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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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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만조선은 기원전 2세기 초, 중국 전한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연나라 출신 위만이 패수를 건너 1,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하여 건국한 국가이다. 위만은 고조선 준왕을 몰아내고 왕검성을 도읍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했으며, 한나라의 외신을 자처하며 주변국을 압박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 무제의 침략을 받아 격렬한 저항 끝에 멸망하고,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위만조선은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무역을 통해 성장했으며,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관료 체제와 군사력을 갖추었다. 위만, 2대 왕, 우거왕으로 이어지는 3대 왕조를 거쳤으며, 멸망 이후 고조선은 한사군으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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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한자 표기정체자: 衛滿朝鮮
간체자: 卫满朝鲜
로마자 표기중국어 병음: Wèimǎn Cháoxiǎn
한국어 (한글): 위만조선
한국어 (한자): 衛滿朝鮮
문화어: 위만조선
로마자 표기: Wiman Joseon
역사
건국기원전 194년?
멸망기원전 108년
이전 국가기자조선
이후 국가한사군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통치자
직책조선왕 (다만 전한으로부터의 칭호)
초대 왕위만 (기원전 195년 ~ 기원전 2세기)
2대 왕(미상) (기원전 2세기)
마지막 왕위우거 (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08년)
수도
수도왕검성
언어 및 민족
공용어예맥어
민족예맥족

2. 역사

위만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과 함께 고조선의 하나로 취급된다.[3]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건국은 초한전쟁전한 초기 중국의 정치 정세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원전 202년, 전한고조 시대에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고, 노관이 연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한에서 건국 공신에 대한 숙청이 진행되면서 노관에게도 모반 혐의가 씌워졌고, 여후가 정권을 잡자 기원전 195년경 신변의 위험을 느낀 노관은 흉노로 망명했다.[5] 이때, 연에서 봉사했던 위만이 현지 풍습으로 옷차림을 바꾸고 패수(다케다 사치오는 압록강이라고 한다[6])를 건너, 1,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도망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8][6]

위만은 한나라로부터의 망명자와 현지인을 규합하여 왕검성(현재의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왕국을 세웠다.[17] 그는 한의 외신이 될 것을 요동 태수와 약속하고, 주변의 제국을 제압하여 세력을 확대해나갔다.[17]

문제 시대에는 한이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기원전 141년에 무제가 즉위하면서 한은 대외 강경책으로 전환했다.[11][12] 위만의 손자 위우거 시대에 한 무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위우거가 주변 국가의 입조를 방해하고 한의 입조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을 책망했다.[10] 그러나 한과 조선의 교섭은 실패했고, 한의 사자는 안내자였던 조선 비왕의 장을 살해하고 돌아왔다. 이후 이 사자가 요동 동부도위로 임명되자, 위우거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살해했다.[10][13]

기원전 109년, 무제는 순지, 양복 등에게 50,000명의 병력을 주어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했다(한의 위만조선 원정). 위우거는 한군을 격퇴하고 발해를 건너 왕검성을 공격한 한군 7,000명도 격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13] 그러나 조선 신하들이 한에 항복하는 일이 잇따랐고, 이듬해 위우거는 대신 참의 가신에게 살해되었다.[13] 대신 성기는 왕검성을 지키며 저항했지만, 한은 위장항과 를 파견하여 성기를 살해하고 항복시켰다.[13]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옛 땅에는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한사군이 설치되어 한의 영토가 되었다. 『사기』 조선전은 "마침내 조선을 정하고 사군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15][13]

2. 1. 건국

중국에서 진나라가 멸망하고, 기원전 206년에 고조전한을 건국한 뒤 주변의 여러 나라에 공신(功臣)들을 봉하여 제후로 삼았다. 이때 노관왕으로 옛 연나라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전한에서 주변의 제후들을 시기하여 제거하기 시작하자, 연왕 노관은 화를 피하려고 흉노로 도망하였고,[21] 연은 한나라 군대에 점령당하여 일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위지》에 따르면, 이 틈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연의 영내에서 유민 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 조선에 들어와 (準)에게 고공지(故空地)의 수비를 하겠다고 하였다.[22] 준왕은 그를 믿고 박사(博士: 지방 장관직)를 삼아 서쪽 변경 백 리의 땅을 봉하여 주었다. 그러나 위만은 유망인(流亡人)들을 통솔하고 그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을 키운 다음,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며 군사를 몰아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이때를 《사기》에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 기원전 194년~ 기원전 180년)라고 하였다. 도읍은 이전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왕검성에 정했다.

이때 준왕은 남쪽의 진국 방면으로 망명하여 한왕(韓王)이 되었다고 한다. 위만은 《사기》 이하 《한서》 등에 모두 연인(燕人)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관하여 최남선은 이를 국치(國恥)로 여기고, 위만조선을 한사군과 더불어 ‘지나인의 북새질’이라 규정하고, 위만의 왕위 찬탈을 ‘위만의 도둑질’이라고까지 하였다.

사마천에 따르면, 위만은 중국 진나라 멸망 이후 중국 동북부의 연나라 출신 장군으로, 준왕에게 항복했다. 준왕은 이를 받아들여 위만을 고조선의 서부 변경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오늘날 랴오닝성 서부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준왕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위만은 반란을 일으켜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기원전 194년, 그는 위만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왕검성으로 정했다.

2. 2. 위만 시기

위만고조선의 지배자가 된 후, 나라 안팎으로 정비에 힘써 왕위 세습권을 확립하고 토착민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위만 집권 초기 한나라는 건국 초기라 국가 체제가 불안정했고, 흉노의 침입에 대비하기 바빠 조선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변동은 요동군에 불안감을 주었고, 요동 태수는 위만에게 한의 외신(外臣)이 될 것 등을 요구하며 맹약을 맺었다.

이 맹약을 통해 위만은 한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지원받아 세력을 키웠다. 특히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 임둔 등을 복속시켜 영토를 수천 리까지 확장했고, 주변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다.

진무 등이 남월과 조선이 중국을 엿보고 있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위만은 주변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고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당시 위만의 태도가 심상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만의 강성은 자체 실력뿐만 아니라, 당시 북아시아에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던 흉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만의 아들 이름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손자는 우거왕이었다고 전해진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위만은 중국 진나라 멸망 이후 연나라 출신 장군으로, 준왕에게 항복했다. 준왕은 위만을 고조선 서부 변경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이곳은 오늘날 랴오닝성 서부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준왕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위만은 반란을 일으켜 고조선을 멸망시켰다.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왕검성으로 정했다.

이 시기 위만조선은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한나라만주 민족 간의 무역을 통제하여 경제적으로 강성해졌다. 한 무제는 위만조선이 한나라를 위협하고 흉노와 동맹을 맺을 것을 우려했다.[3]

2. 3. 우거왕 시기

한나라 무제(기원전 140~87) 시기, 우거왕은 위만조선을 다스렸다. 당시 중국은 사방으로 영토를 확장했는데, 무제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대월지에 파견하여 동맹을 맺으려 했다. 《한서》에 따르면,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한나라에 투항하여 창해군이 설치되었으나, 《후한서》에는 수년 후 창해군이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려가 우거왕의 지배하에 있다가 한나라에 투항했음을 보여준다.

한 무제는 창해군을 설치하고 팽오에게 통로 개척을 명했으나, 막대한 비용과 노동력 때문에 기원전 126년에 창해군은 폐지되었다. 우거왕은 위만 때와 달리 한나라 망명인들을 포섭하고 세력을 키워 한나라에 맞섰으며, 진국이 한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았다. 이는 한나라의 동방 침략 구실이 되었고, 흉노와 위만조선의 동맹 가능성은 한나라에 큰 부담이었다.

이에 한 무제는 기원전 109년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우거왕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나라는 섭하를 요동군 동부도위로 임명했고, 위만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살해했다. 이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략하는 구실이 되었다.

한 무제는 죄인들을 모아 위만조선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기원전 109년 가을, 양복이 이끄는 수로군과 순체가 이끄는 육로군이 위만조선을 침략했다. 양군은 모두 패배하고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23] 위만조선 정복이 어려워지자 한 무제는 위산을 보내 평화 교섭을 시도했다. 우거왕은 태자를 보내 화의에 응하는 척했으나, 태자가 패수를 건널 때 위산과 순체가 무장 해제를 요구하자 왕검성으로 돌아가 화의는 결렬되었다. 순체와 양복은 왕검성을 포위했지만, 의견 차이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 무제는 제남태수 공손수를 파견하여 상황을 타개하려 했다. 공손수는 순체의 말을 듣고 양복을 가두고 수로군을 순체 휘하에 병합했으나, 무제는 공손수를 처형했다.

순체의 총공격 중에 위만조정은 화친파와 주전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한음, 왕겹, 노인 등은 한나라에 투항했고, 노인은 도중에 사망했다. 기원전 108년, 이계상 삼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우거왕이 죽은 후에도 성기가 저항했으나, 장항가 백성을 회유하여 성기를 죽였다. 이로써 3대 80여 년간 이어진 위만조선은 멸망하고, 한나라는 한사군을 설치했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은 한나라 망명객들이 위만조선에 살도록 허락했지만, 한나라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자 진나라가 한나라와 소통하는 것을 막았다.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침략했으나 여러 차례 실패했다. 한 무제는 위만조선의 왕자들을 설득해 우거왕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는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전쟁 후, 한 무제는 위만조선을 격파하지 못한 두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년간의 전투 끝에 왕검성이 함락되고 위만조선은 멸망했다. 한나라는 한사군을 설치했으나,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위만조선의 건설은 초한전쟁전한 초기의 중국 정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전한 고조 시대인 기원전 202년,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켜 처형되고 노관이 연왕이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에서 공신 숙청이 진행되면서 노관은 흉노로 망명했다.[5] 이때 연나라에서 봉사했던 위만이 현지 풍습으로 옷차림을 바꾸고 패수(다케다 사치오는 압록강이라 하고[6], 중국 연구자들은 청천강이라 한다[7])를 건너 1,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도망쳐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8][6] 진・의 혼란기에 조선으로 도망친 중국인은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19]

어떤 전설에 따르면, 조선으로 건너간 위만이 조선 왕 준왕을 섬겨 박사가 되었고 서부 국경 수비를 맡았다. 위만은 연・제・로부터 망명자를 유인하여 세력을 키우고, 전한의 공격으로부터 준왕을 지킨다고 속여 왕도로 쳐들어가 준왕을 습격했다. 준왕은 한의 땅으로 도망쳐 한씨를 칭하고 한왕을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9][19] 이 전설은 『사기』에는 없고 3세기경 성립된 『위략』에 보이는데, 후대 낙랑군 시대에 활약하는 한씨가 조상을 조선 왕에 연결시키려고 만들어낸 이야기라고도 한다.[9]

위만은 한나라 망명자와 현지인을 규합하여 왕검성을 도읍으로 하는 왕국을 세웠다.[17] 그 영역은 확실하지 않지만, 다나카 토시아키는 "조선반도 서북부를 지배했지만, 그 이상 넓게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다.[17]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이 되기로 요동 태수와 약속하고 주변 제국을 제압하여 세력을 확대했다.[17][19] 외신이 된 위씨는 형식상 한나라 황제의 신하였고, 한나라에 입조를 원하는 나라를 방해해서는 안 되었다.[10] 그러나 위만이 지위를 확립하자마자 주변국을 압박한 것은 한나라에서 문제가 되었고, 조선 정벌이 논의되었다.[10]

문제 시대에는 한나라가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지만, 기원전 141년 무제가 즉위하면서 한나라는 대외 강경책으로 전환했다.[11][12] 위만의 손자 위우거 시대에 한 무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위우거가 주변 국가의 입조를 방해하고 한나라의 입조 요구에 응하지 않는 것을 책망했다.[10] 그러나 한나라와 위만조선의 교섭은 실패했고, 한나라 사자는 안내 역할을 맡았던 조선 비왕의 장을 살해하고 돌아왔다. 그 후 이 사자가 요동 동부도위로 임명되자, 위우거는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10][13]

무제는 기원전 109년 순지, 양복 등에게 50,000명의 병력을 주어 위만조선을 공격하게 했다. 위우거는 한군을 격퇴하고 발해를 건너 왕검성을 공격한 한군 7,000명도 격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13] 그러나 위만조선 신하들이 한나라에 항복하는 일이 잇따랐고, 이듬해 위우거는 대신 참의 가신에게 살해되었다.[13] 대신 성기는 왕검성을 지키며 저항했지만, 한나라는 위장항과 를 파견하여 성기를 살해하고 항복시켰다.[13] 다케다 사치오는 전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을 "흉노의 왼쪽 을 끊었다"고 평가한다.[6]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위만조선이 한나라보다 흉노의 지배 하에 있었고, 그 증거로 흉노의 "좌현왕", "우현왕" 용어가 5세기 백제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14]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옛 땅에는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사기』 조선전에는 "마침내 조선을 정하고 사군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15][13]

3. 국가 체제

"위만조선"이라는 이름은 후세에 기자조선이나 이씨 조선과 구별하기 위한 편의상의 명칭이다. 『사기』는 단순히 "조선"이라고 부르지만, 이 이름 역시 당시 이미 국명이 불분명해졌기에 사마천이 지명을 빌려 표현한 것일 뿐, 그들이 자칭한 국명은 아니다.

3. 1. 국가 성격

최근에는 위만조선을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보고 있는데, 이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24] 이는 족장 사회에 대한 논의와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국가에 대한 정의로 마셜 살린스는 무력의 합법적인 사용과 중앙집권화된 조직의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는 최근까지도 가장 공약수가 많은 견해이다. 켄트 플래너리는 위의 특징 외에 법률, 도시, 직업의 분화, 징병 제도, 세금 징수, 왕권, 사회 신분의 계층화 등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제 특징들이 위만 조선 관계 기사에도 나타나고 있다. 사기의 조선열전에는 직업적인 계급을 가진 중앙 관료 정부와 막강한 군사력, 계층화된 신분 조직, 행정 중심지로서의 왕검성, 왕권의 세습화 등의 요소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위만조선은 초기에 주위의 유이민 집단을 정복해 나가다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완벽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위만조선은 정복 국가로 보는 견해와 무역에 기초를 두고 성장한 국가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최근에는 후자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변한, 진한, 마한, 왜, 예 등 철을 중심으로 하는 교역이 남부 지방에 행해지고 있을 때 위만조선은 한반도 북쪽의 지리적인 요충지에 자리잡아 그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중심지 무역을 전개하면서 막대한 흑자를 보았다. 이를 토대로 국가를 성립시킴과 동시에 세력을 확장,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당시의 무역로는 명도전의 출토지로 보아 난평-요양-무순-위원, 강계-평양이 될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산둥반도를 통하는 바닷길이 있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3. 2. 통치 체제

위만조선은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의 정의로 마셜 살린스는 무력의 합법적인 사용과 중앙집권화된 조직을, 켄트 플래너리는 법률, 도시, 직업 분화, 징병 제도, 세금 징수, 왕권, 사회 신분 계층화 등을 제시했는데, 이러한 특징들이 위만조선 관련 기록에 나타난다.[24] 사기 조선열전에는 직업적인 계급을 가진 중앙 관료 정부, 막강한 군사력, 계층화된 신분 조직, 행정 중심지로서의 왕검성, 왕권 세습 등의 요소가 나타나며, 위만조선은 초기에 주위 유이민 집단을 정복하며 점차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24]

위만조선의 통치 체제는 전한의 제도를 바탕으로 정비되었으며, 조선왕 아래에 "폐왕(稗王)", 태자가 있었고, 대부, 대신, , 장군이 합의하여 국가를 운영했으며, 박사 등도 임명되었다.[19] "상" 중에는 "조선상"과 "니계상(尼谿相)"이 있었으므로 다른 "상"도 "○○상"의 약칭으로 추정된다. 합의에 참여한 4인, 즉 조선상 노인(路人), 조선상 한음(韓陰), 니계상 참, 장군 왕협(王唊)의 신분을 보면, 노인과 한음은 "조선상", 왕협은 정치군사를 분담한 장군이었다.[20] 한음과 왕협은 왕·한씨 성으로 보아 중국 출신 망명자이거나 관련 인물이며, 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20] 참은 유일하게 성씨가 없고 "조선상"이 아닌, 현지 근거지인 니계의 "상"이었으며, 위만조선은 이들을 포함하여 느슨하게 연계된 연합 국가였다.[20]

4. 역대 군주

# 위만왕 (기원전 194년 ~ ?)

# 불명 (? ~ ?)

# 우거왕 (? ~ 기원전 108년, 위만의 손자)

위만조선은 3대에 걸쳐 이어졌다고 전해지지만 2대 왕의 이름은 불분명하다. 건국자 위만의 실제 출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연나라의 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으며, 연 태자 단의 일원이거나 요동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동에서 패한 연 태자 단의 군대주민을 거느리고 재지적 호족으로 발전했다는 설도 있지만[16], 위만과 위우거의 성인 '위(衛)'는 『사기』나 『한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단지 '만(滿)', '우거(右渠)'로만 기록되어 있다. '위(衛)'라는 성이 문헌 사료에 기록된 것은 후한 시대의 『잠부론』부터이다[17]。이로 인해 만(滿)은 원래 성이 없었으며, 따라서 한인(漢人)·연인(燕人)이 아니라 연(燕)에 종사했던 조선인이라는 견해도 있다[17]。조선사를 개관할 때에는 연인(燕人) 위만이라는 표현으로 언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18]

참조

[1] 백과사전 창해군 http://terms.naver.c[...]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 백과사전 王険城 Kotobank
[3] 서적 조선사연구입문 조선사연구회편 2011
[4] 서적 조선사연구입문 조선사연구회편 2011
[5] 서적 田中 2000
[6] 서적 1997
[7] 서적 2009
[8] 서적 田中 2000
[9] 서적 田中 2000
[10] 서적 田中 2000
[11] 서적 田中 2000
[12] 서적 1997
[13] 서적 史記
[14] 뉴스 朝鮮半島における言語接触 : 中国圧への対処としての対抗中国化 東京外国語大学語学研究所 2013
[15] 서적 1997
[16] 서적 2009
[17] 서적 田中 2000
[18] 서적 1997
[19] 서적 1997
[20] 서적 1997
[21] 서적 연왕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22] 서적 위만(魏滿)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를 틀고, 적이(狄夷)의 의복을 입고 동쪽으로 요새를 빠져 달아나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의 아래위 보루에서 살면서 ...
[23] 서적 천자는 죄인을 뽑아 조선을 쳤다. 그 해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하여, 옛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보하이 해〔渤海〕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우거(右渠)를 토벌하고자 요동(遼東)에서 나왔다. 우거는 군사를 풀어 험한 곳에서 막았다. 좌장군의 졸정(卒正) 다(多)가 요동(遼東)의 병사를 이끌고 먼저 방종(放縱)하다가, 패하여 흩어지고, 다(多)는 달려서 되돌아오니, 법에 따라 참수되었다. 누선장군은 옛 제나라 땅 출신의 병사 칠천명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險)에 도달하였다. 우거는 성(城)을 지키다가 누선장군의 군사가 적은 것을 알고 꾀를 내어 누선장군을 물리치니 누선장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山) 속에서 십여일을 숨었다가, 점차, 흩어진 병졸을 구하고 거두니, 다시 갖추어졌다. 좌장군은 조선 패수의 서쪽 군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깨뜨리지 못했다.
[24] 웹인용 위만조선(衛滿朝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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