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오카 다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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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로오카 다쓰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야구 해설가이다. 선수 시절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격수로 활약하며 신인왕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고, 지도자로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세이부 라이온스를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명성을 얻었다. 그는 '관리 야구'라는 철학으로 선수들의 훈련, 식생활, 사생활까지 엄격하게 관리하며 팀을 운영했으며, 지바 롯데 마린스의 제너럴 매니저를 역임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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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오카 다쓰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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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히로오카 다쓰로 |
로마자 표기 | Tatsuro Hirooka |
출생일 | 1932년 2월 9일 |
출생지 | 히로시마현 구레시 |
![]() | |
선수 정보 | |
포지션 | 유격수 |
타석/투구 | 우타/우투 |
프로 입단 | 1954년 |
드래프트 순위 | 알 수 없음 |
첫 출장 | 1954년 4월 4일 |
마지막 출장 | 1966년 5월 11일 |
선수 경력 | |
선수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4–1966) |
코치/감독 경력 | |
코치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1–1966)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0–1971) 야쿠르트 스왈로스 (1974–1976) |
감독 | 야쿠르트 스왈로스 (1976–1979) 세이부 라이온스 (1982–1985) |
수상 | |
신인왕 | 1954년 센트럴 리그 신인왕 |
일본 시리즈 우승 | 5회 (1955, 1961, 1963, 1965, 1966) |
감독 수상 | 일본 시리즈 우승 3회 (1978, 1982, 1983) 쇼리키 마쓰타로 상 2회 (1978, 1982) |
기록 | |
타율 | 0.240 |
홈런 | 117 |
안타 | 1,081 |
기타 정보 | |
야구 명예의 전당 | 1992년 (경기자 표창) |
출신 학교 | 히로시마 현립 구레미쓰다 고등학교 와세다대학교 |
2. 프로 입단 전
1932년 2월 9일,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6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10] 일본 제국 해군 소좌이자 구축함의 기관장이었던 아버지 세이이치[11][12]의 영향으로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을 동경했다.[13] 해군 사관학교에서는 기계 체조가 필수였기 때문에, 고반초 초등학교(高坂町小学校|고반초 초등학교일본어) (현: 구레시립 구레 중앙 초등학교) 시절에는 철봉과 운대를 자주 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히로오카는 뛰어난 수비력을 바탕으로 1954년 5월에 주전 유격수였던 히라이 사부로로부터 주전 자리를 빼앗아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314(리그 6위), 15홈런, 67타점을 기록, 신인왕과 베스트 나인을 동시에 수상했다.[20]
1944년, 해군 사관학교의 등용문인 히로시마현립 구레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14] 입학 후, 클럽 활동을 선택하게 되었을 때, 배구 또는 아버지로부터 신사의 스포츠라고 들었던 테니스를 하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와 캐치볼을 하는 모습을 자신보다 연상의 야구부원에게 보여 야구부에 권유받아 야구를 시작했다.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기계 체조로 몸을 단련했기 때문에, 야구를 시작한 후 실력 향상이 빨랐다. 히로오카는 이 경험을 통해, 현역 은퇴 후 지도자가 되었을 때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야구계에서 가장 먼저 깨달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15] 포지션은 3루였다.
구레 제일 중학교는 1948년 학제 개혁으로 신제 구레 다케 고등학교가 되었지만 야구부는 약했다. 1949년 학교 통폐합으로 히로시마현립 구레 미쓰다 고등학교가 된 후 팀 전력이 향상되었다.[16] 고등학교 3학년이 된 1949년 여름의 히로시마현 대회에서 4강에 진출하여 서중국 대회에 진출,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야마구치현립 야나이 고등학교와의 결승전에서는 자신의 악송구도 겹쳐 1-6으로 패배하여 고시엔 출전은 이루지 못했다.
졸업 후에는 야구를 그만두고 히로시마 대학 혹은 야마구치 대학으로 진학을 생각했지만, 와세다 대학 야구부 입단 테스트를 권유받았다. 이는 와세다 대학 OB였던 스기타야 모리가 감독 모리 시게오에게 히로오카를 추천했기 때문이다.[17] 와세다 대학 야구부가 미야자키현 미야자키시의 미야자키현영 야구장에서 실시 중인 캠프에 가서 입단 테스트를 치르고 합격했다. 응시자는 고시엔 출전 경험이 있는 선수뿐이어서 주눅이 들었지만, 플레이를 보니 별것 아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18]
1950년,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 사회학과에 입학, 동대 야구부에 입부했다. 입부 직후, 동 학년인 고모리 미쓰오가 같은 3루수였기 때문에 감독 모리 시게오로부터 유격수로의 전향을 명령받아, 이후 포지션은 유격수가 되었다.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50년 춘계 리그부터의 3연패를 포함한 4번의 우승을 경험, 1학년 위의 아라카와 히로시, 누마자와 고이치로와 함께 스타 선수로 활약, "6대학(진구)의 귀공자"라고도 불렸다.
와세다 대학 야구부에서는 아라카와 히로시, 누마사와 고이치로, 고모리 미쓰오 등과 함께 도쿄 6대학 리그의 인기 선수로서 이름을 올렸다. 리그 통산 82경기에 출전하여 315타수 68안타, 2홈런, 52타점, 타율 2할 1푼 6리를 기록했다.
대학 4학년 때에는 마이니치 오리온스, 긴테쓰 펄스, 오사카 타이거스, 더 나아가 동향의 쓰루오카 가즈토가 이끄는 난카이 호크스에게도 입단을 권유받았지만, 히로오카는 처음부터 "가장 강한 팀에 가고 싶다"라고 결정했다. 다른 구단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학 4학년 말에 구단 대표인 우노 쇼지로부터 권유받아, 요미우리 입단을 결정했다[19]。
3. 선수 시절
1955년에는 팀 사정으로 주로 3루수로 기용되었지만, 이듬해 유격수로 복귀했다. 이후 센트럴 리그에서 요시다 요시오(오사카 타이거스)와 함께 리그를 대표하는 유격수로 불리며 수비의 견실함과 화려함을 다투었다.[21] 그러나 타격에서는 2년차 이후 타율이 낮아 고전했다.
1956년과 1957년에는 모두 4월부터 부상으로 2개월간 결장했지만 복귀 후, 1957년에는 자신의 최다 기록인 18홈런을 기록하는 등 장타력에서 발전을 보였다.[22] 1958년에는 타율 .277(리그 7위)의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이 해에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ON포"로 불리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신인 나가시마 시게오 (리쓰메이칸 대학)가 입단하여, 와세다 대학 출신의 히로오카와 함께 여성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뛰어난 수비력을 갖춘 유격수로 평가받았지만, 베스트 나인 유격수 부문 선정 횟수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최고의 유격수는 요시다 요시오(오사카 타이거스)로 여겨졌다(요시다는 9회, 히로오카는 1회). 히로오카는 요시다의 뛰어난 수비력을 "매우 곤란하다"고 말했지만, 요시다는 "히로오카 씨에게 글러브 다루는 법 등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말했다.[119] 요시다의 민첩하고 화려한 수비에 대항하기 위해 히로오카가 도달한 것은 "기본에 충실하고 견실한 플레이"였다.
히로오카가 수비의 본보기로 삼은 것은 1958년 가을 미일 야구에서 방일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2루수였던 돈 브레이저였다.[120][121] 히로오카는 브레이저를 통해 기본 동작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수비 이론을 확립했다.
1년차부터 타율 3할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타율이 정체되어 .250을 넘긴 해는 1955년(.257)과 1958년(.277) 뿐이었다. 신타 이론과 아라카와 이론 등 다양한 타격 이론을 받아들였지만, 이론가였던 히로오카는 논리적인 타격 연습에 몰두하다 미로에 빠져 암중모색으로 끝나버렸다.[122]
1961년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히로오카는 코치 겸임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1964년 8월 6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 나가시마 시게오의 독단적인 홈스틸 사건으로 가와카미 감독과 갈등을 겪었다. 결국 196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지도자 시절
1970년 네모토 리쿠오 감독의 요청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내야 수비 코치로 발탁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세키네 준조 타격 코치와 함께 야마모토 고지, 기누가사 사치오, 미무라 도시유키, 미즈타니 지쓰오 등을 육성하여 훗날 히로시마 황금 시대의 초석을 다졌다.
1974년 야쿠르트 스왈로스 수비 코치, 1976년 수석 코치를 거쳐 시즌 도중 감독으로 승격했다. 선수들의 생활 태도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수비와 주루를 중시하는 야구를 펼쳐 1978년 구단 창단 이후 첫 센트럴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1979년 구단과의 갈등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1982년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취임 첫 해부터 1983년까지 퍼시픽 리그와 일본 시리즈 2연패를 달성했다. 1985년에도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신 타이거스에게 패했다. 히로오카는 '관리 야구'로 선수들의 식생활과 사생활까지 관리하며 야구에 대한 자세를 가르쳤다. 세이부 감독 시절 다부치 고이치, 히가시오 오사무, 이시게 히로노리 등 10명의 1군 감독을 배출했으며, 그중 6명이 우승 감독이 되었다.
4. 1. 히로시마 코치 시절
1970년 네모토 리쿠오 감독의 요청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내야 수비 코치로 발탁되면서 타격 코치인 세키네 준조와 함께 야마모토 고지, 기누가사 사치오, 미무라 도시유키, 미즈타니 지쓰오 등을 길러 후일 히로시마 황금 시대의 초석을 쌓았다.[44] 히로오카는 카프 코치 시절에 "코치는 스스로 모범 플레이를 보여야 한다"라며, 직접 글러브를 들고 맹렬히 분투했다.[45] 네모토 감독으로부터 "현역 내야수 따위는 문제없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화려한 수비를 보였고, 런닝에서도 선수들 앞에서 달리면서 숨도 헐떡이지 않아, 오히려 선수들이 히로오카를 따라가며 헐떡이는 모습이었다.[20]히로오카가 처음 손을 댄 것은 이노우에 히로아키를 외야수에서 3루로, 니시모토 아키카즈를 투수에서 유격수로 각각 컨버트하여, 두 사람으로 삼유간 콤비를 만드는 것이었다.[46] 이노우에와 니시모토는 히로오카의 "모범 기술"을 보고 질려했다.[20] 히로오카는 "저 두 사람, 매일 훈련시켜도 팬들에게 돈을 받고 보여줄 수 있는 플레이를 할 때까지, 최소 3년은 걸릴 거요"라고 말했다.[20]
네모토 감독은 외야수였던 소노다 도시히코를 내야수로 컨버트하도록 명령했다.[49] 히로오카는 소노다의 수비를 보고 "내야 센스는 제로네요. 가르쳐도 절대로 실력이 늘지 않아요. 제가 보증합니다. 소노다만은 제발 봐주세요"라고 말했지만, 네모토는 "내가 책임을 질 테니 어쨌든 해봐"라고 엄명했다. 소노다는 처음에는 전혀 실력이 늘지 않아, 혹독한 지도에 대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증이 생겼고, 히로오카도 한때 소노다의 전향을 포기하려 할 정도였다. 그러나 끈기 있게 지도를 계속한 결과,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갑자기 내야수로서의 움직임이 능숙해지게 되었고, 이후 소노다는 히로시마의 내야 수비진의 핵심이 되었다. 이 컨버트 성공은 히로오카에게 큰 재산이 되었고, "프로에 오는 선수들은 누구나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답을 내는 방법을 몰라서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 버린다. 그 답을 진흙투성이가 되면서 선수와 함께 찾아가는 것이 지도자의 의무이다. 선수와 지도자에게 의욕이 있다면, 선수는 반드시 답을 찾아 실력이 향상될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내가 있는 것은 소노다 덕분이다"라고 말했다.[50]
1971년 말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퇴단했다.
4. 2. 야쿠르트 코치·감독 시절
1974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수비 코치로 부임했다. 당시 감독은 와세다 대학 선배인 아라카와 히로시였기 때문에, 히로오카는 감독 대신 코치직을 수락했다. 히로오카 외에도 고모리 미쓰오, 누마사와 고이치로 등이 코치진으로 합류하여, 감독을 포함한 이들 4명은 '와세다 대학 출신 4인방'으로 불리며 화제를 모았다.[28] 1976년에는 수석 코치로 승격했고, 시즌 도중 아라카와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취임했다.당시 야쿠르트는 구단주의 방침에 따라 가족적인 분위기였으나, 히로오카는 프로 선수로서의 기강이 해이하다고 판단했다. 시즌 중 부상자가 속출하자, 히로오카는 히로시마 코치 시절 네모토 감독에게서 배운 선수 식생활 관리법을 야쿠르트 선수들에게 적용했다. 1977년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마작, 화투, 골프 금지, 음주 및 흡연 제한 등 선수들의 생활 태도를 엄격하게 규제했다. 또한, 스프링 캠프에서는 수비와 주루를 중시하는 연습과 경기 방침을 내세웠다.
처음에는 선수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히로오카의 방침은 성공을 거두어 그 해 팀을 구단 역사상 최초로 시즌 2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페넌트레이스에서는 요미우리가 우승했고, 야쿠르트는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7승 19패로 부진했다.
1978년, 히로오카는 모리 마사히코를 작전 코치로 초빙했다. 모리는 히로오카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철저히 관리했다. 또한 모리가 수집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요미우리에 대한 특별 대책을 강화했다. 5월부터 페넌트레이스 경쟁에 뛰어든 야쿠르트는 전반기를 리그 선두로 마쳤다. 후반기에 들어서며 성적이 다소 하락했고, 8월 25일에는 요미우리에 4경기 반 차로 뒤지며 우승이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요미우리의 성적이 급락했고, 야쿠르트는 역전승을 거듭하며 무서운 기세로 10월 4일, 구단 창단 이후 첫 센트럴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야쿠르트는 그 해 요미우리를 상대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4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노리던 한큐 브레이브스를 4승 3패로 꺾고 창단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일본 시리즈 우승 후, 히로오카는 야쿠르트를 떠날 생각이었으나 구단의 만류로 3년 계약을 맺었다. 팀 강화를 위해 몇 차례 트레이드를 계획했지만, 히로오카가 원했던 트레이드는 대부분 성사되지 않았다. 히로오카는 "트레이드 예정이었던 선수가 잔류를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1979년, 야쿠르트는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지만, 개막 이후 8연패를 당하는 등 부진에 빠졌다. 구단은 선수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던 모리 코치를 해임하고 우에무라 요시노부 투수 코치를 2군으로 강등시키려 했다. 그러나 히로오카는 구단의 인사 문제에 반발하며 갈등을 빚었고, 결국 8월 17일 사임했다. 이후 성적 부진으로 야쿠르트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니혼 TV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며 독설적인 해설로 인기를 얻었다. 1981년에는 긴테쓰 버펄로스와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4. 3. 세이부 감독 시절
1982년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계약 내용은 “휴양 중에는 급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문제성 발언에 대해서는 엄벌에 대처한다” 등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으나, 히로오카는 “납득했기 때문에 계약했다”라고 밝혔다.[208]히로오카는 세이부에서도 엄격한 생활 관리와 수비 중심의 야구를 펼쳤다. 취임 첫 해인 1982년 전기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플레이오프에서 닛폰햄 파이터스를 꺾고 19년 만에 퍼시픽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주니치 드래건스마저 누르고 24년 만에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세이부 제1차 황금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208]
1983년에는 2위 한큐와 17경기 차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와 맞붙어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승 3패로 승리,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명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오프 시즌에는 에나쓰 유타카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과정에서 기무라 히로시, 시바타 야스미쓰, 고바야시 세이지 등 중간 계투 투수 3명을 방출했다. 이 트레이드는 히로오카의 의향에 반하는 결정이었고, 이로 인해 히로오카는 네모토 리쿠오 등 구단 프런트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1984년에는 다부치 고이치, 야마자키 히로유키, 오타 다쿠지 등 주력 선수들의 부진으로 팀은 우승권에서 멀어졌다. 5월부터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다부치와 야마사키는 은퇴했으며, 에나쓰는 8월 이후 2군으로 강등되어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에나쓰는 히로오카를 “나의 생활권을 빼앗은 남자”라고 칭했다. 세이부는 그 해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985년에는 아키야마 고지, 쓰지 하쓰히코, 구도 기미야스, 와타나베 히사노부 등 젊은 선수들의 활약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히로오카는 시즌 후반 요산성관절염으로 휴양했고, 팀의 리그 우승 당시 현장에 없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신 타이거스에 2승 4패로 패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에는 실패했다.
5. 지바 롯데 GM 시절
1995년 지바 롯데 마린스의 시게미쓰 아키오 구단주 대행의 부름을 받아 일본 야구계 최초로 제너럴 매니저(GM)에 부임했다. 이때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을 역임했던 바비 밸런타인을 감독으로 초빙했다.[209]
그러나 밸런타인 감독과는 야구관의 차이로 갈등을 겪었다. 시즌 개막 직후부터 성적이 좋지 않자, 히로오카는 2군 수석 코치였던 에지리 아키라를 1군 수석 코치로 승격시켰고, 밸런타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경기가 없는 날에는 선수들에게 연습을 시켰다. 팀은 후반부터 힘을 내어 1985년 이후 처음으로 A클래스(2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히로오카는 시즌 종료 후 밸런타인을 해임하고, 후임 감독으로 에지리를 임명했다. 밸런타인은 “제너럴 매니저는 선수를 모아오는 것이 일인데 히로오카는 그것을 하지 않고 현장에 간섭만 했다”라고 비판했고, 히로오카는 “감독은 현장에서 흙투성이가 된 채로 선수를 가르치는 것이 일인데 밸런타인은 그것을 하지 않았다”라고 반박했다.
에지리가 감독을 맡은 이듬해인 1996년에는 팀이 5위로 시즌을 마쳤다. 같은 해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당시 무명이었던 고사카 마코토의 지명을 주도했지만, 이라부 히데키, 고미야마 사토루, 에릭 힐만 등 주력 선수들과 갈등을 일으켜 2년도 채 되지 않아 제너럴 매니저에서 해임되었다. 고사카는 그 후 히로오카와 요시다를 능가하는 간판 유격수로 성장했다.
6. 은퇴 이후
세이부에 퇴단 이후에는 야구 평론가로 다시 활동하며 NHK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102] 1998년부터 2007년까지는 RF라디오닛폰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고, 현재는 야구 평론가로서 활동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102] 나가시마 시게오 회장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2004년 이후에는 사실상 OB회 회장격으로서 활동하고 있다.[102]
1988년에는 '재팬 스포츠 시스템'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미일 베이스볼 회의'를 개최했는데,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열리면서 미국 야구계로부터 감독과 코치, 현역 선수가 일본을 방문했다.[104] 일본에서는 히로오카와 고바 다케시, 하리모토 이사오, 스즈키 게이시 등이 참가해 회의에서 논의를 펼쳤다.[104]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쓰야 등 아마추어 선수들도 참가해 실기 지도를 받았다.[104]
2008년 4월부터는 아이치 신시로 오타니 대학 사회복지학부의 특임 교수로 재직 중이며, 스포츠 과학을 담당하고 있다.[102]
다카기 모리미치와는 친분이 있어, 2012년 주니치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코치를 맡기도 했다는 내용은 원문에 없으므로, 요약과는 달리 해당 내용은 생략한다.
7. 히로오카의 야구 철학: 관리 야구
히로오카 다쓰로는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훈련뿐만 아니라 식생활, 사생활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관리 야구'를 주창했다.[124]
그는 선수들에게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고 각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도록 지도했다. 선수 개개인에게 맞춤형 스케줄을 제공하고, 번화가 외출이나 과도한 음주를 금지했으며, 식단까지 관리했다.[125] 히로오카는 "프로 선수에게는 경기장이 전부이다. 불완전한 몸 상태로 경기장에 나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126]
히로오카는 특히 선수들의 식생활을 중요하게 여겨 현미와 자연식 섭취를 권장하고, 육류 섭취를 제한하는 등 독특한 식단 관리 방식을 도입했다.[130] 그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치 시절부터 선수들의 식습관에 의문을 품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감독 시절에는 선수들의 잦은 부상 원인이 식습관에 있다고 판단했다.[130] 그는 의학 박사 모리시타 케이이치와 교류하며 자연식의 효과를 확신하고 선수들에게 권장했다.[130]
세이부 라이온스 감독 시절에는 '금주, 금연, 금 마작'과 더불어 '현미식·자연 식품 섭취'를 강조하고 육류 섭취를 제한했다.[131][132] 그는 선수 부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어 식생활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133][135] 당시에는 '스테미너를 위해서는 육류가 필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지만,[136] 히로오카는 '육류는 썩은 음식'이라는 강연 내용 때문에 일본 햄 구단 사장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137]
히로오카의 '관리 야구'는 선수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144] 팀 성적 향상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집단 행동의 규율을 중시하는 조직 야구를 추구했으며, 이것이 팀과 선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127]
7. 1. 관리 야구에 대한 비판과 옹호
히로오카 다쓰로의 '관리 야구'는 선수들의 식생활과 사생활까지 통제하는 엄격한 방식으로, 선수들의 개성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124] 예를 들어, 선수들에게 마작, 화투, 골프를 금지하고, 음주와 흡연을 제한했으며, 심지어 식단까지 관리했다.[60][61][62] 이러한 방식은 선수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획일적인 플레이를 강요한다는 지적을 받았다.하지만 히로오카의 지도를 받은 많은 선수들은 그의 가르침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특히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제자들은 히로오카의 가르침이 자신의 야구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 와타나베 히사노부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관리 야구를 경험하고 "터무니없는 곳에 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경험이 긍정적이었다고 회상한다. 히로오카 감독에게 기초를 다져 받은 것이 행운이었다고 말했다.[161]
- 구도 기미야스는 "관리 야구가 내 기초"라며, 히로오카 감독에게 배운 식사법을 현재도 실천하고 있다고 밝혔다.[165] 또한 젊은 시절 프로 정신을 심어준 히로오카 감독 덕분에 역경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166]
- 이토 츠토무는 히로오카에게 기본의 중요성을 배웠으며, 가장 영향을 받은 야구인으로 꼽았다.[172][173]
- 쓰지 하쓰히코는 히로오카 감독 밑에서 야구를 하고 싶어서 아마추어 시절부터 세이부를 지망했다고 밝혔다.[174]
이처럼 히로오카의 '관리 야구'는 비판과 옹호가 공존하는 논쟁적인 주제이지만, 그의 지도가 많은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8. 에피소드
성대모사에 능하여, 한 번 본 사람의 특징을 파악하면 누구든 금방 따라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지방 원정 중 비로 경기가 중단되었을 때,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사인 내는 법, 가와카미 테츠하루의 타격 폼, 벳쇼 다케히코의 투구 폼 등, 동료들의 요청에 맞춰 성대모사를 훌륭하게 해내어 팀원들을 웃게 했다。
손녀는 전 다카라즈카 가극단 94기생[201], 호시구미 남역 배우 마오 유키이다[202]。
9. 주요 저서
- 《나의 해군식 야구》 (산케이 출판)
- 《감독론》 (슈에이샤 인터내셔널)
- 《나의 야구 교육학》 (마이니치 신문)
- 《승자의 조직론》 (나가시마 시게오 공저, 고단샤)
- 《승자의 방정식》 (고단샤)
- 《의식 혁명의 권유》 (고단샤)
- 《적극 사상의 권유》 (고단샤)
- 《나의 야구 인생》 (히로오카 다쓰로, 도야마현 교육 위원회)
- 《성공에의 나침반》 (산케이 신문 뉴스 서비스)
- 《야구 재생: 되살아나라 영혼의 야구》 (슈에이샤 인터내셔널)
- 《거인에게 남기는 유언: 프로 야구 생존의 길》 (겐토샤)[205]
- 오 사다하루, 히로오카 다쓰로, 후지히라 신이치 공저, 《흔들리지 않는다. 초일류가 되는 사람의 마음가짐》 (겐토샤)
- 《92세, 히로오카 다쓰로의 정체》 (마쓰나가 다카린 저, 후소샤, 2024년)[206]
10.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수상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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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수상 경력 |
11. 연도별 타격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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