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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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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상건은 1875년 출생하여 1926년 사망한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고종의 최측근으로 황제권 강화와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러일전쟁 발발 직전 대한제국의 중립을 선언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나, 고종 사후 임시정부와 갈등을 겪었다. 그는 고종의 밀사로 유럽에 파견되어 중립 외교를 펼쳤으며, 상하이에서 대동보국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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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현상건
원래 이름玄尙健
출생일1875년
출생지한성부
사망일1926년
사망지중국 상하이
직책독립운동가, 대한제국 관료, 통역관, 외교관, 정치인, 사업가
군주고종 이형
서훈건국훈장 애국장
배우자임천(林川) 조씨(趙氏) 숙경(淑卿)
경력
주요 경력한성임시정부 평정관(評定官)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러시아 및 프랑스 특사
대한제국 농공상부 광학국장(礦學局長) 겸 광무학교장(礦務學校長)
예식원(禮式院) 외무과장(外務課長) 및 번역과장(繙譯課長)
궁내부 번역과장(宮內府繙譯課長)
궁내부 박문원(博文院) 부장(副長)
인천 통운사(通運社)의 사장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부사장
한성전기철도회사 부사장
육군 보병 참령(陸軍步兵參領)

2. 가계 및 출생

현상건은 1875년 2월 15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숭일동(崇一洞)[1]에서 부친 현명운(玄明運)과 어머니 풍기 진씨(豊基 秦氏)[2]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3] 그의 가계는 연주(延州) 현씨[4] 찬성공파(贊成公派)에 속한다. 효령대군의 부마이자 조선 중종 때 도승지 및 형조판서를 지낸 현석규(玄錫圭)의 16대손이며, 그의 직계 조상들은 9대조부터 역과에 급제하여 여러 대에 걸쳐 당상관(정3품 이상)을 지냈다.

현상건 직계 조상의 관직
관계이름주요 관직/품계
9대조현철상(玄哲詳)정3품 통정대부
8대조현한일(玄漢一)정2품 자헌대부
7대조현덕창(玄德昌)정3품 절충장군
6대조현태형(玄泰衡)정3품 통정대부
5대조현상윤(玄商尹)정3품 통정대부
고조부현시석(玄時錫)정3품 통정대부
증조부현한민(玄漢敏)정2품 정헌대부
조부현학주(玄學周)정2품 자헌대부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 이후 역관직을 사실상 세습하며[5] 전주 이씨(全州 李氏), 남양 홍씨(南陽 洪氏)와 더불어 많은 역관을 배출한 집안 중 하나였다.[6]

부친 현명운(玄明運, 1845~1902)은 1861년(철종 12년) 식년시 역과 한학(漢學) 전공에 장원으로 급제한 한학 역관이었다. 이후 무안현감(務安縣監), 동래 감리(監理)를 거쳐 현재의 부산광역시장 격인 정3품 동래부윤(東萊府尹)을 역임했다. 그는 동래부윤 재직 중 순직하였으며, 사후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추증되었다.[7] 현명운은 동래부윤 시절 경부철도 건설을 위한 민관 합작 건설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8]

현상건은 소설가 빙허 현진건(玄鎭健)과 독립운동가 현정건(玄鼎健) 형제의 삼종형이다. 또한, 초기에는 근왕파였으나 한일합방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대한제국군 군령부 총장을 지낸 현영운(玄暎運)은 그의 재종백숙부이며, 최남선(崔南善)의 부인은 그의 재종이다.[9]

3. 성장기

현상건은 부친과는 달리 역관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1888년, 14세의 나이로 전보총국 주사(電報總局主事)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6품으로 승진했다. 1898년에는 외부번역관(外部繙譯官)으로 임명되었다.

현상건의 처조카이자 역사학자 겸 영문학자 그리고 구인회(九人會) 멤버였던 고려대학교 조용만(趙容萬)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10], 현상건은 1895년 외국어학교 관제가 발표된 후 설립된 관립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11]에서 에밀 마르텔(Emile Martel)[12]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13] 그가 가문의 전통적인 학문인 한학이나 왜학 대신 프랑스어를 선택한 정확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배경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당시 동래 왜관을 관리하며 서양 문물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부친의 영향과, 조선의 친 프랑스적 분위기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조선에서는 1885년 청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한 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와 가까워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프랑스 역시 1890년대 중후반 삼국간섭 이후 프랑스 자본의 대한제국 경제 진출을 도모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프랑스어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이는 1898년(광무 2)부터 1903년(광무 7)까지 한성 법어학교 입학생 수가 영어학교보다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14]

조선의 개항 이후에는 현상건 가문이 사실상 세습적으로 누리던 역관직보다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번역관으로 진출하는 것이 더 유망한 길이 되었다. 특히 프랑스어는 외교 언어로서 중요성이 컸지만, 능숙한 프랑스어 번역관은 매우 드물었기에 현상건의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은 그의 빠른 출세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또한 그는 프랑스어 외에도 러시아어와 영어까지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4. 대한제국 관료 활동

현상건은 부친 현명운과는 달리 역관의 길을 걷지 않고, 1888년 14세의 나이에 전보총국 주사(電報總局主事)로 임명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6품으로 승진하였고, 1898년에는 외부(外部) 번역관(繙譯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895년 외국어학교 관제 발표 이후 설립된 관립 한성법어학교(漢城法語學校)[11]에서 프랑스인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에밀 마르텔프랑스어)[12]에게 프랑스어를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당시 조선에서는 청불전쟁 이후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프랑스 역시 삼국간섭 이후 대한제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프랑스어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으며, 이는 당시 한성법어학교의 인기가 영어학교를 능가했던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4] 현상건이 전통적인 한학이나 왜학 대신 프랑스어를 선택한 것은 개항 이후 변화하는 시대상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특히 외교 언어로서 프랑스어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능숙한 프랑스어 구사 능력은 그의 빠른 출세에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그는 프랑스어 외에도 러시아어와 영어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5]

뛰어난 외국어 능력과 개방적인 가문 배경 덕분에 현상건은 고종의 깊은 신임을 얻어 최측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궁내부 고문관 윌리엄 F. 샌즈(William F. Sands)의 통역관을 시작으로 궁내부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고종의 외교 활동과 국정 운영을 보좌했다. 이를 바탕으로 고종이 추진하던 황제권 강화와 대한제국의 근대화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며, 당시 또 다른 실세였던 이용익(李容翊)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25]

4. 1. 고종의 최측근

현상건은 1899년 궁내부 고문관이었던 미국인 윌리엄 F. 샌즈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고종과 외국 고문 사이의 주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샌즈는 훗날 자신의 저서 조선비망록에서 현상건을 "스마트한 용모에 맵시있는 옷차림을 하고,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젊은 귀족"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는 내가 말하는 바를 진정으로 이해했으며, 외국의 어떤 것도 낯설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큰 야망은 결국 그가 몰락한 이유였다"고 평가했다.[16]

같은 해 그는 여러 중책을 맡으며 빠르게 승진했다. 1899년 3월 궁내부 물품사장(宮內府物品司長)에 임명되었고, 6월에는 법규교정소 위원으로 임명되어[17]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제정에 참여했으며, 르 장드르(C.W. Le Gendre), 브라운(J. McLeavy Brown) 등 외국인 법률 자문관들의 통역을 담당했다.[18] 이후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현상건의 주요 관직 임명 기록 (1899년 ~ 1902년)
날짜직책
1899년 7월 17일궁내부 번역과장(宮內府繙譯課長)
1899년 9월 17일정3품 승진
1899년 11월 5일시종원 분시종(侍從院分侍從)
1900년 10월 29일예식원 외무과장(禮式院外務課長) (궁내부 번역과 폐지 후)
1900년 11월 18일육군 참위(陸軍參尉) 임관
1902년 6월 13일예식원 외무과장(外務課長) 및 번역과장(繙譯課長) 겸임
1902년 6월 20일칭경시 예식사무위원(稱慶時禮式事務委員)
1902년 6월 30일임시위생원 위원(臨時衛生院委員)



현상건이 이처럼 젊은 나이에 고속 승진하며 고종의 최측근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뛰어난 외국어 능력, 기존 수구 세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가문 배경, 그리고 부친 현흥택의 영향 등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황제권 강화와 대한제국의 근대화 작업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으며, 당시 또 다른 실세였던 이용익(李容翊)을 보좌하며 대한제국의 근대화와 외교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궁내부 시종무관으로서 현상건은 고종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고종의 외국인 접견 시 통역과 외교 문서 번역 등을 담당했다. 특히 고종이 열강을 상대로 비밀 외교를 추진할 때 그의 유창한 언어 능력은 그를 비밀 특사로 활동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4. 2. 대한제국 근대화에의 기여

고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현상건은 고종이 추진하던 근대화 작업의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법어학교에서 배운 서양 문물 지식을 바탕으로, 고종이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에 따라 설립한 광무학교(礦務學校), 광학국(礦學局), 박문원(博文院) 등 여러 기관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19]

1900년 10월 8일 초대 광무학교장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고종의 명으로 당시 한성 부윤이었던 이채연(李采淵)과 함께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설립하고 부사장을 맡아 한국 최초의 근대 전력 사업을 시작했다.[20][21] 동시에 최초의 전차를 운영하던 한성전기철도회사의 초대 부사장도 겸임했다. 1901년에는 최초의 근대 해운회사인 인천 통운사(通運社) 사장을 맡아 일본 증기선 住の江丸|스미노에마루일본어를 구매하여 주장호(注江號)로 이름을 바꾸고, 인천-강화 월곶-황해도 해주 용당포-송도 당호 간을 격일로 운항하였다. 당시 황성신문은 통운사가 향후 경영 성과에 따라 기선을 추가로 구입하여 운행 항로를 확장할 계획이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22]

1902년 8월 7일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직접 광산을 경영하기 위해 설립한 농상공부 산하 광학국(礦學局)의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특히 금광 운영을 관할하며 황실 재원 확충에 힘썼다. 같은 해 12월 26일에는 광학국장으로서 박문원(博文院) 부장(副長)을 겸임하며 황실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23] 그는 법제 관련 도서 발간에도 관심을 보여, 1901년 광문사(廣文社)에서 최초로 인쇄하여 간행한 정약용(丁若鏞)의 흠흠신서(欽欽新書) 발문을 쓰기도 했다.[24]

또한 현상건은 군사 제도의 근대화에도 기여했다. 1902년 육군 보병 부위(陸軍步兵副尉)에 임명되어 같은 해 9월 15일 원수부 기록국(記錄局) 국원을 맡아 군사에 관한 조칙과 주요 문서, 서적 및 기록 관리를 담당했다. 1903년 5월 10일 육군 보병 정위(陸軍步兵正尉)로, 이후 육군 보병 참령(陸軍步兵參領)으로 승진했다.

그는 고종의 뜻에 따라 궁내부 위상을 강화하는 데 이용익을 보좌하며 근왕 세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25]

4. 3. 군사 제도 근대화 기여

현상건은 군사 제도의 근대화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1902년 육군 보병 부위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9월 15일에는 원수부에 소속된 기록국의 국원을 맡아 군사에 관한 조칙과 주요 문서, 서적 및 기록을 관리하였다. 이후 1903년 5월 10일 육군 보병 정위로, 그 뒤에는 육군 보병 참령으로 승진하였다.

5. 대한제국 중립 선언의 주역

러시아일본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 현상건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추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중립화 방안을 구체화하고, 이를 위해 주한 프랑스 공사와의 협력을 모색하는 등 초기 단계부터 깊숙이 관여했다.[26]

러일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자, 현상건은 고종의 밀사로서 유럽으로 파견되어 프랑스, 네덜란드, 러시아 등을 순방하며 대한제국의 중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짜르 니콜라이 2세를 직접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극동 총독으로부터 유사시 군사 지원 약속을 받아내는 등[27] 중립 외교의 실질적인 성과를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일본 측의 극심한 경계를 받았다.[28]

귀국 후 현상건은 이용익, 이학균 등 다른 '중립파' 인사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전시국외중립 선언의 준비와 발표를 주도했다.[30] 그는 외국인 인맥을 활용하여 선언문을 비밀리에 준비하고, 프랑스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중국 옌타이에서 중립을 선언하는 등[31][32]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립 선언을 관철시키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과 일본의 압력으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 노력은 결국 좌절되었다.[33] 중립 선언을 주도했던 현상건은 일본의 탄압 대상이 되어 수배령이 내려졌고, 결국 고종의 지시 하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처럼 현상건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걸린 중립화 시도 과정에서 시작부터 좌절의 순간까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5. 1. 유럽 파견과 중립 외교 노력

러시아일본의 대립이 심화될 무렵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현상건은 고종의 뜻에 따라 대한제국의 중립화 방안을 마련하여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에게 제시했고, 긍정적인 협력 의사를 확인했다. 고종은 이를 계기로 프랑스가 대한제국을 보호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현상건, 이용익 등에게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를 지시했다.

러일전쟁 발발이 임박하자,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현상건을 유럽에 밀사로 파견했다. 1903년 8월 프랑스에 도착한 그는 당시 주 프랑스 공사였던 민영찬과 함께 프랑스 외무대신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를 만나 외무대신의 친서를 확보했다. 이 친서를 가지고 10월 하순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로 향하여 만국평화회의와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에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안하려 했으나, 평화회의가 열리지 않고 재판소도 휴정 중이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6]

현상건은 네덜란드를 떠나 1903년 11월 14일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중립 문제를 상의했다. 이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직접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에게도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러시아 방문 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뤼순으로 이동하여 러시아 극동지역 총독 알렉세예프(Evgenil Ivanovich Alekseev)와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유사시 러시아 병사 2,000명을 서울로 파견하여 일본으로부터 궁성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27] 그는 1904년 1월 뤼순에서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Varyag) 호를 타고 귀국했다. 현상건의 이러한 행보는 일본 밀정을 통해 실시간으로 일본 외무성에 보고되었으며, 공개된 당시 기밀 자료를 통해 일본이 그의 활동에 극도로 긴장했음을 알 수 있다.[28]

귀국 직후인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전시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러시아와 일본 간 전쟁이 발발할 경우 대한제국이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이었다. 열강들의 공동 보증을 통한 중립국화를 추진해 온 기존의 노력과는 달리, 이는 러일 양국 간 전쟁 발발 시에 한정된 잠정적 중립 선언으로, 한반도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 성격이 강했다.[29]

일본 공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 중립 선언은 이용익을 중심으로 현상건 외에도 강석호(姜錫鎬), 이학균, 이인영(李寅榮) 등이 주도했다. '중립파'로 불린 이들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추구하며, 일본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동맹은 일본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현상건의 처조카인 역사학자 조용만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 밀정의 감시를 피해 서울 종로3가 부근에 위치한 현상건의 처가이자 조용만 교수의 본가인 판교초당(板橋草堂)에 모여 비밀 회동을 가졌으며, 이용익에게는 회의 결과를 보고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했다.[30]

이 과정에서 현상건은 이용익과 함께 중립화 논의를 이끌고 선언 준비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비밀리에 벨기에 고문, 프랑스어 및 독일어 학교의 외국인 교사들과의 인맥을 활용하여 전시국외중립선언문을 준비했으며, 주한 프랑스 공사관에 근무하던 퐁트네(Vicomte de Fontenay)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국내에서의 발표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904년 1월 21일, 프랑스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중국 산둥반도의 항구도시 옌타이(煙台)에 위치한 즈푸(芝罘)에서 전격적으로 전시국외중립선언을 발표했다.[31][32]

그러나 중립선언에 대한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덴마크, 청나라 공사들은 중립선언문을 접수했다는 회신만 보냈을 뿐, 어떠한 공식적인 지지도 표명하지 않았다. 특히 대한제국 중립 보증의 핵심 당사국인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으로부터는 아무런 회답이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건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공수동맹(攻守同盟) 체결을 제안했을 때 끝까지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동맹을 강제하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은 결국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되었다.[33] 일본은 의정서 체결에 반대했던 고종 측근의 근왕 세력들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이용익은 일본으로 납치되었고, 현상건은 군기밀 누설 혐의로 일본의 수배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현상건은 앙투아네트 손탁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그녀가 운영하던 정동의 손탁호텔에 임시로 은신했다. 이후 고종의 명을 받아 같은 중립파였던 육군 참장 이학균과 함께 미국 군함 신시내티(Cincinnati)호에 비밀리에 승선하여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고종의 지령을 수행하며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5. 2. 전시국외중립 선언과 좌절

러시아일본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 현상건은 고종의 뜻을 받아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추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대한제국의 중립화 방안을 마련하여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Plancy)에게 제시했고, 플랑시로부터 우호적인 협력 의사를 얻어냈다. 이에 고종은 프랑스가 대한제국을 보호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현상건과 이용익 등에게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를 지시했다.

러일전쟁 발발이 임박하자,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현상건을 유럽에 밀사로 파견했다. 1903년 8월 프랑스에 도착한 현상건은 당시 주 프랑스 공사였던 민영찬과 함께 프랑스 외무대신 Théophile Delcassé|델카세fra를 만나 외무대신의 친서를 확보했다. 그는 이 친서를 가지고 10월 하순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로 향했다. 본래 계획은 만국평화회의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를 방문하여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안하는 것이었으나, 평화회의가 열리지 않았고 재판소도 휴정 중이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6]

네덜란드에서 성과 없이 떠난 현상건은 같은 해 11월 14일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중립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를 직접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전(前)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Karl Ivanovich Weber|베베르rus에게도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러시아 방문 후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뤼순으로 이동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 Evgenil Ivanovich Alekseev|알렉세예프rus와 만나, 유사시 러시아 병사 2,000명을 서울로 파견하여 일본으로부터 궁성을 보호해 주겠다는 확약을 받았다.[27] 그는 1904년 1월, 뤼순에서 러시아 군함 Varyag|바리야크rus 호를 타고 귀국했다. 현상건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 밀정을 통해 실시간으로 일본 외무성에 보고되었으며, 현재 공개된 당시 일본 외무성 기밀 자료를 통해 일본이 그의 행보에 극도로 긴장했음을 알 수 있다.[28]

귀국 직후인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전시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러일전쟁 발발 시 대한제국이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으로, 열강의 공동 보증을 통한 중립국화와는 달리 러일 양국 간 전쟁에 한정된 잠정적 중립 조치였다. 이는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 성격이 강했다.[29]

일본 공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 중립 선언은 이용익을 중심으로 현상건, 강석호(姜錫鎬), 이학균, 이인영(李寅榮) 등이 주도했다. '중립파'로 불린 이들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추구하며,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활용하고자 했다. 동시에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동맹은 일본을 자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현상건의 처조카인 역사학자 조용만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 밀정의 감시를 피해 서울 널다리골 판교초당(板橋草堂, 현 종로3가 부근)에 위치한 현상건의 처가이자 조용만 교수의 본가에서 비밀리에 회동했으며, 감시 때문에 직접 참석하기 어려웠던 이용익에게 결과를 보고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었다고 한다.[30]

현상건은 이용익과 함께 중립화 논의를 이끌며 선언 준비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비밀리에 벨기에 고문, 프랑스어 및 독일어 학교의 외국인 교사들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전시국외중립선언문을 준비했고, 주한 프랑스 공사관의 Vicomte de Fontenay|퐁트네fra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국내에서의 발표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프랑스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1904년 1월 21일, 중국 산둥반도의 항구도시 옌타이(煙台)에 위치한 즈푸(芝罘)에서 중립을 전격적으로 선언했다.[31][32]

그러나 중립 선언에 대한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덴마크, 청나라 공사들은 선언문을 받았다는 회신만 보냈을 뿐,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특히 대한제국 중립 보장의 핵심 당사국인 일본, 러시아, 그리고 미국으로부터는 어떠한 회답이나 승인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현상건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공수동맹(攻守同盟) 체결을 제안했을 때 끝까지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은 결국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33] 일본은 의정서 체결에 반대했던 고종 측근의 근왕 세력들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이용익은 일본으로 납치되었고, 현상건은 군기밀 누설 혐의로 일본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현상건은 앙투아네트 손탁과의 친분을 이용해 그녀가 운영하던 정동의 손탁호텔에 잠시 몸을 숨겼다. 이후 고종의 명을 받아 같은 중립파였던 육군 참장 이학균과 함께 미국 군함 신시내티(Cincinnati)호에 비밀리에 승선하여 중국 상하이로 탈출했고, 그곳에서 고종의 지령을 수행하며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6. 상하이 망명과 독립운동

상하이로 망명한 현상건은 고종의 밀명을 받아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과 독립운동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그는 러시아 등 열강과의 외교 활동을 통해 국제적 지원을 모색하고,[35][37] 고종의 해외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등[40]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일제의 침략 실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자 노력했으며,[41] 대동보국회를 조직하여 상하이 교민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42]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을 지원하는 데 힘썼다.[43]

6. 1. 고종 밀사 활동과 해외 비자금 관리

러시아일본의 대립이 심화되던 시기,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현상건은 이 뜻을 받들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대한제국의 중립화 방안을 마련하여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에게 제시했고, 플랑시로부터 우호적인 협력 의사를 얻어냈다. 이에 고종은 프랑스가 대한제국을 보호해 줄 것이라 기대하며 현상건과 이용익 등에게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를 지시했다.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현상건을 유럽에 밀사로 파견했다. 1903년 8월 프랑스에 도착한 현상건은 당시 주 프랑스 공사였던 민영찬과 함께 프랑스 외무대신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를 만나 그의 친서를 받았다. 이 친서를 가지고 10월 하순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로 향했다. 본래 계획은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안하기 위해 만국평화회의와 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를 방문하는 것이었으나, 평화회의가 열리지 않았고 재판소도 휴정 중이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6]

네덜란드에서 성과 없이 떠난 현상건은 같은 해 11월 14일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중립 문제를 논의했다. 이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직접 만나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훈장을 받았다. 또한 전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에게도 고종의 밀서를 전달했다. 러시아 방문 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여 뤼순으로 이동, 러시아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Evgenil Ivanovich Alekseev)와 만나 유사시 러시아 병사 2,000명을 서울로 파견하여 일본으로부터 궁성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27] 그는 1904년 1월 뤼순에서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Varyag) 호를 타고 귀국했다. 현상건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 밀정을 통해 실시간으로 일본 외무성에 보고되었으며, 공개된 당시 기밀 자료를 통해 일본이 그의 행보에 극도로 긴장했음을 알 수 있다.[28]

귀국 직후인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전시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이는 러일 간 전쟁 발발 시 대한제국이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선언으로, 열강의 공동 보증을 통한 중립국화와는 달리 한반도가 직접적인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임시방편적 성격이 강했다.[29]

일본 공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 중립 선언은 이용익을 중심으로 현상건, 강석호(姜錫鎬), 이학균, 이인영(李寅榮) 등이 주도했다. '중립파'로 불린 이들은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추구하며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 했으나,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동맹은 일본을 자극할 위험이 있어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현상건의 처조카인 역사학자 조용만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 밀정의 눈을 피해 서울 널다리골 판교초당(板橋草堂, 현 종로3가 부근)에 있는 현상건의 처가에 모여 비밀 회의를 했고, 그 결과를 이용익에게 보고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었다고 한다.[30]

현상건은 이용익과 함께 중립화 논의를 이끌며 선언 준비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비밀리에 벨기에 고문, 프랑스어 및 독일어 학교의 외국인 교사들과의 인맥을 활용해 선언문을 준비했고, 주한 프랑스 공사관의 퐁트네(Vicomte de Fontenay)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국내 발표가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프랑스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1904년 1월 21일, 중국 산둥반도의 항구도시 옌타이(煙台)의 즈푸(芝罘)에서 전시국외중립선언을 발표했다.[31][32]

그러나 중립 선언에 대한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덴마크, 청나라 공사들은 선언문을 받았다는 회신만 보냈을 뿐 공식적인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특히 중립 보증의 핵심인 일본, 러시아, 미국으로부터는 어떠한 회답이나 승인도 없었다. 그럼에도 현상건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에 공수동맹(攻守同盟) 체결을 제안했을 때 끝까지 반대했다.

결국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의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은 좌절되었다.[33] 일본은 의정서 체결에 반대했던 고종 측근 세력들을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이용익은 일본으로 납치되었고, 현상건은 군기밀 누설 혐의로 일본의 수배를 받게 되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현상건은 앙투아네트 손탁과의 친분을 이용해 그녀가 운영하던 정동의 손탁호텔에 잠시 몸을 숨겼다. 이후 고종의 명령에 따라 같은 중립파였던 육군 참장 이학균과 함께 미국 군함 신시내티(Cincinnati)호에 비밀리에 승선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상하이에서 그는 고종의 지령을 수행하며 후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상하이 망명 후에도 현상건은 고종이 퇴위하기 직전까지 황실로부터 월급을 받았다. 또한 황실 투자 관영기업인 용동회사(龍東; Rondon)에 고용되어 매달 월급을 받으며, 용동회사가 운영하는 대풍양행(大豊洋行)을 통해 천진에 있는 대한제국 영사관 부지를 구매하여 을사조약 체결 후 해당 부지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34]

그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정보국 수장 파블로프 및 상하이 주재 러시아 상무관 고이에르(L. V. von Goyer)와 접촉하며 고종과 러시아 간의 비밀 연락을 담당했다. 또한 한반도 북부에 러시아 정보망을 구축하는 작업을 주도하며 한인 정보요원들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군사령부를 연결했다. 고이에르는 현상건을 "고종황제의 시종무관으로 알려진 그는 지적이고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풍부한 경험을 지닌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35] 당시 홍콩에 보관 중이던 프랑스제 소총과 대검 각 5만 정을 무장 봉기를 위해 연해주로 옮기려 했으나,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하였다.[36]

을사조약 체결 9일 전인 1905년 11월 8일, 현상건은 고종의 명을 받아 작성된 친서를 러시아 황제에게 전달하며 조약의 무효와 주권 회복을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 편지에는 "짐이 전적으로 신임하는 신하 현상건에게 편지와 함께 지시를 내려 보냅니다. 그가 폐하께 짐의 계획을 말씀드릴 것이니, 검토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현상건이 구두로 전달하도록 했다.[37] 이에 러시아는 1905년 12월 참모대위 로쏘프(Rossov)를 파견하여 고종을 비밀리에 만나게 하는 등 여전히 대한제국의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38] 그는 고종의 해외 망명 정부 수립 구상과 관련하여 러시아 망명을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위해 상하이의 러시아 정보국과 긴밀히 협력했다.[39]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현상건은 고종의 해외 비자금을 관리하는 역할도 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종의 비자금 중 약 30만이 현상건 명의로 로청(露淸)은행에 예치되어 있었다고도 한다.[40]

또한 현상건은 상하이에서 한국의 실정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구미 열강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위협과 고종의 의지를 알릴 것을 주장했고, 이에 1905년 2월 고종은 국서 5통을 작성하여 상하이로 반출하려 시도했다(고종의 국서 반출 사건).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되어, 현상건은 이학균 등과 함께 영국 <트리뷴(Tribune)>지의 종군 기자 더글라스 스토리(Douglas Story)와 만나 일본의 침략 실상과 이에 반대하는 고종의 의지를 세계 언론에 알릴 것을 부탁했다. 이를 계기로 스토리는 한국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으며, 현상건의 주선으로 고종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고종은 스토리 기자와의 면담에서 일본의 침략 의도와 을사조약에 대한 자신의 강경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국서를 작성하여 전 세계에 알릴 것을 요청했다. 이 국서의 내용은 스토리 기자를 통해 외신에 보도되었으며, 이는 고종이 열강의 공동 보호를 요청한 첫 공식 문서로서 의미를 지닌다.[41]

6. 2. 대동보국회 조직과 독립운동 지원

1907년경, 현상건은 상하이에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42] 이 단체는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을 장려하였고,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과 학문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국과의 관계 및 지원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있었다.[42] 대동보국회는 교육기관인 대동보국학교(大同保國學校)를 세워 상하이로 온 한국인들을 교육시키는 데 힘썼다.[42] 현상건은 이 단체의 초대 회장을 맡아 활동했으며, 대동보국회를 통해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한 의연금을 모금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42]

현상건의 독립운동 지원 활동은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졌다. 1907년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자금을 지원하며 국내 무장 투쟁을 도왔다. 또한 1909년경에는 국제 사회에 한국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이범진, 연해주의 이상설, 전명운, 만주의 유인석 등 해외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하여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을 천명하고 일제의 침략 행위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힘썼다.

같은 해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의거를 일으키자, 현상건은 즉시 안 의사의 변호를 위한 지원에 나섰다. 그는 변호 비용 1만 원을 모금하여 영국인 변호사에게 변호를 의뢰하였다.[43] 일각에서는 안중근 의거의 배후에 고종이 있었으며, 고종이 현상건을 통해 안 의사에게 지령을 내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43]

1910년 6월에는 서북학회이갑과 함께 상하이 주재 러시아 상무관 고이에르를 만나 고종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망명을 다시 추진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고종의 역할을 이어가려는 시도였으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거절하면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44][45][46]

7. 말년

고종에게 충성을 다했던 근왕파 현상건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화파 및 이승만 등 사이에는 갈등이 불가피했다. 이러한 갈등으로 현상건은 상하이 임시정부 인사들과 점차 거리를 두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상건은 고종 생전에 긴밀히 연락하며 고종의 상하이 망명을 꾸준히 추진했다. 반면, 상하이 임시정부와 미주의 공화파 세력은 권력 유지와 고종 해외 자산 유용 문제[47]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고종의 망명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고종이 상하이 망명 직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47], 현상건을 비롯한 근왕 세력은 활동 기반을 잃었다. 이들은 공화파와 이승만파가 주도하며 조선 황실을 부정했던 상하이 임시정부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47]

고종 사후, 현상건은 상하이 임시정부와 교류를 끊고 사업에 몰두했다고 일본 측 정보 보고는 전한다. 그는 프랑스계 회사 사장을 겸하며 사업을 번창시켜 상당한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졌다.[48] 그러던 중 1926년 5월 22일, 상하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48] 함께 망명했던 동지 이학균은 아편 중독으로 현상건보다 먼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48]

현상건이 수집했던 서화 등 유품 일부는 딸 현채미에 의해 상하이 시립 박물관과 상하이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에 기증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8. 평가

현상건은 상하이에서 대표적인 항일 투사로 존경받았다. 1919년 13도 대표가 소집한 국민대회에서 한성정부 조직 시 신채호, 박은식, 조성환 등과 함께 평정관(評定官) 13인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경기도 개성군 조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에게 충성하는 근왕파였던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공화파 및 이승만 등과 노선 차이로 인해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현상건은 고종 생존 시 고종과 수시로 연락하며 그의 상하이 망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반면,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미주의 공화파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 및 고종 해외 자산 유용에 대한 책임 문제가 불거질 것을 우려하여 고종의 망명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고종이 상하이 망명 계획 실행 직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현상건을 비롯한 근왕 세력은 정치적 기반을 잃고 계몽군주제와 조선 황실을 부정하던 상하이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47]

일본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고종 사후 현상건은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접촉을 끊고 사업에 몰두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상하이의 프랑스 회사 사장을 지내며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켰다. 그러던 중 1926년 5월 22일 상하이에서 병으로 사망했으나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함께 망명했던 이학균은 아편 중독이 심했으며, 현상건보다 먼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48] 현상건은 서화 등을 수집하였는데, 사후 딸 현채미에 의해 일부는 상하이 시립 박물관에, 나머지는 상하이 한국 영사관에 기증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9. 직계 자손

현상건은 부사(府使)를 지낸 임천 조씨(林川 趙氏) 조환(趙煥)의 딸 조숙경(趙淑卿)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직계 자손으로는 제7대 국회의원을 지낸 현정주(玄正柱)가 있다. 또한,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한 동양화가 현채미(玄采薇)가 있는데, 그는 메이란팡(梅蘭芳), 쉬즈모(徐志摩) 등과 교류했으며, 장대천(張大千)의 제자인 진종주(陳從周)로부터 화법을 전수받았다. 현채미는 상하이 농공당(農工黨) 위원을 지내기도 했다.[49] 손자로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에너지자원공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지구물리탐사학회 명예회장,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회원인 현병구(玄炳九)가 있다.

10. 여담


  • 현상건은 듀이문의 대체 역사소설 ‘간도진위대’에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 EBS 교육방송은 EBS 다큐프라임 - 특별기획 잊혀진나라 13년 2부 제국의 전쟁 (2010년 8월 17일 방영)에서 고종의 중립외교와 현상건이 프랑스러시아에 황제의 밀사로 파견된 경로를 추적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iCOtrcByYkk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bAXWinIdFcM 2부])

참조

[1] 문서 현재 종로구 명륜동(鍾路區 明倫洞)
[2] 문서 부친은 진계환(秦繼煥)으로서, 1831년(순조 31년) 식년시 역과 한학(漢學) 급제. 벼슬은 숭정치추(崇政知樞)
[3] 문서 대한민국정부 공훈 기록에는 그가 개성사람으로 잘못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가족이 일제하에 탄압을 피하여 개성으로 잠시 이주한 바에 기인한다
[4] 문서 그 분파인 천령 (川寧) 현씨로도 알려져 있다.
[5] 문서 물론 역과에 합격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실제로 그 등용문이 되는 사역원(司譯院) 선발과정부터 가계 출신성분의 개입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6] 논문 조선후기의 역관 신분에 관한 연구 연세대 1988
[7] 웹사이트 현재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에 그를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보존되어있다. http://busan.grandcu[...]
[8] 뉴스 '[한국기업성장史]<18>종단철도, 열차 기적 울기도 전에 조선기업가가 울었다' http://www.asiae.co.[...] 아시아경제 2012
[9] 웹사이트 춘원 이광수도 상해에서 현상건의 집에 자주 들렸다고 하며, 귀국 후에도 현상건의 집안과 가깝게 왕래하였다고 한다. https://www.joongang[...]
[10] 서적 경성야화(京城野話) 도서출판 창 1992
[11] 웹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1995
[12] 웹인용 위키실록사전 http://dh.aks.ac.kr/[...]
[13] 서적 경성야화(京城野話) 도서출판 창 1992
[14] 간행물 대한제국기 번역관 현상건의 활동 2015
[15] 문서 백옥경 전게서 p. 132
[16] 저널 Undiplomatic Memories. The Far East, 1896-1904. By William Franklin Sands Whittlesey House, McGraw-Hill Book Company, Inc. 1930
[17] 웹인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18] 문서 백옥경 전게서 p. 135
[19] 문서 백옥경, 전게서 p. 133
[20] 논문 한국근대 전력산업의 발전과 경성전기(주) 연세대학교 2006
[21] 웹인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2] 웹인용 강진갑, 통운사(通運社) http://encykorea.aks[...] 1996
[23] 웹인용 위키실록사전 http://dh.aks.ac.kr/[...]
[24] 웹사이트 다산문화재단 http://tasan.or.kr/t[...]
[25] 웹인용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6] 문서 백옥경, 전게서 p. 143
[27] 웹인용 월간중앙,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https://jmagazine.jo[...]
[28] 웹사이트 《日本外交文書》 36-1, No 692, 719쪽 http://contents.hist[...]
[29] 간행물 1903~1904년 대한제국의 대러시아 대응론과 정책의 추이 2007
[30] 뉴스 경성야화(京城野話) 도서출판 창 1992
[31] 간행물 대한제국의 전시국외중립선언 시말 1994
[32] 저널 을사늑약 체결과정과 국제정세 https://sinam.mpva.g[...] 2015
[33] 웹인용 중앙선데이,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https://www.joongang[...]
[34] 문서 백옥경, 전게서 p. 147
[35] 간행물 고종황제의 독립운동과 러시아 상하이 정보국(1904~1909) 2014
[36] 서적 최덕규 전게서
[37] 간행물 Traduction de la lettre de la Majesté l'Empereur de Coreé à la Majesté l'Empereur de Russie (한국 황제 폐하가 제정러시아 황제 폐하에게 보내는 편지 번역문) http://contents.nahf[...] 2022-02-09
[38] 서적 러시아 국립문서 보관소 소장 한국관련 문서 요약집
[39] 서적 최덕규, 전게서
[40] 서적 역사저널 그날 8: 순조에서 순종까지 민음사
[41] 서적 백옥경, 전게서
[42] 서적 백옥경, 전게서
[43] 웹인용 연합뉴스 https://news.naver.c[...] 2009
[44] 뉴스 조선일보 https://www.chosun.c[...] 2010-08-18
[45] 문서 당시 청도에 있던 [[안창호]], [[이동휘]]와의 상의하에, 서북학회(西北學會)의 창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추정(秋汀) [[이갑 (1877년)|이갑]](李甲)이 오산(吾山) [[이강 (1878년)|이강]](李剛)과 함께 1910년 상해의 현상건의 접촉하여 러시아 극동정보국장과 만나고 러시아계 아화도승은행(俄華道勝銀行; Russo Asiatic Bank)에의 저축된 한국인 자금을 파악하고자 하였을 때, 단지 현상건이 상해 홍구(虹口)에 살고 있다는 북경에서 들은 정보만 있고 정확한 주소를 몰라서, 홍구(虹口)의 집들을 가가호호 방문끝에서야 기적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어떤 연유이었는지 그들이 현상건의 주소를 상해의 한국인들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는 것을 보면, 그 접촉은 표면적인 이유가 아닌 고종의 망명과 연관된 극도의 비밀을 요하는 사항이었을 듯 하다. 이갑은 현상건의 소개로 아화도승은행의 총관과 러시아 극동 정보국장을 만났다고 회술하고있다 (출처: 아버님 秋汀 李甲 / 李正熙 著, 人物硏究所, 1981).
[46] 간행물 Письмо Гойера Послу в Токио, 12 ноя. 1908 г. : Император Коджон и план по созданию корейского правительства в изгнании в Приморье https://cyberleninka[...] 1908-11-12
[47] 웹사이트 여운형 등의 상하이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왕정 대신 공화제를 지지하였고, 당연히 황실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분간 ‘유용(有用)하다는 이유로 타협하였다 http://weekly.khan.c[...] 2022-02-09
[48] 서적 Sands, 전게서
[49] 서적 동방명주를 빛낸 사람들 연변인민출판사
[50] Youtube https://www.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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