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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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북장로교회(PCUSA)는 1789년 필라델피아에서 첫 총회를 개최한 칼뱅주의 교회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따르며, 제2차 대각성 운동과 노예 문제로 분열과 재결합을 반복했다. 1906년 컴벌랜드 장로교회와 재결합했고, 1922년부터 1936년까지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을 겪었다. 1958년 북미 연합 장로교회와 합병하여 미국 연합 장로교회(UPCUSA)가 되었고, 신학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며, 선교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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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장로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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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분류 | 개신교 |
성향 | 주류, 개혁교회 |
정치 체제 | 장로교 정치 |
관련 단체 | 1801년 연합 계획 (뉴잉글랜드 조합교회와 함께, 1801–1837) 연합 해외 및 국내 선교회 (미국 개혁 교회 및 미국 연합 개혁 교회와 함께, 1817–1826) 미국 국내 선교회 (1826) 연방 교회 협의회 (1908) 교회 간 세계 운동 (1918–1920) 연합 안데스 인디언 선교회 (1946) |
창립자 | 알 수 없음 |
창립일 | 1789년 |
창립 장소 | 펜실베이니아 필라델피아 |
분리된 교회 | 스프링필드 장로교회 (1803) 컴벌랜드 장로교회 (1810, 일부는 1906년에 재결합) 신학파 장로교인 (1838, 1869년에 재결합) 미국 남장로교회 (1861) 정통 장로교회 (1936) |
합병된 교회 | 미국 연합 장로교회 (1958) |
교구 | 1957년에 8,351개 |
교인수 | 1957년에 280만 명 |
목사 | 1957년에 10,261명 |
역사적 배경 | |
기원 | 스코틀랜드 교회 및 얼스터 시노드 |
2. 역사적 배경
제2차 대각성 부흥 운동 시기에 컴벌랜드 장로교회가 미국 북장로교회(PCUSA)에서 분리되었다.[4] 1836년, PCUSA는 부흥을 지지하고 온건 칼뱅주의 신학을 따르는 뉴 스쿨과, 전통적 예배 방식과 엄격한 칼뱅주의를 고수하는 올드 스쿨로 분열되었다가 1869년에 재결합했다.[4]
1861년, 노예 문제로 미국 남부의 장로교회가 PCUSA에서 분리되어 미국 장로교회(PCUS)를 형성했다. 남부에서 PCUSA에 남은 교회는 '북부 교회'라고 불렸다.[4] 1906년, 컴벌랜드 장로교회의 많은 수가 PCUSA와 재결합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알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수정되었다.[4]
1922년부터 1936년까지 PCUSA는 기독교 근본주의(복음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간의 메이첸 논쟁을 겪었다. 이 논쟁으로 PCUSA에서 분리된 보수파가 정통 장로교회를 형성했다.[4] 1958년, PCUSA는 북미 장로교회와 합병하여 미국 연합 장로교회(UPCUSA)를 형성했다. 1983년, UPCUSA는 현재의 USA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U.S.A.〉)가 되었다.[4]
2. 1. 식민지 시대 (17세기 - 1776)
17세기 후반, 장로교 신자들이 대영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와 스코치-아일랜드 이민자들은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중부 식민지에 장로교 세력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4]2. 1. 1. 초기 조직 (1650-1729)
장로교는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서 기원한다. 존 칼빈의 사상은 울리히 츠빙글리의 사상을 바탕으로 개혁주의 사상을 확립했다.[1] 존 녹스는 제네바에서 칼빈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을 이끌었고, 그 결과 스코틀랜드 교회는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 정치 체제를 채택했다.[2] 얼스터 스코틀랜드인들은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토대를 마련했다.[3]17세기 후반, 장로교인들은 대영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스코틀랜드와 스코치-아일랜드 이민자들은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중부 식민지에 장로교 세력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4] 1706년 이전에는 장로교 교회들이 노회나 시노드로 조직되지 않았다.
1706년, 프랜시스 매키미 등 7명의 목사들이 북미 최초의 노회인 필라델피아 노회를 설립했다. 이 노회는 회원 간의 친교와 훈련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점차 통치 기구로 발전했다. 초기 회원 교회들은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에 있었다. 이후 성장에 따라 1717년에 필라델피아 시노드("총회")가 창설되었다. 시노드 구성원은 모든 목사와 각 교회에서 선출된 장로 1명이었다.
당시 시노드는 공식적인 신앙 고백이 없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와 얼스터 시노드는 성직자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준수를 요구했다. 1729년, 시노드는 채택 조항을 통과시켜 성직자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동의하도록 했다. 그러나 신앙 고백 준수는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조항"으로 간주되는 부분에만 요구되었다. 목사들은 양심의 가책을 노회나 시노드에 밝힐 수 있었고, 시노드는 목사의 견해가 허용 가능한지 판단했다. 이 타협안은 신앙 고백을 엄격하게 준수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2. 1. 2. 신앙고백 논쟁 (1729)
1730년대와 1740년대에 장로교회는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분열되었다.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부흥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복음주의 목사인 윌리엄 테넌트와 길버트 테넌트는 의식적인 회심 경험의 필요성과 성직자들 사이의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1]다른 장로교인들은 부흥주의가 교회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우려했다. 특히, 노회 경계를 넘어선 순회 설교 관행과 부흥주의자들이 다른 목사들의 회심 경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은 "신파"로 알려진 부흥주의 지지자들과 "구파"로 알려진 보수적인 반대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2] 구파와 신파는 즉각적인 구원의 확신의 가능성에 대해 이견을 보였지만, 논쟁은 주로 신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양측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됨, 예정, 그리고 중생이 단계적으로 일어난다고 믿었다.[3]
1738년, 노회는 순회 설교를 제한하고 목사의 교육 요건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는데, 신파는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었다.[4] 양측 간의 긴장은 1741년 5월의 총회까지 계속 고조되었고, 결국 두 파벌 사이의 명확한 분열로 끝났다. 구파는 필라델피아 총회를 장악했고, 즉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무조건적인 가입을 요구했으며, 주저를 표명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5] 신파는 뉴욕 총회를 설립했다. 새로운 총회는 채택법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가입할 것을 요구했지만, 안수를 받기 위해 대학 학위는 필요하지 않았다.[6]
2. 1. 3. 구파-신파 논쟁 (1730-1758)
1730년대와 1740년대에 장로교회는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분열되었다. 윌리엄 테넌트와 길버트 테넌트는 부흥주의 전통에서 비롯된 복음주의 목사로, 의식적인 회심 경험과 성직자들의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강조했다.[1]다른 장로교인들은 부흥주의가 교회 질서에 위협이 된다고 우려했다. 특히, 노회 경계를 넘어선 순회 설교와 부흥주의자들이 다른 목사들의 회심 경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은 "신파"와 "구파" 사이의 논란을 일으켰다.[2] 구파와 신파는 즉각적인 구원의 확신 가능성에 대해 이견을 보였지만, 논쟁은 주로 신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양측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됨, 예정, 중생이 단계적으로 일어난다고 믿었다.[3]
1738년, 노회는 순회 설교를 제한하고 목사의 교육 요건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는데, 신파는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었다.[4] 1741년 5월 총회에서 두 파벌은 분열되었다. 구파는 필라델피아 총회를 장악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무조건적인 가입을 요구했다.[5] 신파는 뉴욕 총회를 설립하고, 안수를 위한 대학 학위는 요구하지 않았다.[6]
thumb,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사]]
미국 장로교인들은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1740년 스코틀랜드 기독교 지식 보급 협회 뉴욕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4년 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신파 장로교인들은 1746년 프린스턴 대학교 설립에 기여했다.[7]
1758년, 신파 부흥주의가 덜 급진적으로 변하고 구파 장로교인들이 수적으로 감소하면서 양측은 화해했다. 두 총회는 뉴욕 및 필라델피아 총회로 통합되었다.[8] 통합된 총회는 신파의 조건에 따라 설립되었다. 노회는 안수 후보자를 심사하고 면허를 발급하며, 후보자는 학식, 정통성 및 "종교에 대한 실험적 지식"(개인적인 회심 경험)에 대해 심사받아야 했으며, 부흥은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되었다.[9]
2. 2. 미국 독립과 건국 (1770-1789)
1770년대 초, 미국의 장로교인들은 처음에는 독립을 지지하는 것을 꺼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장로교인들이 독립 전쟁을 지지하게 되었다.[1] 렉싱턴 전투와 콩코드 전투 이후, 뉴욕-필라델피아 노회는 1775년 5월에 장로교인들에게 제2차 대륙 회의를 지지하면서 조지 3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인 존 위더스푼은 "미국이 현재 무기를 들고 있는 대의는 정의, 자유, 그리고 인간 본성의 대의이다"라고 설교했다. 존 위더스푼과 다른 11명의 장로교인들은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2]전쟁 이전에도 많은 장로교인들은 단일 노회 시스템이 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팽창하는 교회의 요구를 더 이상 충족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모든 성직자는 노회의 연례 회의에 참석해야 했지만, 어떤 해에는 출석률이 30% 미만이었다. 1785년, 총회 창설 제안이 노회에 상정되었고, 정부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3]
이 계획에 따라, 기존의 노회는 총회의 권한 아래 4개의 새로운 노회(뉴욕 및 뉴저지, 필라델피아, 버지니아, 캐롤라이나)로 분할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와 비교했을 때, 이 계획은 지방회에 더 많은 권한과 자율성을 부여했다. 노회와 총회는 "교회의 삶을 통합하고, 항소를 고려하며, 교회 전체의 일반적인 복지를 증진하는 기관"이 되도록 했다.[4] 이 계획에는 교회의 헌법과 교리에 대한 주요 변경을 하기 전에 총회가 과반수 지방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1697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장벽법 조항이 포함되었다.[5] 헌법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함께 대·소요리 문답을 교회의 종속 표준 (즉, 성경에 종속됨)으로 포함했으며, (실질적으로 변경된) 웨스트민스터 지침도 포함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시민 정부에 대한 가르침을 미국의 관행에 맞게 수정했다.[6]
1787년, 이 계획은 비준을 위해 지방회에 보내졌다. 노회는 1788년 5월에 마지막 회의를 열었다. 미국 장로교의 첫 번째 총회가 1789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당시 교회에는 4개의 노회, 16개의 지방회, 177명의 목사, 419개의 회중, 약 18,000명의 회원이 있었다.[7][8]
2. 3. 19세기
제2차 대각성 운동(1790년경~1840년경)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부흥 운동은 버지니아 주 햄던-시드니 칼리지에서 시작되어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 등지로 퍼져나갔다. 1800년, 장로교 목사 제임스 맥그레디가 주도한 회합은 이러한 부흥 운동 중 하나였다. 특히 켄터키의 케인 리지 부흥 운동은 바턴 W. 스톤의 지도 아래 열린 스코틀랜드 성찬절 행사였는데,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었다.하지만 제1차 대각성 운동과 마찬가지로, 장로교 목사들은 새로운 부흥 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의견이 갈렸다. 일부는 신음, 웃음, 경련 등의 현상을 신학적 타협의 징후로 보았고, 알미니우스주의를 옹호하며 예정 교리를 거부하는 경향에 대해 우려했다.
이러한 신념 차이로 인해 리처드 맥네마와 존 톰슨 등은 켄터키 노회에서 탈퇴하여 1803년 독립적인 스프링필드 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나중에 스프링필드 노회를 해산하고 미국 재건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이 운동에서 그리스도 교회 (제자회)와 그리스도 교회 교파가 시작되었다.
한편, 컴벌랜드 노회는 목사 부족으로 인해 교육 수준이 낮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후보자를 면허했다. 1805년, 노회는 이들 중 다수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이단 혐의를 제기했으며, 1806년에는 노회를 해산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목사들은 1810년 컴벌랜드 장로교회(CPC)를 결성했다. CPC는 이중 예정 및 제한 속죄 교리를 거부하는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따랐다.
북동부에서도 부흥 운동이 교회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남부보다 절제되었지만, 제2차 대각성 운동은 북동부의 종교를 변화시켰고, 장로교와 회중교도가 이끄는 경우가 많았다. 뉴잉글랜드 신학(뉴 디비니티 및 뉴 헤이븐 신학)은 전통적인 칼뱅주의를 수정하여 원죄 전가 교리를 거부하고 정부적 속죄론을 채택하며 자유 의지를 강조했다. 필라델피아 노회는 1816년에 뉴 디비니티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총회는 동의하지 않고 뉴잉글랜드 신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1836년에 미국 북장로교회는 신파와 구파로 나뉘었다가 1869년에 재결합하였다. 1861년에는 노예 문제로 남부의 주에 있는 장로교회가 미국 북장로교회에서 분리되어 미국 장로교회를 형성하였다.
2. 3. 1. 초교파적 협력과 선교 운동
제2차 대각성 운동(1790년경~1840년경)은 미국 북장로교회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부흥 운동은 버지니아 주 햄던-시드니 칼리지에서 시작되어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 등지로 퍼져나갔다. 1800년, 장로교 목사 제임스 맥그레디가 주도한 회합은 이러한 부흥 운동 중 하나였다. 특히 켄터키의 케인 리지 부흥 운동은 바턴 W. 스톤의 지도 아래 열린 스코틀랜드 성찬절 행사였는데,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었다.하지만 제1차 대각성 운동과 마찬가지로, 장로교 목사들은 새로운 부흥 운동에 대한 평가에서 의견이 갈렸다. 일부는 신음, 웃음, 경련 등의 현상을 신학적 타협의 징후로 보았고, 알미니우스주의를 옹호하며 예정 교리를 거부하는 경향에 대해 우려했다.
이러한 신념 차이로 인해 리처드 맥네마와 존 톰슨 등은 켄터키 노회에서 탈퇴하여 1803년 독립적인 스프링필드 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나중에 스프링필드 노회를 해산하고 미국 재건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이 운동에서 그리스도 교회 (제자회)와 그리스도 교회 교파가 시작되었다.
한편, 컴벌랜드 노회는 목사 부족으로 인해 교육 수준이 낮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후보자를 면허했다. 1805년, 노회는 이들 중 다수의 자격을 정지시키고 이단 혐의를 제기했으며, 1806년에는 노회를 해산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목사들은 1810년 컴벌랜드 장로교회(CPC)를 결성했다. CPC는 이중 예정 및 제한 속죄 교리를 거부하는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따랐다.
북동부에서도 부흥 운동이 교회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 남부보다 절제되었지만, 제2차 대각성 운동은 북동부의 종교를 변화시켰고, 장로교와 회중교도가 이끄는 경우가 많았다. 뉴잉글랜드 신학(뉴 디비니티 및 뉴 헤이븐 신학)은 전통적인 칼뱅주의를 수정하여 원죄 전가 교리를 거부하고 정부적 속죄론을 채택하며 자유 의지를 강조했다. 필라델피아 노회는 1816년에 뉴 디비니티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총회는 동의하지 않고 뉴잉글랜드 신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총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820년대에 신앙고백 서약, 부흥주의, 뉴잉글랜드 신학 문제로 구파와 신파라는 두 파벌이 형성되었다. 신파는 부흥주의와 뉴잉글랜드 신학을 옹호했고, 구파는 부흥주의의 극단적인 측면에 반대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대한 엄격한 순응을 원했다. 구파 장로교의 이념적 중심지는 프린스턴 신학교였으며, 아치볼드 알렉산더와 찰스 호지의 지도 아래 개혁파 스콜라주의인 프린스턴 신학과 연관되었다.

신파 지도자들에 대한 이단 재판은 교단 내 분열을 심화시켰다. 필라델피아의 노회와 시노드는 앨버트 반스에게 이단 혐의를 인정했지만, 신파가 주도한 1831년 총회는 기소를 기각했다. 라이먼 비처는 1835년 이단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신파의 가장 급진적인 인물은 찰스 그랜디슨 피니였다. 피니는 부흥회, 즉흥 설교, 불안의 벤치, 기도 모임 등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앨버트 볼드윈 도드는 피니가 펠라기우스주의를 설교한다고 비난하며 장로교를 떠나라고 촉구했고, 피니는 1836년 회중 교회에 가입했다.
구파는 회중 교회와의 연합 계획이 장로교 교리와 질서를 훼손했다고 확신했다. 1837년 총회에서 구파 다수는 연합 계획에 따라 발견된 모든 사법부를 장로교에서 제거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총 3개의 뉴욕 시노드와 1개의 오하이오 시노드, 28개의 노회, 509명의 목사, 6만 명의 교회 회원(PCUSA 회원 중 5분의 1)이 교회에서 제외되었다. 신파 지도자들은 뉴욕주 오번에서 만나 오번 선언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칼빈주의 정통성을 16개 항목으로 방어했다.
1838년 필라델피아에서 총회가 열렸을 때, 신파 위원들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지만, 떠나 도시의 다른 곳에서 자체 총회를 소집해야 했다. 구파와 신파는 마침내 규모가 거의 같은 두 개의 분리된 교회로 갈라졌지만, 두 교회 모두 미국 장로교라고 주장했다. 펜실베이니아 대법원은 구파가 분열되지 않은 PCUSA의 법적 후계자라고 결정했다.[5]
2. 3. 2. 제2차 대각성 운동과 분열 (1800-1860)
제2차 대각성 운동 (c. 1790 – 1840)은 미국 북장로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버지니아 주 햄던-시드니 칼리지에서 시작된 학생 부흥 운동은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로 퍼져나갔다. 1800년의 부흥 운동은 장로교 목사 제임스 맥그레디가 주도한 회합에서 시작되었고, 켄터키의 케인 리지 부흥 운동은 바턴 W. 스톤의 지도 아래 열린 유명한 야외 집회였다. 이 집회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이 참여했다.[1]하지만 부흥 운동의 결과에 대해 장로교 목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일부는 참가자들의 "과도함"을 신학적 타협의 징후로 보았고, 부흥 운동 목사들이 자유 의지의 알미니우스주의를 옹호하며 예정 교리를 거부하는 경향에 대해 우려했다.[2]
이러한 신학적 갈등은 결국 분열로 이어졌다. 리처드 맥네마와 존 톰슨 등은 켄터키 노회에서 탈퇴하여 스프링필드 노회를 결성했고, 이들은 나중에 재건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3] 한편, 컴벌랜드 노회는 목사 부족으로 인해 교육 수준이 낮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후보자를 성직자로 임명했고, 이는 결국 컴벌랜드 장로교회 (CPC)의 분립으로 이어졌다. CPC는 이중 예정 및 제한 속죄의 칼뱅주의 교리를 거부하는 수정된 신앙 고백을 따랐다.[4]
북동부에서도 부흥 운동이 교회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 남부보다 절제되었지만, 장로교와 회중교도가 이끈 부흥 운동은 북동부의 종교를 변화시켰다. 뉴잉글랜드 신학(뉴 디비니티 및 뉴 헤이븐 신학으로도 알려짐)은 전통적인 칼뱅주의를 수정하여 원죄 전가 교리를 거부하고 정부적 속죄론을 채택하며 자유 의지를 강조했다. 필라델피아 노회는 뉴 디비니티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총회는 동의하지 않았다.[5]

노예 제도에 대한 논쟁도 교회 분열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필라델피아 및 뉴욕 노회는 온건한 노예제 폐지론적 입장을 표명했지만, 남부 장로교인들은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6] 1795년 총회는 노예 소유가 제명 사유는 아니지만 노예 제도의 궁극적인 폐지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818년 노예제 폐지론자 조지 본은 남부 노회로부터 성직 박탈을 당했다. 1830년대에 노예 제도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면서 교회는 구파-신파 논쟁으로 분열되었다.[7]
신파는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구파는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 교회가 입장을 표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남부 장로교인들이 구파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8]
1858년, 신파에 속한 남부 노회와 치리회는 탈퇴하여 친노예 제도인 미국 장로교 연합 노회를 설립했다. 미국 남북 전쟁 발발 후 1861년, 구파 총회는 가드너 스프링 결의안을 통과시켜 장로교인들에게 미국 헌법과 미국 연방 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반발한 남부의 구파 노회 대표들은 미국 남부 연합의 장로교회를 결성했다.[9] 남북 전쟁 이후, 미국 장로교회 (PCUS)는 "남부 장로교회"로, PCUSA는 "북부 장로교회"로 불리게 되었다.[10]

2. 3. 3. 구학파-신학파 논쟁 (1837)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영향으로 1800년의 부흥 운동, 켄터키의 케인 리지 부흥 운동과 같은 야외 집회가 열렸다. 이러한 부흥 운동에 대한 평가는 장로교 목사들 사이에서 갈렸다. 일부는 부흥 운동 참가자들의 과도한 행동을 신학적 타협의 징후로 보았고, 알미니우스주의를 옹호하고 예정 교리를 거부하는 경향에 대해 우려했다.[1]알미니우스주의 신념으로 이단 혐의를 받은 장로교 목사들은 켄터키 노회에서 탈퇴하여 스프링필드 노회를 결성했고, 이들은 나중에 미국 재건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1] 한편, 컴벌랜드 노회는 목사 부족으로 인해 교육 수준이 낮고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성직자 후보를 면허했고, 이로 인해 컴벌랜드 장로교회가 결성되었다. 컴벌랜드 장로교회는 이중 예정 및 제한 속죄 교리를 거부하는 수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따랐다.[1]
북동부에서도 부흥 운동이 일어나 뉴잉글랜드 신학이 확산되었다. 뉴잉글랜드 신학은 원죄 전가 교리를 거부하고 정부적 속죄론을 채택하며 자유 의지를 더 강조했다. 필라델피아 노회는 뉴 디비니티를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총회는 뉴잉글랜드 신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1]
2. 3. 4. 노예제 논쟁과 남북 분열 (1861)
1861년 미국 남부 주들의 장로교회는 노예 문제로 PCUSA(미국 북장로교회)에서 분리되어 미국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PCUS)를 형성했다. 남부에서 PCUSA에 남은 교회는 종종 '북부 교회'라고 경멸적으로 불렸다.[4]2. 3. 5. 북부 장로교회의 재결합 (1869)
1836년 미국 북장로교회(PCUSA)는 부흥 찬성파이자 온건 칼뱅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뉴 스쿨과, 전통적 예배 스타일과 엄격한 칼뱅주의를 고수하는 올드 스쿨로 분열되었다가, 1869년에 재결합했다.[4]2. 3. 6. 성서 고등 비평과 브릭스 재판 (1891-1893)
다윈의 진화론은 대부분의 북장로교인들이 어떤 형태의 유신론적 진화에 적응하면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고등 비평으로 알려진 새로운 성경 해석 학문은 매우 논란이 되었다. 비교 언어학, 고고학, 문학 분석을 활용하여 율리우스 벨하우젠과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와 같은 독일 고등 비평 지지자들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성경에 대한 가정을 의문시하기 시작했다.[1] 미국 장로교회(PCUSA)에서 논란의 선두에 있던 인물은 뉴욕 유니온 신학 대학교의 교수인 찰스 A. 브리그스였다.[2]브리그스는 예수의 처녀 탄생에 대한 믿음과 같이 여러 분야에서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고수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은 교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역사적 구조물이라는 그의 주장에 경악했다. 그는 모세가 오경을 저술했다고 믿지 않았고, 이사야서에 단일 저자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또한 그는 성경 예언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라고 부인했다. 1891년, 브리그스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설교를 했고, 이는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의 구두 영감 및 성경 무오성 교리에 반한다고 여겼다.[1][2]
이에 대응하여 63개의 노회가 브리그스에 대한 조치를 취하도록 총회에 청원했다. 1891년 총회는 유니온 신학 대학교의 성경 연구 교수직에 대한 그의 임명을 거부했고, 2년 후 브리그스는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목사직에서 정직되었다. 궁극적으로, 유니온 신학 대학교는 브리그스를 그의 지위에서 해임하는 것을 거부하고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2]
1892년, 총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열린 총회에서 발표된 포틀랜드 선언을 채택하는 데 성공했다. 이 선언은 성경 무오성에 대한 교회의 믿음을 재확인하고 "신앙과 실천의 유일무이한 무오한 규칙"으로서 성경을 긍정할 수 없는 모든 목사는 장로교 목사직에서 물러나도록 요구했다. 포틀랜드 선언은 브리그스를 이단으로 유죄 판결하는 데 사용되었다.[3]
2. 4. 20세기
20세기 초, 장로교인들은 성공회 신자들과 함께 미국 내 다른 종교 집단보다 더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았으며, 기업, 법률, 정치 분야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7][8] 이들은 보스턴 브라만과 같이 미국 상류층으로 여겨졌으며, 하버드 대학교와도 관련이 있었다.[9][10][11] 구 화폐 세력은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ASP")로 분류되었으며, 특히 성공회와 장로교와 관련이 깊었다.[12][13]1861년, 미국 남부의 주에 있는 장로교회는 노예 문제로 인해 PCUSA에서 떨어져 나와 미국 장로교회(PCUS)를 형성했다. 1906년에는 컴벌랜드 장로교회의 많은 수가 PCUSA와 재결합하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알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수정되었다.
PCUSA는 1922년부터 1936년까지 기독교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간의 메이첸 논쟁을 겪었다. 이 논쟁으로 인해 정통 장로교회가 분리되었다.
1958년에는 북미 장로교회와 합병하여 미국 연합 장로교회(UPCUSA)를 형성하였다. 이후 1983년에는 현재의 USA 장로교회 (Presbyterian Church〈U.S.A.〉)가 형성되었다.
2. 4. 1. 신앙고백 개정 (1903)

브릭스 이단 재판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칼빈주의적 예정론과 선택 교리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은 주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에는 계속해서 관련 제안이 들어왔다. 1903년, "성령"과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한 두 개의 장이 신앙고백에 추가되었고, 교황이 적그리스도라는 언급은 삭제되었다.[1]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반대한 것은 교회의 선택 교리를 명확히 하기 위해 새로운 "선언문"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선언문"이 알미니우스주의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2]
1903년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개정은 알미니우스주의 성향의 컴벌랜드 장로교회에서 많은 수의 교회가 1906년 PCUSA와 재결합하도록 이끌었다.[2] 이 재결합은 교리적 호환성과 컴벌랜드 장로교회의 인종 차별에 대한 우려로 PCUSA 내에서 논란을 일으켰지만, 압도적으로 승인되었다. 워필드는 교리적 근거로 이 합병을 강하게 비판했다. 프랜시스 제임스 그림키와 헤릭 존슨 같은 북부 장로교인들은 컴벌랜드 장로교인들이 재결합의 대가로 요구한 남부의 인종 차별적 노회 창설에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병은 압도적으로 승인되었다.[1]
2. 4. 2.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 (1922-1936)
20세기 초, 사회 복음 운동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원을 강조하며 장로교회 내에서 지지를 얻었다. 뉴욕 유니온 신학교 총장이자 진보주의 지도자인 헨리 슬론 코핀과 같은 주요 인물들이 이 운동을 옹호했다. 찰스 스텔즐은 미국 장로교회(PCUSA) 노동자 부서의 초대 책임자로서, 사회 복음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3년에 설립된 이 부서는 사회 복음 의제를 추구하는 최초의 공식 교파 기관이었다. 교회 역사가 브래들리 롱필드에 따르면, 스텔즐은 "하나님의 왕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아동 노동법, 근로자 보상, 적절한 주택, 그리고 악과 범죄에 대처하는 더 효과적인 방법을 옹호했다." 1908년, 이 부서는 교회 및 노동부와 이민부로 분할되었다.사회 복음이 교단 내에서 영향력을 넓히는 동안, 야구 선수에서 복음 전도자로 변신한 빌리 선데이의 사역은 복음주의와 부흥 운동 전통이 여전히 교단 내에서 강력한 세력임을 보여주었다. 선데이는 20세기 초 가장 저명한 복음 전도자가 되어, 그의 경력 동안 1억 명 이상에게 설교하고 약 100만 명을 회심으로 이끌었다. 스텔즐이 기독교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한 반면, 선데이는 주로 개인의 회심과 도덕적 책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1922년부터 1936년까지 PCUSA는 근본주의-모더니즘 논쟁에 휘말렸다. 1869년 구학파-신학파 재결합과 1893년 브릭스 이단 재판 이후 수년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1909년, 뉴욕 노회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교 면허를 부여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1910년 총회는 이 결정에 대한 항소에 따라 모든 사역 후보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5가지 본질적 또는 근본적인 교리, 즉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 예수의 부활, 예수의 기적을 긍정하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교리들은 나중에 ''The Fundamentals''라는 일련의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되었는데, 이 에세이는 부유한 장로교인 밀턴과 라이먼 스튜어트가 자금을 지원했다. 저자들은 더 넓은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나왔지만, 워필드, 윌리엄 에드먼, 찰스 에드먼, 로버트 엘리엇 스피어를 포함한 많은 수가 장로교인이었다.
1922년, 뉴욕의 저명한 목사 해리 에머슨 포스딕은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통해 교단 내에서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한 관용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보수적인 장로교 목사 클래런스 E. 매카트니는 "불신이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통해 자유주의가 "예배도,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없는 기독교"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J. 그레샴 매첸 또한 1923년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통해 포스딕에 응답하며 자유주의와 기독교는 서로 다른 종교라고 주장했다.
1923년 총회는 5가지 근본주의를 재확인하고 뉴욕 노회에 퍼스트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따르도록 지시했다. 한 달 후, 노회는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 않는 두 명의 목사에게 면허를 부여했고, 1924년 2월에는 포스딕을 무죄로 판결했으며, 그는 이후 장로교에서 직책을 떠났다.
같은 해, 자유주의 목사 그룹은 오번 신학교의 로버트 헤이스팅스 니콜스의 연구에 근거하여 오번 확언으로 알려진 신학적 견해를 옹호하는 성명을 작성했다. 1729년 채택법을 인용하여 이 확언은 PCUSA에 교리적 자유의 유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회 교리는 총회와 노회의 과반수의 행동을 통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확언에 따르면, 총회는 5가지 근본주의에 대한 준수를 요구하면서 위헌적으로 행동했다.
1925년 총회는 뉴욕 노회의 행동으로 인해 분열될 위기에 직면했다.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총회 의장 찰스 에드먼은 교회의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특별 위원회의 구성을 제안했다. 1926년에 발표된 위원회의 보고서는 교회의 신학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중재적 접근 방식을 찾고자 했다. 오번 확언에 동의하여 위원회는 총회에서 발표된 교리적 선언은 노회의 과반수의 승인 없이는 구속력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패배로, 이 보고서는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1929년에 총회가 여성을 평신도 장로로 안수하는 것을 승인했을 때 보수주의자들은 더욱 실망했다.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는 학교의 지도부와 교직원이 구학파 장로교뿐만 아니라 더 넓은 교회를 대표하도록 재조직되었다. 신학교의 새로운 이사 중 두 명은 오번 확언에 서명했다. 프린스턴의 구학파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매첸과 그의 동료 몇 명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했다.
교회의 선교 노력의 상태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이 발생했다.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의 상실을 감지한 초교파 평신도 해외 선교 조사는 1932년에 ''미션 재고: 100년 후 평신도 조사''를 출판하여 보편주의를 장려하고 기독교의 독창성을 거부했다. 조사가 처음에 PCUSA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미션 재고''가 PCUSA의 해외 선교 위원회의 견해를 나타낸다고 우려했다. 위원회 위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님이자 구세주"로 믿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도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회의적인 입장을 유지했으며, 이러한 두려움은 유명한 작가 펄 S. 벅을 포함한 모더니스트 선교사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벅은 처음에는 복음주의자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의 종교적 견해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1933년, 매첸과 다른 보수주의자들은 장로교 해외 선교를 위한 독립 위원회를 설립했다. 1년 후, 총회는 독립 위원회가 위헌이라고 선언하고 모든 교회 구성원에게 독립 위원회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매첸은 복종을 거부했고, 1936년에 그의 안수가 정지되었다. 이후 매첸은 보수주의자들의 탈출을 이끌어 나중에 정통 장로교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2. 4. 3. 신정통주의와 복음주의의 영향 (1940-1950)

1930년대 대공황이 닥치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주의는 신뢰를 잃었다.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자유주의의 실패, 즉 신의 내재성과 인간의 선함에 대한 과도한 강조, 그리고 미국 개신교를 세속주의, 과학, 미국 문화에 종속시킨 것을 바로잡기 위해 신정통주의로 돌아섰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대신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죄성을 강조했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신정통주의는 장로교 신학교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 시대의 저명한 장로교 신학자로는 엘머 조지 옴리그하우젠과 조셉 하루투니안이 있다.[14]
동시에, 복음주의는 장로교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1940년대 후반,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의 제일 장로교회에서 기독교 교육자 헨리에타 미어스의 노력으로 이 교회는 교단 내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다. 제일 장로교회의 전도는 벨에어 장로교회의 설립자 루이스 에반스 주니어, 미국 상원의 원목 리처드 C. 헐버슨, 그리고 캠퍼스 크루세이드 포 크라이스트의 설립자 빌 브라이트를 포함한 많은 저명한 인물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조지 마스든에 따르면, 미어스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서부 해안 장로교를 형성하는 데 더 많은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14]
2. 4. 4. 북미 연합 장로교회와의 통합 (1958)
1958년, 미국 북장로교회(PCUSA)는 100년 역사의 북미 연합 장로교회(UPCNA)와 합병했다. UPCNA는 1858년 코버넌터와 분리주의 장로교의 연합으로 형성되었다. 1937년부터 1955년까지, PCUSA는 UPCNA, 미국 장로교회, 성공회와 합병 협상을 진행했고, 최종적으로 UPCNA와의 합병을 결정했다.[14]1956년 PCUSA가 여성을 목사로 임명하기로 결정하자, UPCNA 내 보수적인 교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합병 지지도가 감소했다. (PCUSA는 1922년부터 여성들을 집사로, 1930년부터 장로로 임명해 왔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교단의 합병은 그 해 여름 피츠버그에서 성사되었으며, 새로운 교단의 이름은 미국 연합 장로교회(UPCUSA)가 되었다.[14]
3. 신학 및 신앙
미국 북장로교회는 칼뱅주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로서, 성경을 교리와 실천의 유일하고 오류 없는 원천으로 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을 표준 문서로 삼았다.[1][2]
19세기까지는 개혁주의 스콜라주의와 스코틀랜드 상식주의의 영향으로 성경 무오설을 강조하는 성경 문자주의적 해석이 주류를 이루었다.[3][4] 그러나 19세기 후반 고등 비평의 등장으로 성경 해석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고,[5] 1927년 총회는 "신학적 분권화"를 통해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6]
이후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되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대공황 등을 겪으면서 신정통주의가 등장하여 기독교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새로운 신학적 합의를 이루었다.[9][10][11][12][13]
3. 1. 주요 신학적 강조점
미국 북장로교회는 칼뱅주의 교회로서 다른 장로교 및 개혁 교회와 공통된 신학적 유산을 공유했다. 성경은 교리와 실천의 유일하고 무오류한 원천으로 간주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가장 중요한 종속 기준으로 인정했다. 목사와 다른 교회 임원들은 안수 서약의 일환으로 "성경에 가르쳐진 교리 체계를 담고 있는 이 교회의 신앙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채택"해야 했다.[1] 신앙 고백서 외에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도 사용되었다.[2]1930년대까지 개혁주의 스콜라주의에 기초한 성경 권위와 해석에 대한 "비교적 일관된" 관점이 장로교 사상을 지배했다.[3] 과학 혁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앙 고백서에 나타난 성경 무오설 교리는 성경 무오설로 변형되었는데, 이는 성경이 과학과 역사 문제에 있어 오류가 없다는 생각이다. 18세기와 19세기에 프린스턴, 하버드 및 기타 미국 대학을 지배한 스코틀랜드 상식주의가 이러한 성경 해석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상식 철학은 신학자들이 모든 시대와 문화의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가정하도록 장려했고, 따라서 현대의 해석자는 문화와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형태의 성경 문자주의는 장로교 대학과 신학교의 표준 가르침이었다.[4]
1800년대 후반, 고등 비평은 "성경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쓴 자료의 가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의 세계관과 사고 방식은 19세기 미국인과는 매우 다른 언어 구조와 문화적 맥락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지배적인 견해에 도전했다.[5] 이로 인해 무오설을 본질적인 교리로 여기는 다수와 그것이 "신앙과 삶"에 대한 성경적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믿는 소수가 분열되었다.[5] 1892년부터 총회는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기 위해 모든 목사가 긍정해야 할 신념을 명시하려 했다.[6] 1910년부터 1927년까지 신앙 고백서는 성경 무오설,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속죄, 예수의 부활, 예수의 기적이라는 5가지 근본적인 믿음에 관해 공식적으로 해석되었다.[7]
분열 가능성에 직면하여, 총회는 1927년 이후 "신학적 분권화"를 선택했다. 총회는 교회의 헌법을 수정하지 않고는 본질적인 신념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신앙 고백에 대한 대체 해석에 더 큰 관용을 허용했다.[6]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결과, 교회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온건한 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8]
1930년대에 자유주의 신학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자, 제1차 세계 대전, 대공황, 유럽 파시즘의 부상에 직면하여 그 전통의 낙관주의에 실망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신학 운동을 일으켰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서구 문화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더 견고한 신학"을 구축하기 위해 성경과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을 되돌아보았다.[9]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인류의 진화하는 종교적 의식의 기록"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인류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는 도구로 이해했다. 신정통주의는 기독교 근본주의와 달리 성경 비평을 수용하고 성경 무오설을 거부했다.[10]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분한 증언"이지만, 오류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 오류가 있는 문서였다.[11] 신정통주의는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신의 내재성보다는 전적인 타락에 대한 새로운 긍정, 교회 내에서의 세속주의와 문화적 적응에 대한 저항으로 특징지어졌다.[12] 1940년대까지, 신정통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 성경 신학 운동은 PCUSA 내에서 통일된 교리적 합의가 되었다.[13]
3. 2. 신학적 다양성
미국 장로교회는 칼뱅주의 교회로서 다른 장로교 및 개혁 교회와 공통된 신학적 유산을 공유했다. 성경은 교리와 실천의 유일한 무오류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를 비롯한 몇 가지 종속 기준을 인정했다. 목사와 다른 교회 임원들은 안수 서약의 일환으로 "성경에 가르쳐진 교리 체계를 담고 있는 이 교회의 신앙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채택"해야 했다.[1] 신앙 고백서 외에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문답도 사용되었다.[2]1930년대까지 개혁주의 스콜라주의에 기초한 성경 권위와 해석에 대한 "비교적 일관된" 관점이 장로교 사상을 지배했다.[3] 과학 혁명에 대한 반작용으로, 신앙 고백서에 나타난 성경 무오설 교리는 성경 무오설로 변형되었는데, 이는 성경이 과학과 역사 문제에 있어 오류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성경 해석 방식에는 18세기와 19세기에 프린스턴, 하버드 및 기타 미국 대학을 지배한 스코틀랜드 상식주의가 수반되었다. 상식 철학은 신학자들이 모든 시대와 문화의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가정하도록 장려했다. 따라서 현대의 해석자는 문화와 맥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형태의 성경 문자주의는 장로교 대학과 신학교의 표준 가르침이었다.[4]
1800년대 후반, 고등 비평이 등장하면서 "성경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쓴 자료의 가닥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의 세계관과 사고 방식은 19세기 미국인과는 매우 다른 언어 구조와 문화적 맥락으로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지배적인 견해에 도전했다.[5] 이로 인해 무오설을 본질적인 교리로 여기는 다수와 그것이 "신앙과 삶"에 대한 성경적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믿는 소수가 분열되었다.[6] 1892년부터 총회는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기 위해 모든 목사가 긍정해야 할 신념을 명시했다.[7] 1910년부터 1927년까지 신앙 고백서는 성경 무오설, 예수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속죄, 예수의 부활, 예수의 기적이라는 5가지 근본적인 믿음에 관해 공식적으로 해석되었다.[8]
분열 가능성에 직면하여, 총회는 1927년 이후 "신학적 분권화"를 선택했다. 총회는 먼저 교회의 헌법을 수정하지 않고는 본질적인 신념을 정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신앙 고백에 대한 대체 해석에 더 큰 관용을 허용했다.[9]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의 결과, 교회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온건한 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10]
1930년대에 자유주의 신학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자, 제1차 세계 대전, 대공황, 유럽 파시즘의 부상에 직면하여 그 전통의 낙관주의에 실망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새로운 신학 운동을 일으켰다. 신정통주의자들은 서구 문화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더 견고한 신학"을 구축하기 위해 성경과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들을 되돌아보았다.[11]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을 "인류의 진화하는 종교적 의식의 기록"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인류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계시하는 도구로 이해했다. 동시에, 신정통주의는 성경 비평을 수용하고 성경 무오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구별되었다.[12] 성경은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분한 증언"이지만, 오류가 있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 오류가 있는 문서였다.[13] 신정통주의는 또한 신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 신의 내재성보다는 전적인 타락에 대한 새로운 긍정, 교회 내에서의 세속주의와 문화적 적응에 대한 저항으로 특징지어졌다.[14] 1940년대까지, 신정통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된 성경 신학 운동은 PCUSA 내에서 통일된 교리적 합의가 되었다.[15]
4. 조직 및 제도
미국 북장로교회는 장로교 정치 체제에 따라 조직되었다. 교회의 헌법은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와 요리 문답, 1645년 장로교회 정부 형태에서 개정된 정부 형태, 스코틀랜드 징계서에서 개정된 징계서, 그리고 1645년 웨스트민스터 지침서에서 개정된 하나님의 예배를 위한 지침서로 구성되었다.[15] 장로교 정치 체제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회의 행정은 일련의 사법부에 위임되었다.[15]
지역 교회는 회중이 선출하고 목사가 사회를 맡는 통치 당회(통치 장로의 회의)에 의해 통치되었다. 당회는 교회의 영적 사무를 감독하고 지침서에 따라 공적 예배를 제공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교회 구성원에게 교회 징계를 시행할 책임도 있었다.[15]
지역 교회는 지리적으로 정의된 노회로 추가 조직되었다. 노회는 관할 구역 내의 모든 목사와 각 당회에서 선출된 한 명의 통치 장로로 구성되었다. 대학 교회는 목사의 수에 비례하여 두 명 이상의 통치 장로를 대표할 자격이 있었다. 노회는 목사 후보자를 심사, 면허 및 안수할 뿐만 아니라 목사를 재판하고 해임할 책임이 있었다. 또한 교리적 또는 징계적 질문을 해결할 책임이 있었으며, 당회에서 상소 법원의 기능도 수행했다. 노회의 업무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집행 위원회가 임명되었고, 사법 사건은 사법 위원회로 회부되었다.[15]
세 개 이상의 노회는 노회를 형성했고, 매년 회합을 가졌으며, 구성원은 노회를 대표하는 목사와 통치 장로였다. 노회는 노회로부터의 상소 법원 역할을 했다. 또한 아래의 노회와 당회가 교회의 헌법을 준수하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었다.[15]
교회 내 최고 사법부이자 상소 법원은 총회였다. 총회 구성원은 노회에서 선출된 동수의 목사와 통치 장로로 구성되었다. 총회 구성원은 "총회 위원"이라고 불렸다. 총회는 매년 개최되었으며 사회자가 주재했다. 또한 집행 위원회와 사법 위원회를 임명했다. 총회는 헌법 개정을 제안할 수 있었지만, 효력을 발생하기 전에 모든 노회의 과반수 승인을 받아야 했다.[15]
교단의 사업은 다양한 교회 위원회를 통해 수행되었다. 1922년 기준으로 이러한 위원회는 다음과 같다.
- 국내 선교 위원회[15]
- 해외 선교 위원회[15]
- 교육 위원회: 신학교 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15]
- 출판 위원회: 종교 서적 출판과 교단의 주일학교를 감독했다.[15]
- 교회 건축 기금 위원회: 자체 교회 건물을 건축할 수 없는 교구에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사택 건설을 돕기 위해 무이자 대출을 제공했다.[15]
- 구제 위원회: 은퇴 및 장애 목회자와 선교사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사망한 목회자의 가족에게도 지원을 제공했다. 또한 장애 목회자, 사망한 목회자의 미망인 및 고아를 위한 시설을 운영했다.[15]
- 흑인 선교 위원회: 남북 전쟁이 끝날 무렵 해방 노예를 위한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23년까지 미국 남부에서 계속 운영되었다. 그 책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설교자 및 교사의 교육 및 공급을 돕는 것이 포함되었다. 또한 흑인 학교, 교회, 대학 및 신학교를 건설하고 지원했다.[16]
- 대학 및 아카데미 지원 위원회: 제휴 고등 교육 기관에 대한 기금 모금을 감독했다.[15]
1923년에 미국 북장로교회 위원회에 대한 일반적인 개편이 있었다. 국내 선교 위원회 및 흑인 선교 위원회를 포함한 7개의 위원회가 폐지되었고, 그 업무는 새로 설립된 국가 선교 위원회에 통합되었다.[17]
5. 선교
미국 북장로교회는 해외 및 국내 선교에 힘썼다. 해외 선교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졌으며, 특히 일본 선교에는 제임스 커티스 헵번 등이 초기에 파견되었다. 국내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 유대인, 아시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펼쳤다. 이러한 선교 활동을 통해 교회, 학교, 병원 등 다양한 기관들이 설립되었다.[2]
5. 1. 해외 선교
구파-신파 분열 이후 구파 총회는 해외 선교부를 설립했다. 선교는 아프리카, 브라질, 중국, 콜롬비아, 인도, 일본, 태국에서 시작되었다. 1870년 신파(회중교회 ABCFM과 협력)가 구파와 재결합했을 때, 해외 선교부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에서 ABCFM의 운영을 인수했다. 재결합한 교단은 또한 한국, 중앙 아메리카, 남아메리카, 필리핀으로 선교를 확대했다.1837년, 뉴 스쿨과 올드 스쿨이 분열된 다음 해에 기존의 미국 해외 선교 위원회에 참여하는 선교사 파견을 중단하고, 올드 스쿨은 자체적인 해외 전도국인 미국 장로교 해외 전도국을 설치했다. 최초의 선교사 중 한 명은 제임스 커티스 헵번이었다.
1854년 도쿠가와 막부와 미국 정부 간에 미일 화친 조약이 체결되자, 최초로 청에 거주하던 선교사 Divie Bethune McCartee영어에게 일본으로 선교사로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일반인의 일본 여행은 허용되지 않아 실패했다.
1858년 7월 29일에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어 제8조에서 기독교 선교사의 일본 입국이 가능해졌다. 해외 전도국은 자원한 헵번과 청나라에 거주하던 John Livingstone Nevius영어를 일본 선교사로 임명했다.
초기 일본 선교사는 다음과 같다.
선교사 | 파견 연도 |
---|---|
J.C. 헤본 | 1859 |
D. 톰슨 | 1862 |
E. 콘즈 | 1868 |
C. 캐루더스 | 1869 |
H. 루미스 | 1872 |
E.R. 밀러 | 1872 |
O.M. 그린 | 1873 |
J.C. 발라 | 1875 |
W. 임브리 | 1875 |
K.M. 영맨 | 1875 |
G.W. 녹스 | 1877 |
T.C. 윈 | 1877 |
5. 2. 국내 선교
구파-신파 분열 이후 구파 총회는 해외 선교부를 설립했다. 국내 선교부는 아메리카 원주민, 유대인, 아시아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수행했다. 장로교 역사학회 소속 프레더릭 J. 하우저 주니어에 따르면, PCUSA의 선교 사업은 "토착 교회, 다양한 교육 시설, 병원, 고아원, 신학교 및 교회의 교육, 의료, 복음 전파 사역을 반영하는 기타 기관"을 설립했다.[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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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中島耕二2003年、15-16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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