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데르 카마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우데르 카마라는 브라질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활동과 사회 정의를 옹호한 인물이다. 1931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히우 지 자네이루와 올린다 이 헤시피 대교구에서 활동하며, "빈민가의 주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하고, 브라질 군사 독재에 반대하며 해방 신학을 지지했다. 또한, 빈곤 퇴치를 위해 Banco da Providência를 설립하고, '폭력의 나선'을 저술하는 등 사회 변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99년 사망했으며, 현재 시성 절차가 진행 중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에우데르 카마라 | |
---|---|
기본 정보 | |
![]() | |
직함 | 올린다 에 헤시페 대교구 명예 대주교 |
종교 | 로마 가톨릭 |
출생 이름 | 에우데르 페소아 카마라 |
출생일 | 1909년 2월 7일 |
출생지 | 포르탈레자, 브라질 |
사망일 | 1999년 8월 27일 (90세) |
사망지 | 헤시페, 브라질 |
안장지 | 올린다 세계 구세주 대성당 |
국적 | 브라질 |
모토 | (당신의 손안에) |
사제 서품 | |
서품 | 1931년 |
주교 서임 | 1952년 4월 20일 |
주교 서임자 | 자이메 데 바후스 카마라 |
올린다 에 헤시페 대주교 | |
착좌 | 1964년 3월 12일 |
종료 | 1985년 4월 2일 |
이후 | 조제 카르도주 소브리뉴 |
기타 정보 | |
![]() |
2. 경력
1931년,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받아 정해진 연령보다 이른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4] 초기에는 사회 운동에 참여하며 세아라 노동 군단(1931년)과 여성 노동자 가톨릭 연합(1933년)을 설립했다. 1952년에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리우데자네이루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고,[5] 같은 해 브라질 주교 회의(CNBB) 창설에 기여하고 1964년까지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다.[1] 1959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 단체인 Banco da Providência를 리우데자네이루에 설립했다.[10]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올린다와 헤시피 대교구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6] 이후 도시 빈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빈민가의 주교"로 불렸다.[7]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 참여하여 ''가우디움 에스페스'' 초안 작성에 기여했고,[1] 1965년에는 다른 주교들과 함께 카타콤 조약에 서명하며 복음적 빈곤의 삶을 다짐했다.[8][9]
브라질 군사 독재(1964–1985) 기간 동안 해방 신학의 지지자로서 정권을 비판하고 사회 정의를 외쳤다.[10]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토지 개혁 지지 등을 이유로 보수 세력과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11] 동료 신부가 살해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12][13] 1971년에는 구조적 폭력의 악순환을 분석한 저서 ''폭력의 나선''(Spiral of Violence영어)을 출판했다. 그의 활동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1973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1985년 대주교직에서 은퇴하였고, 1999년 8월 27일 헤시피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유년시절
에우데르 카마라는 1909년 2월 7일 브라질의 가난한 북동부 지역인 세아라주의 수도 포르탈레자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Hélder Pessoa Câmarapor이다.[2] 그의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3] 그는 열세 명의 형제자매 중 열두째였다. 당시 의료시설이 부족하여 후두염으로 다섯 형제자매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부모로부터 이웃에 대한 자비심과 작문 실력을 물려받았다. 지역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92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2. 2. 교회에서의 활동

동 에우데르 카마라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3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31년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는 당시 그의 나이가 서품을 받기에 정해진 연령보다 어렸기 때문이다.[4] 사제가 된 초기 몇 년 동안, 그는 극우 단체인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Ação Integralista Brasileira, AIB)의 지지자였으나, 나중에 이러한 이념적 선택을 거부했다. 또한 1931년 세아라 노동 군단과 1933년 여성 노동자 가톨릭 연합이라는 두 사회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1952년 3월 3일, 카마라는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리우데자네이루 대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5] 당시 브라질은 지역이 넓어 지역 교회들 간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2년 브라질 주교 회의(CNBB)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64년까지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1] 브라질 주교회의는 세계성체대회(1955년)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1965년) 결성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세계성체대회는 카마라 대주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회가 끝난 뒤 프랑스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게를리어 추기경은 그에게 "당신의 뛰어난 재능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쓸 생각을 왜 하지 않습니까? 빈부의 격차는 창조주에 대한 모욕입니다."라고 말하며 성직자로서의 양심을 일깨웠다. 1959년에는 빈곤과 사회 부당함에 맞서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대출을 돕는 자선 단체인 Banco da Providência를 리우데자네이루에 설립했다.[10]

1964년 3월 12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그를 올린다와 헤시피 대교구의 대주교로 임명했다.[6] 대주교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도시 빈민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여 비공식적으로 "빈민가의 주교"라고 불렸다.[7] 그는 다른 성직자들과 함께 소그룹으로 복음을 공부하고 사회 변화를 모색하도록 격려하며, 농민들이 기존의 숙명론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카마라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차례 회기(1962-1965)에 모두 참석했으며, 특히 현대 세계의 교회를 다룬 ''가우디움 에스페스''(기쁨과 희망)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1965년 11월 16일, 공의회가 끝나기 며칠 전, 카마라가 이끄는 40명의 주교들은 로마 외곽의 도미틸라 카타콤에서 밤에 만나 성찬례를 거행하고 카타콤 조약이라는 문서를 서명했다. 이 조약은 13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교들에게 명예로운 칭호나 특권, 세속적인 과시를 버리고 복음적인 가난의 삶을 살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주교들의 동료성이 육체적, 문화적, 도덕적 고통 속에 사는 인류의 3분의 2를 공동으로 섬기는 데서 최고의 복음적 실현을 찾는다"고 선언하며, "신념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열린 마음을 가질 것을 다짐했다.[8][9]
카마라 대주교의 지도 아래 브라질 가톨릭 교회는 브라질 군사 독재(1964–1985)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해방 신학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대주교 임기는 독재 기간 전체와 겹친다. 해방 신학은 교회의 자선 활동에 정치적 차원을 부여했으며, 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 변화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나, 일각에서는 무장 혁명 투쟁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10] 카마라는 브라질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빈곤과 부당함으로 인한 반란을 폭력으로 억압하는 것에 대해 강연하고 글을 썼다. 그의 토지 개혁 지지 등으로 인해 전통주의 가톨릭교도들은 군사 정부에 그의 체포를 요구하기도 했으며,[11] 그의 동료인 안토니우 엔리케 페레이라 네투 신부는 보수 세력으로 추정되는 이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12][13]
1971년, 카마라는 Spiral of Violence영어이라는 짧은 논문을 출판했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고 있던 시기에 쓰였으며, 구조적 부당함(1단계 폭력)이 반란(2단계 폭력)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억압적인 반작용(3단계 폭력)을 낳는 악순환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세상의 젊은이들에게 폭력의 나선을 끊기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며, 기성세대는 이미 폭력의 단계적 확산에 익숙해져 있다고 비판했다.
2. 3.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삶
카마라 대주교는 1955년 세계성체대회 이후 프랑스의 게를리어 추기경으로부터 "당신의 뛰어난 재능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쓸 생각을 왜 하지 않습니까? 빈부의 격차는 창조주에 대한 모욕입니다."라는 조언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32] 이는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본격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처음에는 사회복지 사업에 힘썼으나, 곧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가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브라질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 현실, 즉 소수의 부유층이 막대한 부와 토지를 독점하는 반면 대다수 민중은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직시했다. 당시 미국 등 다국적 기업과 결탁한 군사 독재 정권과 언론, 심지어 교회마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상황에 깊은 문제의식을 느꼈다.[32]
이에 카마라 대주교는 가난이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참된 복음화라는 신학적 입장을 확립했다.[32] 그는 직접 파벨라와 같은 빈민가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스스로의 존엄성을 깨닫고 변화의 주체가 되도록 이끌었다. 이러한 헌신적인 삶으로 인해 그는 비공식적으로 "빈민가의 주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7][33]
그는 해방 신학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 정의를 적극적으로 외쳤으며,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에 앞장섰다. 특히 브라질 군사 독재 정권(1964–1985)의 인권 탄압과 폭력에 맞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10] 이러한 활동은 보수적인 특권층과 군사 정권의 극심한 반발과 탄압을 불러왔으며, '사회주의자', '국가 전복자'라는 모함과 함께 살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10][11] 그럼에도 그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 곁을 떠나지 않고 그들의 편에 서서 활동을 이어갔다.
2. 3. 1. 파벨라에서의 사회복지
카마라 대주교는 빈민 지역인 파벨라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직접 공공주택 건설에 나섰으며, 텔레비전, 신문, 라디오 등 다양한 매체에 출연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그는 비공식적으로 "빈민가의 주교"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7]특히 1959년에는 히우 지 자네이루에 자선 단체인 Banco da Providência를 설립했다.[10] 이 단체는 빈곤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보다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했다.[10]
2. 3. 2. 불평등한 현실에 눈뜨다
세계성체대회(1955년)는 카마라 대주교가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회 이후 프랑스 로마 가톨릭교회의 게를리어 추기경은 카마라 대주교에게 "당신의 뛰어난 재능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쓸 생각을 왜 하지 않습니까? 빈부의 격차는 창조주에 대한 모욕입니다."라고 말하며 성직자로서의 양심을 일깨웠다.하지만 카마라 대주교는 사회복지사업만으로는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그는 사회선교 활동을 통해 브라질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 현실을 목격했다. 국민의 10%에 불과한 부유층이 독일 국토 면적의 32배에 달하는 넓은 토지를 소유한 반면, 대다수 민중은 소작인조차 되지 못하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미국 등 다국적 기업과 결탁한 군사 독재정권과 언론은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 문제에 무관심했다. 더욱이 교회마저 부유층 및 권력층과 결탁하여 사회 정의를 외면하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에 그는 깊은 문제의식을 느꼈다.[32]
이에 카마라 대주교는 가난이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며, 민중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과 인권을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참된 복음화라는 신학적 입장을 확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선교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기 시작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브라질 북동부의 올린다와 레시페 교구 대주교로 임명하며 그의 사회선교 활동을 지지했다.
2. 3. 3. 행동․정의․평화운동
카마라 대주교가 활동하던 시기 브라질 사회는 빈부 격차가 매우 극심했다. 인구의 10%도 안 되는 엘리트 특권층이 국민총생산량의 60%를 차지하며 부유하게 사는 반면, 전체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4천 5백만 명은 한 달에 8USD도 안 되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카마라 대주교는 민중을 계몽하여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즉 자존감을 갖도록 이끌었다. 그는 자존감을 가진 사람만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듯 이웃도 소중히 여길 수 있으며, 이는 자기만 사랑하는 이기주의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그는 한 청소부에게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일하느라 거칠고 더러워진 당신의 손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태도"라고 말하며 노동의 가치와 인간 존엄성을 일깨워주었다.[33]
동시에 카마라 대주교는 특권층과 정부를 향해 브라질 사회의 불평등을 비판하며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 내 진보적인 평신도들의 모임을 적극 지원했으며, 지역 공동체 활성화와 성인 교육 프로그램 실시에 힘썼다. 또한, 교회 내 진보적 성직자들을 규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그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에도 앞장섰다. 1952년 브라질 주교 회의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64년까지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1] 1959년에는 히우 지 자네이루에 빈곤과 사회적 불의에 맞서기 위한 자선 단체인 Banco da Providência를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의 대출을 지원했다.[10] 도시 빈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의 행보로 인해 비공식적으로 "빈민가의 주교"라고 불리기도 했다.[7] 그는 농민들이 복음을 공부하고 사회 변화를 모색하며 숙명론적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격려했다.
카마라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차례 회의에 모두 참석했으며, 특히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담은 ''가우디움 에스페스''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1965년 11월 16일, 공의회 폐막 직전에는 40명의 주교들과 함께 로마 외곽의 도미틸라 카타콤에서 만나 카타콤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을 통해 그들은 명예로운 칭호나 세속적인 과시 없이 복음적 가난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며, "주교들의 동료성은 인류의 3분의 2가 겪는 육체적, 문화적, 도덕적 고통을 함께 섬기는 데서 최고의 복음적 실현을 찾는다"고 선언했다.[8][9]
카마라 대주교의 지도 아래 브라질 가톨릭 교회는 브라질 군사 독재 (1964–1985) 정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다.[10] 그는 해방 신학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으로, 교회의 자선 활동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강조하며 사회 변화를 위한 강력한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토지 개혁 지지 등으로 인해 전통주의 가톨릭교도들과 군사 정부로부터 비난과 탄압을 받기도 했다.[11] 심지어 그의 동료였던 안토니우 엔리케 페레이라 네투 신부가 보수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12][13]
1971년, 베트남 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그는 ''폭력의 나선''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구조적 부당함(1단계 폭력)이 반란(2단계 폭력)을 야기하고, 이는 다시 억압적인 반작용(3단계 폭력)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지적하며, 젊은 세대가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10]
2. 3. 4. 권력자들과 특권층의 탄압
엘리트 특권층들과 권력자들은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카마라 대주교를 미워하여, ‘사회주의자’, ‘국가전복자’라고 모함하면서 탄압하였다. 그들은 온갖 방법으로 카마라 대주교의 빈민가 목회를 방해하였으며, 살해 위협까지 하였다. 카마라의 지도 아래 브라질 가톨릭 교회는 브라질 군사 독재 (1964–1985)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는 사회 변화를 위한 강력한 운동이기도 했다.[10] 이러한 활동 때문에 전통주의 가톨릭교도들은 군사 정부에 카마라의 토지 개혁 지지를 문제 삼아 그를 체포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11] 결국 카마라의 동료인 안토니우 엔리케 페레이라 네투 신부가 알려지지 않은 보수 세력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이 발생했다.[12][13]2. 3. 5.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카마라 대주교는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 안에 계신다는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는 목회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행동하는 성직자였으며, 이러한 신념과 활동으로 인해 비공식적으로 "빈민가의 주교"라고 불리기도 했다.[7]그는 소그룹으로 복음을 공부하고 사회 변화를 모색하도록 농민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기존의 운명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1959년에는 히우 지 자네이루에 Banco da Providência를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의 대출을 돕고 빈곤과 사회 부당함에 맞서 싸웠다.[10]
1965년에는 직접 방 세 개짜리 서민 아파트로 이사하였고, 주교관을 개방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신학교를 빈민가로 옮겨 신학생들이 사회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도록 이끌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차례 회의에 모두 참석했으며, 특히 공의회 문헌 중 하나인 ''가우디움 에스페스'' 초안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1965년 11월, 공의회가 끝나갈 무렵에는 로마 외곽의 도미틸라 카타콤에서 40명의 주교들과 함께 카타콤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주교들이 명예로운 칭호나 세속적인 과시 없이 복음적 빈곤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8][9]
카마라 대주교의 지도 아래 브라질 가톨릭 교회는 브라질 군사 독재(1964–1985)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회 변화를 위한 강력한 운동을 이끌었으며[10], 빈곤과 부당함으로 인한 반란을 억압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의 토지 개혁 지지 때문에 전통주의 가톨릭교도들은 군사 정부에 그의 체포를 요구하기도 했으며,[11] 그의 동료였던 안토니우 엔리케 페레이라 네투 신부는 알려지지 않은 보수 세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12][13]
해방신학의 주요 지지자였던 카마라 대주교는 1971년 Spiral of Violence|폭력의 나선eng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당시 베트남 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쓰였으며, 구조적 부당함(레벨 1 폭력)이 어떻게 민중의 반란(레벨 2 폭력)과 이를 억압하는 반작용(레벨 3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은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으며, 1973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5년,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해방신학에 대해 점차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면서[34], 카마라 대주교는 대주교직을 보수적인 후임자에게 넘겨주고 은퇴해야 했다. 그는 1999년 8월 27일, 헤시피에서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 견해
카마라는 버려진 배우자가 교회 내에서 재혼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정교회의 입장을 지지했다. 그는 또한 여성 서품을 인정했다.[14] 그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인공 피임을 제외한 것에 대해 "배우자를 고문하고, 많은 가정의 평화를 방해하는 실수", "갈릴레오에 대한 새로운 비난",[15] "공의회의 죽음" 그리고 "공동합의성의 실제적 부인"이라고 비판했다.[14] 그러나 전 교황청 국무원에 따르면, 카마라는 교황 회칙 ''Humanae Vitae''을 칭찬하는 전보를 바티칸에 보냈다고 한다.[16]
이탈리아 언론인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유명한 인터뷰에서 그는 비폭력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전술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어깨에 소총을 멘 많은 사제들을 존경한다. 나는 억압자에 맞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부도덕하거나 반기독교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이 내 선택도, 내 길도, 복음을 적용하는 방식도 아니다."[17]
카마라는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적 공감을 가졌다.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의 사회주의는 특별하다.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고 복음으로 돌아가는 사회주의다. 나의 사회주의는 정의다."라고 말했다. 그는 마르크스에 대해 그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그의 분석에는 동의한다고 말했다.[17]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동정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자들과의 대화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파티마의 성모의 발현을 믿었지만, 그것의 "러시아의 개종" 요구를 소련이 반종교 정책을 포기하겠지만 공산주의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파티마의 호소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소련과 중국의 멸망이 아니라, 그들의 개종을 위한 것이었다... 1967년 러시아 혁명은 그 기념일을 축하할 것이다... 우리는 속도를 높여야 한다. 낭비할 시간이 더는 없다."[14] 프랑스 도미니크 사제 루이 조제프 르브레에게 헌정된 시에서 카마라는 카를 마르크스가 천국에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르브레를 장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가 그대를 장식했는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카를 마르크스였네,/ 천국으로 데려가다/ 자본을 비판하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신앙에 대한 이해 부족은?/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이었네/ 그가 주변에서 발견했고 그에게 잘못된 비전을 주었네/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18][19]
4. 유산과 영예
- 1973년, 미국 친구 봉사단(AFSC)은 카마라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20] 하지만 당시 브라질의 군사 독재 정권이 그의 수상을 강력히 반대했고, 노르웨이 노벨 위원회의 보수적인 두 위원(슈르 린데브레케와 베른트 잉발센)이 오슬로 주재 브라질 대사와 협력하면서 그의 수상은 안타깝게 무산되었다.[21]
- 1975년에는 데븐포트 교구의 가톨릭 인종간 위원회가 수여하는 평화를 위하여 상을 받았다. 이 상은 모든 국가 간의 평화를 위해 선의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호소한 교황 요한 23세의 1963년 회칙 Pacem in terris|파켐 인 테리스lat("지상의 평화"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5. 하느님의 종
2015년 2월 15일, 올린다와 헤시피 대교구의 안토니우 페르난두 사부리두 대주교는 성좌에 카마라의 시성 절차 개시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고 발표했다.[22] 이 서한은 2015년 2월 16일에 접수되었고, 열흘도 채 안 되어 성인 시성성의 동의를 받아 카마라는 2015년 4월 7일에 하느님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23][24][25][26] 그해 5월 3일 올린다 대성당에서 시복 절차 개시가 이루어졌다.[27] 이는 시복 절차의 교구 단계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28]
6. 어록
“세계 인구의 20퍼센트가 80퍼센트의 것을 먹어치우고, 80퍼센트가 20퍼센트를 가지고 끼니를 때웁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군비경쟁에 소비하는 돈은 이 지구의 빈곤을 없애고도 남을만한 거액입니다.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미움, 폭력을 없애는데 힘을 모아주십시오. 세계 빈곤을 없애는데 참여하자고 간절히 청하고 싶습니다.” (1989년 10월 2일 서울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당시 천주교회 잡지 《생활성서》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聖人)이라 부르고, 내가 가난한 이들은 왜 먹을 것이 없는지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7. 저서
- 《까마라와 함께 읽는 복음》 / 황종렬 옮김 / 생활성서
- 《평화혁명》 / 김윤주 옮김 / 분도출판사
- 《나는 이 쓸모없는 열쇠들을 좋아한다》 / 최정오 옮김 / 청파사
- 이요리 나오코 역, 《창조와 환경 자매인 대지에 바치는 찬가》 ISBN 9784795230422
참조
[1]
서적
Helder, O Dom: uma vida que marcou os rumos da Igreja no Brasil
Editora Vozes
2000
[2]
웹사이트
Hélder Pessoa Câmara ! Brazilian Bishop & Human Rights Activist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4-04-13
[3]
웹사이트
Helder Câmara – Brazil's archbishop of the poor
https://www.theguard[...]
2003-08-08
[4]
웹사이트
Dom Helder Camara
null
null
[5]
서적
Acta Apostolicae Sedis
http://www.vatican.v[...]
1952
[6]
서적
Acta Apostolicae Sedis
http://www.vatican.v[...]
1964
[7]
간행물
'Bishop of the slums' — Dom Hélder Camara and Brazil's church of the poor
http://links.org.au/[...]
2009-07-14
[8]
간행물
The Pact of the Catacombs (Domitilla); A poor servant Church
http://www.sedosmiss[...]
SEDOS - Documentation and Research Centre
[9]
간행물
The urgent need to return to being the church of the poor
http://ncronline.org[...]
2010-03-24
[10]
웹사이트
Hélder Câmara
http://www.theguardi[...]
1999-08-31
[11]
서적
People of God: The Struggle for World Catholicism
https://archive.org/[...]
Viking
[12]
뉴스
Church Liberals in Argentina Target of Rightists
1969-07-12
[13]
뉴스
Priest and Civilian Murdered in Brazil
1969-05-29
[14]
웹사이트
Come i progressisti non vinsero al Concilio / Una recensione di Roma, Due del Mattino di Monsignor Hélder Câmara / di Massimo Introvigne
http://www.cesnur.or[...]
[15]
서적
Dom Helder Camara Circulares Conciliares
https://books.google[...]
Companhia Editora de Pernambuco
2015
[16]
웹사이트
Blessed Paul VI, the Pope who led the Church's barque in troubled waters
https://www.catholic[...]
[17]
웹사이트
Entrevistas históricas: Oriana Fallaci entrevista dom Helder Câmara
http://www.socialist[...]
[18]
웹사이트
Dom Hélder Câmara e o Marxismo: Um Diálogo Possível
https://www.klineedi[...]
[19]
문서
Dom Helder Câmara: entre o poder e a profecia
São Paulo, Ática
1997
[20]
웹사이트
Nobel Peace Prize nominations
https://www.afsc.org[...]
[21]
웹사이트
"På lag med diktaturet"
https://www.nrk.no/y[...]
2017-03-09
[22]
웹사이트
Brazil: Hélder Càmara, The Bishop of the poor
https://www.combonim[...]
2020-08-28
[23]
간행물
Call Him a Saint?
http://americamagazi[...]
2015-04-27
[24]
웹사이트
The initiation of Dom Helder Camara's path to sainthood now has a date
http://iglesiadescal[...]
2015-04-10
[25]
웹사이트
Dom Hélder Câmara recebe título de 'Servo de Deus' da Santa Sé
http://oglobo.globo.[...]
2015-04-08
[26]
웹사이트
Dom Helder Camara is declared “Servant of God” by the Holy See
http://noticias.canc[...]
null
[27]
웹사이트
Notice - Process of beatification and canonization of Dom Helder Camara
http://www.arquidioc[...]
null
[28]
웹사이트
http://site.adital.c[...]
null
[29]
웹사이트
AFSC's Past Nobel Nominations
http://www.afsc.org/[...]
null
[30]
문서
Dom은 이름이 아니라, 고위 성직자이나 귀족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31]
서적
카마라와 함께 하는 복음
생활성서
[32]
문서
[33]
서적
카마라와 함께 읽는 복음
[34]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