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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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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효임은 1814년 한강 변에서 태어난 한국 천주교의 성인이다.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지키며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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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임 - [인물]에 관한 문서
성인 정보
이름김효임 콜룸바
출생일1814년
사망일1839년 9월 26일
축일9월 20일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출생지서울 밤섬
사망지서울 서소문
직업순교자
시복일1925년 7월 5일
시복인교황 비오 11세
시성일1984년 5월 6일
시성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 생애

(내용 없음)

2. 1. 출생과 성장 배경

김효임은 1814년 한강 변의 밤섬이라는 마을의 한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같은 곳에서 태어난 두 살 터울의 여동생 김효주 아녜스가 있다. 본래 그들 가족 중에는 천주교 신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찍이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고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던 반면, 아버지는 전혀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에서 교회라는 말조차 듣기 싫어할 정도로 천주교를 엄격히 금하였다.

2. 2. 독실한 신앙생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여섯 자녀와 함께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김효임 콜룸바와 언니 김효주 아녜스, 여동생 김 클라라는 세례를 받은 뒤 동정을 지키며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결혼하기를 바랐지만, 세 자매는 뜻을 굽히지 않고 결혼한 부녀자처럼 보이기 위해 쪽머리를 했다.

이후 세 자매는 한양 근교 고양군 용머리(현재의 서울특별시 용산구 일대)에 사는 오빠 김 안토니오에게 가서 함께 살았다. 그들은 기도와 주 2회 단식, 성경 읽기, 묵주기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 활동에 힘쓰며 신앙 생활에 전념했다. 집안은 부유했지만 세속적인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온화하고 인정 많은 성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주변의 모든 교우들은 그들의 자선 활동과 모범적인 신앙생활에 감탄하며 깊은 존경심을 표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용머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독실한 신앙 덕분에 샤스탕 신부가 직접 찾아와 종부성사를 베풀어 주었다. 이후 남매들은 계속 용머리에 머물며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2. 3. 체포와 투옥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효임과 동생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감옥에 갇힌 교우들을 위해 매일 기도를 드렸다.

5월 3일, 같은 마을에 살던 김사문이라는 자가 관아에 김효임의 오빠 김 안토니오가 천주교를 믿는 부자라고 밀고하며 그의 집 위치를 알렸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포졸들은 즉시 용머리로 향했다. 마침 김 안토니오는 용무와 궁술 연습 때문에 집을 비운 상태였다.

포졸들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들은 김 안토니오의 부인 김 루치아와 동생 김 베네딕타, 김 클라라는 황급히 집을 빠져나갔다. 김효임은 옆집 담장을 넘어 장작더미 뒤에 숨었고, 동생 김효주는 세 살 된 조카와 함께 방 안에 남아 있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포졸들은 김효주를 가둔 뒤 옆집까지 수색하여 숨어있던 김효임마저 찾아내 집으로 끌고 왔다. 포졸들이 동생 김효주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본 김효임은 분노하여 위엄있게 꾸짖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체포하면 순순히 따라갈 터인데, 어째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이토록 몰지각하게 구는 것이오?"

2. 4. 극심한 고문과 형벌

포도청으로 끌려간 김효임과 동생 김효주는 즉시 심문을 받았다. 포장이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하고 배교를 강요하며 조상 제사 거부를 추궁하자, 김효임은 조상 제사의 무의미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며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포장은 다른 교우들과 서적의 위치, 오라버니의 행방을 물었으나 자매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심문 후 즉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형리들은 먼저 자매의 온몸을 매질하고, 못이 박힌 몽둥이로 어깨, , 무릎 관절 등을 가격했으나 자매는 표정 변화 없이 고통을 견뎌냈다. 이어진 주뢰형은 다섯 차례나 가해졌다. 극심한 고통으로 다리뼈가 뒤틀리는 와중에도 자매는 포장의 회유와 협박에 흔들리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다른 죄수들과 달리 고통 속에서도 예수마리아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 않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인내하는 모습은 형리들을 더욱 당황하고 난폭하게 만들었다.

형리들은 자매가 마귀에 씌였다고 여기며 더욱 잔혹한 고문을 가했다. 옷을 벗기고 등에 주문을 적은 뒤, 달군 쇠꼬챙이로 글자를 따라 열세 차례나 지지는 불고문을 당했지만, 자매는 여전히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포장은 자매의 독신 생활에 대해 물었고, 김효임은 순결을 지켜 하느님을 섬기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이에 포장은 여성으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신앙을 꺾으려 했다. 먼저 '학춤'이라는 고문을 가했다. 이는 죄수의 옷을 벗기고 손을 뒤로 묶은 채 공중에 매달아 네 명의 형리가 돌아가며 매질하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한 이 고문 속에서도 자매는 용기를 잃지 않고 침묵으로 견뎠다.

이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포장은 자매의 처녀성을 훼손하여 배교시키려는 악랄한 계획을 세웠다. 자매의 옷을 모두 벗겨 남자 죄수들만 있는 감옥에 던져 넣었다. 그러나 자매는 이틀 동안 흉악한 죄수들 사이에서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는데, 이는 마치 성령의 보호처럼 보였고 죄수들도 감히 자매를 건드리지 못했다. 결국 형리들은 자매에게 옷을 돌려주고 여성 감옥으로 옮겼다.

이후 형조로 이송되어 판서에게 심문을 받게 되었다. 김효임은 천주교 외에는 참된 길이 없다고 당당히 답했으며, 공자맹자는 현자이지만 이 세상에서만 그렇다고 말했다. 심문 말미에 김효임은 판서에게 발언 기회를 얻어, 포도청에서 겪었던 부당한 치욕, 특히 여성의 순결을 짓밟은 행위를 고발했다. 그녀는 국법에 따른 처형은 받아들이겠으나, 에도 없는 치욕적인 대우는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김효임의 용기 있는 발언에 형조 판서는 놀라며 "이 여성의 순결은 백처럼 귀한 것인데, 어찌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있었는가?"라고 말하며 사건 조사를 명하고 그 결과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당시 사회의 비인간적인 형벌과 여성 인권 유린의 실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극한의 상황에서도 신념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김효임의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2. 5. 순교

두 자매는 법정에서 끌려나와 다시 매질을 당하며 심문 받았다. 형리들은 그들에게 다른 천주교인들이 어디 있는지, 특히 오빠 김 안토니오에 대해 발설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선택했다.

1839년 9월 3일, 동생 김효주는 한양의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다섯 명의 다른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김효주의 나이는 24세였다.

같은 해 9월 26일, 언니 김효임 역시 같은 장소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때 김효임의 나이는 26세였다.

3. 시복 · 시성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자매는 1925년 7월 5일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1]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2] 1984년 5월 6일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1-16
[2]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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