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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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학 혁명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일어난 과학 분야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 과학을 기반으로 중세 이슬람 과학을 거쳐 발전했으며,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발견 등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적 방법론의 발전과 함께, 과학 단체의 등장과 과학자들의 협력, 전문 학술지 발간 등 과학 활동 방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의 역할 변화, 계몽주의의 발달, 산업 혁명으로 이어지는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과학 혁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하며, 여성 과학자의 배제와 같은 문제점도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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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혁명 - 반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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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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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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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과학적 혁명 과학 변혁 |
개요 | |
시기 | 1543년–1687년 |
위치 | 유럽 |
결과 | 코페르니쿠스 혁명 계몽주의 시대 |
주요 내용 | |
핵심 변화 | 고전 역학의 발전 과학적 방법의 발전 물리학과 천문학의 급격한 변화 |
주요 인물 |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 |
주요 개념 | 지동설 만유인력 관성의 법칙 |
영향 | |
사회적 영향 | 과학적 사고의 확산 종교적 권위의 약화 기술 발전의 촉진 |
철학적 영향 |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발전 기계론적 세계관의 등장 |
다음 단계 | 계몽주의 시대 |
2. 역사적 배경
과학의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이를 통칭하여 '''과학 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과학 혁명은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특정 시기의 변화를 지칭하는데, 이 시기에는 과학의 내용뿐만 아니라 연구 방법, 그리고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 자체에서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는 1949년 저서 《근대 과학의 기원》(The Origins of Modern Science)에서 서구 사회를 근대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 종교 개혁이나 르네상스가 아닌 바로 이 과학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168][164] 그는 또한 기존의 유럽 중심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17세기 근대 과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유럽 문명이 반드시 세계사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관점을 제시했다.[165][166]
과학 혁명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하여 우주의 중심이 태양임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고, 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며 그 정점에 달했다고 평가받는다. 약 150년에 걸쳐 진행된 이 혁명은 천문학 분야에서 시작되어, 지구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물리학(역학)의 필요성을 낳았고, 뉴턴은 이를 통합하는 이론적 체계를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각 분야의 큰 변화를 각각 '''천문학 혁명'''과 '''고전 역학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과학 혁명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중세 시대에 재발견되고 발전된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과학, 그리고 이를 계승하고 정교화한 로마/비잔틴 과학 및 중세 이슬람 과학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24] 과학 혁명 이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 모델이 서구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대와 중세의 과학적 성취는 과학 혁명의 중요한 지적 자원이 되었지만, 동시에 혁명을 통해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5][31]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 운동과 고전 학문에 대한 관심 증가는 과학 혁명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고대 문헌의 재발견과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의 확산을 촉진했으며, 이는 기존의 지식 체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새로운 아이디어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과학 혁명의 주요 인물들 역시 고대 학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혁신적인 이론을 발전시켰으며, 때로는 고대 사상가들에게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32][1][2][3][33][34][35]
그러나 과학 혁명은 단순히 고대 지식의 부활에 그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실험과 관찰을 통해 자연 현상을 탐구하고, 수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자연 법칙을 기술하려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이 강조되었다. 또한, 우주를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이해하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등장하여 기존의 목적론적 자연관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우주론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것이었으며,[39] 근대 과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버터필드가 지적했듯이, 과학 혁명은 "근대 세계와 근대 정신의 진정한 창시자"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64]
2. 1. 고대 과학의 유산
과학 혁명은 중세 시대에 재발견되고 발전된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과학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로마/비잔틴 과학과 중세 이슬람 과학을 통해 더욱 정교화되었다.[24]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 신앙의 특정 측면과 과학 발전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25][26] 과학 혁명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은 여전히 중요한 지적 틀이었지만, 자연철학자들은 점차 그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5]고전 고대에서 유래한 핵심 과학 개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상당한 변화를 겪었으며, 과학 혁명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부정되었다.[5] 특히 다음과 같은 고대의 개념들이 근본적으로 변형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 우주의 중심에 지구를 배치한 계층적 구조를 상정했다. 그는 지상계와 천상계가 서로 다른 원소와 운동 법칙을 따른다고 보았다.
- 지상계는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고전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물체는 자신의 원소에 맞는 '자연스러운 장소'를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는 자연 운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 외의 모든 운동은 비자연적이거나 폭력적 운동으로 간주되었다.[27][28]
- 천상계는 변하지 않는 제5원소인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원히 균일한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29]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의 천문학은 관측되는 천체의 불규칙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균일한 원운동을 조합하는 방식을 사용했다.[30]
-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운동 모형: 에우독소스의 기하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저서 ''알마게스트''에서 지구 중심의 복잡한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태양, 달, 행성들의 위치를 상당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이후 천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모델의 물리적 기반으로 제시된 구형 껍질 개념은 복잡한 수학적 설명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31]

물리학이나 역학 분야에서는 후대의 발견을 예견하는 듯한 고대의 대안적인 이론이나 발전도 존재했지만, 고대의 많은 문헌이 전쟁 등으로 소실되면서 이러한 지식들은 오랫동안 잊혔고 과학 혁명기의 재발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시대 동안 기하학, 수학, 천문학 분야에서는 꾸준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시기 고대 학문에 대한 존중은 과학 혁명의 주요 인물들에게도 이어졌다. 코페르니쿠스[32], 갈릴레이[1][2][3][33], 요하네스 케플러[34], 뉴턴[35] 등은 자신들의 혁신적인 이론에 대한 고대 및 중세의 선례를 찾고 인용하기도 했다.[36] 예를 들어,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자신의 운동 법칙이 이미 다른 수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언급했으며, 중력 법칙과 제1 운동 법칙의 계보를 여러 역사적 인물들에게서 찾으려 시도했다.[35][36]
하지만 이러한 고대와의 연결고리에도 불구하고, 과학 혁명은 단순히 고대 지식의 부활이 아니었다. 17세기는 혁명적인 이론과 실험 방법론이 등장하며 과학 연구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예를 들어, 관성 개념은 고대에도 암시된 바 있지만,[37][38] 뉴턴의 이론은 외부 힘이 있어야만 운동이 유지된다고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39]
2. 2. 중세 유럽의 과학
중세 유럽의 과학은 고대 그리스의 학문과 과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로마/비잔틴 과학과 중세 이슬람 과학을 통해 계승되고 발전되었다.[24] 일부 학자들은 기독교 사상이 과학 발전에 특정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한다.[25][26] 중세 지성계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은 17세기 과학 혁명기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지적 틀로 작용했지만, 당시의 자연철학자들은 점차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5]
고전 고대에서 유래한 핵심적인 과학 개념들은 중세를 거치며 유지되었으나, 이후 과학 혁명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부정되었다.[5] 중세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주요 과학적 개념은 다음과 같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구형의 계층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우주는 크게 지상계와 천상계로 나뉘며, 각 영역은 서로 다른 원소와 운동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 지상계는 흙, 물, 공기, 불의 네 가지 고전 원소로 구성되며, 각 원소는 동심원을 이룬다고 여겼다. 모든 물체는 자신의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장소'를 향해 직선으로 움직이는 경향(자연 운동)을 가지며, 외부 힘에 의한 운동은 '폭력적 운동'으로 간주되었다.[27][28]
- 천상계는 영원불변하는 제5원소인 에테르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체들은 완벽하고 균일한 원운동을 한다고 믿었다.[29] 중세 천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틀 안에서 관측되는 천체의 불규칙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개의 균일한 원운동을 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론을 발전시켰다.[30]
-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운동 모형: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의 기하학적 모델을 발전시킨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는 중세 천문학의 표준적인 교과서였다. 이 책은 수학적 계산을 통해 태양, 달, 별, 행성의 위치를 예측하는 방법을 제시했으며, 천문 관측 결과를 바탕으로 모델을 구축하는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이는 후대 천문학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모델은 물리적으로 천구들이 겹겹이 쌓인 구조로 설명되었으나, 실제 행성의 복잡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한 세부 모델들은 이러한 물리적 설명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31]
고대에도 후대의 물리학이나 역학 이론을 암시하는 아이디어들이 있었지만, 전쟁과 문헌 소실로 인해 많은 부분이 잊혔고 중세 과학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명 이후 이러한 고전 지식들이 점차 재발견되고 확산되면서 새로운 과학적 탐구의 밑거름이 되었다. 중세 시대에도 기하학, 수학, 천문학 분야에서는 꾸준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 고대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과학 혁명의 주요 인물들 역시 고대 문헌을 탐구하고 자신들의 이론적 기반을 고대 사상가들에게서 찾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코페르니쿠스,[32] 갈릴레이,[1][2][3][33] 요하네스 케플러,[34] 뉴턴[35] 등은 태양 중심설과 같은 혁신적인 주장의 연원을 고대와 중세의 여러 학자들에게서 찾았다. 예를 들어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자신의 운동 법칙이 이미 선대의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었음을 언급하며, 중력 법칙과 제1 운동 법칙의 아이디어를 역사적 인물들에게 돌리기도 했다.[35][36]
2. 3. 르네상스의 과학
기독교적 신이 절대적 권위였던 중세를 지나, 인문주의자들은 스스로 빛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며 르네상스 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종교 개혁과 더불어 과학 혁명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주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문화적, 예술적 부흥을 추구했던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고대 학문과 예술의 정점에 도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비잔틴 세계에서 유입된 많은 그리스 원전을 연구했으며, 그 결과 중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과학이 새롭게 소개되었다. 특히 고대에 번성했던 플라톤의 수학적 과학 전통은 이슬람 세계를 거쳐 '''신플라톤주의'''로 새롭게 태어났다.
신플라톤주의는 자연 세계를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플라톤의 믿음과 이슬람 세계에서 전해진 마술주의가 결합된 사상이다. 이 사조는 우주의 힘을 일종의 네트워크로 보았고, 그 힘을 조직하는 열쇠를 수학에서 찾고자 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수학에서 나타나는 조화나 간결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또한, 중세 기독교 세계관과 달리 우주를 인간이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았다. 중세에는 우주가 인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한 영역으로 여겨졌지만,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우주 속에 신비한 힘이 존재하며 인간이 이 힘과 상호작용하여 자연 현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이 단순히 수동적인 피조물이 아니라 자연 현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우주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를 자극했고, 새로운 우주 체계의 가능성을 열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으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태양중심설’을 제시했을 때, 당시 많은 천문학자들이 이 새로운 우주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는 자연을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를 통해 근대적 자연관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위상도 높였다.
전통적으로 자연에 대한 이론적 탐구, 즉 과학은 주로 상류 지식 계층이 담당하는 자연 철학의 일부였다. 반면, 기술자들은 사회 하층 계급에 속하며 체계적인 이론 없이 시행착오에 의존해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선박 제조, 교회 건설 등 기술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면서 기술에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해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러한 시대 변화를 대표하는 '학문적 기술자'였다. 그는 화가 베로키오의 제자였지만, 수학, 해부학, 시각생리학, 원근법 등을 깊이 공부했다. 또한 풍속계, 기계식 시계, 거중기, 펌프 등을 발명하며 스스로를 군사 기술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새와 물고기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유선형 배와 비행기 설계도를 그렸으며, 교황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0여 구의 시체를 직접 해부하여 상세한 인체 근육도를 남긴 해부학자이기도 했다. 식물학에도 관심을 보여 식물의 향일성(向日性)과 향지성(向地性), 나이테의 존재, 식물의 암수 구별 등을 발견했다.
이처럼 과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적극적인 조작과 관찰을 통해 자연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수작업과 실제적 행위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며 실험적 방법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주목할 만한 기술들이 등장했다. 세계 지도 제작법과 항해술이 발전했고, 망원경이나 총포 같은 무기류도 개발되었다. 특히 15세기 중엽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 인쇄술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지식 보급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쇄술 덕분에 책을 대량으로 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지식은 더 이상 소수 성직자나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이전에는 접하기 어려웠던 지식이 대중에게 확산되면서 기존 지식 체계의 문제점들이 드러났고, 이는 종교 개혁, 르네상스, 그리고 과학 혁명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과학 혁명의 전개
과학의 역사에서 크고 작은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특히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변화는 과학의 내용뿐만 아니라 방법, 그리고 과학이 실행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를 흔히 과학 혁명이라고 부른다. 영국의 역사학자 버터필드(Herbert Butterfield)는 그의 저서 《근대 과학의 기원》(1952)에서 서구 사회를 근대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 르네상스나 종교 개혁이 아닌 바로 이 과학 혁명이었다고 주장했다.[168]
과학 혁명은 일반적으로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하여 태양 중심설을 주장한 것을 시작으로, 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통해 고전 역학 체계를 완성하며 마무리된 것으로 본다. 약 150년 동안 이어진 이 혁명은 천문학 분야에서 시작되어 고전 역학 분야로 이어졌으며, 각 분야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천문학 혁명과 고전 역학의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오랫동안 진리로 받아들여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철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설 우주관이 도전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은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발견과 갈릴레이의 망원경 관측 및 운동 연구를 통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갔다. 갈릴레이는 실험과 수학을 결합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54][55]
과학적 방법론 역시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귀납법에 기초한 경험주의적 접근과 체계적인 실험을 강조하며 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14][41] 한편, 데카르트는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수학적 확실성에 기반한 기계론적 철학을 제시하여, 우주를 거대한 기계로 보고 모든 자연 현상을 물질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려 했다.
이러한 지적 변화는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더욱 가속화되었다.[17][18] 구텐베르크가 발전시킨 인쇄술 덕분에 과학 서적과 정확한 도해(다이어그램, 해부도 등)가 이전보다 훨씬 널리 보급될 수 있었고, 학자들은 과거의 연구를 쉽게 참조하고 자신의 관찰 결과를 다른 학자들과 비교하며 지식을 축적해 나갈 수 있었다.[19]
과학 지식의 생산과 공유 방식도 변화하여, 왕립학회(1660)[68][70]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666)와 같은 과학 협회가 설립되어 연구 결과를 공유하고 토론하며 학술지를 발간하는 등 과학 활동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71][72]
과학 혁명은 뉴턴의 업적으로 정점에 달했다. 그는 갈릴레이와 케플러 등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정립하여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 집대성했다. 뉴턴의 이론은 지상에서의 물체의 운동과 천체의 운동을 동일한 법칙으로 설명함으로써, 이전까지 분리되어 있던 지상계와 천상계를 하나의 통일된 체계로 통합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된 우주관의 변화를 완성하고, 이후 과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기계론적 자연관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과학 혁명은 단순히 과학 지식의 양적 증가를 넘어,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과학 연구 방법론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는 서구 사회의 세계관을 바꾸고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 과학 및 기술 문명의 토대를 마련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13][20] 버터필드가 지적했듯이, 이 혁명은 고대와 중세의 권위를 넘어 현대 세계와 현대 정신의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다.[22]
3. 1. 코페르니쿠스 혁명
과학 혁명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하여 우주의 중심이 태양임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168] 이는 약 5천 년 동안 소수의 천문학자를 제외하고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지구 중심설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기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며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물질(흙, 물, 불, 공기)로 이루어진 영역으로 여겨졌다. 반면 달 너머의 하늘(달, 태양, 행성, 별)은 완벽하고 영원하며 불변하는 에테르라는 특별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천상의 존재들이 거주하는 영역으로 생각되었다.[73]
코페르니쿠스는 이러한 오랜 믿음을 뒤집고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지구가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 주위를 돈다는 태양 중심설을 제시했다. 그의 주장은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특별한 중심이 아니며 다른 행성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천체임을 뜻했다. 이는 지구가 천상계와 같은 물질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열었으며, 천체의 운동이 완벽한 원 궤도여야 한다는 기존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출간 당시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일부 교황이나 대주교들이 관심을 보이기도 했으나,[77]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관측 가능한 연주 시차가 없다는 점[79]과 오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어긋난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은 이후 그레고리력 제정에 활용되기도 했다.[78]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발전시키고 태양 중심설에 대한 강력한 증거를 제시한 인물은 요하네스 케플러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하고 정밀한 천체 관측 자료를 분석하여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발견하였다. 특히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원이 아닌 타원 궤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혀내 코페르니쿠스 모델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태양 중심설의 정확성을 크게 높였다. 그의 저작들은 이후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하였다.[80][81]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근대 관측 천문학의 아버지",[50]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51] "과학의 아버지",[52] 그리고 "근대 과학의 아버지"[53] 등으로 불리며 과학 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직접 제작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 금성의 위상 변화, 태양의 흑점, 달 표면의 산맥 등을 관측하여 지구가 우주의 유일한 중심이 아니며 천상계 역시 완벽하지 않다는 강력한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태양계 이론을 반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갈릴레오는 초기 관성 이론을 사용하여 지구가 회전하더라도 탑에서 떨어진 돌이 똑바로 떨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으며,[54] 자연 법칙이 수학적 언어로 기술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실험과 수학을 결합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였다.[55]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결합된 발견 덕분에 태양 중심 체계는 지지를 얻었고, 17세기 말에는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연구는 뉴턴의 연구로 절정에 달했고, 그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는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식화하여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수학적으로 유도해냈다. 뉴턴은 같은 원리를 사용하여 혜성, 조수, 춘분의 세차 운동 및 기타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우주에 대한 태양 중심 모델의 타당성에 대한 마지막 의혹을 제거하였다. 이 연구는 또한 지구상의 물체와 천체의 운동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만유인력 법칙은 지상 역학과 천체 역학을 하나의 위대한 체계로 통합하여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된 천문학 혁명을 완성시켰다.
3. 2. 과학적 방법론의 발전
과학 혁명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과학적 지식을 얻는 방법에서 일어난 혁신, 즉 과학적 방법의 변화이다.[169]17세기에 구상된 과학적 방법에 따라, 체계적인 실험이라는 연구 전통이 과학계에서 서서히 받아들여지면서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상황에 대한 기존의 관념은 변화를 맞이했다. 지식을 얻기 위해 가정을 배제하고 열린 마음으로 관찰하려는 귀납적 접근 방식은, 기존에 알려진 사실을 분석하여 더 나은 이해를 도출하려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식 연역적 접근 방식과 대조되었다. 실제로는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두 방식의 건전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즉, 기존의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관찰된 결과가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닌다고 가정하고 해석하려는 의지가 모두 필요했던 것이다.
과학 혁명이 끝날 무렵, 철학자들이 책을 통해 탐구하던 정성적인 세계는 실험적 연구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기계적이고 수학적인 세계로 변모했다. 뉴턴의 과학이 모든 면에서 현대 과학과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개념적으로는 여러 면에서 오늘날의 과학과 유사성을 보인다. 다만 현대 과학의 특징 중 상당 부분, 특히 제도화 및 전문화와 관련된 특징들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 경험주의와 프랜시스 베이컨 ===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 전통에서는 관찰과 추론을 통해 "자연적인" 상황을 탐색하는 것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주된 방식이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론적 모델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드문 사건들을 '변칙'으로 간주하며, 이는 자연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믿는 경향과 결합되었다. 과학 혁명 동안, 자연에 대한 과학자의 역할과 실험적 또는 관찰적 증거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면서 경험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과학 혁명이 시작될 무렵, 경험주의는 이미 과학과 자연 철학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었다. 14세기 초 명목주의 철학자 윌리엄 오컴을 포함한 중세 사상가들은 경험주의를 향한 지적 운동의 기초를 마련했다.[40] "영국 경험주의"라는 용어는 경험주의자로 평가되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합리주의자로 평가되는 르네 데카르트 사이의 철학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토마스 홉스, 조지 버클리, 데이비드 흄은 인간 지식의 기초로서 정교한 경험주의 전통을 발전시킨 주요 철학자들이었다. 경험주의에 대한 영향력 있는 공식화는 존 로크의 ''인간 오성에 관한 에세이''(1689)에서 나타나는데, 그는 인간 정신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지식은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감각적 인상이 기록되고 반성 과정을 통해 지식이 축적되는 "빈 서판", 즉 ''타블라 라사''로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과학 혁명의 철학적 토대는 경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평가된다.[14] 그의 저술은 과학적 탐구를 위한 귀납적 방법론, 흔히 '베이컨 방법(Baconian method)' 또는 단순히 과학적 방법이라고 불리는 것을 확립하고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자연의 모든 것을 조사하는 계획적인 절차에 대한 그의 요구는 과학에 대한 수사적, 이론적 틀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그가 제시한 방법론의 상당 부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41]
베이컨은 신성하고 인간적인 학문의 진보를 위해 모든 지식 획득 과정의 대대적인 개혁, 즉 '인스타우라시오 마그나(Instauratio Magna, 대개혁)'를 제안했다. 그는 이 개혁이 과학의 큰 발전과 인류의 고통과 필요를 해소할 발명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1620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에서 그는 인간을 "자연의 관리자이자 통역자"로 규정하며, "지식과 인간의 힘은 동의어"이고, "결과는 도구와 도움을 통해 만들어지며", "인간은 자연체를 적용하거나 제거할 수만 있고, 자연은 내부적으로 나머지를 수행한다", 그리고 "자연은 그녀에게 복종함으로써만 명령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4] 이 주장의 핵심은, 자연에 대한 지식과 도구의 사용을 통해 인간이 자연의 작용을 유도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고,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원초적인 순수성과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아 무력함, 빈곤,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 번영, 안보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42]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베이컨은 기존의 삼단논법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새로운 논리 체계, 즉 귀납법을 제시했다. 그의 과학적 방법은 제거적 귀납을 통해 현상(예: 열)의 형식적 원인을 분리하는 절차로 구성된다. 철학자는 사실에서 공리를 거쳐 물리 법칙으로 나아가는 귀납적 추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시작하기 전에, 연구자는 진실을 왜곡하는 네 가지 우상(idol)[169]과 같은 잘못된 개념이나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당시 철학이 실제 세계를 관찰하기보다는 단어나 논쟁에 지나치게 몰두한다고 비판하며, "인간은 이성이 단어를 지배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단어가 돌아와 그 힘을 이해력에 반영하여 철학과 과학을 궤변적이고 비활동적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43]
베이컨은 과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단순히 지적 논의를 하거나 관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명을 통해 인류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발명은 마치 새로운 창조물이자 신성한 작품의 모방과 같다"고 말하며,[44] 인쇄술, 화약, 나침반과 같은 발명이 가져온 광범위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에 큰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윌리엄 길버트의 자기 이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그리고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과 같은 당대의 중요한 새로운 이론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45]
===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기계론 ===
한편, 프랑스의 데카르트는 가설-연역법이라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제시하였다.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la("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가 보여주듯이, 그는 명확하고 확실한(명징한) 명제로부터 출발하여 체계적인 의심을 통해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얻고자 했다. 그는 우선 모든 것을 의심한 후에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데카르트는 이로부터 자신을 존재하게 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나아가 신의 존재로부터 외부 세계, 즉 우주의 존재를 설명해냈다. 그는 신이 물질을 창조하고 운동을 부여했으며, 그 운동을 보존하고 유지시킨다고 주장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철학적 기반 위에서 2000여 년간 서구 사상을 지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체계를 대체할 만한 체계적이고 전체적인 기계적 철학을 제시했다. 기계적 철학에서는 우주 공간이 모두 물질과 그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미시적인 물질 입자들의 운동에 대한 이해를 통해 거시적인 우주 전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관점, 즉 거시 세계를 미시 세계의 물질과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입장은 근대 과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데카르트가 주장한 기계적 철학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는 물질과 운동이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세상을 이루는 근본 물질을 찾고, 그 물질들이 따르는 운동 법칙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이전에는 근본 물질 탐색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지만, 데카르트에게는 운동의 문제가 더욱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 체계에서 움직이는 입자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7가지 충돌 법칙은 운동 중에 보존되는 양, 즉 오늘날의 운동량 보존 법칙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를 제공했으며, 운동 문제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즉, 데카르트는 운동의 문제를 철학적 토대 위에서 과학의 중심 주제로 부각시킨 인물이었다. 양자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현대 과학 역시 기본적으로 환원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기계적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사에서 데카르트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평가된다.
=== 수학적 방법론의 부상 ===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은 사물의 참되고 필연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60] 중세 자연철학자들이 수학을 사용한 정도는 주로 국소적 속도 변화나 삶의 다른 측면들에 대한 이론적 분석에 국한되었다.[61] 물리량의 실제 측정과 이론에 기반한 계산 값과의 비교는 유럽에서 주로 천문학과 광학이라는 수학적 학문 분야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62][63]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 과학자들은 지구상의 물리 현상을 측정하는 데 정량적 측정을 점점 더 많이 적용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오는 수학이 신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필연적인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는 "...인간의 지성이 이해하는 그 몇 가지 [수학적 명제]에 관해서는, 나는 그 지식이 객관적 확실성에서 신과 같다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64]
갈릴레오는 그의 저서 ''Il Saggiatore''(시험자)에서 세계를 체계적으로 수학적으로 해석한다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철학(즉, 물리학)은 이 위대한 책, 즉 우주에 쓰여 있으며, 우리의 시야에 끊임없이 열려 있지만, 먼저 그 언어를 이해하고 그것이 쓰여진 문자를 해석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으며, 그 문자는 삼각형, 원 및 기타 기하학적 도형이며, 그것 없이는 단 하나의 단어도 이해하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것 없이는 어두운 미궁 속을 헤매는 것입니다."[65]
1591년 프랑수아 비에트는 대수학에서 매개변수를 사용한 최초의 기호 표기법을 제시한 ''In Artem Analyticem Isagoge''(해석학 입문)를 출판했다. 이후 뉴턴의 미적분학 개발은 수학적 방법을 과학에 적용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뉴턴은 과학 이론이 엄격한 실험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이는 현대 과학의 초석이 되었다.
3. 3. 과학 단체의 등장과 제도화

과학 혁명기 동안 과학 지식을 얻는 방법뿐만 아니라 과학이 실행되는 방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주로 개인적으로 연구 활동을 했지만, 점차 한 곳에 모여 협회를 결성하고 서로의 연구를 교환하며 토론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학 연구의 객관성이 확보되기 시작했으며, 연구 결과를 논문 형식으로 발표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한 과학 전문 학술지도 등장했다. 과학 연구에 주로 종사하는 집단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18세기를 거치면서 '과학자'라는 새로운 전문 직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최초의 과학 단체는 1601년 이탈리아에서 조직된 ‘린체이 아카데미(Accademia dei Lincei)’였다. 박학자였던 체시 공작의 후원으로 설립되어 갈릴레이를 포함한 32명의 과학자들이 활동했으나, 1630년 후원자였던 체시 공작이 사망하면서 해체되었다. 1657년에는 피렌체에 실험 아카데미가 등장했는데, 이 단체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코페르니쿠스와 토리첼리의 제자들이 모여 실험을 수행하는 모임이었다. 이탈리아의 초기 과학 아카데미들은 과학자들에게 경제적 후원과 토론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부유한 개인 후원자의 의사에 따라 단체의 존속이 결정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영국에서 출현한 왕립학회(Royal Society)는 점차 회원 수와 기능을 확대하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왕립학회는 1640년대와 1650년대에 런던의 그레샴 칼리지를 중심으로 모였던 의사들과 자연철학자들의 그룹에서 시작되었다.[68] 이들은 베이컨이 그의 저서 《뉴 아틀란티스》에서 제시한 "새로운 과학"의 영향을 받아 과학을 논의하고 실험을 수행하기 위해 모였다. "옥스퍼드 철학 학회"로 알려진 그룹은 보들리 도서관이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규칙에 따라 운영되었다.[69] 1660년 11월 28일, 이들은 "물리 수학 실험 학습 증진 칼리지"의 설립을 발표하며 매주 모임을 갖기로 했다. 찰스 2세 국왕의 승인을 얻어 1662년 7월 15일 "런던 왕립학회"를 설립하는 왕실 칙허장이 서명되었고, 브롱커 경이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663년에는 두 번째 왕실 칙허장을 통해 국왕이 창립자로 명시되고 "자연 지식 향상을 위한 런던 왕립학회"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다.[70] 이후 뉴턴도 1703년에 회장을 역임했다.

왕립학회는 특별한 자격 요건 없이 일정한 회비를 내고 자연 과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창립 당시 100여 명이었던 회원은 1670년대에는 200명, 1800년에는 500명으로 증가했다. 초기 회원들은 베이컨의 영향을 받아 실험적 과학의 증진을 위해 다양한 실험 기구를 고안하고 제안했으며, 특히 농업 기술 개선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회원들은 각자 수행한 연구를 학회에서 발표하고 다른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초기 회의에는 로버트 훅과 1684년에 임명된 드니 파팽이 수행한 실험들이 포함되었는데, 주제 영역이 다양했다.[71]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를 촉진했지만, 연구 활동이 다소 개인적이고 산만하게 이루어지는 경향도 있었다. 왕립학회는 1665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과학 학술지 중 하나인 《철학 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 학술지는 연구 결과를 널리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우선권 주장과 동료 연구자들의 검토(피어 리뷰)라는 중요한 원칙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72] 초대 서기 헨리 올덴버그가 초기 학회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1666년 프랑스 파리에 세워진 파리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는 영국의 왕립학회와는 다른 특징을 보였다. 왕립학회가 사적인 모임에서 출발한 것과 달리, 과학 아카데미는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주도로 정부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1699년 루이 14세에 의해 규칙이 제정되고 '왕립 과학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자리를 잡았다. 회원은 16명으로 제한되었으며, 모두 직업 과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실력만 있다면 프랑스인이 아니어도 회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데, 네덜란드의 호이겐스나 덴마크의 올레 뢰머가 대표적인 예이다. 회원들은 왕으로부터 급여를 받으며 왕이 부여한 과학적 과제들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해결해 나갔다. 예를 들어, 1m 길이의 정확한 표준을 정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로 탐사대를 파견한 것은 아카데미가 수행한 중요한 국가적 사업 중 하나였다. 이러한 정부 주도의 연구는 영국 왕립학회의 자율적인 연구 방식에 비해 훨씬 방대하고 조직적인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소수 정예 엘리트 집단으로 운영되고 왕의 재정적, 제도적 후원에 의존했던 파리 과학 아카데미는 특정 인물의 영향력에 따라 연구 방향이 좌우될 수 있다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아 아카데미 대표가 된 라플라스는 수리 물리학 연구에 집중하여 해당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지만, 그의 사후에는 프랑스의 수리 물리학이 급격히 쇠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반면, 영국에서는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과학 분야가 비교적 자유롭게 논의되면서 폭넓은 과학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후대에 이름을 남긴 많은 과학자들이 영국 출신이라는 점은 이러한 개방적인 과학 연구 환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4. 과학 혁명의 주요 내용
과학의 역사에서 내용상의 변화는 계속 있었지만,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일어난 변화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과학 혁명'''으로 불린다. 이 시기에는 과학의 내용뿐만 아니라 과학을 연구하는 방법과 과학이 실행되는 방식에서도 급격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H. Butterfield)는 그의 저서 《근대 과학의 기원》(1949)에서 르네상스나 종교 개혁보다 이 과학 혁명이야말로 서구 사회를 근대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주장했다.[163][164] 그는 또한 기존 역사관의 유럽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17세기 이전 유럽 문명이 반드시 세계사에서 주도적이지는 않았다고 보았다.[165][166]
일반적으로 과학 혁명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하여 지동설을 주장한 것을 시작으로, 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며 마무리된 것으로 본다. 약 150년에 걸친 이 혁명은 천문학 분야에서 시작되어 기존의 천동설 우주관을 뒤집었으며(천문학 혁명), 이후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새로운 역학의 필요성을 낳아 뉴턴에 의해 완성되었다(고전 역학의 혁명).[164]
과학 혁명의 핵심적인 변화 중 하나는 과학적 방법의 확립이다. 이전 시대에는 경험적 지식보다 순수 논리적, 철학적 진리를 중시했지만, 과학 혁명기에는 갈릴레이가 보여주었듯 실험과 관찰을 통해 누구나 재현 가능한 방식으로 주장을 증명하는 방법이 중요해졌다. 케플러 역시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지동설이 행성 운행을 더 정확히 예측함을 수학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러한 방법론의 변화는 철학에도 영향을 미쳐 과학철학의 성립을 촉진했다.
자연관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적 자연관, 즉 모든 물체가 각자의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생각 대신, 자연 현상을 기계적인 원리로 설명하려는 기계론적 자연관이 대두되었다. 뉴턴의 연구는 이러한 변화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는 흔히 ‘뉴턴 종합(Newton Synthesis)’이라 불리는 업적을 통해, 만유 인력이라는 단일한 힘으로 천상계와 지상계의 운동을 동일한 법칙으로 설명함으로써 오랫동안 분리되어 온 두 세계를 통합했다. 이는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뉴턴은 수학적이고 정밀한 이론(기계적 방법)과 실험적이고 경험적인 방법을 성공적으로 결합하여 근대 과학의 중요한 연구 방법론을 정립했다.
뉴턴 역학의 성공은 18세기 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과학자들이 화학, 전기, 자기, 열, 연소 현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연의 힘을 만유인력처럼 수학적인 법칙으로 설명하려 시도했다. 예를 들어, 샤를 드 쿨롱은 전기력 역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함을 발견하여 전기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룰 길을 열었다. 생명과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이러한 접근법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과학적 성과는 기술 혁신으로 이어져 18세기 증기 기관의 개발과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버터필드가 지적했듯이, 과학 혁명은 "근대 세계와 근대 정신의 진정한 창시자"로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64]
4. 1. 천문학
약 5천 년 동안 지구 중심설은 소수의 천문학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진 우주관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에서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 두었는데, 이는 지구가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영역이라는 생각과 연결되었다. 반면 달, 태양, 행성, 별들이 있는 하늘은 완벽하고 영원하며 불변하는 영역으로 여겨졌고, 종교적으로는 천상의 존재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지구는 흙,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늘은 '에테르'라는 다른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73]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에 출판한 저술에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태양 중심설을 제시하며 이러한 전통적인 우주관에 도전했다. 이는 지구가 다른 행성들처럼 태양 주위를 돈다는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특별한 중심이 아니며, 다른 천체들과 마찬가지로 변화 가능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또한 천체의 운동이 완벽한 원 궤도에 국한될 필요가 없다는 가능성을 열었다.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고, 교황청조차 관심을 보이며 그레고리력 개정에 그의 모델을 활용하기도 했다.[77][78] 하지만 대부분의 동시대 사람들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관측 가능한 연주 시차가 없다는 점[79], 그리고 무엇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어긋난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요하네스 케플러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연구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강력한 근거를 제공했다. 케플러는 티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하고 정밀한 행성 관측 자료를 분석하여 행성이 태양 주위를 원이 아닌 타원 궤도로 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이 발견을 포함한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통해 코페르니쿠스 모델보다 훨씬 정확하게 행성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태양계 모델을 제시했다. 케플러의 저서들, 특히 『신천문학』(Astronomia Nova)은 태양 중심설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행성의 운동을 기존의 천구 회전이 아닌 자유롭게 움직이는 물체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과학 혁명의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81] 그의 연구는 훗날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80]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직접 개량한 망원경을 이용한 천문 관측을 통해 태양 중심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제시했다. 그는 목성의 위성들, 금성의 위상 변화, 태양 흑점, 그리고 달 표면의 산맥 등을 관측함으로써 천체가 완벽하고 불변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 중심 우주 모델의 문제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또한, 관성 개념에 대한 초기 이론을 발전시켜 지구가 움직이는데도 왜 지상의 물체들이 뒤처지지 않는지를 설명하려 시도했다. 케플러와 갈릴레이의 이러한 발견들 덕분에 태양 중심설은 점차 설득력을 얻어 17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망원경의 발명은 이러한 천문학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08년 네덜란드에서 안경 제작자들에 의해 우연히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는 굴절 망원경은 이듬해 갈릴레이가 천문 관측에 사용하면서 과학 연구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122][123] 이후 아이작 뉴턴은 굴절 망원경의 색수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사 망원경을 개발했다. 그는 빛이 렌즈를 통과할 때 색깔별로 굴절률이 달라 색수차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고, 대신 거울을 사용하는 반사 망원경을 1668년에 제작했다.[124][125][126][127] 이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동 가능한 반사 망원경으로 알려져 있다.

천문학 혁명은 아이작 뉴턴의 연구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는 1687년에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약칭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의 운동 법칙과 만유인력의 법칙을 제시했다. 뉴턴은 로버트 훅과의 서신 교환[82]과 1680년 혜성 관측[83] 등을 계기로 행성 운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 행성의 타원 궤도가 태양 방향의 구심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나타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84][85]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은 만유인력이라는 단일한 힘을 통해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을 수학적으로 유도해냈을 뿐만 아니라, 혜성의 궤도, 조수, 춘분점 세차 등 다양한 천문 현상과 지상의 물체 운동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했다. 이로써 천상계와 지상계의 운동이 같은 물리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우주가 수학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뉴턴의 연구는 태양 중심설에 대한 마지막 의문들을 해소하고, 이후 약 3세기 동안 과학자들의 물리적 우주관을 지배하는 근간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흔히 '뉴턴 종합(Newton Synthesis)'이라 불리며 근대 과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뉴턴은 보이지 않는 힘이 원격으로 작용한다는 원격 작용 개념 때문에 "오컬트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현상으로부터 추론할 수 없는 불필요한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hypotheses non fingo)"는 입장을 고수했다.[87][88]
4. 2. 물리학
4. 3. 생물학과 의학

수 세기 동안 유럽 의학계는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Galen)의 이론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러나 플랑드르 출신의 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는 갈레노스의 이론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갈레노스가 주로 동물을 해부했던 것과 달리, 베살리우스는 직접 인체를 해부하여 연구했다. 1543년에 출판된 베살리우스의 저서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la)[89]는 인체 해부학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실제 해부를 통한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인체를 내부 장기들이 3차원 공간에 배치된 물질적 구조로 파악하는 '해부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이는 갈레노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과 점성술적 요소가 강했던 기존의 해부학 모델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베살리우스는 접형골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하게 설명했으며, 흉골이 세 부분으로, 천골이 다섯 또는 여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측두골 내부의 전정을 정확히 묘사했다. 그는 해부학자 샤를 에스티엔(Charles Estienne)이 관찰했던 간정맥 판막의 존재를 확인했고, 무명정맥을 설명했으며, 태아의 제대정맥과 대정맥을 연결하는 관(훗날 정맥관으로 명명됨)을 발견했다. 이외에도 대망과 위, 비장, 대장의 연결 관계를 설명하고, 유문의 구조를 정확히 밝혔으며, 인간의 작은 충수를 관찰했다. 종격과 폐장막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설명과 당시까지 가장 완전한 뇌 해부학적 설명 역시 그의 업적이다.
베살리우스 이전에도 해부학 연구는 진행되고 있었다. 알레산드로 아킬리니(Alessandro Achillini)의 해부학적 기록은 인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보여주며, 그가 해부 중 발견한 내용을 갈레노스와 아비케나(Avicenna)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발견한 내용과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적고 있다.[90] 니콜로 마사(Niccolò Massa)는 1536년에 초기 해부학 교재인 『해부학 서설』(Anatomiae Libri Introductoriusla)을 저술하고, 뇌척수액을 설명했으며, 여러 의학 논문의 저자이기도 했다.[91] 장 페르넬(Jean Fernel)은 신체 기능 연구를 설명하기 위해 "생리학"(physiology영어)이라는 용어를 도입한 프랑스 의사였으며, 척수관을 최초로 설명한 사람이었다.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는 1628년 『동물의 심장과 혈액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논고』(De Motu Cordisla)를 출판하며 의학사에 또 다른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하비는 심장의 구조를 면밀히 분석하여, 동맥의 맥박이 왼쪽 심실의 수축에 의해 발생하며, 오른쪽 심실의 수축은 혈액을 폐동맥으로 보낸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한, 이전 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양쪽 심실이 거의 동시에 수축한다는 점도 확인했다.[92]
하비는 심장의 용량, 각 박동 시 배출되는 혈액량, 그리고 특정 시간 동안 심장이 뛰는 횟수를 추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만약 갈레노스의 이론처럼 혈액이 간에서 계속 생성된다면 하루에 약 244.94kg이라는 엄청난 양의 혈액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이러한 수학적 추론을 근거로, 하비는 뱀과 물고기를 이용한 여러 실험을 통해 혈액 순환의 원리를 증명했다. 그는 정맥과 동맥을 각각 다른 시점에 묶었을 때 나타나는 변화를 관찰했다. 정맥을 묶으면 심장이 비고, 동맥을 묶으면 심장이 부풀어 오르는 현상을 확인한 것이다. 이후 인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유사한 결과를 얻었다. 사람의 팔 위쪽을 단단한 결찰로 묶어 동맥과 정맥의 혈류를 차단하자, 묶인 부분 아래 팔은 차갑고 창백해졌고, 위쪽 팔은 따뜻하고 부어올랐다. 결찰을 약간 느슨하게 하여 정맥보다 깊숙이 위치한 동맥으로 혈액이 흘러 들어갈 수 있게 하자, 팔 아래쪽이 따뜻해지고 부어오르며 혈액으로 가득 찬 정맥이 뚜렷하게 관찰되었다.
의학적 이해와 실천에 있어서 다양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의사 피에르 포샤르(Pierre Fauchard)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치과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현대 치과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외과의사 암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는 특히 상처 치료 분야에서 외과학 기술과 전장 의학 발전에 기여했고,[93] 헤르만 보에르하페(Herman Boerhaave)는 라이덴에서의 뛰어난 교육과 그의 교과서 『의학 강의』(Institutiones medicaela, 1708) 덕분에 때때로 "생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4. 4. 화학

화학과 그 전신인 연금술은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과학적 사고에서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94] 화학 연구에 참여한 저명한 학자들로는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 화학 의사 파라켈수스, 로버트 보일, 토마스 브라운, 아이작 뉴턴 등이 있다. 기계론적 철학과 달리, 화학적 철학은 연금술사들이 종종 자연에서 작용하는 정령으로 표현했던 물질의 활동적인 힘을 강조했다.[95]
16세기 초 화학자들에게 중요한 정보의 원천은 광석의 정제 및 제련을 통해 금속 추출법을 개선하려는 실용적인 시도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1556년 그의 저서 ''데 레 메탈리카''를 출판한 게오르기우스 아그리콜라가 있다.[96] 그의 저술은 당시 광업, 금속 추출, 야금술의 고도로 발달되고 복잡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의 접근 방식은 이 주제에 얽힌 신비주의를 걷어내고 다른 이들이 발전시킬 수 있는 실용적인 토대를 마련했다.[97]
화학자 로버트 보일은 연금술에 대한 현대 과학적 방법을 개선하고 화학을 연금술로부터 분리하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98] 그의 연구는 연금술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오늘날 보일은 최초의 현대 화학자 중 한 명이자 현대 실험 과학 방법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보일은 1662년에 제시한 보일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99] 이 법칙은 온도가 일정한 폐쇄계 내에서 기체의 절대 압력과 부피가 반비례 관계에 있음을 설명한다.[100]
보일은 또한 1661년에 출판된 그의 중요한 저서 ''회의적인 화학자''로도 인정받는데, 이 책은 화학 분야의 초석으로 여겨진다. 이 저서에서 보일은 모든 현상이 운동하는 입자들의 충돌 결과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화학자들에게 실험을 촉구하며, 실험 결과가 화학 원소를 고전적인 네 가지(흙, 불, 공기, 물)로 제한하는 기존 관점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화학이 의학이나 연금술에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과학 분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요한 점은 그가 과학 실험에 대한 엄격한 접근 방식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이론은 실험적으로 검증되어야만 참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저서에는 원자, 분자, 화학 반응에 대한 초기 근대적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현대 화학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5. 과학 혁명의 사회적 영향
과학 혁명은 단순히 과학 지식의 변화를 넘어 사회, 문화, 사상 전반에 걸쳐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는 그의 저서 《근대 과학의 기원》에서 르네상스나 종교 개혁보다 과학 혁명이야말로 서구 사회를 근대로 이끈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168][164] 그는 과학 혁명이 중세는 물론 고대 세계의 권위까지 뒤집었으며, 기독교의 부상 이후 가장 중요한 변화이자 현대 세계와 정신의 진정한 기원이라고 강조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22]
그 혁명은 영국에서 중세뿐만 아니라 고대 세계의 권위를 뒤집었기 때문에 ― 즉, 그것은 학문적 철학의 쇠퇴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파괴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 기독교의 부상 이후 모든 것을 능가하며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중세 기독교 체제 내의 단순한 에피소드, 단순한 내부적 변화로 격하시킨다.... [그것은] 현대 세계와 현대 정신의 실제 기원으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유럽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습적인 시대 구분은 시대착오적이고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22]
과학 혁명의 중요한 사회적 영향 중 하나는 과학적 방법의 확립이다. 윌리엄 휴얼이 지적했듯이, 이 시기에는 인간 정신의 내적 능력에 대한 암묵적인 신뢰에서 벗어나 외부 관찰에 대한 공개적인 의존으로 전환되었으며, 과거의 지혜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 대신 변화와 개선에 대한 열렬한 기대심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12] 갈릴레이가 실험 결과를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케플러가 관측 데이터를 바탕으로 행성 운동 법칙을 정립한 것처럼, 누구든 재현 가능한 방법을 통해 지식을 검증하는 방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과학이 철학이나 기술과 구별되는 자율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13]
인쇄술의 발달 역시 과학 혁명의 사회적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텐베르크가 도입한 인쇄술 덕분에 과학 지식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넓게 전파될 수 있었다.[17][18] 정확한 그림, 도표, 지도 등을 복제하여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학자들은 과거의 연구를 쉽게 참조하고 자신의 관찰 결과와 비교하며 지식을 축적해 나갈 수 있었다.[19] 이는 과학 연구의 효율성을 높이고 집단 지성 형성을 촉진하는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과학 혁명은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 등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아리스토텔레스적,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관과 자연관을 무너뜨렸다.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이러한 변화의 충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새로운 철학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한다.
불의 원소는 완전히 사라졌고;
태양은 사라졌고, 지구도 사라졌으며, 아무도
어디서 그것을 찾아야 할지 잘 알지 못한다.[21]
이러한 변화는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했으며, 특히 뉴턴 역학이 천상계와 지상계를 동일한 법칙으로 설명하면서 기존의 목적론적 자연관 대신 기계론적 자연관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는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과학 혁명 과정에서 종교와의 관계는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다. 일부 종교적 권위는 새로운 과학적 발견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역사가 피터 해리슨 등이 지적하듯이, 기독교 신앙이 과학 혁명의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23]
과학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종교적 요인이 서구에서 현대 과학의 출현과 지속에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학 발전의 핵심 인물 중 많은 수가 진지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개척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종교적 가정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 그러나 과학 혁명의 주요 인물 중 많은 수가 그들이 대체한 중세의 자연에 대한 관념보다 기독교와 더 호환되는 과학의 옹호자라고 생각했다.[23]
과학 혁명을 이끈 주요 인물 다수가 독실한 신앙인이었으며, 그들의 연구 활동은 종교적 신념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과학 혁명은 과학 지식의 발전뿐만 아니라, 과학적 방법론의 확립, 인쇄술을 통한 지식 전파 방식의 변화, 세계관의 전환 등 사회 다방면에 걸쳐 혁명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과 산업 혁명의 기술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현대 사회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20]
5. 1. 대학교의 역할 변화

현대의 대학교 연구소는 과학 활동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대학교가 언제부터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과학사 연구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유럽에서 중세 대학이 등장한 것은 12~13세기로, 초기 대학은 새로 유입된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을 흡수하고 정리하며 보완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과학 혁명기의 대학 역할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가 존재한다. 과학 혁명 연구의 권위자인 리처드 S. 웨스트폴은 당시 대학이 과학 활동의 중심지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형성되는 것을 반대하는 주요 세력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웨스트폴의 견해는 오랫동안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고, 연구의 초점은 대학 외부의 과학 단체들에 맞춰졌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과학 혁명기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가스고인(Gascoigne) 등은 대학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가스고인은 중세 후반 대학의 교육 내용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근거로 대학의 긍정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 중세 후반 대학에서는 근대 이후보다 자연 철학, 수학, 의학 분야에서 실험적 과학 교육이 더 활발히 이루어졌다.
- 비록 비판적인 맥락에서였지만, 새로운 과학의 급진적인 생각들이 대학 내에서 언급되고 논의되었다.
-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대체할 수 있는 데카르트주의가 대학을 통해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과학 혁명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 대학 교육을 통해 기존 지식을 습득하고 비판하며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분명 과학 혁명기의 대학이 새로운 사상이 적극적으로 제기되고 활발히 논의되는 중심지는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간접적인 방식으로 과학 혁명이 가능하도록 토대를 마련하고 기여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5. 2. 계몽주의와 과학
뉴턴의 과학적 성과는 흔히 ‘뉴턴 종합(Newton Synthesis)’으로 요약된다. 이는 만유 인력이라는 하나의 힘으로 천상계와 지상계의 운동을 동일한 법칙으로 설명하고, 수학적·기계적 방법과 실험적·경험적 방법을 성공적으로 결합했음을 의미한다. 뉴턴이 보여준 과학적 방법의 통합은 근대 과학의 중요한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다.뉴턴 역학의 성공에 힘입어, 18세기 과학자들은 다양한 자연 현상을 뉴턴처럼 수학적이고 역학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화학자들은 물질 간의 결합력을 '화학적 친화도'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고, 전기 및 자기 분야에서는 샤를 드 쿨롱 등이 전기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함을 밝혀내며 수학적 접근의 길을 열었다. 이 외에도 열 현상, 연소 현상, 심지어 생명과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예: 식물의 모세관 운동)에서도 현상의 근본적인 힘이나 작용을 찾아 설명하려는 뉴턴적 접근 방식이 널리 시도되었다.

뉴턴 과학은 단순한 과학적 성과를 넘어 18세기 유럽 사상 전반, 특히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뉴턴이 가설이나 독단 없이 수학적, 합리적, 경험적 방법으로 자연 세계를 성공적으로 설명하자, 다른 분야에서도 이러한 방법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철학자, 사상가, 문인들은 형이상학적이고 독단적인 논의를 비판하고 합리성과 경험을 중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8세기 계몽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의 지적·문화적 흐름을 대표하며, 당시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계몽된 사람'이라 칭했다. 볼테르와 같은 계몽 사상가들은 사회의 부조리나 비리가 인간 본성보다는 잘못된 사회 구조나 제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특히 볼테르는 영국 망명 시절, 뉴턴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영국을 과학적 이성이 존중받는 자유로운 사회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볼테르는 자국의 상류 계급이 편견과 독단에 사로잡혀 있고 하류 계급은 무지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부패한 프랑스 사회 역시 뉴턴 과학처럼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개혁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으로 《백과전서》 편찬을 주도했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자들을 ‘백과전서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 《백과전서》는 단순히 지식을 모아놓는 것을 넘어, 이성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뉴턴과 그의 과학은 프랑스 사회 변혁을 이끄는 중요한 이념적 기반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3. 산업 혁명과 과학

18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이루어진 증기기관과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산업 및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된다. 이러한 변화를 가리켜 "'''제2차 과학혁명'''" 또는 "'''18세기 과학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업 혁명의 동력 확보에 있어 증기기관의 발명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데니스 파팽(Denis Papin)은 최초의 증기기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증기솥(steam digester)을 발명하며 증기 동력 활용의 가능성을 열었다.[117][118] 이후 1698년, 영국의 발명가 토마스 세이벌리(Thomas Savery)는 최초로 작동하는 증기기관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 이 기관은 "불의 추진력으로 물을 퍼 올리고 모든 종류의 공장 작업에 동력을 공급하는 새로운 발명"으로 소개되었으며, 특히 광산 배수, 도시 용수 공급 등에 유용할 것으로 기대되었다.[119] 세이벌리는 1699년 6월 14일 왕립학회에 이 발명을 시연했고, 1702년 자신의 저서 『광부의 친구; 또는 불로 물을 퍼 올리는 기관』(The Miner's Friend; or, An Engine to Raise Water by Fireeng)에서 이 기계의 효용성을 강조했다.[120] 하지만 실질적으로 널리 사용될 수 있는 증기기관은 토마스 뉴커먼(Thomas Newcomen)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가 개발한 뉴커먼 증기기관은 광산 등에서 물을 퍼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뉴커먼은 산업혁명의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121]
증기기관과 더불어 철 생산 기술의 혁신도 산업 혁명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아브라함 다비 1세(Abraham Darby I)는 기존의 목탄 대신 코크스(coke)를 연료로 사용하여 고품질의 철을 대량 생산하는 용광로 기술을 개발했다. 이는 철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생산량을 증대시켜, 기계, 건축, 운송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 필요한 철의 공급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산업혁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6. 과학 혁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
영국의 과학사가 H. 버터필드는 17세기에 일어난 과학의 대규모 변혁을 "과학 혁명"이라 명명하며, 이를 르네상스나 종교 개혁보다 더 중요한 근대의 분기점으로 제시했다.[163][164] 그는 이 혁명이 근대 세계와 정신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평가하며 그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164]
그러나 버터필드의 이러한 주장이 발표된 이후, 과학 혁명의 성격과 의미에 대한 다양한 논쟁과 비판적 시각이 제기되었다.[163] 모든 역사가들이 근대 과학의 성립을 급격한 '혁명'으로 보거나, 버터필드가 제시한 역사적 평가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비판적 관점으로는, 과학 혁명이 갑작스러운 단절이 아니라 중세 및 르네상스 시기의 지적 성과와 연속성을 가진다는 연속성 논제가 있다. 또한, 과학 혁명의 성과가 순수하게 유럽 내부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 중국 등 다양한 문화권과의 교류와 영향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다문화적 영향에 대한 분석도 중요한 비판 지점이다. 더불어, 과학 혁명의 역사가 주로 남성 중심으로 서술되어 여성들의 기여가 간과되었다는 비판 역시 제기된다.
이처럼 과학 혁명은 단순히 영웅적인 과학자들의 발견 이야기로만 이해될 수 없으며, 그 역사적 맥락과 다양한 비판적 관점을 통해 더욱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6. 1. 연속성 논제

근대 과학이 일종의 혁명으로 일어났다는 생각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어 왔다.[146] 과학 혁명 개념의 약점 중 하나는 14세기와 17세기 사이 기간 동안 지식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방식이 부족했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147] 이는 근대 과학자들의 가치와 역할을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속성 논제는 중세의 지적 발전과 르네상스 및 초기 근대 시대의 발전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없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피에르 뒤엠, 존 허먼 랜덜, 앨리스터 크롬비, 윌리엄 A. 월러스와 같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깊이 있게 다루어졌다. 이들은 소위 과학 혁명의 여러 아이디어들이 실제로는 그 이전 시대에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연속성 논제의 관점에서 보면, 르네상스 이후 갑작스러운 과학 혁명이 일어났다는 생각은 일종의 신화일 수 있다. 일부 연속성 이론가들은 중세 시대에 이미 지적인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보며, 그 예로 유럽의 12세기 르네상스[148][149]나 중세 이슬람 세계의 과학적 성과[150][151][152]를 연속성의 증거로 제시한다.[153]
아룬 발라는 근대 과학의 탄생에 대한 그의 저서에서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과학 혁명 시기의 주요 변화들, 예를 들어 수학적 실재론으로의 전환, 기계적 철학, 원자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태양이 중심 역할을 맡게 된 것 등이 유럽 외부의 다문화적 영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알하젠의 물리 광학 이론, 세계를 기계로 보게 만든 중국의 기계 기술, 새로운 수학적 사고방식을 담고 있던 힌두-아라비아 숫자 체계, 그리고 헤르메티시즘과 관련된 고대 이집트 종교 사상에 기반한 지동설 등을 중요한 영향으로 꼽는다.[154] 발라는 이러한 다문화적 영향을 무시하면 과학 혁명에 대해 유럽 중심적인 시각에 빠지게 된다고 비판한다.[155] 그러나 그는 "혁명의 주역들인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등은 관련된 아이디어를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변형하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그들의 과업을 완수해야 했다… 결국 분석해 보면, 비록 혁명이 다문화적 기반 위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럽에서 유럽인들이 이룬 업적이다"라고 덧붙인다.[156] 일부 비평가들은 특정 과학적 아이디어 전달에 대한 명확한 문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발라의 모델이 "결론이라기보다는 작업 가설"에 가깝다고 지적한다.[157]
세 번째 접근 방식은 "르네상스"라는 단어의 의미 그대로 "재생"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 수학에 대한 연구는 과학 혁명 시기의 소위 '혁명적' 결과들이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오래되었거나, 적어도 아르키메데스 시대의 아이디어를 다시 서술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 혁명기에 주장된 지동설과 같은 일부 아이디어를 명시적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과학적 방법의 기본적인 아이디어, 예를 들어 부력의 발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미 아르키메데스와 동시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 혁명은 새로운 지식의 창조라기보다는 르네상스의 연장선상에서 고전적인 아이디어를 다시 배우고 확인하는 기간으로 볼 수 있다. 이 견해는 뉴턴, 코페르니쿠스 등이 피타고라스적 세계관을 지지한 발언들을 근거로 제시한다.[158][159]
최근에는 이 시기 과학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 당시 남성 과학자 중심의 서술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160] 여성 학자들은 남성 학자들이 누렸던 기회를 동등하게 얻지 못했으며, 이 시대 과학에서 여성들의 작업은 종종 간과되거나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연구자들은 17세기 여성들의 과학 참여를 조사하며, 가정 내 지식과 같은 영역에서도 여성들이 과학적 발전에 기여했음을 밝히려 노력하고 있다.[161] 하지만 당시 기록의 한계로 인해 과학적 아이디어와 발명에 대한 여성의 역할을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또한 이 시대가 후대의 여성 과학자들에게 미친 영향도 고려해야 할 점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천문학자 애니 점프 캐넌은 과학 혁명기에 개발된 법칙과 이론의 혜택을 받았으며, 과학 혁명 이후 시대에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처럼 과학 혁명은 과학의 미래, 특히 여성이 과학 분야에 참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162]
6. 2. 다문화적 영향
과학 혁명이 순수하게 유럽 내부에서 발생한 단일한 사건이라는 전통적인 시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영국의 과학사가 H. 버터필드는 근대 과학의 성립을 논하면서 기존 역사관의 유럽 중심주의를 지적하고, 17세기 이전 유럽 문명이 반드시 세계사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관점을 제시했다.[165][166]
과학 혁명에 대한 생각의 약점 중 하나는 14세기와 17세기 사이 지식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 방식이 부족하다는 점이다.[147] 이러한 배경에서 연속성 논제는 중세의 지적 발전과 르네상스 및 초기 근대 시대의 발전 사이에 근본적인 단절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일부 이론가들은 중세 이슬람 과학의 기여를[150][151][152] 중요한 연속성의 증거로 언급하기도 한다.[153]
아룬 발라(Arun Bala)는 그의 저서에서 과학 혁명에 대한 다문화적 기원론을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과학 혁명을 이끈 주요 변화들, 예를 들어 수학적 실재론, 기계적 철학, 원자론,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태양이 중심 역할을 하는 개념 등이 유럽 외부의 다양한 문화적 영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154] 발라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영향을 지적한다.
- 알하젠의 물리적 광학 이론
- 세계를 기계로 인식하는 데 영향을 준 중국의 기계 기술
- 새로운 수학적 사고방식을 내포한 힌두-아라비아 숫자 체계
- 헤르메티시즘과 관련된 고대 이집트 종교 사상에 뿌리를 둔 지동설[154]
발라는 이러한 다문화적 영향을 무시하면 과학 혁명에 대한 유럽 중심적인 이해에 머무르게 된다고 비판한다.[155] 그러나 그는 동시에 "혁명의 주역들인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등 많은 사람들은 관련된 아이디어를 선택적으로 적절히 활용하고, 변형하고, 새로운 보조 개념을 만들어야만 그들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비록 혁명이 다문화적 기반 위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그것은 유럽에서 유럽인들이 이룬 업적이다"라고 덧붙이며 유럽 과학자들의 독창적인 역할을 인정했다.[156] 다만, 발라의 주장에 대해서는 특정 과학적 아이디어 전달에 대한 명확한 문서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57]
6. 3. 여성 과학자의 배제
과학 혁명 시기 동안 과학 분야는 주로 남성 학자들이 주도했다.[160] 이로 인해 여성 학자들은 남성들과 동등한 연구 기회를 얻기 어려웠으며, 그들의 과학적 기여는 종종 제대로 평가받거나 기록되지 못했다. 학자들은 당시 여성들이 가정 지식과 같은 분야에서 과학적 발전에 기여했음을 밝혀내고 있지만,[161] 현존하는 기록만으로는 여성들의 역할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이러한 성별 불균형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후대의 여성 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20세기 천문학자 애니 점프 캐넌은 과학 혁명기에 정립된 이론과 법칙의 혜택을 받았지만, 여전히 여성 과학자로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수 있다. 과학 혁명은 과학의 미래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지만, 동시에 과학계 내 성별 불평등 문제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62] 이는 과학 연구 환경의 다양성과 포용성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한다.
7. 결론
영국의 과학사가 허버트 버터필드(H. Butterfield)가 처음 사용한 "과학 혁명"이라는 용어는 주로 17세기에 일어난 과학 분야의 거대한 변화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았다.[163] 버터필드는 1949년 저서 『근대 과학의 탄생』(The Origins of Modern Science)에서, 르네상스나 종교 개혁보다 17세기 근대 과학의 성립이야말로 근대를 연 진정한 분기점이라고 주장하며 이 변혁을 산업 혁명에 빗대어 "과학 혁명"이라 명명했다.[164] 그는 당시 유럽 문명이 세계사에서 항상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며, 17세기 과학 혁명 이전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165][166]
과학 혁명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전환이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등은 기존의 천동설 중심 우주관을 폐기하고 지동설을 확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64]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행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을 넘어,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 자체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갈릴레이의 낙하 법칙과 같은 역학적 발견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반한 목적론적 자연관(모든 물체가 고유한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포함한 뉴턴 역학의 등장은 세상을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이해하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확립시켰다. 이는 지상 세계와 천상 세계를 엄격히 구분했던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술 혁신을 촉발하여 18세기 증기 기관의 발명과 산업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과학 혁명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지식 탐구 방법론의 변화이다. 이전 시대에는 경험적 지식보다 순수한 논리적 사유를 중시하여 과학적 증명 방법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으나, 이 시기부터는 누구나 재현 가능한 실험과 관찰을 통해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방식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갈릴레이는 저서에서 실제로 공을 굴리고 진자를 흔드는 실험 과정과 결과를 상세히 기술하여 독자들이 직접 검증할 수 있도록 했으며, 케플러는 루돌프 표를 통해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행성의 움직임을 훨씬 더 정확하게 예측함을 증명했다. 이러한 방법론적 혁신은 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쳐 과학철학의 발전을 촉진했다.
버터필드가 지적했듯이, 과학 혁명은 "근대 세계와 근대 정신의 진정한 창시자"로서[164]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단순히 과학 지식의 진보를 넘어,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관, 그리고 사회 구조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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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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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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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수
[169]
문서
동굴의 우상, 종족의 우상, 극장의 우상, 시장의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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