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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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마사는 중국 뤄양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68년에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승려가 흰 말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낙양에 온 전설에 따라 이름 붙여졌다. 중국 불교 초창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당나라 시대에는 현장이 순례를 시작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인도와의 불교 문화 교류를 상징하는 사원도 함께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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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마사 | |
|---|---|
| 일반 정보 | |
![]() | |
| 중국어 간체 | 白马寺 |
| 중국어 병음 | Báimǎ Sì |
| 중국어 광둥어 | Baak6-maa5 zi6 |
| 종교 | 불교 |
| 위치 | 중국 허난성 뤄양시 |
| 상세 정보 | |
| 창건자 | 미상 |
| 완공 연도 | 68년 |
| 건축 양식 | 중국 건축 |
| 면적 | 13 헥타르 |
| 웹사이트 | |
| 공식 웹사이트 | Buddha Channel |
2. 역사
68년,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승려가 대월지(아프가니스탄)에서 후한의 사신 채음(蔡愔), 왕준 등을 만나 흰 말에 《사십이장경》과 불상을 싣고 수도 낙양에 오면서 백마사(白馬寺)라는 이름을 얻었다.[42] 백마사는 두 승려들이 머무르면서 불경을 번역했던 홍려관 자리라고 한다.
《낙양가람기》권4에 따르면 북위 시대에는 후한 명제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었으며, 낙양성 서쪽 서양문(西陽門) 밖 3리 지점에 있었다.[42] 북위 시절에는 절에 안치된 경함(経函)에 대한 신앙이 퍼져 있었으나, 이 경함 안의 경전이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가져왔던 《사십이장경》인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주를 선포한 당의 측천무후는 자신이 총애하던 승려 설회의를 백마사 주지로 삼았고, 수공 원년(685년)에 백마사를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주변 국가 불교도들을 모아 조회하게 하였다. 이후 몇 차례 중흥과 쇠락을 겪었고, 명 가정 34년(1555년)과 청 강희 52년(1713년) 두 차례 중수되었다.
안사의 난 당시 당 왕조의 요청을 받은 위구르족에 의해 낙양이 약탈당했을 때 백마사도 불탔다. 당시 백마사에는 난을 피해 숨어든 낙양의 처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인도에서 온 두 승려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사찰에 머물렀다. 이 사찰은 "백마사"(白馬寺|Báimǎ sì|바이마쓰중국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白은 "흰색", 馬는 "말", 寺는 "사당, 사찰, 수도원"을 의미한다.[17][9] 황제는 존경의 표시로 사찰 이름에 접미사 寺(쓰)를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10] 이후 모든 사찰, 심지어 모스크에서도 이 글자를 이름에 사용하게 되었고, 정부 부처 이름에서는 제외되었다. 그 결과, 사찰 이름은 때때로 "백마부"로 번역되기도 한다. "백마사"는 현대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이는 민간 어원일 수 있는데, 다른 중심지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초기 사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 수도에서 불교를 널리 전파한 지둔(314–366)은 동진 (317-420) 수도 건강 (이전의 건업)의 백마사(Pai ma) 수도원에서 펑후이와 토론을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1] 샹양에도 백마사가 있었는데, 도안과 그의 제자들이 365년경에 머물렀다.[12] '백마 강'과 '디'라는 민족이 '백마 계곡'에 살았고, 그곳에는 여전히 '백마 디'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이름의 기원을 찾는 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13] 백마라는 이름은 흰 말들이 경전을 운반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이들 민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258년, 구차 왕족 출신 승려 포옌은 이 사찰에서 《무량수경》을 포함한 6개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인도-스키타이 불교 번역가 축법호는 266년에 뤄양에 와서 적어도 289년 봄부터 290년까지 백마사에 머물렀다.[26]
당나라 승려 현장은 부처의 고향을 방문하고자 인도에 16년간 순례 여행(630~635년)을 했으며, 이 사찰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현장은 귀국 후 죽을 때까지 백마사 주지로 있었다. 그는 인도에서 가져온 불교 경전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했다.[5]
1175년, 백마사 남동쪽 칠륜탑 옆 석비에 50년 전 화재로 사찰과 탑의 전신인 석가여래 사리 탑이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금나라(1115–1234) 관리가 석조 칠륜탑을 세웠으며, 이 중국 탑은 당나라의 사각형 기단 탑을 모방했다.[5]
13세기부터 20세기 사이 명나라(1368–1644)와 청나라(1644–1911) 시대에 걸쳐 복원/개조되었다. 16세기에 상당한 복원이 이루어졌고 일부 건물은 이 시기에 지어졌지만, 그 이후 일부가 개조되었다.[27]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백마사에 있던 요 시대 18나한상과 패엽경 등 많은 불교 유물들이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탔다.[6]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중국 공산주의 정부 치하에서 이 사찰은 문화 대혁명 이후 1952년부터 1973년 사이에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1973년, 캄보디아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가 방문했는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시아누크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백마사를 방문하고 싶다고 밝혔다. 문화 대혁명으로 사찰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자금성 서쪽 자선궁과 베이징 향산 벽운사 나한당 조각상 등 2900개 유물이 비밀리에 옮겨져 복원되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유물들을 백마사에 영구 이전하였다.[28]
1992년, 태국과 중국 기부자 지원으로 태국 불전이 옛 사찰 서쪽에 건설되었다.[29]
인도와 중국 간 불교 문화 유대 강화를 위해 2005년 4월 11일 양해 각서(MOU)가 체결되었고, 2008년 산치 스투파를 복제한 인도 양식 불교 사원이 백마사 경내에 완공되었다. 인도 대통령 프라티바 파틸은 2010년 5월 27일 개관식을 가졌다.[32]
인도 총리 P.V. 나라심하 라오(1993년)와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2003년)가 이 사원을 방문한 것은 중국과 인도의 고대 문화 관계에서 이 사원이 갖는 상징적 중요성을 보여준다.[30]
2. 1. 창건 설화
후한 명제 11년(68년)에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 두 승려가 대월지(아프가니스탄) 경내에서 후한의 사신들을 만나 흰 말에 《사십이장경》과 불상을 싣고 낙양에 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백마사는 이 두 승려가 머물면서 불경을 번역했던 홍려관(鴻臚館) 자리라고 한다.[42]《낙양가람기》에 따르면, 북위 시대에는 후한 명제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었으며 낙양성 서쪽, 서양문 밖 3리 지점에 있었다. 당시 절에 있던 경함(経函)에 대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으나, 그 안에 든 경전이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가져온 《사십이장경》인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42]
백마사의 창건은 한나라의 "영평구법"과 관련이 깊다. 후한 명제는 꿈에서 머리에 흰 빛을 띤 금인이 서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대신 부의는 이를 서방의 부처라고 하였고, 명제는 채음, 진경, 왕준 등 십여 명을 천축(인도)에 보내 불법을 구하게 하였다. 이들은 대월지 지역에서 섭마등과 축법란을 만나 《사십이장경》을 포함한 불경과 불상을 얻었다. 두 승려는 이들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중원에 불법을 전파하기로 하고, 백마에 경서를 싣고 67년에 낙양에 도착했다. 명제는 이들을 위해 성 서쪽 옹문 밖에 천축풍 건물을 짓고, "홍려사"의 "사" 자를 따서 "백마사"라 이름 지었다. 이것이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이다.[42]
당나라 무측천은 자신이 총애하던 승려 설회의(薛懷義)를 백마사 주지로 삼았고, 685년에 백마사를 크게 증축하고 주변 국가 불교도들을 모아 조회하게 하였다. 이후 백마사는 여러 차례 중흥과 쇠락을 겪었고, 1555년과 1713년 두 차례 중수되었다.
안사의 난 때 위구르족에 의해 낙양이 약탈당하면서 백마사도 불탔다. 당시 백마사에는 난을 피해 숨어든 낙양의 처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백마사에 있던 요나라 시대의 18나한상과 패엽경(貝葉經) 등 많은 불교유물들이 파괴되거나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2. 2. 초기 역사
68년,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승려가 대월지(아프가니스탄)에서 후한의 사신 채음(蔡愔), 왕준 등을 만나 흰 말에 《사십이장경》과 불상을 싣고 수도 낙양에 왔다는 전설에 따라 백마사(白馬寺)라는 이름을 얻었다.[42] 백마사는 두 승려들이 머무르면서 가지고 온 불경을 번역했던 홍려관 자리라고 한다.《낙양가람기》권4에 따르면 북위 시대에는 후한의 명제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었으며 낙양성 서쪽, 서양문(西陽門) 밖으로 3리 되는 지점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42] 북위 시절에는 절에 안치된 경함(経函)에 대한 신앙이 퍼져 있었는데, 이 경함 안의 경전이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가져왔던 《사십이장경》인지는 명확하게 기록되지 않았다.
주를 선포한 당의 측천무후는 자신이 총애하던 승려 설회의를 백마사의 주지로 삼았고, 수공 원년(685년)에 백마사를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주변 국가들로부터 오는 불교도들을 모아 백마사에서 조회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의 중흥과 쇠락을 겪었고, 명 가정 34년(1555년)과 청 강희 52년(171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
안사의 난 당시 당 왕조의 요청을 받은 위구르족에 의해 낙양이 약탈당했을 때 백마사도 불탔다. 당시 백마사에는 난을 피해 숨어든 낙양의 처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백마사에 있던 요 시대에 만들어진 18나한상과, 2천년 전 인도의 고승이 가져왔다는 패엽경을 비롯한 많은 불교유물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8]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인도에서 온 두 승려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사찰에 머물렀다. 이 사찰은 "백마사"(白馬寺|Báimǎ sì|바이마쓰중국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白은 "흰색"을, 馬는 "말"을, 寺는 "사당, 사찰, 수도원"을 의미한다.[17][9]
특히 황제는 존경의 표시로 사찰 이름에 접미사 寺(쓰)를 사용할 것을 명령했다. 이 글자는 정부 부처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10] 이후 모든 사찰, 심지어 모스크에서도 이 글자를 이름에 사용하게 되었고, 정부 부처 이름에서는 제외되었다. 그 결과, 사찰의 이름은 때때로 당시의 진실에 가까운 번역인 "백마부"로 번역되기도 한다. "백마사"는 현대적이고 문자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민간 어원일 수 있는데, 다른 중심지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초기 사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 수도에서 불교를 널리 전파한 유명한 승려 지둔(314–366)은 동진 (317-420)의 수도인 건강 (이전의 건업)에 있는 백마사(Pai ma) 수도원에서 펑후이와 토론을 나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1] 또한 샹양에도 백마사가 있었는데, 도안과 그의 제자들이 365년경에 머물렀다.[12] 이름의 기원을 찾는 것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장라 ([Chang-la]: 북위 32.50°, 동경 103.40°) 근처의 민강 상류, 민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백마 계곡'에 살았던 '백마 강'과 '디'라는 민족이 있었고, 그곳에는 여전히 '백마 디'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13] 백마라는 이름이 문자 그대로의 흰 말들이 경전을 운반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초기 시대에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는 이들 민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증명할 수는 없다.
258년, 구차의 왕족 출신 승려 포옌은 이 사찰에서 중요한 《무량수경》을 포함한 6개의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기원후 266년에서 308년 사이에 활동한 유명한 인도-스키타이 불교 번역가 축법호는 266년에 뤄양에 와서 적어도 289년 봄부터 290년까지 백마사에 머물렀다.[26]
당나라의 유명한 승려 현장은 부처의 고향을 방문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도에 16년간 순례 여행(630~635년)을 했으며 이 사찰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현장은 귀국 후 죽을 때까지 백마사의 주지로 남아 있었다. 머무는 동안 그는 사찰에서의 가르침과 다른 종교 활동 외에도 인도에서 가져온 많은 불교 경전을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했다.[5]
2. 3. 당나라와 그 이후
주(周)를 선포한 당(唐)의 무측천(武則天)은 자신이 총애하던 승려 설회의(薛懷義)를 백마사의 주지로 삼았고, 수공 원년(685년)에 백마사를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주변 국가들로부터 오는 불교도들을 모아 백마사에서 조회하게 하였다.[5] 이후 몇 차례의 중흥과 쇠락을 겪었고, 명 가정(嘉靖) 34년(1555년)과 청 강희(康熙) 52년(171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다.안사의 난 당시 당 왕조의 요청을 받은 위구르족에 의해 낙양이 약탈당했을 때 백마사는 불탔다. 당시 백마사에는 난을 피해 숨어든 낙양의 처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인도-스키타이 불교 번역가 축법호()는 266년에 뤄양에 와서 적어도 289년 봄부터 290년까지 백마사에 머물렀다.[26]
당나라의 승려 현장은 부처의 고향을 방문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도에 16년간 순례 여행(630~635년)을 했으며, 이 사찰에서 순례를 시작했다. 현장은 귀국 후 죽을 때까지 백마사의 주지로 남아 있었다. 그는 머무는 동안 사찰에서의 가르침과 다른 종교 활동 외에도 인도에서 가져온 많은 불교 경전을 능숙하게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번역했다.[5]
1175년, 백마사 남동쪽에 있는 칠륜탑 옆 석비에 50년 전에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과 탑의 전신인 석가여래 사리 탑이 파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해 금나라(1115–1234) 관리가 그 직후에 석조 칠륜탑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중국 탑은 당나라의 사각형 기단 탑을 모방한 설계 스타일로 지어졌다.[5]
13세기부터 20세기 사이에 이 사찰은 명나라(1368–1644)와 청나라(1644–1911) 시대에 걸쳐 복원/개조되었다. 16세기에 상당한 복원이 이루어졌고 일부 건물은 이 시기에 지어졌지만, 그 이후 일부가 개조되었다.[27]
2. 4. 근현대
안사의 난 당시 당 왕조의 요청을 받은 위구르족에 의해 낙양이 약탈당했을 때 백마사도 불탔다. 당시 백마사에는 난을 피해 숨어든 낙양의 처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백마사에 있던 요(遼) 시대에 만들어진 18나한상과, 2천년 전 인도의 고승이 가져왔다는 패엽경(貝葉經)을 비롯한 많은 불교 유물들이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불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6]196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護単位)로 지정되었다.
중국 공산주의 정부 치하에서 이 사찰은 문화 대혁명 이후 1952년부터 1973년 사이에 여러 차례 개축되었다. 1973년,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왕자가 이 사찰을 방문했는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시아누크는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백마사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사찰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자금성 서쪽에 있는 자선궁과 베이징 향산의 벽운사 나한당에 있는 조각상 등 2900개의 유물이 비밀리에 사찰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이 유물들을 백마사에 영구 이전하였다.[28]
1992년, 태국과 중국의 기부자들의 지원을 받아 태국 불전이 옛 사찰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다.[29]
인도와 중국 간의 불교 문화 유대 강화를 위해 2005년 4월 11일에 양해 각서(MOU)가 체결되었고, 2008년에는 산치 스투파를 복제한 인도 양식의 불교 사원이 백마사 경내에 완공되었다. 인도 대통령 프라티바 파틸은 2010년 5월 27일에 이 사원의 개관식을 가졌다.[32]
이 사원이 중국과 인도의 고대 문화 관계에 갖는 상징적 중요성은 인도 총리 P.V. 나라심하 라오가 1993년에,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가 2003년에 이 사원을 방문했을 때 잘 드러났다.[30]
3. 건축
백마사는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중앙 축을 따라 여러 전각과 안뜰이 배치되어 있다. 사찰 부지는 200 무(13ha)에 달한다. 최근에 원래 문에서 150m 앞에 3개의 문이 있는 덮개 아치형 입구인 석조 패방(아치형 입구)이 새로 건설되었다. 사찰 정면에 있는 돌 말은 명나라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경전과 인도 승려를 중국으로 운반한 흰 말을 상징한다. 아치형 입구와 문 사이에는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고, 3개의 돌 다리가 놓여 있다.[6][29] 입구 양쪽에 있는 송나라(960–1279)의 녹석으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말 조각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6]
경내에는 참배객들이 향을 피우는 큰 소각로가 있으며, 본당과 여러 전각에는 신자들이 올린 과일 등의 공물과 다색 태피스트리, 켜진 양초 등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1]
본당 제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조각상이 있고, 명나라 가정제 때 설치된 1톤(혹은 2.5톤)이 넘는 큰 종이 있어 승려들이 기도할 때 사용한다. 당나라 시대에는 만 명의 승려가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1][38] 종에는 "종소리가 부처님의 사찰에 울려 퍼져 지옥의 귀신들이 두려움에 떨게 한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39]
승려들의 생활 공간인 '기운탑'(또는 제운탑)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으며, 정원과 본당 왼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갈 수 있다. 12세기에 지어진 13층, 25m 높이의 정육면체 벽돌탑으로, 이후 개조되었다.[1][3][6][29] 당나라 관리였던 적인걸의 무덤도 경내 동쪽 끝에 있다.
3. 1. 주요 전각
사찰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입구에서부터 중앙 축을 따라 여러 전각과 안뜰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6] 사찰 부지는 200 무(13 헥타르)의 면적을 차지한다. 최근에 원래 문에서 150m 앞에 3개의 문이 있는 덮개 아치형 입구인 석조 패방(아치형 입구)이 새로 건설되었다. 사찰 정면에 있는 돌 말은 명나라 건축 양식으로, 경전과 인도 승려를 중국으로 운반한 흰 말을 나타낸다. 아치형 입구와 문 사이에는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고, 3개의 돌 다리가 놓여 있다.[6][29] 입구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말은 송나라(960–1279)의 녹석으로 만들어졌다.[6]오늘날 사찰에 들어가면 방문객과 순례자를 전각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영어 및 중국어)과 이정표가 보인다. 표지판에는 각 전각의 조각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표지판의 비문에 따라 전각은 영접전, 육조전, 옥불전, 천왕전, 대웅전, 변화경전(고대 경전 보관소)을 포함한다.
본당 뒤에는 '청량대'라고 알려진 '시원하고 맑은 누각'이 있는데, 이곳은 원래 경전이 번역된 곳이다.[1][6] 이 누각은 오래된 소나무와 대나무 숲 속에 있으며 서로 연결된 전각이 있다. 누각의 네 면은 녹색 벽돌로 쌓여 있다. 누각의 중앙 건물은 비로자나전으로, 원래는 한나라 시대에 건설되었다. 현재 건물은 명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중 처마가 있는 ''겹처마'' 양식의 지붕으로 지어졌다. 이 전각에는 주로 비로자나불과 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5,050개의 향 재로 만든 나무 조각 부처상이 전각 양쪽에 안치되어 있다. 누각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저명한 승려, 섭마등과 축법란의 조각상이 있는 홀이 있는 곤루전이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죽은 후 사찰 문 안에 묻혔다. 그들의 무덤 앞에 있는 종루와 고루는 한때 뤄양 시의 두드러진 광경이었다.[6]
안뜰에는 참배객이 향을 피워 자극적인 냄새를 만드는 큰 소각기가 보관되어 있다. 본당과 이미지를 숭배하는 다른 전각에는 제단이 신자들이 올린 과일 및 기타 공물로 가득 차 있다. 다색 태피스트리가 전각 천장에 걸려 있고, 조명이 켜진 양초가 대야에 떠 있어 신성한 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1]
가장 작은 전각은 "영접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광호 시대 9년에 동지 시대 초에 불탄 원래 전각을 대체하기 위해 지어진 비교적 새로운 건물이다. 이 전각에는 세 개의 서방 극락(인도) 성인의 신격화된 조각상이 있다. 창시자인 아미타불이 중앙에 있고, 왼편에는 관세음보살이, 오른편에는 대세지보살이 있다.[33]
'육조전'에는 선종 창시자들의 조각상이 숭배되고 있다. 창시자의 이름은 계승 순서대로 표시되어 있다. 고대 인도에서 온 첫 번째 창시자인 달마는 불교 철학을 설파한 28대 조사였으며, 두 번째는 혜가, 세 번째 창시자는 승찬, 네 번째는 도신, 다섯 번째 창시자는 홍인, 여섯 번째는 혜능이었다. 혜능 이후, 오가칠종이 설립되었다.[34]
"옥불전"에는 석가모니불 형상이 있다. 1.6m 높이의 옥으로 만들어진 이 형상은 1988년 미얀마에 정착한 중국인이 기증했다. 이 우아하게 조각되고 소중한 조각상에는 이마에 보석이 박혀 있다. 1992년 이 사찰로 옮겨지기 전에는 비로전에 보관되어 있었다.[35]
사찰 단지에서 첫 번째 큰 전각은 "천왕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에서 웃는 부처로 알려진 미륵불 조각상이 전각 정면에 있는 주요 신이다. 이 조각상은 동서 양쪽에 4명의 천왕이 있으며, 각 천왕은 우주의 4분의 1을 나타낸다. 동쪽은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국가의 수호자)이 다스리고, 서쪽은 용을 손에 들고 있는 광목(예리한 시력자)이 관할하며, 남쪽은 우산을 든 증장(성장 보호자)이, 북쪽은 탑을 든 다문(지식 보존자)이 나타낸다. 또한 미륵불 조각상 뒤에는 위태천(고위 천계 장군이자 불법의 수호자) 조각상이 있다.[36]
1995년에 지어진 변화경전은 고대 경전 보관소로, ''용장경 대종경'', ''대증종경'', ''티베트 경'' 등 10가지 이상의 불교 경전이 있다. 이 보관소 중앙에는 고대 중국의 부처상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부처상 제작은 동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각상은 20세기 초에 분실되었으나, 나중에 태국에서 발견되어 97cm 높이의 청동상 2개로 복제되어 금박을 입혔다. 이 중 하나는 도서관에 안치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태국으로 보내졌다.[37]
대웅전에는 세 명의 주요 부처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 이미지는 석가모니불이며, 왼편에는 약사여래, 오른편에는 아미타불이 있다. 이들은 차례로 위태천과 위리라는 두 명의 천계 장군에 의해 호위된다. 십팔나한 조각상이 전각 측면에 장식되어 있다. 모든 조각상은 원나라 시대에 갈포로 만들어졌다. 양쪽 벽에는 만 개의 불교도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가란 조각상이 뒷문 북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다.[25][37]
본당 제단에는 세 개의 조각상이 있으며, 중앙 조각상은 석가모니불이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조각상이 있다. 제단 근처에는 1톤이 넘는(2.5톤이라는 수치도 언급됨) 매우 큰 종이 있으며, 명나라 가정제 통치 시대에 설치되어 승려들이 기도를 외울 때 맞춰 쳐진다. 당나라 시대에는 만 명의 승려 공동체가 이곳에 거주했다.[1][38] 종의 비문에는 "종소리가 부처님의 사찰에 울려 퍼져 지옥의 귀신들이 두려움에 떨게 한다."라고 적혀 있다.[39]
승려들의 생활 공간은 "기운탑" 또는 기운탑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탑에 있으며, 출입이 제한된다. 이 탑은 정돈된 정원과 본당 왼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접근할 수 있다. 이 탑은 금나라(1115–1234) 대정 연간 15년인 12세기에 지어졌다. 13층, 25m 높이의 정육면체 모양의 벽돌탑으로, 이후 시대에 개조되었다.[1][3][6][29]
3. 2. 기타 시설
사찰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입구에서부터 중앙 축을 따라 여러 전각과 안뜰이 차례로 이어져 있다.[6] 사찰 부지는 200 무(13ha)의 면적을 차지한다. 최근에 새로 건설된 석조 패방(아치형 입구)은 원래 문에서 150m 앞에 있다. 사찰 정면에 있는 돌 말은 명나라 건축 양식으로, 경전과 인도 승려를 중국으로 운반한 흰 말을 나타낸다. 아치형 입구와 문 사이에는 분수가 있는 연못이 있으며, 3개의 돌 다리가 놓여 있다.[6][29] 입구에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말은 송나라 시대(960–1279)의 녹석으로 만들어졌다.[6]오늘날 사찰에 들어가면 방문객과 순례자를 전각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영어 및 중국어)과 이정표가 보인다. 표지판에는 각 전각의 조각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다. 표지판에 따르면 전각은 '영접전', '육조전', '옥불전', '천왕전', 대웅전, 변화경전(고대 경전 보관소) 등이 있다.
'청량대'라고 알려진 '시원하고 맑은 누각'은 본당 뒤에 있으며, 원래 경전이 번역된 곳이다.[1][6] 이 누각은 오래된 소나무와 대나무 숲 속에 있으며 서로 연결된 전각이 있다. 누각의 네 면은 녹색 벽돌로 쌓여 있다. 누각의 중앙 건물은 비로자나전으로, 원래는 한나라 시대에 건설되었다. 현재 건물은 명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중 처마가 있는 ''겹처마'' 양식의 지붕으로 지어졌다. 이 전각에는 주로 비로자나불과 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다. 또한 5,050개의 향 재로 만든 나무 조각 부처상이 전각 양쪽에 안치되어 있다. 누각에는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저명한 승려, 섭마등과 축법란의 조각상이 있는 홀이 있는 곤루전이 있다. 그들은 이곳에서 죽은 후 사찰 문 안에 묻혔다. 그들의 무덤 앞에 있는 종루와 고루는 한때 뤄양 시의 두드러진 광경이었다.[6]


안뜰에는 참배객이 향을 피워 자극적인 냄새를 만드는 큰 소각기가 보관되어 있다. 본당과 이미지를 숭배하는 다른 전각에서는 제단이 신자들이 올린 과일 및 기타 공물로 가득 차 있다. 다색 태피스트리가 전각 천장에 걸려 있고, 조명이 켜진 양초가 대야에 떠 있어 신성한 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1]
가장 작은 전각은 "영접전"이다. 이 건물은 광호 시대 9년에 동지 시대 초에 불탄 원래 전각을 대체하기 위해 지어진 비교적 새로운 건물이다. 이 전각에는 세 개의 서방 극락(인도) 성인의 신격화된 조각상이 있다. 창시자인 아미타불이 중앙에 있고, 왼편에는 관세음보살, 오른편에는 대세지보살이 있다.[33]
'육조전'에 조각상이 숭배되는 사찰 창시자는 선종에 속했다. 창시자의 이름은 계승 순서대로 표시되어 있다. 고대 인도에서 온 첫 번째 창시자인 달마는 불교 철학을 설파한 28대 조사였으며, 두 번째는 혜가, 세 번째 창시자는 승찬, 네 번째는 도신, 다섯 번째 창시자는 홍인, 여섯 번째는 혜능이었다. 혜능 이후, 오가칠종이 설립되었다.[34]
"옥불전"에는 석가모니불의 형상이 서 있다. 1.6m 높이의 옥으로 만들어진 이 형상은 1988년 미얀마에 정착한 중국인이 기증했다. 이 우아하게 조각되고 소중한 조각상에는 이마에 보석이 박혀 있다. 1992년 이 사찰로 옮겨지기 전에는 비로전에 보관되어 있었다.[35]
사찰 단지에서 첫 번째 큰 전각은 "천왕전"이며, 중국에서 웃는 부처로 알려진 미륵불의 조각상이 전각 정면에 있는 주요 신이다. 이 조각상은 동서 양쪽에 4명의 천왕이 있으며, 각 천왕은 우주의 4분의 1을 나타낸다. 동쪽은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국가의 수호자)이 다스리고, 서쪽은 용을 손에 들고 있는 광목(예리한 시력자)이 관할하며, 남쪽은 우산을 든 증장(성장 보호자)이, 북쪽은 탑을 든 다문(지식 보존자)이 나타낸다. 미륵불 조각상 뒤에는 위태천(고위 천계 장군이자 불법의 수호자)의 조각상이 있다.[36]
1995년에 지어진 변화경전은 고대 경전 보관소로, ''용장경 대종경'', ''대증종경'', ''티베트 경'' 등 10가지 이상의 불교 경전이 있다. 이 보관소 중앙에는 고대 중국의 부처상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 부처상 제작은 동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각상은 20세기 초에 분실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태국에서 발견되어 높이 97cm의 청동상 2개로 복제되어 금박을 입혔다. 이 중 하나는 도서관에 안치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태국으로 보내졌다.[37]

대웅전에는 세 명의 주요 부처 조각상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 이미지는 석가모니불이다. 이 조각상은 왼편에 약사여래, 오른편에 아미타불이 있으며, 이들은 차례로 위태천과 위리라는 두 명의 천계 장군에 의해 호위된다. 십팔나한 조각상이 전각 측면에 장식되어 있다. 모든 조각상은 원나라 시대에 갈포로 만들어졌다. 양쪽 벽에는 만 개의 불교도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가란 조각상이 뒷문 북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다.[25][37]
본당 제단에는 세 개의 조각상이 있으며, 중앙 조각상은 석가모니불이고, 조각상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제단 근처에는 1톤이 넘는(2.5톤이라는 수치도 언급됨) 매우 큰 종이 있으며, 명나라 가정제 통치 시대에 설치되어 승려들이 기도를 외울 때 맞춰 쳐진다. 당나라 시대에는 만 명의 승려 공동체가 이곳에 거주했다.[1][38] 종의 비문에는 "종소리가 부처님의 사찰에 울려 퍼져 지옥의 귀신들이 두려움에 떨게 한다."[39]
승려들의 생활 공간은 "기운탑" 또는 기운탑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탑에 있으며, 출입이 제한된다. 이 탑은 정돈된 정원과 본당 왼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접근할 수 있다. 이 탑은 금나라(1115–1234)의 대정 연간 15년인 12세기에 지어졌다. 이 탑은 13층, 25m 높이의 정육면체 모양의 벽돌탑이다. 이후 시대에 개조되었다.[1][3][6][29] 유명한 당나라 관료 적인걸의 무덤도 단지 동쪽 끝에 위치해 있다.
4. 문화적 의의
백마사는 중국 최초의 불교 사찰로, 한나라 명제(明帝)가 불교 경전을 구하기 위해 사신을 서역에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신들은 중앙 인도에서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승려를 만나 불경과 불상을 흰 말에 싣고 뤄양으로 돌아왔다. 명제는 이를 기뻐하며 사찰을 건립하고 백마사(白馬寺)라 이름 지었다.[17]

두 승려는 백마사에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특히, 가섭마등이 번역한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은 중국 최초의 불교 경전으로, 중국 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14][17] 백마사는 이후 중국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한국, 일본, 베트남 등지로 불교가 전파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백마사의 건립과 관련된 여러 전설들은 중국에서 불교의 수용과 전파 과정을 보여준다. 명제의 꿈, 흰 말, 불경 번역 등의 이야기는 불교가 중국 문화에 융합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백마사는 인도와 중국의 문화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3년과 2003년에는 인도 총리가 백마사를 방문했고, 2005년에는 양국 간 문화 교류 협약이 체결되었다.[30] 그 결과, 2008년 백마사 경내에 인도 양식의 불교 사원이 건립되었으며, 2010년 인도 대통령이 개관식에 참석했다.[32]
6세기에 제작된 미륵불 석상은 도난당해 미국으로 유출되었으나, 현재는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40]
4. 1. 기타
모란 축제(牡丹花會, mudan huahui중국어)는 매년 4월 10일부터 25일까지 뤄양에서 열리는 중요한 꽃 축제로, 많은 사람들을 도시와 백마사로 불러 모은다.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 측천무후가 모란이 겨울에 피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시안에서 뤄양으로 추방하라고 명령했고, 이 추방이 뤄양에서 모란 축제로 기념되고 있다고 한다.[4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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