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계 정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초계 정씨는 경상남도 합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상서와 중추원사를 지낸 정배걸이다. 초계 정씨는 내급사공파, 천호장공파, 대제학공파, 박사공파, 대사성공파 등 여러 분파로 나뉘며, 조선 시대에는 정문, 정온, 정엽 등 문과 급제자와 정준, 정유섭 등 무관을 배출했다. 현대에는 정치, 법조, 연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있다. 1985년 83,311명에서 2015년 104,155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초계 정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성씨 | 초계 정씨 |
한자 표기 | 草溪鄭氏 |
나라 | 한국 |
관향 |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
시조 | 정배걸(鄭倍傑) |
아시조 | 정문(鄭文) |
집성촌 | 경상남도 합천군 경상남도 거제시 경상남도 창녕군 경상북도 포항시 경상북도 경산시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경기도 이천시 경기도 화성시 경기도 용인시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 황해도 벽성군 장곡면 평안남도 룡강군 담부리 |
주요 인물 | 정문 정복경 정선 정윤의 귀인 정씨 정요 정윤겸 정난정 정종영 정엽 정온 정현석 정균식 정우식 정명조 정호영 정동남 정현백 정범구 정유섭 정용신 정상헌 |
년도 | 2024 |
인구 | 93586명 |
순위 | 8 |
2. 역사
초계 정씨(草溪 鄭氏)의 시조 '''정배걸'''(鄭倍傑)은 초계(草溪) 성산(城山: 현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출신이다.[1] 1017년(현종 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035년(정종 1) 좌습유 지제고(左拾遺知制誥)를 역임하였다.[1] 1047년(문종 1)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 20명을 선발하였으며, 1051년(문종 5)에 예부상서(禮部尙書)·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1]
정배걸은 고려 최초의 사학으로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인 홍문공도(弘文公徒: 일명 웅천도熊川徒)를 개설하였다.[1] 1080년(문종 34)에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광유후(光儒侯)에 추증되었고,[1] 시호는 홍문(弘文)이다.[1]
2. 1. 시조 및 기원
초계 정씨(草溪 鄭氏)의 시조 '''정배걸'''(鄭倍傑)은 초계(草溪) 성산(城山: 현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출신이다.[1] 1017년(현종 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035년(정종 1) 좌습유 지제고(左拾遺知制誥)를 역임하였다.[1] 1047년(문종 1)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 20명을 선발하였으며, 1051년(문종 5)에 예부상서(禮部尙書)·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렀다.[1]정배걸은 고려 최초의 사학으로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인 홍문공도(弘文公徒: 일명 웅천도熊川徒)를 개설하였다.[1] 1080년(문종 34)에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광유후(光儒侯)에 추증되었고,[1] 시호는 홍문(弘文)이다.[1]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가 32년(유리이사금 9) 정씨(鄭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와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여 엇갈리게 기술되어 있다.
2. 2. 본관
초계(草溪)는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초팔혜현(草八兮縣)으로 부르다 경덕왕 때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합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초계(草溪)로 명칭을 고쳤고 현종 때에 합천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2년에 비로서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 때 밀직사 정수기(鄭守琪)와 초계사람 변우성(卞遇成)이 왕실에 공을 세워 초계군으로 승격하였고 조선시대에 그대로 유지되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에 합천군에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별호(別號)는 청계(淸溪)이다.3. 분파
초계 정씨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여러 분파로 나뉘었다. 정배걸의 3세손을 기준으로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정복공(鄭復公)의 장자 정영(鄭榮)의 후손으로,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지냈다. 종파(宗派)인 남양파, 신계파, 마산파, 충주(어사공)파, 개성파, 담양파, 삭령파, 안성신곡파, 수안곡산파, 광주한강파, 해남파가 있고 충주파는 집의공파, 죽산파, 지장파, 거제파, 청풍파가 있다. 집의공파는 다시 추동파, 오효파, 병산파로 나뉘어져 있고, 오효파는 덕교파, 송당파, 감곡파, 망덕(망덕,도장,오촌)파, 대야곡파로 나뉘어져 있다.
-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정복공의 차자 정행부(鄭幸夫)의 후손이다. 호희공파, 전서공파, 문간공파로 구성되어 있다. 호희공파는 이천종파, 춘천우두, 수원, 이천, 춘천도정, 김포, 시흥, 백일동, 부사원, 파주, 용인, 천안, 인천, 양주, 청주, 음성, 충주로 분파되었고, 문간공파는 순창, 곡성, 광주, 정읍, 곡성으로 분파되었다. 전서공파는 청주, 보은, 예산, 남양천등, 해주, 포천, 양양, 남양중송, 남양지화, 진천, 제천, 여주, 안성, 순창, 철원, 연천, 부사원, 담양, 화순, 옥과, 신천으로 분파되었다.
-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정복경(鄭復卿)의 독자 정윤기(鄭允耆)의 후손이다. 경산파, 초계진주파, 관동파로 구성되어있다.경산파는 경산종파, 협석, 천동, 옥곡, 인각, 동계로 분파되었고 초계진주파는 송담공파(내천), 별제공파, 주부공파(삼천포, 산청), 매헌공파(거제, 진주),군사공파, 부사공파로 분파되었다. 관동파는 종파, 도사공파, 교관공파, 시정공파, 만종공파, 산일공파, 선무랑공파(죽동,경방,가곡,향동), 경주공파(익산), 별좌공파, 백운공파, 예천공파, 송담공파, 삼구당공파, 이우당공파, 남애공파, 좌랑공파, 낭천공파, 승의랑공파, 주부공파, 진사공파, 부사공파, 병사공파로 분파되었다.
- 박사공파(博士公派): 정복유(鄭復儒)의 후손 중 국자박사를 지낸 7세손 정승(鄭丞)의 후손이다. 진정종파, 장양공파, 상시공파, 용인파로 구성되어 있다.진정종파는 진정, 대구, 연동, 포두, 산청천지, 포두상촌, 야로, 함안칠원, 산청상법, 쌍백신기, 향묵, 궁평, 초곡, 안의교북으로 분파되었고 장양공파는 양림, 신반, 경산, 문산, 함안, 갑산, 산청, 대정, 신반, 영산, 여배, 학동, 야로창동, 오소로 분파되었다. 상시공파는 장사랑공파, 문간공파, 교위공파, 판관공파, 교리공파, 진사공파, 강헌공파(용인)으로 분파되었다.
-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정복유의 후손 중 6세손 정태화(鄭太華)의 후손이다. 서정공파와 효정공파로 구성되어 있다. 서정공파는 종파, 부사공파, 이암재파, 백헌공파, 서암재파, 서하당공파로 분파되었고 효정공파는 종파(양산,서산), 부사공파, 선전공파, 수재공파로 분파되었다.
4. 주요 인물
wikitext
정문(鄭文)은 정배걸의 아들로 10년간 형부(刑部)를 맡아보면서 죄를 함부로 다스리지 않았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을 지냈고, 예종 즉위 후 검교사공(檢校司空)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궁중에서 근무하던 중 급환으로 왕이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으며, 병이 깊어지자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를 내렸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정문의 아들 정복공(鄭復恭)은 문과에 급제하고 태중대부,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또 다른 아들 정복경(鄭復卿)은 문과에 급제하고 합문지후, 호부원외랑, 예부원외랑을 거쳐 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을 지냈다.
정신(鄭愼)은 고려 때 합문지후를 지냈으며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정수기(鄭守基)는 친종장군, 만호 등 무관직을 역임했다. 1280년(충렬왕 6)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군천호(管軍千戶)가 되어 금패(金牌)와 인(印)을 하사받았다.
정배걸의 7세손 정윤의(鄭允宜)는 1268년(원종 9) 과거에 차석으로 합격하고, 1300년(충렬왕 26)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었으며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슬하에 3녀를 두었으며, 세 명의 사위들은 모두 공경에 이르렀는데, 맏사위는 성주인(星州人) 이조년(李兆年)이다. 정선(鄭敾)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3군의 수령을 지냈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공민왕 때 우산기상시를 지냈고 재초도감(齋醮都監)을 관장하였으며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치사하였다.
정국경(鄭國卿)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청성군에 봉군되었다. 정광조(鄭光祖)는 고려 때 보승별장을 지냈다. 정광계(鄭光啓)는 1316년(충숙왕 3) 문과에 급제하고 보승낭장, 판도판서를 지냈다.
정연(鄭淵)은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의 정치감이 되어 개혁에 힘썼으며, 공민왕 때 교주강릉도도지휘사, 판개성부사를 거쳐 밀직제학을 지내고 팔천군에 봉해졌다. 1356년(공민왕 5) 수사공, 우복야에 제수되었으나 채하중의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목사로 좌천된 후 경북 경산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지였던 경산에 은거하였으나 예학과 음률에 밝아 많은 후진들이 찾아와서 배웠다.
정수(鄭需)는 고려 때 사재부령을 지냈다. 정옥량(鄭玉良)은 유일로 봉직랑, 하양현감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효자로 정문이 세워졌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정편(鄭便)은 고려 때 통례문 봉례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왕실의 사위로서 개경에서 원주 가야곡으로 은거하였으며, 왕씨부인은 망명 도중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정습인(鄭習仁)은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학관, 지영주사, 우산기상시, 지제교를 지냈다. 곧은 절개로 유명하였다. 정요(鄭堯)는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화령부사로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조선 시대에 자헌대부, 상의문하부사, 의흥삼군부 동지절제사를 거쳐 숭정대부 판한성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호희(胡僖)이다. 정전(鄭 জনকে)은 1382년(우왕 8)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지냈다. 왕조가 바뀌자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4. 1. 고려
정문(鄭文)은 정배걸의 아들로 10년간 형부(刑部)를 맡아보면서 죄를 함부로 다스리지 않았다. 숙종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형부상서, 정당문학, 태자빈객을 지냈고, 예종 즉위 후 검교사공(檢校司空)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궁중에서 근무하던 중 급환으로 왕이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으며, 병이 깊어지자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를 내렸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정문의 아들 정복공(鄭復恭)은 문과에 급제하고 태중대부, 형부원외랑을 지냈다. 또 다른 아들 정복경(鄭復卿)은 문과에 급제하고 합문지후, 호부원외랑, 예부원외랑을 거쳐 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을 지냈다.
정신(鄭愼)은 고려 때 합문지후를 지냈으며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정수기(鄭守基)는 친종장군, 만호 등 무관직을 역임했다. 1280년(충렬왕 6)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군천호(管軍千戶)가 되어 금패(金牌)와 인(印)을 하사받았다.
정배걸의 7세손 정윤의(鄭允宜)는 1268년(원종 9) 과거에 차석으로 합격하고, 1300년(충렬왕 26)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서북면도순문사가 되었으며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슬하에 3녀를 두었으며, 세 명의 사위들은 모두 공경에 이르렀는데, 맏사위는 성주인(星州人) 이조년(李兆年)이다. 정선(鄭敾)은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3군의 수령을 지냈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공민왕 때 우산기상시를 지냈고 재초도감(齋醮都監)을 관장하였으며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치사하였다.
정국경(鄭國卿)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부상서를 지냈으며 청성군에 봉군되었다. 정광조(鄭光祖)는 고려 때 보승별장을 지냈다. 정광계(鄭光啓)는 1316년(충숙왕 3) 문과에 급제하고 보승낭장, 판도판서를 지냈다.
정연(鄭淵)은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의 정치감이 되어 개혁에 힘썼으며, 공민왕 때 교주강릉도도지휘사, 판개성부사를 거쳐 밀직제학을 지내고 팔천군에 봉해졌다. 1356년(공민왕 5) 수사공, 우복야에 제수되었으나 채하중의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목사로 좌천된 후 경북 경산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지였던 경산에 은거하였으나 예학과 음률에 밝아 많은 후진들이 찾아와서 배웠다.
정수(鄭需)는 고려 때 사재부령을 지냈다. 정옥량(鄭玉良)은 유일로 봉직랑, 하양현감을 지냈으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효자로 정문이 세워졌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정편(鄭便)은 고려 때 통례문 봉례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왕실의 사위로서 개경에서 원주 가야곡으로 은거하였으며, 왕씨부인은 망명 도중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정습인(鄭習仁)은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학관, 지영주사, 우산기상시, 지제교를 지냈다. 곧은 절개로 유명하였다. 정요(鄭堯)는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화령부사로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다. 조선 시대에 자헌대부, 상의문하부사, 의흥삼군부 동지절제사를 거쳐 숭정대부 판한성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호희(胡僖)이다. 정전(鄭 জনকে)은 1382년(우왕 8)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지냈다. 왕조가 바뀌자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4. 2. 조선
정문(鄭文)은 정배걸의 아들로 10년간 형부(刑部)를 맡아보았으나 죄를 함부로 다스리지 않았다. 숙종 때 비서감(祕書監)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형부상서(刑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냈고, 예종 즉위 후 검교사공(檢校司空)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궁중에서 근무하던 중 급환이 발생해 왕이 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였으며, 병이 깊어지자 특진 좌복야 참지정사(特進 左僕射 參知政事)를 내렸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정문(鄭文)의 아들 정복공(鄭復恭)은 문과에 급제하고 태중대부(太中大夫),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냈다. 정문(鄭文)의 아들 정복경(鄭復卿)은 문과에 급제하고 합문지후(閤門祗候),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을 거쳐 시군기소감(試軍器少監)을 지냈다.
정신(鄭愼)은 고려 때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지냈으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었다. 정수기(鄭守基)는 친종장군(親從將軍), 만호(萬戶) 등 무관직을 역임하였다. 1280년(충렬왕 6)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군천호(管軍千戶)가 되어 금패(金牌)와 인(印)을 하사받았다.
정배걸의 7세손 정윤의(鄭允宜)는 원종 9년(1268년) 과거에 차석으로 합격하고 충렬왕 26년(1300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가 되었으며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슬하에 3녀를 두었으며 세 명의 사위들이 모두 공경에 이르렀는데, 성주인(星州人) 이조년(李兆年)은 공의 맏사위이다. 정선(鄭僐)은 정배걸의 7세손으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3군의 수령을 지냈는데 치적이 모두 우수하였다. 공민왕 때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고 재초도감(齋醮都監)을 관장하였으며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치사하였다.
정국경(鄭國卿)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청성군(淸城君)에 봉군되었다. 정광조(鄭光祖)는 고려 때 보승별장(保勝別將)을 지냈다. 정광계(鄭光啓)는 충숙왕 3년(1316년) 문과에 급제하고 보승낭장(保勝郞將),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정연(鄭淵)은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감(整治監)이 되어 개혁에 힘썼으며, 공민왕 때 교주강릉도도지휘사(交州江陵道都指揮使),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내고 팔천군(八川君)에 봉해졌다. 공민왕 5년(1356년) 수사공(守司空), 우복야(右僕射)에 제수되었으나 채하중(蔡河中)의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좌천된 후 경북 경산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지였던 경산에 은거하였으나 예학(禮學)과 음률(音律)에 밝아 많은 후진들이 찾아와서 배웠다.
정수(鄭須)는 고려 때 사재부령(司宰副令)을 지냈다. 정옥량(鄭玉良)은 유일(遺逸)로 봉직랑(奉直郞), 하양현감(河陽縣監)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로서 이름이 높았다. 효자로서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정편(鄭便)은 고려 때 통례문 봉례(通禮門 奉禮)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왕실의 사위로서 개경에서 원주 가야곡으로 은거하였으며 왕씨부인은 망명 도중 강물에 투신 자살하였다.
정습인(鄭習仁)은 공민왕 4년(1355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학관(成均學官), 지영주사(知榮州事),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지제교(知製敎)를 지냈다. 곧은 절개로 유명하였다. 정요(鄭堯)는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화령부사(和寧府使)로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으며, 조선시대 자헌대부(資憲大夫),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의흥삼군부 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 同知節制使)를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호희(胡僖)이다.
정전(鄭 জনকে)은 1382년(우왕 8)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 예조참의(禮曹參議) 등을 지냈다. 왕조가 바뀌자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정온(鄭昷)은 세조조에 무과에 급제하고 아산현감(牙山縣監),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삼도해운판관(三道海運判官) 등을 지냈다.
정잠(鄭潛)은 형조좌랑(刑曹佐郞), 지평(持平), 의정부 경력(議政府 經歷)을 지내고 직제학(直提學),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정편(鄭偏)은 중종 14년(1519년) 문과에 급제하고 호조(戶曹)·형조(刑曹) 좌랑(佐郞)을 지내고 개성(開城)·청송(淸松)·서흥(瑞興)·김제(金堤)의 4군(郡)의 수령(守令)을 지내고 사간원 사성(司諫院 司成)으로 치사하였다.
정준(鄭俊)은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진절제사(穩城鎭節制使)로서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구성군 준(浚)의 비장(裨將)으로 출전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다. 지조가 굳고 확실하였으며 호송군(護送軍)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가는 도중 가산군(嘉山郡)에 이르러 병사했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량(莊襄)이다. 정종아(鄭宗雅)는 무과에 급제하고 부산포첨절제사(釜山浦僉節制使), 통정대부(通政大夫),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냈다.
정회아(鄭回雅)는 통훈대부(通訓大夫), 광주판관(光州判官)을 지냈으며 세조 때 원종훈(原從勳)에 녹훈되고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를 지냈다. 정이아(鄭以雅)는 단종 1년(1453년) 문과에 급제하고 정자(正字), 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오다 순직하였다. 정발(鄭發)은 경주부윤(慶州府尹),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으며 문종 즉위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세조 즉위 후 숭정대부(崇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정옥형(鄭玉亨)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통정대부(通政大夫),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냈다. 정창(鄭昌)은 세종 20년(1438년) 문과에 급제하고 문학(文學), 집현전 교리(集賢殿 校理)를 지냈으며 성삼문, 박팽년 등과 더불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단종조에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노모 봉양을 핑계로 진천군수(鎭川郡守)를 자원하였으며 세조 즉위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은거하였다. 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김시습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생육신과 병칭하였다.
정윤겸(鄭允謙)은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를 거쳐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재직 시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책록되었다. 4도(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내고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및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윤성(鄭允誠)은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정구룡(鄭九龍)은 훈련원 주부(訓鍊院 主簿)를 지내다 임진왜란을 만나 정기룡 장군 막하에서 선봉장(先鋒將)으로 활약하다 적탄을 맞아 장렬히 순절하였다. 정준(鄭浚)은 154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우부승지(右副承旨), 부제학(副提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정전(鄭詮)은 무과에 급제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 담양부사(潭陽府使) 등 여섯 고을의 수령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에 이르렀다. 정종영(鄭宗榮)은 중종 25년(1530년) 문과에 급제 후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1552년(명종 7)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4도(道)의 관찰사(觀察使)와 육조(六曹)의 판서(判書)를 두루 역임하였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부임 시 평양에 서원(書院)과 서적포(書籍鋪)를 설립하여 학문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부임 시 윤원형에게 아부하여 부정행위를 하는 수령과 요승(妖僧)을 제거하였다. 우찬성(右贊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내고 조선시대 재신(宰臣)으로는 최초로 치사(致仕)하였다.
정중원(鄭重遠)은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아산현감(牙山縣監), 청양현감(靑陽縣監)을 지냈으며 치적이 우수하였다. 정진철(鄭振哲)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과(副司果), 수군만호(水軍萬戶), 사용(司勇), 사맹(司猛) 등을 지냈으며 명천부사(明川府使),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정약(鄭若)은 직장(直長), 주부(主簿), 감찰(監察), 도사(都事), 판관(判官)을 역임하고 고성(高城), 곡산(谷山), 이천(伊川), 영월(寧越) 등 각 읍(邑)의 수령을 지낸 후 통정대부(通政大夫)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정혹(鄭㫊)은 팔계군 정종영(鄭宗榮)의 4남으로 이조정랑(吏曹正郞), 의정부 사인(議政府 舍人),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우승지(右承旨),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정세소(鄭世সৌ)는 중종 17년(1516년)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을 지낸 후 5도(道)의 관찰사(觀察使)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정문익(鄭文翼)은 1611년(광해군 3)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거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다.
정덕기(鄭德驥)는 1576년 선조 9년 과거에 급제하고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정기광(鄭期光)은 광해군 1년(160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나주목사(羅州牧使), 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양전어사(量田御史)로서 청홍도(淸洪道)에 출안(出按)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병조참의(兵曹參議)로서 남한산성 수비의 총 책임자로 활약하였으며 승정원(承政院)의 좌부승지(左副承旨), 우승지(右承旨) 등을 지냈다. 정 진(鄭 振)은 1624년 인조 2년 과거에 급제하고 공조(工曹)와 예조(禮曹)의 좌랑(佐郞)을 지냈다.
정기풍(鄭基豊)은 인조 26년(1648년) 문과에 급제하고 문학(文學), 지평(持平), 장령(掌令), 필선(弼善), 집의(執義) 등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고 신계현감(新溪縣監), 양양부사(襄陽府使),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고 치적이 우수하여 곳곳에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정기숭(鄭基崇)은 영의정 이덕형의 사위로 전설사 별검(典設司 別檢)을 시작으로 태인(泰仁), 양구(楊口), 여천(麗川)의 수령을 지내고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를 지냈다. 정의국(鄭義國)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고 마을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내려졌다.
정유정(鄭惟精)은 선조 3년(1570년) 문과에 급제하고 헌납(獻納), 사간(司諫),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냈다. 정예남(鄭禮男)은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이후 상의원 주부(尙衣院 主簿), 내의원 어의(內醫院 御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정인(鄭<亻寅>)은 선조 24년(1591년)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兵曹)·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정랑(兵曹正郞), 강릉부사(江陵府使)를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정석량(鄭碩良)은 중부참봉(中部參奉), 의령직장(宜寧直長), 찰방(察訪) 등을 지냈다. 정엽(鄭曄)은 조선 인조대의 명신으로 이이, 성혼, 송익필의 문인이다. 1583년(선조 16) 문과에 급제하고 인조반정 후 대사성(大司成), 동지경연(同知經筵), 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하여 학제(學制)를 상정하여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켰다. 대사헌(大司憲)을 다섯 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 가지 직임을 겸임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와 《수몽집》(睡夢集)이 있으며,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정창시(鄭昌時)는 수운판관(水運判官), 고령현감(高靈縣監) 등을 역임하였고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조정랑(工曹正郞), 예빈주 주부(禮賓注 主簿)를 지냈다. 정수명(鄭壽明)은 청안(淸安), 노성(魯城), 과천(果川), 마전(麻田) 현감(縣監)을 두루 역임하고 영월부사(寧越府使), 장악원 첨정(掌樂院 僉正)을 지냈다. 정원석(鄭元錫)은 1627년 인조 5년 과거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성균관 사예(成均館 司藝), 사재감 첨정(司宰監 僉正)을 지냈다.
정수석(鄭壽錫)은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 옥과현감(玉果縣監), 호조좌랑(戶曹佐郞), 호조정랑(戶曹正郞), 김제군수(金堤郡守), 연안부사(延安府使), 사직령(社稷令) 등을 역임하였다. 정계주(鄭啓周)는 영조 16년(174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현감(縣監), 봉상시 첨정(奉常寺 僉正) 등을 지냈다. 정륜(鄭綸)은 인조 22년(1644년) 문과에 급제하고 의주부윤(義州府尹),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내고 황해도(黃海道) 및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공조(工曹)·호조(戶曹)·예조참의(禮曹參議)를 두루 거치고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정시심(鄭時諶)은 1646년 인조 24년 과거에 급제하고 승문원 주서(承文院 主書), 보안도 찰방(保安道 察訪)을 지냈다. 정명겸(鄭命謙)은 1648년 인조 26년 과거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유(成均館 學諭), 종묘서 부봉사(宗廟署 副奉事), 직장(直長)을 지냈다. 정온(鄭蘊)은 광해군 2년(1610년)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집권 시 영창대군이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에 의해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후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이때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를 지었다. 병자호란 시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서 화의(和議)가 이루어짐을 보고 할복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후 모든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에 은거하다가 5년 만에 죽었다.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정문익(鄭文翼)은 광해군 3년(161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 및 지평(持平), 헌납(獻納), 교리(校理),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광해 혼조(昏朝) 시 간신배의 농권(弄權)으로 충원현감(忠原縣監)을 자원하였으며 이듬해 사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숙천부사(肅川府使)로 특명을 받았으며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워 통정대부(通政大夫), 자산군수(慈山郡守),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역임하였다. 정묘호란 후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온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정국빈(鄭國賓)은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첨정(訓鍊院 僉正),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오효자(五孝子)로 널리 알려진 다섯 형제분들 중 막내로 충효(忠孝)로 이름이 높았다.
정동륭(鄭東隆)은 1690년 숙종 16년 과거에 급제하고 결성현감(結城縣監)을 지냈다. 정한주(鄭漢周)는 1691년 숙종 17년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정우주(鄭羽周)는 숙종 17년(1691년) 문과에 급제하고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후 양양(襄陽), 강릉(江陵), 진주(晋州) 등 10군(郡)의 수령을 역임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정내주(鄭來周)는 1705년 숙종 31년 과거에 급제하고 동래부사(東萊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정운주(鄭雲周)는 숙종 33년(1707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장령(掌令),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였다. 정동(鄭棟)은 정조 7년(1783년)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등을 지냈으나 권간(權奸)들의 농권(弄權)으로 향리(鄕里)로 은거하였다. 정시망(鄭時望)은 광해조(光海朝) 때 국정쇄신(國政刷新)을 상소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으로 유적(儒籍)을 삭탈(削奪)당하기도 하였으나, 인조반정 후 인조 8년(1630년)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호조좌랑(戶曹佐郞), 호조정랑(戶曹正郞),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장령(掌令)을 지내고 안악군수(安岳郡守), 수안군수(遂安郡守), 사예(司藝) 등을 지냈다.
정희보(鄭希普)는 영조 1년(1725년)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고 지평(持平), 정언(正言), 병조정랑(兵曹正郞), 집의(執義), 보덕(輔德),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병조참의(兵曹參議), 부승지(副承旨)를 지냈으나 왕실의 외손인 원경하(元景夏)의 무고(誣告)로 극지(極地)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 정희규(鄭希逵)는 경종 원년(1721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장령(掌令),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정덕겸(鄭德謙)은 무과에 급제하고 5읍(邑) 3곤(閫)의 수령을 지냈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에 이르렀다.
정계장(鄭啓長)은 숙종 22년(1696년) 문과에 급제하고 장령(掌令) 등 내직(內職)을 거쳐 임천군수(林川郡守), 제주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정추(鄭推)는 숙종 6년(16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내직(內職)을 두루 역임하고 금산(金山), 진주(晋州), 청주(淸州), 홍주(洪州)의 수령을 지내고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노모(老母)의 봉양(奉養)을 위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지방관 재임 시마다 청백리(淸白吏)로서 백성을 사랑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정담(鄭湛)은 무과에 급제하고 3읍(邑)의 수령을 거쳐 흥해군수(興海郡守)를 지냈다. 각 고을마다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으며 사친지효(事親至孝)하고 우애지극(友愛至極)하였다. 정창주(鄭昌周)는 인조 15년(1637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지제교(知製敎), 헌납(獻納) 등을 지내고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낸 뒤 청나라에 다녀와서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외직(外職)으로는 2읍(邑)의 현감(縣監)과 5부(府)의 부사(府使)와 목사(牧使)를 지내고 전라도(全羅道)·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정이상(鄭履祥)은 무과에 급제하고 옥천군수(沃川郡守), 용천부사(龍川府使)를 지내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을 지냈다. 정홍좌(鄭弘佐)는 무과에 급제하고 영서찰방(嶺西察訪), 형조(刑曹)·공조(工曹)의 정랑(正郞)을 지
4. 3. 현대
초계 정씨는 조선시대와 현대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배출했다.조선시대에는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인물들이 많았다. 정종영(鄭宗榮)은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평안도관찰사로 재임하며 서원과 서적포를 설립하여 학문 진흥에 기여했다. 정엽(鄭曄)은 이이, 성혼, 송익필의 문인으로, 대사성과 동지경연 등을 역임하며 성균관을 크게 일으켰다. 정온(鄭蘊)은 영창대군 피살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리고, 병자호란 때 화의에 반대하여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현석(鄭顯奭)은 덕원부사 재임 시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원산학사를 설립했다.
근현대에는 정종철(鄭宗喆)이 부산부윤과 서울부시장을 역임했고, 정균식(鄭均植)은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다. 정상철(鄭相喆)은 민선 양양군수를 역임했다. 정호영(鄭鎬瑛)은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내고 이명박 특검을 맡았다. 정우식(鄭雨湜)은 제주도지사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범구(丁範九)는 국회의원과 주 독일대사를 지냈다. 정유섭(鄭有燮)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정현백(丁賢百)은 여성가족부 장관을 지냈다. 정용후(鄭鎔厚)는 공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정호섭(丁鎬燮)은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정명조(鄭明祚)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지냈다. 정우성(鄭雨盛)은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5. 집성촌
경상남도 합천군 쌍백면 육리, 평구리, 쌍책면 진정리,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거제시 장목면 대금리, 거제면 오수리에 초계 정씨 집성촌이 있다. 경상북도 포항시 청하면 미남리, 경산시 남천면 협석동에도 집성촌이 있으며,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죽리, 횡성군 공근면 학담리, 공근리에도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 와룡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 이천군 장호원읍 풍계리, 용인시 처인구 화산리, 고양시 일산읍 마두리 등에도 초계 정씨 집성촌이 분포한다.
6.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7. 인구
1985년에는 20,215가구 83,311명이었으며, 2000년에는 29,264가구 93,586명이었다. 2015년에는 104,155명으로 조사되었다.
8. 항렬자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
인(寅) | 헌(憲) | 용(用) | 구(九) | 우(雨) | 하(河) | 성(晟) | 기(起) | 한(漢) | 재(宰) | 윤(潤) | 규(揆)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