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튀르키예 전쟁 (1919년~1922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 1. 개요
- 2. 배경
- 3. 전쟁의 전개
- 3.1. 그리스군의 스미르나 상륙 (1919년 5월)
- 3.2. 그리스의 하계 공세 (1920년 여름)
- 3.3. 세브르 조약 (1920년 8월)
- 3.4. 그리스군의 진격 (1920년 10월)
- 3.5. 그리스 정부의 변화 (1920년 11월)
- 3.6. 게디즈 공세 (1920년)
- 3.7. 이뇌뉘 전투 (1920년 12월 – 1921년 3월)
- 3.8. 튀르키예 민족 운동에 대한 지원 변화
- 3.9. 아피온카라히사르-에스키셰히르 전투 (1921년 7월)
- 3.10. 사카리아 전투 (1921년 8월-9월)
- 3.11. 교착 상태 (1921년 9월 – 1922년 8월)
- 4. 튀르키예의 반격
- 5. 결과
- 6. 양측의 잔혹 행위와 인종 청소
- 7. 인구 교환
- 참조
1. 개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1919년~1922년)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 과정에서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에 발생한 무력 충돌이다. 영국 등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는 '거대한 이상'을 내세우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했으나, 튀르키예의 저항에 직면했다. 전쟁은 그리스의 스미르나 상륙(1919년)으로 시작되어, 그리스군의 공세와 튀르키예의 반격, 그리고 1921년 사카리아 전투를 거치며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후 튀르키예의 공세로 그리스군은 패배하고, 스미르나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에서 철수했다. 전쟁 과정에서 양측은 잔혹 행위와 인종 청소를 자행했으며, 스미르나 대화재가 발생했다. 전쟁은 무다니아 휴전(1922년)과 로잔 조약(1923년)으로 종결되었고, 그리스-터키 간 인구 교환이 이루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1919년~1922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 | |
분쟁 명칭 | 서부 전선 (튀르키예어: Batı Cephesi, 오스만 튀르크어: غرب جبهه سی (Garb Cebhesi)) 소아시아 원정 (그리스어: Μικρασιατική Εκστρατεία, Mikrasiatikí Ekstrateía) 소아시아 참사 (그리스어: Μικρασιατική Καταστροφή, Mikrasiatikí Katastrofí) 아나톨리아 침공 (그리스) |
시기 | 1919년 5월 15일 – 1922년 10월 14일 |
장소 | 서부 아나톨리아 |
결과 | 튀르키예의 승리 1922년 9월 11일 그리스 혁명 및 6인 재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정부의 몰락 무다니야 정전 협정 및 로잔 조약 체결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튀르키예 대국민의회 |
지원 세력 (교전국 1) | 러시아 SFSR (1921년부터) 우크라이나 SSR (1921년부터) 아제르바이잔 SSR (1921년부터) 부하라 PSR (1921년부터) 이탈리아 왕국 프랑스 제3공화국 (1921년부터) 체르케스 체르케스 지원군 (1920년까지) |
교전국 2 | 그리스 왕국 |
지원 세력 (교전국 2) | 영국 영국령 인도 오스만 제국 (칼리프 군대) 아르메니아인 지원군 체르케스 체르케스 지원군 (1920년부터) 미국 프랑스 제3공화국 폰토스 지원군 |
지휘관 | |
튀르키예 | 무스타파 케말 파샤 페브지 파샤 이스메트 파샤 체르케스 에템 (1920년까지) 파흐레틴 파샤 케말레틴 사미 파샤 유수프 이젯 파샤 알리 푸아트 파샤 무히틴 파샤 나지 파샤 외메르 할리스 파샤 뮈니프 파샤 뤼슈튀 파샤 셰피크 파샤 레페트 파샤 |
그리스 | 콘스탄티노스 1세 알렉산드로스 1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 (사형 집행) 레오니다스 파라스케보풀로스 아나스타시오스 파풀라스 요르요스 하치아네스티스 (사형 집행) 콘스탄티노스 밀리오티스-콤니노스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콘스탄티노스 니데르 알렉산드로스 오토나이오스 콘스탄티노스 팔리스 요르요스 폴리메나코스 안드레아스 왕자 키몬 디게니스 (포로)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 (포로) 쉴레이만 셰피크 파샤 체르케스 에템 (1920년부터) |
병력 규모 | |
튀르키예 | 1919년 5월: 35,000명 1920년 11월: 86,000명 1921년 8월: 92,000명 1922년 8월: 208,000명 |
그리스 | 1919년 5월: 15,000명 1920년 4월: 90,000명 1921년 1월: 100,000명 1921년 6월: 200,000명 1922년: 215,000명 |
조직 (1922년) | |
튀르키예군 | 보병 18개 사단 기병 5개 여단 3개 독립 연대 |
그리스군 | 보병 12개 사단 기병 1개 여단 9개 독립 연대 |
장비 (1922년) | |
튀르키예군 | 소총 93,000정 경기관총 2,025정 중기관총 839정 대포 323문 칼 5,282자루 트럭 198대 차량 및 구급차 33대 항공기 10대 |
그리스군 | 소총 130,000정 경기관총 3,139정 중기관총 1,280정 대포 418문 칼 1,300자루 트럭 4,036대 차량 및 구급차 1,776대 항공기 50대 |
사상자 | |
튀르키예군 | 정규군: 전사: 9,167명 부상 또는 비전투 원인 사망: 2,474명 부상: 31,097명 실종: 11,150명 포로: 6,522명 |
그리스군 | 전사: 19,362명 비전투 사망: 4,878명 부상: 48,880명 실종: 18,095명 포로: 약 13,740명 |
민간인 | 그리스 민간인 사망: 264,000명 튀르키예 민간인 사망: 논쟁 중. 헬레닉 군대에 의해 30,000+ 건물 및 250+ 마을 파괴 및 전소. |
부대 | |
튀르키예 | 국군 (1920년부터) 국민군 (1920년까지) 녹군 (1920년까지) |
그리스 | 소아시아 군대 칼리프 군대 아르메니아 지원군 녹군 (1920년부터)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동맹국 측에 가담했으나 패전하였고, 연합국은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는 계획을 세웠다.[47] 영국은 이라크의 모술, 동남 아나톨리아, 서 아나톨리아, 흑해 연안 도시를, 프랑스는 킬리키아 지역을, 이탈리아 왕국은 아나톨리아 반도 남서부의 안탈리아와 코니아를 점령했다.
그리스 왕국은 대그리스주의에 따라 에게 해 연안의 그리스인 거주 지역을 통합하려 했다.[225] 그리스 총리 베니젤로스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동트라키아, 임브로스 섬과 테네도스 섬, 그리고 스미르나(현 이즈미르) 주변의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요구했다.
그리스는 소아시아 원정의 이유 중 하나로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54] 1910년 오스만 공식 통계에 따르면, 아나톨리아 지역의 민족 분포는 다음과 같다.[53]
주 | 투르크인 | 그리스인 | 아르메니아인 | 유대인 | 기타 | 총계 |
---|---|---|---|---|---|---|
이스탄불(아시아 해안) | 135,681 | 70,906 | 30,465 | 5,120 | 16,812 | 258,984 |
이즈미트 | 184,960 | 78,564 | 50,935 | 2,180 | 1,435 | 318,074 |
아이딘 주(이즈미르) | 974,225 | 629,002 | 17,247 | 24,361 | 58,076 | 1,702,911 |
부르사 | 1,346,387 | 274,530 | 87,932 | 2,788 | 6,125 | 1,717,762 |
코니아 | 1,143,335 | 85,320 | 9,426 | 720 | 15,356 | 1,254,157 |
앙카라 | 991,666 | 54,280 | 101,388 | 901 | 12,329 | 1,160,564 |
트라브존 | 1,047,889 | 351,104 | 45,094 | – | – | 1,444,087 |
시바스 | 933,572 | 98,270 | 165,741 | – | – | 1,197,583 |
카스타모누 | 1,086,420 | 18,160 | 3,061 | – | 1,980 | 1,109,621 |
아다나 | 212,454 | 88,010 | 81,250 | – | 107,240 | 488,954 |
비가 | 136,000 | 29,000 | 2,000 | 3,300 | 98 | 170,398 |
총계 (%) | 8,192,589 (75.7%) | 1,777,146 (16.4%) | 594,539 (5.5%) | 39,370 (0.4%) | 219,451 (2.0%) | 10,823,095 |
그리스 민족주의의 핵심 개념인 메갈리 이데아(거대한 이상)는 에게 해 양쪽에 위치한 그리스인 거주 지역을 그리스 왕국에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는 1453년에 멸망한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독교 세계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59][60]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그리스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콘스탄티노스 1세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깊은 정치적, 사회적 분열(국가 분열)이 존재했다.[61]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가 전쟁 중 어느 편을 지지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고, 소아시아 원정 실패와 전간기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다.[63]
2. 1. 지정학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오스만 제국은 붕괴 직전에 이르렀고, 연합국은 제국을 분할하기 위한 비밀 협정들을 체결했다.[47] 영국 총리는 그리스가 연합국 측에 참전하는 대가로 오스만 제국 영토의 일부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48] 여기에는 동트라키아, 임브로스 섬과 테네도스 섬, 그리고 스미르나(현 이즈미르) 주변의 서부 아나톨리아 지역이 포함되었다.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생-장-드-모리엔 협정에 대한 이탈리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는 그리스의 서부 아나톨리아 점령을 지지했다.
2. 2. 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 공동체

그리스가 소아시아 원정을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이었다.[54] 그리스인들은 고대부터 소아시아에 거주해 왔으며, 1912년에는 오스만 제국에 250만 명의 그리스인이 있었다.[54] 1906~1907년 오스만 인구 조사는 제국 전체의 그리스 정교회 인구(알바니아인, 슬라브어 사용자, 블라흐인, 아랍 정교회 신자 포함)가 2,823,063명이라고 보고하고 있다.[55] 1914년 오스만 인구 조사에 따르면, 발칸 및 에게해 섬을 잃은 후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정교회 인구는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에서 온 188,047명의 아랍 정교회 신자를 포함하여 1,729,738명이었다.[55]
주 | 투르크인 | 그리스인 | 아르메니아인 | 유대인 | 기타 | 총계 |
---|---|---|---|---|---|---|
이스탄불(아시아 해안) | 135,681 | 70,906 | 30,465 | 5,120 | 16,812 | 258,984 |
이즈미트 | 184,960 | 78,564 | 50,935 | 2,180 | 1,435 | 318,074 |
아이딘 주(이즈미르) | 974,225 | 629,002 | 17,247 | 24,361 | 58,076 | 1,702,911 |
부르사 | 1,346,387 | 274,530 | 87,932 | 2,788 | 6,125 | 1,717,762 |
코니아 | 1,143,335 | 85,320 | 9,426 | 720 | 15,356 | 1,254,157 |
앙카라 | 991,666 | 54,280 | 101,388 | 901 | 12,329 | 1,160,564 |
트라브존 | 1,047,889 | 351,104 | 45,094 | – | – | 1,444,087 |
시바스 | 933,572 | 98,270 | 165,741 | – | – | 1,197,583 |
카스타모누 | 1,086,420 | 18,160 | 3,061 | – | 1,980 | 1,109,621 |
아다나 | 212,454 | 88,010 | 81,250 | – | 107,240 | 488,954 |
비가 | 136,000 | 29,000 | 2,000 | 3,300 | 98 | 170,398 |
총계 (%) | 8,192,589 (75.7%) | 1,777,146 (16.4%) | 594,539 (5.5%) | 39,370 (0.4%) | 219,451 (2.0%) | 10,823,095 |
총계 (%) | 7,048,662 (72.7%) | 1,788,582 (18.5%) | 608,707 (6.3%) | 37,523 (0.4%) | 218,102 (2.3%) | 9,695,506 |
---|
그리스가 주장하는 영토에서 그리스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 역사가들은 이의를 제기했다. 세드릭 제임스 로우와 마이클 L. 도크릴은 그리스가 스미르나에 대해 제기한 주장이 기껏해야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리스인이 스미르나 빌라예트에서 아슬아슬하게 다수를 차지하거나,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소수였으며, "그 지역은 압도적으로 투르크인 아나톨리아에 위치해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정확한 인구 통계는 오스만 제국의 정책에 따라 혈통, 언어 또는 자기 식별보다는 종교에 따라 인구를 분류함으로써 더욱 모호해졌다. 반면에, 동시대의 영국과 미국의 통계(1919년)는 그리스인이 스미르나 지역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375,000명인 반면, 무슬림은 325,000명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56][57]
2. 3. 그리스의 민족주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그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리스 왕국은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현 이즈미르)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였고, 이는 전쟁의 발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25]그리스 민족주의의 핵심 개념인 메갈리 이데아(거대한 이상)는 에게 해 양쪽에 위치한 그리스인 거주 지역을 그리스 왕국에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수복 지구에 대한 비전이었다. 1830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가 독립한 이후, 메갈리 이데아는 그리스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스 정치인들은 "그리스 왕국의 확장은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고 여러 차례 연설했다.[59][60]
메갈리 이데아는 단순한 19세기 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많은 그리스인들의 종교적 의식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는 1453년에 멸망한 비잔틴 제국을 재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기독교 세계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메갈리 이데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외에도 크레타, 테살리아, 에피루스,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에게 해 제도, 키프로스, 소아시아 해안 지역, 흑해의 폰토스를 포함했다.
2. 4. 그리스의 국가 분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그리스에는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는 세력과 콘스탄티노스 1세를 지지하는 세력 간의 깊은 정치적, 사회적 분열이 존재했다.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가 전쟁 중 어느 편을 지지해야 할지에 대한 결정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61]영국은 콘스탄티노스 1세가 연합국을 지지하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국왕과 그의 지지자들은 분쟁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엄격한 중립을 고수했다. 가족 관계와 정서적 애착 또한 콘스탄티노스 1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가 중앙 강국에 합류하면서 국왕의 딜레마는 더욱 커졌다.[62]
콘스탄티노스 1세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그리스의 이익이 연합국 가담에 있다고 판단하고 외교적 노력을 시작했다. 이견과 국왕의 베니젤로스 해임은 두 사람 간의 깊은 갈등을 초래했고, 이는 그리스 사회 전체로 번졌다. 베니젤로스는 북부 그리스에 별도의 국가를 설립했고,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국왕을 퇴위시켰다. 1917년 5월, 콘스탄티노스 1세 망명 후, 베니젤로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연합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리스 군대는 국경에서 불가리아군에 대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62]
전쟁 참전과 그 이전의 사건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에 깊은 정치적, 사회적 분열을 초래했다. 베니젤로스 자유주의자와 왕당파는 이미 전쟁 전부터 격렬한 경쟁 관계였으며, 서로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 상태에 이르렀다. 양측은 상대방의 행동을 부당하고 반역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적대감은 그리스 사회 전체로 퍼져 소아시아 원정 실패에 기여하고, 전간기에 많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했다.[63]
3. 전쟁의 전개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은 무드로스 휴전으로 시작되어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1919년 5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그리스군이 에게 해 연안에 상륙하여 입지를 굳힌 시기이다. 두 번째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8월까지 그리스군의 공세 작전이 이어진 시기이다. 세 번째는 1922년 8월까지로, 튀르키예군이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1919년 5월, 그리스 군대는 스미르나(현 이즈미르)에 상륙하여 연합군의 지원을 받으며 도시와 주변 지역을 장악했다. 1920년 여름에는 뷔윅 멘데레스 강(메안데르 강) 계곡, 부르사(프루사), 알라셰히르(필라델피아) 방향으로 공세를 펼쳐 점령 지역을 확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편으로 참전한 대가로, 그리스는 세브르 조약을 통해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의 밀레트를 할당받았다. 그러나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과 그리스 모두 비준하지 않았다.
1920년 10월, 그리스군은 아나톨리아 동부로 진격했지만,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1920년 11월 그리스에서 정권이 교체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반대했던 콘스탄티노스 1세가 다시 왕이 되었고,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이 대거 교체되었다.
1920년 1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벌어진 이뇌뉘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튀르키예군의 저항에 부딪혀 진격이 저지되었다. 이후 튀르키예는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강화했다.
1921년 7월, 그리스군은 아피온카라히사르-퀴타히아-에스키셰히르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여 이 지역들을 점령했다. 그러나 튀르키예군은 사카리아강 동쪽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1921년 8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사카리아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튀르키예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패배하고 후퇴했다. 이 전투는 그리스군이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멀리 진격한 지점이었다.
1921년 9월부터 1922년 8월까지는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연합국은 세브르 조약 수정을 제안했지만, 튀르키예는 이를 거부하고 그리스에 대한 최종 공세를 준비했다.
3. 1. 그리스군의 스미르나 상륙 (1919년 5월)
1919년 5월 15일, 2만 명의 그리스 군대가 스미르나(현 이즈미르)에 상륙하여 그리스, 프랑스, 영국의 해군 지원을 받으며 도시와 주변 지역을 장악했다. 상륙의 법적 근거는 무드로스 휴전 조약 제7조에 있었는데, 이는 연합국이 "연합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는 것을 허용했다.[64]

다양한 출처에 따르면, 스미르나의 기독교 인구(주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는[65] 무슬림 터키인 인구와 거의 비슷했다. 그리스군은 2,500명의 아르메니아 자원 봉사자를 포함하고 있었다.[66] 도시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군대를 해방군으로 환영했다.[67]
3. 2. 그리스의 하계 공세 (1920년 여름)
1920년 여름, 그리스군은 뷔윅 멘데레스 강(메안데르 강) 계곡, 부르사(프루사) 및 알라셰히르(필라델피아) 방향으로 일련의 성공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스미르나 방어에 전략적 깊이를 제공하는 것이 이 작전들의 전반적인 전략적 목표였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 점령 지역은 서부 및 북서부 아나톨리아 대부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터키의 저항은 점점 거세졌다.
3. 3. 세브르 조약 (1920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편으로 참전한 그리스의 공헌에 대한 보답으로, 연합국은 동트라키아와 스미르나의 밀레트를 그리스에 할당하는 것을 지지했다.[68] 이 조약은 소아시아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시켰고, 동시에 오스만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유럽 열강이 아니게 되었다.1920년 8월 10일, 오스만 제국은 차탈자 선까지 트라키아를 그리스에 할양하는 세브르 조약에 서명했다. 더 중요한 것은, 터키가 임브로스와 테네도스에 대한 모든 권리를 그리스에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작은 영토, 마르마라 제도 및 "유럽 영토의 작은 구획"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이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었으므로 국제 위원회에 의해 관리되었다.
터키는 또한 그리스에 스미르나에 대한 "주권 행사"를 이전해야 했으며, "외부 요새에 깃발만 꽂아두는" "상당한 배후지"를 유지해야 했다. 그리스가 스미르나 앙클레이브를 통치했지만, 주권은 명목상 술탄에게 남아 있었다. 조약의 조항에 따르면 스미르나는 지방 의회를 유지해야 했으며, 5년 이내에 그리스 왕국에 합병을 요청할 경우, 국제 연맹이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해당 문제를 결정하도록 규정되었다.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68]도 그리스[70]도 비준하지 않았다.
3. 4. 그리스군의 진격 (1920년 10월)
1920년 10월, 그리스군은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의 격려에 힘입어 아나톨리아 동부로 더 깊숙이 진격했다. 로이드 조지는 튀르키예와 오스만 정부에 세브르 조약 서명을 압박하려 했다.[73] 이 진격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자유당 정부 하에서 시작되었지만, 공세가 시작된 직후 베니젤로스는 실각하고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로 교체되었다. 이 작전의 전략적 목표는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을 격파하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평화 협상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여전히 수적으로 우세하고 현대 장비를 갖춘 그리스군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튀르키예군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조기 전투를 기대했다. 그러나 튀르키예군은 질서정연하게 퇴각하고 포위를 피하며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은 "그리스군은 많은 험준한 협곡을 안전하게 통과하며 시골길을 따라 이동했고, 튀르크군은 강력하고 현명한 지도력 아래 아나톨리아의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라고 말했다.[74]3. 5. 그리스 정부의 변화 (1920년 11월)
1920년 10월, 그리스 국왕 알렉산드로스가 원숭이에 물려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그리스는 정치적 격변을 겪게 되었다.[73][74] 알렉산드로스 국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1920년 11월 1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이끄는 자유당은 패배하고,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가 이끄는 왕당파 정부가 들어섰다.이 선거에서 베니젤로스파는 전쟁의 지속과 내부 관리 부실, 권위주의적 태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인해 369석 중 118석을 얻는 데 그쳤다. 많은 그리스 국민들은 전쟁과 베니젤로스파의 독재적인 정권에 지쳐 변화를 선택했다. 베니젤로스는 참패 후 해외로 망명길에 올랐다.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가 이끄는 새 정부는 콘스탄티노스 1세의 복귀를 위한 국민 투표를 준비했다. 국민 투표 결과,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에 복귀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는 복귀 직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을 대거 교체하고, 경험이 부족한 왕당파 장교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했다. 아나스타시오스 파풀라스가 작전 지휘를 맡았고, 콘스탄티노스 1세는 형식적으로 전체 지휘를 맡았다.[21] 그러나 스미르나의 고등 판무관 아리스티디스 스테르기아디스는 해임되지 않았다.
이러한 그리스의 정부 변화는 연합국의 지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킬리키아에서의 손실을 이유로 그리스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고,[76] 영국은 계속해서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리스가 영국의 지원을 잃을까 두려워 일부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을 해임하지 않았다.[37]
3. 6. 게디즈 공세 (1920년)
1920년 그리스 하계 공세 이후, 튀르키예의 비정규군은 콘스탄티노스 마테나스 지휘 하의 그리스군을 공격했다.[77] 이 공세는 성공적이었지만, 체르케스 에템 지휘 하의 쿠바-이 세야레의 자의적인 행동으로 인해 약 15,000명에 달하는 그리스 제13 보병 사단을 포위하여 파괴할 기회는 사라졌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튀르키예 국민주의자 대국민 의회는 정규군을 창설하기 시작했다. 정규군은 이후 그리스군과의 퀴타히아-에스키셰히르 전투에서 패배할 운명이었다.[78]앙카라에 사령부를 둔 오스만 제20군단 사령관 알리 푸아트 파샤는 시바스 회의 이후 비정규 부대가 주체인 국민군 총사령관을 겸임했으며, 1920년 6월 25일 새롭게 편성된 서부 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서부 전선은 10월 하순부터 11월 상순에 걸쳐 진행된 Gediz Battle|게디즈 전투영어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이 때문에 11월 8일, 대국민회의는 그동안의 국민군이나 유격군 등의 비정규 부대 대신 정규군을 설립하기로 결정했고,[218] 구 서부 전선은 이스메트 베이가 지휘하는 서부 전선과 레페트 베이가 지휘하는 남부 전선으로 이분되어 재편성되었다. 이에 따라 알리 푸아트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 연방(구 러시아 제국)의 수도 모스크바 주재 대사로 전출되었다.
3. 7. 이뇌뉘 전투 (1920년 12월 – 1921년 3월)

1920년 12월까지 그리스군은 스미르나와 북서쪽의 에스키셰히르 두 방면에서 진격하여 점령 구역을 통합했다. 1921년 초, 그리스군은 소규모 정찰을 재개했으나,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장비를 갖춘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77]
1921년 1월 11일, 제1차 이뇌뉘 전투에서 그리스군의 진격이 처음으로 저지되었다. 이는 그리스군 1개 사단만 참여한 소규모 전투였지만, 신생 튀르키예 혁명가들에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전투로 연합국은 런던 회의에서 세브르 조약 수정을 제안했고, 튀르키예 혁명 정부와 오스만 제국 정부 대표가 모두 참석했다.[78]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과 일부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그리스 정부는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며 더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합의하지 않았다. 1921년 3월 27일, 그리스군은 제2차 이뇌뉘 전투에서 재차 공격을 감행했으나, 튀르키예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3월 30일 진격이 저지되었다. 영국은 제2차 이뇌뉘 전투에서 6인치 곡사포로 그리스군을 지원했고,[79] 튀르키예군은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았다.[80]

1921년 1월 6일, 알렉산드로스 1세 사망 후 왕위에 복귀한 콘스탄티노스 1세 지휘 아래 그리스군은 진격을 재개했다. 부르사에서 에스키셰히르 방면으로 위력 정찰에 나선 그리스군은 1921년 1월 9일부터 11일까지 이뇌뉘 부근에서 메흐메트 아리프 베이 지휘 하의 제11사단, 메흐메트 아투프 베이 지휘 하의 제24사단, 메흐메트 나즘 베이 지휘 하의 제4사단과 소규모 전투 후 후퇴했다. 이스메트 베이는 전투 종료 후 전선에 도착했다.[219]
이후 그리스군은 다시 전진했다. 이스메트 파샤 지휘 하의 제11, 제24, 제61 보병 사단, 예비 제3보병 사단, 제1기병여단은 이뇌뉘 부근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1921년 3월 26일부터 31일까지 전투를 벌였다. 국방장관 페브지 파샤가 직접 전선을 방문, 이스메트 파샤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아 반격하여 그리스군을 후퇴시켰다. 4월 3일, 터키 대국민의회는 이 공적으로 페브지 파샤를 '비린지 페리크'로 승진시켰다. (이스메트는 1934년 이들 전투를 기념하여 이뇌뉘 성을 수여받았다.)
3. 8. 튀르키예 민족 운동에 대한 지원 변화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튀르키예 혁명가들의 세력이 커지자 그들과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81] 이들은 그리스를 영국의 위임 통치국으로 보고 튀르키예에 군사 장비를 판매했다.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는 모스크바 조약 (1921년)에서 볼 수 있듯이 튀르키예 혁명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볼셰비키는 무스타파 케말과 그의 군대에 돈과 탄약을 지원했다.[82][83] 1920년 한 해에 볼셰비키 러시아는 케말주의자들에게 소총 6,000정, 소총 탄약 5백만 발 이상, 포탄 17,600발, 그리고 금괴 200.6kg을 제공했다. 그 후 2년 동안 지원 규모는 증가했다.[84]3. 9. 아피온카라히사르-에스키셰히르 전투 (1921년 7월)
1921년 6월 27일부터 7월 20일까지, 9개 사단으로 증강된 그리스군은 아피온카라히사르-퀴타히아-에스키셰히르 전선에서 이스메트 이뇌뉘가 지휘하는 튀르키예군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21] 그리스군의 계획은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주요 철도가 이 도시들에 위치했기 때문에 아나톨리아를 둘로 나누는 것이었다. 결국, 튀르키예군의 강력한 방어선을 돌파한 그리스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거점들을 점령했다.그리스군은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의 군사력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지 않고 추격을 멈추었다. 그 결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군은 포위를 피하고 사카리아강 동쪽으로 전략적 후퇴를 감행하여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다.[21]
이는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 작전의 운명을 결정지은 중요한 결정이었다. 국왕 콘스탄티노스,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 총리, 아나스타시오스 파풀라스 장군을 포함한 국가 및 군 지도부는 퀴타히아에서 만나 작전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사기가 저하되었던 그리스군은 회복되었지만, 방어 측에 유리한 전략적 상황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대신, 지도부는 '최종 해결책'을 요구하며 튀르키예군을 추격하여 앙카라 근처의 마지막 방어선을 공격하는 위험한 결정을 내렸다. 군 지휘부는 신중한 입장이었고, 더 많은 증원군과 준비 시간을 요청했지만, 정치인들에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요안니스 메탁사스를 포함한 소수의 목소리만이 방어적 입장을 지지했다. 이 시점에서 콘스탄티노스는 실질적인 권한이 거의 없었고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다. 튀르키예군이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준 거의 한 달 간의 지연 후, 그리스 사단 중 7개가 사카리아강 동쪽을 건넜다.[21]
1921년 7월, 그리스군은 영국 등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아 세 번째 진격을 시작하여, 앙카라 서쪽 50km 지점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다.
3. 10. 사카리아 전투 (1921년 8월-9월)
퀴타히아-에스키셰히르 전투에서 이스메트 이뇌뉘의 지휘 아래 튀르키예군이 후퇴한 후, 그리스군은 앙카라 서쪽 100km 이내에 있는 사카리아강(그리스어로 상가리오스)까지 다시 진격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는 "앙기라로!"를 외쳤고, 영국 장교들은 케말의 도시에서 열릴 승전 기념 만찬에 초대받았다.[85] 튀르키예 혁명군은 수도 방어를 위해 전투에 끌려들어 소모전에서 파괴될 것으로 예상되었다.소련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튀르키예군은 보급품이 부족했다. 개인 소유의 소총, 총, 탄약을 군대에 반납해야 했고, 모든 가구는 속옷 한 벌과 샌들을 제공해야 했다.[85] 한편, 튀르키예 의회는 이스메트 이뇌뉘의 지휘에 불만을 품고,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참모총장 페브지 차크마크가 지휘권을 잡기를 원했다.

그리스군은 공격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사막을 가로질러 200km를 행군했기 때문에 튀르키예군은 그들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식량 보급품은 40톤의 빵과 소금, 설탕, 차였고, 나머지는 가는 길에서 찾아야 했다.[85]
그리스군의 진격은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고, 이는 21일간의 사카리아 전투 (1921년 8월 23일 – 9월 13일)에서 절정에 달했다. 튀르키예의 방어 진지는 일련의 고지대에 집중되었고, 그리스군은 그곳을 습격하여 점령해야 했다. 튀르키예군은 특정 언덕 꼭대기를 점령하고 다른 곳은 잃었으며, 일부는 여러 번 잃고 되찾았다. 그러나 튀르키예군은 병력을 보존해야 했는데, 그리스군이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그리스군이 앙카라 남쪽 40km에 있는 하야마나를 점령하려 했을 때였지만, 튀르키예군은 버텼다. 아나톨리아로의 그리스군의 진격은 그들의 보급 및 통신선을 길게 늘였고, 탄약이 부족해졌다. 전투의 격렬함으로 양측 모두 지쳤지만, 그리스군이 먼저 이전 전선으로 물러났다. 전투 내내 앙카라에서는 대포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그것이 그리스군이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멀리 진격한 곳이었고, 몇 주 안에 그들은 질서 정연하게 6월에 점령했던 전선으로 후퇴했다. 튀르키예 의회는 이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하여 무스타파 케말과 페브지 차크마크에게 야전 원수 칭호를 수여했다. 오늘날까지 터키 공화국에서 이 5성 장군 칭호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11. 교착 상태 (1921년 9월 – 1922년 8월)
군사적 해결에 실패한 그리스는 연합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1922년 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세브르 조약이 시행될 수 없으며 수정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일련의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와 프랑스 군대는 그들의 위치에서 철수했고, 그리스는 고립되었다.[86]1922년 3월, 연합국은 휴전을 제안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이제 전략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느껴 그리스가 아나톨리아에 남아 있는 한 어떤 해결책도 거부하고, 그리스에 대한 최종 공세를 위해 튀르키예 군대를 재편성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동시에 그리스는 방어 진지를 강화했지만 방어 상태로 남아 있는 것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점점 더 사기가 저하되었다. 그리스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거나 최소한 대출을 확보하기를 간절히 원했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입지를 위협함으로써 외교적으로 영국을 압박하려는 잘못된 계획을 세웠지만, 이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주둔한 연합군 병력이 트라키아의 그리스군(2개 사단)보다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군대를 철수시켜 스미르나의 그리스 방어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반면에 튀르키예군은 소비에트 러시아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 4월 29일, 소련 당국은 튀르키예 영사에게 세 개의 튀르키예 사단에 충분한 양의 무기와 탄약을 공급했다. 5월 3일, 소비에트 정부는 튀르키예에 을 전달했는데, 이는 의 차액이었다.[86]
그리스 내에서는 철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선전이 군대 사이에서 퍼졌다. 제거된 베니젤리스트 장교들 중 일부는 "국방" 운동을 조직하고 아테네로부터 탈퇴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베니젤로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그들의 모든 행동은 헛된 것으로 남았다.[87]
4. 튀르키예의 반격
1922년 8월까지 튀르키예군이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의 마지막 단계였다.
4. 1. 둠루프나르 전투 (1922년 8월)

튀르키예군은 1922년 8월 26일 "대공세(Büyük Taarruz)"라고 부르는 반격을 시작했다. 8월 26일 주요 그리스 방어선이 무너졌고, 다음 날 아피온이 함락되었다.[225] 1922년 8월 30일, 그리스군은 둠루프나르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히거나 살해되었고, 장비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88] 이 날은 튀르키예의 국경일이자 퀴타히아 구출의 날인 승전 기념일로 기념된다. 전투 중, 그리스 장군 니콜라오스 트리쿠피스와 키몬 디게니스(Kimon Digenis)가 튀르키예군에 포로로 잡혔다. 트리쿠피스 장군은 포로로 잡힌 후에야 자신이 최근 하치안네스티스 장군을 대신하여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1922년 9월 1일, 무스타파 케말은 튀르키예군에게 "군대여, 너희의 첫 번째 목표는 지중해다, 전진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4. 2. 스미르나로의 튀르키예군 진격 (1922년 9월)
1922년 9월 9일, 튀르키예 기병대가 스미르나(현 이즈미르)에 진입했고, 같은 날 그리스 본부는 도시에서 철수했다. 튀르키예 기병대는 9월 9일 토요일 오전 11시경에 도시에 진입했다.[225] 이로 인해 그리스 정부는 사임했다.[225]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9월 10일, 사회적 혼란 가능성에 대비하여 비전투원을 해치는 튀르키예 군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튀르키예가 도시를 점령하기 며칠 전, 무스타파 케말의 전령들은 이 명령이 그리스어로 쓰인 전단을 배포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앙카라 정부는 학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9월 13일, 스미르나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인 지구가 파괴되었지만, 튀르키예와 유대인 지구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225] 그리스와 아르메니아 인구에 대한 잔학 행위가 자행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약탈당했다. 대부분의 목격자 보고서는 튀르키예 군인들이 도시에 불을 질렀다고 밝혔다. 화재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즈미르를 점령하고 있던 그리스인과 튀르키예군의 박해를 두려워한 아르메니아인 등이 배를 타고 그리스로 탈출했다. 각국의 배가 자국민을 우선적으로 승선시키는 가운데, 일본의 상선 'Tokeimaru'가 짐을 버리고, 튀르키예 측의 난민에 대한 공격을 견제하면서 약 800명의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 등을 구출했다는 증언과 당시 보도가 있다.[220] 이 사건은 많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2017년에는 자호스 사모라다스에 의해 'Tokei Maru'라는 이름의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Tokeimaru'에 관한 전승은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어떤 배였는지, 누가 선장이었는지 등이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스 근현대사 연구자인 도요 대학 교수 무라타 나나코는 과거 배의 기록을 조사하고 선박 회사에 대한 청취 조사를 실시한 결과, 1922년 동지중해에 'Tokeimaru'와 소리가 비슷한 ''''도케이마루(東慶丸)''''라는 배가 있었고, 당시 선장이 현재 미나미치타정 출신의 ''''히비 사조''''라는 인물이었음을 밝혀냈다. 또한, 지타 반도에 사는 사조의 친족과도 접촉하여 사조의 어머니가 열심한 기독교 정교회 신자였다는 것도 밝혀냈다.[221]
4. 3. 차나크 위기
터키군은 스미르나를 재탈환한 후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북상했고, 연합군 주둔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병력으로 증강되었다.[96] 9월 15일 ''데일리 메일''에 실린 조지 워드 프라이스와의 인터뷰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요구는 최근의 승리 이후에도 전과 동일하다. 우리는 소아시아, 마리차 강까지의 트라키아, 콘스탄티노플을 요구한다... 우리는 수도를 가져야 하며, 그럴 경우 며칠 안에 내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협상을 통해 소유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무한정 기다릴 수는 없다."''[96]이 무렵, 여러 명의 터키 장교들이 전쟁 발발 시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터키인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침투했다. 예를 들어, 당시 신문 ''토론토 스타''의 종군 기자였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97]
어느 날 밤 [영국] 구축함이... 소아시아에서 건너오는 터키 여성들을 태운 보트를 세웠다... 무기를 수색한 결과, 그 여성들은 모두 남자였다. 그들은 모두 무장을 했고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공격에 대비해 교외에 거주하는 터키인을 조직하기 위해 파견된 케말리스트 장교임이 밝혀졌다.영어
영국 내각은 처음에는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필요하다면 터키에 저항하고, 그리스가 동 트라키아에 남을 수 있도록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98] 영국 정부는 또한 자치령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자치령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뉴질랜드 제외). 또한 이탈리아와 프랑스군은 해협의 진지를 포기하고 터키에 맞서기 위해 영국만 남겨두었다.
9월 24일, 무스타파 케말의 군대가 해협 지역으로 진입하여 영국군의 퇴거 요청을 거부했다. 영국 내각은 이 문제에 대해 분열되었지만 결국 가능한 무력 충돌은 예방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연합군 사령관인 찰스 해링턴 영국군 장군은 부하들이 터키군에게 발포하지 못하도록 하고 영국 내각에 경솔한 모험을 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그리스 함대는 그의 요청에 따라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영국은 마침내 그리스군이 트라키아의 마리차 강 뒤로 철수하도록 강요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무스타파 케말이 휴전 회담의 개시를 수락하도록 설득했다.
이즈미르를 점령한 튀르키예군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의 해협 관리 구역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부대와 대치했다(차나크 위기). 튀르키예군은 관리 구역에서 철수했고, 실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5. 결과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19년 5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그리스의 소아시아 상륙과 에게 해 연안 점령, 둘째, 1920년 10월부터 1921년 8월까지 그리스의 공세, 셋째, 1922년 8월까지 튀르키예군이 전략적 주도권을 쥔 시기이다.
전쟁은 무다니아 휴전과 로잔 조약 체결로 끝났다. 터키와 그리스는 인구 교환 협약을 맺어 100만 명이 넘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이 아티카 등 그리스 영토에 재정착하고, 약 50만 명의 무슬림이 그리스에서 튀르키예로 이주했다.
그리스는 초기 튀르키예군을 과소평가했으나, 연합국은 그리스의 진격에 의문을 표했다.[99] 제1차 이뇌뉘 전투와 제2차 이뇌뉘 전투에서 터키군을 격파하지 못한 그리스는 1921년 7월 이탈리아의 아나톨리아 남서부 철수, 프랑스의 앙카라 조약 (1921년) 체결로 곤경에 처했다. 연합국은 1920년 삼순 전투에서 흑해에서 강제 철수당했고, 그리스 해군은 일부 항구를 포격, 흑해 해안을 봉쇄해 터키군의 물자 수송을 막았다.[100][101]
그리스군은 물자 부족과 장기 동원 유지에 어려움을 겪었다.[102][103] 반면 터키군은 소련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아 전력을 강화했다.[4] 무스타파 케말은 여러 터키 세력을 통합하고, 봄베이 칼리파트 위원회의 지원을 받았다.[108]
결과적으로 터키군은 방어 이점과 1차 대전 참전 용사들의 지휘 아래 효과적으로 싸워 승리했다.
5. 1. 무다니아 휴전 (1922년 10월)
1922년 10월 11일, 무다니아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연합국(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은 동트라키아와 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그리스군은 이 지역에서 철수해야 했다. 이 협정은 그리스 측이 서명에 동의한 지 하루 뒤인 1922년 10월 15일부터 발효되었다.[225]무다니아 휴전 이후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과는 별도로 터키와 그리스는 인구 교환에 관한 협약에 합의했다. 100만 명이 넘는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인이 이주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아티카와 새로 합병된 그리스 영토인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에 재정착되었으며, 그리스 영토에서 이주한 약 50만 명의 무슬림과 교환되었다.
5. 2. 로잔 조약 (1923년 7월)
1923년 7월, 스위스 로잔에서 로잔 조약이 체결되어 동트라키아와 이즈미르는 튀르키예 영토가 되었고, 그리스와 튀르키예 간의 현재 국경이 확정되었다.[225] 이 조약으로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이 결정되어, 약 100만 명의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이 튀르키예에서 그리스로, 50만 명의 이슬람교 신자들이 그리스에서 튀르키예로 이주했다.[189] 이스탄불의 정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령 트라키아(서 트라키아)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신자들은 예외적으로 거주가 허용되었다.
6. 양측의 잔혹 행위와 인종 청소
루돌프 럼멜의 연구에 따르면, 1900년부터 1923년까지 터키의 여러 정권은 350만 명에서 43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아시리아인을 학살했다.[109][110] 특히 1919년에서 1922년 사이 터키 독립 전쟁 동안 터키군에 의해 44만 명의 아르메니아 민간인과 26만 4천 명의 그리스 민간인이 살해되었다.[111]
터키 독립 전쟁 기간 동안, 터키에서는 동부와 남부의 아르메니아인과 흑해 지역의 그리스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1922년까지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그리스인 대다수는 난민이 되거나 사망했다.[112] 그리스인들은 터키 노동 부대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사망 행진과 노동 수용소에서의 굶주림 등은 "백색 학살"로 불렸다. 오스만 관료 라페트 베이는 "우리는 아르메니아인처럼 그리스인들을 끝내야 한다"고 말하며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14]
1919년 시바스 주 주지사는 흑해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만행이 너무 끔찍해서 보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21년 누레틴 파샤의 지휘하에 있는 중앙군에 의해 11,181명의 그리스인이 살해되었다. 타네르 아크캄에 따르면, 누레틴 파샤는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모든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할 것을 제안했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거부되었다.
당시 서방 신문들은 터키군이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을 보도했다.[116][117][118][119][120][121] 런던 타임스는 "터키 당국은 모든 그리스인을 죽게 만들 의도가 분명하다"고 보도했고, 벨파스트 뉴스 레터는 "소아시아의 기독교 소수 민족을 근절하려는 체계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했다.[1]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터키인들이 기독교인들의 근면성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 때문에 학살을 자행했다고 보도했다.[122]
스코츠맨 신문은 1920년 8월 18일, 터키인들이 5,000명의 기독교인을 학살했다고 보도했다.[1] 1922년 2월 25일, 폰토스 지역의 24개 그리스 마을이 불에 탔다. 애틀랜타 옵저버는 "폰토스의 여성과 어린이의 타는 시체의 냄새"를 언급하며 소아시아 기독교인들의 미래를 경고했다.[118] 필라델피아 이브닝 불레틴은 터키인들이 여성과 어린이를 하렘에 가두고 강간하는 등 노예 제도를 유지했다고 보도했다.[1][37][124]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터키 당국이 인도주의 단체의 지원을 막고 그리스인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었다고 비판했다.[1]
헨리 모겐소 시니어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는 터키 정부가 기독교인을 전멸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126] 미국 영사 조지 호튼은 학살당한 기독교인들이 가해자만큼 나쁘다는 주장은 터키의 선전이라고 비판하며, 그리스인들의 행동을 칭찬했다.[130]
폰토스 그리스인에 대한 만행은 폰토스인 학살로 인정받고 있다.[131] 뉴욕 주지사는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이 터키 정부의 조직적인 이주 캠페인으로 인해 잔혹 행위를 겪었다고 선언했다.[132]
1922년 9월 9일, 터키군은 스미르나에 진입했고, 기독교 인구는 공격을 받았다. 그리스 대주교는 린치를 당했고, 화재로 도시가 황폐화되었다. 약 5만[133]에서 10만[134] 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사망했다.
한편, 그리스군 또한 터키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아놀드 J. 토인비는 1919년 5월 15일 그리스군이 스미르나(현 이즈미르)에 상륙한 후 조직적인 잔혹 행위가 있었다고 기록했다.[135] 그는 얄로바, 젬리크, 이즈미트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직접 목격했다.[135] 윈스턴 처칠은 그리스의 잔혹 행위가 터키 측의 대량 학살에 비해 "사소한 수준"이었다고 언급했다.[136]
베르가마 전투 동안 그리스군은 메네멘에서 터키 민간인을 학살했고,[137] 1921년 이즈미트 학살에서는 300명 이상의 터키 민간인이 사망했다. 연합 위원회와 적십자 대표는 그리스군이 터키 주민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보고했다. 아놀드 J. 토인비는 스미르나 시의 터키인 상황이 '공포 통치'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저스틴 맥카시는 로잔 조약 협상에서 터키 대표가 그리스 점령 지역에서 150만 명의 아나톨리아 무슬림이 추방되거나 사망했다고 보고했다.[188]
퇴각하는 그리스군은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여 아나톨리아를 황폐화시켰다. 중동 역사가 시드니 네틀턴 피셔는 퇴각하는 그리스군이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고 터키 마을 사람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고 기록했다. 노먼 네이마크는 그리스군의 퇴각이 점령보다 지역 주민들에게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고 언급했다.
스타일리노스 고나타스 대령은 알라셰히르가 불타고 그리스군이 터키와 그리스 가옥 모두를 약탈했다고 회고했다. 스웨덴 오리엔탈리스트 요하네스 콜모딘은 그리스군이 250개의 튀르키예 마을을 불태웠다고 썼다. 킨로스는 우샤크의 3분의 1이 사라지고, 마니사에는 18,000채의 건물 중 500채만 남았다고 기록했다. 마니사 방화 당시에는 11,000채의 집 중 1,000채만 남았다.
1922년 2월 14일, 아이딘 비라예트의 튀르키예 마을 카라테페에서 주민들이 모스크에 갇혀 불태워졌다.[182]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사는 그리스인들이 60명 정도의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했다고 보고했다.[183]
그리스의 초토화 작전에는 가축 대량 학살도 포함되었다. 스타일리노스 고나타스는 그리스군이 말과 다른 동물들을 대량으로 사살했다고 진술했다. 파흐레틴 알타이는 부상당하고 굶주린 그리스군의 말들이 버려져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터키군 기록 보관소는 약 500마리의 전투 동물이 죽은 채 발견되었고, 1,000마리가 구출되었다고 기록했다. 1923년 로잔 협상에서, 이스메트 파샤는 그리스군이 말 134,040마리, 당나귀와 노새 63,926마리, 기타 동물 3,291,335마리를 죽이거나 제거했다고 밝혔다.[188]
6. 1. 터키의 그리스인 및 아르메니아인 학살
루돌프 J. 럼멜은 1900년부터 1923년까지 다양한 터키 정권이 3,500,000명에서 4,300,000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아시리아인을 살해한 것으로 추산했다.[109][110] 럼멜은 1919년에서 1922년 사이 터키 독립 전쟁 동안 터키군에 의해 44만 명의 아르메니아 민간인과 26만 4천 명의 그리스 민간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111]터키 독립 전쟁 기간인 1920~23년 동안, 특히 동부와 남부의 아르메니아인과 흑해 지역의 그리스인에 대한 학살이 있었다. 1922년까지 아나톨리아의 오스만 그리스인 대다수는 난민이 되었거나 사망했다.[112]
그리스인들은 터키 노동 부대에서 고통을 받았다. 사망 행진, 노동 수용소에서의 굶주림 등을 포함한 만행은 "백색 학살"로 언급되었다. 오스만 관료 라페트 베이는 그리스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1916년 11월에는 "우리는 아르메니아인처럼 그리스인들을 끝내야 한다 ... 오늘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그리스인을 죽이기 위해 내륙으로 부대를 보냈다"라고 말했다.[114]
1919년 시바스 주 주지사 에부베키르 하즘 테페이란은 대량 학살이 너무 끔찍해서 보고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흑해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만행을 언급했으며, 공식 집계에 따르면 1921년 누레틴 파샤 (그는 크리소스토모스 대주교 살해로 악명이 높음)의 지휘하에 있는 중앙군에 의해 11,181명의 그리스인이 살해되었다.[37] 타네르 아크캄은 한 신문에 따르면 누레틴 파샤가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모든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을 살해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는 무스타파 케말에 의해 거부되었다고 썼다.
터키군이 아나톨리아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주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을 보도하는 여러 현대 서방 신문 기사가 있었다.[116][117][118][119][120][121] 예를 들어, 런던 타임스에 따르면 "터키 당국은 모든 그리스인을 죽게 만들 의도가 분명하다고 밝히고 있으며,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진술을 뒷받침한다." 아일랜드 신문인 벨파스트 뉴스 레터는 "앙고라 터키인들이 현재 자행하고 있는 야만성과 잔혹 행위의 끔찍한 이야기는 소아시아의 기독교 소수 민족을 근절하려는 체계적인 정책의 일부이다"라고 썼다.[1]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터키인들이 기독교인들의 근면성과 그로 인한 질투, 열등감 때문에 기독교 소수 민족을 살해해야 한다고 느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터키인들의 마음에 불안감과 질투심이 생겨났고, 이는 나중에 그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평화의 기술에서 기독교 신민들과 경쟁할 수 없으며 특히 기독교인과 그리스인들이 너무 근면하고 경쟁자로서 너무 교육을 잘 받았다고 믿는다. 따라서, 때때로 그들은 추방과 학살을 통해 균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라고 썼다.[122]
신문 스코츠맨에 따르면, 1920년 8월 18일, 소아시아 이즈미드의 남동쪽 카라무살의 페이발 지역에서 터키인들은 5,000명의 기독교인을 학살했다.[1] 이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도 있었다.[123] 1922년 2월 25일, 폰토스 지역의 24개 그리스 마을이 불에 타 버렸다. 미국 신문 애틀랜타 옵저버는 "폰토스의 여성과 어린이의 타는 시체의 냄새"라고 전하며 "헬레네 군대가 철수 한 후 소아시아의 기독교인에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경고로 다가온다"라고 썼다.[118] 벨파스트 뉴스 레터에 따르면, 1922년 처음 몇 달 동안 10,000명의 그리스인이 진격하는 케말리스트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1][37] 필라델피아 이브닝 불레틴에 따르면, 터키인들은 노예 제도를 계속 유지하여 여성과 어린이를 하렘으로 데려가고 수많은 여성을 강간했다.[1][37][124]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터키 당국이 집을 불태운 그리스 민간인을 돕는 선교사와 인도주의 단체의 지원을 막았고, 이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썼다. 또한 "터키인들은 1915년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행사했던 것보다 더 강력하게 그리스인들을 근절하려 하고 있다"라고 썼다.[1]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 그리고 영국 외교관 조지 W. 렌델이 "터키 학살과 박해"에 대해 작성한 1922년 각서는 소아시아의 그리스인에 대한 일련의 조직적인 학살과 인종 청소의 증거를 제공했다.[125]
헨리 모겐소,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오스만 제국 주재 미국 대사는 "터키 정부"를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시리아 기독교인을 전멸시키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터무니없는 공포, 잔인한 고문, 여성을 하렘으로 몰아넣고, 순수한 소녀들을 타락시키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을 80센트에 판매하고,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사막으로 추방하여 굶어 죽게 하고, 수백 개의 마을과 많은 도시를 파괴"하는 캠페인으로 비난했다.[126]
미국 영사 조지 호튼은 "터키 선전가들이 유포한 가장 교묘한 진술 중 하나는 학살당한 기독교인들이 처형자만큼 나쁘다는 것, 즉 '50대 50'이었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폰토스와 스미르나에서 학살 이후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에 있는 모든 터키인을 학살했다면 기록은 거의 50대 50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는 또한 목격자로서 "사나운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스인들의 "그리스에 거주하는 수천 명의 터키인에 대한 행동"을 칭찬했다.[130]
폰토스 지역에 거주하는 폰토스 그리스인에 대한 만행은 그리스와 키프로스에서 폰토스인 학살로 인정받고 있다.[131] 뉴욕 주지사(당시 조지 파타키)가 2002년에 발표한 선언문에 따르면,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은 터키 정부가 승인한 조직적인 이주 캠페인 기간 동안 잔혹 행위를 겪었다. 그리스 마을과 도시를 파괴하고, 흑해 연안, 폰토스, 스미르나 주변 지역과 같이 그리스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추가로 학살했다. 생존자들은 터키에서 추방되었고 오늘날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그리스 디아스포라 전체에 살고 있다.[132]
1922년 9월 9일까지 터키군은 스미르나에 진입했고, 그리스 당국은 이틀 전에 떠났다. 대규모 혼란이 뒤따랐고, 기독교 인구는 군인과 터키 거주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리스 대주교 크리소스토모스는 터키 군인을 포함한 폭도들에게 린치를 당했고, 9월 13일에는 도시의 아르메니아 지구에서 발생한 화재가 도시의 기독교 해안가를 휩쓸어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화재에 대한 책임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약 5만[133]에서 10만[134] 명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이 화재와 그에 수반된 학살로 사망했다.
6. 2. 그리스의 터키인 학살
아놀드 J. 토인비는 1919년 5월 15일 그리스군이 스미르나(현 이즈미르)에 상륙한 후 조직적인 잔혹 행위가 있었다고 기록했다.[135] 그는 아내와 함께 얄로바, 젬리크, 이즈미트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목격했으며, "불에 타 약탈당한 집, 최근의 시신, 공포에 질린 생존자"의 형태로 풍부한 증거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민간인들의 강도 행위와 그리스 군인들의 방화 행위를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했다.[135] 토인비는 그리스군이 상륙하자마자 터키 민간인들을 상대로 잔혹 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하여 "비옥한 메안데르(마에안데르) 계곡을 황폐화"했으며, 수천 명의 터키인들이 그리스가 통제하는 지역 밖으로 피난하도록 강요했다고 기록했다.[135]윈스턴 처칠은 터키 측이 저지른 대량 학살과 비교하며 그리스의 잔혹 행위는 "트라브존과 삼순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을 끔찍하게 추방한 것"에 비해 "사소한 수준"이었다고 언급했다.[136]
베르가마 전투 동안 그리스군은 메네멘에서 터키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저질러 200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었다.[137] 1921년 6월 24일, 이즈미트에서 학살이 발생하여 아놀드 J. 토인비에 따르면 300명 이상의 터키 민간인이 사망했다.[137]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장교로 구성된 연합 위원회[147]와 제네바 국제 적십자 대표 M. 게리는 젬릭-얄로바 반도 학살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두 개의 별도 협력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그리스군이 터키 주민들을 상대로 조직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을 발견했다. 위원들은 "터키 마을의 방화 및 약탈", "터키인에 대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의 폭력", "무슬림 인구의 조직적인 파괴 및 소멸 계획"을 언급했다. 연합 위원회는 1921년 5월 23일자 보고서에서 "이 계획은 그리스 지시 하에, 때로는 정규군 부대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 밴드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고 진술했다. 또한 마을 파괴와 무슬림 인구의 실종이 이 지역에서 그리스 정부에 유리한 정치적 상황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일 수 있다고 진술했다. 연합 조사에서는 이러한 사건이 과거 수년간, 특히 1년 전 마르마라 지역에서 자행된 터키의 잔혹 행위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지적했다.[148]
아놀드 J. 토인비는 1921년 6월 이후 그리스가 점령한 나머지 지역에서 비슷한 잔혹 행위가 저질러졌다는 증거를 확보했다고 기록했다. 그는 "스미르나 시의 터키인 상황이 '공포 통치'가 되었으며, 시골 지역에서의 대우는 더욱 악화되었다"고 주장했다.
저스틴 맥카시는 로잔 조약 협상 동안 터키 대표단의 수석 협상가 이스메트 파샤(이노뉴)가 그리스 점령 지역에서 추방되거나 사망한 아나톨리아 무슬림의 추정치를 150만 명으로 제시했다고 보고했다.[188]
6. 3. 그리스의 초토화 작전
여러 자료에 따르면, 퇴각하는 그리스군은 전쟁의 마지막 단계에서 아나톨리아에서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중동 역사가인 시드니 네틀턴 피셔는 "퇴각하는 그리스군은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고, 그 길목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튀르키예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진 모든 만행을 저질렀다"라고 썼다. 노먼 네이마크는 "그리스군의 퇴각은 점령보다 지역 주민들에게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고 언급했다.그리스군은 퇴각할 때뿐만 아니라 진격할 때에도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1921년 9월 17일자 일기에 따르면, 사카리아 전투 이후 그리스군의 퇴각 부대는 마을을 불태우고 있었고, 튀르키예 민간인들은 감히 그리스군에 대항하지 못했다. 또한 곡물이 아직 들판에 남아 있는 동안 방화가 일어났다. 퇴각하는 병력이 저지른 전쟁 범죄의 심각성은 아나톨리아 주재 그리스군의 또 다른 장교인 파나기오티스 데메스티차스도 언급했는데,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우리가 지나간 도시와 마을의 파괴, 방화 및 기타 추악함은 내가 묘사할 수 없으며, 세상이 이 파괴를 모르는 채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라고 적고 있다.
스타일리노스 고나타스 대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파괴와 약탈의 분노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알라셰히르는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불타고 있었고, 그리스군이 도시를 불태우는 동안 튀르키예와 그리스 구역 모두 불길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그리스군이 튀르키예 가옥뿐만 아니라 그리스 가옥도 약탈했다고 덧붙였다. 고나타스는 또한 알라셰히르 동쪽 평원에 있는 모든 마을이 불탔고, 그의 부대는 살아있는 사람도, 안내할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한 살리흘리와 나중에 마니사가 퇴각하는 그리스군에 의해 불탔으며, 튀르키예 주민들을 도시 안에 가두어 두었다고 밝혔다.
스미르나에 거주하던 스웨덴 오리엔탈리스트 요하네스 콜모딘은 편지에서 그리스군이 250개의 튀르키예 마을을 불태웠다고 썼다.
킨로스는 "이미 그들이 지나간 길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우샤크의 3분의 1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알라셰히르는 언덕을 훼손하는 어두운 검게 그을린 공동에 불과했다. 마을은 재더미로 변했다. 역사적인 성지 마니사에 있는 18,000채의 건물 중 500채만 남았다."라고 썼다. 마니사 방화 당시 도시의 11,000채의 집 중 1,000채만 남았다.
그리스의 점령 기간 중 그리스군의 만행의 한 예로, 1922년 2월 14일 아이딘 비라예트의 튀르키예 마을 카라테페에서 모든 주민이 모스크에 갇히고 모스크가 불태워졌다. 불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 이탈리아 영사는 그리스인들이 60명 정도의 여성과 어린이를 학살한 튀르키예 마을을 방문했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프랑스 영사 코허 대위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리스의 초토화 작전에는 가축 대량 학살도 포함되었다. 스타일리노스 고나타스는 1922년 9월 14~15일 체쉬메에서 배를 타기 전에 그리스군이 말과 다른 동물들을 대량으로 사살하라고 명령했으며, 이는 그리스군 내 많은 사람들의 이기적인 무모함의 결과라고 진술했다. 파흐레틴 알타이는 9월 16일 아침, 이들 동물을 반도에서 목격했다. 그는 "아나톨리아에서 도망치는 그리스 군인들은 마을에서 모은 말들과 함께 체쉬메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그들의 말들은 부상을 입고 멍이 들고 야위었으며, 배고픔과 갈증으로 인해 일부는 바다에 흩어졌고, 일부는 모래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마른 분수대에서 축축한 돌을 핥고 있었다. 불쌍한 동물들 중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죽어가고 있었다."라고 동물의 상태와 반도에 대해 진술했다. 터키군 기록 보관소의 공식 문서에서도 약 500마리의 전투 동물이 죽은 채 발견되었고, 1,000마리가 구출되었다. 1923년 1월 20일, 로잔 협상에서, 이스메트 파샤의 아나톨리아의 그리스 파괴에 대한 국민투표는 말 134,040마리, 당나귀와 노새 63,926마리가 죽거나 제거되었으며, 양, 염소, 소, 낙타, 황소, 물소를 포함한 모든 동물의 총 수는 3,291,335마리라고 명시했다.
7. 인구 교환
인구 교환 조약에 따르면, 터키의 그리스 정교회 신자와 그리스에 거주하는 터키 및 그리스 무슬림 시민은 이 두 국가 간의 인구 교환 대상이 되었다. 약 150만 명의 그리스계 민족인 정교회 신자와 터키의 터키계 민족, 그리고 그리스의 약 50만 명의 터키인 및 그리스 무슬림이 고향에서 쫓겨났다.[189]
참조
[1]
논문
"Decisive Turkish victory in Anatolia ... produced Britain's gravest strategic crisis between the 1918 Armistice and Munich, plus a seismic shift in British politics ..."
Erik Goldstein and Brian McKerche, ''Power and Stability: British Foreign Policy''
2004
[2]
간행물
The internationalisation of Constantinople and the Straits under the aegis of the League of Nations, feasible in 1919, was out of the question after the complete and decisive Turkish victory over the Greeks
''Contemporary Review''
1922
[3]
서적
"But now in 1922, after the decisive Turkish victory over the Greeks, 40,000 Turkish soldiers moved towards Çannakale."
https://books.google[...]
''Istanbul Under Allied Occupation, 1918–1923''
1999
[4]
서적
History of the Balkans: Twentieth century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5]
웹사이트
УКРАЇНСЬКА ДЕРЖАВНІСТЬ У XX СТОЛІТТІ
http://litopys.org.u[...]
[6]
웹사이트
Внешняя политика Азербайджана в годы cоветской власти
https://web.archive.[...]
[7]
웹사이트
Hüseyin Adıgüzel – Atatürk, Nerimanov ve Kurtuluş Savaşımız
http://www.turksolu.[...]
2014-12-24
[8]
서적
Turkestan Struggle Abroad From Jadidism to Independence
https://books.google[...]
SOTA Publications
2007
[9]
뉴스
The Place of the Turkish Independence War in the American Press (1918–1923)
http://dergiler.anka[...]
[10]
문서
Sforza, Diario
1920-11-28
[11]
서적
The Truth about the Peace Treaties
Gollancz, London
1938
[12]
서적
Ionian Vision: Greece in Asia Minor, 1919-1922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9
[13]
서적
Η Εθνική Τραγωδία (National Tragedy)
Πανεπιστήμιο Αθηνών, Τμήμα Πολιτικών (University of Athens) Επιστημών και Δημοσίας Διοικήσεως
1995
[14]
서적
«ΤΑ ΦΟΒΕΡΑ ΝΤΟΚΟΥΜΕΝΤΑ – ΣΑΓΓΑΡΙΟΣ ΕΠΟΠΟΙΪΑ ΚΑΙ ΚΑΤΑΡΕΥΣΗ ΣΤΗΝ ΜΙΚΡΑ ΑΣΙΑ»
ΕΚΔ. ΦΥΤΡΑΚΗ, ΑΘΗΝΑ
1974
[15]
서적
Mudros to Lausanne: Britain's Frontier in West Asia, 1918–1923
https://books.google[...]
SUNY Press
1976
[16]
뉴스
British Indian troops attacked by Turks; thirty wounded and British officer captured – Warships' guns drive enemy back
http://query.nytimes[...]
[17]
서적
Cumhuriyet tarihi yalanları
İnkılâp
2010
[18]
뉴스
Smyrna is taken away from Turkey
http://query.nytimes[...]
New York Times
1919-05-17
[19]
서적
1919'un Şifresi (Gizli ABD İşgalinin Belge ve Fotoğrafları)
Ceviz Kabuğu Yayınları
2007
[20]
웹인용
ABD "Türkiye'nin paylaşılması"nda nasıl rol almıştı?
https://www.odatv.co[...]
Odatv
2014-03-19
[21]
서적
Şu Çılgın Türkler
https://archive.org/[...]
2005-09
[22]
서적
İstiklal Harbinde Ayaklanmalar
Türk İstiklal Harbi Serisi, 6th Volume
[23]
서적
Millî Mücadelede Ayaklanmalar
Kum Saati Yayınları
2006
[24]
서적
Anadolu'nun İşgali
Kum Saati Yayınları
2006
[25]
서적
İşgal Günlerinde İşbirlikçiler Hüsnüyadis Hortladı
Kum Saati Yayınları
2006
[26]
서적
Türkiye Cumhuriyeti tarihi I
Ege Üniversitesi Basımevi
1984
[27]
서적
Türk İstiklal Harbinde Batı Cephesi
Turkish General Staff
1999
[28]
간행물
Büyük Taarruz: 70 nci yıl armağanı
Genelkurmay basımevi
1992
[29]
서적
100 [i.e. Yüz] soruda Kurtuluş Savaşımızın tarihi
https://books.google[...]
Gerçek Yayınevi
1917
[30]
웹사이트
Britain and the Greek-Turkish War and Settlement of 1919–1923: the Pursuit of Security by "Proxy" in Western Asia Minor
http://theses.gla.ac[...]
University of Glasgow
2002
[31]
간행물
Türk İstiklal Harbinde Batı Cephesi
Turkish General Staff
1999
[32]
서적
Asian Review
https://books.google[...]
East & West
1934
[33]
서적
Ground Warfare: An Internation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02
[34]
간행물
History of the Campaign of Minor Asia, General Staff of Army
Directorate of Army History
1967
[35]
웹사이트
Britain and the Greek-Turkish War and Settlement of 1919–1923: the Pursuit of Security by "Proxy" in Western Asia Minor
http://theses.gla.ac[...]
University of Glasgow
2002
[36]
문서
[37]
Citation
Çağdaş Türkiye
Cem Yayınevi
[38]
Citation
Samsun'da Başlayan ve İzmir'de Biten Yolculuk (1919–1922)
http://atam.gov.tr/s[...]
Atatürk Araştırma Merkezi
1986-11-01
[39]
문서
[40]
서적
"Kanlı mürekkeple yazın çektiklerimizi ... !": Milli Mücadelede Türk ve Yunan esirleri, 1919–1923
Platin Yayınları
[41]
Citation
Επίτομος Ιστορία Εκστρατείας Μικράς Ασίας 1919–1922
Directorate of Army History
[42]
문서
[43]
문서
[44]
간행물
Savaş esirlerinin Milli mücadeledeki yeri
http://dergiler.anka[...]
Ankara University, Türk İnkılap Tarihi Enstitüsü Atatürk Yolu Dergisi
1990
[45]
서적
Ιστορία των αρμενο-ελληνικών στρατιωτικών σχέσεων και συνεργασίας / Հայ-հունական ռազմական առնչությունների եւ համագործակցության պատմություն [History of Armenian-Greek military relations and cooperation]
Stamoulis Publications
2010
[46]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Turkey
[47]
서적
Twenty-Five Lectures on Modern Balkan History (The Balkans in the Age of Nationalism)
http://staff.lib.msu[...]
MSU
2008-09-03
[48]
문서
[49]
Citation
Turkey
Ernest Benn
[50]
문서
[51]
문서
[52]
문서
[53]
서적
The Balkan Exchange of Minorities and Its Impact on Greece
https://books.google[...]
C. Hurst & Co
[54]
문서
[55]
문서
[56]
논문
Population Statistics of the Ottoman Empire in 1914 and 1919
[57]
논문
The Making of the Treaty of Sèvres of 10 August 1920
[58]
Citation
Not War Against Islam – Statement by Greek Prime Minister
1920-06-29
[59]
웹사이트
Another Bag, More Travel
https://anotherbagmo[...]
2024-11-04
[60]
웹사이트
Collective and State Violence in Turkey: The Construction of a National Identity from Empire to Nation-State 9781789204513
https://dokumen.pub/[...]
2024-11-04
[61]
Citation
6. The National Schism: Metamorphoses of Political Polarization
https://www.degruyte[...]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009-05-10
[62]
웹사이트
Greece breaks diplomatic ties with the Central Powers {{!}} June 29, 1917
https://www.history.[...]
2024-11-03
[63]
웹사이트
The Strange Story of How Greece Joined the Entente in WWI
https://www.thecolle[...]
2024-05-12
[64]
서적
Yurt Ansiklopedisi
Anadolu Yayıncılık
1982
[65]
서적
Greece – a Jewish History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66]
문서
[67]
Citation
The Ruined City of Smyrna: Giles Milton's 'Paradise Lost'
http://www.nysun.com[...]
NY Sun
2011-03-01
[68]
서적
Individual Responsibility in International Law for Serious Human Rights Violations
Martinus Nijhoff
1992
[69]
서적
Reclaiming a Plundered Past: Archaeology and Nation Building in Modern Iraq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5
[70]
Citation
Treaty of Lausanne
http://www2.mfa.gr/N[...]
MFA
1923-07-24
[71]
웹사이트
Greece and Turkey: The Treaty of Lausanne 100 years on – DW – 07/23/2023
https://www.dw.com/e[...]
2024-11-04
[72]
논문
The Making of the Treaty of Sevres of 10 August 1920
https://www.jstor.or[...]
1972
[73]
웹사이트
Venizelos and the Asia Minor Catastrophe
http://www.ahistoryo[...]
2008-09-03
[74]
웹사이트
Greece’s King Alexander dies after being bitten by a monkey {{!}} October 25, 1920
https://www.history.[...]
2024-11-04
[75]
문서
"Two letters - Memoranda of E. Venizelos to Winston Churchill"
1983
[76]
문서
Greco-Turkish War (1919-1922)#Cite Note-17
[77]
웹사이트
Ιστορια Των Ελληνικων Ενοπλων Δυναμεων
http://www.hellasarm[...]
[78]
간행물
Gediz Taarruzu
http://www.atam.gov.[...]
1991-07
[79]
서적
British Armies of the Greek-Turkish War
https://books.google[...]
[80]
논문
Soviet Arms Exports in the 1920s
2013
[81]
논문
The Greco-Turkish War, 1920-1922
https://www.jstor.or[...]
1979
[82]
서적
Soviet Russia and Asia, 1917–1927
[83]
서적
[84]
간행물
Mezhdunarodnaya Zhizn
1963
[85]
서적
The Minor Asia Campagne, volume 5th, The Angora Campagne
1986
[86]
서적
Soviet Russia and Asia, 1917–1927
[87]
서적
The Making of the Modern Near East, 1792–1923
Longman
1987
[88]
서적
The Minor Asia Campaign, volume 7, retreat of I and II Army Korps
[89]
서적
The Middle East in World Affairs
Cornell University Press
1962
[90]
서적
Ships of Mercy: the True Story of the Rescue of the Greeks, Smyrna, September 1922
Peter E Randall
[91]
서적
The Great Extirpation of Hellenism and Christianity in Asia Minor: The Historic and Systematic Deception of World Opinion Concerning the Hideous Christianity's Uprooting of 1922
https://archive.org/[...]
[92]
서적
The Balkans: Nationalism, War and the Great Powers, 1804–1999
https://archive.org/[...]
Viking
[93]
뉴스
Kemal Won't Insure Against Massacres
https://query.nytime[...]
New York Times
1922-09-11
[94]
논문
It Was All a Pleasant Business: The Historical Context of 'On the Quai at Smyrna'
2003-01-01
[95]
서적
Borders of Belief: Religious Nationalism and the Formation of Identity in Ireland and Turkey
https://books.google[...]
Rutgers University Press
2022
[96]
문서
Britain and the Greek–Turkish War and Settlement of 1919–1923: The Pursuit of Security by 'Proxy' in Western Asia Minor
http://theses.gla.ac[...]
[97]
서적
Hemingway on War
Simon and Schuster
2012
[98]
서적
The Chanak Affair
1969
[99]
서적
The History of Armenia
Palgrave Macmillan
[100]
서적
1. Dünya Harbi'nde ve Kurtuluş Savaş'ında Türk deniz harekatı
https://books.google[...]
Dz.K.K. Merkez Daire Başkanlığı Basımevi
[101]
서적
'Millı Mücadele' de Karadeniz, 1919–1922
https://books.google[...]
Atatürk Araştırma Merkezi
[102]
서적
Sorrowful Shores:Violence, Ethnicity, and the End of the Ottoman Empire 1912–1923
Oxford University Press
[103]
서적
Ordered to Die: A History of the Ottoman Army in the First World War
[104]
서적
The Minor Asia Campaign Logistic and Transportation
1965
[105]
간행물
Turkish Great Offensive
NTV Yayınları
2011-08
[106]
서적
Türk devrim tarihi. 2. kitap: ulusal direnisten, Türkiye, cumhuriyeti'ne
Bilgi Yayinevi
[107]
서적
Mütareke döneminde ordunun durumu ve yeniden yapılanması, 1918–1920
Türk Tarih Kurumu Basımevi
[108]
서적
Kurtuluş Savaşının Mali Kaynakları
Atatürk Araştırma Merkezi
[109]
table
Turkey's Dead (1900–1923)
http://www.hawaii.ed[...]
[110]
웹사이트
Statistics Of Turkey's Democide Estimates, Calculations, And Sources
http://www.hawaii.ed[...]
1997
[111]
웹사이트
Turkish Democide
http://www.hawaii.ed[...]
[112]
서적
The Turkish War of Independence a Military History, 1919–1923
https://books.google[...]
Abc-Clio
[113]
서적
The Thirty-Year Genocid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9
[114]
간행물
2005
[115]
문서
Les Persécutions antihélleniques en Turquie, depuis le debut de la guerre européenne: D'après les rapports officiels des agents diplomatique et consulaires
Bernard Grasset
1918
[116]
뉴스
Turk's Insane Savagery: 10,000 Greeks Dead
The Times
1922-05-05
[117]
뉴스
5,000 Christians Massacred, Turkish Nationalist Conspiracy
1920-08-24
[118]
뉴스
24 Greek Villages are Given to the Fire
1922-03-30
[119]
뉴스
Near East Relief Prevented from Helping Greeks
1922-07-13
[120]
뉴스
Turks will be Turks
1922-09-16
[121]
뉴스
More Turkish Atrocities
1922-05-16
[122]
뉴스
Turkish Rule over Christian Peoples
1919-02-01
[123]
뉴스
Allies to Act at Once on Armenian Outrages
1920-02-29
[124]
웹사이트
Girls died to escape Turks
http://www.umd.umich[...]
University of Michigan
2013-04-01
[125]
웹사이트
The Genocide and Its Aftermath
http://www.aihgs.com[...]
[126]
뉴스
Morgenthau Calls for Check on Turks
1922-09-05
[127]
학술 논문
Forgetting the Smyrna Fire
http://levantineheri[...]
2016-03-10
[128]
서적
In Byron's Shadow: Modern Greece in the English and American Imagination: Modern Greece in the English and American Imagina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129]
서적
Admiral Mark L. Bristol and Turkish-American Relations, 1919–1922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1960
[130]
웹사이트
George Horton: An American Witness in Smyrna
http://ahiworld.org/[...]
AHI World
2009-11-03
[131]
간행물
Cyprus Press Office
[132]
Resolution of the State
Governor Proclaims October 6th, 2002 as the 80th Anniversary of the Persecution of Greeks of Asia Minor
2002-10-06
[133]
서적
The Western Shores of Turkey: Discovering the Aegean and Mediterranean Coasts
https://books.google[...]
Tauris Parke Paperbacks
[134]
서적
Death by Government
https://archive.org/[...]
Transaction Publishers
[135]
서적
Turkey
Ernest Benn
1926
[136]
서적
America's Black Sea Fleet: The U.S. Navy Amidst War and Revolution, 1919–1923
https://books.google[...]
Naval Institute Press
2017
[137]
서적
Greek occupation of Izmir and adjoining territories: report of the Inter-Allied Commission of Inquiry (May–September 1919)
2002
[138]
서적
Türkiye'de vahset ve soy kırımı girisimi: (15 Mayıs 1919 – 9 Eylül 1922). 15 Mayıs 1919 – 13 Eylül 1921
https://books.google[...]
Genelkurmay Basımevi
1994
[139]
서적
Το Νούμερο 31328: Σκλάβοι στα Εργατικά Τάγματα της Ανατολής: Ρομάντσο
[140]
서적
Το νούμερο 31328, Το βιβλίο της σκλαβιάς
Εστία
[141]
서적
Arşiv belgelerine göre Balkanlar'da ve Anadolu'da Yunan mezâlimi
T.C. Başbakanlık, Devlet Arşivleri Genel Müdürlüğü
1996
[142]
서적
İstiklal Süvarisi – İzmir'in Kurtuluşu: Teğmen Ali Riza Akıncı'nın Hatıratı
Kırmızı Kedi Yayınevi
[143]
서적
Ethnic Cleansing in Twentieth-Century Europe
https://books.google[...]
Social Science Monographs
[144]
서적
Death and exile: the ethnic cleansing of Ottoman Muslims, 1821–1922
https://books.google[...]
Darwin Press
[145]
서적
Η Έξοδος. Τόμος Α'. Μαρτυρίες από τις επαρχίες των Δυτικών Παραλίων της Μικρασίας
Κέντρο Μικρασιατικών Σπουδών
[146]
서적
Arşiv belgelerine göre Balkanlar'da ve Anadolu'da Yunan Mezâlimi
T.C. Başbakanlık, Devlet Arşivleri Genel Müdürlüğü
1996-12-01
[147]
문서
General Hare, the British Delegate; General Bunoust, the French Delegate; General Dall'Olio, the Italian Delegate; Admiral Bristol, the American Delegate
[148]
서적
America's Black Sea Fleet: The U.S. Navy Amidst War and Revolution, 1919–1923
https://books.google[...]
Naval Institute Press
2017
[149]
서적
Το ημερολόγιον, 1918–1922
Private
[150]
서적
Arşiv belgelerine göre Balkanlar'da ve Anadolu'da Yunan Mezâlimi
T.C. Başbakanlık, Devlet Arşivleri Genel Müdürlüğü
1996-12-01
[151]
서적
Το ημερολόγιον, 1918–1922
Private
[152]
서적
Demirci Akıncıları
Türk Tarih Kurumu
[153]
서적
The Thirty-Year Genocide: Turkey's Destruction of Its Christian Minorities, 1894–1924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9
[154]
서적
Όσα Θυμάμαι – Α': Γκαρνιζον Ουσιακ (1922–23)
ΚΕΔΡΟΣ
[155]
서적
Arşiv belgelerine göre Balkanlar'da ve Anadolu'da Yunan Mezâlimi
T.C. Başbakanlık, Devlet Arşivleri Genel Müdürlüğü
1996
[156]
서적
Esaretten Zafere
AKY YAYINLARI
[157]
문서
'A concise History of Greece'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06-20
[158]
서적
Death and Exile: The Ethnic Cleansing of Ottoman Muslims, 1821–1922
https://books.google[...]
Darwin Press Incorporated
[159]
서적
World War I and the end of the Ottomans: from the Balkan wars to the Armenian genocide
2015
[160]
문서
'The Banality of Denial: Israel and the Armenian Genocide'
Transaction Publishers
[161]
문서
Encyclopedia of Genocide, Vol. 2
ABC-CLIO
[162]
문서
"Denial of the Armenian Genocide in Comparison with Holocaust Denial" in Remembrance and Denial: The Case of the Armenian Genocide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63]
서적
Statistics of Democide: Genocide and Mass Murder Since 1900
https://books.google[...]
LIT Verlag Münster
1998
[164]
서적
Warfare and Armed Conflicts: A Statistical Encyclopedia of Casualty and Other Figures, 1492–2015
https://books.google[...]
McFarland
2017
[165]
서적
The Law of Armed Conflict and the Use of Force: The Max Planck Encyclopedia of Public International Law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66]
웹사이트
Lausanne Conference on Near Eastern Affairs 1922–1923
https://archive.org/[...]
His Majesty's Stationery Office
1923
[167]
서적
Ατομικόν ημερολόγιον. Μικρά Ασία, 1919–1922
Εστία
[168]
서적
Ατομικόν ημερολόγιον. Μικρά Ασία, 1919–1922
Εστία
[169]
서적
Αναμνήσεις
Πελασγός
[170]
서적
Απ' την Αράχωβα στα Κράσπεδα της Άγκυρας. Ημερολόγιο Εκστρατείας 1919–1922
Δήμος Αράχωβας
[176]
서적
Το Νούμερο 31328: Σκλάβοι στα Εργατικά Τάγματα της Ανατολής: Ρομάντσο
[177]
서적
Το νούμερο 31328: Το βιβλίο της σκλαβιάς
Hestia Publishers
[178]
서적
Türk İstiklal Harbi II. Cilt Batı Cephesi 6. Kısım III. Kitap Büyük Taarruzda Takip Harekatı (31 Ağustos – 18 Eylül 1922)
Genelkurmay Atase Başkanlığı Yayınları
[179]
서적
ΑΙΧΜΑΛΩΤΟΣ ΤΩΝ ΤΟΥΡΚΩΝ (1922–1923)
Private
[180]
서적
Ημερολόγιο μικρασιατικής εκστρατείας
Γνώση
[181]
웹사이트
Turks halt embarkation of all Smyrna refugees; Quit the neutral zone
http://fultonhistory[...]
2022-09-05
[182]
간행물
Letter
1922-04-06
[183]
간행물
Report on the Nationalist Offensive in Anatolia
The Inter-Allied commission proceeding to Bourssa
1922-09-15
[184]
서적
Απομνημονεύματα Στυλιανού Γονατά 1897–1957
[185]
서적
Görüb Geçirdiklerim-10 YIL SAVAŞ 1912–1922 VE, SONRASI
İnsel Yayınları
[186]
서적
Türk İstiklal Harbi II. Cilt Batı Cephesi 6. Kısım III. Kitap Büyük Taarruzda Takip Harekatı (31 Ağustos – 18 Eylül 1922)
Genelkurmay Atase Başkanlığı Yayınları
1995
[187]
서적
The Short Stories of Ernest Hemingway
Scribner
2002
[188]
서적
Records of Proceedings and draft Terms of peace
https://archive.org/[...]
His Majesty's Stationery Office (HMSO)
[189]
서적
Twice A Stranger: How Mass Expulsion Forged Modern Greece and Turkey
Harvard University Press
[190]
문서
Encyclopaedia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
[191]
문서
[192]
문서
[193]
문서
[194]
서적
History of the Balkans: Twentieth centu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5]
웹사이트
The Place of the Turkish Independence War in the American Press (1918-1923)
http://dergiler.anka[...]
[196]
웹사이트
Mütareke Döneminde Mustafa Kemal Paşa-Kont Sforza Görüşmesi
http://www.atam.gov.[...]
[197]
웹사이트
Mustafa Kemal Paşa – Kont Sforza ve İtalya İlişkisi
https://web.archive.[...]
[198]
문서
[199]
문서
Kuva-yi Milliye
[200]
서적
Çağdaş Türkiye
https://books.google[...]
Cem Yayınevi
[201]
서적
Asian Review
https://books.google[...]
East & West
[202]
간행물
Büyük Taarruz: 70 nci yıl armağanı
Genelkurmay basımevi
[203]
서적
100 [i.e. Yüz] soruda Kurtuluş Savaşımızın tarihi
https://books.google[...]
Gerçek Yayınevi
[204]
웹사이트
Britain and the Greek-Turkish War and Settlement of 1919-1923: the Pursuit of Security by "Proxy" in Western Asia Minor
http://theses.gla.ac[...]
University of Glasgow
2014-07-11
[205]
간행물
Türk İstiklal Harbinde Batı Cephesi
Turkish General Staff
[206]
서적
Ground Warfare: An International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ABC-CLIO
[207]
간행물
History of the Campaign of Minor Asia, General Staff of Army
Directorate of Army History
[208]
웹사이트
Britain and the Greek-Turkish War and Settlement of 1919-1923: the Pursuit of Security by "Proxy" in Western Asia Minor
http://theses.gla.ac[...]
University of Glasgow
2014-07-11
[209]
간행물
Çağdaş Türkiye
Cem Yayınevi
[210]
간행물
Samsun'da Başlayan ve İzmir'de Biten Yolculuk (1919–1922)
http://atam.gov.tr/s[...]
Atatürk Araştırma Merkezi
1986-11
[211]
서적
Armies of the Greek-Turkish War 1919–22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6-09-17
[212]
서적
Millî mücadele - Cilt I
Burçak yayınevi
[213]
서적
"Kanlı mürekkeple yazın çektiklerimizi ... !": Milli Mücadelede Türk ve Yunan esirleri, 1919–1923
[214]
간행물
Directorate of Army History
[215]
간행물
Στρατιωτική Ιστορία
2013-12
[216]
논문
Savaş esirlerinin Milli mücadeledeki yeri
http://dergiler.anka[...]
Ankara University, Türk İnkılap Tarihi Enstitüsü Atatürk Yolu Dergisi
[217]
서적
Mütareke Döneminde Ordunun Durumu ve Yeniden Yapılanması (1918-1920)
Türk Tarih Kurumu Basımevi
[218]
서적
Atatürk ve Askerlik: Düşünce ve Uygulamaları
https://books.google[...]
Atatürk Araştırma Merkezi
[219]
웹사이트
"Zafersiz kahraman İnönü"
http://www.zaman.com[...]
2010-02-21
[220]
뉴스
オスマン帝国が迫害 アルメニア人/日本船の難民救助 逸話伝承/ナゴルノ「敗戦」記憶に重み
北海道新聞
2021-11-24
[221]
웹사이트
日本の船が人々を救った? 100年前の「救出劇」の真相は?
https://www3.nhk.or.[...]
NHK
2022-11-29
[222]
뉴스
The Place of the Turkish Independence War in the American Press (1918-1923)
http://dergiler.anka[...]
[223]
문서
Mütareke Döneminde Mustafa Kemal Paşa-Kont Sforza Görüşmesi
http://www.atam.gov.[...]
[224]
웹사이트
Mustafa Kemal Paşa – Kont Sforza ve İtalya İlişkisi
http://web.archive.o[...]
[225]
뉴스
http://news.khan.c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