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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오 시게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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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에오 시게사부로는 1905년 교토부 미야즈시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이다.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대장성 관료로 근무하다가, 1949년 중의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통상산업상,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역임하며 소득 배증 계획 수립에 기여했으며, 이케다 사후에는 굉지회 파벌의 수장이 되었다. 중의원 의장과 법무대신을 거쳐 1981년 사망했으며, 정계에서 지식인적인 면모와 공정한 태도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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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오 시게사부로
기본 정보
이름마에오 시게사부로
원어 이름前尾 繁三郎
로마자 표기Maeo Shigesaburō
출생일1905년 12월 10일
출생지교토부 요사군 미야즈정 (현 미야즈시)
사망일1981년 7월 23일
사망지교토
직업관료, 정치인
1961년경의 마에오 시게사부로
1961년경의 마에오 시게사부로
학력
출신 학교도쿄제국대학
정당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과거: 민주자유당, 자유당)
파벌고치카이
관직
직함중의원 의장
임기 시작1973년 5월 29일
임기 종료1976년 12월 9일
직함법무대신
내각제3차 사토 개조 내각
임기 시작1971년 7월 5일
임기 종료1972년 7월 7일
직함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내각제1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1966년 8월 1일
임기 종료1966년 12월 3일
직함통상산업대신
내각제1차 기시 개조 내각
임기 시작1957년 7월 10일
임기 종료1958년 6월 12일
직함중의원 의원
선거구구 교토 2구
당선 횟수12회
임기 시작1949년 1월 24일 - 1979년 9월 7일, 1980년 6월 22일
임기 종료1981년 7월 23일
기타 직책
직함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총재사토 에이사쿠
임기 시작1965년
임기 종료1966년
직함자유민주당 간사장
총재이케다 하야토
임기 시작1961년 7월
임기 종료1964년 7월
직함자유민주당 세제조사회 회장
총재이케다 하야토
임기 시작1960년 12월
임기 종료1961년 8월
훈장 및 작위
작위종2위
훈장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기타중의원 영년 재직 의원

2. 생애

마에오 시게사부로는 1905년 교토부 미야즈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도자기 사업을 했고, 어머니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1]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고 학교 성적이 우수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으나, 지역 의사의 도움으로 학비를 지원받아 중학교에 진학했다.[1] 제일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했는데, 이는 사실상 도쿄제국대학 합격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1929년 도쿄제국대학 졸업 후 대장성에 들어갔다. 이케다 하야토와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1] 1949년 이케다의 영향으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요시다 시게루의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자유민주당(자민당)에 합류했다.

이케다의 "브레인 트러스트" 일원이었고, 1957년 이케다의 굉지회(고치카이) 파벌 창립 멤버가 되었다. 이케다가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대장성 장관으로 입각하자, 마에오도 국제무역산업성 장관으로 함께 입각했다.[1] 이후 자민당 경제정책연구회 회장으로서 1960년 발표된 이케다의 "소득 배증 계획" 설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0년부터 1964년까지 이케다가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자민당 사무총장을 세 번 역임하며 이케다의 정책을 적극 지원했다.

1965년 이케다가 암으로 사망하자 고치카이 파벌의 두 번째 수장이 되었다.[1] 하지만 정치 자금 모금이나 대인 관계에 능숙하지 못했다.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 4선에 성공하면서 파벌 내 젊은 의원들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지하며 마에오를 축출했다.[1]

이후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다나카 가쿠에이미키 다케오 정권 하에서 제58대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다.

1979년 총선에서 일본사회당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5] 1980년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의석을 되찾았다.[5] 그러나 1981년, 7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6]

마에오 시게사부로의 중의원 당선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거명선거구정당명득표수득표율득표순당락비고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민주자유당40,74511.06%3 / 16당선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당52,42512.85%3 / 11당선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당55,29614.24%3 / 9당선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당60,25014.82%2 / 10당선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83,11419.83%1 / 10당선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77,45818.28%1 / 10당선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12,32726.46%1 / 6당선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00,09120.79%1 / 7당선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00,68917.90%2 / 6당선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98,84515.14%4 / 6당선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19,98416.84%3 / 7당선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03,00514.98%6 / 7낙선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82,92224.13%1 / 7당선


2.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1905년 교토부 요사군 미야즈정(지금의 미야즈시)에서 가난한 도자기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마에오의 두 형은 모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도제가 되었다. 마에오도 본래 도제가 될 예정이었지만 소학교 재학 당시 마에오의 성적이 좋은 것을 눈여겨 본 담임교사가 마에오의 부모를 설득하여 교토부립 미야즈 중학교에 진학했고 졸업 후 상경해 제일고등학교에 들어갔다.[1]

고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는데 아침 식사 때 밥 7그릇, 된장국 12그릇을 모두 먹어치워서 독일어를 뜻하는 마건(Magen)이란 별명을 얻었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했으며 졸업 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했다.[1]

2. 2. 대장성 관료 시절

일본 대장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는데, 대장성 입직 시험 때 후쿠다 다케오로부터 대장성 소속 4개 국의 이름을 쓰는 문제가 나올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으나,[16] 주계국과 은행국만 쓰고 주세국과 이재국을 잊어버렸다고 한다. 입직한 다음 해인 1930년 11월 결핵늑막염으로 휴직했다. 휴직 기간이 1년을 넘겨 규정에 따라 퇴직해야 했지만 5년 동안 요양한 뒤 복직에 성공했다. 이 무렵 마에오의 4년 선배였던 이케다 하야토도 수포증으로 휴직했다가 복직했다.

복직 후엔 마에오가 와카야마 세무서장으로, 이케다가 오사카 다마쓰쿠리 세무서장으로 발령받았다. 두 사람은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비슷한 시기에 병으로 휴직했다가 복직했고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금방 의기투합했다. 둘은 "내(이케다)가 주세국장이 되고 네(마에오)가 국세과장이 돼라"라고 서로 맹세하기도 했다.

와카야마 세무서장 임기를 끝낸 마에오는 나고야 세무감사국과 오사카 세무감사국에서 근무했다. 1938년 오사카 직세부장으로 근무할 때 주위의 주선으로 기선 회사를 운영하는 자산가의 딸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양가 부모님만 참석해 간소하게 진행했으며 신혼여행도 가지 않은 채 결혼식 다음 날 평소처럼 출근했다. 1940년 7월 도쿄 세무감독국 직세부장이 되었으며 세타가야로 이사를 갔다. 이때 이케다도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후 이케다가 주세국 경리과장을 거쳐 국세과장이 되자 마에오에게 전화를 걸어 "됐다, 됐다"라고 소식을 전했다. 훗날 마에오는 "대신이나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그때만큼 기뻐하진 않았다"라고 술회했다. 1942년 9월 네덜란드령 동인도술라웨시 섬에 위치한 도시 마카사르의 사정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민정부 총감으로 부임한 사람이 야마자키 이와오인데 이 인연으로 두 사람은 친분을 맺었다.

1944년 4월 도쿄 재무국장으로 부임한 이케다가 "주세국 국세2과장이 공석이니 돌아와라"라고 마에오에게 연락해 마에오는 5월에 귀국하여 국세2과장이 되었다. 1945년 4월에는 이케다가 주세국장이 되고 마에오가 국세1과장이 되었으며 1947년 이케다가 대장차관으로 승진하자 후임 주세국장으로 마에오가 취임했다. 하지만 마에오는 예정신고납세제도나 할당과세에 반대하는 등 징세 방법을 둘러싸고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과 대립했다. GHQ는 대장상 구루스 다케오를 불러 마에오의 경질을 요구했지만 구루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며칠 뒤 마에오는 이케다의 전화를 받고 이케다의 자택을 찾았는데 이 자리에는 비서과장 모리나가 데이이치로도 함께 있었다. 모리나가는 마에오에게 "지금 당신이 조폐국장을 거치지 않고 퇴직한다면 GHQ를 자극하게 되고 향후 대장성이 GHQ와 교섭하기가 어려워진다. 3일이라도 좋으니까 조폐국장을 역임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이케다도 마에오에게 지금은 어쩔 수 없다며 나중에 우리 둘이서 정치를 하자고 제안했다. 주세국장이던 마에오에게 조폐국장 발령은 굴욕적인 좌천이었지만 마에오는 이케다와 대장성 동료들을 위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오사카 조폐국장으로 발령받았다. 인도네시아에서 근무할 때 알게 된 미야자와 기이치도 마에오의 처우에 대해 GHQ와 교섭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미야자와는 위안의 뜻을 전하고자 마에오를 찾았는데 정작 마에오는 국장실에서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고 한다.

1948년 11월 민주자유당 본부를 찾아 간사장 히로카와 고젠에게 총선 출마 의향을 밝히며 공천을 신청했다. 마에오가 국세2과장으로 근무할 때 도쿄 술판 조합장으로 있던 히로카와와 친분을 쌓은 적이 있었다. 12월 23일 중의원이 해산되자 마에오는 조폐국장을 사임하고 대장성을 퇴직했다.

2. 3. 정치 입문

민자당 공천을 받아 1949년 총선 때 교토부 제2구에 출마했다.[1] 선거 유세를 하면서 정계 정화, 매출세 폐지, 행정 정리 및 통제 해제 등을 주장했으며,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가며 재정 문제를 논하는 등 고지식한 학자적 면모를 보여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많은 불평을 샀다.[1] 주변에선 마에오를 미래의 대장상이라며 열심히 선전했지만, 마에오 본인은 사람들이랑 술도 잘 못 마시고 가슴에 꽃을 장식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여 유세에 어려움이 많았다.[1]

이런 마에오를 지지해준 것은 각지의 세무관리, 직물조합, 어업조합, 요음조합, 다업조합 등 지원단체나 지원기업이었다.[1]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빌려준 마이크는 당시로는 드물게 고성능이어서 마에오 캠프의 사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1] 성실하고 인품이 있다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했으며, 돈을 만드는 조폐국장을 역임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1] 결과적으로 마에오는 4만 5천여 표를 얻어 3위로 당선에 성공했다(당시 일본은 중선거구제로 교토부 제2구는 5명까지 당선 가능).[1]

1952년 8월 두 번째로 출마한 총선에서도 당선됐으며,[1] 선거 이후 출범한 제4차 요시다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이 된 고구레 부다유 밑에서 부회장을 맡았다.[1] 이때 계획조선에 대한 「이자보급법」 개정안을 두고 개진당 출신의 고모토 도시오와 절충하여 원안 작성을 담당했다.[1]

2. 4. 중의원 의원 시절

1949년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아 교토부 제2구에 출마했다. 선거 유세에서 정계 정화, 매출세 폐지, 행정 정리 및 통제 해제 등을 주장했다. 구체적인 숫자를 들어가며 재정 문제를 논하는 등 고지식한 학자적 면모를 보여 대중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불평을 샀다. 주변에서는 마에오를 미래의 대장상이라며 선전했지만, 마에오 본인은 사람들과 술도 잘 못 마시고 가슴에 꽃을 장식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여 유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마에오를 지지해준 것은 각지의 세무관리들이었다. 직물조합, 어업조합, 요음조합, 다업조합 등 지원단체나 지원기업이 마에오를 지지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빌려준 마이크는 당시로는 드물게 고성능이어서 마에오 캠프의 사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성실하고 인품이 있다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했으며, 돈을 만드는 조폐국장을 역임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에오는 4만 5천여 표를 얻어 3위로 당선됐다(당시 일본은 중선거구제로 교토부 제2구는 5명까지 당선 가능했다).[5]

1952년 총선에서도 당선되었으며, 선거 이후 출범한 제4차 요시다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이 된 고구레 부다유 밑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이때 계획조선에 대한 「이자보급법」 개정안을 두고 개진당 출신의 고모토 도시오와 절충하여 원안 작성을 담당했다.

중의원 지방행정위원장과 외무위원장을 거쳐 1957년 제1차 기시 내각에서 통산산업상으로 첫 입각했다. 「중소기업단체조직법」을 입안하고 섬유 불황이 닥치자 이를 구제하고자 직기 구매 조치를 취했다. 아라비아 석유의 유전 개발을 허가해주고 일본무역진흥회·중소기업신용보험공사 설립에도 나섰다. 1958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아시다 히토시를 누르고 1위로 당선됐다.[6]

1959년 7월 개각 때 이케다 하야토가 통산상으로 입각했다. 당시 이케다는 월급 2배론을 주창하고 있었는데, 이케다는 마에오를 당 경제조사회장으로 앉혀 소득배증론을 구체화하도록 했다. 안보 투쟁의 여파로 기시가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나고 1960년 7월 이케다가 총리대신이 되면서 소득 배증 계획은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된다.

이케다는 본래 야마자키 이와오간사장에 기용코자 했다. 정치 경험이 더 많았던 야마자키를 우선 간사장에 앉혔다가 후임으로 마에오를 간사장으로 지명하려는 것이 이케다의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내각, 특히 오하시 다케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이케다는 파벌 내 원로 정치인이던 마스타니 슈지를 간사장으로 임명했고 오하시는 수석 부간사장이 되었다. 오하시는 마에오의 라이벌이었기에 이는 마에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고 마에오는 비교적 한직인 당 경리국장이 되었다. 경리국장이 된 마에오는 국민협회 설립에 앞장섰고 투명한 정치 자금 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

1961년, 정치적 폭력 행위 방지 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혼란이 빚어지면서 기시파와 사토파가 내각 붕괴 움직임을 보였다. 이케다 총리는 7월 개각에서 전면적인 인사 쇄신을 단행했다. 제2차 이케다 내각 제1차 개조에서 간사장에 취임했다. 전임 마스야 히데츠구는 이케다에게 있어서는 불만스러운 인사였지만, 마에오는 심복으로서 발탁된 것이었다. 이 무렵 당뇨병을 앓고 있었고, 그 영향으로 늑막염이 악화되어 농흉 증세가 나타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거기에 오히라 마사요시와 쿠로가네 야스미가 찾아와 간사장직을 요청했다. 마에오는 처음에는 고사했지만, 마지막에는 수락했다.

마에오는 간사장으로서 온갖 힘을 다해 이케다 내각을 지지했고, 소득 배증 계획 추진과 이케다의 브레인 육성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군인 연금, 농지 보상의 성립, 파방법의 폐기 결정, 국민협회에 의한 자민당에 대한 정치 자금 일원화, 당 재무 위원회 설치에 의한 정치 자금의 투명성을 모색했다. 재임 중에 마에오는 건강을 해쳤고, 1962년 말에는 간사장 사임을 희망했지만 허락받지 못하고, 병원에서 통근하며 일하는 일도 있었다. 1963년 중의원 해산 당시, 이케다가 깜짝 해산을 계획한 것에 대해서는 야당의 대표 질문이 모두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해산하는 것은 의회 정치의 도리가 아니라고 만류한 것은 마에오의 원칙을 고수하는 강직함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간사장은 보통 길어야 1년 남짓의 임기였고, 마에오를 여러 번 재임시킨 이케다는 "이대로라면 마에오는 1964년 7월, 이케다의 자유민주당 총재 3선을 계기로, 후임에 미키 다케오를 추천하여 간사장직에서 물러났다. 3년의 재임 기간은 2019년 니카이 도시히로가 경신할 때까지 최장 기록이었다.

1964년 9월 초, 부간사장 오히라 마사요시가 마에오 자택을 방문하여 "이케다 총리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 암인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케다 하야토는 7월 총재 선거 전후부터 목의 통증을 호소했고, 도쿄대학 병원에서의 진찰에서 후두암임이 밝혀졌다. 현직 총리가 암임을 공표하면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마에오는 오히라와 협의하여, 9월 7일 IMF 총회 이케다 총리 연설 후에 츠키지의 암센터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이케다 본인에게는 "암이 아니지만, 최신 치료 설비가 거기에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마에오는 의료진에게 "암임을 절대로 비밀로 해주고 거짓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같은 달 25일, 의료진은 이케다의 병세에 대해 "전암 증상이다"라고 발표했다.

이케다 총리와 일심동체였던 마에오는 은밀히 이케다 내각의 막을 내리는 준비에 들어가, 사퇴 시기를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 날로 정했다. 마에오는 은밀히 미키 다케오 간사장, 오히라와 만나 이러한 생각을 전했다. 미키 간사장은 동의할까 걱정했지만, 마에오는 "그것은 제가 책임지겠으니, 당내 절차를 은밀히 진행해 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이케다 사퇴 움직임은 올림픽 개막 중에는 완전히 비밀이 지켜졌다. 10월 25일, 이케다 총리는 병상에 고노 이치로 부총리, 카와시마 마사지로 부총재, 미키 간사장, 스즈키 젠코 관방장관을 초청하여 사퇴 의사를 전달했고, 스즈키 관방장관과 미키 간사장에 의해 즉시 발표되었다. 깔끔한 마무리였고, 여론도 이를 칭찬했다.

이케다의 뒤를 이을 총재 후보로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고노, 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郎) 3인이 나섰다. 상황은 사토에게 유리했다. 열세에 놓인 고노와 후지야마는 "누가 지명되더라도 서로 협력한다"는 연합 맹약을 맺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마에오는 은밀히 후지야마 단일화 작업을 진행했다. 마에오는 고노와 친분이 있는 후나타 나카 衆議院 의장을 만나 "상황을 고노에게 전달하고, 출마를 단념하도록 고노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후나타는 고노를 만나 마에오의 이야기를 전하고, 후보에서 물러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고노는 결국 거부했고, 후지야마 단일화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 6월 사토 내각의 첫 개조에서 이케다의 추천으로 자민당 총무회장에 취임했다. 7월 이케다의 암이 광범위하게 전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입원 당일 아침, 이케다가 사저에 마에오, 오히라, 스즈키 3인을 불러 후사를 부탁했다. "마에오 군을 중심으로, 오히라, 스즈키 두 사람은 마에오 군을 도와주게. 마에오, 타나카의 시대가 올 것이다. 마에오 군은 PR을 하지 않는 게 좋은 점이지만, 더 해야 한다." 이것이 유언이 되었고, 1965년 8월 이케다가 사망함에 따라 마에오는 코이케카이(宏池会)를 계승하여 회장이 되었다.

마에오는 파벌을 정책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정치 자금을 무심코 요구하러 온 진가사 의원(陣笠議員)에게 "돈이 솟아나는 책"이라며 귀중한 장서를 건네주었는데, 진가사 의원은 그 책에 다발로 돈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넘겨 보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마에오는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면 인격도 갈고 닦이고 자연스럽게 정치 자금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 진가사 의원에게 "어떠냐, 돈이 솟아날 것 같지 않느냐?"고 물어 그 의원의 인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에오의 생각에, 같은 코이케카이에 소속되어 이케다 내각을 지탱해 온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는 파벌을 어디까지나 정권 획득을 제일 의무로 생각하여 인식이 달랐다. 또한 고사카 젠타로(小坂善太郎)나 니와 교시로(丹羽喬四郎) 등의 고참 의원과 사이토 쿠니키치(斎藤邦吉)·사사키 요시타케(佐々木義武)·이토 마사요시(伊東正義) 등 중견·젊은 의원들의 파내 대립도 발생했다. 코이케카이의 간부가 마에오 직계 의원으로 굳어진 것도 있어, 오히라가 독자적으로 젊은 세대에 대한 정치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오히라와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이것이 196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현저하게 나타났다. 마에오는 "자금은 오히라, 표는 스즈키 젠코(鈴木善幸)"라고 역할 분담을 정하고, 태연하게 있었다. 그러나 사토 에이사쿠의 3선 저지에 출마한 마에오는 95표를 획득했지만, 107표를 획득한 미키 다케오(三木武夫)를 하회하는 3위로 참패했다.[5] 마에오는 원래 이 총재 선거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파벌의 구심력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출마했지만, 엄청난 참패에 충격을 받은 마에오는, 이대로는 오히라에게 코이케카이를 넘겨줄 수 없다, 다음 총재 선거는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6]

그러나 1970년 총재 선거에서는, 사토 에이사쿠가 마에오에게 "4선 후에 내각 개조를 할 때는 마에오 파를 우대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마에오는 출마를 보류했다. 그리고 4선을 달성한 사토는 약속을 어기고 내각 개조를 보류했고, 마에오는 망신을 당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다나카 로쿠스케(田中六助), 다자와 기치로(田沢吉郎), 시오자키 준(塩崎潤) 등 오히라 계 젊은 의원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여 파벌 분열도 불사할 태세를 보였기 때문에, 1971년 4월 마에오는 회장직을 오히라에게 양보했다(오히라측근의 다나카 로쿠스케는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이케다 파에 소속할 생각이었다. 다시는 코이케카이의 회합에는 참석하지 않겠다"고 마에오를 비판했다). 사토는 마에오가 코이케카이 회장을 사임한 3개월 후에 내각 개조를 단행하여 마에오를 법무대신에 임명했다.

선거명선거구정당명득표수득표율득표순당락비고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민주자유당40,74511.06%3 / 16당선
제2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당52,42512.85%3 / 11당선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당55,29614.24%3 / 9당선
제2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당60,25014.82%2 / 10당선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83,11419.83%1 / 10당선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77,45818.28%1 / 10당선
제3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12,32726.46%1 / 6당선
제3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00,09120.79%1 / 7당선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00,68917.90%2 / 6당선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98,84515.14%4 / 6당선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19,98416.84%3 / 7당선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03,00514.98%6 / 7낙선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구 교토 제2구자유민주당182,92224.13%1 / 7당선


2. 5. 자유민주당 간사장 시절

1961년, 마에오는 이케다 내각을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에 맞서 개각을 통해 간사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마에오는 당뇨병늑막염으로 인한 농흉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케다는 자신의 복심인 마에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 오히라 마사요시와 구로가네 야스미를 보내 설득했고, 마에오는 결국 이를 수락했다.

간사장이 된 마에오는 이케다를 적극 지지하며 소득 배증 계획 추진과 이케다의 브레인 육성에 기여했다. 군인 연금 및 농지 보상 성립, 파괴활동방지법 폐안 결정, 국민협회를 통한 자민당 정치 헌금 일원화, 당 재무위원회 설치 및 정치 자금 투명성 모색 등이 마에오가 간사장 재임 시절 추진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력적인 활동은 건강 악화를 불러왔고, 1962년 말 마에오는 간사장 사임을 희망했다. 이케다는 이를 만류하며 병원 요양 중 업무를 보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이케다는 마에오가 미키 부키치처럼 배후에서만 활약하는 정치인이 될 것을 우려하여, 1964년 7월 총재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후 미키 다케오를 간사장으로 임명하여 마에오를 퇴진시켰다. 마에오의 3년 간사장직 재임 기록은 2019년 니카이 도시히로에 의해 경신되기 전까지 최장 기록이었다.

1964년 9월, 부간사장이던 오히라는 마에오에게 이케다 총리의 병세가 심각하며 암인 것 같다고 보고했다. 이케다는 후두암 진단을 받았고, 마에오는 오히라와 협의하여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이케다를 암센터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마에오는 의료진에게도 암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고, 의료진은 이케다의 병증이 전암 상태라고 발표했다.

마에오는 극비리에 이케다의 퇴진을 준비하여 1964년 하계 올림픽 폐막식 다음날로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미키, 오히라와 비밀리에 만나 이 계획을 알렸다. 올림픽 기간 동안 이케다의 퇴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25일 이케다는 병상에서 고노 이치로, 가와시마 쇼지로, 미키, 스즈키 젠코를 불러 퇴진 의사를 밝혔다. 여론은 이케다의 깨끗한 퇴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19]

2. 6. 이케다 하야토의 죽음과 굉지회 계승

이케다 하야토의 후임 총재로는 사토 에이사쿠, 고노,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등 세 명의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사토가 유력하다는 평이 많았다. 열세에 놓여 있던 고노와 후지야마는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해 동맹을 결성했다. 마에오는 후지야마를 지지하고자 고노가 후지야마와 후보 단일화에 나서주길 원했다. 그래서 고노와 친분이 있던 중의원 의장 후나다 나카와 만나 설득을 부탁했다. 하지만 고노는 후나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했고, 후보 단일화는 결국 실패했다. 이후 진행된 총재 선거에서 사토가 무난히 당선됐다.

사토는 취임 후에 처음 단행한 개각을 통해 마에오를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으로 지명했는데, 이는 이케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다음 달인 1965년 7월, 암이 광범위하게 전이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이케다는 마에오·오히라·스즈키를 불렀다. 이케다는 "마에오 군을 중심으로 해서 오히라 군과 스즈키 군이 도와줬으면 좋겠다. 마에오, 다나카의 시대가 올 거다. 마에오 군은 자기 홍보를 하지 않는 게 장점이지만 하는 게 더 좋겠다"라며 후계자를 정했다. 한 달 뒤 이케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이 말은 사실상 유언이 되었고, 마에오는 이케다의 유언에 따라 굉지회의 회장이 되었다.

마에오는 파벌을 정책집단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 한 의원이 자신을 찾아오자 "돈이 솟아나는 책"이라며 귀중한 장서를 건넸다. 그 의원은 당연히 책 사이에 돈 다발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펼쳐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마에오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면 인격을 연마하여 자연스럽게 정치 자금이 모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그 의원은 마에오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같은 파벌이던 오히라는 파벌의 첫 번째 역할은 정권 획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고사카 젠타로·니와 교시로 등 원로 정치인과 사이토 구니키치·사사키 요시타케·이토 마사요시 등 중견·소장파 의원들 사이에 내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마에오는 회장이 되면서 파벌 간부를 자신의 직계 의원들로 채우기도 했다. 마에오와 오히라의 갈등은 1968년 총재 선거 때 폭발했다. 사토의 3선 저지를 위해 마에오는 "자금은 오히라, 표는 스즈키"라는 역할 분담을 결정했는데, 마에오는 95표를 얻어 107표를 얻은 미키보다도 순위가 낮았다.[17] 사실 마에오는 총재 선거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파벌의 구심력을 유지하기 위해 출마했었다. 이를 감안해도 3위에 그친 것은 마에오에게 큰 충격이었고, 마에오는 차기 총재 선거에는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18]

그런데 1970년 총재 선거 때 사토가 4선에 도전하면서 "내가 당선되면 개각할 때 마에오파를 우대하겠다"라고 약속하자 마에오는 총재 선거를 포기했다. 하지만 사토는 4선 이후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히라의 측근들인 다나카 로쿠스케·다자와 기치로·시오자키 준 등 소장파 의원들이 맹반발했다. 이들은 파벌의 분열도 불사하겠단 태도로 마에오를 공격했고, 결국 마에오는 1971년 4월 파벌 회장직을 오히라에게 양도했다. 3개월 뒤 사토는 마에오를 법무대신으로 임명했다.

2. 7. 파벌 갈등과 회장직 사임

이케다 하야토의 후임 총재 후보로 사토 에이사쿠, 고노 이치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등이 거론되었는데, 사토가 유력하다는 평이 많았다. 열세에 놓인 고노와 후지야마는 협력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 마에오는 후지야마를 지지하고자 고노에게 후보 단일화를 원했다. 그래서 고노와 친분이 있던 중의원 의장 후나다 나카에게 설득을 부탁했지만, 고노는 이를 거절했고 단일화는 실패했다. 이후 총재 선거에서 사토가 당선됐다.

사토는 첫 개각 때 마에오를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으로 지명했는데, 이는 이케다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1965년 7월 암이 전이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케다는 마에오, 오히라 마사요시, 스즈키 젠코를 불러 "마에오 군을 중심으로 오히라 군과 스즈키 군이 도와줬으면 좋겠다. 마에오, 다나카의 시대가 올 거다. 마에오 군은 자기 홍보를 하지 않는 게 장점이지만, 하는 게 더 좋겠다"라며 후계자를 정했다. 한 달 뒤 이케다가 사망하여 이 말은 사실상 유언이 되었고, 마에오는 굉지회 회장이 되었다.

마에오는 파벌을 정책집단 정도로 생각했다. 한 의원이 자신을 찾아오자 "돈이 솟아나는 책"이라며 장서를 건넸는데, 의원은 돈 다발을 기대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마에오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면 인격 연마로 정치 자금이 모일 것이라 말했고, 이후 그 의원은 마에오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오히라는 파벌의 첫 번째 역할은 정권 획득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고사카 젠타로 등 원로 정치인과 사이토 구니키치 등 중견·소장파 의원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다. 마에오는 회장이 되면서 파벌 간부를 자신의 직계 의원들로 채웠다. 마에오와 오히라의 갈등은 1968년 총재 선거 때 폭발했다. 사토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해 마에오는 "자금은 오히라, 표는 스즈키"라는 역할 분담을 결정했는데, 마에오는 95표를 얻어 107표를 얻은 미키 다케오보다 낮은 순위를 기록했다.[17] 마에오는 총재 선거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파벌의 구심력을 위해 출마했는데 3위에 그친 것은 큰 충격이었고, 차기 총재 선거에는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18]

1970년 총재 선거 때 사토가 4선에 도전하며 "내가 당선되면 마에오파를 우대하겠다"라고 약속하자 마에오는 총재 선거를 포기했다. 하지만 사토는 4선 이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히라의 측근들인 다나카 로쿠스케 등이 맹반발하며 파벌 분열도 불사하겠단 태도로 마에오를 공격했고, 결국 마에오는 1971년 4월 파벌 회장직을 오히라에게 양도했다. 3개월 뒤 사토는 마에오를 법무대신으로 임명했다.

2. 8. 중의원 의장 및 말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다나카 가쿠에이미키 다케오 정권 하에서 제58대 중의원 의장을 역임했다.[4]

1979년 총선에서 단 174표 차이로 일본사회당 후보에게 패해 낙선했지만,[5] 1980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의석을 되찾았다.[5] 1981년 7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6]

3. 정책 및 정치 활동

1961년 「정치적 폭력행위 방지법」안을 둘러싸고 기시파·사토파가 이케다 내각을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이케다는 개각을 통해 분위기 쇄신을 꾀했고 마에오가 간사장이 되었다. 당시 마에오는 당뇨병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늑막염이 악화해 농흉 증상이 나타나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케다는 자신의 복심인 마에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 오히라 마사요시와 구로가네 야스미를 보내 자신의 의사를 타진했다. 마에오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계속된 요청을 이기지 못하고 승낙했다.

간사장이 된 마에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케다를 지지했고 소득 배증 계획 추진과 이케다의 브레인 육성에 큰 힘을 보탰다. 군인 연금·농지 보상 성립, 「파괴활동방지법」 폐안 결정은 마에오가 간사장일 때 추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력적인 활동은 건강에 악영향을 미쳤고, 1962년 말 마에오는 간사장 사임을 희망했다. 이케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병원에서 요양하며 업무를 보도록 했다. 당시 간사장 임기는 보통 1년이었는데, 이케다는 3년이나 간사장을 맡기면 마에오가 미키 부키치처럼 배후에서만 활약하는 스타일의 정치인이 될 것을 우려했다. 1964년 7월, 이케다는 총재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뒤 미키 다케오를 간사장으로 임명하여 마에오를 퇴진시켰다. 마에오가 간사장직을 3년간 지킨 기록은 2019년 니카이 도시히로가 경신할 때까지 오랫동안 최장 기록이었다.

1964년 9월 초, 부간사장이던 오히라가 마에오의 저택을 방문하여 "이케다 총리의 병세가 심각하다. 암인 듯하다"라고 보고했다. 3선에 성공한 이케다는 병증을 느껴 도쿄 대학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후두암이었다. 총리대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 소동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마에오는 오히라와 협의하여 9월 7일 국제 통화 기금 총회에서 이케다가 연설한 다음에 암센터에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케다에게는 "암은 아니지만 최신 치료 설비가 거기에만 있다"라고 둘러댔고, 의료진들에게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반드시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25일, 의료진은 이케다의 병증이 전암 상태라고 발표했다.

마에오는 극비리에 이케다의 퇴진을 준비하여 1964년 하계 올림픽 폐막식 다음 날로 날짜를 정했다. 비밀리에 미키·오히라와 만나 이 생각을 전했는데, 미키는 이케다가 받아들일지 우려했지만 마에오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내에서 진행해야 할 절차를 비밀리에 추진해달라"고 부탁했다. 올림픽 기간 동안 이케다의 퇴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25일, 이케다는 병상에서 국무상 고노 이치로, 부총재 가와시마 쇼지로, 미키, 관방장관 스즈키 젠코를 불러 퇴진 의사를 밝혔다. 스즈키와 미키는 이를 즉시 발표했고, 여론은 깨끗하게 물러났다는 반응을 보였다.

3. 1. 경제 정책

마에오 시게사부로는 제1차 기시 내각에서 통상산업상으로 처음 입각하여 「중소기업단체조직법」을 입안하고 섬유 불황에 대응하여 직기 구매 조치를 취했다. 아라비아 석유의 유전 개발을 허가하고 일본무역진흥회·중소기업신용보험공사 설립에도 힘썼다.[5]

1959년 7월 개각 때 이케다 하야토가 통산상으로 입각하면서 마에오는 당 경제조사회장에 임명되어 이케다의 소득 배증론을 구체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1960년 7월 안보 투쟁의 여파로 기시 노부스케가 물러나고 이케다가 총리대신이 되면서 소득 배증 계획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5]

3. 2. 조세 정책

일본 대장성 관료 시절, 마에오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와 조세 방법을 둘러싸고 대립했다.[16] 특히 예정신고납세제도와 할당과세에 강하게 반대했다.[16] GHQ는 구루스 다케오 대장상에게 마에오의 경질을 요구했지만, 구루스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16]

이후 마에오는 이케다 하야토와 모리나가 데이이치로의 설득으로 오사카 조폐국장으로 좌천되었지만, 이는 GHQ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대장성의 이익을 지키려는 동료들을 위한 결정이었다.[16]

3. 3. 정치 자금 투명화

마에오는 1960년 자유민주당 경리국장이 되어 국민협회 설립에 앞장섰고, 투명한 정치 자금 제도를 확립하고자 했다.[5] 1961년 간사장이 된 후에는 국민협회를 통해 자민당 정치 헌금을 일원화하고, 당 재무위원회를 설치하여 정치 자금의 투명성을 모색했다.[5]

마에오는 파벌을 정책 집단으로 인식했다. 정치 자금을 요구하러 온 의원에게 "돈이 솟아나는 책"이라며 귀중한 장서를 건네준 일화가 있는데, 이는 마에오가 책의 내용을 이해하면 인격도 갈고 닦여 자연스럽게 정치 자금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의원은 돈이 들어있지 않은 책을 보고 마에오에게 실망했다고 한다.

4. 평가

니나가와 도라조는 1950년부터 1978년까지 7선 교토부지사를 지냈다. 마에오가 총선 책임자인 간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1962년, 니나가와의 독주를 막기 위해 공천에 관여했지만 그 사람은 낙선했다. 이후 1966년과 1970년에도 공천을 받았지만 3연패했다. 이 사건은 마에오가 총재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었다.[21]

1993년 이전에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였기에 하나의 선거구에 같은 정당 후보자들이 복수로 출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벌이 겹치지 않도록 공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교토부 제2구는 굉지회에서만 마에오·다니가키 센이치 두 명이 공천을 받고 당선도 되었다.

정계에서 독서가·교양인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소학생 시절 『태평기』를 독파했으며, 서재에는 일본뿐 아니라 중국·미국·유럽의 책 등 4만여 권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국회 내의 서점에서 400만 권이 넘는 서적을 구매하여 점주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22] 마에오 사후 유족들이 미야즈시에 책과 건설 자금을 기증하여[23][24] 1983년 7월 미야즈시립 마에오 기념문고가 개관했다.[25]

대부분의 자유민주당 정치인들과 달리, 마에오 시게사부로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실력자라기보다는 지식인에 가까웠다. 그는 3만 9천 권의 개인 서재를 소장했고, 취미는 어원 연구였다.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기에, 동료들은 그의 생각을 알아내기 어려워 "어둠 속의 황소"(暗闇の牛|쿠라야미 노 우시일본어)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항상 주의 깊게 듣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에오는 대중 유세나 정치적 책략보다는 배후에서 정책에 매달리는 것을 선호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연공서열 때문에 받을 자격이 있었던 내각직을 여러 차례 거절하며 젊은 정치인들의 경력 향상을 도왔다. 또한 어려운 정치적 문제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헌신성과 공정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마에오의 공정한 플레이 정신, 개인적 야망의 부재, 그리고 치열한 정치적 다툼에 대한 무관심은 그를 서투른 파벌 지도자로 만들어 고치카이 파벌 수장직에서 축출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친구와 적 모두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게 했다. 1970년대, 마에오는 시이나 에쓰사부로와 나다오 히로키치와 함께 자유민주당의 "삼현인"(三賢人|산 켄진일본어)으로 알려지며 배후에서 자유민주당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5. 개인적인 면모

정계에서 손꼽히는 독서가이자 교양인으로 알려졌다. 초등학생 시절에 『태평기』를 완독했으며, 장서는 일본어와 한문, 유럽과 미국 서적 등 약 4만 권에 달한다고 한다. 국회 내 서점에서 매달 400만에서 500만에 달하는 서적을 구입하여 서점 주인에게 "그런 사람은 다시 없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10] 1981년 사망 후 유족이 고향인 미야즈시에 장서와 많은 건설 자금을 기증하였고,[11][12] 사망 후 2년째 되는 해인 1983년 7월 23일에는 미야즈시립 마에오 기념 문고가 개관하였다.[13]

제2차 세계 대전 후 최초의 천일회봉행 대행만 대아사리인 에이난 소켄 대승정이 재계 지원자 모임인 "법등호지회"를 설립하여 연력사의 부흥 자금 지원을 위해 분주히 활동했을 때, 법화경의 "안락행품"의 사상에 따라 정치인에게는 접근하지 않았으나, 예외적으로 학구적인 마에오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마에오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 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14][15]

예능에도 능숙하여, 소가요는 가스가류 명취로 "가스가와 한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입원 중에 문병 온 미야자와 기이치와 병상에서 연습을 하거나, 다나카 가쿠에이와 함께 동횡홀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삼선, 하모니카, 바이올린도 연주할 수 있었다.

자민당 정치인들과 달리, 마에오 시게사부로는 정치적 실력자라기보다는 지식인에 가까웠다. 그는 3만 9천 권의 개인 서재를 소장했고, 그의 취미는 어원 연구였다. 그는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기에, 동료들은 그의 생각을 알아내기 어려워 "어둠 속의 황소"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항상 주의 깊게 듣고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에오는 대중 유세나 정치적 책략에 참여하기보다는 배후에서 정책에 매달리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권력에 대한 탐욕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연공서열 때문에 받을 자격이 있었던 내각직을 여러 차례 거절하며 젊은 정치인들의 경력 향상을 도왔다. 또한 그는 어려운 정치적 문제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헌신성과 공정성으로 명성을 얻었다. 마에오의 공정한 플레이 정신, 개인적 야망의 부재, 그리고 치열한 정치적 다툼에 대한 무관심은 그를 서투른 파벌 지도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친구와 적 모두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게 했다. 1970년대, 마에오는 시이나 에쓰사부로와 나다오 히로키치와 함께 자유민주당의 "삼현인"으로 알려지며 배후에서 자유민주당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05년 교토부 요사군 미야즈정(현 · 미야즈시)에서 가난한 도자기 상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마에오의 두 형은 모두 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나갔다. 후에 형은 힘든 과정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다. 마에오는 초등학교 성적이 우수했고, 담임이었던 니시가키 엔지라는 교사가 마에오의 부모를 설득하여 "학비가 부족하면 내가 지원하겠다"고 말했기에 진학할 수 있었다. 후에 그는 "오사카로 견습공으로 보내질 운명이었는데, 니시가키 선생님 덕분에 미야즈 중학교에 진학하여 제일고등학교·도쿄제국대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미야즈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제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제일고등학교에서는 기숙사에서 아침 식사 때 밥 7그릇, 된장국 12그릇을 먹어치워, 독일어로 위를 의미하는 "마아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제일고등학교 시절 동기에는 작가 다카미 준이 있다. 제일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사법과에 합격했다.

동대 졸업 후 대장성에 입성한다. 대장성 시험 당시 구두 시험 대기실에서 후쿠다 다케오가 대장성의 네 개 국(주계, 주세, 리재, 은행)의 이름을 알려주었지만,[1], 마에오는 정작 주계국과 은행국 두 곳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입성 후 다음 해인 1930년 11월 결핵늑막염에 걸려 휴직했다. 1년간의 휴직 기간이 지나면서 퇴직을 강요받았지만, 5년간 요양 생활 후 대장성에 복직한다. 같은 무렵, 4기 선배이자 후일 내각총리대신이 된 이케다 하야토도 낙엽성 천포창이라는 큰 병으로 휴직, 퇴직했다가 복직한 바 있다. 마에오는 이케다를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사이였다.[2]

복직 후 마에오는 와카야마시 세무서장에, 이케다는 오사카시 타마즈쿠리 세무서장으로 부임했다. 마에오와 이케다는 성격이 정반대였지만, 서로 큰 병으로 쓰러져 출발이 늦었고 둘 다 술을 매우 좋아해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나는 주세국장이 될 거야. 너는 국세과장이 되고." "좋아, 네가 주세국장이 되고 나는 국세과장을 할게." 라고 서로 맹세할 정도였다. 와카야마 세무서장 이후 나고야시 세무감사국, 오사카부 세무감사국으로 이동했다. 1938년, 오사카 직세부장 시절 주변의 권유로 시마자키 기선이라는 회사를 경영하는 니시노미야의 부유한 집안 딸인 시마자키 시즈코와 중매 결혼했다. 고시엔 호텔에서 양가 가족만 참석한 간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가지 않았고, 식 다음 날에도 평소처럼 출근했다. 당시 이미 34세였다. 1940년 7월, 도쿄 세무감독국 직세부장이 되어 세타가야의 마쓰바라 3정목의 임대주택에 살았다. 이케다도 약 1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사 왔다. 이케다는 당시 주세국 경리과장이었지만, 국세과장이 되자 마에오에게 "됐다, 됐다"라고 전화해왔다. "그가 후에 장관이나 총리가 되었을 때도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라고 마에오는 회상했다. 1942년 9월, 인도네시아 셀레베스 섬 마카사르에 사정관으로 부임했다. 민정부 총감에는 내무성의 야마자키 이와오가 부임했다. 여기서 두 사람은 친밀해졌다. 1944년 4월, 도쿄 재무국장 이케다로부터 "주세국의 국세 제2과장 자리가 비었으니 빨리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5월에 귀국하여 국세 제2과장에 취임했다. 1945년 4월, 이케다가 주세국장이 되고, 마에오는 국세 제1과장이 되었다. 1947년 이케다가 대장 차관이 되자 후임 주세국장에 취임한다. 그러나 GHQ와 조세 방법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특히 예정 신고 납세 제도와 할당 과세에 마에오는 강하게 저항했다. GHQ에 저항하면 해임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에오는 "나 혼자 정도는 희생되어 진주군에 반성을 촉구하는 것도 좋다"라고 각오했다. 1947년 12월, 가타야마 내각의 구리스 다케오 재무대신은 GHQ에 소환되어 주세국장 해임을 요구받았다. 이 이야기를 즉시 거절하고 이케다에게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꼭 그만두고 싶다"고 잘라 말했다. 마에오는 2, 3일 후 이케다의 집으로 불려갔다. 모리나가 데이이치로 비서과장도 동석했고, 모리나는 "당신이 지금 조폐국장이 되지 않고 퇴관하면 총사령부에 면박을 당하고, 앞으로 대장성이 총사령부와 협상하는 데 엄청난 장애가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음을 바꿔 3일이라도 좋으니 조폐국장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설득했다. 이케다도 "마에오, 어쩔 수 없다. 가라. 언젠가 우리 둘이서 (정치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에오에게는 굴욕적인 강등이었지만, 이케다와 동료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기에 마지못해 승낙하고 오사카 조폐국장으로 강등된다. 인도네시아 파견 중에 알게 된 미야자와 기이치는 GHQ와 마에오의 처우를 둘러싸고 협상하지만 상황은 변하지 않았고, 마에오에게 사과했지만 마에오는 개의치 않고 국장실에서 좋아하는 독서 삼매경의 생활을 보낸다. 1948년 5월, 다케나카 공무점, 우메바야시 그룹 및 시미즈 그룹에 대한 융자 문제로 중의원 부당 재산 거래 조사 특별위원회에 증인 소환되었다.[3]

같은 해 11월, 민주자유당 본부를 방문하여 히로카와 고젠 간사장에게 출마 의사를 전하고 공인을 신청했다. 마에오가 전시 중 국세 제2과장을 하고 있을 때 히로카와는 도쿄 주류 판매 조합장을 하고 있었고, 그때는 "히로카와 군"이라고 부르던 사이였다. 12월 23일 중의원이 해산되자 조폐국장을 사임하고 대장성을 퇴관했다.

1949년 제2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교토 2구에서 요시다 시게루의 민주자유당 공인으로 출마했다. 당시 43세였던 마에오 시게사부로는 연설에서 주로 "정계 정화", "거래고세 폐지", "행정 정리 및 통제 해제"를 주장하거나 재정 수치를 나열하는 등, 진지하고 학자적인 태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해 평판이 좋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미래의 대장성 대신"이라고 홍보했지만, 본인은 밤 회합에서 술을 따르는 것도 싫어하고, 가슴에 꽃을 다는 것조차 부끄러워할 정도였다. 술을 마셔도 연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선거구에는 전 총리이자 민주당의 연설 명수인 아시다 히토시가 있었다. 형사 기소를 받은 아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눈물로 호소하는 한 표를"이라며 각지에서 열정적인 연설을 펼쳤다. 선거를 뒷받침한 것은 각지 세무 공무원들의 숨은 지원이었다. 다나고의 직물 조합, 어업 조합 외에 우쿄구의 요료 조합, 우지의 차업 조합 등 지원 단체와 기업이 점차 확대되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빌려준 당시로서는 드문 고성능 마이크도 마에오 진영의 사기를 높였고, 성실한 인품과 운동원들의 자발적인 선거 운동, 그리고 대장성 최고 직책인 조폐국장 출신이라는 점 등으로 개표 결과 마에오는 4만 5천 표 이상을 획득하여 정원 5명 중 3위로 당선되어 중의원에 입성했다.[4] 이후 12선을 기록했다. 마에오는 세련되지 못한 외모 때문에 "어둠 속의 소"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 유래 중 하나는 선거 운동 중에 선전용 트럭에 화로를 가져다놓고 따뜻한 정종을 마시면서 선거 운동을 하다가 어두운 밤길에 소가 나타나자 취한 마에오가 소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6. 유산

마에오 시게사부로는 대부분의 자유민주당 정치인들과 달리 정치적 실력자라기보다는 지식인에 가까웠다. 3만 9천 권의 개인 서재를 소장했고, 취미는 어원 연구였다. 매우 과묵한 사람이었기에, 동료들은 그의 생각을 알아내기 어려워 "어둠 속의 황소"(暗闇の牛|쿠라야미 노 우시일본어)라는 별명을 붙였다. 하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항상 주의 깊게 듣고 결단력 있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

마에오는 대중 유세나 정치적 책략보다는 배후에서 정책에 매달리는 것을 선호했다. 권력에 대한 탐욕을 보이지 않았고, 연공서열 때문에 받을 자격이 있었던 내각직을 여러 차례 거절하며 젊은 정치인들의 경력 향상을 도왔다.[2] 어려운 정치적 문제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헌신성과 공정성으로 명성을 얻었다.[2] 마에오의 공정한 플레이 정신, 개인적 야망의 부재, 그리고 치열한 정치적 다툼에 대한 무관심은 그를 서투른 파벌 지도자로 만들어 고치카이 파벌 수장직에서 축출되었지만, 동시에 친구와 적 모두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게 했다. 1970년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나다오 히로키치와 함께 자유민주당의 "삼현인"(三賢人|산 켄진일본어)으로 알려지며 배후에서 자유민주당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참조

[1] 웹사이트 天下の猛妻 -秘録・総理夫人伝- 福田赳夫・三枝夫人(下) https://www.excite.c[...] 2020-03-12
[2] 뉴스 造幣局長に左遷、政界出馬を決 https://www.nikkei.c[...]
[3] 간행물 第2回国会 衆議院 不当財産取引調査特別委員会 第21号 https://kokkai.ndl.g[...] 1948-05-08
[4] 문서 당선 동기
[5] 웹사이트 森山欽司 ─反骨のヒューマニスト─ 第十三章 http://www.mayumi.gr[...] 2013-08-17
[6] 서적 自民党戦国史 上 朝日文庫 1985
[7] 웹사이트 衆院議長に就任、ロッキード国会を収拾 https://www.nikkei.c[...] 2020-02-20
[8] 서적 賢人たちの世 文藝春秋・文春文庫 1994
[9] 서적 自民党戦国史 中 朝日文庫 1985
[10] 뉴스 読売新聞 2014-07-06
[11] 웹사이트 宮津市立前尾記念文庫 http://www.miyazu.gr[...]
[12] 간행물 前尾記念文庫所蔵の近代政治家書簡群について http://archives.bukk[...] 仏教大学総合研究所 2002
[13] 서적 前尾繁三郎先生のこころ 1984
[14] 웹사이트 高僧が高僧を語る オーラルヒストリーから見えてくる人生訓 https://www.yomiuri.[...] 2023-04-10
[15] 서적 戦後初の北嶺千日回峰行者 叡南祖賢大阿闍梨 叡南覺範・村上光田・藤光賢・堀澤祖門が語る比叡山の傑僧 善本社 2023
[16] 웹사이트 天下の猛妻 -秘録・総理夫人伝- 福田赳夫・三枝夫人(下) https://www.excite.c[...] 2024-02-18
[17] 웹사이트 森山欽司 ─反骨のヒューマニスト─ 第十三章 http://www.mayumi.gr[...] 2024-02-18
[18] 서적 自民党戦国史 上 朝日文庫 1985
[19] 웹사이트 衆院議長に就任、ロッキード国会を収拾 https://www.nikkei.c[...] 2024-02-18
[20] 서적 賢人たちの世 文藝春秋・文春文庫 1994
[21] 서적 自民党戦国史 中 朝日文庫 1985
[22] 뉴스 読売新聞 2014-07-06
[23] 웹사이트 宮津市立前尾記念文庫 http://www.miyazu.gr[...]
[24] 간행물 前尾記念文庫所蔵の近代政治家書簡群について http://archives.bukk[...] 仏教大学総合研究所 2002
[25] 서적 前尾繁三郎先生のこころ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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