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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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성 선씨는 중국 주나라 선왕의 후손, 주공의 후손, 송나라 선공의 후손에서 기원하며, 보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조선 시대에는 선윤지를 시조로 삼았으며, 선형, 선거이, 선세강, 선약해 등 무신과 문신을 배출했다. 보성 선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7명, 무과 29명의 급제자를 배출했고, 2000년에는 약 3만 5천 명, 현재는 약 4만 명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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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성 선씨 - 선동열
선동열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야구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MVP를 수상했고, KBO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KBO 리그 통산 평균자책점 1.20, WHIP 0.80의 압도적인 기록을 세웠으며, 은퇴 후에는 프로 야구팀 감독과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위원 겸 KBO 기술위원이다. - 보성 선씨 - 선율 (가수)
선율은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에 재학 중인 대한민국 가수로, 여러 예능 프로그램 출연 및 뮤지컬, 음반 발표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과거 그룹 업텐션 멤버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 보성 선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보성 선씨 |
| 한자 표기 | 寶城 宣氏 |
| 로마자 표기 | Boseong Seon Ssi |
| 유형 | 씨족 |
| 국가 | 한국 |
| 지역 | 보성군 |
| 시조 | 선윤지 |
| 관련 인물 | 선동열 |
| 웹사이트 | 보성 선씨 대종중 |
| 인구 통계 | |
| 2000년 인구 | 34,842명 |
| 순위 | 176위 |
2. 기원
선씨(宣氏)의 득성(得姓) 시조는 중국 주(周) 문왕(文王)의 아들인 희정(姬靜, 묘호 선왕(宣王)), 주(周) 문왕(文王)의 넷째 아들 희단(姬旦, 주공(周公))의 후손인 숙손교여(叔孫僑如, 시호 선백(宣伯)), 송나라 자력(子力, 시호 선공(宣公))이다. 이 세 명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시호인 ‘선(宣)’으로 성씨를 삼았으니, 기원전 800~600년대의 일이다. 이들 희정-숙손교여-자력은 모두 황제의 직계 후손들이다. 한반도 보성군을 본관으로 한 선씨(宣氏)들이 이 세 명 중 누구의 후손인지는 공식적인 사료가 없어 밝혀내지 못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선(宣)씨는 전라도 보성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조선 시대에 한반도로 이주를 시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시대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광주 선씨'''(光州 宣氏)와 '''밀양 선씨'''(密陽 宣氏) 등이 나타나지만, 모두 보성 선씨 각 파의 지역적 호칭이며 동원(同源)이다.
황족이던 선씨(宣氏)들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BC 221년)에서 한반도로 이주를 시작하여 복호촌(伏虎寸=伏忽,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6] 이후 여러 집안들이 각각 세를 이루어 후손들을 이루다가, 조선 중기 양반 가문들이 앞다투어 족보를 편찬하던 17세기에 전국의 선씨들로부터 가승보(家乘譜 - 각각의 집안에서 이어져 기록해온 부모 관계도)를 모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고려시대 이전의 기록에 등장하는 선씨들의 후손들은 찾지 못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 관직을 지낸 최초의 인물(선형의 고조부, 5대조 선윤지)을 시조로 삼고, 선윤지가 낙향한 전라남도 보성을 본향으로 삼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고조부까지의 기록을 정부에 제출해야 했기에 선형의 고조부 기록이 선씨 일문의 가승 기록 중 가장 오래되고 정통성 있는 기록으로 합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성 선씨는 1681년(신유년)에 관산 봉림사에서 최초로 족보를 만들기 위해 모여 수보를 시작하였으나, 초고(신유초고)만 남기고 완성하지 못하였다.[1] 1738년(무오년)에 보성의 개흥사에서 다시 수보를 시작하여, 신유초고와 옛 문적을 참고하여 선윤지를 시조로 삼고 그 후손들의 파를 순서대로 나열한 후, 세계가 확인되지 않은 선씨를 기록하였다.[1]
보성 선씨 가문은 조선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무과 급제자가 29명으로, 이는 보성 선씨 가문이 무(武)를 중시하는 가풍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3. 역사
보성 선씨 시조 '''선윤지'''(宣允祉)는 고려 우왕 때 황명(皇明)으로 문연각 학사 자격으로 고려에 와서 전라도 관찰사 겸 안렴사(按廉使)로 전라도 해안에 넘나드는 왜구를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보성에 정착하였다.[7] 이에 도민들이 한식동(寒食洞)에 생사우(生祠宇)를 세워 선생을 추앙하였고, 1831년(순조 31년) 오충사(五忠祠)로 사액되어 후손 선형(炯), 선거이(居怡), 선세강(世綱), 선약해(若海)와 함께 오충사에 배향(配享)되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고려 충신 '두문동 72현'의 1명으로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 내 '고려통일대전'에 위패를 모시고 있다. 1862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관(知義禁府事五衛都摠管)에 증직되었다.
'''선용신'''(宣用臣)을 시조로 하는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과 도촌면에 사는 선씨들은 선용신이 고려 고종 때의 진사(進士)로 선중의 호적(보성군 호구정장)으로 신원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한다. 조성과 도촌에 거주하는 선씨는 전체 선씨들의 5% 미만이다.
4. 족보
1741년(신유년)에 신유초고 수정으로 기사보(1749년)의 초보를 완성하였고,[1] 1748년(무진년)에 안락의 징광사에서 최종 수정을 거쳐,[1] 1749년(기사년)에 보성 선씨 최초의 족보인 기사보를 완성하였다.[1]
이때 세계가 확인되지 않아 별도로 부록되어 있던 선용신을 시조로 하는 조성과 도촌파들의 기록은 문적이 불분명하고, 역년이 위착되어 믿음이 가는 문서로 증명되지 않았고, 시조 선윤지와는 세계를 연계할 수 없어 다른 선씨로 판단하여 조도계열을 배제하고 선윤지를 시조로 한 보성 선씨 최초 족보 기사보를 만들었다.[1] 그 후 조성과 도촌에 사는 조도계열은 선용신을 중시조로 1757년(정축년)에 별보를 하였다.[1]족보명 간행년도 비고 신유초고 1681년 초고만 남기고 완성되지 못함. 초고에서 선복주는 오선개조안렴공(吾宣皆祖按廉公)이라는 시를 남겨 안렴공(선윤지)가 시조임을 밝힘. 기사보 1749년 보성 선씨 최초로 완성된 족보 을사보 1785년 기사보를 수정, 보완하여 발간(문송영제 수록, 문송영제란 보성선씨간 시조논쟁에 대한 1768년의 송사결과 판결문으로 보성선씨 시조가 선윤지임을 증명함) 정미보 1847년 신해보 1851년 을묘보 1855년 을해보 1875년 계사보 1893년 정사보 1917년 경오보(참의공파보) 1930년 임오보(옥암공파보) 1942년 정해보(선전공파보) 1947년 을미보 1955년 무오보 1978년 선윤지 후손과 선원지 후손이 합보하였으나, 선원지 후손이 다시 분파하여 별보를 함
5. 인물
이름 생몰년 주요 경력 및 활동 선형 1434년 ∼ 1479년 원종공신 2등, 정충적개공신 3등, 좌리공신 4등 책봉, 우의정 추증 선거이 1545년 ∼ 1598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전우, 행주대첩 승리,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 병조판서 추증 선극례 1556년 ~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울산성 전투 참전, 신령면 전투에서 전사, 선무원종공신 1등 책봉 선세강 1576년 ∼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에서 전사, 병조판서 추증 선약해 1579년 ∼ 1643년 청나라 특사 파견, 병조판서 추증 선여경 1551년 ∼ ? 임진왜란 당시 어가 호종 중 순절, 선무원종공신 책봉
이 외에도 보성 선씨 가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8]
; 문과
; 무과
; 생원시
; 진사시
; 음관
; 음양과
2015년 대학수학능력시험에는 선채원, 2023년에는 선재원이 응시했으며, 2027년에는 선지우(宣知佑)가 응시할 예정이다.
5. 1. 선형
宣炯|선형중국어(1434년 ~ 1479년)은 조선 세조~성종 대의 무신이다. 선윤지의 고손자(5세 손자)이다.
1451년(문종 1년) 18세에 증광시 무과에 급제했다. 1455년(세조 원년) 경흥부사(종3품), 판사(종3품)로서 원종공신(2등)에 책봉되었다. 1456년 경상좌도수군처치사(정3품), 안주목사(정3품), 한성부윤(종2품), 판종성부사를 역임했다.
1459년 상호군(정3품)으로 한명회의 근접경호를 책임지면서 그의 측근이 되었다. 1460년 회령부사 겸 병마절제사(종2품), 1463년 인수부윤, 1464년 중추원부사,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465년(세조 11년) 경상도제언순찰사로 경주 북천(北川)에 새로운 수로를 건설했다. 1466년 의주목사 겸 절제사가 되었다.
1467년 황해도관찰사(종2품)를 거쳐, 같은 해 형조참판(종2품)으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충적개공신(3등)에 책봉되고 황해도병마수군절도사(종2품)와 자헌대부(정2품) 유성군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년) 경기도관찰사(종2품)가 되었고, 1471년 좌리공신(4등)에 책봉되었다. 충청도관찰사, 영안북도절도사를 거쳐 1472년 정헌대부(정2품) 유성군으로 품계가 올랐다. 1477년 지중추부사(정2품)가 되었다.
1479년 별세하여 국가 주관 장례로 장례를 치렀다. 사후 좌찬성(종1품)으로 추증되었고, 평양(平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유성군으로 봉해질 때 받은 봉토인 서울대 교수아파트 뒷산에 안장되었다.
정여창이 선평양공 행장을 지었고, 신숙주의 ‘보한재집’에도 선형 관련 시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정2품 상계 정헌대부에 올랐고, 공신 칭호를 3번 받으며 왕자와 같은 대우를 받는 유성군에 봉해졌다. 사후 좌찬성(종1품)을 거쳐 우의정(정1품)으로 추증되었다.
세조와 성종의 신임 속에 24년간 정3품 이상 당상관을 지냈다. 세조의 증손녀와 선형의 증손자 선헌 간의 혼인으로 보아 왕실과의 관계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 고양시 강매동 영모재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전남 보성군 오충사, 경기도 고양시 오충사, 전남 장흥군 포충사에서도 춘추로 제사를 지낸다.[6][7]
5. 2. 선거이
'''선거이'''(宣居怡, 1545년 ∼ 1598년)는 보성 선씨 시조 '''선윤지'''(宣允祉)의 8세손으로, 조선 선조 대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함께 한산도 대첩 등 주요 해전에서 활약하고, 행주대첩에서 권율과 함께 대승을 거두는 등 큰 공을 세웠다.[7]
1545년(명종 원년) 7월 25일에 출생하여, 1569년(선조 2년) 공신(유성군 선형)의 후손 자격으로 겸사복(兼司僕, 국왕 직속 경호대)으로 임명되었고, 1579년(선조 12년) 식년시(매 3년마다 보는 정식 시험) 무과에 급제하였다.[8]
1587년, 동갑내기 친구인 조산만호(造山萬戶, 종4품) 이순신(李舜臣)이 녹둔도 전투에서 패배하여 감옥에 가게 되었을 때, 선거이는 이순신에게 술을 권하며 위로했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정2품, 국방부장관) 정언신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이후 이순신은 석방되었고, 두 사람은 함께 시전부락 전투에서 여진족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1590년 전라우도수군절도사(정3품, 전라도 해남 우측 해군 전단장)가 되었을 때 이순신은 정읍현감(종6품)이었다. 이순신은 선거이의 당상관(최고위 관리)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전라우수영을 방문했고, 선거이는 이순신을 각별하게 대접했다. 1591년 진도군수(종4품)를 겸직했다.
1592년 3월 17일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 당시 군인으로 최고위 직책 전라도 군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임진왜란 발발로 인해 임명장을 받지 못했다. 이 임명장은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거이는 후임 이억기에게 전라우수영을 넘겨주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취임한 친구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진도군수 자격으로 한산도 대첩에 참전하여 승리했다.
1592년 11월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 전라도 군단장)로 다시 임명되어 오산 독산성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왜군의 총탄에 부상을 당했다. 1593년 2월 부원수 겸 전라도병마절도사(종2품)로서 도원수 겸 전라도관찰사(종2품, 전라도 도지사) 권율(權慄)과 함께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뒀다.
임진왜란 당시 문신 우대 정책으로 인해, 선거이는 무관으로서 부원수(육군 참모총장)였지만, 모든 전투의 작전과 지휘는 도원수(합참의장)였던 문관 권율의 몫이었다. 행주대첩 당시 선거이는 전체 병력의 80%를 지휘했음에도, 권율의 아버지인 영의정(국무총리) 권철과 권율의 사위인 병조판서(국방부장관) 이항복의 영향으로 선무공신 1등에 오르지 못했다.
1593년 6월, 선거이는 진주성을 사수하라는 명령에 반대하며 병력을 후방으로 보냈다. 그는 조선군의 병력이 적고 왜군의 병력이 많아 진주성이 포위될 경우 조선군 전체가 섬멸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권율을 설득했다. 권율의 승인을 받고 병력을 후퇴시켰으나, ‘명령 불복종’으로 인해 선무공신 1등(이순신, 권율, 원균)에 오르지 못했다.
1594년 9월 충청도 병마절도사(종2품, 충청도 군단장)로 부임했다가 1594년 11월 충청도 수군절도사(정3품, 충청도 해군 전단장)로 좌천됐다. 선거이와 이순신은 서로를 높이 평가했으며,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선거이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남겼다.
1595년 9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심해져 부임하지 못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픈 몸을 이끌고 부원수 겸 7도 병마절도사(명예직) 자격으로 울산성 전투에 참전하여 왜적 70여 명을 사살하고 1598년 1월 적의 총탄에 54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시신은 찾을 수 없었고,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 봉능리에서 초혼장(招魂葬)으로 장례를 치렀다.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는 이순신, 육지에서는 선거이라 불렸으며, 그 공로가 이순신과 비슷하다는 기록이 있다. 전쟁 후 진주성 항명을 이유로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었고, 1801년에야 조정으로부터 충신정려를 하사받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충신정려문(忠臣旌閭門)’이 세워졌으며, 1862년 11월 병조판서(정2품, 국방부장관)로 추증되었다.
행주대첩 기념 제사를 매년 주관하는 고양시 행주서원에서 권율의 부원수 자격으로 제향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162 보병여단’을 ‘선거이 부대’라고 부르고 있다. 보성군 오충사(五忠祠), 고양시 오충사(五忠祠), 장흥군 포충사(褒忠祠)에서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5. 3. 선극례
선윤지의 9세손이다. 명종 11년(1556년)에 출생하여 선조 9년(1576년) 무과에 급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호군(종3품)으로 임명되었다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정3품)를 역임했다.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울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신령면 전투에서 42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선조 38년(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경남 울주군 작괘천(울산 12경 작천정) 인근의 "선무원종공신비"와 기념 바위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며, 경북 영천시 팔공산 인근에 묘비를 세웠다. 울산성 전투를 기념하는 울산 충의사(忠義詞)에 제향되었다.
경상도에 거주하던 “선극례” 장군의 후손들과 전라도 보성에 있던 "선씨 대종중“간의 교류가 없었던 관계로, “선거이” 장군 다음으로 공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선씨 5충신"에 합류하지 못해 추증을 받지 못했다.[8]
5. 4. 선세강
선윤지의 9세손이며, 사헌부 장령(정4품) 선세휘의 형이다. 선조 10년(1576년)에 태어나 선조 36년(1603년) 무과에 급제했다. 광해군 10년(1618년) 평안도 벽단첨사(碧團僉使, 종3품)를 거쳐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 건축을 지휘했다. 홍주영장(정3품, 홍주지역 부대장)과 안동영장을 역임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과 함께 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출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군 쌍령(雙嶺)으로 출전했다. 경상좌병사 허완은 산골짜기에 진을 칠 것을 명령했지만, 선세강은 "우리는 숫자가 적은 보병이고, 적들은 숫자도 많은 기병이니 산 위에 진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급자인 허완의 거듭된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산골짜기에 진을 쳤고, 한밤중에 기습한 청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다 칼을 손에 잡은 채 전사했다.[6]
선세강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쌍령 전투는 한민족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3대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이 전투의 패전으로 모든 군사력을 잃은 조선은 단 27일을 더 버티고 청나라에 항복(삼전도의 굴욕)하게 된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는 선세강 장군에게 병조참판(종2품, 국방부 차관)을 추증하고, 명정(운구 앞에 서는 깃발)을 하사하며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군까지 시신을 옮기라고 명했다. 1862년 11월 병조판서(정2품, 국방부 장관)로 한 번 더 추증되었다. 1979년 9월 전사했던 장소에 대한민국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비석을 세웠다.[6]
> “길손이여 발을 멈추소서, 이곳은 선세강 장군이 전사한 곳. 병자호란 때 겨레를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경기도 광주시 정충묘에서 매년 광주시 주관으로 제례를 한다. 전라남도 보성군 오충사(五忠祠), 경기도 고양시 오충사(五忠祠), 전남 장흥군 포충사(褒忠祠)에서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6]
5. 5. 선약해
宣若海중국어, 1579년 ~ 1643년)는 선윤지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대구도호부사(종3품) 의문(義問)이다. 선조 12년(1579년) 출생하여 선조 38년(1605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1625년 울진 군수를 역임하고 인조 8년(1630년) 비변사 낭청(종6품)으로 있을 때, 당시 적국이던 후금(청나라)에 다녀올 담력을 가진 위문사(慰問使, 외교관)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에 비변사(조선시대 국방에 관한 최고 의결기구)에서는 선약해를 문무의 재주를 겸비했다고 추천했고, 국서를 지참하고 국왕의 특사 자격으로 청나라 심양에 다녀왔다. 숭명배청(崇明排淸, 명을 숭상하고 청을 배척함)이라는 조선 국왕의 지시에 따라 특사의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고, 청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은 공로로 인해 귀국 후 품계가 오르고, 금편(金鞭 : 금으로 도금한 말의 채찍), 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갑옷), 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다.[6] 그 뒤 평산부사(종3품), 정평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정3품)를 지냈다.
선약해가 기록한 심양사행일기는 1630년 4월 3일부터 5월 23일까지의 기록으로, 당시 만주와 하북의 정세 및 청나라(당시 후금)인들의 관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역사적 자료이다.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 일행이 작성한 심양일기는 고단했던 인질 생활과 심양의 풍경, 생활상 등을 적은 것이지만, 선약해의 심양사행일기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당시 후금)를 배척하던 당시 조선의 외교정책을 무관(군인)의 비판적 시각으로 기록했고, 미래의 적군이 될지도 모르는 후금(청나라)의 각종 군사적 정보를 심층적으로 기록한, 당시 외교·국방 정책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서이다. 당시 조선이 앞으로 취할 수 있는 정책 행보가 선약해가 기록한 심양사행일기에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자인 왕이 애써 외면했기에(혹은 인식하지 못했기에) 결국 병자호란이 발발했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었다.
1862년에 병조참판(종2품)에 추증되었고, 1873년에 병조판서(정2품)로 한 번 더 추증되었다.[6] 전라도 보성의 오충사(五忠祠), 경기도 고양시 오충사(五忠祠), 전남 장흥군 포충사(褒忠祠)에서도 봄·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5. 6. 선여경
宣餘慶중국어, 1551년 ~ ?)는 조도계열 선용신의 후손이다. 자는 경숙(敬叔)·응원(應遠), 호는 도암(道庵)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주부(主簿) 등의 관직을 수행하다가, 1591년(선조 24) 부친상을 당하여 움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묘를 하던 중이었으나 상복을 먹물로 염색하여 입고서 두 아들과 종형제들에게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을 말하였다. 이들도 “사나이가 죽어야 할 때가 이때이다.” 하면서 함께 어가를 호종(扈從)하였다. 평양성 전투를 전후하여 공을 세우고 이들은 모두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고, 이들 6충신을 기리기 위하여 전라남도 보성군 정흥리 호음동에 ‘선씨육충유장비(宣氏六忠遺庄碑)’를 세웠다. 사후 숭모재(崇慕齋)에 제향(祭享) 되었다.[8]
그러나 별시방목(과거 급제자 목록)에 기록된 선여경은 “자시하(慈侍下,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모시는 상태)"로 기재되어 있어, 무과에 급제한 선여경이 직책을 받지 못하던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직책없이 후퇴하는 임금을 경호하다가 순절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공신록권에도 당시 직책이 정(正)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더해서 판단한다.
6. 집성촌
7. 과거 급제자
보성 선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7명, 무과 급제자 29명을 배출하였다.[8]
| 이름 |
|---|
| 선문주(宣聞周) |
| 선세휘(宣世徽) |
| 선순보(宣淳輔) |
| 선약봉(宣若奉) |
| 선준채(宣俊采) |
| 선진규(宣鎭奎) |
| 선헌(宣憲) |
| 이름 |
|---|
| 선거이(宣居怡) |
| 선거중(宣居重) |
| 선경협(宣景恊) |
| 선귀인(宣貴仁) |
| 선기주(宣起周) |
| 선극례(宣克禮) |
| 선덕민(宣德敏) |
| 선덕용(宣德容) |
| 선문환(宣文煥) |
| 선봉령(宣鳳齡) |
| 선세강(宣世綱) |
| 선순웅(宣舜雄) |
| 선순흠(宣舜欽) |
| 선시진(宣時振) |
| 선약해(宣若海) |
| 선여경(宣餘慶) |
| 선영길(宣永吉) |
| 선응길(宣應吉) |
| 선응진(宣應軫) |
| 선의남(宣義男) |
| 선익도(宣翊道) |
| 선익성(宣翊成) |
| 선익헌(宣翊憲) |
| 선중륜(宣重倫) |
| 선팽(宣彭) |
| 선필영(宣必英) |
| 선형(宣炯) |
| 선호적(宣豪績) |
| 이름 |
|---|
| 선세휘(宣世徽) |
| 선약봉(宣若奉) |
| 선양중(宣養中) |
| 선우빈(宣遇贇) |
| 선정달(宣廷達) |
| 선헌(宣憲) |
| 이름 |
|---|
| 선문주(宣聞周) |
| 선병련(宣炳蓮) |
| 선붕익(宣鵬翼) |
| 선세기(宣世紀) |
| 선우해(宣羽海) |
| 선응직(宣應直) |
| 선의문(宣義問) |
| 선인후(宣仁厚) |
| 선탁경(宣倬卿) |
| 이름 |
|---|
| 선문주(宣聞周) |
| 선원표(宣元杓) |
| 선준채(宣俊采) |
| 선창로(宣昌魯) |
| 이름 |
|---|
| 선흥윤(宣興胤) |
8. 인구
| 연도 | 가구 수 | 인구 수 | 비고 |
|---|---|---|---|
| 1985년 | 7,651가구 | 33,105명 | |
| 2000년 | 10,821가구 | 34,842명 | |
| 현재 | 약 4만여 명 | 선윤지 후손 37,000여 명 (95% 이상), 선용신 후손 3,000여 명 (5% 미만) |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보성선씨 宝城宣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간행물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3]
서적
선윤지(宣允祉)
http://people.aks.ac[...]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7-10-28
[4]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0
[5]
웹사이트
선씨(宣氏) 본관(本貫) 보성(寶城)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7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윤지
http://people.aks.ac[...]
2017-12-26
[7]
뉴스
고 감사 선윤지 등 5세의 사액을 오충이라고 내리다.
http://sillok.histor[...]
순조실록
1830-10-09
[8]
한국학중앙연구원
보성 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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