샹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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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샹카라는 8세기경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의 철학자로, 불이원론(Advaita Vedānta) 베단타 철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을 주장하며, 무지(아비드야)로 인한 현상 세계의 환영(마야)을 극복하고 브라만과의 합일을 통해 해탈(Moksha)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샹카라는 인도 전역을 순례하며 불교 등 다양한 사상과 논쟁을 벌였으며, 4개의 주요 승원을 설립하여 아드바이타 베단타 전통을 확립했다. 그의 철학은 힌두교와 인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힌두교의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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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힌두교 지도자 - 라마누자
라마누자는 11~12세기에 활동한 인도의 철학자이자 힌두교의 스리바이슈나바 전통의 중요한 인물로, 비시슈타드바이타 철학을 발전시키고 박티 운동을 이끌었으며 사회 개혁에도 기여했다.
샹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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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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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샹카라 샹카라 바가바트파다 (Śaṅkara Bhagavatpāda) 샹카라 바가바트파다차리아 (Śaṅkara Bhagavatpādācārya) 샹카라차리아 |
종교 | 힌두교 |
철학 | 아드바이타 베단타 |
존경 | 자갓구루 |
알려진 이유 |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주창 |
생애 | |
출생 | 기원후 700년경 |
사망 | 기원후 750년경 |
스승 | 고빈다 바가바트파다 |
2. 생애
샹카라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부족하며, 대부분의 정보는 후대에 쓰여진 전기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 아드바이타 전통에서는 샹카라를 기원전 5세기로 보지만, 학계에서는 서기 8세기 전반의 학자로 보고 있다.
샹카라는 "신의 발의 스승"으로 알려졌으며,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교리를 강화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동일하다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82] 스마르타 전통에서 샹카라는 시바 신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샹카라는 인도 각지를 여행하며 강연과 다른 철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했다.[82] 그는 힌두교와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포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4개의 사원을 설립했다. 그의 저서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였으며 아드바이타(비이원성) 교리 확립에 관한 것이지만, 300점이 넘는 샹카라 저작으로 여겨지는 작품 중 대부분은 위작으로 여겨진다.[82] 주요 저작으로는 베단타 학파의 근본 성전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인 『브라마 수트라 주석』,[82] 『브리하드 아라니야카』 등 고대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 그리고 『우파데샤 사하스리』 등이 샹카라의 진작으로 여겨진다. 샹카라는 가르침을 설파할 때, 우파니샤드와 다른 힌두교 성전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샹카라는 베단타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지만, 그의 사상은 불교와 친근성이 높다고 한다.[83] 그는 자신의 해설서에서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했으며, 힌두교의 아트만(영혼, 자아) 존재를 주장하고 "영혼도 자아도 없다"는 불교와 대립했다.[85][86][87]
몇몇 학자들은 샹카라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력은 수세기 후, 특히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그로 인한 인도의 황폐 시대에 높아졌다고 지적한다.[88][89] 샹카라의 전기 대부분은 14세기 이후에 집필·출판되었으며, 널리 인용되는 비디야나의 『샹카라 비자야』 등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샹카라는 인도 반도 남부 케랄라 주 칼라디에서 브라만 계급으로 태어났으며,[82] "시바 신의 화신"으로 묘사된다.[91]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출가하여 고빈다를 스승으로 섬겼다.[82] 그 후, 인도 전역을 유행하며 여행했고, 파드마파다, 하스타마라카, 토타카차리야, 바르티카카라라는 4명의 제자를 얻었다.
샹카라는 브라만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승원을 건립한 인물이다. 그는 인도 동서남북에 4개의 승원을 창설하고 4명의 고제자를 각각 배치했다. 베단타파 승원은 현재 인도 각지에 있지만, 총본산은 카르나타카 주 슈링게리에 있으며,[82] 동부 푸리, 서부 드바라카,[90] 히말라야 산맥 지방 바드리아나트, 타밀나두 주 칸치에 주요 승원이 있다.[82]
4개 승원 법주의 자리는 "샹카라 아차리야의 자리"라고 불리며, 베단타를 체득한 사람만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어 공석이 되는 경우도 많다. 샹카라 아차리야는 우파니샤드 성전의 진리를 체득한 성자로서 샹카라의 화신으로 존경받으며, 현재 인도에서도 큰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91]
샹카라는 전설에 따르면 히말라야 지방 케다르나트에서 입멸했다고 한다.[82][92]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샹카라는 8세기경 남인도 케랄라 주 칼라디[20]라는 마을에서 브라만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나이가 많고 자녀가 없는 부부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아들의 이름을 "번영을 주는 자"라는 의미의 샹카라라고 지었다.[22] 샹카라의 아버지는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23]전설에 따르면 샹카라는 시바 신의 화신으로 여겨지며,[91]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지적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5세 때 베다 성전 학습을 시작하였고, 7세에 이미 모든 경전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91]
2. 2. 출가와 수행
샹카라는 어린 시절부터 출가하여 은둔자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어머니는 이를 반대했다. 샹카라가 여덟 살 때 강에서 악어에게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샹카라는 어머니에게 출가자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외쳤고, 어머니가 동의하자 악어에게서 풀려났다고 전해진다.[82]이후 샹카라는 고빈다 바가바트파다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샹카라와 스승의 만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료마다 다르게 묘사되지만, 샹카라가 스승과 함께 옴카레슈와르의 나르마다 강가, 카시(바라나시), 또는 히말라야 산맥의 바다리(바드리나트) 등에서 베다, 우파니샤드, 브라마수트라를 공부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언급된다.[82]
샹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젊은 나이에 여러 주요 저작들을 저술하였다. 그는 스승 고빈다와 함께 가우다파디야 카리카를 공부했는데, 고빈다는 가우다파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미맘사 학파의 힌두교 학자들인 쿠마릴라와 프라바카라, 그리고 만다나와 다양한 불교도들과 공개 철학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82]
2. 3. 인도 전역 순례와 논쟁
샹카라는 불이원적 베단타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4세기에서 17세기에 쓰여진 전기들은 그를 베다 연구를 복원하기 위해 인도 전역을 여행한 승리자로 묘사한다.[9] 샹카라는 불교와 자이나교 등의 공격으로부터 힌두교의 다르마를 복원하고 불교를 인도에서 몰아내는 데 기여한 인물로 여겨진다.[10]샹카라는 인도 각지를 여행하며 힌두 철학의 다양한 정통 학파뿐만 아니라 불교도, 자이나교도 등 이단 전통과 공개 철학 토론을 벌였다. 성인전에는 그가 여러 마타(수도원)를 세웠다고 하지만, 이것은 불확실하다. 인도 여러 지역의 10개 수도회가 샹카라의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사냐신'' 학파로 일반적으로 여겨지며, 그중 4개는 그의 전통을 이어왔다: 바라티(스링게리), 사라스바티(칸치), 티르타 및 아스라민(드바라카).
샹카라는 여행 중에 많은 제자들을 얻었는데, 파드마파다차르야(사난다나라고도 불림), 수레슈바라, 토타카차르야, 하스타말라카차르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샹카라와 아드바이타 베단타에 관한 자체 문헌을 저술했다.
샹카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강연과 다른 철학자와의 논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82] 그는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했는데, 특히 『브라마 수트라』 2.2.32 주석에서 "바이나시 학파(불교도)의 교리는 신빙성이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84] 샹카라는 힌두교의 아트만(영혼, 자아) 존재를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고 말하며 대립했다.[85][86][87]
2. 4. 수도원 설립
샹카라는 브라만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승원을 건립한 인물이다. 샹카라는 인도 동서남북에 4개의 승원을 창설하고 4명의 고제자를 각각 배치했다.[82] 베단타파의 승원은 현재 인도 각지에 있지만, 총본산은 카르나타카 주의 슈링게리 샤라다 피탐이며,[82] 그 외 동부의 푸리, 서부의 드바라카,[90] 히말라야 산맥 지방의 바드리아나트, 타밀나두 주의 칸치에 주요 승원이 세워져 있다.[82]전통에 따르면 아디 샹카라는 힌두 수도승들을 서쪽의 드바르카, 동쪽의 자간나트 푸리, 남쪽의 스링게리 및 북쪽의 바드리케아슈라마에 있는 네 개의 마타 (산스크리트어: मठsa) 아래에 조직했다.[26] 각 마타는 베단타 삼프라다야를 이어가는 그의 네 명의 주요 제자 중 한 명이 이끌었다.
4개의 승원 법주의 자리는 현재 "샹카라 아차리야의 자리"라고 불리며, 베단타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면 그 자리에 앉을 수 없기 때문에 공석이 되는 경우도 많다. 샹카라 아차리야(아차리야는 "선생님"의 의미)는 직역하면 "샹카라(의) 선생님"이 되며, 초대 샹카라를 나타낼 때에는 아디("초대"의 의미)를 붙여 구분한다. 샹카라 아차리야는 우파니샤드 성전의 진리를 체득한 성자로서 샹카라의 화신으로 존경과 신앙을 모으며, 현재의 인도에서도 큰 사회적 영향력이 있다.[91]
폴 해커에 따르면, 이 시스템은 비디아라냐 (14세기)에 의해 시작되었을 수 있으며, 그는 샹카라의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전파하기 위한 캠페인의 일환으로 샹카라 자신이 설립했다고 선언하면서 마타를 세웠을 수 있다. 비디아라냐는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며,[17] 그의 후원과 체계적인 노력은 샹카라를 가치의 집결 상징으로 확립하고,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의 역사적 및 문화적 영향을 확산시키며, 샹카라와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수도원 (마타)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2. 5. 사망
아디 샹카라는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힌두교 순례지인 우타라칸드주 북부 케다르나트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90][91] 문헌에 따르면 그는 제자들에게 케다르나트 사원 뒤편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으며, 히말라야에서 발걸음을 옮기다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일부 문헌에서는 그의 죽음을 칸치푸람 (타밀나두) 또는 케랄라주 어딘가에서 일어났다고 묘사한다.[31] 칸치 수도원에 관련된 전기에 따르면, 아디 샹카라는 칸치에서 사망했다.[90] [82][92]3. 샹카라의 연대 문제
샹카라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전통적인 아드바이타 베단타 학파에서는 샹카라를 기원전 5세기의 인물로 보지만, 현대 학자들은 대체로 샹카라를 서기 8세기 전반(700년 ~ 750년)의 인물로 추정한다.[82]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학자들은 K.P. 틸레를 따라 788–820 CE를 제시했으며, 막스 뮐러, Macdonnel, Pathok, Deussen, 라다크리슈난과 같은 학자들이 관례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서는 788–820 CE 연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학계는 샹카라의 생애를 8세기 전반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추정치는 그의 생애의 가장 이른 시점과 가장 늦은 시점에 대한 가능성에 근거한다. 그의 작품에는 5~7세기 불교 및 미맘사 저자들과의 논쟁의 흔적이 담겨 있으며, 가장 이른 시점은 대략 650년경이다. 가장 늦은 시점은 바차스파티 미스라가 샹카라의 작품에 대한 해설을 9세기 전반으로 기록하면서 설정되었으며, 이는 샹카라의 가장 늦은 시점을 대략 800년경으로 본다.
3. 1. 마타(Matha) 기록에 따른 연대
샹카라의 주요 기관인 Maṭhasa(마타)의 수장 기록에 따르면, 아디 샹카라차르야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4]수도원 | 추정 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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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르카 | 기원전 491년 |
조티르마트 | 기원전 485년 |
자간나트 푸리 | 기원전 484년 |
스링게리 | 기원전 483년 |
칸치푸람 피탐에 따르면 아디 샹카라는 칼리 2593년(기원전 509년)에 태어났다.[5] 그는 신성한 사명을 확립한 후, 32세 때인 칼리 2625년, 락타크시 순환 해에 스리 카마크시 부근의 칸치에서 브라흐마(브라만과의 동일성)를 달성했는데, 이는 기원전 476년에 해당한다.[7]
스링게리 마타의 기록에 따르면 샹카라는 "비크라마디티야"의 통치 14년에 태어났지만, 이 이름이 어떤 왕을 지칭하는지는 불분명하다.[8]
3. 2. 학자들의 연대 추정
19세기 말 ~ 20세기 초 학자들은 K.P. 틸레(Tiele)를 따라 샹카라의 생몰 연대를 788년 ~ 820년으로 추정했다.[2] 막스 뮐러, 맥도넬, 라다크리슈난 등의 학자들이 이 연대를 관례적으로 받아들였다.[2] 그러나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학계에서는 샹카라의 저작에 나타난 불교 및 미맘사 학파와의 논쟁, 그리고 바차스파티 미스라의 저술 등을 근거로 샹카라의 활동 시기를 8세기 전반(700년 ~ 750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2]4. 주요 사상
샹카라는 불이원론(Advaita Vedānta) 베단타 철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샹카라 이전에도 유사한 견해가 존재했지만, 베단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20] 11세기까지 베단타는 주변적인 학파였으나,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가 자신들의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베단타를 활용하면서 주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21] 초기 베단타 학자들은 전통 문화에 정통한 사회 상류층 출신으로, "힌두교의 일반적인 실천가 및 신학자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적 엘리트를 형성했다.[22] 그들의 가르침은 "선택된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해졌다".[23] 샹카라 이후에야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의 신학자들이 베단타 철학을 자신들의 교리의 기반으로 활용"하게 되었으며, "인도 사회 전체에 대한 이론적 영향력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되었다".[24]
샹카라는 아트만(Atman)과 브라만(Brahman)의 동일성에 대한 해방적인 지식을 강조했다. 모크샤는 ''마하바키야'' 특히 "그것이 너다(Tat Tvam Asi)"를 통해 중재된 ''아트만''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인식함으로써 이 생에서 얻어진다. 그는 "신의 발의 스승"으로 알려졌으며,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교리를 강화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브라만(梵)과 아트만(我)은 동일하다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82]
샹카라는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했다. 그의 가장 직접적인 불교 비판은 『브라마 수트라』 2.2.32의 주석에서 볼 수 있다. 그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영혼, 자아)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85][86][87] 석가가 무상, 찰나, 공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교리를 설하여 민중을 미혹하고 혼란에 빠뜨렸다고 비판하며, 해탈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존경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84] 샹카라가 목표로 한 것은 윤회로부터의 해탈이었으며, 그 수단은 바라문교의 경전 『베다』의 주석서(오의서)인 『우파니샤드』가 설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만(梵)과 개체의 본질인 아트만(我)은 본래 동일하다는 지식이다.[93]
4. 1. 불이원론 (Advaita Vedānta)
샹카라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참된 자아인 아트만(Atman)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불이원론(Advaita, 不二一元論)적 관점을 제시했다.[82] 샹카라에 따르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실체(브라만)만이 실재하며, 변화하는 실체는 절대적인 존재를 갖지 않는다. 샹카라는 현상 세계의 다양성과 변화는 무지(無知, Avidya)로 인한 환영(幻影, Maya)에 불과하며, 브라만만이 유일한 실재라고 주장했다.[93] 샹카라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을 깨닫는 것이 해탈(Moksha)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했다.콜러에 따르면, 샹카라와 그의 동시대인들은 불교와 고대 베다 전통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현존하는 사상을 변형시켜 특히 힌두교의 베단타 전통을 개혁하여 1,000년 이상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 전통"으로 만들었다. 베네딕트 애슐리는 아디 샹카라가 힌두교의 두 개의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철학적 교리인 아트만과 브라만을 통합했다고 평가한다.[48]
나카무라에 따르면, 샹카라는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라 선행 철학자들의 저술을 체계화했다. 샹카라 저술의 중심 주제는 자아(아트만)와 ''브라만''의 동일성에 대한 해방적인 지식이다. 모크샤는 ''마하바키야'' 특히 "그것이 너다(Tat Tvam Asi)"를 통해 중재된 ''아트만''과 ''브라만''의 동일성을 인식함으로써 이 생에서 얻어진다.
나카무라에 따르면, 초기 베단타 학자들의 알려진 가르침과 샹카라의 사상을 비교해 보면, 샹카라 사상의 특징 대부분이 "샹카라 이전에 누군가에 의해 옹호되었다"고 한다. 샹카라는 이전에 존재했던 ''불이원론(Advaita-vāda)''을 종합한 인물이다. 나카무라에 따르면, 가우다파다의 저작을 정점으로 베단타에 대한 불교의 영향력이 커진 후, 아디 샹카라는 이 작품들에서 불교적 요소에 베단타적 성격을 부여하여 불이원론의 교리를 종합하고 부활시켰다.
콜러에 따르면, 샹카라는 고대 인도 텍스트의 아이디어를 사용하여 8세기에 불이원 베단타의 기반을 체계화하여 바다라야나(Badarayana)의 베단타 전통을 개혁했다.
샹카라의 저작의 중심 주제는 ''아트만''-브라만'으로서의 ''지바트만''(개별 자아)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해방적 지식이다. 샹카라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우파니샤드를 베다의 의례 지향적인 미맘사 해석을 넘어 독립적인 지식의 수단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샹카라에 따르면, 다수의 우파니샤드 구절은 '아트만'(Ātman, 자아)과 '브라만'(Brahman, 궁극적 실재)의 동일성을 드러낸다. 아드바이타 베단타 전통에서, 이러한 구절 중 네 가지는 '마하바탸스(Mahāvākyas, 대경구)'라고 불리며, 다른 구절들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이러한 동일성을 드러내는 데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66] 이는 다음과 같다.
- तत्त्वमसि, ''tat tvam asi'',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8.7. 전통적으로 "그것이 바로 너다"(That Thou Art)로 번역된다.
- अहं ब्रह्मास्मि, ''aham brahmāsmi'',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 I.4.10, "나는 브라만이다"(I am Brahman) 또는 "나는 신성하다"(I am Divine).
- प्रज्ञानं ब्रह्म, ''prajñānam brahma'',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V.3, "''프라즈냐남''은 브라만이다"(is Brahman)."
- अयमात्मा ब्रह्म, ''ayamātmā brahma'', 만두키야 우파니샤드 II, "이 아트만은 브라만이다"(This Atman is Brahman).
샹카라는 불이원론적 입장을 고수하며 경험적 현실을 부정하지만, 'Īśvara'와 동일시함으로써 우주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때때로 'Īśvara'와 'Brahman'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둘 다에 다양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우주 및 그 속성과 관련된 'Īśvara'를 절대적인 불이원적 브라만과 분리한다. 우파니샤드를 참고하여 샹카라는 'Īśvara'를 'maya'의 힘을 통해 우주를 발현시키며, 그 결과 우주를 지각하고 자각하게 만드는 우주의 물질적이고 지적인 원인으로 본다. '만두캬 우파니샤드'와 관련하여 샹카라는 우주의 비현현 상태를 깊은 무의식적인 우주 상태의 'Īśvara'에 비유한다.[72]
세상의 원인으로서의 브라만에 대한 샹카라의 개념은 문자 그대로의 창조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비바르타'(변형 없는 다양성)이다.[73]
샹카라는 "신의 발의 스승"으로 알려졌으며,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교리를 강화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브라흐만(梵)과, 아트만(我)은 동일하다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82]
샹카라가 목표로 한 것은 윤회로부터의 해탈이었으며, 그 수단은 바라문교의 경전 『베다』의 주석서(오의서)인 『우파니샤드』가 설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흐만(梵)과 개체의 본질인 아트만(我)은 본래 동일하다는 지식이다.[93]
4. 2. 지식의 중요성
샹카라는 해탈을 위해서는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에 대한 지식(Jnana)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탐구하고, 이성적 사유와 명상을 통해 참된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샹카라는 행위(Karma)나 의례만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으며, 오직 지식만이 해탈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93]샹카라에 따르면, 다수의 우파니샤드 구절은 '아트만(Ātman, 자아)'과 '브라만(Brahman, 궁극적 실재)'의 동일성을 드러낸다. 아드바이타 베단타 전통에서, 이러한 구절 중 네 가지는 '마하바탸스(Mahāvākyas, 대경구)'라고 불리며, 다른 구절들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이러한 동일성을 드러내는 데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경구 | 의미 | 출처 |
---|---|---|
तत्त्वमसि, tat tvam asi | "그것이 바로 너다" |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VI.8.7 |
अहं ब्रह्मास्मि, aham brahmāsmi | "나는 브라만이다" 또는 "나는 신성하다" | 브리하다라냐카 우파니샤드 I.4.10 |
प्रज्ञानं ब्रह्म, prajñānam brahma | "프라즈냐남은 브라만이다" |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V.3 |
अयमात्मा ब्रह्म, ayamātmā brahma | "이 아트만은 브라만이다" | 만두키야 우파니샤드 II |
샹카라 저작의 중심 주제는 ''아트만''-브라만'으로서의 ''지바트만''(개별 자아)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해방적 지식이다.[71] 샹카라에 따르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실체(브라만)만이 실재하며, 변화하는 실체는 절대적인 존재를 갖지 않는다. 샹카라는 ''지바트만''이 ''아트만-브라만''이라는 진정한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이 생에서 해탈을 달성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이는 특히 "그것이 너다"라는 ''마하바키야스''에 의해 매개된다. ''지바트만''과 ''아트만-브라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불멸을 달성하는 것이며, 고통과 윤회로부터의 해탈로 이어진다.
샹카라는 요가를 통해 얻는 마음의 순수함과 평정심을 해탈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겼지만, 그러한 요가적 마음 상태만으로는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보았다.[60] 샹카라에게 있어 브라만에 대한 지식은 오직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만 비롯된다.[61]
샹카라는 완전한 생각의 억압이 해탈로 이어진다는 요가 시스템의 변형과, 슈루티가 자아의 일원성에 대한 지식과는 별개의 무언가로 해탈을 가르친다는 견해를 거부했다. 샹카라는 참된 사물의 본성에 관련된 지식과 통찰력만이 해탈시킨다고 가르쳤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연구를 매우 강조하며, 그것들을 자아 해방적인 지식을 얻는 데 필요하고 충분한 수단으로 강조했다. 또한 샹카라는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한 ''구루''(아차르야, 스승)의 필요성과 역할을 강조했다.[62]
4. 3. 불교 비판
샹카라는 불이원론(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을 옹호하며 당시 인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던 불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그는 불교의 공(空, Śūnyatā) 사상과 무아(無我, Anātman)론을 비판하며, 아트만의 실재성과 브라만과의 동일성을 주장했다. 샹카라는 불교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모순되며 경험적 현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84]샹카라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영혼, 자아)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는 반면,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85][86][87] 그는 자신의 해설서에서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했는데, 가장 직접적인 비판은 『브라마 수트라』 2.2.32의 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샹카라는 석가가 무상, 찰나, 공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교리를 설파하여 민중을 미혹하고 혼란에 빠뜨렸다고 비판하며, 해탈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존경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84]
일부 학자들은 샹카라의 불이원론과 불교의 중관파의 관점이 초월적이고, 형언할 수 없으며, 비이원적이고, 단지 ''부정의 길'' (네티 네티)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양립 가능하다고 보았다. S.N. Dasgupta는 샹카라와 그의 추종자들이 비판의 변증법적 형태를 불교에서 많이 차용했으며, 샹카라의 브라만은 순야(sunya)와 매우 흡사하다고 평가했다.[76]
그러나 샹카라의 베단타는 대승 불교와 유사점을 보이며, 샹카라를 "은둔 불교도"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77][83] 라마누자는 아디 샹카라를 "은밀한 불교도"인 ''Prachanna Bauddha''라고 비난했으며,[77] 유신론적 박티 헌신을 훼손하는 인물이라고 비판했다.[77]
하지만 불이 베단타 전통은 아트만, 아나트만, 브라만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강조하며 이러한 비판을 거부한다.[74][75] 불교에서 더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 열반은 욕망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지각, 욕망, 망상의 중심으로서의 자아(아나트만)가 없음을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 힌두교에서 더 흔히 사용되는 용어인 모크샤는 욕망과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며, 자신의 내면적 자아가 개인적인 '에고 자아'가 아닌, 보편적인 자아임을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다.[74][78]
5. 저작
샹카라는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고 전해지지만,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300점이 넘는 저작이 샹카라의 것으로 여겨지지만, 대부분은 위작으로 여겨진다.[82] 샹카라의 진본으로 여겨지는 주요 저작에는 베단타 학파의 근본 성전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인 《브라마 수트라 주석》과,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등 고대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이 있다.[82] 그는 가르침을 전달할 때 우파니샤드와 다른 힌두교 성전의 광범위한 인용을 사용했다. 독립된 저작물로 그의 진작으로 여겨지는 《우파데샤 사하스리》는 상키아 학파나 불교에 가까운 입장으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반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5. 1. 진본으로 여겨지는 주요 저작
샹카라의 저작 중 진본으로 여겨지는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82]- 《브라마 수트라 주석 (Brahmasūtrabhāṣya)》: 베단타 학파의 기본 경전인 브라흐마 수트라에 대한 주석서로, 샹카라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샹카라는 자신의 주석에서 가우다파다(샹카라 스승의 스승)에게 귀속된 작품의 일부 구절을 언급하거나 인용하며, 영향 관계를 드러낸다.[40]
- 《바가바드 기타 주석 (Bhagavadgītābhāṣya)》: 힌두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주석서이다.
- 《우파데사사하스리 (Upadeśasāhasrī)》: 샹카라의 독자적인 철학적 저술로, 불이원론 베단타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다.
- 주요 우파니샤드 주석:
-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주석》[82]
- 《타이티리야 우파니샤드 주석》
- 《찬도기야 우파니샤드 주석》
-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주석》
- 《케나 우파니샤드 주석》
- 《이사 우파니샤드 주석》
- 《카타 우파니샤드 주석》
- 《프라슈나 우파니샤드 주석》
5. 2.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저작
Vivekacūḍāmaṇisa:[43] 샹카라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전통주의자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반면, Grimes에 따르면, "현대 학자들은 샹카라의 작품으로서의 진정성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Grimes는 "비베카추다마니의 저자가 샹카라일 가능성이 여전히 있다"고 주장하며,[43] "그것은 다른 독자에게 말을 걸고 다른 강조점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다른 작품과 다르다"고 언급했다.[43] "그것은 샹카라의 영적 유산에 너무나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이 작품]을 고려하지 않고 그의 관점을 분석하는 것은 불완전할 것"이다.[43]Aparokshanubhutisa와 Atma bodhasa 역시 샹카라의 독창적인 철학적 논문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의심스럽다. 폴 해커(Paul Hacker)는 편찬된 Sarva-darsana-siddhanta Sangrahasa가 샹카라가 완전히 저술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는 스타일의 차이와 부분적인 주제적 불일치 때문이다.[44] 마찬가지로, 가야트리-바샤(Gayatri-bhasya)sa는 샹카라의 작품인지 의심스럽다.[44]
샹카라의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낮은 다른 주석에는 우타라기타(Uttaragita)sa, 시바-기타(Siva-gita)sa, 브라마-기타(Brahma-gita)sa, 라리타-사스라나마(Lalita-shasranama)sa, 수타-삼히타(Suta-samhita)sa 및 산드야-바샤(Sandhya-bhasya)sa에 대한 주석이 포함된다. 샹카라에게 귀속된 밀교 작품 라리타-트리사티-바샤(Lalita-trisati-bhasya)sa에 대한 주석 또한 진정성이 없다.[44]
Vishnu sahasranāmasa 및 Sānatsujātiyasa와 같은 다른 경전 작품에 대한 주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45] 이 두 작품 모두 의문을 제기한 학자들에 의해 위작으로 간주된다.[45] 하스타말라키야-바샤(Hastamalakiya-bhasya)sa 또한 인도에서 샹카라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샹카라의 작품 사마타(Samata)sa 판에 포함되어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것이 샹카라의 제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45]
니르심하-푸르바타파니야 우파니샤드(Nrisimha-Purvatatapaniya)sa와 슈베슈바타라 우파니샤드(Shveshvatara Upanishads)sa에 대한 주석은 샹카라에게 귀속되지만, 그 진정성은 매우 의심스럽다.[42] 마찬가지로, 샹카라에게 귀속된 초기 및 후기 우파니샤드에 대한 여러 주석은 학자들에 의해 그의 작품으로 거부되었으며, 후대 학자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는 카우쉬타키 우파니샤드(Kaushitaki Upanishad)sa, 마이트리 우파니샤드(Maitri Upanishad)sa, 카이발야 우파니샤드(Kaivalya Upanishad)sa, 파라마함사 우파니샤드(Paramahamsa Upanishad)sa, 사카타야나 우파니샤드(Sakatayana Upanishad)sa, 만달라 브라흐마나 우파니샤드(Mandala Brahmana Upanishad)sa, 마하 나라야나 우파니샤드(Maha Narayana Upanishad)sa, 고파라타파니야 우파니샤드(Gopalatapaniya Upanishad)sa가 포함된다. 그러나 브라마수트라-바샤(Brahmasutra-Bhasya)sa에서 샹카라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면서 이러한 우파니샤드 중 일부를 인용하지만, 그의 동료와 제자들이 남긴 역사적 기록과 후기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의 스타일과 내용의 주요 차이점 때문에 학자들은 후기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이 샹카라의 작품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42]
6. 영향 및 평가
샹카라는 후대 인도 철학과 종교,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카무라 하지메는 샹카라 이전에도 그의 견해와 유사한 견해가 존재했지만, 베단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고 말한다.[82] 11세기까지 베단타 자체는 주변적인 학파였으며,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가 자신들의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베단타를 활용하면서 주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초기 베단타 학자들은 전통 문화에 정통한 사회 상류층 출신으로, "힌두교의 일반적인 실천가 및 신학자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적 엘리트를 형성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선택된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해졌다". 초기 베단타 학파의 저술에는 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언급이 없다. 샹카라 이후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의 신학자들이 베단타 철학을 자신들의 교리의 기반으로 활용"하게 되었으며, "인도 사회 전체에 대한 이론적 영향력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되었다". 샹카라의 견해를 거부하며 박티를 철학적 사상과 연결시킨 라마누자(11세기)와 나트 전통이 그 예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신 베단타 학파와 서구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힌두교를 단일 종교 전통으로 통합하는 신학적 연결 고리"로 격상시키면서 샹카라의 입장은 더욱 확고해졌다.[44]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이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따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샹카라는 "힌두교 종교와 문화의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다.[45]
그는 "신의 발의 스승"으로 알려졌으며,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교리를 강화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브라흐만(梵)과 아트만(我)이 동일하다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49] 인도 신화에서 샹카라는 시바 신의 별칭이다.
샹카라는 베단타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지만, 그 사상은 불교와 친근성이 높다고 한다.[50] 그는 자신의 해설서에서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했는데, 가장 직접적인 불교 비판은 『브라마 수트라』 2.2.32의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샹카라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영혼, 자아)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52][53][54]
몇몇 학자들은 샹카라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은 수세기 후, 특히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그 결과로서의 인도의 황폐 시대에 높아졌다고 지적한다.[55][56]
6. 1. 힌두교 철학에 미친 영향
샹카라의 불이원론(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은 힌두교의 주요 철학 학파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후대 베단타 학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9] 샹카라 이전에도 유사한 견해가 존재했지만, 베단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11세기까지 베단타는 주변적인 학파였으나,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가 자신들의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베단타를 활용하면서 주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초기 베단타 학자들은 전통 문화에 정통한 사회 상류층 출신으로, "힌두교의 일반적인 실천가 및 신학자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적 엘리트를 형성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선택된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해졌다". 초기 베단타 학파의 저술에는 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언급이 없다. 샹카라 이후에야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의 신학자들이 베단타 철학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들의 교리의 기반으로 활용"하게 되었으며, "인도 사회 전체에 대한 이론적 영향력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되었다".
샹카라의 사상은 비시슈타드바이타(Viśiṣṭādvaita) 학파의 라마누자(Ramanuja), 드바이타(Dvaita) 학파의 마드바(Madhva) 등 다른 베단타 학파의 사상가들에게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면서, 힌두교 철학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 들어, 라마누자는 샹카라의 견해를 거부하면서 박티를 철학적 사상과 연결시켰다.
중세 시대에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가장 영향력 있는 힌두교 다르샤나(दर्शन, Darśana, 철학)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아드바이티들이 왕실의 후원을 놓고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종파로 개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샹카라와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력이 확립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샹카라의 전기들은 14세기와 그 이후에 만들어지고 출판되었는데, 비드야라냐의 ''샹카라-비자야''가 널리 인용된다. 비드야라냐는 싱게리 사라다 피탐의 제12대 자가드구루이자[16]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재상이기도 했다.[17] 그는 남인도의 힌두교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재건을 고취시켰는데, 이는 이슬람교 델리 술탄국에 의해 초래된 파괴에 대한 대응이었을 수 있다. 그의 노력은 스리 바이쉬나바 집단, 특히 비자야나가라 제국이 정복한 영토에서 지배적이었던 ''비시스타드바이타''를 겨냥하기도 했다.[55]
비드야라냐는 샹카라를 "승리한 정복자처럼 인도 전역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한 신성한 민속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전설을 창조했다.[29] 그의 독소그래피 ''사르바다르샤나상그라하''에서 비드야라냐는 샹카라의 가르침을 모든 ''다르샤나''의 정점으로 제시하며, 다른 ''다르샤나''들을 샹카라의 가르침으로 수렴되는 부분적인 진실로 제시했다.[29] 드바이타와 비시스타드바이타는 베단타로 분류되지 않았고, 불교와 자이나교 바로 위에 위치했는데, 이는 비드야라냐의 아드바이타 충성에 대한 위협을 반영했다. 베다베다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인도 철학의 역사에서 문자 그대로 삭제되었다."
''사르바다르샤나상그라하''의 영향력은 너무 커서, 초기 인도학자들 또한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우파니샤드의 가장 정확한 해석으로 간주했다. 비드야라냐는 샹카라 자신이 설립했다고 선언하는 ''마타''를 설립했다.[29] 그는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며,[17] 그의 후원과 체계적인 노력은 샹카라를 가치의 집결 상징으로 확립하고,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력을 전파하며, 수도원(''마타'')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6. 2. 힌두교 부흥에 미친 영향
샹카라의 활동은 불교의 쇠퇴와 힌두교의 부흥에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샹카라는 불교와의 논쟁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철학을 전파함으로써 힌두교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82] 샹카라가 설립한 수도원들은 힌두교의 중요한 종교적 중심지로서 기능하며, 힌두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샹카라는 강연과 다른 철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인도 각지를 여행했다.[82] 그는 힌두교와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포교 역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4개의 사원을 설립했다.
몇몇 학자들은 샹카라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은 수세기 후, 특히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그 결과로서의 인도의 황폐 시대에 높아졌다고 지적한다.[88][89] 샹카라의 전기 대부분은 14세기 이후에 집필·출판되었으며, 널리 인용되는 비디야라냐의 『샹카라 비자야』 등이 있다.
중세 시대에 아드바이타 베단타는 가장 영향력 있는 힌두교 ''다르샤나''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아드바이티들이 왕실의 후원을 놓고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종파로 개종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샹카라와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력이 확립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비드야라냐는 비자야나가라 제국의 재건을 고취시켰는데, 이는 이슬람교 델리 술탄국에 의해 초래된 파괴에 대한 대응이었을 수 있다.[17] 비드야라냐는 샹카라를 "승리한 정복자처럼 인도 전역에서 자신의 ''디그비자야''("만방 정복")를 통해 가르침을 전파한 신성한 민속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전설을 창조했다. 그리고 비드야라냐는 샹카라 자신이 설립했다고 선언하는 ''마타''를 설립했다. 비드야라냐는 왕실의 지원을 받았고,[17] 그의 후원과 체계적인 노력은 샹카라를 가치의 집결 상징으로 확립하고, 샹카라의 베단타 철학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력을 전파하며, 샹카라와 아드바이타 베단타의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수도원(''마타'')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6. 3. 현대적 평가
나카무라 하지메는 샹카라 이전에도 그의 견해와 유사한 견해가 존재했지만, 베단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고 말한다.[36] 11세기까지 베단타 자체는 주변적인 학파였으며,[37]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가 자신들의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베단타를 활용하면서 주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38] 초기 베단타 학자들은 전통 문화에 정통한 사회 상류층 출신으로, "힌두교의 일반적인 실천가 및 신학자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사회적 엘리트를 형성했다.[39] 그들의 가르침은 "선택된 소수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전해졌다".[40] 초기 베단타 학파의 저술에는 비슈누 또는 시바에 대한 언급이 없다.[41] 샹카라 이후에야 "힌두교의 다양한 종파의 신학자들이 베단타 철학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신들의 교리의 기반으로 활용"하게 되었으며,[42] "인도 사회 전체에 대한 이론적 영향력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되었다".[43]샹카라의 입장은 19세기와 20세기에 신 베단타 학파와 서구 오리엔탈리스트들이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힌두교를 단일 종교 전통으로 통합하는 신학적 연결 고리"로 격상시키면서 더욱 확고해졌다.[44] 샹카라는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이 아드바이타 베단타를 따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힌두교 종교와 문화의 상징적인 표현"이 되었다.[45]
2023년 9월 21일, 마디아프라데시 주 옴카레슈와르 사원 근처에 아디 샹카라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33미터 높이의 아디 샹카라 동상이 공개되었다.[46] 2019년 11월 5일에는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가 케다르나트에서 3.6미터 높이의 동상을 공개했는데, 이는 녹섬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는 35ton이다.[47][48]
그는 "신의 발의 스승"으로 알려졌으며,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교리를 강화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브라흐만(梵)과 아트만(我)이 동일하다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49] 인도 신화에서 샹카라는 시바 신의 별칭이다.
샹카라는 베단타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지만, 그 사상은 불교와의 친근성이 높다고 한다.[50] 그는 자신의 해설서에서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했는데, 가장 직접적인 불교 비판은 『브라마 수트라』 2.2.32의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샹카라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영혼, 자아)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52][53][54]
몇몇 학자들은 샹카라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은 수세기 후, 특히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그 결과로서의 인도의 황폐 시대에 높아졌다고 지적한다.[55][56]
7. 한국 불교와 샹카라
샹카라는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발전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 철학을 베단타 철학에 흡수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83] 비록 샹카라가 불교 교리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의 사상은 신라의 원효나 고려의 지눌 등 한국 불교 사상가들에게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
7. 1. 원효의 화쟁 사상과의 유사성
신라 시대의 고승 원효(元曉, 617년 ~ 686년)는 서로 다른 불교 교리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불교의 근본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화쟁(和諍) 사상을 주창했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샹카라의 불이원론 철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두 사상 모두 현상 세계의 다양성과 차별을 넘어서는 궁극적 실재, 즉 불성(佛性) 또는 브라흐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83]7. 2. 지눌의 선사상과의 관련성
고려 고승 지눌(1158년 ~ 1210년)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와, 깨달음과 수행을 동시에 강조하는 돈오점수를 주장하며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확립했다. 지눌의 선사상은 샹카라의 불이원론 철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두 사상 모두 수행을 통해 번뇌와 무지를 극복하고,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82]7. 3. 샹카라에 대한 비판적 시각
나카무라에 따르면, 샹카라는 이전에 존재했던 불이원론(Advaita-vāda)을 종합한 인물이다.[83] 샹카라는 그의 해설서에서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의 가장 직접적인 불교 비판은 『브라마 수트라 주석』 2.2.32에서 볼 수 있다.샹카라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영혼, 자아)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85][86][87]
8. 결론
그는 "신의 발의 스승"으로 알려졌으며,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교리를 강화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그의 가르침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고 존립하는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동일하다는 주장에 기반하고 있다.[82] 인도 신화에서 샹카라는 시바의 별칭이다.
샹카라는 강연과 다른 철학자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인도 각지를 여행했다.[82] 그는 불교 이후 힌두교와 아드바이타 베단타 철학의 포교, 역사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4개의 사원을 설립했다.
오늘날에도 모두 현존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그의 저서는 아드바이타(비이원성)의 교리를 확립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300점이 넘는 저작이 샹카라 저작으로 여겨지지만 대부분은 위작으로 여겨진다.[82] 주요 저작은 베단타 학파의 근본 성전에 대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주석인 『브라마 수트라 주석』이다.[82] 이 외 샹카라의 진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에는 『브리하드 아라니야카』 등, 고대 우파니샤드에 대한 주석이 있다.[82] 샹카라는 가르침을 설파할 때, 우파니샤드와 다른 힌두교 성전의 광범위한 인용을 했다. 독립된 저작물로 그의 진작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우파데샤 사하스리』가 있으며, 상키아 학파나 불교에 가까운 입장으로부터의 비판에 대한 반박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샹카라는 베단타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지만, 그 사상은 불교와의 친근성이 높다고 한다.[83]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불교 철학을 베단타 철학에 흡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샹카라는 그의 해설서에서 불교의 많은 교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직접적인 불교 비판은 『브라마 수트라』 2.2.32의 주석에서 볼 수 있다.
요컨대, 바이나시 학파(불교도)의 교리는, 그 신빙성을 검토할 때마다, 사상누각처럼 무너져 내리고, 그렇기에 신빙성이 없다. 석가는, 무상, 찰나, 공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세 가지 교리를 설했다. 석가는 민중을 미워하거나, 민중을 미혹하기 위해 모순된 교리를 설하여, 혼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의 교리는 해탈을 원하는 자에게는 존경할 가치가 없다.sa[84]
샹카라는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영혼, 자아)이 존재한다"라고 주장하고, 불교는 "영혼도 자아도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85][86][87]
몇몇 학자들은 샹카라의 역사적 명성과 문화적 영향은 수세기 후, 특히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그 결과로서의 인도의 황폐 시대에 높아졌다고 지적하고 있다.[88][89] 샹카라의 전기 대부분은 14세기 이후에 집필·출판되었으며, 널리 인용되는 비디야나의 『샹카라 비자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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