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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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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도병(제2차 세계 대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병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징병 유예 대상이었던 대학생들을 징집한 제도이다. 1943년, 일본은 중일 전쟁 및 태평양 전쟁의 장기화로 병력 부족에 시달리자, 문과 계열 대학생들의 징병 유예를 폐지하고 학도병으로 징집했다. 일본인 학도병은 주로 하급 장교나 하사관으로 충원되었으며, 한국인 학도병은 강제 동원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복무했다. 전쟁 후, 일부 학도병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많은 수가 시베리아 억류, 전범 재판, 정신적 트라우마 등으로 고통받았다. 전몰 학도병들의 유고집인 '와다쓰미의 소리'는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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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 (제2차 세계 대전)
기본 정보
학도출진 당시의 모습
학도출진 당시의 모습
시기제2차 세계 대전 중
관련 인물홍사상
윤동주
김석범
아나키즘 계열의 학병 거부자들
배경
배경일본의 전시 동원 체제 강화
국가총동원법
징병제
계기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전황 악화
경과
경과1943년 10월 21일: '학도출진' 담화 발표
1943년 12월 1일: 징병 검사 실시, 입영
1944년: 일본군에 배속, 훈련 후 각 전선에 투입
규모
규모일본인 학도병: 약 13만 명
조선인 학도병: 약 4,385명
특징
특징지식인 계층의 강제 동원
사상적 갈등과 저항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성
결과
결과다수의 학도병 사망 또는 부상
전후 사회에 대한 깊은 상처와 반성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한 각성
영향
영향전후 문학,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 반영
전쟁의 역사적 교훈과 평화의 중요성 강조
징병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 형성
참고 자료
참고 자료아시아 역사
전쟁
일본 제국
한국사
징병제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서적
관련 서적《학도병의 절규》 (김석범)
《어둠의 혼》 (홍사상)
기타
관련 다큐멘터리KBS 역사 스페셜 - 학도병, 그들은 왜 총을 들었나

2. 역사적 배경

1937년 중일 전쟁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1942년 이후 전황이 악화되면서 심각한 병력 부족 문제에 직면했다. 광대한 전선 유지와 늘어나는 전사자로 인해 병력 충원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기존 일본병역법에 따라 대학, 고등학교, 전문학교 등 고등 교육기관 학생들은 만 26세까지 징병이 유예되는 혜택을 받고 있었다.[4]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병력 부족이 심화되자 일본 정부는 징병 유예 대상을 점차 축소해 나갔다.

마침내 1943년 10월 1일, 도조 내각은 "'''재학 징집 연기 임시 특례'''"(쇼와 18년 칙령 제755호)를 공포하여[9][3], 기존의 징병 유예 제도를 대폭 수정했다. 이 조치로 이공계와 교원 양성계 학교를 제외한 문과계 고등 교육기관 재학생들의 징병 유예가 전면 철폐되었다. 이는 학업 중인 학생들까지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결정으로, 이후 학도병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배경이 되었다.

2. 1. 일본인 학도병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1941년 발발한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은 심각한 병력 부족에 직면했다. 특히 1942년 이후 전황이 악화되고 전사자가 급증하자, 기존에 대학·고등학교·전문학교 학생들에게 부여되던 26세까지의 징병 유예 제도를 점차 축소하기 시작했다.[4] 전시 상황 속에서 일부 학생들의 불성실한 태도가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5], 이는 징병 유예 제도 폐지의 여론적 기반이 되었다.[6]

1941년 10월, 대학과 전문학교의 수업 연한을 3개월 단축하고 졸업생을 대상으로 임시 징병 검사를 실시하여 1942년 2월에 입대시키는 조치가 시행되었다.[7] 1942년에는 예과와 고등학교까지 대상을 확대하여 수업 연한을 6개월 단축하고, 9월 졸업 후 10월에 입대시켰다.[8]

결정적으로 1943년 10월 1일, 도조가 이끌던 도조 내각은 "'''재학 징집 연기 임시 특례'''"(쇼와 18년 칙령 제755호)를 공포하여, 이공계와 교원 양성계를 제외한 문과계 고등 교육기관 재학생들의 징병 유예를 전면 철폐했다.[9][3] 이 조치에 따라 해당 학생들은 즉시 징병 검사를 받았고, 합격자는 그해 12월부터 일본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입대를 앞둔 1943년 10월 21일, 도쿄의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에서는 문부성 주최로 대규모 '출진 학도 장행회(出陣学徒壮行会)'가 열렸다. 도조 히데키 총리, 오카베 나가카게 문부대신 등이 참석한 이 행사에는 간토 지방의 출진 학도들을 중심으로 약 7만 명(관람 인원 포함 추정)이 동원되었다. 행사는 NHK를 통해 생중계되고 영화 "학도 출진"으로 제작되는 등, 군국주의적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 적극 활용되었다. 장행회는 가을비 속에서 출진 학도들의 행진(관병식 분열 행진곡 "부상가" 연주), 궁성(황거) 요배, 오카베 나가카게 문부대신에 의한 개전 조서 봉독, 도조 히데키 수상의 훈시,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에바시 신시로의 답사, "바다로 가자" 제창 등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경기장에서 궁성까지 행진했다. 이러한 장행회는 전국 각지에서도 열렸으나, 이듬해부터는 개최되지 않았다.

학도 출진 장행의 그림
(교토 제국대학, 스다 쿠니타로)


출진 학도 장행 조케이센


고시칸 전문학교의 학도 출진


학도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은 대부분 고학력자라는 이유로 육군의 간부 후보생, 특별 조종 견습 사관, 특별 갑종 간부 후보생이나 해군의 예비 학생, 예비 생도로 선발되어, 부족했던 하급 장교나 하사관으로 충원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옥쇄침몰이 빈번했던 최전선 격전지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열악한 병참 사정으로 인한 영양 실조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특히 1944년 말부터 패전 직전까지는 특별공격대(가미카제)에 편성되어 희생된 학도병들도 상당수 발생했다.

1943년 10월에는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 조치 방책"이 각의 결정되어 문과계 학교 축소 및 이과계 전환, 재학 입대자의 졸업 특례 등이 시행되었고, 1944년 10월에는 징병 연령이 20세에서 19세로 낮아지는 등 전쟁 막바지로 갈수록 더 많은 청년들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학도병으로 출진한 정확한 인원과 사망자 수는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 부재와 전재(戰災) 및 학제 개혁으로 인한 자료 유실 등으로 인해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약 10만 명이라는 추정치가 있으나[11], 정확한 근거는 부족하다.[12] 당시 일본의 고등 교육기관 취학률이 5% 미만이었고[13], 이공계 학생은 징병이 유예되었음을 고려하면 실제 학도병의 수는 전체 청년 인구 대비 많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연구(예: 니나가와 도시이에[10] 등)에서 추정치를 제시하고 있으나 통일된 통계는 없는 실정이다.

2. 2. 한국인 학도병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은 강제로 조선인 학생들을 학도병으로 징집했다. 1937년 중일 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투 병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에게 눈을 돌렸다. 1943년 10월, 일본은 육군성령 제48호 '육군 특별 지원병 임시 채용 규칙'을 공포하여[3], 당시 학업을 이유로 입대를 연기하고 있던 만 20세 이상의 조선인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선인 학도지원병 제도'를 시행했다.[17] 이는 대만인 학생들에게도 적용되었다.[3]

명칭은 '지원병' 제도였으나 실제로는 강제 동원이었다. 일본 당국은 학도병 모집 대상 학생의 집에 찾아가 가족을 협박하거나, 전문학교 이상의 학교에 학도병 지원 목표 인원을 할당하여 채울 것을 강요했다. 또한, 매일신보와 같은 신문을 통해 학도병 지원을 미화하고 독려하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실어 학생들의 지원을 압박했다. 문부성은 각 대학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에 대해 휴학이나 퇴학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하기도 했다.[3]

이러한 강압적인 방식으로 1943년 한 해에만 6,203명의 대상자 가운데 4,385명(다른 기록에는 4,300명 이상[3])의 조선인 학생들이 학도병으로 동원되어 1944년에 전선에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일본 본토, 중국, 한반도 등 각지로 흩어져 배치되었다. "일본을 위해 싸울 수 없다"며 징집을 거부하거나 저항한 학생들은 탄광이나 시멘트 공장 등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전선에 투입된 학도병들은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받지 못한 채 총알받이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전투 경험이 부족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전투 중 목숨을 잃기 쉬웠으며, 전쟁 막바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과 열악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2. 3. 대만인 학도병

1943년(쇼와 18년) 징병 대상자가 확대되면서 학도 출진 대상이 된 이들은 주로 제국대학령 및 대학령에 따른 대학(구제 대학), 고등학교령에 따른 고등학교(구제 고등학교), 전문학교령에 따른 전문학교(구제 전문학교) 등 고등 교육 기관에 재학 중인 문과계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각 학교에 학적을 유지한 채 휴학 처리되었고, 징병 검사를 거쳐 입대하게 되었다.

반면, 이과계 학생들은 병기 개발 등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인력으로 간주되어 징병이 계속 유예되었으며, 육군이나 해군의 연구소 등에서 근로 동원 형태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농학부의 일부 학과(농업경제학과, 농학과 등) 학생들은 다른 이과계 학생들과 달리 징병 유예(소집 연기)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10]

또한, 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사범학교의 이과 계열 학과(수학, 이과) 재학생들에게도 징병 유예 제도가 계속 적용되었다.

3. 출진 학도 장행회

1943년 10월 1일, 도조 내각이 공포한 "재학 징집 연기 임시 특례" (쇼와 18년 칙령 제755호)에 따라 이공계와 교원 양성계를 제외한 문과계 고등 교육기관 재학생들의 징병 유예 조치가 철폐되었다.[9][3] 이 제1회 학도병 입대를 앞두고, 1943년 10월 21일 도쿄도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에서 문부성 학교 보국단 본부 주최로 첫 번째 '''출진 학도 장행회'''가 열렸다.

1943년 출진 학도 장행회가 열린 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


도쿄 장행회에는 도조 히데키 총리, 오카베 나가카게 문부대신 등이 참석했으며, 간토 지방의 입대 학생을 중심으로 약 7만 명이 모였다. 행사는 일본방송협회(NHK)가 2시간 반 동안 실황 중계(아나운서: 시무라 마사요리)하였고, 영화 "학도 출진"으로 제작되는 등 군부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관람석에는 징병이 유예된 이공계 학생, 중등학교 학생, 여학생 등 약 5만 명(96개교)이 지켜보았다. 도쿄도·가나가와현·지바현·사이타마현의 77개 대학·고등학교·전문학교에서 출진하는 학도들은 학교별로 대대를 편성하여 학교기를 앞세우고, 학생모와 학생복 차림에 각반을 차고 소총을 멘 채 입장 행진을 벌였다(행진곡: 관병식 분열 행진곡 "부상가", 연주: 육군 토야마 학교 군악대). 이후 궁성 요배, 오카베 나가카게 문부대신에 의한 개전 조서 봉독, 도조 히데키 총리의 훈시,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에바시 신시로의 답사, "바다로 가자" 제창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경기장에서 궁성까지 행진하며 마무리되었다.

도쿄 장행회를 시작으로 일본 제국의 다른 주요 도시에서도 장행회가 이어졌다.

날짜개최 지역개최 장소행사명
1943년 10월 21일도쿄메이지 신궁 외원 경기장출진 학도 장행회
1943년 10월 21일타이베이 (대만)출진 학도 장행회
1943년 10월 30일경성 (조선)출진 학도 장행회
1943년 11월 3일만주국 (신징, 하얼빈, 펑톈, 다롄)만주국 출진 학도 장행식
1943년 11월 14일도쿄2세 출진 학도 장행회
1943년 11월 16일오사카나카노시마 공원출진 학도 장행회 및 분열 행진
1943년 11월 18일센다이관동 북부 지방 학도 장행회
1943년 11월 19일고베히가시 유원지출진 학도 장행회
1943년 11월 21일~22일나고야도카이 지구 학도 연합 훈련 및 출진 학도 장행식
1943년 11월 21일교토헤이안 신궁출진 학도 무운 장구 기원제 및 장행회
1943년 11월 27일상하이 (중국)학도 출진 장행식
1943년 11월 28일삿포로출진 장행식



교토의 출진 학도 장행회가 열린 헤이안 신궁


오사카의 출진 학도 장행회가 열린 나카노시마 공원


고베의 출진 학도 장행회가 열린 히가시 유원지


이러한 장행회는 1943년 11월 이후로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으며, 제2회 출진 이후에도 개최되지 않았다. 출진한 학도의 정확한 인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장행회를 마친 학생들은 징병 검사를 받고 그해 12월 육군에 입영하거나 해군에 입단했다.

4. 전후 상황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고 일본군이 무장 해제되면서, 해외 및 외지에 있던 학도병들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만주국 주둔 관동군이나 사할린, 쿠릴 열도 방면의 제5방면군 등에 소속되었던 학도병들은 소련의 대일 참전으로 인해 시베리아 억류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귀환하지 못하고 사망한 학도병들도 있었다.

또한, 학도병 중에는 학력을 인정받아 육군 간부 후보생이나 해군 예비 학생 등으로 지원하여 하사관 이상의 계급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일본군이 저지른 포로 학대나 처형과 같은 잔학 행위에 대해 현장 책임자로 지목되어 BC급 전범으로 기소되는 사례도 발생했다. 전범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귀환 후 일본이나 항복한 현지에서 처형된 학도병도 있었다.

4. 1. 귀국 후의 삶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아 일본으로 돌아온 학도병들 중 다수는 원래 다니던 학교로 복학하여 학업을 마쳤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전후 일본 사회의 재건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답사를 낭독했던 에바시 신시로는 출진 후 항공 정비병으로 일본 본토에서 육군에 복무하다 무사히 생환했다. 그는 이후 도쿄 대학 교육학부 교수가노야 체육 대학 총장을 역임하며 학계에 기여했다. 고베 상업 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출진했던 우노 소스케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겪고 귀국한 뒤 대학에 복학하지 않고, 시가현 의원을 시작으로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경제학부 학생이었던 시오카와 마사주로 역시 메이지 신궁 외원에서 열린 장행회에 참여하며 출진했다(출진 중 졸업 처리됨). 와세다 대학 상학부 재학 중 육군 특별 조종 견습 사관으로 지원했던 다케시타 노보루는 전쟁 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시마네현에서 현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훗날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 다케시타와 우노, 그리고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학과 재학 중 1944년 징집되어 전쟁 후 복학하여 졸업한 무라야마 도미이치까지, 총 3명의 학도병 출신 인물이 일본 총리를 역임했다. 도쿄 상과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학도병으로 출진한 와타나베 미치오 역시 전후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또한, 일본 통치 시대의 대만에서 태어나 교토 제국 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출진했던 리덩후이(일본명: 이와사토 마사오)는 훗날 중화민국 총통이 되었다.

다도 우라센케 가문의 센 겐시츠는 도지샤 대학 법경학부 경제학과 재학 중 징병되어 해군에 지원, 특공대원이 되었으나 출격 전에 전쟁이 끝나 목숨을 건졌다. 그는 대학에 복학한 후 제15대 이에모토(家元) 자리를 계승했다. 센 겐시츠가 속했던 부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는데, 다른 한 명은 니혼 대학 전문부 예술과 출신의 배우 니시무라 아키라였다.

우노 소스케나 시오카와 마사주로 등 일부 학도병 출신 인사들은 자신의 전쟁 경험(우노의 경우 시베리아 억류 경험 포함)을 저서나 강연 등을 통해 증언했다. 반면 에바시 신시로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으나, 학도 출진 장행회 67주년이 되던 2010년 10월 21일자 아사히 신문 인터뷰[15]2013년 같은 날 마이니치 신문 인터뷰[16]에 응하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이니치 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나라고 살아서 돌아오려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 돌아올 것을 기약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죽지 못한 인간은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말하며, 전후 사실과 다른 소문이나 뜬소문에 의한 중상모략에도 반론하지 않았던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리는 일이 된다. 최근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덧붙이며 자신의 입장이 변화했음을 밝혔다.

5. '와다쓰미의 소리(わだつみのこえ)'

전몰한 학도병들의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1947년에는 도쿄 대학 전몰 학도병들의 글을 모은 『아득한 산하에』가 출판되었다. 이어 1949년에는 B급 및 C급 전범으로 처형된 이들을 포함한 일본 전국의 전몰 학도병 유고집 『들려오는 바다의 목소리』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당시 정부에 의해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터로 내몰려 군대의 부조리함과 죽음의 공포에 직면했던 학도병들의 철학적 사색, 일본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고찰, 미래 평화에 대한 염원 등을 담고 있다. 평화를 간절히 바랐던 당시 일본인들에게 강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졌으며, 열악한 출판 환경에도 불구하고 약 200만 부가 팔리며 당시의 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50년에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최초 영화화가 실현되었고, 1995년에도 다시 영화화되었다.

이 책을 계기로 최초 영화화 직후 1950년 일본 전몰 학생 기념회가 발족하여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2006년 12월 1일에는 도쿄 대학 캠퍼스 인근 도쿄도 분쿄구 혼고의 한 맨션 내에 「들려오는 바다의 목소리 기념관」을 설립하여 전몰 학도병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참조

[1] 뉴스 「学徒出陣」碑に献花式 国立競技場改築で移設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4-10-22
[2] 서적 中学社会 歴史 教育出版
[3] 웹사이트 学徒出陣70周年-元朝鮮人学徒兵を訪ねて https://yab.yomiuri.[...] Chuo Online YOMIURI ONLINE(読売新聞) 2022-11-23
[4] 서적 学歴・階級・軍隊 中公新書 2008
[5] 뉴스 東京の盛り場、抜き打ち二千人検挙 東京日日新聞 1938-02-16
[6] 뉴스 徴兵猶予取り消しも考えると末次内相 東京日日新聞 1938-07-30
[7] 문서 大学学部等ノ在学年限又ハ修業年限ノ臨時短縮ニ関スル件
[8] 문서 大学学部等ノ在学年限又ハ修業年限ノ昭和十七年度臨時短縮ニ関スル件
[9]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御署名原本・昭和十八年・勅令第七五五号・在学徴収延期臨時特例(国立公文書館) https://www.jacar.ar[...]
[10] 웹사이트 別冊「東京帝国大学が敗れた日」 『東大生が体験した「8月15日」』 http://gekkan.bunshu[...] 文芸春秋 2005
[11] 웹사이트 学徒出陣 :: 法政大学 https://www.hosei.ac[...] 2022-10-12
[12] 웹사이트 学徒出陣とは https://www.nhk.or.j[...] NHK 2022-10-12
[13] WAP 大学・短期大学等の入学者数及び進学率の推移 www.mext.go.jp/b_men[...] 2008-02-18
[14] 서적 大学崩壊と学力低下で専門学校の時代が来た
[15] 뉴스 朝日新聞 2010-10-21
[16] 뉴스 毎日新聞 2013-10-21
[17] 웹인용 일제강점기 학도병, 그들은 누구인가? http://kids.donga.co[...] kids.donga.com 20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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