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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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石)씨는 중국 무위에서 기원한 성씨로, 주나라, 흉노족 등에서 분파되었다. 5호 16국 시대 후조를 세운 석륵이 흉노 갈족 출신으로 석(石)씨가 되었으며, 석경당은 후진의 건국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2015년 인구조사에서 49,203명이 석(石)씨 성을 사용하며, 충주, 해주, 광주 등을 포함한 23개의 본관이 존재한다. 석(昔)씨는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단본으로, 신라의 탈해 이사금이 시조이며, 2015년 인구는 11,355명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자에 '석(Seok)'으로 읽히는 한자는 20자가 있으며, '석'이라는 음절을 포함하는 다양한 이름들이 사용된다.
석(石)씨는 한자로 '돌'을 의미하는 '石'을 주로 사용하며, '옛날'을 의미하는 '昔'을 쓰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石' 자를 쓰는 경우가 더 많다.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 기준으로 49,203명이며[1], 주요 본관으로는 충주, 해주 등이 있다.
2. 석(石)씨
국립국어원의 2007년 대한민국 여권 신청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해당 성을 가진 사람들의 61.3%가 여권에 성을 로마자로 'Seok'으로 표기했으며, 'Suk'으로 표기한 경우는 30.6%였다. 그 외 'Seog', 'Sok', 'Souk', 'Sock' 등 드문 표기도 있었다.[2]
이 성을 가진 인물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2. 1. 기원 및 역사
석(石)씨는 중국 무위(武威)에서 유래한 성씨이다. 주나라의 제후국인 위나라와 정나라에서 계출된 희성(姬姓) 계통과 흉노족 계통의 성씨가 있다. 전국시대의 천문학자 석신(石申)이 있으며, 5호 16국 때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흉노의 한 갈래인 갈족 출신이다. 갈(羯)이 돌을 뜻하므로 성을 석(石)으로 삼았다고 전해지며, 중국에는 석륵 계통의 석씨가 다수 존재한다. 후진 (오대)의 건국자인 석경당(石敬瑭)도 있다. 금사(金史)의 함보 기사에는 여진족 왕족으로 석고내(石土门)가 기록되어 있으며, 금나라 금 세종 때 여진족 오림답부(烏林荅部)의 수장 석토흑(石土黒)은 금 세종의 장인이었다.
한국의 석씨는 주로 '돌'을 뜻하는 석(石) 자를 사용하지만, '옛날'을 뜻하는 석(昔) 자를 쓰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석(石)씨가 더 많다. 2000년 대한민국 인구 조사에서는 석(Seok)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46,066명으로 조사되었으며[1], 이들 중 다수는 경주 석씨와 충주 석씨 문중이었다. 충주 석씨는 2000년에 9,544명이었다.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서는 석(石)씨가 49,203명으로 조사되었다. 주요 본관으로는 충주(忠州), 해주(海州), 광주(廣州), 홍주(洪州), 조주(潮州), 성주(星州) 등 23본이 있으며, 이 중 충주 석씨가 다수를 차지한다.
국립국어원이 2007년 대한민국 여권 신청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석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61.3%가 로마자로 'Seok'으로 표기했으며, 'Suk'으로 표기한 경우는 30.6%였다. 그 외 'Seog', 'Sok', 'Souk', 'Sock' 등 드문 표기도 있었다.[2]
2. 2. 본관
석(石)씨는 중국 감숙성 무위(武威)에서 유래한 성씨이다.[1] 주나라의 제후국이었던 위나라와 정나라에서 계출된 희성(姬姓) 계통과 흉노족 계통 등이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의 201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에는 석(石)씨 성을 가진 사람이 49,203명 있으며, 본관은 충주(忠州), 해주(海州), 광주(廣州), 홍주(洪州), 조주(潮州), 성주(星州) 등 23본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중 충주 석씨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1]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 기준 주요 본관별 인구는 다음과 같다.
각 본관의 시조와 유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2. 1. 충주 석씨 / 홍주 석씨
충주 석씨(忠州石氏)의 시조 '''석린'''(石隣)은 1174년(고려 명종 4년) 두경승(杜景升)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동서북면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예성군(蘂城君)에 봉해졌다.한편,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석신(石信)의 아들 석수민(石受珉, 1077년 ~ 1160년)은 1145년(고려 인종 23년) 예빈랑 응양군대장군(禮賓郞 鷹揚軍大將軍)에 올랐다.[4]
석린의 6세손 석양선(石良善)은 부인 최씨(崔氏)가 태조 이성계의 이모였으므로, 조선 건국 후 홍양부원군(洪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석양선의 손자 석수명(石壽明)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내고 홍주(洪州)로 분관(分貫)하여 홍주 석씨의 시조가 되었다.
석수명의 동생 석여명(石汝明)은 1374년(공민왕 23년) 성균관 생원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를 지냈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태종(太宗)이 집현전제학(提學) 벼슬을 내려주었음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사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5]
석여명의 아들 석문성(石文成, ? ~ 1380년)은 1364년(공민왕 13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있을 때, 왜구가 착량(窄梁)에 침입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이를 물리쳐 예성군(芮城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돈(辛旽)의 무고(誣告)로 장암(長巖)에 유배되고 가산(家産)은 몰수되었다가 뒤에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1377년(우왕 3년) 왜구가 수안(守安)·통진(通津)·동성(童城) 등지에 침입하였을 때 최영(崔瑩) 등과 함께 원수(元帥)로 출전하여 이를 방어하였다.[6]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 충주 석씨는 41,802명, 홍주 석씨는 1,009명으로 조사되었다.
2. 2. 2. 광주 석씨
'''광주 석씨'''(廣州 石氏)의 시조 '''석함'''(石涵, 1538년 ~ ?)은 1568년 선조 1년 생원이 되고, 1579년 선조 12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역임했다.[7] 자는 양초(養初)이다. 석함(石涵)의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전의감첨정(行典醫監僉正) 석수도(石守道)이다. 광주 석씨 인물로는 생물학자 석주명(石宙明), 민속학자 석주선(石宙善) 남매가 있다. 2015년 인구는 148명이다.2. 2. 3. 조주 석씨 / 해주 석씨 / 성주 석씨
'''해주 석씨'''(海州 石氏)와 '''성주 석씨'''(星州 石氏)는 명나라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석성'''(石星)을 시조로 한다. 석성은 중국 위군(魏郡) 동명(東明) 사람으로, 1559년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1584년 조선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썼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에 원군을 파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 해주석씨족보에 따르면, 석성의 부인 류씨(柳氏)는 과거 조선의 역관 홍순언에게 도움을 받은 인연으로, 종계변무와 임진왜란 원병 파병을 남편에게 적극 권유하여 숨은 공을 세웠다고 한다.[1]그러나 심유경을 통해 추진된 왜군과의 화의가 실패하자, 명나라 신종은 막대한 군비 지출의 책임을 물어 석성을 투옥시켰다.[1] 석성은 옥중에서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언에 따라 차남 석천(石洊)은 1597년(정유재란) 조선으로 건너와 경상북도 성주군 가야산 부근에 정착하여 성주 석씨의 입향조가 되었다.[1] 한편, 장남 석담(石潭)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 어머니 류씨를 모시고 황해도 해주에 정착하였다. 당시 조선 선조는 그에게 수양군(首陽君)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수양산 아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며 해주를 본관으로 삼게 하여 해주 석씨가 시작되었다.[1] 이후 석담의 후손 중 일부는 청나라의 침입을 피해 경상남도 산청군으로 이주하여 대를 이어왔다.[1]
'''조주 석씨'''(潮州 石氏)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 석성의 아들 석재금(石在錦)이 숙부 석규(石奎), 손자 석계조(石繼祖) 등 일족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와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1] 조주(潮州)는 중국 광둥성에 있는 지명이다.
대한민국 통계청의 2015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해주 석씨는 941명, 조주 석씨는 538명, 성주 석씨는 255명으로 집계되었다.[1]
3. 석(昔)씨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 기준으로 11,355명으로 집계되었다. 본관은 월성(月城, 현재의 경주) 단본이며, 시조는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昔脫解)이다.
3. 1. 기원 및 역사
'''석'''(昔)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 기준으로 11,355명으로 집계되었다. 본관은 월성(月城, 현재의 경주) 단본이다.월성 석씨(月城昔氏)의 시조는 신라 제4대 왕인 '''석탈해'''(昔脫解)이다. 석탈해는 신라 제2대 남해왕(南解王) 5년에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이후 유리왕(儒理王)의 뒤를 이어 신라 제4대 왕으로 즉위하여 24년간 재위하였다. 석(昔)씨 왕조는 시조 탈해 이사금을 시작으로 총 8명의 왕을 배출하며 합계 171년간 신라를 통치하였다.
대수 | 왕호 |
---|---|
제4대 | 탈해 이사금 (시조) |
제9대 | 벌휴 이사금 |
제10대 | 내해 이사금 |
제11대 | 조분 이사금 |
제12대 | 첨해 이사금 |
제14대 | 유례 이사금 |
제15대 | 기림 이사금 |
제16대 | 흘해 이사금 |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은 본래 바다를 건너온 해양 세력 출신으로, 용성국(龍城國)에서 왔다고 전해진다. 석탈해는 대마도, 거제도 등을 거쳐 처음에는 김해 지역에 정착하려 했으나, 그곳에서 가야의 김씨 세력과 충돌한 후 신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가야 관련 신화에서도 석탈해와의 갈등 관계가 묘사되어 있다.
이후 신라에서 김씨 세력이 집권하면서 석씨 세력은 점차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내물왕 시기에 석씨가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꿈에 석탈해가 나타나 자신의 무덤을 옮겨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문무왕이 석탈해의 무덤을 파서 이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문무왕이 석씨 잔존 세력을 정리한 사건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석씨는 신라 왕실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왕족이었던 박씨나 김씨처럼 후손이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으며, 역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도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월성 석씨의 중시조(1세조)인 '''석재흥'''(昔載興)은 시조 석탈해의 23대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시대에 교서랑(校書郞) 벼슬을 지냈다.
4. 이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지정한 '석'으로 읽는 한자는 20자가 있다.[3] 이름에 '석' 자가 단독으로 쓰이거나 다른 글자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4. 1. 단음절 이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자에 '석(Seok)'으로 읽히는 한자는 20자가 있다.[3]'석'이라는 단음절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다.
- 백석 (1912–1995), 시인
- 이석 (1941년 출생), 조선 왕족의 후손
- 조석 (1983년 출생), 웹툰 작가
- 김석 (1991년 출생), 축구 선수
- 김석 (1992년 출생), 승마 선수
'석' 음절을 포함하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4. 2. 이름에 포함된 음절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에 '석'으로 읽는 한자는 20자가 있으며, 흔히 사용되는 한자도 있다.[3]'석'이라는 한 글자 이름을 가진 인물은 다음과 같다.
- 백석 (1912년 ~ 1995년), 시인
- 이석 (1941년 ~ ), 왕족 후손
- 조석 (1983년 ~ ), 웹툰 작가
- 김석 (1991년 ~ ), 축구 선수
- 김석 (1992년 ~ ), 승마 선수
'석' 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다음과 같다.
참조
[1]
웹사이트
행정구역(구시군)/성씨·본관별 가구 및 인구
http://kosis.nso.go.[...]
2007-03-01
[2]
서적
성씨 로마자 표기 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
http://korean.go.kr/[...]
National Institute of the Korean Language
2009-06-25
[3]
웹사이트
인명용 한자표
http://help.scourt.g[...]
Supreme Court
2013-10-17
[4]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석수민
[5]
한국향문화전자대전
석여명
https://terms.naver.[...]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석문성
[7]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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