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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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 비루니는 973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지역에서 태어난 이슬람 학자이자,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업적을 남긴 과학자이다. 그는 이슬람 율법, 신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 여러 학문을 섭렵했고, 특히 인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도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가즈나 왕조 시기에는 인도 원정에 동행하며 인도의 문화, 종교, 과학 등을 연구하여 저술을 남겼으며, 객관적인 시각으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점을 분석했다. 천문학 분야에서도 지구의 반지름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와는 달리 태양의 원지점이 움직인다는 것을 관찰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서로는 《인도》, 《과거 시대의 남은 흔적》, 《마수디 법》 등이 있으며, 사후에는 달의 크레이터, 소행성, 남극의 섬 등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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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콰리즈미는 8세기 바그다드에서 활동한 페르시아 출신 학자로, 대수학과 삼각법 발전에 기여하고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전파했으며, 주요 저서들을 통해 대수학, 알고리즘, 지리학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973년 출생 - 하인리히 2세 (신성 로마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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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니 | |
---|---|
기본 정보 | |
본명 | 아부 라이한 무함마드 이븐 아흐마드 알-비루니 알-콰리즈미 |
원어 이름 | أبو الريحان محمد بن أحمد البيروني الخوارزمي |
출생 | 973년 |
출생지 | 카트, 콰레즘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
사망 | (77세) |
사망지 | 가즈니, 가즈나위 제국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
국적 | 이란 |
학문 분야 | |
주요 관심사 | 지질학 물리학 인류학 비교 사회학 천문학 화학 역사 지리학 수학 의학 심리학 철학 신학 |
영향 | 아부 하니파 디나와리 알-시지 아부 나스르 만수르 알-바타니 |
영향 받은 인물 | 알-시지 오마르 하이얌 알-카지니 자카리야 알-카즈위니 |
종교 | |
종교 | 이슬람 |
종파 | 수니파 |
신조 | 아샤리 |
업적 | |
주요 저서 | 과거 세대의 남은 흔적 보석 인디카 마스우디 법전 점성술의 이해 |
활동 | |
시대 | 이슬람 황금시대 |
활동 지역 | 콰레즘, 중앙아시아 지야르 왕조 (레이) 가즈나위 왕조 (가즈니) |
2. 생애
알 비루니는 973년 호라즘의 수도 카스(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베루니) 외곽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교외'를 뜻하는 '비룬'(bīrūn)에서 유래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슬람 율법, 신학, 문법,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으며, 특히 이란계 호라즘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고대 호라즘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995년 마문 왕조에 의해 아프리히 왕조가 전복되자, 비루니는 고향을 떠나 부하라로 가서 사만 왕조의 만수르 2세를 섬겼다. 998년에는 타바리스탄의 지야르 왕조 카부스 궁정에서 《고대 민족 연대기》를 저술했고, 바반디 왕조 알-마르주반의 궁정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호라즘을 통치하던 마문 왕조와 평화를 맺었다.
1017년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가 호라즘을 정복하면서 비루니는 가즈니로 가게 되었고, 궁정 천문학자가 되어 마흐무드의 인도 원정에 동행하며 인도 연구를 시작했다. 1030년경 인도 연구를 통해 《인도지》를 완성했다.
2. 1. 초기 활동과 학문적 교류
알 비루니는 호라즘에서 태어나 처음 25년 동안 이슬람 율법, 신학, 문법, 수학, 천문학, 의학, 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공부했다. 그의 모국어인 이란 호라즘어는 이슬람교 전파 이후에도 수 세기 동안 살아남았으며, 이는 호라즘 문화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아프리히 왕조에 우호적이었으나, 995년 마문 왕조에 의해 왕조가 전복되자 고향을 떠나 부하라로 갔다. 부하라에서 사만 왕조의 통치자 만수르 2세를 섬기며 아비센나(이븐 시나)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했다.998년에는 타바리스탄의 지야르 왕조 아미르 카부스의 궁정으로 가서 첫 주요 저서인 《고대 민족 연대기》(al-Athar al-Baqqiya 'an al-Qorun al-Khaliyyaar)를 저술했다. 이 책은 역사 및 과학 연대기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한 것으로, 1000년경에 완성되었으나 이후에도 수정되었다. 그는 바반디 왕조 통치자 알-마르주반의 궁정도 방문했으며, 이후 호라즘을 통치하던 마문 왕조와 평화를 맺었다.
비루니는 동시대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이븐 시나와 서신을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8] 이 논쟁은 비루니가 아랄해 남쪽 호라즘의 카스로 돌아간 997년 이후에 이루어졌으며, 당시 비루니는 25세, 이븐 시나는 18세였다.[8] 두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을 비롯한 자연학의 여러 주제에 대해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의견을 교환했다. 비루니는 천체의 무게, 불변성, 운동 방향, 원자론,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 열과 빛의 본성 등에 대해 질문했고, 이븐 시나는 이에 답했다.
2. 2. 가즈나 왕조 시기와 인도 연구
1017년,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가 호라즘을 정복하면서 알 비루니는 가즈니로 이주하게 되었다.[7] 그는 궁정 천문학자가 되었고, 마흐무드의 인도 원정에 동행하며 인도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인도의 문화, 종교, 과학 등을 다룬 백과사전적인 저서 《인도지》를 완성하여 인도학 연구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2. 3. 후기 활동과 사망
1017년부터 1030년까지 비루니는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를 섬겼다. 마흐무드의 십여 차례에 걸친 인도 원정에 여러 번 동행하여 인도의 민속, 역사, 법률 및 언어를 정리한 『인도지』를 1030년에 완성했다. 같은 해, 천문학 서적 『마스우드 보전』을 엮었다. 이 책에서 아리아바타의 지구 자전설을 소개했지만 채택하지는 않았다. 또한 지구 반경을 약 6,339.6km로 계산했는데, 현재 관측 수치(적도면에서의 반경)인 6,378km와 매우 비슷하여 정확도가 높았다. 비루니는 『샤나메』의 저자 페르도우시와 동시대 인물이다.[7]그는 약학 전집 『사이디나의 서』(『약학의 서』), 광물 사전 『보석의 서』 등도 집필했다. 저술한 책의 수는 120권이 넘는다. 저서는 주로 아랍어로 썼으며, 『요가 수트라』의 아랍어 번역 등 인도 관련 저작물이 20편 정도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를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려 시도했으나, 성공 여부를 보여주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유네스코 세계의 기억(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7]
3. 주요 업적
비루니는 이슬람 황금 시대에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그의 주요 업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천문학과 지리학''': 일식 관측, 지구 반지름 측정, 천구의 연구 등[7]
- '''인도학''': 인도 문화, 종교, 과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 및 저술[2]
- '''약학과 광물학''': 다양한 약물과 광물에 대한 약전 및 분류 체계 제시[1][2]
- '''종교학과 인류학''': 다양한 종교 비교 연구 및 인류학적 접근[4]
- '''이븐 시나와의 논쟁''': 자연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과 토론[8]
비루니는 점성술을 비판하고 천문학을 지지했으며, 인도 천문학 해설서를 저술하고 지구 자전 문제를 다루었다. 마수드 캐논에서는 태양의 원지점이 움직인다는 것을 관찰했으며, 그의 일식 데이터는 달의 가속도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역학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고 밀도 측정을 위한 실험적 방법을 개발했으며, 지구 둘레와 아프로-유라시아의 크기를 바탕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예측하기도 했다.
인도 문화와 종교를 깊이 있게 연구했으며, 힌두교 달력 연구와 산스크리트어 번역에도 힘썼다. 약학과 광물학 분야에서는 비중과 경도를 기준으로 광물을 분류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비교 종교학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비루니는 다양한 종교를 연구하고 인류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븐 시나와의 논쟁에서는 자연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며 학문적 깊이를 보여주었다.
3. 1. 천문학과 지리학
알 비루니는 이슬람 황금 시대에 천문학, 수학, 지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95권의 책을 저술했다.[7] 당시 압바스 왕조는 종교적인 이유로 예배와 기도에 필요한 성스러운 장소의 정확한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 천문학 연구를 장려했다.[7]알 비루니는 점성술을 비판하고 천문학을 지지했는데, 점성가들이 사이비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경험주의가 부족하며, 수니파 신학자들의 견해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7] 그는 인도 천문학에 대한 해설서인 Taḥqīq mā li-l-Hindar를 저술하여 아리아바타의 저작을 번역했다.[7] 또한, '천문학의 열쇠'라는 책에서 지구 자전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7]
그의 주요 천문학 저서인 '마수드 캐논'에서 알 비루니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달리 태양의 원지점이 움직인다는 것을 관찰했다.[7] 그는 시간을 측정하고 측량에 사용되는 천구의 사용법을 설명하는 논문을 썼으며, 그가 그린 8개의 기어가 있는 다이어그램은 이슬람 천구의와 시계의 조상으로 여겨진다.[7] 그의 일식 데이터는 리처드 던쏜이 달의 가속도를 결정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7]
알 비루니는 역학에 과학적 방법을 도입하고, 부력 저울을 사용하여 물질의 밀도를 측정하는 실험적 방법을 개발했다.[7] 그는 귀금속, 보석, 공기 등 다양한 물질의 밀도를 측정했으며, 이 방법을 사용하여 지구의 반지름을 측정하기도 했다.
알 비루니는 지구 둘레와 아프로-유라시아의 크기를 바탕으로,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으로 알려진 미지의 대륙이 존재할 것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7]
3. 1. 1. 지구 반지름 측정
알 비루니는 산의 높이를 측정하고 그 산꼭대기에서 수평선의 기울기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삼각법을 이용하여 지구의 반지름을 계산했다.[7] 그는 오늘날 파키스탄 핀드 다단 칸에 있는 난다나에서 이 방법을 수행했다.[7] 그가 계산한 지구 반지름은 3928.77마일로 실제 평균 반지름 3847.80마일보다 약 2% 더 컸다.[7] 그의 추정치는 12,803,337 큐빗으로 주어졌는데, 큐빗의 정확한 길이는 명확하지 않다.[7] 18인치 큐빗을 사용하면 그의 추정치는 3,600마일이 되고, 22인치 큐빗을 사용하면 4,200마일이 된다.[7] 알 비루니는 대기 굴절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계산은 실제 값에서 약 20% 정도의 오차를 보였다.[7] 그는 34분 각도의 기울기 각도를 사용했지만, 굴절은 일반적으로 측정된 기울기 각도를 약 1/6만큼 변경시킬 수 있다.[7]3. 2. 인도학
비루니가 인도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주로 두 권의 저작 덕분이다.[2] 비루니는 인도의 모든 면을 탐구한 《Taḥqīq mā li-l-Hind min maqūlah maqbūlah fī al-ʿaql aw mardhūlahar》(인도인들이 설명하는 모든 것,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검증함)이라는 백과사전적인 저작을 썼다. 인도 여행 중에 비루니는 군사 및 정치 역사에 크게 집중하지 않고, 힌두교 신앙의 민간적이고 학문적인 측면, 즉 문화, 과학, 종교 등을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풍부한 문화적 맥락 안에서 종교를 탐구했다.[2] 그는 자신의 목표를 간결하고 웅변적으로 표현했으며, 인도 현인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를 Tarjamat ketāb Bātanjalī fi’l-ḵalāṣ men al-ertebākar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7]비루니는 자신의 책에서 무슬림들이 힌두교 지식과 문화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언급하면서,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11세기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잦은 외침으로 인해 무슬림뿐만 아니라 모든 외국인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고, 무슬림을 폭력적이고 부정한 존재로 여겨 교류를 꺼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루니는 힌두교 학자들의 환영을 받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산스크리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11세기 인도의 수학, 과학, 의학, 천문학 등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그는 지구가 구형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인도 학자들의 주장에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위도, 계절, 지구와 달과 별의 상대적 위치에 따른 낮 시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비루니는 인도의 필사자들이 낡은 문서를 복사하는 과정에서 부주의하게 문서를 훼손했다고 비판했으며, 힌두교도들이 역사를 배우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점 등도 지적했다.
비루니는 힌두교 달력을 연구하며 큰 결단력과 집중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힌두교 달력의 날짜를 그리스 달력, 아랍/무슬림 달력, 페르시아 달력 등 세 가지 다른 달력의 날짜로 변환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또한 천문학을 이용하여 복잡한 수학 방정식과 과학적 계산으로 서로 다른 달력 간의 날짜와 연도를 변환할 수 있게 했다.
비루니의 저작은 사회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담고 있으며, 지루한 전투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인도 문화의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연구와 함께 전통과 관습을 설명했다. 비록 정치 및 군사 역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중요한 날짜와 전투가 벌어진 실제 장소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인도 통치자들의 이야기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그들의 통치 방식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비루니는 자신의 저작에서 인도의 지리를 묘사하며 다양한 수역과 자연 현상을 기록했는데, 이는 현대 역사가들이 특정 목적지를 찾거나 사라진 지역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비루니는 힌두교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을 제시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에서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사실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에두아르트 사카우는 비루니의 저작을 "칼이 부딪히고, 도시가 불타고, 사원이 약탈당하는 세상 속에서 조용하고 공정한 연구의 마법의 섬"에 비유했다.
3. 3. 약학과 광물학
비루니는 약학과 광물학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그가 저술한 《약학의 서》(Kitāb al-ṣaydana|키탑 알 사이다나ar)는 약전으로, 다양한 약물의 동의어를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그리스어, 발루치어, 아프간어, 쿠르드어 및 일부 인도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1]
또한, 비루니는 《보석의 서》(Kitāb al-Jamāhir fī Ma‘rifat al-Jawāhir|키탑 알 자마히르 피 마'리파트 알자와히르ar)에서 금속과 보석을 비중 및 경도와 같은 주요 물리적 특성으로 분류하여, 당시 흔히 사용되던 색상에 따른 분류 대신 새로운 분류 방법을 제시했다.[2] 그는 금속과 보석의 밀도와 순도를 결정하기 위해 비중 저울을 사용하기도 했다.[2]
3. 4. 종교학과 인류학
알 비루니는 비교 종교학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는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힌두교,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를 연구했다. 그는 이슬람교의 우월성을 전제했지만, 다른 문화를 칭찬하고 다른 종교의 성서에서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1] 그는 모든 문화가 인간의 산물이기 때문에 서로 먼 친척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2]알 비루니는 힌두교도를 교육받은 계급과 교육받지 못한 계급으로 나누었다. 교육받은 힌두교도는 유일신론을 믿고 우상 숭배를 피하는 반면, 교육받지 못한 힌두교도는 다수의 우상을 숭배한다고 설명했다.[3]
알 비루니는 인도 아대륙의 민족, 관습, 종교에 관해 기록했다.[4] 그는 특정 집단과 광범위한 참여 관찰을 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주요 텍스트를 연구했으며, 문화 간 비교를 사용하여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4] 이러한 연구 방식으로 인해 알 비루니는 최초의 인류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4]
3. 5. 이븐 시나와의 논쟁
이븐 시나와의 서신 논쟁은 알 비루니가 고향인 호라즘의 카스로 돌아간 997년 이후에 이루어졌으며, 당시 비루니는 25세, 이븐 시나는 18세 쯤이었다.[8] 이 논쟁에서 비루니는 이븐 시나에게 자연철학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이븐 시나가 답변하면 다시 비루니가 반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비루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8]
번호 | 질문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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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천체에는 무게가 없는가? |
2 | 천체는 불변하는가? |
3 | 방향은 여섯 개인가? |
4 | 원자론은 이상한가? |
5 |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
6 | 천체가 달걀형이나 렌즈형이라면, 허공이 생기는가? |
7 | 천체의 운동의 시작은 오른쪽인가? |
8 | 불의 원소는 구형을 이루는가? |
9 | 열은 어떻게 태양에서 지구에 이르는가? 빛의 본성은 무엇인가? |
10 | 원소 간의 변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번호 | 질문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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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구형 유리 용기에 물을 채웠을 때, 빛을 모으는 이유는 무엇인가? |
2 | 네 원소 모두 아래로 운동하지만 그 상대적인 정도가 다르다는 설명과, 불과 공기는 위로 향한다는 설명 중 어느 것이 맞는가? |
3 | 물속에 있는 것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
4 | 남쪽과 북쪽의 거주 가능 지역의 비율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
5 | 4등분한 사각형 중 두 개는 어떻게 접하는가? |
6 | 공기를 빼낸 병에 물이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
7 | 병 속의 물이 얼면 병이 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
8 | 얼음이 물에 뜨는 이유는 무엇인가? |
비루니는 우주가 시작이 있다는 수니파 다수 입장을 옹호했으며, 무에서 유의 창조를 지지하며 이븐 시나를 반박했다.[8]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와 물질이 시작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도 물질이 영원하다는 생각을 고수하는 모순을 범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비루니는 종교의 문헌적 증거를 따르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8]
4. 저서
알 비루니는 아랍어를 주된 저술 언어로 사용했지만, 페르시아어에도 능통하여 일부 저서는 두 언어로 모두 작성했다. 그의 저서는 120권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고대 민족 연대기》(Āthār al-Bāqiya ‘an al-qurūn al-khāliyah): 여러 문화와 문명의 달력을 비교 연구한 책으로, 수학, 천문학, 역사 정보를 담고 있으며, 기독교 숭배에 관한 여러 장을 포함한다.[7]
- 《마수드 법전》(al-Qānūn al-Mas‘ūdī): 천문학, 지리학, 공학 백과사전으로, 가즈니 술탄 마흐무드의 아들인 마수드에게 헌정되었다.
- 《점성술 교본》(Kitāb al-Tafhīm li-awā'il ṣanā‘at al-tanjīm):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작성된, 수학과 천문학에 관한 문답 형식의 책.
- 《인도지》(Taḥqīq mā lil-Hind min maqūlah maqbūlah fī al-‘aql 'aw mardhūlah): 인도의 종교와 철학을 집대성한 책이다.[2]
- 《보석의 서》(Kitāb al-Jamāhir fī Ma‘rifat al-Jawāhir): 광물과 보석에 관한 지질학 지침서로, 마수드의 아들 마우두드에게 헌정되었다.
- 《사이다나의 서》(『약학의 서』)(Kitāb al-ṣaydana): 약물과 의약품에 관한 저서.
- 마흐무드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역사
- 호라즘의 역사
- Epître de Berūnī|베루니의 서한프랑스어[7]
비루니는 대부분의 저서를 당시 과학의 언어였던 아랍어로 저술했지만, 은 페르시아어로 쓰인 초기 과학 저술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며, 페르시아 산문과 사전학의 풍부한 자료이다. 이 책은 ''사과''(Quadrivium)를 상세하고 능숙하게 다루고 있다.
5. 평가 및 영향
알 비루니는 중세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연구는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인도학 연구는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3] 알 비루니의 인도에 대한 저술은 사후 수 세기 동안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거나 참조되지 않았으나, 영국령 인도 제국 시기에 재조명되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3]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달의 크레이터는 알 비루니로, 소행성은 9936 알 비루니로 명명되었다. 남극의 비루니 섬 역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란에서는 측량 기술자들이 알 비루니의 생일을 기념한다.
2009년 6월, 이란은 빈 국제 센터 중앙 기념 광장에 위치한 빈 유엔 사무국에 학자 파빌리온을 기증했다.[4] 이 파빌리온에는 아비센나, 아부 라이한 비루니, 자카리야 라지(Rhazes), 오마르 하이얌 등 네 명의 저명한 이란 학자들의 조각상이 있다.[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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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sell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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