보게 하였는데, 땅을 석 자 깊이로 파 들어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2] 거북의 등에는 "백제는 둥근달 같고 신라는 초생달 같다(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그 뜻을 묻자, 무당은 "둥근달은 곧 기울 것이요, 초생달은 점점 차오를 것입니다"라고 답하여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흥성을 예언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분노하여 무당을 죽였다.[2]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글귀를 정반대로 해석하여, "둥근달은 왕성함을 뜻하고 초생달은 미약함을 뜻하니, 이는 백제가 흥하고 신라가 쇠퇴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라고 아뢰어 왕을 기쁘게 하였다고 전해진다.[2]

이 사건은 백제 멸망을 예언한 대표적인 참언으로 여겨진다. 이를 통해 당시 사회에 거북의 등껍질에 새겨진 갑골문을 해독하는 점복술이 존재했으며, 이를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예언과 그 해석이 민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엿볼 수 있다.[2]

5. 1. 3. 신라 멸망 도참설

'''신라망국참언'''(新羅亡國讖言)은 신라 말년에 신라의 망국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각종 참언을 말한다.[4]

신라망국참언 중의 하나는 최치원(崔致遠)의 문장이라고 전하는 "계림(鷄林: 신라의 별칭)은 황엽(黃葉)이요, 곡령(鵠嶺: 고려의 도읍지 송악을 가리킴)은 청송(靑松)이다"라는 문구로, 고려의 개국에 참가한 최치원 문인들의 위작(僞作)으로 여겨진다.[4]

다른 하나는 신라의 망국과 궁예(弓裔)의 비운, 왕건의 행운을 예언한 왕창근경문(王昌瑾鏡文)인데, 궁예의 신하인 송함홍(宋含弘) · 백탁(白卓) · 허원(許原) 등이 그 내용을 해독하였으나 궁예를 두려워하여 적당히 꾸며 대답하였다고 한다.[4]

5. 1. 4. 왕창근 경문참

신라 경명왕 2년(918)에 중국 상인 왕창근이 태봉(泰封)의 왕성인 철원(鐵圓) 장터에서 산 거울 속에 적힌 참문(讖文)이다. 이 참문은 신라의 멸망과 태봉의 붕괴,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거울면에 적힌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5]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리시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으리라. 사년(巳年)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靑木)속에 감추고, 하나는 모양을 흑금동(黑金東)에 나타냈다.


왕창근이 이 거울을 당시 태봉의 왕이었던 궁예에게 바치자, 궁예는 글을 잘 아는 신하 송함홍 · 백탁 · 허원 등에게 명하여 그 뜻을 해석하게 하였다.[5] 송함홍 등은 참문의 내용을 풀이하며 "궁예 왕이 철원에서 일어나 곧 멸망할 것이며, 시중(侍中) 왕건(王建)이 먼저 신라를 얻고 후에 압록강(鴨綠江) 유역까지 차지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했다.[5] 그러나 당시 궁예의 포악함과 변덕스러움 때문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못하고, 적당히 다른 내용으로 꾸며 보고했다고 전해진다.[5]

5. 1. 5. 도선의 도참설

풍수지리 사상은 신라 중기에 중국에서 도입되어 유행하였으며, 이는 당시 왕릉의 지세나 문헌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道詵, 827~898)과 같은 유명한 지리 도참가가 등장했다. 도선은 도참 형식을 빌려 지리쇠왕설(地理衰旺說), 지리순역설(地理順逆說) 및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을 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도선은 최치원과 동시대 인물로, 속성은 김(金)씨이다. 말년에 백계산(광양) 옥룡사에 머물다 72세로 입적했다. 그는 지리적으로 기운이 왕성한 곳(왕처, 旺處)과 순한 곳(순처, 順處)을 택해 거주해야 하며, 기운이 쇠한 곳(쇠처, 衰處)과 거스르는 곳(역처, 逆處)은 인공적인 방법이나 불교의 힘(사찰이나 탑 건립)을 빌려 보완하거나(비보, 裨補) 기운을 눌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여러 종류의 도참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도선의 도참서는 그의 사후 세상에 알려졌고, 고려를 건국한 고려 태조는 도선의 이론을 깊이 신뢰하였다. 태조는 훈요 10조(十訓要)를 통해 산수의 순하고 거스름을 가려 사원을 세울 것과, 함부로 절과 탑을 세워 땅의 기운(지덕, 地德)을 손상시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은 본래 사찰의 무분별한 건립을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후세에는 오히려 이를 명분 삼아 사찰을 남발하는 풍조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고려 시대에는 도선의 이름을 빌린 다양한 비기(秘記)가 널리 유행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러한 비기들이 실제 도선의 저작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만든 위작(僞作)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참조

[1]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槪說〕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
[2]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 > 백제망국 참언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
[3]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 > 고구려비기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
[4]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 > 신라망국 참언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
[5] 백과사전 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사상 > 통일신라시대의 도참사상 > 왕창근 경문참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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