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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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사익은 1887년 또는 1889년에 태어난 일제강점기 조선인 일본군 장교이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수료했으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하며 연합군 포로 학대 혐의로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처형되었다.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식 성명을 유지했으며, 청렴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포로 학대 묵인 혐의로 비판받기도 한다. 사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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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사익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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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홍사익 |
| 한자 표기 | 洪思翊 |
| 일본어 표기 | ホン・サイク (혼 사이쿠), こう しよく (코 시요쿠) |
| 출생일 | 1889년 3월 4일 |
| 출생지 | 경기도 안성 소촌면 내소촌 (현재 대한민국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 |
| 사망일 | 1946년 9월 26일 |
| 사망지 | 필리핀 마닐라 포로수용소 |
| 사망 원인 | 교수형 |
| 본관 | 남양(南陽) |
| 배우자 | 조숙원(사별), 이청영(재혼) |
| 자녀 | 홍국선(장남) 홍현선(차남) 홍달선(삼남) |
| 부모 | 홍이유(부) |
| 친척 | 홍사용(형) |
| 군사 정보 | |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 복무 기간 | 1914년 ~ 1946년 |
| 최종 계급 | 중장 |
| 지휘 | 일본군 보병 제3연대 대대장 일본군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 병참총감 |
| 참전 전투 | 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필리핀 전역 (1944-1945) |
| 기타 | |
| 로마자 표기 | Hong Sa-ik |
| 일본어 로마자 표기 | Hon Saiku, Kō Shiyoku |
2. 생애
대한제국 말 경기도 안성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교 폐지 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중앙소년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26기)를 졸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부 동기들이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과 달리, 그는 실력 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일본 제국 육군 장교의 길을 걸었다.[1]
이후 일본 육군대학교(35기)까지 졸업하며 엘리트 군인으로 성장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왕족을 제외한 평민 출신 조선인으로는 유일한 사례였다.[17][18] 만주와 중국 등지에서 근무하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고, 일본군 내에서 소장, 중장까지 진급하며 여단장, 육군학교 간부(부교장), 필리핀 파견군 병참총감 등을 역임했다. 필리핀에서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11] 지청천 등 한국 광복군 활동가들과 비밀리에 관계를 유지하며 지원했다는 설도 있으나[1],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제의는 끝내 거절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필리핀 마닐라에서 연합군에 의해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포로수용소장 재직 당시 부하들의 포로 학대 행위에 대한 감독 책임[4] 등으로 마닐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9월 26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5][6]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으며[25], 대한민국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규정되었다.
2. 1. 생애 초기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자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육군중앙소년학교( 陸軍中央幼年学校|리쿠군 주오 요넨 각코jpn )로 편입하였다.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한 동기들과 달리, 홍사익은 당장의 행동보다는 실력 양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1]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1923년에는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에도 비밀리에 지청천 등 한국 광복군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자금 지원을 하는 등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발각될 경우 홍사익 자신에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1]
2. 1. 1. 출생과 가계
홍사익은 1889년 3월 4일[12]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소촌(현 안성시 대덕면 소현리 소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다만 그의 출생 연도와 날짜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묘비문에는 1889년 3월 4일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호적상으로는 1887년 2월 2일생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1886년생, 1890년생이라는 설도 존재한다.[12] 아버지는 자작농인 홍이유(洪理裕)였으며, 홍사익은 그의 셋째 아들이었다.본관은 남양 홍씨로, 조선 숙종 때 남인의 지도자였던 남파 홍우원의 후손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양반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아버지 대에는 농사를 짓는 처지였다. 중추원 참의를 지낸 정교원과 사돈 관계였으며, 명성황후의 여동생의 아들인 정갑진과는 사촌 처남 사이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스무 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맏형 홍사용(洪思容)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사서삼경을 모두 암기할 정도로 능통했다고 전해진다.[12] 언론인 송건호는 그의 한학 실력이 인격 형성에 기반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2] 1903년(광무 6년) 용인군 출신 조숙원과 결혼한 직후, 출세의 길을 찾아 한성부로 상경했다.
본래 과거 시험에 뜻을 두었으나 그가 소년일 때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집안의 아저씨뻘이자 당시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로 육군무관학교 교관이었던 홍중유(洪中裕)의 권유로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2. 1. 2. 유년 시절과 교육
1889년, 조선 경기도 안성의 양반 가문인 남양 홍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1909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자,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육군중앙소년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중앙소년학교 졸업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에는 여러 한국인 유학생이 있었는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부는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사익은 당장의 행동보다는 실력을 기른 후에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이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1]
2. 1. 3. 일본 유학
1909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자,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친왕의 일본 유학 동반자로 선발되어 이응준, 김석원과 함께 국비 유학생이 되었다. 당시 동기로는 지청천, 신태영, 소설가 염상섭의 형 염창섭 등이 있었다.유학 중 학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아르바이트와 노동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송건호에 따르면, 그는 일하며 배우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1909년부터 기호흥학회에 매달 1환(一圜)씩 성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학교 성적은 상위권(전교생 20등 안팎)이었으며, 특히 작문에 재능을 보여 생도 신분으로 천황 앞에서 직접 작문이나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동기들 사이에서 '시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충격을 받은 홍사익을 비롯한 이응준, 지청천, 김석원, 3기수 선배 김광서 등 조선인 유학생들은 아오야마 묘지에 모여 향후 거취를 논의했다. 일부는 즉각 학업을 중단하고 항일 운동에 나서자고 주장했으나, 홍사익은 아직 배울 것이 많으니 실력을 키운 후에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설득했다. 이들은 우선 의무 복무 기간인 2년~4년만 채우고 군을 떠나기로 합의했으나, 홍사익은 이후에도 일본군에 계속 남았다.[1]
1912년 5월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제26기생으로 입학했다. 입학 당시 26기 조선인 생도 13명 중 성적이 가장 우수했다. 일본 육사 재학 중 학업 성적은 동급생 중 22등이었고, 이응준은 32등이었다.[13] 1914년 5월 28일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26기, 전체 739명 중 22등, 군번 보병 22번)하고 견습사관을 거쳐 그해 12월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함께 졸업한 한국인 동기생 13명 가운데는 지청천, 이응준, 신태영, 조철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4]
2. 2. 군인 활동
일본 육군사관학교(26기)와 일본 육군대학교(35기)를 졸업하며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걸었다.[9][10] 일제강점기 동안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1925년 참모본부 근무를 시작으로, 1929년 육군 보병 소좌, 1934년 중좌로 진급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관동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만주국군 고문으로 활동하며 봉천군관학교 지도 등에 관여했다.
1936년 일본 육군보병학교 교관으로 전근했고,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7년 12월 중지나파견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다. 1938년 3월 육군 보병 대좌로 승진하여 흥아원 조사관으로 상하이에서 정보 수집 및 정치 공작을 담당했다.
1941년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화북 지역의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 팔로군 및 조선의용대와 교전했다. 백철에 의하면, 그가 여단장으로 있을 때 화북 지역 조선인 이민자들이 그의 덕에 일본인들에게 함부로 대우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간사(부교장)를 지냈다. 이 시기 조선인 징병제 실시에 대해 천황을 위한 보국의 기회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11] 대한제국군 시절의 동료였던 지청천 등 항일 운동가들과 관계를 유지하며 지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제안은 거절했다.
1944년 3월 필리핀으로 부임하여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했으며, 같은 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제14방면군 병참감으로 근무하다 종전을 맞았다.
2. 2. 1. 엘리트 군인의 길
191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26기로 졸업(742명 중 31위)하고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졸업 성적이 우수하여 고위 장교의 등용문으로 여겨지던 도쿄 제1사단 제1연대(속칭 '아카사카의 보 1')에 배속되었다.1918년 7월 중위로 진급했다.

1920년 12월, 일본 육군의 최고 엘리트 양성 과정인 일본 육군대학교에 제35기로 입학하여 3년간 수학했다. 육사 26기 동기 742명 중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인원은 66명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 육군대학교에 입학한 조선인은 영친왕, 이건, 이우 등 왕족 3명과 홍사익뿐이었으며,[15][16] 왕족이 아닌 평민 출신으로는 홍사익이 유일했다.[17][18] 이는 훗날 그가 장성급 장교가 되는 기반이 되었다.[18]
1923년 11월 29일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원 소속 부대인 보병 제1연대로 복귀했다.
1924년 3월 대위로 진급하여 중대장으로 복무했다.[18]
2. 2. 2. 만주에서의 활동
1931년(쇼와 6년) 8월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거쳐, 1933년(쇼와 8년) 4월 관동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만주국군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만주에서 봉천군관학교(육군사관학교에 해당)의 지도에 참여했으며, 만주국 군관학교의 모집 대상에 만주국 거주 조선인을 포함시켜 이전까지 일본인·만주인·연안(延安)계 조선인에게만 한정되었던 만주국군 장교의 문호를 조선인 이민에게도 개방하는 데 기여했다.1934년(쇼와 9년) 육군 보병 중좌로 진급하여 1936년(쇼와 11년)까지 관동군 사령부 참모부에서 근무하였다. 이 시기 대한제국군 및 일본 육사 시절부터 친구였던 한국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제안을 받았으나, 조선의 독립에는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청천을 포함한 구 대한제국군 출신의 항일 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우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돈으로 그들의 가족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는 홍사익 자신에게도 위험이 미칠 수 있는 행위였다.
1936년(쇼와 11년) 육군보병학교 교관으로 다시 전근하면서 만주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2. 2. 3. 중일전쟁과 화북에서의 활동

1936년 일본 육군보병학교 교관으로 전근하였다. 이듬해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같은 해 12월 중지나파견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중국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1938년 2월에는 중지나파견군 특무부원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고, 같은 해 3월 육군 보병 대좌로 승진하였다. 이후 흥아원 조사관으로 임명되어 상하이 화중연락부에 배속되었다. 본래 문관 직책이었으나 당시 군의 권한 확대로 군인이 배속된 자리로, 그는 이곳에서 정보 수집과 정치 공작에 종사하였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는 지나파견군(China Expeditionary Army)에서 복무하였다. 1940년 8월에는 유수 제1사단 사령부에 배속되었다. 194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중국 허베이성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 보병 제108여단장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 화북 지역에서 활동하던 팔로군과 교전하였는데, 팔로군 산하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와도 전투를 치렀다. 같은 해 12월 호가장 전투에서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고 주요 대원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1942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는 만주 공주령에 위치한 육군공주령학교의 간사(부교장)로 근무했다.
2. 2. 4. 태평양 전쟁과 필리핀에서의 활동
태평양 전쟁 중 중국에서 여단장 및 일본 육군 공주령학교 부교장 등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3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총군(南方總軍) 총사령부의 병참총감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함께 약 10개월간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하며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10월에는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홍사익의 필리핀 부임 소식이 알려지자, 부임 전 매일신보 기자 겸 도쿄 특파원이었던 김을한이 그의 도쿄 숙소를 찾아와 일본군 탈영을 권유하며 마지막 기회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홍사익은 "내가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나를 알아준 일본에 대한 의리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 조선인이 수십만 명이나 동원되어 있는데, 명색이 조선인으로 최고 지위에 있다는 내가 만일 배신을 한다면 병사들은 물론 징용된 노무자들까지 보복을 받을 것이다. 나만을 생각해서 그런 경솔한 짓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절했다.
또한, 그는 여러 차례 한국 광복군 측의 합류 제의를 받았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이청천의 본명)과 참모장 이범석 등은 그가 북지나(北支那) 사령부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부터 꾸준히 중경의 광복군으로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홍사익은 이러한 사실을 비밀로 하다가 아들 홍국선에게 털어놓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 제복에 충성하고 싶다"고 답하며 제의를 물리쳤다고 한다. 송건호에 따르면, 아들 홍국선 역시 필리핀 부임이 확정되자 아버지에게 광복군 합류를 여러 번 권했지만, 홍사익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필리핀에서 제14방면군 병참감으로 근무하며 종전을 맞이했다.
2. 3. 종전 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홍사익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연합군에 의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는 포로수용소장 재직 당시 부하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 때문이었다.[4] 1946년 4월 18일 전쟁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5] 같은 해 9월 28일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수감 중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처형 직전 성경 시편 51편 낭독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6]
2. 3. 1. 체포와 투옥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홍사익은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체포되어 마닐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루손섬 산악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가 패전을 맞이했다.홍사익이 전범으로 기소된 이유는 1944년 필리핀 포로수용소장 및 남방총군 제14방면군 병참감으로 재직할 당시, 연합군 포로에 대한 불법적인 처우와 학대, 살해에 대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21][4] 1945년 12월 19일, 다른 일본군 장성 22명과 함께 체포되어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투옥되었다.
1946년 1월 7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고, 포로수용소 관련 혐의로 10여 건의 고소 및 고발이 이어졌다. 그는 포로수용소의 책임자로서 부하들의 포로 학대 및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연합국의 군사재판정에 섰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변명을 거부하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마닐라 군사재판소는 1946년 4월 18일 홍사익에게 전쟁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5] 그는 같은 해 9월 26일 마닐라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수감 중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처형 직전 성직자에게 성경 시편 51편을 읽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해진다.[6]
2. 3. 2. 사형 선고와 최후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홍사익은 필리핀 포로수용소장 재직 당시 부하 교도관들의 포로 학대 행위에 대한 책임[4] 및 '포로학대 살해' 죄목으로 BC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마닐라 국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변명이나 증언을 거부하고 침묵을 지켰으나, 다른 전범 피고인을 변호하기 위한 증언은 적극적으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4월 18일, 마닐라 군사재판소는 홍사익에게 사형을 선고했다.[5] 당시 국내에서는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언론 등을 통해 '홍사익 구명운동'이 벌어졌고[21], 그의 아내와 아들 내외는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를 찾아가 선처를 호소했으며, 안성군 주민들 또한 사면 탄원서를 제출했으나[22]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사익은 항소를 포기했으며, 최종상고심에서 사형 판결이 확정되자 일본어로 "나는 갑종(甲種)에 합격했다"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는 사형을 뜻하는 교수형(絞首刑)과 발음이 같은 점을 이용한 풍자였다. 그의 발언에 다른 피고와 방청객은 침묵했고, 통역을 통해 내용을 들은 미군 군법무관들은 놀랐다고 한다.
형량이 과도하다는 일본 극우 세력의 여론도 있었으나[21], 1946년 9월 26일 필리핀 마닐라의 전범수용소에서 일본군 군복을 입은 채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21][6] 당시 홍사익 외에도 15명의 조선인 출신 일본군 고위 장교들이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수감 중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6], 최후에 참관인들에게 구약성서 시편 51편을 낭송해달라고 요청했다.[23]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23]"
사형 직전에는 "옛부터 원통한 죽음을 당한 자 많으니 나 또한 이에 더할 뿐", "괜히 생각해봐야 불평만 될 뿐 패전의 죄라고 체념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홍사익은 체포 직후 일본 국적 포기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했으며,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BC급 전범으로 재판받은 유일한 일본군 내 지도적 위치의 한국인이었다.[24] 생전에 작성했던 시, 수필, 기행문 등은 일본군을 미화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군과 연합군에 의해 모두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2. 4. 사후
일본에서는 작전권이 없는 참모부대인 보급부대 지휘관이었던 홍사익이 B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것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일기도 했으며, 그의 평전이나 재판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글이 출간되기도 했다. 홍사익의 시신은 미군의 비밀지령 293호에 따라 다른 일본군 전범들과 함께 화장되었고, 유골 가루는 비밀리에 미 해군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그의 유품 중 일부는 일본군 측 변호인을 통해 일본 육군이 보관하다가 1947년 6월 19일 일본 외무성을 거쳐 아들 홍국선에게 전달되었다. 여기에는 손목시계, 저금통장, 안경집 등이 포함되었다. 순종이 내린 군인 칙유 칙서와 일본 황태자 다이쇼에게 선물 받은 은 손목시계 등 다른 유품은 미군 헌병 장교 이반 케이가 보관하고 있었다. 이반 케이는 퇴역 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던 중, 이웃 일본인을 통해 수소문하여 아들 홍국선에게 유품을 전달했다.
해방 후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후처 이청영(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졸업)은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사립학교 교사 채용도 거부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지인을 통해 일본 내 남편의 육사 동기 및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의 도움과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전달된 탄원 등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아들 홍현선이 유학 중인 미국으로 이주했다. 장남 홍국선은 일본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서 근무했으나, 이승만의 지시로 해임된 후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7]
1966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25]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군인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어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그의 고향인 안성시에는 유품을 담은 빈 관으로 묘가 조성되었고, 부인 조씨의 묘 옆에 자리하고 있다. 비석은 1979년 4월에 세워졌다.
3. 사상과 신념
그는 조선인이 일본에 협력하면, 나중에 조선인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인과 동등한 국민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들 홍국선이 중고등학교 시절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따돌림을 당하며 괴로워하자, 홍사익에게 "왜 우리들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호소했다. 이에 홍사익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또 조급히 해결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문제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기회에 조사해왔지만 일본인과의 관계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사이와 매우 비슷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아일랜드인의 방식이 우리에게 참고가 될 것이다. 아일랜드인은 영국에서 어떤 취급을 받더라도 절대로 아일랜드인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는 반드시 또렷하게 나는 아일랜드인인 아무개 올시다라고 말한다. 너도 그렇게 하여 어떤 때에나 반드시 나는 조선사람 홍국선입니다라고 말하여 결코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을 생략해서는 안된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가 일본군 고위 장교로 근무하는 것에 반감을 품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언급하자, 홍사익은 일본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여 동등한 국민임을 입증하는 것이 조선인의 권리 획득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며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정미7적으로 꼽히는 이병무와 마찬가지로 일본 육군 중장을 지냈던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26] 그는 조선식 성명을 지키고 조선인임을 인정받으면서도 일본 국민이 될 수 있으며, 다민족 국가를 이루는 것이 강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조선총독부 역시 그에게 창씨개명을 권고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제가 창씨개명이 강제적이 아니라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26]
4. 평가와 비판
그는 돈 욕심이 없었고 공직 생활 중 뇌물을 받지 않아 가족들은 가난하게 지냈다고 전해진다. 홍사익은 '일본 제국에 충성을 다한, 개인적으로는 훌륭하고 청렴결백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있다.[27] 언론인 송건호(宋建鎬) 역시 그를 "평생동안 이재에는 무관심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말기 필리핀에서 포로수용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연합군 포로들의 학살을 묵인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송건호는 홍사익에 대한 비판은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가 한국 민족을 철저히 무시하는 정책으로 일관되었고, 한국인을 '반도인'이라 부르며 일본을 '내지'라고 칭하던 상황에서 한국인이 일본군 중장까지 승진한 것은 오히려 민족적 긍지를 높이는 측면도 있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당시 홍사익을 보는 시각과 해방 후 그를 평가하는 가치 판단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2년 8월, 홍사익의 사망일 즈음하여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한국의 여러 언론에서 그를 추도하는 칼럼이나 기사를 준비했지만, 대부분 압수되거나 검열 삭제되었다.
5. 가족 관계
홍사익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 관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아버지 | 홍이유(洪理裕) | ||
| 형 | 홍사용(洪思容) | 1870년~? | |
| 누나 | 남양 홍씨 | ||
| 형 | ? | 이름 미상 | |
| 본인 | 홍사익(洪思翊) | 1889년~1946년 | |
| 부인 (초배) | 조숙원(趙淑元) | 1885년~1943년 | 오랜 병상 생활 끝에 병사[28] |
| 아들 (장남) | 홍국선(洪國善) | ?~1984년 | 와세다 대학 졸업, 조선은행 근무 중 이승만 지시로 해임[7][9], 육군 대령 전역, 한국광업공사 이사 역임[9], 1984년 경기도 안성에서 사망[28][9] |
| 부인 (후배) | 이청영(李淸榮) | 1907년~1978년 |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현 오차노미즈 여자대학교) 졸업[28][9], 해방 후 미국 이민,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28][9] |
| 아들 (차남) | 홍현선(洪顯善) | ?~?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입학[9], 어머니와 함께 미국 이민[9], 로스앤젤레스 거주[28] |
| 아들 (삼남) | 홍달선(洪達善) | 정보 부족 |
첫 번째 부인 조숙원은 오랜 기간 병상에 있다가 1943년에 사망했다.[28] 장남 홍국선은 와세다 대학 졸업 후 조선은행에서 근무했으나,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해임되었다.[7][9] 이후 군 복무와 공기업 임원을 거쳐 1984년 고향 안성에서 사망했으며, 현재 안성 남양 홍씨 문중산에는 그의 유품을 묻은 묘(비석명: 남양공홍사익 배한양조씨지묘)가 있다.[28][9]
두 번째 부인 이청영은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해방 후 귀국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냉대와[28] '친일파 가족'이라는 사회적 비난 및 압박에 시달렸다.[28][7] 모든 직업에서 배제된[9] 그녀는 한국전쟁 이후 미국 이민을 결심했으나 여비가 부족하여 당시 일본 수상 요시다 시게루에게 편지를 보냈고, 요시다 수상의 도움(100만엔)으로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28]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들 홍현선과 함께 거주하다 1978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28][9]
차남 홍현선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9]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갔다.[9][28] 삼남 홍달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6. 일화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떳떳이 조선인임을 밝히면서도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인물이었는데, 이는 왕족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유일한 사례이다. 다만, 일제가 '창씨개명이 강제적인 것이 아님'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그를 이용했기 때문에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는 설명도 있다.[29]
이승만은 그를 유독 미워했다고 전해진다. 홍사익의 아들 홍국선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을 거쳐 그 후신인 한국은행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국선이 한국은행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파면되었다.[7][9]
해방 후 한국에서 홍사익은 친일파로 규탄받았고, 그의 가족 역시 어려움을 겪었다. 장남 홍국선은 이승만의 명령으로 한국은행에서 해임되었으나,[7] 이후 군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고, 한국광업공사 이사로 재직하다 1984년 경기도 안성에서 사망했다.[9] 홍사익의 부인 이청영은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의 전신인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나, 한국 귀국 후 모든 직업에서 배제되어 일본으로 돌아가 약 6년간 거주했다. 차남 홍현선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으나, 이후 어머니 이청영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이청영은 197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7][9]
그는 박승환과 친일 인사로 알려진 김태덕(金泰德)의 딸을 중매하고 결혼까지 주선하기도 했다.
전시 중에 조선 출신 탈영병을 자신의 집에 숨겨준 적이 있다. 당시 일본군 헌병이 "탈영병을 숨겨준 조선인의 집"이라는 정보만 듣고 홍사익의 집을 수색하러 왔다가, 일본 제국 육군 소장 군복을 입은 그가 나오자 깜짝 놀라 그대로 도망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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