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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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즈베크 칸은 킵차크 칸국(일명 금장 칸국)의 칸으로, 1312년 삼촌 토크타 칸의 사망 이후 즉위했다. 그는 바투의 증손자이며, 몽케 테무르를 할아버지로 둔다.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샤머니즘과 불교를 믿는 세력을 억압하여 킵차크 칸국에 이슬람을 확고히 전파했다. 그는 3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유지하며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를 맺고, 맘루크 왕조, 비잔틴 제국, 러시아 공국 등과 다양한 외교, 군사적 관계를 맺었다. 그의 치세 동안 사라이는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우즈베크"라는 이름은 투르크 계통으로, 징기스 칸 이전에도 중동에서 사용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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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크 칸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칸 |
통치 기간 | 1313년 – 1341년 |
이전 통치자 | 토크타 |
다음 통치자 | 티니 베그 |
출생 연도 | 1282년 |
사망 연도 | 1341년 |
사망 장소 | 사라이 |
왕조 | 조치 울루스 |
가문 | 보르지긴 가문 |
아버지 | 토그릴차 |
종교 | 수니 이슬람 |
언어 | 튀르크어족/쿠만어 |
이름 (페르시아어) | غیاث الدین محمد اوزبک خان (Ghiyâsuddin Mohammad Uzbak Khân)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불루간 하툰 타이둘라 하툰 카바크 하툰 우르두자 하툰 바얄룬 하툰 셰리툼가 하툰 마리아 하툰 |
자녀 | 자니 베그 티니 베그 |
2. 생애
우즈베크는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토그릴차이다. 토그릴차는 토데 멩구 (1280-1287년 재위)를 전복시켰으나, 이후 그의 형제 톡타 (1291-1312년 재위)에게 처형당했다. 톡타는 토그릴차의 미망인을 아내로 삼고 그의 아들 우즈베크를 킵차크 칸국의 먼 지역인 호라즘 또는 체르케스인의 땅으로 유배 보냈다.
우즈베크는 수니파 수피 부하라 출신의 사이드이자 야사비 교단의 셰이크인 이븐 압둘 하미드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313년 1월, 삼촌 톡타가 사망하자 전임 칸의 재상 테무르 쿠틀루그와 불라간(또는 바얄룬) 카툰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많은 몽골 귀족들이 그의 즉위를 반대하여 암살 음모를 꾸몄다. 우즈베크는 이 음모를 알아차리고 반란군을 진압했다.[3] 그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샤머니즘과 불교를 믿는 공모자들을 엄하게 진압했다. 우즈베크는 킵차크 칸국에 이슬람을 확고히 전파하고 주변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을 허용했다.
우즈베크는 경쟁자인 원나라의 카안 아이유르바르와다 부얀투의 사절들이 반란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원나라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4] 킵차크 칸국의 동쪽을 다스리던 샤머니스트 일바산은 1320년에 살해되었다. 우즈베크는 무슬림 무바라크 쿠와자를 백장 칸국의 왕위에 앉혔지만, 그들의 독립을 억제했다. 장기적으로 이슬람교는 칸이 칸국 내의 파벌 간의 투쟁을 제거하고 국가 제도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러시아 학자 레프 구밀료프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즈베크가 칸국을 술탄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5] 우즈베크 이후 킵차크 칸국의 칸들은 모두 무슬림이었다.[6]
우즈베크는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관대했다. 교황 요한 22세는 우즈베크가 기독교인들을 친절하게 대해준 것에 대해 감사 편지를 보냈다.[7] 우즈베크는 표트르 대주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뜻과 권능, 위대함과 지극히 높으신 분의 뜻에 따라! 표트르가 수장으로 있는 대주교 교회를 어떤 사람도 모욕하지 말라, 그의 봉사나 그의 성직자를 모욕하지 말라. 어떤 사람도 그들의 재산, 재화 또는 사람을 압류하지 말라, 어떤 사람도 교회의 일에 간섭하지 말라... 그들의 법, 교회 및 수도원과 예배당을 존중해야 한다. 이 종교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어떤 구실로도 변명할 수 없으며,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한다.[1]
2. 1. 출생과 가계
칭기즈 칸의 후손이자 킵차크 칸국의 유력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는 토그릴차(? - 1300년?)이며, 바투의 증손자이자 제6대 칸인 몽케 테무르를 할아버지로 둔다.[36] 토그릴차는 토데 멩구 (1280-1287년 재위)를 전복시킨 인물이다.[3]토그릴차는 맏형인 아르구이와 함께 트레 부카, 곤체크 형제의 쿠데타에 가담하여 토데 멩구 칸을 폐위시켰다. 조치 울루스는 한때 트레 부카, 토그릴차, 아르구이, 곤체크 4자에 의한 공동 통치가 이루어졌다.[37]
『집사』「조치 칸 기」에는 칸에 즉위한 트레 부카가 노가이의 계략에 의해 토크타에게 살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 트레 부카는 생모의 조언에 따라 동생 곤체크와 노가이의 막영을 방문했다. 맘루크 왕조의 역사가 누와일리에 따르면, 이때 토그릴차도 트레 부카를 따라갔으며, 노가이의 명령에 의해 트레 부카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38]
누와일리의 정보에 따르면 노가이의 명령으로 트레 부카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그 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 따라서 트레 부카, 아르구이 등 다른 형제들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티무르 왕조의 역사가 나탄지지는 그를 우익·청장(쿄쿠 오르다)의 초대 당주로 보고 있어 구명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톡타는 토그릴차의 미망인을 아내로 삼고 그의 아들 우즈베크를 킵차크 칸국의 먼 지역( 호라즘 또는 체르케스인의 땅)으로 유배 보냈다. 이후 우즈베크는 수니파 수피 부하라 출신의 사이드이자 야사비 교단의 셰이크인 이븐 압둘 하미드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했다.[2]
2. 2. 즉위 과정
금장 한국(킵차크 한국)의 칸이었던 삼촌 토크타 칸이 1312년 1월 사망한 후, 우즈베크는 이전 칸의 무슬림 환관의 도움을 받아 칸위에 올랐다.[2] 수니파 수피 부하라 출신의 사이드이자 야사비 교단의 셰이크인 이븐 압둘 하미드에 의해 이슬람으로 개종한 우즈베크는 1313년 1월 삼촌 톡타의 사망과 함께 전임 칸의 재상 테무르 쿠틀루그와 불라간(또는 바얄룬) 카툰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2]그러나 몽골 귀족들은 우즈베크의 즉위에 반대하며 암살 음모를 꾸몄다. 우즈베크는 이 음모를 발각하고 반란군을 진압했다.[3]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샤머니즘과 불교를 믿는 반대파들을 숙청해야 했다.[4]
우즈베크 칸의 즉위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사건 | 내용 |
---|---|
삼촌 토크타 칸의 사망 | 1312년 1월, 우즈베크 칸의 삼촌이자 킵차크 칸국의 칸이었던 토크타 칸이 사망함. |
권력 투쟁 | 우즈베크는 이전 칸의 무슬림 환관, 테무르 쿠틀루그, 불라간(또는 바얄룬) 카툰의 도움을 받아 칸위를 요구함. 그러나 몽골 귀족들은 반대하며 암살 음모를 꾸밈. |
반대파 진압 및 즉위 | 우즈베크는 암살 음모를 발각하고 반란군을 진압함. 1313년 1월, 호라즘을 통치하는 사촌 쿠투르그 티무르와 토그릴차의 정실 부인 바야룬의 지지를 받아 칸으로 즉위했다.[40] |
이슬람교 국교화 |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샤머니즘과 불교 신봉자들을 숙청함. |
우즈베크 칸은 킵차크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칸으로, 그의 통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 걸쳐 킵차크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즈베크는 즉위에 공헌한 쿠투르그 티무르를 군 최고 사령관으로 승진시켰다.[41] 또한, 바투와 오르다를 제외한 조치의 아들들의 자손들을 불러, 그들 중 시반의 자손을 제외한 자들을 키야트족의 이사타이에게 주었다.[42] 1314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서신과 선물을 보낸 사절을 파견했다.[43]
3. 통치와 업적
그의 재위시 킵차크 출신의 친위대사령관은 엘 테무르였다. 그는 원나라로 가서 무종의 측근이 되었으며, 1312년에는 원나라로부터 영숙왕(寧肅王) 직위를 받았다.
3. 1. 중앙집권화와 행정 개혁
우즈베크 칸은 1312년 1월 삼촌 토크타가 사망한 후, 이전 칸의 무슬림 환관의 도움으로 즉위하였다. 몽골인들은 우즈베크 칸에게 저항하였고, 원 인종에게 사자를 보내 군사 지원을 받아 우즈베크 칸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우즈베크 칸은 이 계획을 발각하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는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였다.
우즈베크 칸은 칭기스칸의 몽골인들을 점차적으로 제거하였다. 1320년에는 백장 한국의 일바산 칸이 마지막으로 피살되었다.[1]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교도 무바라크 화자를 백장 한국의 왕좌에 즉위시켰다. 이슬람은 칸이 한국 내의 파간의 투쟁을 제거하고 국가 기관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1338년 우즈베크 칸은 원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자립을 선언하며 원나라의 봉지에서 이탈했다.[2]
3. 2. 군사력 강화와 대외 팽창
우즈베크 칸은 3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여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군대를 유지했다. 그는 일 칸국을 상대로 1319년, 1325년, 1335년에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일 칸국의 지휘관 추판은 우즈베크의 처음 두 번의 공격을 격퇴했고, 1325년에는 조치 울루스 깊숙이 침공하기도 했다.[8] 1318년에는 코카서스의 데르벤트를 넘어 일 칸국을 침입하여 어린 아부 사이드 칸과 대치했지만, 장군 초반이 이끄는 20,000명의 군대가 진격해 온다는 보고를 받자 철수했다.[45] 1334년 8월에 다시 일 칸국을 친정했지만, 이듬해 1335년에 새로 일 칸국의 칸으로 추대된 알파 케운에게 공격을 받아 철수했다.[49]
우즈베크는 맘루크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카이로의 광장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정도였다. 칸은 이전 칸의 누이인 툴룬부야 공주를 맘루크 술탄과 결혼시켰지만, 그녀는 몇 년 만에 사망했다. 우즈베크는 맘루크 술탄이 툴룬부야와 이혼하고 일 칸국에 대한 공동 침공에 대해 우유부단한 것에 실망했다.[8] 1316년에 맘루크 왕조의 술탄 나스르 무함마드가 칭기즈 칸의 일족인 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고, 결혼 조건을 놓고 양국은 분쟁을 벌여 한 번은 혼담이 무산되었지만, 우즈베크의 제안으로 베르케 칸의 딸과 나스르 무함마드의 혼담이 성사되었다.[47] 1320년 4월에 베르케의 딸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고, 맘루크 왕조 측은 호화로운 별궁을 지어 그녀를 환대했다.[48] 1323년, 이집트와 일 칸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동맹은 무효화되었고 맘루크는 일 칸국 침공을 거부했다.
에센 부카-아유르바르와다 전쟁 전과 그 기간 동안, 차카타이 칸국의 차카타이 칸 에센 부카 1세는 1313년과 1316년에 원나라 황제인 아유르바르와다 부얀투 칸에 대항하기 위해 우즈베크 칸의 지원을 얻으려 했다. 에센 부카는 우즈베크에게 대칸이 그를 호르데의 왕좌에서 몰아내고 다른 조치드 출신 칸을 세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우즈베크의 재상은 그를 설득하여 이를 믿지 않도록 했고 칸은 에센 부카를 돕는 것을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즈베크는 통치 초기 기간 동안 원나라가 금장 호르드에 미치는 모든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칸의 원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324년에 개선되었다.[9] 아유르바르와다 부얀투 칸은 그에게 금장 호르드 (원나라 자료에서 조치의 울루스)를 통치할 권리를 부여했다.[10] 1330년대에 이르러 우즈베크는 몽골 원나라 황제에게 조공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 대가로 중국과 몽골에 있는 조치드 소유에서 자신의 몫을 받았다.[4] 1338년 우즈베크 칸은 원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자립을 선언, 원나라의 봉지에서 이탈했다.
우즈베크는 1320년부터 1332년까지 제2차 불가리아 제국 및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그는 비잔틴과 중세 세르비아에 대항한 불가리아 차르 미하일 시쉬만의 전쟁을 부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트라키아를 습격했으며, 이는 1319년에 시작되었다. 그의 군대는 1324년에는 40일 동안, 1337년에는 15일 동안 트라키아를 약탈하여 3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11] 1341년 우즈베크의 죽음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공격적인 정책을 계속하지 않았고 불가리아와의 관계는 중단되었다.[12] 1330년 세르비아에 대한 몽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비잔틴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는 그의 사생딸을 우즈베크와 결혼시켰다고 전해지지만,[13][14] 안드로니코스 통치의 말년에 관계가 악화되었고, 몽골군은 1320년에서 1324년 사이에 트라키아를 습격하여 비잔틴 항구인 비치나 마카리아를 점령했다. 안드로니코스의 딸은 바얄룬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는데, 이슬람으로의 강제 개종을 두려워하여 비잔틴 제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14][15] 헝가리 왕국의 남동부에서 왈라키아와 그 통치자 바사라브 1세는 1324년 이후 우즈베크의 지원을 받아 독립 세력이 되었다.
3. 3. 경제 발전과 무역 장려
우즈베크 칸의 통치 기간 동안, 사라이는 정치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주요 상업 중심지이자 산업 무역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다. 이슬람을 성공적으로 전파하기 위해서는 모스크와 목욕탕과 같은 "정교한 장소"를 건설해야 했는데, 이는 무슬림 문화의 중요한 요소였다. 사라이는 유럽, 아시아 및 이슬람 국가뿐만 아니라 중동에서 온 상인들을 끌어들였다. 맘루크 술탄국과의 유대 관계가 강화되면서 노예 무역이 번성했다. 성공적인 상업 혁명은 새로운 시장과 대상(隊商, 캐러밴)을 필요로 했는데, "상인들이 길을 찾는 곳"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의 성장과 생산의 증가는 항상 인구 증가를 자극했다. 이 지역의 주택이 증가하면서 수도는 대규모 무슬림 정부의 중심지로 변모했고, 적절한 모습과 지위를 부여했다. 오즈 베크는 실제로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되었고, 공식적으로 사라이 알 제디드, 즉 뉴 사라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3. 4. 이슬람 국교화와 문화 발전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였다. 이슬람은 칸이 한국 내의 파간의 투쟁을 제거하고 나라의 기관을 안정시킬 수 있게 하였다. 조치 울루스 내 무슬림의 수는 적었고, 우즈베크는 영내 비무슬림에게 무력으로 개종과 복종을 강요했다. 1314년에 맘루크 왕조에 파견된 사절은 우즈베크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위해 싸웠고, 반항하는 자에게 탄압을 가했다고 말했다.[58]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독교도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여 교황 요한 22세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59]
그의 치세부터 왕족과 제후를 비롯하여 조치 울루스 영내 전역에서 유목 제세력의 무슬림화가 현저해졌다. 우즈베크 이후의 조치 울루스의 군주는 모두 이슬람교를 신봉했다.[60] 티무르 왕조나 무굴 제국 등의 페르시아어, 아랍어 자료에서 샤이바니 왕조의 군주를 비롯한 조치 울루스계의 제 세력은 "우즈베키얀(우즈베크의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14-15세기에 걸쳐 무슬림화가 촉진된 조치 울루스 내부의 제 세력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조치 가문의 계통이자 무슬림임을 표방하고, 그 권위를 무슬림인 조치 울루스의 종주 '''우즈베크 칸'''에 연유하여 불렀으며, 타칭 내지 자칭일 것으로 현재 연구에서 유력하게 여겨지고 있다.
4. 대외 관계
우즈베크 칸은 킵차크 한국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로서 주변 국가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일 칸국과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두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1319년, 1325년, 1335년에 걸쳐 원정을 감행했으나, 1323년 맘루크 왕조와 일 칸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맘루크 왕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8]
맘루크 왕조와는 일 칸국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으려 했다. 카이로의 한 광장이 우즈베크 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정도였다.[8] 1320년에는 맘루크 왕조의 술탄 나스르 무함마드와 베르케 칸의 딸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47][48] 그러나 맘루크 술탄이 일 칸국과의 공동 침공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비잔틴 제국과는 전쟁과 평화를 반복했다. 1320년부터 1332년까지 전쟁을 벌여 트라키아를 약탈하기도 했지만,[11]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딸과 결혼하면서 일시적으로 관계가 개선되기도 했다.[13][14]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 말년에 다시 관계가 악화되어 몽골군이 트라키아를 습격하기도 했다.[14][15]
러시아 공국들에 대해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을 지원하며 트베리 공국을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모스크바의 유리와 이반 칼리타를 지원하여 트베리 공작 4명을 처형하기도 했다.[16] 1327년 트베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1332년에는 이반을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했다.
4. 1. 일 칸국과의 관계
우즈베크 칸은 30만 명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며 일 칸국과 여러 차례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1319년, 1325년, 1335년에 아제르바이잔을 놓고 일 칸국을 상대로 원정을 감행했다.[8] 처음 두 번의 원정은 일 칸국의 지휘관 추판에 의해 격퇴되었고, 추판은 1325년에 오히려 조치 울루스 깊숙이 침공하기도 했다.[8]1315년에는 과거 일 칸국에 항복했던 조치 울루스의 왕족 바바가 호라즘을 침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44] 우즈베크 칸은 일 칸국에 항의했고, 일 칸국의 칸 올제이투가 바바와 그의 아들을 처형하면서 문제는 해결되었다.[44] 1318년에는 코카서스의 데르벤트를 넘어 일 칸국을 침입했지만, 장군 초반이 이끄는 군대의 접근 소식에 철수했다.[45]
우즈베크 칸은 맘루크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 일 칸국에 대항하려 했다.[8] 카이로의 광장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정도였다.[8] 칸은 이전 칸의 누이인 툴룬부야 공주를 맘루크 술탄과 결혼시켰으나, 그녀는 몇 년 만에 사망했다.[8] 1323년 이집트와 일 칸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동맹은 무효화되었고, 맘루크는 일 칸국 침공을 거부했다.[8]
1334년 8월, 우즈베크 칸은 다시 일 칸국을 친정했지만, 이듬해인 1335년에 알파 케운에게 공격받아 철수했다.[49] 우즈베크 칸의 다음 침입은 아부 사이드의 죽음과 일치했다. 그러나 날씨가 나빠졌고, 새로운 일 칸인 아르파 케운이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우즈베크 칸의 군대는 철수해야 했다.[8]
4. 2. 맘루크 왕조와의 관계
우즈베크 칸은 일 칸국에 대항하기 위해 맘루크 이집트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카이로의 한 광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될 정도였다.[8] 그는 이전 칸의 누이 툴룬부야 공주를 맘루크 술탄과 결혼시켰으나, 공주는 몇 년 만에 사망했다. 우즈베크 칸은 자신의 상인들에게 맘루크 대사에게 27,000 디나르를 빌려주어 사라이에서 신부를 위한 연회를 지원하도록 했다.[8]1316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나스르 무함마드는 칭기즈 칸 가문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제안했다.[46] 결혼 조건 문제로 양국은 갈등을 겪었고, 혼담이 무산될 뻔했지만, 우즈베크 칸의 제안으로 베르케 칸의 딸과 나스르 무함마드의 혼담이 성사되었다.[47] 1320년 4월, 베르케의 딸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고, 맘루크 왕조는 호화로운 별궁을 지어 그녀를 환대했다.[48]
그러나 우즈베크 칸은 맘루크 술탄이 툴룬부야와 이혼하고 일 칸국에 대한 공동 침공에 소극적인 것에 실망했다. 1323년 이집트와 일 칸국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동맹은 무산되었고, 맘루크는 일 칸국 침공을 거부했다.
4. 3.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우즈베크 칸은 비잔틴 제국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1320년부터 1332년까지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벌였으며, 중세 세르비아에 대항한 불가리아 차르 미하일 시쉬만의 전쟁을 부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트라키아를 반복적으로 습격했다.[11] 1324년에는 40일 동안, 1337년에는 15일 동안 트라키아를 약탈하여 3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11] 1341년 우즈베크 칸이 사망한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이러한 공격적인 정책을 계속 추진하지 않았고, 불가리아와의 관계는 중단되었다.[12]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는 자신의 사생딸을 우즈베크 칸과 결혼시키기도 했지만,[13][14] 안드로니코스 3세의 통치 말년에 관계가 악화되어 몽골군이 1320년에서 1324년 사이에 트라키아를 습격했고, 비잔틴 항구인 비치나 마카리아를 점령하기도 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딸은 바얄룬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비잔틴 제국으로 탈출했다.[14][15]
4. 4. 러시아 공국들과의 관계
외즐 베그는 모스크바의 초기 공작들, 즉 그의 매형 모스크바의 유리와 유리의 계승자인 이반 칼리타를 트베리의 공작들에 대항하여 지지했다. 트베리의 공작 4명 (미하일 트베르스코이, 그의 아들들 드미트리, 알렉산드르와 그의 손자 표도르)는 모두 외즐 베그의 명령에 따라 사라이에서 살해되었다.[16]
1317년, 미하일 야로슬라비치는 보르테네보라는 마을에서 유리를 물리치고, 유리의 아내 콘차카를 포획했다. 콘차카는 미하일의 감금 상태에서 사망했고, 유리는 칸에게 그녀가 미하일의 명령으로 독살되었다고 알렸다. 미하일은 골든 호드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1318년 11월에 참수되었다.[16]
드미트리와 그의 형제 알렉산드르는 유리와 전투를 벌이고, 호드에서 그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 1322년 드미트리가 칸에게 유리가 호드에 바쳐야 할 공물을 착복했다고 설득하여 대공 왕좌에 대한 야를리크를 획득했다. 유리는 재판을 위해 사라이로 소환되었지만, 1325년 11월 21일 드미트리에 의해 살해되었다. 외즐 베그는 1326년에 드미트리를 처형했다.

1327년 8월, 칸의 사촌인 바스카크 셰브칼과 그의 타타르족이 트베리에서 살해되고 반란이 일어났다. 트베리의 공작 알렉산드르는 프스코프로 도망쳤다. 이반이 이끄는 50,000명의 몽골-타타르 군대가 트베리의 봉기를 진압했다. 외즐 베그는 1332년에 이반을 블라디미르의 대공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드르는 1337년에 트베리에 대한 공작 야를리크를 받았으나, 이반의 음모로 인해 1339년에 처형당했다.
외즐 베그는 이반의 아들들을 환영했고, 1340년에 시메온을 대공으로 임명했다. 시메온은 리투아니아에 대항하기 위해 칸으로부터 더 많은 권한을 부여받았다. 외즐 베그는 또한 리투아니아에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
1340년 이반의 뒤를 이어 모스크바 대공이 된 세묜에게 우즈베크는 호의를 보이며, 리투아니아에 대항하는 병력을 공급했다.
5. 평가와 유산
우즈베크 칸은 킵차크 한국(금장 한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칸으로, 그의 통치 기간은 킵차크 한국의 전성기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여 킵차크 한국 내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1312년 삼촌 토크타 칸이 사망한 후, 우즈베크 칸은 이전 칸의 무슬림 환관의 도움을 받아 즉위했다. 그러나 몽골인들은 이에 저항했고, 원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여 우즈베크 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우즈베크 칸은 이 계획을 발각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14~15세기 아랍인 및 페르시아인 작가들은 우즈베크 칸을 유능한 정치가이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물로 묘사했다. 이븐 바투타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일곱 왕 중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32] "우즈베크"라는 이름은 투르크계 기원으로, 징기스 칸의 원정 이전에도 중동에서 언급되었다. 오사마 빈 문키드의 "교화의 책"에는 1115~1116년 하마단 통치자의 군대 장군 중 한 명이 우즈베크였다는 기록이 있다.[34]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에 따르면, 타브리즈에서 통치했던 마지막 일데기지드 투르크 왕조의 대표자는 우즈베크 무자파르(1210~1225)였다.[35]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몽골인들을 숙청하는 등 강압적인 통치를 펼쳤다는 비판도 받는다. 1338년 우즈베크 칸은 원나라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자립을 선언했다.
5. 1. 긍정적 평가
이븐 바투타를 비롯한 14~15세기 아랍인 및 페르시아인 작가들은 우즈베크 칸을 유능한 정치가이자 따뜻한 마음을 가진 배려심 깊은 인물로 묘사했다. 알-무파달은 그를 좋은 외모와 훌륭한 성품을 지닌 용감하고 정력적인 무슬림 젊은이로 묘사했다. 지리학자이자 역사가인 알-아이니는 "그는 용감하고 용감한 사람이었고, 종교적이고 경건했으며, 법학자를 존경하고, 과학자를 사랑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신뢰하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셰이크를 방문하고 그들에게 선행을 했다."라고 썼다.[32]알-비르잘리는 "톡타 왕이 죽었을 때, 30세 정도의 우즈베크 칸이 그 뒤를 이어 통치했다. 그는 이슬람을 신봉했으며, 지능, 좋은 외모, 몸매로 구별되었다."라고 썼다. 투르크멘 역사가 아드-다하비는 "...용감한 영웅, 외모가 잘생겼으며, 많은 아미르와 마법사를 파괴한 무슬림."이라고 묘사했다. 우즈베크 칸에게 적대적이었던 페르시아 역사가 와사프조차도 "경건한 왕자 우즈베크...는 신성한 믿음과 왕의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라며 칭찬했다.[33]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고, 킵차크 한국 내에서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치 울루스 내 무슬림의 수는 적었지만,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위해 노력했고, 이후 조치 울루스의 군주는 모두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었다.[58][60] 이러한 점은 킵차크 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진다.
5. 2. 부정적 평가
우즈베크 칸은 이슬람을 국교로 채택하면서 몽골인들의 저항을 받았고, 원나라의 지원을 받아 자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많은 칭기스 칸의 몽골인들을 숙청하는등 종교적 탄압과 반대파 숙청을 자행했다는 비판을 받는다.[32] 특히 1320년에는 백장 한국의 일바산 칸을 살해하기도 했다.[32]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 방식은 그의 부정적인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5. 3. 유산
우즈베크 칸의 통치 기간 동안 조치 울루스 영토 내에서 왕족과 제후를 포함한 유목 세력의 이슬람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우즈베크 칸 이후 조치 울루스의 모든 군주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했다.[60] 티무르 왕조와 무굴 제국 등에서 사용된 페르시아어 및 아랍어 자료를 보면, 샤이바니 왕조의 군주를 비롯한 조치 울루스계 세력들은 "우즈베키얀(우즈베크의 사람들)"이라고 불렸다. 이는 14~15세기에 걸쳐 이슬람화가 진전된 조치 울루스 내부 세력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조치 가문의 계통이자 무슬림으로 인식하고, 그 권위를 무슬림인 조치 울루스의 종주 '''우즈베크 칸'''에게서 찾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명칭은 다른 세력이 부르거나 스스로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현재 연구에서 유력하게 추정된다.6. 가족 관계
우즈베크 칸은 여러 명의 부인과 첩을 두었으며, 그의 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특히, 어느 어머니에게서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지는 항상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토그릴차는 칭기즈 칸의 후손들 중 하나였으나, 형제인 톡타에게 처형당했다. 톡타는 토그릴차의 미망인을 아내로 삼았고, 우즈베크는 킵차크 칸국의 먼 지역으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구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토그릴차 | 칭기즈 칸의 후손, 토데 멩구를 전복시켰으나 형제 톡타에게 처형당함 |
삼촌 | 톡타 | 토그릴차를 처형하고 그의 미망인을 아내로 삼음 |
6. 1. 부인과 첩
우즈베크 칸은 여러 부인과 첩을 두었다. 어느 어머니에게서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지는 항상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인:
- 불루간 하툰 (1312년경) — 토그릴차와 톡타의 미망인[18]
- 바얄룬 하툰 (1323년 사망)[18]
- 타이둘라 하툰 (1360년 사망)[19] — 원래 기독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있음[20]
- 케베크 하툰 — 아미르 난그다이의 딸[21]
- 바얄룬 하툰 (두 번째) — (사생아일 가능성이 높음)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딸[22]
- 오르두자 하툰 — ''아미르-에 울루스'' 이사 베그의 딸[23][31]
- 셰리툼가 하툰[24]
6. 2. 아들과 딸
우즈베크 칸은 여러 명의 부인과 첩을 두었으며, 어느 어머니에게서 어떤 아이가 태어났는지는 항상 명확하지 않다.부인:
- 불루간 하툰 (1312년경) — 토그릴차와 톡타의 미망인
- 바얄룬 하툰 (1323년 사망)[18]
- 타이둘라 하툰 (1360년 사망)[19] — 원래 기독교 신자였을 가능성이 있음[20]
- 케베크 하툰 — 아미르 난그다이의 딸[21]
- 바얄룬 하툰 (두 번째) — (사생아일 가능성이 높음)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딸[22]
- 오르두자 하툰 — ''아미르-에 울루스'' 이사 베그의 딸[23][31]
- 셰리툼가 하툰[24]
아들:
- 티무르 베그 (1330년 사망)[25]
- 티니 베그 (재위 1341–1342년) (타이둘라 하툰 소생)[26]
- 자니 베그 (재위 1342–1357년) (타이둘라 하툰 소생)[26]
- 히드르 베그 (1342년 사망)[27]
- 툴룬 베그[28]
- 이란 베그 (킬디 베그의 아버지)[29]
딸:
- 이트 퀴추유크 (바얄룬 하툰 소생)[30] — ''아미르-에 울루스'' 이사 베그와 결혼[31]
- 딸 (바얄룬 하툰 소생?) — 아미르 알리 b. 아르자크와 결혼
- 딸 (타이둘라 하툰 소생?) — 아미르 쿠틀루 테뮤르의 아들 하룬 베그와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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