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마일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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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스 마일스톤은 1895년 러시아 제국 키시네프에서 태어난 영화 감독이다. 그는 표현주의와 사실주의를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로, 할리우드 황금기에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마일스톤은 1928년 《두 아라비안 나이트》로 아카데미 코미디 감독상을, 1930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더 프론트 페이지》, 《생쥐와 인간》 등 다양한 작품을 연출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 선전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냉전 시대에는 친소련 영화 제작으로 인해 적색 공포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연출과 영화 작업을 병행했다. 1980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총 50편이 넘는 영화를 감독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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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마일스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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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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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라이프 밀슈테인 |
출생일 | 1895년 9월 30일 |
출생지 | 키시너우, 베사라비아 현, 러시아 제국 |
사망일 | 1980년 9월 25일 (84세)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국적 | 러시아 (1919년까지) 미국 (1919년부터) |
직업 | 영화 감독 프로듀서 각본가 |
활동 기간 | 1915년–1964년 |
배우자 | 켄달 리 (1935년 결혼, 1978년 사별) |
수상 | |
아카데미 감독상 | 1929-1930년 《서부 전선 이상 없다》 1927-1928년 《美人国二人行脚》 |
관련 링크 | |
웹사이트 | Turner Classic Movies - Behind the Camera - Mutiny on the Bounty ('62) |
2. 초기 생애 및 경력
편집자, 각본가, 조감독 등을 거쳐 1925년 영화 《뒷면 일곱 명》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1]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코미디 영화 《두 명의 미녀》(1927년)로 희극 감독상을 수상했는데, 이 상은 제1회 시상식에만 존재했던 부문이다.[1] 초기에는 주로 코미디 영화를 연출했지만, 1928년작 《폭력단》에서 보여준 사실적인 갱단 묘사로 주목받기 시작했다.[1]
1930년에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반전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연출하여 아카데미 작품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작품을 통해 마일스톤은 토키 영화 시대 초기의 중요한 감독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1] 이듬해인 1931년에는 《범죄 도시》를 통해 뛰어난 코미디 연출 감각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시카고 신문 기자들의 특종 경쟁을 그린 이 사회파 코미디는 빠른 대사 처리와 속도감 있는 전개로 토키 영화의 매력을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후 빌리 와일더 감독이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하워드 혹스와 같은 후배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1]
또한 마일스톤은 소설 등 문학 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서머싯 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비》(1932년)나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영화화한 《생쥐와 인간》(1939년) 등은 그의 사실적인 묘사 스타일이 잘 드러난 문예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1]
2. 1. 러시아 출생 및 미국 이민
레프 또는 레이브 밀스타인(Lev or Leyb Milstein영어)은 1895년 러시아 제국 베사라비아의 수도 키시네프(현재 몰도바의 키시너우)에서 유대계 혈통의 부유하고 명망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3] 그의 부모는 사회 및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으며, 밀스타인은 유대교 학교에서 초등 교육을 받고 여러 언어를 공부했다. 어린 시절부터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나, 가족들은 그가 연극 예술을 추구하는 것을 만류하고 독일 작센의 미트바이다로 보내 공학(엔지니어링)을 공부하게 했다.[4]그러나 밀스타인은 지역 극장 공연을 보느라 수업에 소홀했고 결국 학업에 실패했다. 그는 연극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미국행 편도 티켓을 구매했다. 18번째 생일 직후인 1913년 11월 14일, 그는 뉴저지주 호보켄에 도착하며 미국 땅을 밟았다.[5][6][7]
뉴욕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청소부, 방문 판매원, 레이스 기계 조작원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1915년에 이르러서야 초상화 및 연극 사진 작가로 일자리를 얻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미국 육군 통신대에 입대했다.[8] 뉴욕과 워싱턴 D.C.에 주둔하며 통신대 사진 부대에 배속되어 항공 사진 촬영 훈련을 받았고, 훈련 영화 제작 지원 및 다큐멘터리 전투 영상 편집 작업에 참여했다. 이때 그의 동료 중에는 훗날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이 되는 요제프 폰 스텐베르크와 빅터 플레밍도 있었다.[8][9]
1919년 2월, 밀스타인은 군에서 제대함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으며, 법적으로 성을 '마일스톤'(Milestone)으로 변경했다. 통신대 시절 인연을 맺은 독립 영화 제작자 제시 D. 햄프턴의 주선으로 할리우드에서 조감독으로 일할 기회를 얻으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10][11]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및 영화계 입문
뉴욕에서 자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마일스톤은 청소부, 방문 판매원, 레이스 기계 조작원으로 일하다가 1915년 초상화 및 연극 사진 작가 조수로 일자리를 얻었다.[5][6][7]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미국 육군 통신대에 입대했다. 뉴욕과 워싱턴 D.C.에 주둔하며 통신대 사진 부대에 배속되어 항공 사진 훈련을 받고, 훈련 영화 제작을 지원했으며, 다큐멘터리 전투 영상을 편집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당시 통신대 동료 중에는 훗날 할리우드 감독이 되는 요제프 폰 스텐베르크와 빅터 플레밍도 있었다.[8][9]1919년 2월 군에서 제대한 마일스톤은 즉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법적으로 성을 '마일스톤'으로 변경했다. 이후 통신대 시절 알게 된 지인이자 독립 영화 제작자인 제시 D. 햄프턴의 도움으로 할리우드에서 조감독으로 일할 기회를 얻으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10][11]
2. 3. 할리우드 견습 (1919-1924)
마일스톤이 할리우드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여전히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스튜디오에서 일자리를 얻기 전까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시티 유전의 도박장에서 카드 딜러로 잠시 일했다고 말했다.[12][13]마일스톤은 햄프턴 밑에서 주당 20USD를 받고 평범한 일들을 맡았고, 편집 조수에서 감독으로 승진했다. 1920년 그는 파테 익스체인지에서 헨리 킹 감독의 일반 조수로 선택되었다. 마일스톤이 처음으로 이름을 올린 작품은 킹 감독의 영화 ''운명의 주사위'' (1920)의 조감독이었다.[14][15][16]
이후 약 6년간 마일스톤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토머스 H. 인스 감독 아래에서는 편집자로, 윌리엄 A. 사이터 감독과는 영화 각본 작업(조수 및 공동 저자)을 했으며, 코미디언 해럴드 로이드의 개그 작가로도 활동했다. 1923년, 마일스톤은 윌리엄 A. 사이터를 따라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로 옮겼다. 그는 사이터가 감독한 영화 ''리틀 처치 어라운드 더 코너'' (1923)의 조감독을 맡아 실제 제작 과정 대부분을 마무리 지었다.[17][18] 문제가 생긴 영화 제작을 수습하는 데 능숙하여 '영화 해결사'(movie doctoreng)라는 명성을 얻었고, 워너 브라더스는 그의 능력을 활용해 다른 스튜디오에 높은 보수를 받고 그를 빌려주기도 했다.[19]
3. 감독: 무성 영화 시대 (1925-1929)
마일스톤은 1925년 《뒷면 일곱 명》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의 초기 다섯 작품은 코미디 영화였다. 1927년에는 《두 명의 미녀》(1927년)로 제1회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코미디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제1회 시상식에만 존재했던 부문이다. 1928년작 《폭력단》은 사실적인 갱스터 묘사로 주목받으며, 마일스톤이 코미디 외 장르에서도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4. 초기 유성 영화 시대 (1929-1936)
제1회 아카데미상에서 희극 감독상을 수상하며 무성 영화 시대에 이미 실력을 인정받았던 마일스톤은 유성 영화 시대가 도래하자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토키 영화 초기의 기술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탐구하며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다.
1930년 발표한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아카데미 작품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43][44] 이 작품의 성공은 마일스톤을 할리우드의 주요 감독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유성 영화 시대 초기 장인 감독으로서의 명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931년에는 벤 헥트와 찰스 맥아더의 희곡을 각색한 《더 프론트 페이지》를 연출하여 뛰어난 코미디 감각과 빠른 전개, 속사포 같은 대사 처리 능력을 선보였다.[46] 이 영화는 이후 스크루볼 코미디 장르와 저널리즘을 다룬 영화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47]
이처럼 마일스톤은 1930년대 초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더 프론트 페이지》라는 걸작들을 연이어 내놓으며 유성 영화 시대의 문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이후 그는 문예 영화로도 영역을 확장하여 서머싯 몸 원작의 《비》(1932)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1936년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4. 1. 《뉴욕 나이츠》 (1929)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영화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4. 2. 《서부 전선 이상 없다》 (1930)
마일스톤의 대표적인 반전 영화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그의 연출작 중 걸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의 모습을 가장 설득력 있게 극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34] 이 영화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동명의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마일스톤은 소설의 특징인 "암울한 현실주의와 반전 테마"를 영화적으로 충실히 전달하고자 했다.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제작 책임자였던 칼 렘믈 주니어는 레마르크의 소설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자 영화 판권을 사들였다.[35][36] 제작 과정에서 유니버설의 공동 설립자이자 사장인 칼 렘믈이 마일스톤에게 '해피 엔딩'을 요구했으나, 마일스톤은 "해피 엔딩은 제가 준비했습니다. 독일이 전쟁에서 이기게 할 겁니다."라고 재치있게 응수하며 원작의 비극성을 지키려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37]영화는 애국심에 불타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 독일 군인들이 참호전의 참혹한 현실 속에서 환멸을 느끼고 무너져가는 과정을 그린다. 배우 르 루에르가 순수하고 섬세한 청년 파울 보이머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마일스톤은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각본가 맥스웰 앤더슨, 델 앤드루스, 조지 애벗과 협력하여 레마르크 소설 특유의 "간결하고 강렬한 대화"를 살려내면서 "전쟁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각본을 완성했다.[38] 원래 무성 영화로 기획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무성 영화 버전과 유성 영화(토키) 버전을 모두 촬영하여 순차적으로 제작하는 방식을 택했다.[39]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중요한 기술적 성취 중 하나는 당시 초기 단계였던 사운드 기술과 무성 영화 시대 후반에 발전된 시각 효과를 성공적으로 통합했다는 점이다. 마일스톤은 사운드 녹음을 후시 녹음 방식으로 진행하여, "항상 촬영해 오던 방식대로 촬영할 수 있었고, 그것은 간단했다. 모든 트래킹 샷은 무성 카메라로 촬영했다"고 밝힌 바 있다.[40] 특히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전투 시퀀스에서는 트래킹 샷과 음향 효과를 결합하여 진격하는 병사들에게 쏟아지는 포격과 기관총 사격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40][41][42]
이 영화는 개봉 후 비평가와 대중 모두로부터 압도적인 호평을 받았으며, 마일스톤은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43][44]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성공은 마일스톤을 할리우드의 유망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했고, 이는 하워드 휴즈가 그에게 벤 캑트와 찰스 맥아더의 1928년 연극 《전선》의 영화화 연출을 제안하는 계기가 되었다.[45]
4. 3. 《더 프론트 페이지》 (1931)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성공 이후, 제작자 하워드 휴즈는 마일스톤에게 벤 캑트와 찰스 맥아더가 쓴 1928년 브로드웨이 연극 《전선》(The Front Page|더 프론트 페이지영어)을 영화화할 기회를 제안했다.[45]마일스톤이 연출한 《더 프론트 페이지》(1931)는 시카고 신문 타블로이드 세계의 뒷골목 인물들을 다룬 작품이다.[46] 이 영화는 1931년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경험 많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할리우드 기자 캐릭터의 원형을 제시했다.[46] 각본은 벤 헥트와 찰스 맥아더가 쓴 원작 희곡의 "번뜩이는 대사[와] 빠르고 냉혹한 속도"를 충실히 살렸다.[46] 뛰어난 코미디 감각을 보여준 이 영화는 시카고 경찰서에 상주하며 특종 경쟁을 벌이는 신문 기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사회파 코미디이기도 하다. 기관총처럼 빠른 대사와 쉴 틈 없는 반응을 통해 토키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했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자들을 따라가는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가 특징이다.
《더 프론트 페이지》는 1930년대 저널리즘 장르 영화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 많은 스튜디오에서 유사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하워드 혹스 감독의 《그녀는 나의 금요일》(1940)과 빌리 와일더 감독의 《더 프론트 페이지》(1974)를 포함하여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기도 했다.[47] 이 작품은 혹스 등 후배 감독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마일스톤은 주인공 기자 "힐디" 존슨 역에 팻 오브라이언이 캐스팅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제임스 케그니나 클라크 게이블을 염두에 두었으나, 제작자 하워드 휴즈는 시카고 연극 무대에서 같은 역을 맡았던 오브라이언을 고집했다.[48]
전기 작가 찰스 하이엄은 이 영화를 "완벽한 걸작이며, 이 시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는 점에서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능가한다"고 평가하며, "마일스톤은 영화와 연극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이 영화는 시민 케인 이전까지 신문사를 다룬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함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였다.[49]
조셉 밀리챕에 따르면, 마일스톤은 "여러 프레이밍 장치, 장면 간의 빠른 교차 편집, 클로즈업과 함께 움직이는 카메라, 앵글과 거리의 병치, 그리고 여러 트릭 샷"을 사용했다. 또한 "현실적인 미장센과 표현주의적인 카메라 기법의 능숙한 조합은 원작 [연극]의 현실적이면서도 멜로드라마적이고 코믹한 요소들로부터 최상의 결과물을 이끌어내어, 가장 재미있는 버전은 아닐지라도 영화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더 프론트 페이지》 버전을 만들어냈다"고 분석했다.[50][51][52] 마일스톤의 뛰어난 연출 기술은 신문 인쇄 공장을 보여주는 오프닝 트래킹 샷이나, 몰리 맬로이(메이 클라크)와 기자 무리가 대치하는 장면 등에서 잘 드러난다.[53][54]
《더 프론트 페이지》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300명의 영화 평론가가 참여한 《필름 데일리》 설문 조사에서는 마일스톤을 "최고의 감독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55]
4. 4. 1932-1936
1930년대 초반의 성공 이후, 마일스톤은 장편 영화의 질이 향상됨에 따라 소설 등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그는 특기인 리얼리즘 묘사를 살려 서머싯 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비(1932년)를 연출했으며, 이 작품은 문예 영화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5. 감독 휴지기 (1936-1939)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약 3년 동안 루이스 마일스톤은 영화 감독으로서 활동을 중단하는 시기를 겪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소송 문제, 계획했던 프로젝트의 실패, 그리고 계약 파기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며 영화 제작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력 공백은 제작자 할 로치와 계약을 맺고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생쥐와 인간》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작품은 그의 영화계 복귀작이 되었다.
5. 1. 《생쥐와 인간》 (1939)
장편 영화의 질이 향상되면서 소설 등 문학 작품을 영화화하는 데에도 재능을 보였다. 특히 그의 장기인 리얼리즘 묘사를 통해 존 스타인벡 원작의 《생쥐와 인간》(1939)과 같은 문예 영화의 걸작을 만들었다.[126]6. 1940년대 초반
마일스톤은 《생쥐와 인간》 이후에도 할리우드 임원들 사이에서 감독으로서 명성을 유지했다.[114] 이에 RKO는 그와 두 편의 가벼운 코미디 영화 연출 계약을 맺었으며, 두 영화 모두 로널드 콜먼이 주연을 맡았다.[114] 마일스톤은 자신만의 제작 부서를 배정받아 계약상의 의무를 빠르게 이행하여, 진저 로저스 주연의 《럭키 파트너》(1940)와 안나 리 주연의 《캐롤라인과의 나의 인생》(1941)을 연출했다.[115] 《캐롤라인과의 나의 인생》은 "완전히 매력적인 유쾌함"을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115] 마일스톤은 이 두 영화에 대해 "이 두 편의 코미디 영화 [《럭키 파트너》(1940)와 《캐롤라인과의 나의 인생》(1941)]는 다음 영화에서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얻기를 바라며 영화계에 남기 위해 제작하는 종류의 영화였습니다."라고 말했다.[116]
7. 제2차 세계 대전 할리우드 선전 (1942-1945)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그린 반전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로 명성을 얻은 루이스 마일스톤은 할리우드에서 반파시즘 전쟁 영화 제작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다.[34][43][44] 영화 큐레이터 찰스 실버는 마일스톤이 전투 장면 묘사에 탁월했지만, 그의 영화 속 전쟁 묘사에는 평화주의적 의도와 상반되는 불가피한 웅장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마일스톤 자신도 "전쟁의 폭력을 보여주지 않고 어떻게 평화주의 영화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전쟁 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의 참전이 현실화되자, 당시 할리우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따라 마일스톤 역시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그는 반전 영화 감독으로서의 신념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재능을 선전 영화 제작에 기여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마일스톤은 워너 브라더스와 단편 영화 계약을 맺고 복귀했으며,[122] 이후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로센과 협력하여 여러 편의 전쟁 영화를 제작했다. 그 첫 작품인 《어둠의 가장자리》(1943)는 그의 전쟁 영화에 대한 태도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24] 마일스톤은 이 영화에 대해 "''어둠의 가장자리''는 환멸을 없앴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적을 알고 있으며 현재 전쟁의 엄중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가장자리''의 교훈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입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위대한 교훈이며 민주주의 대의를 위한 승리의 핵심입니다."[125]라고 언급하며 변화된 입장을 드러냈다.
이후 제작된 《퍼플 하트》(1944) 역시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선전 영화의 성격을 띠었으며, 마일스톤은 "우리는 전쟁 중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전시 상황에서의 영화 제작 방향을 분명히 했다.[140] 로센과 다시 협력한 《태양의 거리》(1945)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비교했을 때,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요구와 선전 요소로 인해 주제 의식이 약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146] 여전히 마일스톤 특유의 현실주의적 묘사와 기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147] 이처럼 마일스톤은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자신의 초기 평화주의적 입장과는 다른 방향으로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다수의 영화를 연출하며 할리우드의 선전 활동에 동참했다.
7. 1. 《우리 러시아 전선》 (1942)
''우리 러시아 전선''(Our Russian Fronteng)은 1942년에 제작된 전쟁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41년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당시 소련 시민 언론인들이 러시아 전선에서 촬영한 약 4572.00m 분량의 뉴스릴 영상을 편집하여 만들어졌다. 루이스 마일스톤은 네덜란드 영화감독 요리스 이벤스와 협력하여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1940년 설립된 정부 영화 서비스를 통해 독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러시아 마을 사람들의 투쟁을 담아냈다. 배우 월터 휴스턴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았고, 작곡가 드미트리 튜름킨이 영화 음악을 작곡했다.7. 2. 《어둠의 가장자리》 (1943)
워너 브라더스에서 《동굴의 남자》(1926)를 연출한 지 17년 만에, 마일스톤은 단편 영화 계약으로 워너에 복귀했다.[122] 《어둠의 가장자리》는 그가 시나리오 작가 로버트 로센과 협력하여 만든 세 편의 성공적인 영화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이 영화는 나치 독일 점령 하의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에롤 플린과 앤 셰리던이 노르웨이 레지스탕스 역을, 헬무트 단틴이 반사회적인 나치 사령관 역을 맡았다.[123]멜로드라마적 성격의 영화인 《어둠의 가장자리》는 나치 점령군에 의해 잔혹한 행위를 당하는 노르웨이의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탄압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저항 정신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주민들은 나치 점령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들을 몰아낸다. 마일스톤은 주민들이 겪는 참상을 먼저 보여주고 플래시백 기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반 서스펜스" 장치를 사용했다.[126] 이러한 마일스톤의 "주제적 단순화"는 멜로드라마적 선전을 선호하는 당시 할리우드의 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126]
이 영화는 마일스톤의 전쟁 영화에 대한 직업적, 개인적 태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었다.[124] 마일스톤은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둠의 가장자리''는 환멸을 없앴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싸우는 적을 알고 있으며 현재 전쟁의 엄중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가장자리''의 교훈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입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위대한 교훈이며 민주주의 대의를 위한 승리의 핵심입니다."[125]
7. 3. 《북극성》 (1943)
마일스톤의 다음 작품은 선전 영화인 '북극성'으로, 독소전쟁이 우크라이나 집단 농장의 주민들에게 끼친 피해를 극적으로 묘사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미국 전쟁 정보국의 영화 담당 국장인 로웰 멜렛을 파견하여 프로듀서 샘 골드윈을 설득, 미국과 러시아의 전시 동맹을 기념하는 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마일스톤의 제작진에는 극작가 겸 각본가 릴리안 헬만, 촬영 감독 제임스 웡 호, 세트 디자이너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 작곡가 애런 코플런드, 작사가 이라 거슈윈과 유능한 출연진이 포함되었다.[127][128]헬만의 각본과 마일스톤의 영화적 구성은 집단 농장의 주민들을 특징짓는 목가적인 배경과 사회적 단결을 보여준다. 마일스톤은 늙은 코미디 인물 카프(월터 브레넌)가 수레를 타고 마을을 지나는 장면을 트래킹 샷으로 따라가며, 이는 영화의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음식, 노래, 춤으로 수확을 축하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일종의 민족 오페레타를 연상시킨다. 마일스톤은 오버헤드 카메라를 사용하여 행복한 축제 참가자들의 원형 대칭을 기록했다.[129][130][131] 마일스톤은 마을 사람들이 독일 폭격기의 접근을 감지하는 장면에서 그의 "기술적 숙련도"를 보여준다. 이 장면의 일부는 다큐멘터리 전쟁 장면과 유사하며, 마일스톤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요리스 이벤스의 스페인의 대지에서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132]
'북극성'은 주류 언론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소유 신문은 영화의 친러시아적 주제를 친공산주의 선전으로 해석하며 비판했다.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는 '북극성'을 최우수 미술 감독상, 최우수 촬영상, 최우수 특수 효과상, 최우수 음악상, 최우수 음향상, 최우수 각본상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영화는 흥행에서는 대체로 외면받았다.[133][134]
냉전 시대가 시작된 후, 샘 골드윈의 '북극성', 워너 브라더스의 '모스크바 특파원' 그리고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의 '러시아의 노래'와 같은 친소련 성향의 영화들은 반공주의적 시각을 가진 미국 하원 외교 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135][136]
1957년, '북극성'은 원작의 의도와 다르게 대폭 편집되어 '장갑 공격'(Armored Attack)이라는 제목으로 재개봉되었다. 스탈린주의 정권 하의 삶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장면들은 삭제되었고, 배경은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의 헝가리로 바뀌었으며,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내레이션이 추가되었다.[137]
7. 4. 《퍼플 하트》 (1944)
퍼플 하트(1944)는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1942년 7월 18일, B-25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를 폭격한 둘리틀 공습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미국 공군 조종사들이 일본 제국에 의해 제네바 협약 위반 혐의로 기소되는 이야기를 다룬다.[138]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마일스톤 감독은 공군 조종사들이 겪는 고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통해 강력한 선전 효과를 노렸으나, 이는 미국의 폭격 행위나 반일 감정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비판의 여지도 남겼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퍼플 하트 훈장은 포로로 잡힌 조종사들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아니라, 군사 기밀을 얻기 위한 일본군의 고문 과정에서 생긴 상처 때문에 수여받게 되는 상황을 보여준다.[139]
영화 평론가 조셉 밀리칩(Joseph Millichap)은 이 작품을 영화적으로 뛰어난 전쟁 영화라고 평가했다. 마일스톤 감독 본인 역시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선전 영화 제작에 대해 "우리는 전쟁 중에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라고 밝히며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다.[140]
7. 5. 《사랑의 집》 (1944)
마일스톤의 다음 작품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제작한 ''사랑의 집''(1944)으로, 알프레드 히치콕 스타일의 심리 스릴러이다. 마일스톤은 촬영 도중 응급 충수 절제술을 받게 되어 이 프로젝트에서 하차했다. 비록 마일스톤이 몇몇 장면에 기여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존 브람이 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 영화는 배우 앤 백스터가 조셉 L. 맨키위츠의 1950년 작품 ''이브의 모든 것''에서 주연을 맡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41][142]7. 6. 《태양의 거리》 (1945)
각본가 로버트 로센과 두 번째로 협력하여 제작한 영화로, 해리 조 브라운의 1944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마일스톤은 이 작품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저축액 3만달러를 직접 투자하기도 했다.[143]영화는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이탈리아 연합군 침공 당시를 배경으로, 살레르노에서 약 약 9.66km 내륙으로 진격하여 독일군이 점령한 다리와 농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은 미군 소대의 이야기를 다룬다.[144]
이 영화에서 전쟁을 묘사하는 마일스톤의 관점은 그의 대표적인 반전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는 차이가 있다.[145] 전기 작가 조셉 밀리샙에 따르면,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한 소대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 전체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반면, ''태양의 거리''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요구와 선전 요소 때문에 주제 의식이 다소 약화되었다고 평가된다.[146]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리샙은 마일스톤이 이 영화에서 할리우드 전쟁 영화의 상투적인 영웅주의를 피하고,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보여준 현실주의적 접근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고 보았다. 특히 마일스톤 특유의 트래킹 샷 기법이 액션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147]
8. 적색 공포와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냉전이 시작되면서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미국 의회와 협력하여 미국 영화에서 공산주의적 요소를 찾아내려 했다.[148] 마일스톤의 친소련 영화 《북극성》(1943)은 본래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추축국에 맞선 소련과의 전쟁 동맹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장려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나, 이후 표적이 되었다.[148] 마이클 커티스의 《모스크바 특파원》(1943), 그레고리 라토프의 《러시아의 노래》(1944), 자크 투르뇌르의 《영광의 날들》(1944)과 같은 다른 친소련 전쟁 영화들도 소련에 대한 작은 동정심조차 미국의 이상에 대한 파괴 행위로 간주되던 매카시즘 시대에 제작자들에게 어려움을 안겨주었다.[148][149]
마일스톤이 제1차 수정헌법 위원회와 같은 진보적인 활동에 참여한 것은 적색 공포 시대에 그가 친공산주의 성향을 가졌다는 의심을 키웠다.[150] 미국 하원 비미국 활동 위원회(HUAC)는 마일스톤을 포함한 여러 영화 제작자들을 소환하여 심문했다. 조셉 밀리찹에 따르면, 러시아 태생의 마일스톤은 항상 좌익 성향의 자유주의 지식인이었기에 HUAC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1946년 11월 초, 마일스톤은 위원회에 '비우호적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8년에는 반공 작가 마이론 페이건이 마일스톤을 공산주의 동조자로 암시했고, 이는 헤다 호퍼의 할리우드 칼럼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졌다. 그러나 할리우드 10인 등 많은 동료들과 달리 마일스톤은 계속해서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150][151]
할리우드 블랙리스트가 마일스톤의 창작 활동에 미친 정확한 영향은 불분명하다. 그는 계속 일자리를 찾았지만, 영화 평론가 마이클 바슨은 업계의 "그레이리스트" 때문에 그의 작품 수와 질이 제한되었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밀리찹은 "마일스톤은 자신의 삶에서 이 시기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분명히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고 언급했다.[152][153][154]
9. 전후 영화 (1946-195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마일스톤은 1940년대 후반에 창작 활동의 "마지막 독창적인 시기"를 맞이했다.[155] 이 시기 첫 작품은 할 B. 월리스가 제작한 필름 느와르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1946)이었다.[155][156] 이후 파라마운트를 떠나 독립 제작사 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스로 이적하여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원작의 ''개선문''(1948)을 연출했다.[160] 이 영화는 큰 기대 속에 제작되었으나 제작사의 편집 간섭 등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실패했다.[166][167][168][169] 엔터프라이즈에서 코미디 ''사소한 악덕''(1948)을 추가로 만들었지만 큰 반향은 없었고,[169][170][171][172] 마일스톤은 이 제작사를 떠났다.[174] 다음으로 리퍼블릭 픽처스에서 존 스타인벡과 협력하여 그의 소설을 각색한 ''붉은 조랑말''(1949)을 연출했다. 이 작품은 마일스톤의 첫 테크니컬러 영화로, 비평과 흥행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183][185] 1950년대 초반에는 20세기 폭스로 이적하여 활동했으며,[186] 첫 작품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 영화 ''몬테주마의 홀''(1951)을 만들었다.[186][188] 이 영화는 냉전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했다.[187]
9. 1.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 (1946)
마일스톤이 1940년대 후반에 연출한 영화들은 그의 창작 활동의 "마지막 독창적인 시기"를 대표한다. 그의 첫 번째 전후 작품은 할 B. 월리스가 제작한 영화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1946)으로, 존 패트릭의 단편 소설 "Love Lies Bleeding"을 바탕으로 한다.[155] 각본가 로버트 로센과 공동 작업한 이 영화는 하이엄과 그린버그(1968)에 따르면, 암울한 19세기 낭만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영화 기법을 결합하여 전후 할리우드 영화 장르인 ''필름 느와르''에 "눈에 띄는 추가"를 더했다.[156]로센과 마일스톤의 각본은 바바라 스탠윅, 반 헤플린, 그리고 영화 데뷔작에서 "긴장감 넘치고 거친" 서사를 선보인 커크 더글러스에게 제공되었으며, 이는 부패하고 구제 불능인 전후, 도시 미국을 비판한다.[157] 촬영 감독 빅터 밀너는 ''필름 느와르'' 효과를 제공했고, 음악 감독 미클로스 로자는 마일스톤의 시각적 요소와 사운드 모티프를 통합했다.[158][159]
9. 2. 《개선문》 (1948)
마일스톤은 파라마운트를 떠나 독립 제작사인 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스로 이적한 후 첫 작품으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1945년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 《개선문》(Arch of Triumph, 1948)을 연출했다.[160]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스는 이 영화에 큰 기대를 걸고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161] 소설은 1939년 파리를 배경으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망친 외과 의사 라빅 박사(샤를 보와이에)와 ''데미몬드'' 조안 모도우(잉그리드 버그만)라는 두 망명자의 비극적인 사랑과 운명을 다룬다.[162]
그러나 원작에 묘사된 복수 살인, 안락사, 파리의 어두운 뒷골목 등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큰 영향을 미치던 엄격한 검열 규정인 영화 제작 윤리 강령(헤이즈 코드)과 충돌했다. 마일스톤은 각본에서 "술집, 사창가, 수술실"과 같은 요소 및 비참한 결말을 삭제해야 했다.[163]
제작사 경영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와 같은 대작을 만들고 싶어 했고, 이에 따라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샤를 보와이에와 잉그리드 버그만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163] 마일스톤은 이러한 스타 캐스팅이 오히려 작품의 현실성을 해친다고 생각하며 "한 가지 잘못된 점은 현실적인 작품이어야 했지만, 두 명의 주연 배우가 메이저 스타였다는 점입니다. 그런 메이저 스타가 두 명이나 있으면 현실감의 절반은 사라집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64][165]
마일스톤은 처음에는 제작사가 승인한 4시간 분량의 영화를 완성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개봉 직전에 결정을 번복하여 영화를 2시간 분량으로 대폭 축소 편집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장면과 등장인물이 삭제되어 영화의 서사적 명확성과 연속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166]
이러한 제작 과정에서의 문제와 간섭은 마일스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고, 이는 영화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 평론가 밀리찹(1981)은 최종 편집본의 문제점을 감안하더라도 영화 자체가 "이상하게 무기력하고 생명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부분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어 이전 마일스톤 영화의 세심한 미장센이 부족하며, 구도는 지루하고 카메라는 고정적이며 편집은 예측 가능하다고 지적하며 "마일스톤은 거의 포기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167] 마일스톤 역시 이 재앙적인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67]
결국 《개선문》은 흥행에 크게 실패했고, 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스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169] 밀리찹은 이 영화를 "비난의 대상이 어디에 있든, ''개선문''은 좋은 책에서 만들어진 분명한 실패작, 나쁜 영화"라고 결론지었다.[168]
마일스톤은 이 실패 이후에도 엔터프라이즈와 잠시 협력하여 데이나 앤드루스와 릴리 팔머가 출연한 코미디 영화 《사소한 악덕》(No Minor Vices, 1948)을 제작, 감독했지만[169][170][171], 이 작품 역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172][173], 마일스톤은 엔터프라이즈를 떠나게 된다.[174]
9. 3. 《사소한 악덕》 (1948)
《개선문》의 흥행 실패 이후, 마일스톤은 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스와 계속 협력하여 코미디 영화인 《사소한 악덕》(No Minor Vices, 1948)의 제작 및 감독 제안을 받아들였다.[169][170][171] 이 영화에는 데나 앤드루스와 릴리 팔머가 출연했다.[169] 마일스톤의 1941년 코미디 영화 《캐롤린과의 나의 인생》(My Life with Caroline)을 연상시키는 "반(半) 세련된" 영화로 평가받았으나,[172] 마일스톤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173]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마일스톤은 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스를 떠났다.[174]9. 4. 《붉은 조랑말》 (1949)
마일스톤의 다음 프로젝트는 소설가 존 스타인벡과 리퍼블릭 픽처스에서 협력하여 1937년작 ''붉은 조랑말''을 영화화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20세기 초 캘리포니아의 시골 샐리너스 계곡을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이다. 마일스톤과 스타인벡은 1940년부터 소년과 그의 조랑말에 대한 이 성장 소설을 각색하는 것을 고려해 왔다. 1946년, 그들은 저예산 서부극으로 알려진 "포버티 로우" 스튜디오의 합병체인 리퍼블릭 픽처스와 손을 잡았지만, 이제는 대규모 제작에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175]스타인벡은 ''붉은 조랑말''의 단독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했다. 네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그의 소설은 "등장인물, 배경, 주제의 연속성으로만 통일"된다.[176] 영화 시장을 파악하는 것이 리퍼블릭에게 핵심적인 관심사였으며, 젊은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를 고집했다.[177] 순차적이고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스타인벡은 영화 각색을 주로 "선물"과 "지도자" 이야기에 국한했으며, 소설의 일부 더 가혹한 에피소드를 생략했다. 스타인벡은 기꺼이 영화에 더 희망적인 결말을 제공했는데, 이는 Millichap (1981)에 따르면 "스타인벡의 이야기 전개의 주제적 핵심을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었다.[178]
''붉은 조랑말''의 캐스팅은 마일스톤에게 스타인벡의 등장인물과 아이의 "성인 세계로의 입문"이라는 주제를 개발하는 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179] 늙은 목장 일꾼 빌리 벅 역은 젊고 활력 넘치는 로버트 미첨이 연기했으며, 그의 캐릭터는 아홉 살 톰 티플린 (피터 마일스)의 남성 멘토로서 아버지 프레드 티플린 (셰퍼드 스트러드윅)을 효과적으로 대체했다. 소년의 어머니 역은 미르나 로이가 맡았다.[180] Millichap에 따르면, "주요 캐스팅 문제는 [어린] 주인공이다. 아마도 어떤 아역 배우도 이 역할의 복잡성을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이 섬세한 아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아이가 연기하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181]
Millichap (1981)에 따르면, 마일스톤의 영화적 노력은 문학적 원천에 걸맞지 않지만, 몇몇 시각적 및 청각적 요소는 인상적이다. 오프닝 시퀀스는 1939년 스타인벡의 소설 ''생쥐와 인간''을 각색한 작품의 서문과 유사하며, 등장인물의 삶을 지배하고 알려줄 자연 세계를 소개한다.[182]
''붉은 조랑말''은 마일스톤의 첫 테크니컬러 영화이다. Canham (1974)에 따르면, 그의 "우아한 시각적 터치"는 촬영 기사 토니 가우디오의 시골 풍경의 회화적인 묘사로 향상되었다.[183] Barson (2020)에 따르면, 작곡가 애런 코플런드의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 음악은 아마도 스타인벡의 이야기를 마일스톤이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을 능가할 것이다.[184]
''붉은 조랑말''은 엔터프라이즈에 만족스러운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비평가들의 찬사와 괜찮은 흥행 수익을 올렸다.[185]
9. 5. 20세기 폭스로 이적
마일스톤은 20세기 폭스로 이적하여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몬테주마의 홀'' (1951), ''캥거루'' (1952), 그리고 ''레 미제라블'' (1952)이다.[186]1951년 1월에 개봉한 ''몬테주마의 홀''은 한국 전쟁 동안 할리우드 영화에 영향을 미친 냉전의 필연성을 반영하고 있다. 마이클 블랭크포트(Michael Blankfort)가 각본을 썼고 마일스톤은 공동 각본가로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187]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 해병대가 일본군 점령 섬을 공격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특히 일본군의 로켓 발사 벙커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한 정찰대의 영웅적인 고난에 초점을 맞춘다.[188] 마일스톤은 해병대의 전투 영웅담을 기리는 동시에, 현대 전쟁의 "공포", 즉 적군 고문 등을 겪는 병사들의 심리적 피해에 대한 고찰을 병치하는 이중적인 주제를 다뤘다.[189] 그러나 마일스톤 자신은 ''몬테주마의 홀''이 전쟁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을 다룬 것이라고 부인하고, 금전적인 이유로 영화 연출에 동의했다고 밝혔다.[190]
''몬테주마의 홀''은 마일스톤의 1930년 반전 고전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일부 요소를 연상시킨다. 출연진은 비교적 덜 알려진 배우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복잡하고 믿을 만한" 캐릭터 묘사는 노련한 베테랑과 신병 간의 대조를 드러냈다. 전투 장면 연출 역시 1930년 영화처럼 해병대가 상륙정에서 배치되어 적의 공격을 받으며 탁 트인 지형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91] 하지만 마일스톤은 해병대 찬가의 선율과 함께 "Give 'em Hell|지옥에나 가라eng"는 구호로 마무리되는 전형적인 클라이맥스를 통해 일반적인 전쟁 영화로 회귀했다.[192] 이 영화는 그의 재능 쇠퇴 또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의한 착취를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193]
''몬테주마의 홀''을 완성한 후, 20세기 폭스는 마일스톤을 호주로 보내 그 나라에 재투자할 자금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마일스톤은 영화 평론가 보슬리 크로더가 '오스트레일리아 서부극'이라고 칭한 ''캥거루'' (1952)를 촬영했다.[194][195] 영화 평론가 조셉 밀리챕(Joseph Millichap)에 따르면, 마일스톤은 스튜디오와 "미국 평원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아웃백으로 옮겨진 서부극의 진부함"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196] 그는 빈약한 각본을 보완하기 위해 대화보다는 "풍경, 동식물"에 집중하려 했다. 찰스 G. 클라크의 테크니컬러 촬영 기법은 다큐멘터리와 같은 품질을 보여주었으며, 마일스톤의 특징인 패닝 및 트래킹 기법을 포함했다.[197][198]
20세기 폭스에서 제작한 세 편의 영화 중 마지막으로 마일스톤은 빅토르 위고의 동명의 소설 (1862)을 104분으로 각색한 ''레 미제라블'' (1952)을 선보였다. 폭스는 마이클 레니, 데브라 패짓, 로버트 뉴턴, 실비아 시드니 등 계약 배우들과 호화로운 제작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리처드 머피의 각본은 "소설의 유명한 장면들을 이 진부한" 축약본에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199][200] 1968년 인터뷰에서 마일스톤은 ''레 미제라블'' 촬영 당시 "아, 젠장, 그저 일이었어요. 그냥 하고 끝내버릴 겁니다"라고 말하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밀리챕은 "[위고의] 문학 고전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점은 마일스톤의 창의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201]
10. 후기 경력 (1952-1962)
마일스톤의 마지막 영화 제작 기간은 할리우드 영화 제국의 쇠퇴기와 맞물려 있었으며, 그의 마지막 여덟 편의 영화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다.[202] 1962년, 그의 마지막 할리우드 영화인 《바운티호의 반란》 개봉 직전, 영화 잡지 ''Films and Filming''은 "많은 구세대 감독들처럼 루이스 마일스톤의 명성은 지난 10년간 다소 훼손되었다. 그의 영화는 더 이상 초기 작품들을 특징짓던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03]
20세기 폭스에서 만든 마지막 두 편의 영화는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호주에서 촬영한 《캥거루》(1952)는 평론가 보슬리 크로더로부터 "오스트레일리아 서부극"이라는 평을 받았는데,[194][195] 마일스톤은 서부극의 진부함을 피하기 위해 대화보다는 풍경과 동식물 묘사에 집중하려 했다.[196][197][198]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각색한 《레 미제라블》(1952)은 원작의 방대한 내용을 축약한 작품으로,[199][200] 마일스톤 자신도 이 영화에 대해 "아, 젠장, 그저 일이었어요. 그냥 하고 끝내버릴 겁니다"라고 말하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이는 그의 창의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여겨지기도 한다.[201]
이 시기 마일스톤의 영화들은 "감독의 이전 업적을 재현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영화 작업을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연속"으로 평가받으며, 배경, 스타일, 완성도 면에서 매우 다양한 작품들을 오갔다.[204][205] 1950년대 초반, 그는 작품 활동을 위해 영국과 이탈리아로 건너가 여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206]
- 《멜바》(1953): 호라이즌 픽처스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호주 출신 소프라노 가수 데임 넬리 멜바의 전기 영화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스타 패트리스 문셀이 멜바 역으로 스크린에 데뷔했지만, 빈약한 각본과 출연진의 한계로 멜바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지 못했고 흥행에도 실패했다.[207][208]
- 《They Who Dare》(1953): 영국에서 메이플라워 픽처스–브리티쉬 라이언 필름을 위해 촬영한 전쟁 모험 영화로, 디르크 보가드가 주연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도스의 독일 비행장을 파괴하는 특공대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나, 비평과 흥행 면에서 모두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209][210][211]
- 《미망인》(La Vedovaita, 1955): 이탈리아에서 촬영된 멜로드라마로, 수잔 요크의 소설을 각색했다. 삼각관계를 다룬 예측 가능한 이야기라는 평가를 받았다.[212][213]
이후 마일스톤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포크찹 고지》(1959), 랫 팩이 출연한 범죄 코미디 영화 《오션스 일레븐》(1960), 그리고 그의 마지막 연출작이 된 대작 《바운티호의 반란》(1962) 등을 감독했다.
10. 1. 《포크찹 고지》 (1959)
밀리챕(Millichap, 1981)에 따르면, 멜빌 컴퍼니(Melville Company)에서 Sy Bartlett가 제작한 영화 ''포크찹 고지''(1959)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와 ''태양 속의 산책''(1945)과 함께 마일스톤의 "비공식 전쟁 3부작" 중 세 번째 작품이다.[214][215] 이 영화는 참전 용사 S. L. A. Marshall의 한국 전쟁 전투에 대한 회고록과 James R. Webb의 각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를 통해 마일스톤은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다룬 그의 마지막 영화적 접근을 시도할 현실적인 문학적 토대를 얻었다.[216]영화의 줄거리는 한국 전쟁 막바지에 미군 보병 중대가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언덕을 점령하고 방어하기 위해 훨씬 큰 규모의 중국군 대대와 맞서 싸우는 무의미한 공격을 다룬다.[217] Canham(1974)은 이 줄거리를 "한국 전쟁 마지막 날, 군사적 가치는 거의 없지만 도덕적 가치는 큰 전략적 요충지를 위한 전투 이야기"라고 요약했다.[218]
마일스톤은 영화의 주제 제시 방식을 두고 주연 배우이자 재정적 투자자인 그레고리 펙(중대장 조 클레몬스 중위 역)과 논쟁을 벌였다. 마일스톤은 군사 작전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자 했으나, 펙은 ''포크찹 고지'' 점령을 벙커힐 전투나 게티즈버그 전투와 같은 역사적 전투에 비견하며 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기를 원했다.[219][220] McGee(2003)에 따르면, 스튜디오가 최종 편집한 버전은 마일스톤이 의도했던 전쟁의 허무함에 대한 메시지, 즉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이후 그의 가장 강력한 반전 메시지가 될 수 있었던 부분을 약화시켰다.[221][222] 밀리챕(1981)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223]
펙이 맡은 배역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마일스톤의 비전을 망쳤다. 펙은 그 역할을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의 거의 전형적인 슈퍼맨으로 바꾸었고... 또한 마일스톤이 다른 등장인물들을 세심하게 발전시킨 부분, 그의 대립하는 세력 간의 예술적인 대비, 그리고 그의 비꼬는 결론의 많은 부분을 잘라냈다.[224][225]
결국 마일스톤은 영화의 최종 편집본에 대해 "포크찹 고지는 내가 자랑스러워할 수 없는 영화가 되었고... [단지] 또 하나의 전쟁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며 거리를 두었다.[226] 펙 외에도 마일스톤은 Woody Strode, Harry Guardino, 성인 연기로는 처음인 로버트 블레이크, George Peppard, Norman Fell, Abel Fernandez, Gavin MacLeod, Harry Dean Stanton, Clarence Williams III 등 당시에는 비교적 덜 알려진 배우들을 장교와 사병 역할로 캐스팅했다.[227][228]
10. 2. 《오션스 일레븐》 (1960)
마일스톤은 워너 브라더스의 제안을 받아 코미디 범죄 영화인 ''오션스 일레븐''(1960)을 도체스터 스튜디오를 위해 제작하고 연출했다. 조지 클레이튼 존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라스베이거스의 주요 카지노를 정교하게 털 계획을 세우는 전직 공수 부대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이 영화에는 프랭크 시나트라가 이끄는 랫 팩이 출연했다. 시나트라는 감독 마일스톤과 마찬가지로 레드 스케어 기간 동안 수정헌법 옹호 위원회의 지지자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워너 브라더스는 마일스톤의 코미디 영화와 전쟁 서사극에서의 초기 성공을 고려하여 그를 감독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229]
영화의 각본은 해리 브라운과 찰스 레더러가 썼으나, 밀리챕(1981)은 이를 "터무니없는" 각본이라고 평가했다.[230] 밀리챕은 또한 이 영화가 미국의 탐욕에 대한 순수한 풍자인지 혹은 그것을 찬미하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분석했다.[231]
''오션스 일레븐''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마일스톤의 재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널리 평가했다.[232] 영화 평론가 데이비드 월시는 마일스톤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프로젝트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작업했을 것이며, 당시 스튜디오 시스템의 제약 속에서도 자신의 작품에 개인적,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했을 것이라고 보았다.[233] 이 작품은 이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오션스 일레븐''(2001)으로 리메이크되어 다시 인기를 얻었다.
10. 3. 《바운티호의 반란》 (1962)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MGM)가 제작한 프랭크 로이드 감독의 1935년 영화 바운티 호의 반란''(클라크 게이블, 찰스 로튼 주연)의 리메이크 작품이다.[234] 이는 1950년대 후반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제작 경향을 따르는 것이었다. MGM은 이 "불운한" 1962년작 ''바운티 호의 반란''에 2000만달러 이상을 투자했지만, 흥행에 크게 실패하여 투자금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했다.[234]1961년 2월, 당시 65세였던 마일스톤은 캐롤 리드 감독의 뒤를 이어 연출을 맡게 되었다.[235] 리드는 부적절한 각본, 타히티 로케이션 촬영 중 겪은 악천후, 그리고 주연 배우 말론 브란도와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프로젝트에 환멸을 느끼고 하차한 상태였다.[235] 마일스톤에게는 제작 과정에 질서와 규율을 다시 세우고 통제하기 어려운 배우로 알려진 브란도를 관리하는 임무가 주어졌다.[235] 그러나 마일스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영화는 거의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단 몇 장면만 촬영된 초기 단계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35]
1962년작 ''바운티 호의 반란''의 제작 과정은 일관된 영화적 시도라기보다는, 마일스톤과 브란도 사이에 오고 간 개인적이고 직업적인 갈등과 비난의 기록에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236] 브란도는 반란을 일으키는 플레처 크리스찬 역할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관철하고 창의적인 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마일스톤과는 별도로 각본가들과 협력하고 촬영장 밖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236] 이러한 브란도의 압력으로 인해 마일스톤은 결국 일부 장면과 시퀀스의 연출에서 물러나 실질적인 통제권을 브란도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236] 영화 평론가 조셉 밀리찹은 이 영화를 "브란도-마일스톤" 합작품으로 칭하며, "이 할리우드 재앙의 이야기는 길고 복잡하지만, 모든 면에서 중심 인물은 루이스 마일스톤이 아닌 말론 브란도"라고 지적했다.[237]
''바운티 호의 반란''은 마일스톤의 이름으로 크레딧된 마지막 완성 영화이지만[238], 그의 경력 말년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평가받지는 못한다.[202][238] 영화 개봉 직전인 1962년 12월, 영화 잡지 ''Films and Filming''은 "많은 구세대 감독들처럼 루이스 마일스톤의 명성은 지난 10년간 다소 훼손되었다. 그의 영화는 더 이상 초기 작품들을 특징짓던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03]
11. 텔레비전 및 미완성 영화 프로젝트 (1955-1965)
1955년, 《미망인 (라 베도바)》을 완성한 후, 마일스톤은 새로운 영화 프로젝트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쇠퇴하면서 영화 제작 기회를 얻기 어려워졌고, 마일스톤은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텔레비전 분야로 눈을 돌렸다. 다음 장편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239][240]
1956년부터 1957년까지, 마일스톤은 자신의 영화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1946)으로 데뷔시킨 배우이자 프로듀서인 커크 더글러스와 손잡고 《시민 케인》과 같은 거물에 관한 영화 《킹 켈리》 제작을 시도했으나, 이 프로젝트는 1년 만에 중단되었다.[241]
1957년부터 마일스톤은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의 에피소드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알프레드 히치콕 presents》(두 편), 《슐리츠 플레이하우스》(두 편), 《서스피션》(한 편) 등이 있다. 1958년에는 자신의 영화 《캥거루》(1952)에 출연했던 배우 리처드 분이 주연한 텔레비전 서부극 《총을 가져와 - 여행을 갈 것이다》의 두 에피소드를 연출했다.[242]
마일스톤은 워너 브라더스의 영화 《PT 109》(1963)의 연출을 맡아 촬영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태평양 전쟁 당시 어뢰정 사령관으로 겪었던 경험을 다룬 전기 영화였다. 그러나 촬영 시작 몇 주 후, 워너 브라더스의 수장 잭 L. 워너는 마일스톤을 프로젝트에서 해고하고 레슬리 H. 마틴슨 감독으로 교체했으며, 최종 크레딧에는 마틴슨의 이름이 올랐다.[243]
비록 텔레비전 제작에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마일스톤은 《바운티호의 반란》(1962)을 완성한 후 다시 TV 분야로 돌아와 1963년 시리즈 《체포와 재판》의 에피소드 한 편과 《리처드 분 쇼》의 에피소드 한 편을 연출했다.[244]
마일스톤의 마지막 영화 작업은 아메리칸 인터내셔널 픽처스가 참여한 다국적 합작 영화 《라 게아 세노- 더티 게임》(1965)이었다. 그는 이 영화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던 중 건강 악화로 인해 테렌스 영 감독으로 교체되었다.[245]
12. 개인적인 삶과 죽음
1935년, 마일스톤은 배우 켄달 리(본명 켄달 리 글레이즈너)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리가 맥페일 부인 역을 맡았던 1932년 영화 비 촬영장에서 만났다. 그들은 자녀는 없었으며, 리가 1978년에 사망할 때까지 결혼 관계를 유지했다. 전기 작가 조셉 밀리찹에 따르면, "수년에 걸쳐 마일스톤 부부는 할리우드의 가장 우아한 호스트였으며, 영화계의 핵심 인물들을 끌어 모으는 파티를 열었다."[74]
마일스톤은 1960년대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43년간 함께한 아내 켄달 리가 사망한 직후인 1978년에 뇌졸중을 겪었다.[247]
이후 더 심각한 질병을 앓던 마일스톤은 1980년 9월 25일, 85번째 생일을 5일 앞두고 로널드 레이건 UCLA 메디컬 센터에서 사망했다.[248] 마일스톤이 사망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요청은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를 원래 길이로 복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 의회 도서관 영화 부서는 1998년에 이 영화의 완전 복원 버전을 공개했다.[249][250] 마일스톤은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우드 빌리지 메모리얼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13. 비평적 평가
루이스 마일스톤은 37년(1925–1962) 동안 38편의 장편 영화를 연출했으며, 할리우드 황금기 동안 스크린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에 기여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251] 그의 작품은 무성 영화 시대와 유성 영화 시대를 모두 아우르며, 이는 표현주의의 시각적 요소와 사실주의를 혼합한 그의 스타일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자연스러운 사운드의 발전과 함께 사실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252] 비평가 앤드류 사리스는 마일스톤을 "좌익의 형식주의자"로 평가하며,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와 전선(1931) 이후 미국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으로 칭송받았다고 언급했다.[253]
마일스톤의 대표작이자 경력의 정점으로 꼽히는 작품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반전 소설을 각색한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이다.[34][254] 이 영화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의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으며, 소설의 "암울한 현실주의와 반전 테마"를 성공적으로 영화화했다.[34][35][36] 마일스톤은 당시 초기 유성 영화 기술과 무성 영화 시대 후반의 시각 효과를 통합하여, 특히 트래킹 샷과 음향 효과를 통해 전투 장면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기술적 혁신을 보여주었다.[40][41][42] 이 영화는 비평과 흥행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마일스톤에게 아카데미 작품상과 아카데미 감독상을 안겨주었다.[43][44]
그러나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성공은 이후 작품들에 대한 높은 기대치를 설정했고, 후속작들은 종종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았다.[254] 전기 작가 킹슬리 캐넘은 이를 두고 "경력 초기에 고전 영화를 만드는 문제는 모든 후속 작품에 대한 비교 기준을 설정하며, 이는 어떤 경우에는 불공정하다"고 지적했다.[255] 마일스톤의 후기 영화들은 때때로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보여준 기술적 독창성을 보여주었지만, 명확한 예술적 목적이나 원작에 대한 깊은 헌신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56][257] 앤드류 사리스는 "마일스톤의 유동적인 카메라 스타일은 항상 개인적인 관점과 분리되어 왔다. 그는 거의 헌신하지 않는 감독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의 전문성은 의미가 없는 만큼이나 확고하다"고 평가했다.[258] 킹슬리 캐넘 역시 "마일스톤의 경력은 그의 헌신 부족 또는 작품 참여 부족으로 인해 여러 번 평가 절하되었다"고 언급했다.[259]
조셉 밀리챕은 마일스톤의 "다작하고 절충적이며 고르지 못한 작품"을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요구와 연결지었다. 그는 마일스톤의 창의성이 스튜디오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의 최고작과 최악의 작품 모두 시스템이 제공한 문학적 자산을 영화로 변환하려는 실용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즉, "강력한 문학적 소재"를 다룰 때는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약하고 사소한 소재를 맡았을 때는 평범한 결과에 그쳤다는 것이다.[260]
영화 평론가 리처드 코자르스키는 마일스톤을 "1930년대의 더 독립적인 정신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면서도, "많은 선구적인 감독들처럼... 그의 권력의 절정기에 스튜디오 시스템과의 관계는 생산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261] 마일스톤은 영화 감독들이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통제력을 잃어가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킹 비더가 제안한 영화 제작자 협동조합 조직을 지지하기도 했다.[56][57] 코자르스키는 마일스톤 경력 후반부를 "두세 개의 고독한 떡갈나무가 은혜롭게 자란 진정한 묘목 숲"에 비유하며, 창의성이 산발적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다.[262]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일스톤은 《비》(1932), 《새벽에 죽다》(1936), 《생쥐와 인간》(1939) 등 문학 작품을 각색한 영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특히 《새벽에 죽다》는 좌익 정치 성향의 극작가 클리포드 오데츠가 각본을 맡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긴장"이라는 사회 정치적 주제를 다루었으며[88], 마일스톤은 트래킹 샷, 분할 화면, 매치 디졸브 등 인상적인 영화 기법을 선보였다.[91] 《생쥐와 인간》은 대공황 시대를 배경으로 한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마일스톤은 작가의 문학적 사실주의를 영화적으로 잘 구현했으며, 애런 코플랜드의 음악과 함께 시각적, 음향적 모티프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106][107][108][109]
14. 수상 및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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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결과 |
---|---|---|---|---|
1928[263] | 아카데미상 | 코미디 감독상 | 두 아라비안 나이트 | 수상 |
아카데미 작품상 | 더 라켓 | 후보 | ||
1930[264] | 아카데미 작품상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 수상 | |
아카데미 감독상 | 수상 | |||
1931[265] | 아카데미 감독상 | 더 프론트 페이지 | 후보 | |
1939 | 아카데미 작품상 | 생쥐와 인간 | 후보 |
15. 필모그래피
연도 | 작품명 | 역할(비고) |
---|---|---|
1918 | The Toothbrush | 감독 |
1918 | Posture | 감독 |
1918 | Positive | 감독 |
1919 | 승리할 자격 | 감독 |
1922 | 일어나서 해봐 | 각본 |
1923 | 북쪽이 시작되는 곳 | 편집 |
1924 | 양키 영사 | 각본 |
1924 | 들어봐 레스터 | 각본 |
1925 | 매드 월(The Mad Whirl) | 각본 |
1925 | 위험한 순수 | 각본 |
1925 | 티저 | 각본 |
1925 | 단발머리 | 각본 |
1925 | 일곱 죄인 | 감독, 각본 |
1926 | 동굴인 | 감독 |
1926 | 새로운 클론다이크 | 감독 |
1926 | 좋은 매너 | 감독 (크레딧 미기재) |
1927 | 키드 브라더 | 공동 감독 (크레딧 미기재) |
1927 | 두 명의 아라비안 기사 | 감독 |
1928 | 에덴의 동산 | 감독 |
1928 | 폭풍 | 감독, 각본 (크레딧 미기재) |
1928 | 래킷 | 감독 |
1929 | 뉴욕의 밤 | 감독 |
1929 | 배신 | 감독, 제작 |
1930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 감독 |
1931 | 전면 | 감독 |
1932 | 비 | 감독 |
1933 | 할렐루야, 나는 부랑자 | 감독 |
1934 | 선장은 바다를 싫어한다 | 감독 |
1935 | 파리의 봄 | 감독 |
1936 | 아무나 하는 대로 | 감독 |
1936 | 사령관은 새벽에 죽었다 | 감독 |
1939 | 생쥐와 인간 | 감독, 제작 |
1939 | 밤의 밤 | 감독 |
1940 | 럭키 파트너 | 감독, 각본 |
1941 | 캐롤라인과의 나의 인생 | 감독 |
1942 | 우리 러시아 전선 | 감독 |
1943 | 어둠의 가장자리 | 감독 |
1943 | 북극성 | 감독 |
1944 | 집 안의 손님 | 감독 (크레딧 미기재) |
1944 | 보라색 심장 | 감독 |
1945 | 태양 속의 산책 | 감독, 제작 |
1946 |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 | 감독 |
1948 | 개선문 | 감독, 각본, 촬영 |
1948 | 사소한 악덕은 없다 | 감독 |
1949 | 붉은 조랑말 | 감독, 제작 |
1951 | 몬테주마의 홀 | 감독 |
1952 | 레 미제라블 | 감독 |
1952 | 캥거루 | 감독 |
1953 | 멜바 | 감독 |
1954 | 그들은 감히 한다 | 감독 |
1955 | 라 베도바 X | 감독, 각본 |
1957 | 알프레드 히치콕 프레젠트 (TV 시리즈) | 감독 |
1957 | 슐리츠 플레이하우스 (TV 시리즈) | 감독 |
1957 | 의혹 (TV 시리즈) | 감독 |
1958 | 총을 가져오세요 – 여행 가능 (TV 시리즈) | 감독 |
1959 | 돼지 고개 | 감독, 제작 |
1960 | 오션스 일레븐 | 감독, 제작 |
1962 | 바운티 호의 반란 | 감독 |
1963 | 리처드 분 쇼 (TV 시리즈) | 감독 |
1963 | 체포와 재판 (TV 시리즈) | 감독 |
참조
[1]
웹사이트
Leib Milstein at RootsWeb'sConnect Project
http://wc.rootsweb.a[...]
[2]
웹사이트
Behind the Camera - Mutiny on the Bounty ('62)
http://www.tcm.com/t[...]
2020-06-27
[3]
문서
Millichap, 1981 p. 26: "born in [[Odessa]] [into] a clan of prominent Russian Jews{{nbsp}}... his father a well-off manufacturer" and "until 1919, Milestone retained his surname, Milstein". Silver, 2010: "Lewis Milestone (1895–1980) was born Lev Milstein near Odessa, Ukraine." Barson, 2020: "Lewis Milestone, original name Lev Milstein, born September 30, 1895 in Kishinyov, Russia [now Chișinău, Moldova]." Robinson, 1970 pp. 141–142: "Lewis Milestone was born in [[Chișinău|Kishmev, Ukraine]]" Canham, 1974 p. 72: "born in the Ukraine, near Odessa."
[4]
문서
Canham, 1974 p. 72: "His formal education took place in Russia [then] his parents sent him to a German engineering school in [[Mittweida]], Saxony"
[5]
문서
Robinson, 1970 p. 141: "after commercial studies in Europe reached America, apparently as an illegal immigrant, just before the First World War."
[6]
문서
Canham, 1974 p. 72: Milestone abandoned his academic studies and "used his return fare home at the end of the [school] term to emigrate to New York{{nbsp}}... on arrival he was [temporarily] financed by an aunt but ran out of funds." His appeal for financial support from his father in Russia was rejected.
[7]
문서
Millichap, 1981 pp. 26–27: See section The Director's Early Life And p. 27: ".free of family restrictions [in the United States], he felt he might realize his dream of a theatrical career."
[8]
문서
Millichap, 1981 pp. 26–27: he held a series of odd jobs, including janitor, door-to-door salesman and machine operation in a lace factory{{nbsp}}.... In 1915 [he secured a job] as a photographer's assistant{{nbsp}}... more to his liking{{nbsp}}... [then became] a theatrical photographer" and p. 27: In 1917, upon America's entry into WWI "he enlisted in the photography section of the [[United States Army Signal Corps|Signal Corps]] [performing] aerial photography [and shooting] training films{{nbsp}}... also edited combat footage" and Sternberg and Fleming mentioned.
[9]
문서
Canham, 1974 p. 72: "He began work as a factory sweeper, then became a salesman and finally a photographic assistant. The latter job stood him in good stead when he enlisted in the [[United States Army Signal Corps|Signal Corps]] in 1917" where he worked as "an assistant in the making of army training films." Barson, 2020: "During World War I he served as an assistant director on training films for the U.S. Army." Whiteley, 2020: Milestone "received a thorough grounding in all aspects of filmmaking [with the Signal Corps], which would prove invaluable in the years to com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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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p. 27–28: Upon discharge from the Army in 1919 "Milestone became a [US] citizen and changed his name [from Milstein to Milestone] at the suggestion of the [immigration] judge" and "Jesse D. Hampton, an independent film producer{{nbsp}}.... Milestone asked for a job in [Hollywood] movies; the only thing available was assistant editor."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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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 72: "he left the army in 1919 and headed for Hollywood, where he found employment as a cutter with Jesse Hampton" a former army comrade, now 'independent produ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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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28: An unpublished interview with Mark Lambert, see Millichap footnote. And See p. 28 for comparison to 1913 arrival in America. Silver, 2010: Silver describes Milestone as "émigré, not "immigrant" Koszarski, 1976 p. 317: "Milestone was a Russian émigr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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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go, 2017: "Like most great pioneer filmmakers, Milestone led an adventurous life before he hit the soundstage."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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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28: For Hampton he performed "a multitude of off jobs{{nbsp}}... sweeping floors and running errands{{nbsp}}... editing work consisted merely of splicing films{{nbsp}}... [but] "personal contacts would prove valuable in his steady advancement{{nbsp}}... became King's general assistant" in 192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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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 72: Began work as "a cutter"And "promoted to the role of general assistant" for Henry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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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son, 2020: "He launched his Hollywood career in 1920, working for Henry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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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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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 72: "For the next six years [1921–1926] Milestone took on jobs in any capacity available: he assisted [[William A. Seiter]], wrote scenarios and treatments and did some ed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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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p. 28–29: "Warners often lent out the young editor to other studios at several times his salary".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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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nson, 1970 pp. 141–142: "After varied work in Hollywood, he emerged as a writer on [[Alan Crosland]]'s ''Bobbed Hair'' (1925) and a director on ''Seven Sinners'', made later the same year." Barson, 2020: "In 1925 Milestone made his directorial debut with Seven Sinners; he also wrote the screenplay." Millichap, 1981 p. 30: "Milestone offered Warner a story idea he had created himself if he could direct it himself. Warner took the bait." Rhodes, 2020: "Milestone had honed his career in comedies, writing the scripts for ''The Mad Whirl'' (1925), ''The Teaser'' (1925), and ''Bobbed Hair'' (1925), all of which humorously depicted the jazz-crazed youth of the [[Roaring Twen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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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 72: " ... he was given a chance to direct a [[Marie Prevost]] vehicle, ''Seven Sinners''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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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30: "Milestone's career as a director was launched." Strago, 2017: "The New York Times critic called Milestone's first feature, ''Seven Sinners'' (1925), made for Warner Bros., the best recent picture he'd seen at Warner's flagship theater, but Milestone chafed at studio demands. Happily, Hughes soon formed his own company and, in 1927, the young director went to work for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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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p. 30–31: "By 1926 [Warners] was paying Milestone $400 a week [but] loaning him out as a film doctor at the rate of $1000 a week and more{{nbsp}}.... Milestone demanded the difference" and broke his contract when Warners refused. Canham, 1974 pp. 72–73: "Warners and Milestone capitalized [on the success of ''Seven Sinners'' by finishing a second comedy vehicle two months later{{nbsp}}... The Caveman (1926){{nbsp}}... contemporary reviewers lavished praise on Milestone's adroit direction, and his ability to switch from sophisticated comedy through slapstick to suspense."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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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31: Milestone "a rising talent"and one of "the years graduates of Paramount 'School of Stars" "And "he quarreled with [Swanson] and left the film." Canham, 1974 p. 73: Critics were less pleased with Milestone's ''[[The New Klondike]]'' (1926) "[but] the fact that it was filmed on location in Florida gives some indication of Milestone's rising status as a director."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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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 73: "He made only one film during 1927, but it proved to be his most important silent work [Two Arabian Knights]" and "He left Warners after the Prevost pictures, working under several banners over the next few years [among them] the Caddo Company{{nbsp}}... owned by [[Howard Hughes]]" and "his first war film{{nbsp}}... the comical adventures of two American doughboys" and pp. 73–74: ''Two Arabian Knights'' "was made to cash in on the popularity of director [[Raoul Walsh]]'s ''[[What Price Glory? (1926 film)|What Price Glory]]'' (1926), for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central characters are identical, and the two films shared one of the writers, James T. O'Donahue. Whereas Walsh's film won plaudits for an earthy, rugged humor, Milestone's relied on intelligent acting at the expense of any slapstick comedy, a quality which helped win him the Academy Award for best direction."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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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ver, 2010: "he had won a "Best Comedy Direction" statuette for ''Two Arabian Knights'' (1927), beating out Charles Chaplin's ''The Circus''. Barson, 2020: Barson notes that "In 1930 the comedy and drama categories were merged" by the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Millichap, 1981 pp. 31–32: "Milestone's talents were recognized when he signed a four-year contract [with] Caddo" and p. 32: "triangle" Koszarski, 1976 p. 317: "his silent films were hailed for their freshness and vigor{{nbsp}}... the best of them ''The Caveman'', ''Two Arabian Knights'', ''The Racket''"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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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p. 74–75: Written by "one of Lubitsch's favorite writers{{nbsp}}... The Garden of Eden was a comedy-drama{{nbsp}}... written by [[Hans Kraly]], and once more Milestone's deft direction of players enhanced the often acidic sophistication of his material."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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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32: "Milestone's visual production obviously recalls the work of Lubitsch" and "impressive production included lavish sets [by] Menzies and excellent camera work by John Arn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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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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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inson, 1970 p. 43: "The most distinguished early gangster films were unquestionably the [[Josef von Sternberg|von Sternberg]] series (''Underworld'', ''[[The Drag Net]]'', ''[[The Docks of New York]]'') and Lewis Milestone's [[The Racket (1928 film)|The Racket]]. Gangster films were however to reach their notable peak in the next decade." Canham, 1974 p. 75: "Possibly to avoid type-casting as a comedy director, he change pace with his third picture for Hughes, [[The Racket (1928 film)|The Racket]] (1928), a gutty drama of gang-war and political corruption." Millichap, 1981 p. 32: "The Racket{{nbsp}}... influenced by Josef von Sternberg's Underworld (1927)." Cady, 2004 TCM: "The Racket (1928) was one of the movies that started the cycle of gangster pictures that led to ''Little Caesar'' (1931), ''The Public Enemy'' (1931) and ''Scarface'' (193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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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 75: Reception was "marred by a release date among a plethora of similar gangster films of variable quality." Millichap, 1981 p. 34: Best Picture nomination.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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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p. 34–35: Millichap notes that "for some reason" Milestone was credited for the film and that Tin Pan Alley was "justly forgotten".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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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ham, 1974 p. 75: Milestone's "first talkie, ''New York Lights'' (1929){{nbsp}}... a highly dramatic gangster film, scripted by [[Jules Furthman]] and photographed by [[Ray June]], but it gave little indication of Milestone's ability in adapting to sound techniques."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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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38: "generally regarded as{{nbsp}}... his masterpiece{{nbsp}}... in terms of both subject and style" and p. 53: "remains Lewis Milestone's most important film." Baxter, 1970 pp. 132–133: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930) is still one of the most eloquent of anti-war documents{{nbsp}}... one of the acknowledged classics of the American cinema." Thomson, 2015: "It is still one of the best films about the Great War."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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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ichap, 1981 p. 38: "the director had his first chance to translate a powerful literary statement into cinematic language{{nbsp}}... perhaps the best war film ever made". Editor's Forward: Milestone: "Throughout my career I've tried, not so much to express a philosophy, as to restate in filmic terms{{nbsp}}... my agreement with the author of a story I like is trying to say." From Preface: "like [[William Wyler]], a cinematic interpreter of literary tex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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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estone's film version Steinbeck's ''Of Mice and Men'' in its anti-omniscient viewpoint{{nbsp}}... increasing the complexity and the ambiguity of the work because of the lack of editorial judgement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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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such, Milestone conferred carefully on image motifs with art director Nicolai Remisoff, and cameraman Norbert Brodine] competently filmed the piece{{nbsp}}... and Milestone was much concerned with sound motifs enlisting Aaron Copland to do the musical score.
1981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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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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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wis Milestone's ''Of Mice and Men'' (1939) was a critical success and the film garnered four Oscar nominations for Best Picture, Best Sound Recording (Elmer A. Raguse), Best Musical Score (Aaron Copland), and Best Original Score (Aaron Copland).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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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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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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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wis Milestone's ''Of Mice and Men'' (1939) was a critical success and the film garnered four Oscar nominations for Best Picture, Best Sound Recording (Elmer A. Raguse), Best Musical Score (Aaron Copland), and Best Original Score (Aaron Copland). While this achievement might sound reasonably impressive alone, it's downright stellar when one considers that the film received these recognition in 1939, Hollywood's greatest year.
2014
[113]
웹사이트
The film's tragic, violent ending is one of the most memorable in all of movie history. Audiences at the time were so troubled by this narrative of slowly-rising defeat, the film failed miserably at the box office. Apparently, it was one thing to read such a thing, but another altogether to watch it unfold onscreen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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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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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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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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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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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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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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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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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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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141]
서적
Milestone shared credit for some work on Guest in the House (1944), credited to director John Brahm which dealt with the evil influence of an apparently innocent but sick young lady (Anne Baxter in a dress rehearsal for her outstanding performance in Joseph L. Mankiewicz's All About Eve (year)."
1974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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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 appendix ruptured during filming and had it removed.
1981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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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lm was another labor of love and the book was my script and Rossen and Milestone relied heavily on [Brown's] novel and Milestone realized the work in strong visual terms
1981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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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alk in the Sun (1945) was a stylistically adventurous war drama, adapted by Robert Rossen from the novel by Harry Brown. The film focuses almost entirely on the states of mind of several soldiers (Andrews, Conte, and John Ireland) as they try to take a Nazi-held farmhouse in Italy.
2020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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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ral outlook of the soldiers imply a structural and moral change by [the characters] tacit acceptance of the conditions of war.
1974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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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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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istically portrays the effects of war on combat soldiers. And p. 132: Milestone avoids melodramatic and cliches and All Quiet his earlier masterpiece The film synthesized his reappraisal of men in war. The plot was sparse, but tightly constructed in a series of episodes (all containing underlying melancholia). The dialogue was deliberately stylized: repetition, catch phrases and obsessional figures produced as effect of blank verse, the rhythm of which heightened the sense of fear and isolation The effect is closer to the antiwar message of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than to the gung-ho heroics of most World War II pictures. the cinematographer Russell Harlan handles ''A Walk in the Sun'' with great skillnbsp... Also striking is Milestone's frequent use of lateral tracking shots during the combat scenes, directly recalling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TCM
1981, 1974, 2020, 2007
[148]
서적
Films produced after the Hitler–Stalin pact was broken and Russia joined the Allies of World War II were to haunt their creators in the McCarthy era, when various witch hunters would try to sniff out any sympathy with Communism. In most cases, this romanticizing of the Eastern Front seems more commercially than politically motivated.
1981
[149]
서적
in the wake of the Cold War the HUAC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the Catholic League of Decency, the Motion Picture Alliance for the Preservation of American Ideals and the Alliance for Preservation American Values put up together the infamous blacklists of people presumed to be members of the Communist Party, or have communist beliefs. Hearings regarding Communist infiltration of the Motion Pictures were held by HUAC in 1947, and the main targets were the contributors to wartime [Hollywood] pro-Soviet pictures
2013
[150]
서적
Quoted from a 1979 interview with Milestone conducted by Millichap. See footnote in Millichap.
1981
[151]
서적
Director Lewis Milestone was part of the group of the Hollywood directors (who invoked the first [fifth] amendment) to be summoned by the [Committee] for their [suspected] involvement with the Communist Party. He together with another seven directors and screenwriters finally managed to avoid testifying. As for the rest of the Hollywood Ten, they remained the main victims of the Hollywood Purges, each of them being tried and sentenced for contempt of the Court Unlike The Hollywood Ten, he was able to keep working through these tense times.
2013, 1981
[152]
서적
Although suspected of having communist leanings, Milestone was never called to testify before the HUAC, and he was never officially blacklisted. However, for much of the 1950s, he struggled to find film assignmentsnbsp.... Milestone worked in television for a few yearsnbsp.... Toward the end of the 1950s, Milestone's "greylisting" was lifted. a period of fear, betrayal and witch-hunting hysterianbsp... the ranks of key contributors to the movie-making process were appreciably thinned.
1981, 2020, 1968
[153]
서적
According to some, Milestone was a victim of the blacklist did guilt by association block the financial backing necessary for truly creative projects, or did pressure make him opt for 'safe' subjects in ''Arch of Triumph'', ''The Red Pony'' and ''Halls of Montezuma''?. Milestone refused to comment of this side of his life: evidently his always found it very painful.
2001, 1981
[154]
서적
In the postwar period his career was undoubtedly affected by the McCarthy Communist witch-hunts. In 1949, he was blacklisted for his left wing associations of the 1930's and for the apparent pro-Communist leanings shown in his movie 'The North Star' of 1943.
2020
[155]
서적
Between them the writer and director created a taut, harsh tale of American moral corruption which became a classic example of the post-war Hollywood style known as film noir
TCM
2003, 1981
[156]
서적
See here for definitions of film noir, re: Romanticism and German/Austrian directors, reaching its fullest realization in the Forties Lewis Milestone, in 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 (1946), also created a striking addition to film noirnbsp.... Replete with impressive images of cruelty and destructiveness, this chef d'oeuvre could not have been more persuasively directed Milestone's 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 proves a perfect example of film noir, a dark revelation of a corrupt and corrupting urban Americanbsp... not only one of the best of its type [it] remains one Milestone's best films, a dramatic confirmation of the director's diverse and generous gifts Robert Rossen's literate and intelligent screenplay, a work which recalls literary sources a diverse as Eugene O'Neill and John O'Hara Milestone assistednbsp... by an excellent cast a classic film noir which introduced Kirk Douglas to the movie-going worldnbsp.... Dark, twisted and gripping, the picture was an all-around triumph.
TCM
1968, 1981, 2003
[157]
서적
Between them the writer and director created a taut, harsh tale of American moral corruption which became a classic example of film noir. The Strange Love of Martha Ivers (1946) was a departure for Milestone, an effective film noir starring Barbara Stanwyck, Lizabeth Scott, and (in his film debut) Kirk Douglas. the viciousness of dialogue and character reflected a cynical approach to modern society a powerful demonstration of the destructive distortion of identifynbsp... which stemmed from an obsessive devotion to money and power. Kirk Douglas, in his screen debut
1981, 2020, 1974
[158]
서적
Victor Milner's cinematography renders the requisite stylistic effects of film noir the sound track is enhanced by Miklos Rozsa's brilliant original score [which] presents themes for each of the characters and then skillfully intertwines and contrasts them in an almost perfect counterpoint to the visual images.
1981
[159]
서적
the minatory score ofnbsp... Miklos Rozs. The final cut was marred by Wallis's post-production insertion of close-ups to promote his rising Paramount property Lizabeth Scott. Only one member of the production staff really hindered Milestone: producer Hal B. Wallis [who insisted] on inserting a number of pointless close-ups of his latest starlet, Lizabeth Scott, in Milestone's finished director's print. The inserts [of Scott] stand out like sore thumbsnbsp... the rest of the film is as faultless in its visual rhythms as everything Milestone ever did.
1968, 1981
[160]
서적
One of several independent film companies attempting to establish a foothold in Hollywood was Enterprise Productions, which generated a string of quality pictures in the late 1940snbsp... Enterprise's biggest production is director Lewis Milestone's Arch of Triumph, from a novel by the noted Erich Maria Remarque, who had earlier written the source novel for Milestone
TCM
2014
[161]
서적
Enterprise Productions put everything it had into Arch of Triumph, with production values the equal of any big studio filmnbsp... the highly anticipated movie seemed a guaranteed hit. Producers [at Enterprise Productions] saw the adaptation of the best-selling novel as a blockbuster on the scale of Gone with the Wind (1939).
TCM
2014, 1981
[162]
서적
Adapted from a novel by Erich Remarque, Arch of Triumph is set on the eve of World War II in the Paris of desperate anti-Nazi refugees. Charles Boyer is one, an idealistic doctor, who falls in love with a professional courtesan and chanteuse of mystery (Ingrid Bergman)
2014, 1981
[163]
서적
The first problem was that Enterprise pushed [the production] toward glamorous romance and bars, brothelsnbsp... [and the film's] conclusion is changed to conform to Code.
1981
[164]
서적
Boyer and Bergman were badly miscast. Boyer, a matinee idol [is unconvincing as] a refugee doctor, while Bergmannbsp... portrayed as{{clarify|reason=typo?|date=May 2023}} international tart about as convincingly as Boyer would have played an All-American fullback.
1981
[165]
서적
Arch of Triumph fails almost completely. A great part of the failure was beyond Milestone's control.
1981
[166]
서적
certain studio executives did not like the long version that Milestone turned in, so it was drastically pruned and re-edited, and today Milestone practically disowns Arch of Triumph. A major difficulty was that [producers cut Milestone's long version] from about four hours to a more conventional twonbsp... such drastic cutting destroyed the continuity of the work. Major characters were completely eliminated, loose ends of plot abound and the movie romance of Boyer and Bergman becomes even more central. The script, which Milestone helped write, is hopeless—disjointed and rich with pointless enigmas, although not enough to be truly surreal.
1974, 1981, 2014
[167]
서적
1981
[168]
서적
The Arch of Triumph should have been a much better film than it turned out to benbsp... based [as it was] on a solid literary property
1981
[169]
서적
audiences didn't [appreciate] the film and it earned back less than a third of its budget.
TCM
2014
[170]
서적
both an artistic and financial disaster. It grossed $1,5 million, while it cost almost $4 million to make.And p. 157: in later years he has practically disowned the film
1981
[171]
서적
1974
[172]
서적
After he completed ''Arch of Triumph'', Milestone reverted to the weak, semi-sophisticated comedy of his Paramount and RKO pictures of the 1930s in No Minor Vices (1949)nbsp... the movie seems to reprise My Life with Caroline (year){{clarify|reason=check quote; what is "(year)" doing here?|date=May 2023}}nbsp... Milestone labored to make the film interesting with stream-of-consciousness soliloquies and deft pansnbsp... but most reviewers found it dull stuffnbsp... it seems the kind of programmer that the director might have better avoided.
1981
[173]
서적
Milestone continued to work prolifically, turning our a rarely seen comedy, No Minor Vices
1974
[174]
서적
1981
[175]
서적
The Red Pony (1949) was an adaptation by Steinbeck of his book of four related stories. The coming-of-age film centers on a boy who bonds with his pony. Formed as a union of half a dozen poverty-row film studios, Republic Pictures in its early years didn't carry much prestige. This view changed in the late 1940s when the studio made a concerted effort to propel itself to more respectable ranks by producing 'serious' dramas with renowned filmmakersnbsp... [their] most expensive picture to date Milestone and Steinbeck became good friends while working on ''[[Of Mice and Men (1939 film)|Of Mice and Men]]'' (1939). And Republic, essentially a studio devoted to westerns and p. 158: The story set about 1910. Shot mainly on location, the film was part of Republic Studio's bid for 'prestige' that had also resulted in [[Orson Welles]]' ''[[Macbeth (1948 film)|Macbeth]]'' (1948). Its score by [[Aaron Copland]], its attractive restrained colornbsp... fully realized the studio's prestigious aspirations.
TCM
2020, 2008, 1981, 1968
[176]
서적
"Steinbeck served as screenwriter, his only adaptation of one of his own works, while Milestone took credit as both producer and director" and p. 159 and p. 168: The quote on "distorts" is a composite quote used for clarity. And p. 158: "The four separate tales [of the story sequence] are connected by common characters, settings and themes."
1981
[177]
서적
"A film of [high] caliber was Lewis Milestone's version of John Steinbeck's The Red Pony (1949), from a screenplay by Steinbeck. This entered with sensitivity and imagination into the world of childhood"
1968
[178]
서적
"The film's conclusion, altered to a stock happy ending represents the transformation of the plot character and theme in the screen version" of "one of Steinbeck's finest works of [literary] fiction" and p. 159 and p. 164 re: focus on "The Gift" and "The Leader of the People" with "The Great Mountains" expunged and "The Promise" severely cut. And on "willingly" See p. 168: "the author himself included [the happy ending] in the screenplay... [altering] the thematic thrust of the story sequence"
1981
[179]
서적
"the film quickly loses much of the power promised by the literary source and anticipated in the strong opening sequence."
1981
[180]
서적
"Myrna Loy plays against type here, and film historian Lawrence Quirk has wondered "why [she] took this role, merely a ranch housewife and mother who is very much on the periphery of this bucolic mood piece."
1981
[181]
서적
"Miles sensitivity often seems rather sugary and his anger at the world is more or less a tantrum."
1981
[182]
서적
"Like many Milestone films, it opens quite well [but] does not sustain the artistic intensity" and p. 168: "Although Milestone's The Red Pony is not as artistically successful as Steinbeck's story sequence it remains a sincere film adaptation" and pp. 160–161: "Milestone opens the film with a pre-title sequence which clearly recalls ''Of Mice and Men'' in both visual and aural imagery... establishing a complex relationship between the human characters and the natural world"
1981
[183]
서적
"his first technicolor film"
1974
[184]
서적
"Aaron Copland wrote the acclaimed film score."
2020
[185]
서적
"the movie proved a moderate success, both critically and financially."
1981
[186]
서적
1974
[187]
서적
Milestone on taking screenwriting credits: "'I seldom did' he said."
2003
[188]
서적
"Milestone... worked with [Blankfort on the screenplay], and it seems likely [Milestone's] own brand of liberal realism influenced the work... there are many interesting correspondences with [his 1930 film]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and "it concerns a Marine landing on a [Japanese held] Pacific island" that resembles the [[Okinawa Prefecture|Okinawa]] attack in 1945 "but it was produced during the Korean War."
1981
[189]
서적
"the marines fight because they are on the side of right, 'On God's side' [reflecting] the [[Cold War]] vision of the American position... [the film's] ultimate thematic thrust... obviously resembles many of the mindlessly self-congratulatory war films of the 1950s" and "for all its disconcerting patriotic entertainment values, [the film] also has moments of real insight into the horrors of war" and p. 170: The letter of a dead Marine is discovered by his comrades: "'war is too horrible for human beings'... the letter itself contains the film's thematic core"
1981
[190]
서적
"Milestone dismisses the film as a potboiler" and Milestone: "'It was really just a job, not a true opportunity to state my personal beliefs about war... I was collecting some money I needed very badly'"
1981
[191]
서적
"Flashbacks fill in the civilian lives and problems of the characters, and are quite well integrated"
1974
[192]
서적
"the final half-hour, the film deteriorates into a rather standard adventure movie"
1981
[193]
서적
"After ''Halls of Montezuma'' (1950) Milestone's movie career began to trail off and he never again reached his earlier heights.... After ''Halls of Montezuma'' he did no work for a year" and "In the postwar period his career was undoubtedly affected by the McCarthy Communist witch-hunts. In 1949, he was blacklisted for his left wing associations of the 1930s.
2020
[194]
서적
In the early 1950s he made "several low budget failures, such as 'They Who Dare' in 1954"
2020
[195]
서적
"the director's development paralleled Hollywood history as he tried his hand at television, foreign productions and earlier [film] classics. None of these films really require close analysis"
1981
[196]
서적
"the ploy resembled a routine Western format"
1974
[197]
서적
"Milestone's handling of the material was interesting to the extent of carrying sound and lack of dialogue to extremes, but the standard of playing was below par."
1974
[198]
서적
See here for camerawork, comparisons to [[John Ford]] and [[Howard Hawks]] depictions of the American West. And Burdened with a "hapless plot" Kangaroo "proves to be only another [of Milestone's] interesting failures."
1981
[199]
서적
"Fox loaded his next film [''Les Misérables''] with contract players, but Milestone was dealing with an indifferent script... lavish sets and model work helped capture the feeling of the piece"
1974
[200]
서적
"Casting does not aid Milestone's effort" and see p. 176 for "cliche-ridden" comment.
1981
[201]
서적
See p. 177 for quote And p. 176: "The final print bears every evidence of this attitude".
1981
[202]
서적
"many of his later films tend to be forgettable."
2010
[203]
서적
Excerpt quoted by Canham. And p. 104: Milestone once known for "his superlative craftsmanship [which had] earned his a place in film history" and "established professionals who had become more or less house directors at various studios suddenly [found themselves displaced] by new directors from television"
1974
[204]
서적
1981
[205]
서적
"The later half of the Fifties proved to be a key era in the history of Hollywood. It was a significant turning point in that it marked the end of the 'golden years of Hollywood; the gigantic star factory... had begun to crumble at the beginning of the decade under pressure from the spreading popularity of television,[as well as] the hysterical the publicity that arose from the investigation into Hollywood folk by the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 [which] stopped many careers dead, and sent other into exile of [[Ghost writer|"ghost"]] work. The studios began to tighten the purse strings... [and the industry resorted to] gimmicks and technical modification such as [[3D film|3-D]], [[CinemaScope]] and [[Cinerama]]"
1974
[206]
서적
See Canham's film summaries in Filmography section.
1974
[207]
서적
"Melba was an ill-fated attempt to cash in on the success of the recently filmed biography of [[Gilbert and Sullivan]]. [[Sam Spiegel]] produced the film for Milestone, but in spite of the presence of Patrice Munsel as [[Dame Nellie Melba]], it turned out to be a disastrous flop."
1974
[208]
서적
"the [Munsel] vehicle turned out to be another Hollywood travesty... [Milestone's] ersatz biography."
1981
[209]
서적
1981
[210]
서적
"Milestone had little success with the two films he had made in England" and "failure at the box office [with Melba and They Who Dare] was not a good omen for an established director, especially in the Fifties"
1974
[211]
서적
2020
[212]
서적
1974
[213]
서적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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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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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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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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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erved Projects
https://www.oscars.o[...]
[247]
서적
Millichap, 1981 p. 82: "in 1935 [Milestone] married Kendall Lee Glaezner" and p. 186: "In 1978, [Milestone] was shocked by the death of his wife"
[248]
문서
Millichap, 1981 p. 186: "Health problems plagued Milestone in later years{{nbsp}}... one personal project was an uncompleted autobiography, tentatively entitled Milestones" and p. 186: "After a succession of illnesses Lewis Milestone died on September 25, 1980, at the [[UCLA Medical Center]], five days before his eighty-fifth birthday."
Whitely, 2020: "In 1963 he was scheduled to direct 'PT 109'{{nbsp}}... he was replaced after suffering a stroke. He was forced into retirement by his ill health and spent the last decade of his life confined to a wheelchair."
[249]
웹사이트
'Western Front,' As Good As Old
https://www.washingt[...]
1999-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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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s Well With 'All Quiet'
https://www.latimes.[...]
1998-05-31
[251]
서적
Millichap, 1981 p. 189
[252]
문서
Millichap 1981 pp. 189–190
Baxter, 1970 pp. 132–133: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930) [noted for] the battle scenes, with their endless tracking shots and artfully designed soundtracks"
[253]
문서
Walsh, 2001
[254]
문서
Baxter, 1970 p. 132 "Neither a consistent, nor a commercial director, he nevertheless began his Thirties career on a high point, with one of the acknowledged classics of the American cinema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1930)]" and p. 133: "Unfortunately, Milestone did not live up to the promise of his first major films"
Silver, 2010: "Like his fellow Russian émigré Rouben Mamoulian, however, Milestone's early promise was never truly fulfilled."
Koszarski, 1976 p. 317: "by the late 30s the innovative flair that had marked his earlier work had dampened"
[255]
서적
Canham, 1974 pp. 104–105
[256]
문서
Millichap, 1981 p. 144: "Milestone always needed a strong literary vehicle to create a successful film"
Barson, 2020: "An avid reader of literature, [Milestone] was especially known for his realistic dramas, many of which were literary adaptations."
Canham, 1974 p. 81: "above all it was the technique of Milestone's film that rightly led to his fame. The [camera] movement became the message"
[257]
문서
Millichap, 1981 p. 189: "the technical expertise he acquired from years of editing evolved into an eclectic cinema style which enlivened even his dullest efforts and made possible the artistry of his classic works."
Canham, 1974 p. 71: "[Milestone] has perhaps over-used the lateral tracking shot"
[258]
문서
Walsh, 2001
Hoberman, 2014: Walsh and Hoberman forms a composite quote from Sarris in his American Cinema (1968).
Silver, 2010: "Andrew Sarris had it right when he said that Milestone 'is almost the classic example of the uncommitted director.'"
Millichap, 1981 Preface: "Milestone was somewhat overpraised in the early stages of his career, and a corresponding critical reaction set in during his later years{{nbsp}}... the negative judgements of Andrew Sarris set the tone."
[259]
서적
Canham, 1974 p. 71
[260]
문서
Millichap, 1981 pp. 189–190 And:from author's Preface: "Milestone's{{nbsp}}... uneven body of work that defies easy categorization, analysis or evaluation." and Millichap, 1981 Editor's Foreword (Warren French), re: "was notably uneven" passage.
[261]
서적
Koszarski, 1976 p. 317
[262]
문서
Koszarski, 1976 p. 317: Note that Koszarsk's analogy is based on an essay, "The Reign of the Director", carried in ''New Theatre and Film'', March 1937, by Lewis Milestone, reprinted in the 1976 book. Milestone's theme concerns the decline of the artistic, independent and autonomous director (e.g. D. W. Griffith, James Cruze and Erich von Stroheim) and the rise of the Hollywood studio system. The saplings bend to the studio "storm"; the oaks resist and are uprooted.
[263]
웹사이트
THE 1ST ACADEMY AWARDS
https://www.oscars.o[...]
2018-12-04
[264]
웹사이트
THE 3RD ACADEMY AWARDS
https://www.oscars.o[...]
2018-12-04
[265]
웹사이트
THE 4TH ACADEMY AWARDS
https://www.oscars.o[...]
201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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